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30일 월요일

박근혜의 첫 번째 ‘덫’


이글은 시사IN 2012-07-30일자 기사 '박근혜의 첫 번째 ‘덫’'을 퍼왔습니다.
정수장학회 사회 환원을 둘러싼 노사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유력 대선주자인 박근혜 의원에게도 아킬레스건이 될 전망이다. 민주당은 ‘정수장학회 사회 환원 결의안’을 당론으로 의결했다.

서너 발자국 걸어 (부산일보) 현관문 안으로 들어서면, 벌금이 100만원이다. 1988년에 입사했으니 24년째 다닌 회사다. 하지만 이제는 회사 건물에 출입하는 것만으로 벌금 100만원을 내게 된 것이다. 7월11일, 법원이 내린 판결이 그렇다. 그날 이후 이정호 (부산일보) 편집국장은 현관 옆에 작은 책상을 마련했다. 그렇게 그는 ‘거리의 편집국장’이 되었다.

이정호 국장은 1988년 11월 공채 31기로 (부산일보)에 입사했다. 그의 표현대로 “기자 초년 생활을 좋은 시절에 시작했다.” 1988년 7월 (부산일보)는 파업을 겪었다. 사회 민주화 열기가 뜨거울 때였다. 당시 경영진은 ‘우리 신문은 숙명적 여당지’라고 강조해 노조의 강한 반발을 샀고, 이것이 나중에 사장 퇴진까지 이어지는 불씨가 되었다. 6일간의 파업으로 얻은 성과가 ‘편집국장 3인 추천제’였다. 편집국 노조원이 추천하는 3인 중 편집국장을 임명하도록 함으로써 편집권 독립을 보장하려는 제도였다. 회사는 관례상 3인 가운데 최다 득표자를 편집국장으로 임명했다. ‘이정호 기자’는 이 파업 직후에 (부산일보)에 입사했다. 그리고 ‘편집국장 3인 추천제’에 따라 2010년 12월 편집국장에 임명되었다. 

ⓒ시사IN 조남진 <부산일보> 본사.

갈등이 표면화한 것은 2011년 11월이었다. 봄부터 노조와 회사가 사장 선임제와 관련해 협의를 해왔다. 노조 측은 (부산일보) 주식을 100% 갖고 있는 정수장학회가 사장을 선임할 것이 아니라 사원들의 의사가 반영된 ‘민주적 사장 선임제’를 도입할 것을 요구해왔다. 11월, 사장이 노조위원장을 징계하려 했다. 이정호 편집국장은 “그때까지만 해도 노조와 회사 사이의 문제였다”라고 말했다. 당시 이 국장은 사내게시판에 ‘노조위원장에 대한 징계가 부적절하다’는 글을 올렸다(이호진 노조위원장은 11월 말에 해고되었고, 2012년 4월에 법원의 조정으로 복직했다). 

그리고 11월17일 ‘정수장학회의 사회 환원’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서울에서 열렸고, 이 기사는 1면에 배치되었다. 사장은 ‘회사의 명예가 걸린 문제라 게재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고, 편집국장은 ‘회사의 문제이지만 또한 공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국민의 알 권리 측면에서 게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기사는 나갔고 국장에 대한 징계 얘기가 나왔다. 11월30일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김종렬 당시 사장은 1면 머리기사였던 ‘부산일보 사측 징계 남발, 노사 갈등 격화’ 기사와 2면 ‘부산일보 ‘정수재단 사회 환원 투쟁’ 갈등 원인은’ 기사를 문제 삼았다. 인쇄 단계에서 회사가 윤전기를 세우면서 결국 이날 신문은 나오지 않았다. 회사 측은 ‘신문 발행의 최종 책임은 발행인에게 있다’라고 인쇄를 중단한 이유를 설명했고, 이정호 편집국장은 ‘신문에 어떤 기사를 실을지 판단하는 것은 편집국 권한이다. 이번 사건은 편집권 독립 침해이다’라고 맞섰다. 

(부산일보) 사태의 발단

이 일이 있고 나서 회사 측은 ‘지시 불이행’ 등을 이유로 이정호 편집국장에 대해 대기 처분을 내렸다. 회사 측은 이정호 국장에 대한 두 차례 징계 사유에 대해 “사규를 어기고 업무 질서를 어지럽힌 것이다. 신문 지령 표시를 잘못하고, 발행인 표시를 하지 않는 등 신문법을 위반하는 식의 징계 사유가 많다. 경영진이 편집권에 압력을 넣었거나 하는 편집권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조남진 <부산일보> 이정호 부산일보 편집국장이 7월17일 부산일보 현관 앞에 마련한 책상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징계 이후 양측의 소송전이 이어졌다. 2월10일에는 이정호 편집국장이 승소했다. 회사 측이 제기한 ‘편집국장 직무집행 중지 가처분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부산일보)의 경우 사규에 ‘징계위원 3분의 2 찬성으로 징계한다’는 의결 규정을 두고, 단체협약에 ‘징계위는 노사 동수로 구성하고 위원장은 회사 측이 맡는다’는 구성요건을 두었다. 그런데 지난해 하반기 회사 측이 사규를 변경해 3분의 2 찬성을 과반 찬성으로 바꾸었다. 이에 따라 이정호 국장에 대한 징계가 이뤄진 것이다. 이에 대해 법원은 노동자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사규를 개정할 경우 노조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데 이런 과정이 없었던 만큼 절차상 하자가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따라서 본안소송까지는 편집국장 지위를 인정한다고 판결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뒤 회사 측은 임원과 국·실장으로 구성된 ‘포상징계위원회’를 열어 이정호 국장을 재차 징계했다. 그리고 다시 법정 대결을 벌였다. 7월11일 법원은 회사 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직무정지 및 출입 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편집국장은 비노조원이기 때문에 단체협약 규정을 따르지 않고, 사규만 적용해도 된다는 판단이었다. 이로써 이정호 국장은 편집국장 직무가 중지되고, 회사에도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현재 부국장이 편집국장 직무 대행을 하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정수장학회였다. 이정호 국장은 “그동안 잠복해 있던 갈등이 경영진이 윤전기를 세우면서 물 위로 드러났다”라고 말했다. 정수장학회는 (부산일보)의 주식 100%를 갖고 있다. 정수장학회 이사회에서 (부산일보) 사장을 임명한다. 박근혜 의원이 1995년부터 2005년까지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역임했다(18~20쪽 딸린 기사 참조). 이정호 국장은 “박근혜 의원이 한나라당 대표가 된 2004년부터 갈등이 시작되었다”라고 말한다. 박 의원이 1997년 정치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는 칩거하다시피 했고, 한나라당 대표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대구의 한 지역구 의원’ 정도의 비중이었기 때문에 그와 관련해 ‘보도할 거리가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2004년 17대 총선 당시 (부산일보)는 홍역을 치렀다. 당시 공보위 간사였던 이호진 (부산일보) 노조위원장에 따르면, 당시 기자들이 회의를 거쳐 결의문을 붙이기도 했다. “당시 젊은 기자들이 취재를 하면서 (부산일보) 보도가 왜 그러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박근혜 띄우기’ 보도가 심했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이 동아대 석좌교수로 임명되고 총학생회가 반발했는데, 이 내용을 다룬 기사가 빠진 일도 있었다. 이런 일이 연이어 벌어지면서 기자들이 격분했다.” 

2004년 노골적인 칼럼 한 편

당시 (부산일보)는 이런 칼럼(‘거리의 정치 평론가’)을 내보냈다. “박근혜 대표가 고해와 참회의 의식으로 취임 첫날 사찰에서의 108배, 성당에서의 고해 성사, 교회에서는 참회 예배를 갖기까지 한나라당은 참으로 먼 길을 돌아서 왔다. 2002년 12월 대선 패배 이후 1년3개월이 걸렸다. (중략) 그렇다. 변화란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중략) 총선일까지는 꼭 2주 남은 셈이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그러나 충분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그래도 다행스러울 정도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시사IN 조남진 이호진 <부산일보> 노조위원장이 박근혜 의원과 최필립 이사장 등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이 칼럼에 대해 부산 민언련은 ‘충성스러운 선거 참모와 같은 당부와 총선 후 재보선의 활용방안까지 안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호진 위원장은 2004년 이런 일을 겪은 만큼 지난해 하반기부터 이런 보도가 재발할까봐 위기의식이 커졌다고 말한다. “본인이 직접 대선 후보로 나서면 (부산일보)에 2004년 총선 때보다 몇 배로 충격이 올 수 있다고 보았다.”

2004년 총선의 경험은 ‘사장 선임’을 둘러싼 노사 갈등으로 이어졌다. 정수장학회의 사장 임명에 반발해 2006년과 2009년 노조가 사장실을 점거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회사 측은 ‘민주적 사장선임제’를 위해 노력한다고 했으나 어떤 방법으로 구체화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매번 미루어졌다. 이호진 위원장은 “2005년부터 7년 동안 최필립 이사장을 설득해왔다. 최 이사장은 자기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정수장학회와 (부산일보) 문제는 박근혜 후보가 직접 해결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회사 측은 “당시 노조의 요구를 재단 측에 전달했으나, 재단에서는 노조의 요구가 ‘경영권 침해’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편집국장이 편집권 독립을 주장하면서 8개월 동안 회사 측과 맞서는 상황.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누가 되든 편집국장 처지에서 해야 하는 일이었다. 정수장학회가 순수한 장학회라면 문제는 다르다. 거기에 연관이 있는 박근혜 의원이 특정 정당 후보로 대선에 나선다면, (부산일보)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편집권 독립은 언론사의 생명이다. 각오한 싸움이고,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라고 이정호 국장은 말했다. 

(부산일보)와 정수장학회 문제는 8월 이후에도 계속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는 ‘박근혜의 아킬레스건’ 가운데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부산일보)의 편집권 독립 문제는 유력 대선 후보의 ‘언론관’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크다. 정수장학회가 MBC의 주식 30%를 갖고 있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한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은 “MBC 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70% 소유)와 정수장학회가 파업 사태에 뒷짐을 졌다”라고 비판했다. 주주들이 책임을 못 졌다면서 ‘민영화’도 거론했다. 대선에 앞서 정수장학회와 언론((부산일보), MBC) 문제가 동시에 떠오를 수 있는 양상이다. 

법원 판결·야당 공세, 박근혜에게 부담

법원 판결도 박근혜 후보로서는 부담스럽다. 김지태씨의 유족들은 (부산일보)와 MBC 등 강탈당한 언론사 주식을 돌려달라며 국가와 정수장학회를 상대로 주식반환 청구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지난 2월 서울중앙지법은 ‘강압으로 주식을 증여한 사실은 인정되나 반환청구 시효가 지나 돌려받을 수는 없다’고 판결했다. 법원이 ‘강압’ 부분을 인정한 것은 박근혜 후보로서 부담스러운 대목이다(유족들은 이에 대해 항소를 한 상황이다). 

야당도 공세의 고삐를 당기고 있다. 7월20일 민주통합당은 ‘정수장학회 사회 환원 결의안’을 당론으로 의결했다. 기자 출신인 배재정 의원이 마련한 이 결의안은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부정한 과거사를 바로잡고 나아가 공익법인임에도 특정인에 의한 사유화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정수장학회를 사회에 환원할 것’을 촉구했다.

(부산일보) 안팎으로도 변수가 많다. 이정호 국장이 제기한 ‘대기처분 무효확인’

 본안 소송에 대한 1심 선고가 8월24일로 잡혀 있다. (부산일보) 노조는 파업 찬반 투표를 거쳐 이미 파업을 결의해놓은 상황이다. 

(부산일보) 입구에는 ‘독자가 주인입니다. 최고 신문 부산일보’라고 크게 적혀 있다. 그 아래에서 (부산일보)의 편집국장은 ‘거리의 편집국장’이 되어 앉아 있다. 그리고 1962년의 ‘부일장학회 강탈 사건’은 그로부터 50년 후에 (부산일보) 편집권 독립 문제로 불거져 있다. 현재 (부산일보)의 주인은, 정수장학회다.

차형석 기자 |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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