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10일 월요일

[한도숙 칼럼]악수를 거부하는 손과 투박한 농부의 손


이글은 민중의소리 2012-12-09일자 기사 '[한도숙 칼럼]악수를 거부하는 손과 투박한 농부의 손'을 퍼왔습니다.

 
ⓒ사진공동취재단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가 7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 경동시장 앞 유세에서 연설을 마친 뒤 지지자들을 향해 악수를 하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다.

박근혜대통령후보가 덥석 손을 잡으려는 한 아주머니를 외면하며 손을 뒤로 감추는 사진이 화제가 됐다. 손잡기를 거절한 듯한 사진 때문에 새누리당은 고발을 하네 마네로 시끄러웠다. 사정이야 어쨌든 간에 후보들은 유권자의 손을 잡음으로써 교류와 소통 하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손잡음의 의미는 이미 여러 선거를 통해 한국사회의 한 의식으로 자리매김 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인류는 직립보행을 시작하면서 손을 자유로이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인류문명의 발전은 손을 써서 두뇌의 사고 영역을 넓혀 가능 했던 것이다.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것도 손으로부터 시작한다. 인간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을 위해 노동을 한다는 것이다. 이 노동행위에서 핵심이 손인 것이다. 

역사학자 신채호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손을 흥남의 고무공장노동자 김창숙의 화상 입은 손을 들었다. 김창숙은 고무공장 노동자로 일제의 노동착취에 저항해 투쟁한 노동투사였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섬섬옥수란 이름의 아름다운 손은 착취의 손일 뿐 삶을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그런 점에서 농부들의 손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손 중의 손일 것이다. 투박하고 주름 잡힌 거무튀튀한 농부의 손은 그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해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실체인 것이다. 시인 이진호는 ‘농사군의 명함’이라는 시로 농부의 손을 대변했다. 정치를 한답시고 농부의 머리 위에 있는 양 헷갈리는 사람들이 건네는 명함은 깔끔하지만 영악스럽다. 하지만 무덤덤하게 내미는 농부의 거친 손은 풍파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명함이라는 것이다. 

신의 손, 참다운 농부의 손이었던 나의 아버지

아버지는 참 가난했다. 마을에서도 굿은 일을 도맡아 하셨다. 그중에서도 구둘 놓는 일이 일품이라고 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구들장 놓는 일은 60년대 가난한 농촌의 일상사였다. 구들을 놓은 지 몇 년이 흐르면 쥐가 뚫기도 하고 내려앉기도 해 구들을 뜯어 다시 놓아야 했다. 만만치 않은 공력이 들어야 하는 일이다. 서투른 솜씨로 구들을 놓으면 불이 잘 들지 않아 불 때는 사람이 고역을 치러야 하기에 구들장 놓는 일은 신중을 기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구들을 놓는 일을 배운적도 없고 이론도 모르는 양반이 구들을 놓으면 불이 잘 들었단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이 구들을 놓으려면 꼭 당신을 부르고 일을 맡겼다했다. 

사람들의 떠도는 말로는 사람의 손에 기운이 있다고 한다.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음식을 만들어도 맛의 차이가 나는 것은 바로 손의 기운 때문이란다. 그런 기운이 아버지의 손엔 있었다고 나는 느낀다. 

올해는 들깨 농사가 대풍이었다. 따지고 보니 다른 밭작물 보다 소득이 괜찮은 작목이 들깨인 듯싶기도 하다. 게다가 웰빙인지 뭔지 오메가 쓰리가 많이 함유됐다고 들기름 소비가 늘어 여기저기 찾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작년에는 들깨 씨를 뿌렸는데 들깨 모종이 가물치 콧구멍인지 보이질 않았다. 씨가 서지 않은 것이다. 새가 까먹은 탓도 하고 쥐가 까먹은 탓도 했지만 그렇게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옆집에서 동냥하다시피 얻은 모종으로 들깨를 심었다. 거기서 아버지의 손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분명 아버지가 뿌렸으면 잘 났을 종자가 내가 뿌리니 나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씨를 잘 세우셨다. 특히 흩어뿌리기(?播)에는 거의 신의 수준이라 극찬 할만하다. 골뿌리기(點播)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흩어뿌리기는 씨앗의 크기나 그날의 바람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는다. 특히 시금치 씨나 상추 씨 같이 작고 가벼운 씨앗들은 모래에 석어 뿌리는데 까딱 잘못하면 모래만 뿌리게 된다. 손안에서 모래와 씨앗이 빠져나가는 숫자를 세어내듯이 감각으로 읽으며 팔을 휘저어 뿌린다. 물론 팔을 내젖는 횟수나 강도는 걸음걸이 속도와 함께 절묘한 조화를 갖추어야 베지도(密) 드물지도(蔬) 않은 맞춤한 밀도의 싹들이 나올 수 있다. 물론 좋은 땅과 흙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나 같은 불한당이 씨를 뿌리면 그렇게 곱고 어여쁜 싹이 나오질 않는다. 생명을 기르는 손이 아무렇게나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버지를 통해 배운 것이다.

ⓒ이승빈 기자 지난 9월 서울역광장에서 열린 농작물 피해보상촉구 전국농민대회에 참가한 농민이 벼를 쥐고 시름에 잠겨 있다.

요즘 귀농바람이 불고 있다. 정부는 자신들의 공적인양 부풀리고 있지만 귀농의 몇 가지 사회적 조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전후 베이비붐 세대의 정년이 귀농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본다. 또 자유로운 삶을 희구하는 사람들이 직장이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려는 분위기가 있다. 거기에 정말 농업에서 뭔가 블루오션을 발견하겠다고 덤비는 사람도 있다. 땅을 갈며 씨를 뿌리는 삶을 동경하는 사회, 자신의 손으로 생명을 가꾸는 보람을 느끼려는 사회로 이동하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어쨌든 이 사람들이 농촌에 내려가 흙을 만지며 살아가겠다고 나서는 것은 어쩌면 농촌을, 농업을 위해 다행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농촌살이가 그렇게 생각한 것만큼 성공적이지 못하다는데 문제가 있다. 유턴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기존 농촌공동체에 끼어들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이런저런 이유로 눈 밖에 나서 송사에 휘말리거나 논리적으론 말도 안 되는 일로 괴로운 일을 격기도 한다. 

내가 판단하는 가장 큰 이유가 그들의 손이 농부들과 다른데 있는 것으로 본다. 이웃에 누군가가 이사를 왔는데 도시에서 일하던 사람이란다. 인사를 온다고 왔는데 내미는 손이 거친 내손과 다르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 첨부터 불편하다. 하종오 시인의 시처럼 ‘피는 피끼리 벼는 벼끼리’의 감성이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다. 나는 농사꾼이요 하고 내민 손에 나는 그렇지 않다고 내민 손이 서로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막걸리를 나눌 수는 없지 않는가. 설령 입으로는 막걸리를 나누어 마실지언정 서로의 교류를 느끼는 최초의 신체였던 손이 가슴에 가져다주는 감정의 모습은 도시와 농촌만큼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다. 

대선 후보들, 농부의 손을 잡을 때 미안함을 느끼시라

한 세기 전 이 땅 아버지들은 누구나 신의 손일만큼 생명생산의 주인공들이었다. 세상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변하며 생명의 흙을 교감하는 농부의 손을 하잖게 생각하는 세상이 돼버린 것은 정치가들의 책임이다. 

대통령선거로 전국을 누비실 후보자들께 말씀드린다면 농부의 손을 잡을 때 미안함을 느끼라 전하고 싶다. 진정으로 농부의 손을 잡을 때 신의 손을 잡듯 경의를 손끝에 담아야 한다. 덥석 잡았다 그냥 놓는 손이 아니라 미안함을 가득 담아 농부의 깊은 가슴앓이를 느끼도록 말이다. 

나는 농부의 아들입네로 대통령이 된 사람들이 제 아버지의 손을 잘라버리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아버지의 손이 말하는 것을 채 이해하지도 못한 채 생명의 손에서 분노의 손을 만들어 농촌이 농업이 나락으로 굴러 떨어진 것이다. 

이번에 대통령은 누구보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손이, 생명의 손이, 신의손이 대접받는 정책을 펼 수 있는 대통령이었으면 좋겠다. 대통령의 손이 울 아버지의 손처럼 후덕하고 따듯한 손이 된다면 더 말할 나위 없겠지만 그렇게까지 바라는 것은 욕심일 것이다. 자신의 모든 진정을 담아 내미는 손이라야 투박한 삶의 손에서 신의 향기가 배어남을 느낄 수 있다. 신의 손을 경외심 가득한 공약으로 잡아주는 후보에게 투표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책임이라 생각하니까. 

ⓒ양지웅 기자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선후보가 지난 11월 충남 예산 삽교읍 예산추곡수매장에서 농민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한도숙 한국농정신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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