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프레스바이플 2012-07-13일자 기사 '거리로 쫓겨난 동아의 ‘자유언론’'을 퍼왔습니다.
언론과 권력 (44)
동아일보사에서 제작거부 농성이 시작된 지 엿새째인 3월 17일 자정이 넘은 시각에 편집국 창밖을 내다본 기자 몇 명이 황급히 외쳤다. 수상한 남자들이 회사 건물을 에워싼 가운데 무교동 쪽 큰길에 누군가가 대형 탐조등을 설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편집국과 4층 방송국에서 바닥에 담요를 깔고 누워 눈을 붙이려던 사원들에게 비상한 상황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두 벌떡 일어나서 창가로 달려갔다.
새벽 3시 15분께 편집국 남쪽 길 건너편에서 탐조등 불빛이 켜지는 것을 신호 삼아 쇠파이프와 몽둥이를 든 200여 명의 폭도들이 ‘와’ 하는 함성과 함께 2층 공무국으로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겨우 5분도 되지 않아 망치로 2층 공무국의 철문과 벽을 부수고 안으로 몰려들어갔다.
물만 마시면서 엿새째 단식농성을 하고 있던 23 명의 기자들 가운데 최연장자가 “소란을 피우면 활자판이 쏟아질 테니 우리 스스로 조용히 나가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침입자들은 막무가내였다. 그들은 술 냄새를 풍기면서 기자 한 명에 3,4 명씩 달려들어 몽둥이를 휘두르거나 주먹질을 해댔다. 기진맥진한 기자들은 양쪽 겨드랑이를 폭도들에게 잡힌 채 회사 차고로 끌려갔다.
그 과정에서 정연주의 안경이 두 동강이 나고 임채정, 심재택, 성유보가 다쳤다. 기자 23 명을 태운 동아일보사 업무용 지프 다섯 대는 통행금지로 인적이 끊긴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 혜화동 우석병원으로 달려갔다. 나중에 밝혀졌듯이 폭도들의 일부는 동아일보사의 영업직 사원과 가판원이었고 나머지는 정체불명의 무술 유단자들이었다.
3층 편집국에서 창문을 통해 밖을 살피고 있던 기자들은 새벽 3시 50분쯤 폭도들이 공격을 시작하는 소리를 듣고 농성을 하던 사원들에게 ‘경보’를 발했다. 쇠줄로 굳게 걸어 잠근 남쪽 출입문을 망치와 도끼로 부수는 소리가 편집국 안으로 울려 퍼졌다. 고막을 뚫을 듯이 소름이 끼치는 그 굉음은 자유언론을 난도질하는 ‘망나니들의 칼춤’ 소리 같았다.
철문이 휑하니 뚫리자 대형 손전등을 든 폭도 몇 명의 뒤를 따라 150 명이 넘는 괴한들이 편집국으로 밀려들었다. 젊은 기자들이 맨 주먹으로 달려가서 앞을 막아서자 그들은 소화기로 가스를 뿜어대면서 몽둥이를 휘둘렀다. 폭도들 사이에는 동아일보사 판매부와 통신과 직원, 그리고 임시로 고용된 경비원들이 섞여 있었다. 폭도들은 농성하는 사원들에게 ‘당장 나가라’고 위협했다. 그러자 기협 임시분회장 안종필(편집부 차장)을 비롯한 기자 몇 사람이 “우리가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으니 잠깐 자리를 비켜달라”고 그들을 설득했다.

▲ 1974년 10월 24일 오전부터 편집국 한가운데 기둥에 걸려 있던 ‘자유언론실천선언’ 족자를 떼어냈다.
안종필의 사회로 마지막 기자총회가 열렸다. 농성자들은 ‘자유언론실천선언’ 낭독에 이어 당시 민주화운동권에서 많이 부르던 ‘우리 승리하리라’를 합창했다. 이어서 ‘자유언론 만세’ ‘민주회복 만세’와 애국가를 부른 기자들은 1974년 10월 24일 오전부터 편집국 한가운데 기둥에 걸려 있던 ‘자유언론실천선언’ 족자를 떼어냈다. 기자들은 침통한 얼굴로 각자 책상에 든 물건들을 챙겼다. 사물함을 정리한 뒤 편집국을 나서는 기자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3층부터 회사 정문까지 계단을 내려오는데 폭도들이 ‘빨리 나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괴한들이 동아일보사 언론인들의 농성장을 기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재야인사들은 통행금지가 해제된 새벽 4시가 지나자 회사 정문 앞으로 달려와 분노의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신새벽에 내리는 부슬비를 맞으면서 동아일보사 건물을 나서는 기자들을 얼싸안은 그들은 함께 눈물을 흘렸다. 함석헌, 천관우, 이희호, 정일형, 이태영을 비롯한 재야의 어른들이었다.
2층 공무국의 단식농성팀과 3층 편집국의 기자들이 폭력에 밀려났다는 소식을 들은 4층의 방송국팀은 광화문 네거리에서 자행되고 있는 추악한 ‘민중 배신극’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라도 날이 밝기까지 지연작전을 펴기로 했다. 특히 방송국은 시설의 특수성 때문에 보안장치가 되어 있어서 4층 셔터를 내리고 문을 잠근 뒤 책걸상을 비롯한 집기로 출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방송국 사원들은 공무국과 편집국이 폭도들에게 점거 당한 뒤 1시간 40분이나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 아침 6시께 각목과 소화기, 소방호스로 무장한 폭도들이 방송국 셔터를 부수고 밀려들어 왔다. 무술유단자로 보이는 자가 폭도들을 꾸짖던 프로듀서 김학천의 옆구리를 발길로 차서 실신시킨 뒤 병원으로 보내는가 하면 여성 아나운서의 머리채를 낚아채기도 했다. 폭도들은 4층부터 계단을 내려가는 여자 사원들의 치맛자락을 들치면서 상소리를 퍼붓고 남자 사원들에게 폭행을 가했다. 먼저 회사 밖으로 쫓겨난 기자들은 방송국 사원들을 부둥켜안으면서 눈물을 쏟았다.
바로 그 무렵 동아일보사 남쪽 길 건너편의 중부소방서 앞에 모여 있던 사복경찰관 150여 명이 동아일보사 정문 앞으로 달려와 폭력에 밀려 쫓겨난 사원들과 재야인사들을 광화문 지하도로 내몰기 시작했다. 그때가 1975년 3월 17일 아침 6시 30분께였다. 당시 쫓겨난 사원 160여 명 가운데 113 명 (고인이 된 18 명 포함)은 그 이후 37년이 지난 2012년 7월 현재까지 동아일보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동아일보사 부근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한 기자들이 오전 9시쯤 회사 정문 앞으로 가서 보니 임시로 채용된 경비원들과 사복경찰관들이 출근하는 사원들의 신분증을 일일이 검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회사가 미리 나누어준 ‘빨간 신분증’을 지니고 있었다.
쫓겨난 동아일보사 사원들은 그날 오전 10시께 신문회관(현재 프레스센터 자리)에 모여 ‘폭력에 밀려 동아일보를 떠나며’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자유언론의 마지막 보루 ‘동아’를 지키기 위해 신명을 바쳐온 우리는 17일 새벽 동아일보사 사원 아닌, 산소용접기와 각목을 휘두르는 폭도들에 끌려 밤거리에 내동댕이쳐졌다.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이후 뜨거운 국민적 성원과 온 세계 양심의 격려에 힘입어 빈사의 상태에서 기적처럼 회생한 ‘동아’는 이제 권력의 강압과 경영주의 마비된 이성으로 끝내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이 비극적 파국 앞에서 우리는 국민적 열망을 배반한 괴로움에 비통해 할 겨를마저 없다.
이제 ‘동아’는 어제의 ‘동아’가 아니다. 폭력을 서슴지 않는 언론이 어찌 민족의 소리를 대변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몸은 비록 ‘동아’의 사옥을 떠나지만 ‘동아’의 정통성은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
인간의 영원한 기본권인 자유언론은 산소용접기와 각목으로 말살될 수 없다. ‘동아’의 정통성은 폭도를 고용한 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언론을 사수하는 우리들에게 있다.”(, 36쪽)
김종철 (언론인) | cckim99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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