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26일 일요일

“죽음의 송전선으로 삶을 밝힐 수는 없습니다”


이글은 경향신문 2013-05-25일자 기사 '“죽음의 송전선으로 삶을 밝힐 수는 없습니다”'를 퍼왔습니다.

· 밀양 송전탑 반대 시위 나선 인문학 연구공간 ‘수유+너머’ 학자들

침묵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분노, 열망을 나타내는 반어의 도구일 때가 있다. 25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 모인 10여명의 인문학 연구자들의 ‘침묵 시위’도 그랬다. 이들은 연구 공동체 수유너머R 회원들과 시민들로 “우리의 말문을 막는 야만을 막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인문학 연구자들이 야만이라고 여기는 일은 경남 밀양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곳 주민들은 25일 765㎸ 송전탑 공사를 막기 위해 한국전력공사와 엿새째 대치를 계속하고 있다. 인문학 연구자들은 침묵 시위에 앞서 ‘죽음의 송전선으로 삶을 밝힌 순 없습니다’라는 기자회견문을 냈다. “우리는 모든 속물적인 것에 똥물을 내던지며 바닥에 드러누운 노인들, 잘려나갈 나무를 부둥켜안고 엉엉 울고 있는 저 위대한 직관과 감성이 육중한 중장비들에 당장 깔려죽을 위험에 처했음을 알리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고 말했다. 


수유너머R회원과 시민들이 25일 오후 광화문 광장에서 침묵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들은 밀양송전탑 공사에 반대하던 고 이치우 할아버지(당시 74세)가 지난해 1월 밀양 보라마을에서 분신 자살 전까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다. 이들은 할아버지의 분신을 ‘제 몸을 태운 봉화’로 수신했다. 그 이후 최근까지 밀양 송전탑 반대 농성장을 간간히 찾아 연대의 자리를 가졌다.

지난 8년 동안 분신을 비롯해 여러 말문 막히는 일이 벌어졌다. 젊은 용역에게 끔찍한 욕설과 폭력을 당하면서도 그들의 끼니를 걱정하는 할머니·할아버지들의 모습, 낮에 온몸을 던져 공사를 막고는 밤에 손전등을 켜고 감자의 어린 싹이 숨을 쉬도록 구멍을 열어주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이들은 “(인문학자로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존귀한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밀양에서 한전은 ‘돈의 경제학’을 강조하고, 반대 주민들은 이 경제학을 거부하며 “그냥 가만히 살게 두라”고만 이야기한다. 공권력과 한전은 ‘정주’의 권리와 외침을 한푼이라도 더 받으려는 술수로 여기는 듯하다. 동일본 대지진 때, 한 당국자는 “한국이 원자력 강국으로 도약할 기회가 왔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들 연구자들은 이 당국자의 말을 거론하며, “이런 속물주의적 지향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을 밀양에서 봤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이제는 성장과 개발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돌볼 때라는 것, 밀양의 노인들이 빼앗기지 않기 위해 움켜쥐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임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수유너머R 노호규 연구원이 밀양 송전탑 농성장의 고통을 형상화한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그는 생애 첫 무용이자 퍼포먼스라고 했다

침묵 시위는 오후 5시 시작됐다. 이들은 입에 ‘X’ 마스크를 쓰고, ‘죽음의 송전선으로 삶을 밝힐 수 없다’는 플래카드, 농성장에 목줄을 걸고 저항하는 할아버지의 사진과 뭉크의 ‘절규’를 패러디한 ‘송전탑 out’ 포스터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밀양을 보자” “밀양을 듣자”는 호소는 이들의 입이 아니라 소형 앰프에서 흘러나왔다. 앰프 속 굴착기 굉음을 뚫고 할머니들의 “여기서 죽을 거예요”라는 외침이 터져나왔다. 

수유머너R 노호규 연구원은 ‘밀양의 고통’을 제 고통인양 몸짓으로 노래했다. 무용을 배운 적도, 공연한 적도 없는 노씨의 첫무대는 앰프 속의 할머니들의 절규에 스스럼없이 녹아들었다. 

인문학 연구자들은 각자의 목에 새끼줄을 매달았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절박학을 전하기 위해, 우리 목에 줄을 걸고 침묵하며 걸어가겠다”고 했다. 광화문에서 출발해 보신각을 거쳐 시청광장까지 걸어갔다. “우리의 말문을 막는 폭력에 항의하고, 우리의 말을 멈추고 그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라고 말하기 위해 침묵의 퍼포먼스를 한 것”이라고 했다. 

수유너머R 고병권 연구원은 “인문학이 인간이 가진 가능성과 존엄함을 밝히는 것이라면, 삶의 진지한 성찰인 밀양 주민들의 저항과 행동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날 침묵 시위에는 20개국(G20) 정상회의 홍보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래피티(낙서)했다는 이유로 검찰 수사를 받은 박정수 수유너머R 연구원도 참여했다. 


수유머너 R 고병권 연구원이 목줄을 건 채 농성장 현장에서 같은 목줄을 걸고 저항하던 할아버지 모습을 담은 사진을 들고 있다.

수유너머R 회원들이 광화문 침묵 시위에 이어 보신각-서울광장을 잇는 침묵의 행진을 시작하고 있다.


글·사진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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