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30일 목요일

추락하는 <한국일보>, 수상한 패밀리

이글은 시사IN 2013-05-30일자 기사 '추락하는 (한국일보), 수상한 패밀리'를 퍼왔습니다.
회사 간부가 몰래 1면 기사를 바꿔치기한 사건을 계기로 사태가 다시 불붙고 있다. 장재구 회장에 대한 노조의 배임 고발로 촉발되었지만 문제의 뿌리는 장씨 일가의 족벌 경영이다.

5월15일자 (한국일보)에 사고가 났다. 2면과 18면에 ‘日 관광객 뚝…썰렁한 명동’이라는 똑같은 사진이 두 번 게재되었다. 1면 단독 기사 밀어내기가 빚은 사고였다. (한국일보)는 다른 일간지와 마찬가지로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새벽 2시까지 다섯 번 정도 기사를 바꾸거나 보충하는 ‘판갈이’를 한다. 일찍 마감하는 초판과 지방판 1면 하단에 ‘박 대통령 광고업계 일감 몰아주기 지적에…공정위 납품가 후려치기 조사 착수’라는 단독 기사가 실렸다. 공정위가 광고업계의 ‘갑’ 제일기획을 조사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밤 11시 수도권 지역에 배달되는 ‘수도권판’부터 이 기사가 1면에서 사라지고 경제면으로 이동했다. 그것도 편집국 외부에서 회사 쪽에 동조하는 간부급 기자가 주도해 판갈이를 한 것이다. 기자들에 따르면, 언론사 광고의 갑 노릇을 하는 제일기획의 눈치를 보고 회사 쪽이 알아서 밀어내기를 했다고 한다. 5월15일자 신문을 받아보고서야 기자들은 기사 밀어내기를 알았다. 이날 오후 2시 기자들은 비상총회를 열고 “신문의 얼굴인 1면이 무참히 짓밟혔다”라고 분노했다. 박진열 사장실 앞으로 몰려가 퇴진을 요구했다. 


ⓒ시사IN 조남진 5월8일 <한국일보> 노조가 장재구 회장 구속 수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한국일보) 사태가 잠시 소강상태를 거쳐 다시 불붙고 있다. 지난 4월29일 (한국일보) 노조 비상대책위원회는 장재구 (한국일보) 회장을 업무상 배임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하루 전인 4월28일 장 회장은 (한국일보) 매각 협상 결렬을 발표했다. 5월1일에는 비대위의 검찰 고발에 맞서 회사 측이 이영성 편집국장과 부장단을 경질했다. 기자들은 이 국장 재신임 투표를 통해 인사안을 거부했다. 회사가 후임 국장으로 임명한 하종오 편집국장에 대해서는 임명동의 투표를 거쳐 부결시켰다. 회사가 이 국장과 부장단의, 기사 전송 시스템인 ‘집배신’ 수정 권한을 박탈했지만, 다른 기자들 아이디를 빌려 지면을 제작해왔다. 

첨예하게 부딪친 노사는 5월9일부터 물밑 협상에 들어가 세 차례 만났다. 그런 협상 국면에서 5월14일 밤 기자들도 모르게 1면 단독 기사 밀어내기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최진주 (한국일보) 비대위 부위원장은 “협상 국면에서 다시 대치 국면으로 원위치했다”라고 말했다. 

(한국일보) 하면 지금도 경복궁 앞 중학동 사옥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현재 (한국일보)는 서울 중구 남대문로 한진빌딩 신관 15층으로 옮겼다. 사장 등 임원실은 신관 9층, 노동조합 사무실은 본관 3층으로 흩어져 있다. 2007년 2월부터 시작된 셋방살이다. 애초 계획대로라면 (한국일보)는 2011년 경복궁 앞 중학동 14번지로 복귀해야 했다. 그해 1월1일자 1면에 ‘굿모닝 2011…한국일보가 새롭게 출발합니다’라며 한일건설이 옛터에 시공한 트윈트리타워 사진까지 게재했다. 신사옥 건물로 복귀할 것이라는 사진 설명도 달았다.


장기영 사주 일가. 뒷줄 왼쪽부터 4남 재국, 2남 재구, 장남 강재, 5남 재근씨

불발된 복귀는 불씨가 되었고, 2년 뒤 노조의 경영진 고발로 타올랐다. (한국일보)를 창간한 장기영씨의 차남 장재구 회장은 2002년 2월 회장에 취임했다. 그해 6월 언론사로서는 처음으로 채권단의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 대상이 되었다. 채권단이 3400억원에 이르는 한국일보사 부채 금리를 5~7%포인트 깎아주는 조건으로 장재구 회장은 사재로 500억원 증자를 약속했다. 그해 200억원을 냈고, 2006년까지 300억원을 나눠 냈다. 2006년 장 회장은 채권단에 200억원 추가 증자와 중학동 사옥 매각을 약속해 워크아웃을 졸업했다. 장 회장은 200억원 추가 증자를 하고 한일건설에 옛터를 900억원대에 팔았다. 옛터를 팔면서 (한국일보)는 한일건설로부터 신축 건물의 2개 층에 대해 시가인 3.3㎡당 1700여만 원보다 훨씬 저렴한 3.3㎡당 700만원에 살 수 있는 ‘우선매수 청구권’을 확보했다. 그래서 2011년 1월1일자에 신사옥 복귀 사진을 1면에 게재한 것이다. 하지만 복귀가 차일피일 미뤄졌다. 한 기자는 “신문 1면에 떡하니 공고까지 냈는데 왜 못 들어가는지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몰랐다”라고 말했다. 

노조가 파악해보니, 장 회장이 2006년 추가 증자한 200억원이 한일건설에서 빌린 돈이었고, 이를 우선매수 청구권으로 되갚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회사의 자산(우선매수 청구권)을 사주의 개인 증자 대금을 갚는 데 썼으니 배임에 해당한다고 노조는 주장한다. 

장 회장에 대한 배임 고발로 촉발되었지만 (한국일보) 사태는 뿌리가 깊다. 그 연원은 창간 사주인 장기영 일가와 맞닿아 있다. 1954년 6월9일 한국은행 부총재와 (조선일보) 사장을 지낸 장기영씨가 (태양신문)을 인수해 제호를(한국일보)로 바꾸고 ‘누구도 신문을 이용할 수 없다’라는 창간사를 실으며 1호를 내놓았다. 100가지 생각을 뜻하는 ‘백상’을 호로 쓴 장기영은 신문사에서 먹고 자며 100가지 아이디어를 신문에 녹였다. 언론사에 일반화된 견습기자 제도나 신문에 두세 가지 사설을 싣는 관행이 모두 장기영이 처음 시도한 아이디어였다. 그는 사장실에서 먹고 자고 쓰고 고치며 자칭 편집국장·주필·기자 노릇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기자들은 그를 ‘왕초’나 ‘장 기자’라 불렀다. 초기 사옥 계단에 ‘신문은 마감 시간이 없다. 순간순간이 마감 시간이다’ ‘승패는 일요일 아침에 있다. 일요일 새벽 3시 반에 특종이 있다고 생각하는 정신이 한국일보 정신이다’라고 직접 써 붙인 글귀만 보아도 장기영은 뼛속까지 신문쟁이였다. 



다른 언론사 사주와 달리 강한 카리스마로 신문사를 키운 장기영은 공화당 국회의원(1973~1977년)을 지내던 1977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경영권을 넘겨받은 장남 장강재는 월요판 발행(1989년 7월), 조·석간 동시 발행(1990년 말) 등 공격 경영을 트레이드마크로 내세우면서 (한국일보)를 4대 일간지로 자리매김시켰다. 지금이야 ‘조·중·동’이라는 말이 거대 신문사의 약칭이지만, 이전만 해도 이른 바 ‘4대지(조선·중앙·동아·한국)’라는 말이 거대 신문의 별칭으로 통했다. 장강재도 48세이던 1993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장강재의 형제인 재구·재민·재국·재근이 경영권을 나눠가지면서 (한국일보)는 ‘패밀리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신문사’로 전락했다. (한국일보) 출신 한 언론계 인사는 “무능력한 사주 일가가 어떻게 언론사를 망가뜨릴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푼돈부터 목돈까지 사주 일가는 (한국일보)를 마치 사금고처럼 이용했다”라고 말했다.  

장강재 사후 당시 최대 지분을 가진 장강재의 장남 장중호가 누구와 손을 잡느냐에 따라 (한국일보) 경영권이 결정 났다. 장중호는 장재국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다 1998년 1차 장중호-장재구 연합전선이 이뤄져 장재국 회장을 퇴진시켰다. 장재국은 집안 중재로 9개월 만에 복귀했지만, 부실 경영과 라스베이거스 카지노 도박 혐의가 불거지면서 결국 탄핵당했다. 2002년 2월 장중호-장재구 2차 연합이 이뤄져 장재구 회장에게로 경영권이 넘어갔다. 대신 장중호는 (일간스포츠) 지분을 보장받고 계열 분리했다. (일간스포츠)는 현재 (중앙일보)로 넘어갔고 장중호는 사장만 맡고 있다. 이후 장재국·장재근 등은 세금포탈과 횡령 등 혐의로 사법처분을 당하기도 했다. 

비대위, 파업은 최후 카드로 보류

2011년 신사옥 복귀 불발 뒤 기자들은 배임액에 해당하는 200억원 복원을 장재구 회장에게 여러 차례 요구했다. 그때마다 장 회장은 자신이 보유한 (미주 한국일보) 지분이나 (서울경제신문) 지분을 매각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다 결국 (한국일보) 매각 카드까지 꺼냈다. 장 회장이 매각 의사를 밝히자, 기자들이 인수 대상자를 알아보기도 했다. 


ⓒ시사IN 이명익 경복궁 앞에 있던 옛 한국일보사 사옥(왼쪽)과 복귀가 불발된 트윈트리타워.

최근 (한국일보) 매각 협상은 ㅅ사, ㅌ사, ㅆ사와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ㅆ사 회장은 미국 시민권자라는 이유로 조기 탈락했다. ㅌ사와 ㅅ사가 경합을 벌이다가 ㅅ사와 최종 매각 협상을 했다. 양쪽은 매각 자금액에도 근접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협상은 ㅅ사 회장과 장재구 회장 단독 만남 뒤 어그러졌다. 협상 결렬을 보는 노사의 시각차가 크다. 비대위는 결렬 원인을 장 회장의 ‘플러스알파’ 요구로 본다. 한 기자는 “인수자금 문제가 아니라, 인수 뒤 각종 횡령 배임 의혹에 대해 일절 문제 삼지 않는다는 일괄 사면을 요구한 것 아니냐는 말이 있다”라고 전했다. 반면 회사 고위 관계자는 “인수 희망자가 장 회장을 만나고 나면 말을 바꾸었다. 회장을 불신하는 노조는 이런 얘기를 신뢰하지 않고, 장 회장이 무리한 요구를 거듭했기 때문에 성사가 안 되었다고 비난한다”라고 주장했다. 장 회장도 (한국일보) 노조가 회사 측도 아닌, ㅅ사를 일방적으로 두둔해 협상을 방해한다며 반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협상이 결렬되면서 노조는 장 회장에게 더 이상 자구 노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보고 검찰에 고발했다. 문제는 (한국일보)가 여기까지 오게 한 장본인이 장재구 회장이지만, 이 열쇠를 풀 수 있는 당사자 또한 장 회장이라는 점이다. 현재 (한국일보) 지분은 장재구 회장 40.1%, (서울경제신문) 29.99%, 장재민 (미주 한국일보) 회장 30%로 되어 있다. 사실상 장재구 회장이 지분 70%를 가진 셈이다.  

10년차 이상인 한 기자는 “노조가 그동안 준비를 많이 해왔다. 횡령 혐의 등 장 회장에 대한 자료가 많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중견 기자는 “이번에는 기자들이 제대로 뭉쳤다. 일선 시니어 기자들은 여기저기 스카우트 제의를 거부하고 (한국일보)에 남은 충성도 높은 사람들이고 주니어 기자들 역시 이제는 바꿔보자는 의지가 강해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비대위는 파업은 최후 카드로 보류하고 있다. (한국일보) 기자들에게 마지막 자존심이 바로 ‘누구도 이용할 수 없는’ 신문 지면이기 때문이다. 


고제규 기자  |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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