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7일 목요일

대중은 혁신을 꿈꾸었고 야권에게 혁신은 없었다


이글은 프레시안 2012-12-27일자 기사 '대중은 혁신을 꿈꾸었고 야권에게 혁신은 없었다'를 퍼왔습니다.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야권, 소득별 보편증세 내걸었어야"

선거는 끝났다. 늘 그렇듯이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 긴 시간의 흐름으로 보면 현 시점은 작은 점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이 작은 점의 집적과 누적이 역사의 모양새를 만든다. 역사에서 어떤 한 시점의 모습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어떤 한 가지 극적인 사건으로 역사적 사건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일정한 시대적 조건 속에서 참여하는 주체들의 실천이 응집돼 만들어진다. 악조건이지만 실천을 통해 진보를 일궈내기도 하고 호조건이지만 잘못된 실천으로 역사의 퇴보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번 대선도 예외일 수는 없다.

야권의 패배로 대선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한숨소리가 메아리친다. 심한 정신적 공황상태(멘붕)에 빠진 사람들이 많다. 경남 도지사 선거에 참여했던 한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왜 졌는지 모르겠다고 정신줄 놓은 사람처럼 읊조린다. 또 어떤 사람은 친목 모임에도 안 나오겠다고 한다. 너무 충격이 큰 탓이다. 이 글을 쓰면서 조그만 제조업체를운영하는 한 후배에게 전화를 해서 의견을 구했더니 "할 말이 없다. 생각이 없다. 제발 묻지 마라. 불편하다"고 했다.

지난 총선에서 졌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역사적 분기점이 될 만한 두 번의 큰 선거에서 연거푸 패배했으니 그 여파가 상상 이상으로 오랜 기간 지속될 것 같은 느낌이다.

대중은 혁신적 변화를 원했다

선거 패배의 원인을 두고 여러 가지 분석이 나오고 있다. 세대구성의 변화에 둔감했고 이에 대한 대책이 없었던 데서 원인을 찾는 이도 있고 언론 환경 악화와 지역주의, 민주당의 '친노세력' 혹은 박정희 향수에서 찾는 이도 있다. '기울어진 운동장론'(새누리당은 기울어진 축구장의 위쪽에 있고 야권은 아래쪽에 있다는 논리)을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 분석 모두 일정 부분 맞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분석에 머문다면 앞으로 계속 패배는 예정되어 있다는 결론에 이르거나 우경화하는 길 말고 다른 길은 없다는 처방 밖에 나오지 않을 듯하다.

나는 야권 패배의 근본 원인은 다른 데 있다고 본다. 야권은 대중의 변화 욕구를 제대로 받아 안지 못해 패배했다. IMF 이후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린 처절한 경험을 한 대중들은 혁명에 준하는 변화를 원했다. 이 변화의 열망은 안철수 현상으로 나타났다. 일종의 메시아적 대망론으로 표현된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 대중은 위기 속에서 살고 있다. 900만 명에 이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이 추운 겨울에 고공농성을 해도 귀담아 듣는 위정자가 없는 해고 노동자들, 중증질환에 병원비가 없어 치료와 삶을 포기하거나 가계가 무너진 사람들, 일자리가 없어 앞길이 막막한 청년과 노동자들, 등록금이 없어 학업을 접거나 빚을 잔뜩 진 사람들, 제주해군기지와 밀양송전탑 건설 강행처럼 국책사업 한답시고 마을을 파괴하는 권력과 자본에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 늘 불안해하는 하우스 푸어들, 결혼까지 포기하는 삼포세대들, 수명 다한 원전 가동으로 공포에 떠는 사람들…. 양극화와 빈부 격차, 자본의 독재로 고통 받는 사람들은 단순히 '새 정치'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민주당도 시민사회도 심지어 안철수(이하 대선후보들 존칭 생략) 자신도 안철수 현상으로 표현되는 대중의 사회 변화에 대한 욕구를 받아 안는 데 둔감했다. 그래서 선거에 패했다. 이번 패배는 선거패배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앞으로 상당기간 동안 민주와 진보 세력은 대중의 열망을 투영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기대한 만큼 실망과 분노가 크기 때문이다. 대중은 모든 걸 다 용서해도 게으름과 무능만큼은 용서하지 않는다.

 
ⓒ연합뉴스

'안철수 현상', 열매를 맺지 못하다!

안철수 현상은 '새 정치'를 강조하지만 새 정치라는 말은 애매하고 대중의 요구를 담기에는 협소한 개념이다. 대중이 안철수를 불러낸 것은 기성 정치세력에서 대안을 찾지 못한 데서 출발한다. 대중은 단순히 정치 제도 개혁을 몇 가지 해달라고 안철수를 불러낸 것이 아니다. 정치제도 변화는 수단일 뿐이다. 대중이 요구한 것은 무너진 삶을 다시 일으켜 세워달라는 거였고 일자리를 잃거나 자영업하다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사회안전망을 갖춰달라는 것이었다.

안철수는 적어도 처음에는 흐름을 제대로 읽어낸 듯하다. (안철수의 생각)에서 정의로운 복지국가를 외치고 '능력별 보편증세'를 주장했다. 대중의 요구에 부응한 응답이었다. 하지만 이후 캠프가 모양을 띠면서부터 복지국가라는 말은 점점 희미해지고 보편증세는커녕 부자증세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안철수가 말을 바꾼 것이다. 무엇이 그를 뒷걸음질 치게 만들었는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이른바 진심캠프에 참여한 일부 경제학자들(장하성, 홍종호 교수 등)의 강한 목소리와 함께 보편증세 문제는 먼 미래의 일로 되고 말았다. 증세를 하더라도 맨 마지막에 고려할 수 있다는 태도인데 증세에 관한 한 박근혜 수준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이 말은 곧 현실의 안철수는 안철수 현상을 담을 수 있는 인물에서 벗어나고 있었다는 걸 뜻한다.

보편복지는 언급을 회피하고 증세는 철회하면서 안철수가 내놓은 것이 정치쇄신안이다. 국회의원 정수 축소, 정당보조금과 중앙당 폐지 또는 축소, 국회의원 당론포기, 지자체 선거 출마자 당적 금지, 청와대 이전 등을 포함하고 있지만 획기적으로 정치를 발전시킬 안은 사실상 없다. 선거공영제 약화는 퇴행적이기까지 하다. 안철수가 역사적 안목을 가졌다면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전면 도입과 결선투표제 같은 개혁안을 들고 나왔을 것이다.

문제는 삶이다. 경제적인 삶의 토대가 무너지는 데 뜬구름 잡는 식의 정치개혁으로 초점을 옮겨 버리고 나니까 삶의 변화를 꿈꿨던 대중들의 절박한 요구는 묻히게 되었다. 그 결과 안철수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낮아졌고 단일화 작업을 현명한 방식으로 진행하지 못한 문제까지 겹친 안철수는 결국 사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자기 반성에 불철저한 민주당, 친노세력, 문재인

지난 총선 때 박근혜 진영은 민주당을 줄곧 거짓말 하는 세력, 민생을 파탄 낸 세력이라는 프레임으로 야권을 압박했고 그것의 성공으로 과반이 넘는 의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주로 한미 FTA와 제주해군기지가 단골 소재였는데 원죄를 가지고 있고 철저한 반성을 하지 않은 민주당은 이에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없었다.

이번 대선도 친노세력이 주도하고 그 세력 안에서 후보를 내면 박근혜 진영의 좋은 공격 대상이 될 것은 너무나 분명한 선거판이었다. 그럼에도 친노진영은 친노의 상징적 인물, 문재인을 야권 전체의 대선 후보로 내보내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문재인 아닌 다른 대안을 모색하지 못한 친노세력은 두고두고 대선 패배의 책임론에 시달릴 가능성이 크다. 물론 정치세력이 권력의지를 갖는 걸 탓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전체 판을 바라보고 전략 전술을 상황에 맞게 정확하게 구사하는 건 오로지 그 정치세력의 능력 문제다.

문재인을 후보로 하면 절대 안 된다는 걸 말하려는 건 아니다. 매우 힘든 싸움이 된다는 걸 말하는 것이다. 그런 만큼 이기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필요했다. 문재인을 후보로 미는 경우는 문재인의 입을 빌어 지난 노무현 정부 때 잘못에 대해 가차 없는 반성과 참회가 뒤따랐어야 한다. 문재인이 반성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왜 잘못했는지 말하는 수준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어물쩍 넘어가는 수준이었다. 한미 FTA만 하더라도 노무현 정부의 것과 이명박 정부의 것을 구분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양극화와 비정규직 양산, 정리해고, 노동탄압에 대해서도 철저한 자기비판이 뒤따랐어야 한다. 살인적인 등록금 인상과 제주해군기지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진정성을 보여주는 자기비판 없이 이명박 정권을 비판한다는 것은 역공을 받기 쉬운 조건 속에 스스로의 몸을 내맡기는 것과 같다.

단일화 문제는 풀기 힘든 난제였다. 아름다운 모습의 단일화를 하지 않으면 역효과가 금방 나타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다. 단일화 과정이 어떤 모양새를 취했는지는 모두가 아는 그대로다. 여기서 꼭 짚어 봐야 할 점은 단일화 룰을 안철수 진영에 일임한다고 했던 문재인이 양자 토론에서 얼굴 붉혀 가며 상당한 시간을 쓰면서 단일화 방식을 거듭 제기하는 모습은 좀스러운 모습으로 보였다. 넉넉한 '큰 형님론'이 무너지는 순간이었고 안철수도 문재인도 표가 뚝뚝 떨어지는 과정이었다.

안철수와 마찬가지로 문재인도 대중의 못살겠다는 외침과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라는 요구를 오롯이 받아 안을 때 대선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안철수는 '안철수 현상'을 정치개혁 요구에 가두었다. 문재인은 복지국가 5개년 계획을 말하고 의미 있는 공약을 많이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약을 뒷받침할 재원대책이 취약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건 대중의 변화의 열망을 표현하긴 했지만 재정대책이 부실함으로써 중도 성향의 시민들은 물론 지지층도 공약 실현에 의문을 강하게 제기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문재인이 티비(TV)에서 연설할 때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준다고 할 때 믿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문재인이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복지국가 정책 전면 도입과 소득별 보편 증세를 걸고 재원대책이 허접한 박근혜 세력과 전면전을 벌였다면 박근혜는 매우 버거운 싸움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1세기에 두세 번 올까 말까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아 복지와 민생을 전면에 걸고 박근혜와 전면전을 벌여야 함에도 민주당과 문재인은 선거 기간 동안 민생과 복지를 의제로 싸움다운 싸움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했다. 기조마저 줄곧 흔들리는 모습까지 노출시켰다. 처음엔 '유신 대 반유신' 구도로 가다가 갑자기 '박근혜의 이명박 정부 안주인론'으로 바꾸고 나중에는 '대통합노선'으로 바꾸었다. 이는 돌이킬 수 없는 범실이다. 선거와 전투에서 일관성 상실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또 하나 더 지적할 것은 선거에서 밀리는 쪽은 대중을 믿고 자기만의 색깔을 드러내야 하는데 박근혜 세력의 대통합론을 따라 나선 건 패착 중에 패착이었다.

엔엘엘 (NLL) 관련 문제에 있어서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두고두고 곱씹어 볼 문제다. 평화 의제를 전면화하면서 상황을 주도할 길이 없었던 게 아니다. 그러나 문재인은 수세적인 태도를 보였고 NLL에 관한한 박근혜 입장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입장을 드러내는 데 치중했다.

당사자 대중과 함께 하라

앞에서 말한 나의 평가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중도층을 잡아야 할 마당에 복지의 전면화를 내걸면 더욱 중도층을 멀어지게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세대에 관계없이 야권 성향의 시민들이 문재인의 복지 대책이 박근혜와 분명한 차별성이 있고 팍팍한 삶을 변화시키고 삶의 질 향상과 행복과 직결된다는 믿음을 가졌다면 이웃과 친척, 가족과 직장 동료, 친목모임 회원들에게 소신을 가지고 설득할 수 있었다. 그런 바탕 위에 중도층 잡기에 나설 때 원하는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다.

지난 서울시장 선거를 치르며 보편복지가 대세를 이루었고 야권의 핵심가치였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는 민생을 내세우는 박근혜가 복지를 더 잘하고 약속도 잘 지킬 것 같은 분위기가 지배하는 선거 구도에 빠지고 말았다. 박근혜가 민생을 내세우고 하우스푸어 대책, 임대주택, 신용불량자 부채탕감, 무상보육 전면 시행, 반값등록금 등을 공약하며 잽과 훅, 어퍼컷을 계속 날리는 사이 야권은 단일화를 내세우며 시간을 보내다 아름답지 못한 마무리를 하게 되었다. 이명박 실정과 대통합만 이야기하며 세월을 보내버렸다. 참으로 한심스럽고 통탄할 선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 같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민주당의 전면적인 변화와 혁신이 있어야 하고 결선투표제, 독일식 정당명부제, 노사 공동결정제, 소득별 보편증세 도입과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정당건설에 모든 노력을 쏟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역과 부문의 당사자 조직 건설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들 당사자 조직들이 현안 논의에도 참여하고 복지 정책에도 개입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낼 때 대한민국은 비로소 혁신적 변화의 길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대중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시민세력도 대중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대중과 동고동락하며 함께 손잡고 나아가는 전면적인 자기 혁신이 있어야만 대중 주체의 복지국가 건설이 가능하고 역사적 의미도 확보할 수 있다.


 /최창우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공공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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