2012년 7월 14일 토요일

한미FTA, 시민검증단이 나섰다


이글은 시사인 2012-07-13일자 기사 '한미FTA, 시민검증단이 나섰다'를 퍼왔습니다.
정부가 한·미 FTA 번역 오류 내역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아예 ‘3년간 비공개’라고 못을 박았다. [시사IN]은 시민 검증단을 모집해 한글 번역본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따져보기로 했다.

1997년 12월3일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청서에 사인하는 임창렬 경제부총리를 지켜보며 대한민국 국민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곧 망할지도 모른다’는 대한민국에 긴급 자금을 빌려주는 구세주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사인을 받으러 온 미셸 캉드쉬 IMF 총재는 국빈 대접을 받았다. 

그로부터 4년 뒤 IMF로부터 빌린 돈은 다 갚았지만, 이후 대한민국은 ‘IMF 체제’의 후유증을 혹독하게 겪고 있다. 그 사이 알짜배기 기업들이 외국인 손에 헐값에 넘어갔고, ‘빅딜’을 통해 기업 간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됐으며, 정리해고 광풍이 몰아치면서 실업자가 급증하고 중산층이 몰락했다. 대한민국에 양극화가 이렇게 심해진 데는 ‘IMF 체제’가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다는 데 이견이 없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현재 여권이 추진 중인 한·미 FTA는 IMF 구제금융 때보다 훨씬 더 폭넓게, 더 오래 우리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한·미 FTA를 비준한다 해도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내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 잘 알고 통과시켜야 한다. 

그런데 이번 한·미 FTA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지나치게 정보 공개를 꺼리고 있다. 당장 비준안을 통과시켜야 할 국회의원 299명 가운데 외통위원 등 관련 상임위원 등을 뺀 대다수가 한글 번역본을 받지 못했다. 민주당 박주선 의원실의 한 보좌관은 “‘전체 의원에게 번역본을 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외통부에 얘기를 했더니 ‘예산이 많이 든다. 관심 있는 분들은 홈페이지에서 보면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영문 협정본을 국문 협정본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어떤 오류가 있었고, 그걸 어떻게 고쳤는지 전혀 공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2008년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한글 번역본에서 오류가 처음 확인된 건 2011년 4월이다. 그에 앞서 한·EU FTA 협정문에 대한 무더기 번역 오류가 확인되어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비준안을 철회하고 수정 제출하는 소동이 벌어진 터였다. 

‘협정문 정오표’ 안 내놓는 까닭확인된 번역 오류는 치명적이었다. 통상 ‘군 복무자’를 뜻하는 ‘military service personal’을 엉뚱하게도 ‘병역 의무자’로 번역했고, ‘펀드 운용’ 또는 ‘펀드 사무관리’를 뜻하는 ‘fund administration’은 금융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무관리’로 번역했다. 이렇게 지적된 오류가 300개에 이르자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국회에서 잘못을 시인하고, 한·미 FTA 비준동의안마저 스스로 철회한 후 다시 내는 ‘굴욕’을 겪었다. 

이렇게 한바탕 홍역을 치른 후 정부는 2011년 6월3일 새로운 한·미 FTA 비준동의안을 제출했다. 그런데 기존 협정문에서 무엇을, 어떻게 고쳤는지 한눈에 볼 수 있는 ‘정오표(正誤表)’를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안 내놓고 있다. 

그동안 야당과 FTA 전문가들이 번역 오류 정오표를 요구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한·미 FTA는 국회의 비준 동의를 거치면 곧바로 법률적 효력을 가진다. 그런데 영문본과 국문본이 서로 불일치할 경우 법률적 효력에 당장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따라서 제대로 된 수정 작업이 이뤄졌는지, 또 다른 문제는 없는지 국회가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이 효력의 대상자가 되는 일반 국민이 그 내용을 이해하게 된다면 더더욱 바람직하다. 

둘째, 정부가 쉬쉬하고 있다가 또다시 번역 오류가 발견된다면 국회에 상정된 비준동의안을 또 한번 철회하고 다시 제출해야 한다. 이는 정부의 망신은 물론 대한민국 전체의 망신이다. 올봄 한·EU FTA가 번역 오류로 두 번이나 철회되는 과정을 겪자 외신이 이를 비웃은 바 있다. 여권 일각에서도 정오표를 제출하라고 가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도 외통부의 방침은 요지부동이다.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 9월16일 한·미 FTA 번역 오류에 대한 정오표를 제출하라는 외통위원들의 요구에 “깨끗하게 고친 국문본을 6월3일 전 국민이 보시도록 공개했다.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났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볼 만큼 봤을 것이다”라면서 정오표 제출을 거부했다. “한·EU FTA 때는 정오표를 제출해놓고 이번에는 왜 안 내놓느냐”라는 질문에는 “한·EU FTA 때는 유럽 내 비준 절차가 먼저 끝나서 공개할 수 있었지만, 한·미 FTA는 미국 내 절차가 진행 중이라 공개할 수 없다”라는 취지로 답변했다(한·EU FTA 때도 정부는 “정오표 분량이 너무 많다” “번역상의 미세한 오류를 찾아낼 정도로 자세히 본 분들이 많다”라며 정오표 제출을 거부하다 국회가 집요하게 요청하자 결국 제출했다).  

그 논리대로라면 한·미 FTA에 대한 미국 내 절차가 마무리된 지금 시점에는 ‘번역 오류 정오표’를 내놓아야 한다. 그러나 외통부는 새로운 논리를 개발해 놓았다. 지난 9월20일 서울행정법원 재판부는 외통부에 ①정정 전 한글본 ②정정 후 한글본 ③정오표의 제출을 지시했다.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제기한 소송에서 외통부가 패소한 셈이다. 하지만 외통부는 9월26일 법원에 보낸 공문에서 “한·미 FTA 오류 정정을 미국 정부가 검증하는 과정에서 외교문서의 일부로 처리된 점에 비추어(한·미 FTA 협상 관련 문서는 양국 간 합의에 따라 발효 후 3년까지 비공개로 분류), 정오표 제출에 어려움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아예 ‘발효 후 3년간 비공개’로 대못을 박은 셈이다.

정부는 10월 안에 한·미 FTA 비준동의안을 처리해달라고 국회를 압박하고 있다. 그럴수록 정오표 확인이 시급하다. 급기야 한나라당 소속인 남경필 외통위원장마저 10월13일 “정부가 의원들의 정오표 제출 요구를 일정 부분 받아들일 의무가 있다”라고 말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시민검증단이 정오표 만들어 전문가에게 의뢰

정부가 끝까지 뭉갤 경우 시민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다. 이에 은 박주선 의원실과 공동으로 한·미 FTA 시민 검증단을 모집해 정정 전의 한글본과 정정 후의 한글본 600여 쪽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따져보는 중이다. 

이미 20여 명의 시민이 비교 검토를 자원했는데, 초반 작업에서만 의미 있는 대목이 눈에 띄었다. 이를테면 제1.4조 정의 조항의 경우 2007년 한글본에 “기업이라 함은 회사·신탁회사·합명회사·1인기업·합작투자·조합 또는 유사한 조직을 포함하여”라고 번역됐던 것이 2011년에는 “기업이라 함은 회사·신탁·파트너십·단독소유기업·합작투자·협회 또는 유사한 조직을 포함하여”로 바뀌었다. 합명회사나 조합은 법적 개념인 반면, 파트너십이나 협회는 쓰임새가 다르다. 게다가 파트너십이나 협회로 정정한 것은 당초 정부가 발표한 ‘번역 오류 수정 유형’에는 없던 대목이다. 검증단이 이런 정오표를 만들면 이를 송기호 변호사 등 전문가들에게 보내 적용상의 차이를 검증받을 계획이다. 

어른들 말씀에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고 했다. IMF 외환위기야 느닷없이 당했다 쳐도, 한·미 FTA만은 신중 또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이숙이 기자 | sook@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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