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시사IN 2013-05-16일자 기사 '북, MB 정권 때 ‘공단 무의미’ 결론'을 퍼왔습니다.
북한은 참여정부 시절에도 개성공단이 산업 협력이라기보다는 저임금 따먹기에 불과하다는 불만을 표했다. 이명박 정부 때 이런 불만이 극에 달하며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개성공단은 사실 기획 단계부터 문제가 있었다. 김정일 위원장이 남한과의 대치 상황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요충지를 남쪽에 내어준 것은 개성공단이 북한 산업 발전에 기여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여정부 시절 본격 출범한 개성공단의 모습은 산업 협력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저임금 따먹기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핵 문제의 와중에서 약속한 일정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이런 문제 외에도 군부의 지속적인 반발은 북한 지도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북한 군부는 1999년 개성공단이 거론될 때부터 반대 의견을 표명해왔다. 2006년 4월 열린 일선 지휘관 회의는 당시 남북관계 상황과 맞물려 성토장을 방불케 했다. 김정일 위원장의 카리스마로 가까스로 수습하기는 했지만, 김 위원장이 2006년 7월 미사일 발사와 10월 핵실험을 단행한 것도 이 같은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당시 몇몇 전문가는 개성공단을 둘러싼 북한 내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포착하고 노무현 대통령에게 올라가는 보고서에서 이를 적시하기도 했다. 그 내용 중에 ‘개성은 거대한 역사박물관이 될 것이다’ ‘개성이 잘될 것이라고 보는 평양 고위층은 없다’ ‘개성에서 배우는 산업지식이 있는가? 없다’ 등 북한 고위층 내부의 육성을 그대로 전달해 경각심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노 대통령 주변은 개성공단이 성공한 모델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고,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였다. 2007년 10월3일 남북 정상 간 만남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육성으로 북측의 불만이 터져나왔다. 당시 김 위원장은 북한이 개성공단을 산업 협력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4년간 했어도 시범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남측이 개혁·개방의 성공 사례처럼 떠들어대는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특구 해서 우리가 득본 것 하나도 없다”라고 말하기까지 한 것이다(문정인 연세대 교수의 언론 좌담 내용 재인용).
김 위원장의 이 같은 성토는 북한 내에서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남쪽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2007년 10월 중순부터 개성공단을 담당했던 북측 대남 일꾼들에 대해 대대적인 반부패 조사가 진행됐다. 이것이 1차 파동이었다면, 2차 파동은 또다시 군부로부터 일어났다.
대남 담당 부서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남측 기업 등에서 받았던 뇌물 액수가 적게는 수만 달러에서 많게는 수백만 달러에 이를 정도로 적나라하게 밝혀지면서, 군부의 분노가 폭발했다. 개성공업지구가 들어오기 전까지 휴전선 인근 땅은 북한 군부 관할이었다. 그런데 공단이 시작되고 난 후 군부는 자신들의 땅을 내어주고 물러난 뒤 힘은 힘대로 들고 들어오는 것은 하나도 없는 사이에 민경련 등 대남 부서들만 배를 채웠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한 것이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07년 10월2일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에 도착한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 환영행사에 참석했다.
군부의 불만에 기름을 끼얹는 일이 이명박 정부 초기 벌어졌다. 2008년 3월19일 김하중 통일부 장관이 “북핵 문제가 타결되지 않는 상태에서 (개성공단 사업을) 확대하기 어렵다”라고 발언한 것이다. 김 장관 본인은 이 말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잘 몰랐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은 개성공단 2단계 공사가 시작되면 그나마 수익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북한 군부의 계산을 틀어지게 만들었다. 2008년의 일선 지휘관 회의는 그 직후에 있었다. 이때 개성공단 폐쇄를 요구하는 군부의 불평불만이 또다시 분출한 것이다.
관리 주체 당 중앙위 관할로 바꿔
그렇다고 당장 폐쇄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김 위원장으로서는 더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던 중 2008년 7월 박왕자 사건이 터지면서 금강산 관광이 남한 정부에 의해 폐쇄되기에 이르렀다. 북한으로서는 충격이었다. 금강산이 폐쇄된다는 것은 개성공단도 언젠가는 문 닫을지 모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북한이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2009년 6월 토지임대료로 5억 달러를 요구하면서 개성공단 임금을 월 300달러로 인상해달라고 요구한 것. 시쳇말로 이명박 정부의 간을 본 것인데, 3개월 뒤인 10월 이 요구 사항을 철회했다. 대북 소식통은 “바로 이때 평양에서는 더 이상 개성이 자신들에게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라고 전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당 중앙위의 브레인들에게 개성공단 폐쇄에 대비한 ‘대책적 방안(플랜 B)’을 세울 것을 지시한 시점이 바로 이때라고 한다. 이때부터 개성공단은 당 중앙위 관할로 들어가게 된다. 즉 공단 조성기인 2003년에는 통전부 산하인 민경련과 군부 연합팀이 담당하다 이후 민경련이 관리를 맡았다. 2006년 4월의 일선 지휘관 회의에서 군부가 난리를 친 이후에는 국방위원회로 관리 주체가 바뀌었다. 그런 이유로 개성공단의 남측 체류인원 및 통행제한을 선언한 2008년 ‘12·1 조치’ 직전에 김영철 국방위원회 정책실장을 비롯한 군부 조사단이 개성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2009년 김정일 위원장이 개성에 대한 ‘플랜 B’를 수립할 것을 지시한 이후부터는 당 중앙위의 관할로 들어갔고, 현재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4월8일 개성공단을 방문해 공단 잠정 폐쇄를 발표한 김양건 당 통일전선부장의 당시 타이틀에 대해 이 통전부장이 아니라 ‘당 중앙위원회 비서’라고 호칭했던 것이다.
남문희 대기자 |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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