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21일 화요일

한겨레와 중앙일보의 사설 교류, ‘청소년’ 위해?


이글은미디어스 2013-05-20일자 기사 '한겨레와 중앙일보의 사설 교류, ‘청소년’ 위해?'를 퍼왔습니다.
사교육에 영합하는 한겨레의 탈정치성은 아닌지


▲ 20일자 한겨레 1면 기사

한겨레와 중앙일보의 ‘사설 교류’가 시작됐다. 한겨레와 중앙일보는 동일한 사안에 대한 두 언론사의 사설을 비교·분석해 보여주는 지면 ‘사설 속으로’를 공동 제작해 21일부터 매주 화요일 두 신문에 싣는다. 두 신문사는 사설을 비교·분석하는 필자를 두 명씩 추천하기로 했는데, 한겨레는 송승훈 남양주광동고 국어 교사와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를 추천했고 중앙일보는 김기태 호남대 교수와 허병두 숭문고 교사를 추천했다.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진보언론인 한겨레와 영향력 있는 보수신문 중 하나인 중앙일보가 공동기획을 추진하는 상황은 그 자체로 분석될 가치가 있다. 만일 성향이 다른 두 신문사가 공동기획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 그 이유는 ‘심화된 공론형성’과 ‘진영논리의 극복’ 정도가 될 것이다. 사설을 비교·분석하는 기획이라면 더욱이나 그렇다. 

그렇다면 이 기획을 평가하는 잣대는 “이 기획이 밋밋한 양비론이나 양시론을 넘어 공론형성을 심화하고 진영논리를 극복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진보진영 내부에서 이러한 질문이 던져진다면 그 질문은 중앙일보 보다는 한겨레를 향하게 될 것이다. 보수세력이 진보세력에게 관용적인 자세를 취하겠다는 데에 진보진영 입장에서 시비를 걸어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진보세력이 보수세력에게 접근한다면 그것이 정체성을 훼손하지는 않는지 유효한 전략·전술인지를 따져 물을 수 있다.   

이를테면 보수언론 중에 ‘파트너’를 선택할 때 그 대상이 중앙일보인 것이 적절했느냐는 질문이 가능하다. ‘조중동’으로 요약되는 보수언론의 지형도에서, 조선일보는 삼성 등 기업권력에 대한 비판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반면 대북문제에 대해서는 대단히 경직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앙일보는 정확히 반대방향이다. 동아일보는 이명박 정부 시절 무색무취했던 여당지에서 나름의 변신을 꾀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일보는 ‘상대적으로 해악이 덜한 보수신문’이란 평가도 받을 수 있고 ‘장기적으로 볼 때 가장 해악이 큰 보수신문’이란 평가도 가능하다. 하지만 현재 신문지형과 담론 구조에서 볼 때 중앙을 '조선, 동아'에서 떼어내 판단해야 할 아무런 근거가 없으며 이를 한겨레 역시 모르지 않을 것이다. 한겨레 역시 나름의 평가를 통해 협력관계를 추구했겠지만 이 첨예한 논의를 진보담론이나 언론개혁 운동 내부에서 공론화하기 전에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가능하다. 

더 큰 문제는 ‘사설 속으로’가 그 취지 설명 기사를 볼 때 ‘공론형성’이나 ‘진영논리 극복’ 등을 준거로 평가 받을 기획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중앙일보와 한겨레에 같은 내용으로 실린 기사 설명을 보면 유난히 부각되는 키워드가 ‘청소년’이다. 

두 신문은 “건강한 토론 문화를 뿌리내리고, 청소년에게 균형 잡힌 시각을 길러주기 위한 뜻있는 일을 시작합니다”라고 선언했고 두 신문사의 사설을 깊이 있게 탐구하는 것이 “청소년들에겐 다양한 분야의 풍부한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기회”라고 말한다. 신문사가 청소년을 걱정하는 것을 탓할 수는 없으나 보기에 따라서는 ‘공론형성’이나 ‘진영논리 극복’보다는 논술이나 구술면접 시장에 어필하려는 장삿속이 읽힌다고 보일 수 있는 대목이다.  

과거에는 시사현안에 대해 곧바로 대응하는 텍스트를 읽을 수 있는 창구가 신문 정도 밖에는 없었다. 그런 시대의 신문은 자신의 주장만 늘어놓을 것이 아니라 그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으면 상대 입장의 논리까지도 정연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경향신문이 한때 조선일보 출신 논객 류근일의 칼럼 등을 지면에 받으며 논란을 일으켰던 상황은 그러한 ‘전통적인 신문의 문법’으로 복귀하려는 욕망에서 나온 일이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오늘날에도 그러한 일이 필요한지는 분명하지 않다. 오늘날 뉴스를 소비하는 독자들은 주로 인터넷에서 소비하기 때문에, 신문사가 소개하기 전에 입장이 다른 언론사의 뉴스들을 찾아다닌다. 특히 조중동의 독자들이 정치성향이나 연령의 특성상 주로 조중동만 본다면, 한겨레와 경향신문의 독자들은 이미 조중동의 논의들을 충분히 접하고 그에 염증을 내는 중이다. 

‘소통’도 좋지만 조선일보 사이트만 들어가면 볼 수 있는 류근일과 같은 전형적인 극우논객의 글을 굳이 경향신문 지면에서 봐야 하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진보언론이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마이너’의 입장에 있고 그 독자들이 ‘메이저’의 논리를 이미 알고 있다면 더욱이나 그렇다. 사실 뉴스소비의 창구가 온라인이 되기 이전에도 한겨레는 보수언론과 함께 읽는 일종의 ‘병독지’로 소비되었기 때문에 그 ‘전통적인 신문의 문법’에서 꽤나 자유로웠다. 

그러나 경향신문의 시도가 ‘전통적인 신문의 문법’으로 회귀하려는 보수성이라면 한겨레의 시도는 정치성향이나 입장과 무관하게 ‘글쓰기’ 자체를 평가하는 사교육에 영합하는 탈정치성이 될 수도 있다. 이는 ‘청소년’에 대한 강조에서만 이끌어낸 무리한 추론이 아니라, 양 신문사가 추천한 필자가 글쓰기 교육에 종사하는 이들이란 점에서 나온 우려이기도 하다. 

물론 이 사회에서 글쓰기 교사들의 역할은 소중하지만, 정치성향이 다른 양 신문사의 사설을 비교·분석하는 ‘중립지대’에 글쓰기 교사가 포진해 있는 상황은 부적절하다. 정말로 공론형성 심화나 진영논리 극복을 목적으로 했다면 양 신문사의 관성적인 ‘취재원 풀’을 넘어서는 각 분야에서 ‘열린 사고’를 가지고 있는 이들을 매번 선정하거나, 적어도 그런 시선을 대변할 수 있는 필자를 선정했어야 했다. 양 신문사가 선정한 필자가 그런 역할을 하기를 기대해야겠지만 대체로 교사들의 글쓰기는 대단히 조심스럽고 제약이 많은 것도 현실이다.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기는 어려운 실정에서 그들의 글쓰기는 '균형잡힌 견해가 요구된다'거나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류의 하나마나한 소리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사실 양 신문사의 ‘사설 속으로’ 기획 취지실명 기사에서는 ‘공론형성’이나 ‘진영논리 극복’이란 말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건강한 토론 문화를 뿌리내린다”는 말이나, “사설은 우리 사회 현안에 대한 신문사의 책임 있는 주장입니다. 세상을 보는 다른 시각을 지닌 두 신문사의 사설을 깊이 살피면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정보 홍수의 시대에 바르고 균형 잡힌 시각을 갖출 수 있게 될 것”이란 말은 그런 식으로 이해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만약 저 말들을 그저 ‘립서비스’로만 받아들이고 위와 같은 비판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이 기획은 그야말로 ‘청소년 글쓰기 교재’가 되어버린다. “사설은 우리 사회 현안에 대한 신문사의 책임 있는 주장”이란 말이 무색하게, 성향이 다른 두 신문사의 사설 교류가 공론형성의 문제와는 큰 관련이 없고 21세기 내내 진행된 ‘NIE(Newspaper In Education)’ 판촉전략과 관련이 있는 상업기획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렇게 접근할 때엔 한겨레 측의 ‘사업 파트너’로 중앙일보가 최적이었을 거라는 점이 단번에 납득이 가게 된다. 

실제로 한겨레 측은 미디어스 측의 확인취재 당시 “(기획 꼭지는) 교육면에 배치될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차라리 그랬다면 그 역할을 한정하기가 쉬웠을 테지만 ‘사설 속으로’의 포부는 그것을 넘어서니 문제다. 

한겨레 사정을 아는 한 관계자는 “한겨레 내부에서 끊임없이 반성적으로 나오는 논리가 있다. 우리는 너무 편향된 신문이고 중도층으로 세를 확장할 수 있는 논조와 불편부당함을 갖출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기획 역시 그러한 인식의 발현인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편향성을 극복하는 것은 모든 언론의 과제겠지만, 이 기획은 애초에 ‘공론’과는 상관없는 문제였던 것이 아닐까. 양 신문사에서 섭외된 4인의 필자들이 의외의 활약을 해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 20일자 중앙일보 1면 기사


한윤형 기자  |  a_hrima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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