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8일 금요일

다섯 명의 죽음으로 막 올린 ‘박근혜 대통령’ 시대


이글은 미디어스 2012-12-27일자 기사 '다섯 명의 죽음으로 막 올린 ‘박근혜 대통령’ 시대'를 퍼왔습니다.
죽음을 애도하고 산 사람의 세상을 일구는 사람들

“쌍용차 청문회가 이루어지고 사람들이 방문하면서 23명 죽음의 행렬이 억지로 막혀 있지만, 희망이 없다고 판단되는 순간에는 예기치 않은 사건이 많이 일어날 겁니다.”
지난 10월 24일, 덕수궁 대한문 앞 쌍용자동차 해고자 분향소를 찾은 무소속 안철수 전 후보에게 박병우 민주노총 대외협력국장이 건넨 말이다. 당시 대선 후보였던 문재인·박근혜·안철수 3자회동을 통해 죽음의 행렬을 막아 달라는 취지에서 나온 호소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이 벼랑 끝에 내몰려 있음을 다급하게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렁그렁 고이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쥐어짜듯 꺼낸 말에서 초조함이 느껴졌다.

▲ 27일 오후 3시부터 한진중공업 최강서 열사추모 영남 노동자 대회가 부산역 광장에서 열렸다. 집회 측 추산 1500여명의 참가자들은 집회를 마친 후 영도구 한진중공업까지 거리 행진을 벌였다.ⓒ오마이뉴스

12월 27일.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가 대통령 당선자가 된 후 여드레라는 시간이 흘렀다. ‘희망이 없다고 판단되는 순간’의 도래를 증명하듯 그간 다섯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한진중공업 노동자 고 최강서 씨,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조 이운남 조직부장, 민권연대 활동가 최경남 씨, 전국대학노조 한국외대지부 이호일 지부장과 이기연 수석부지부장. 박근혜 대통령의 시대는 이 다섯 명의 죽음과 함께 막을 열었다.
다섯 명의 죽음이 또 다른 죽음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박근혜 당선자의 인수위에 직접 돌격하며 노동자들을 살려달라고 호소했다. 어떤 사람들은 대한문 앞에서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온 몸과 마음으로 동지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무엇보다도 절실한 것은 연대였다.

노동법률가단체 “박근혜, 노조법 개정하고 반(反)노조 정책 폐기하라”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와 새누리당에 연이은 죽음의 행렬을 막아 달라고 요구한 이들이 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 노동인권실현을 위한 노무사모임, 민주주의법학연구회,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법률위원회, 민주노총·금속노조·공공운수노조 법률원 등 노동법률가단체들은 27일 오후 삼청동 금융연수원을 찾아 기자회견을 열었다. 금융연수원은 박근혜 당선자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꾸려진 장소이다.
공교롭게도 기자회견이 박 당선자의 인수위 인선 발표와 맞물리면서, 기자회견 시작 시간을 불과 10분 남겨 놓고도 기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기자회견인데 기자가 없네……”라며 다소 낙담하던 참가자들의 얼굴은, 그러나 현장에 하나 둘 기자들이 도착하면서 활짝 개었다. 이내 번쩍이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와 함께 기자회견이 시작되었다.

▲ 노동법률가단체들은 27일 오후 삼청동 금융연수원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근혜 당선자는 노조법 개정하고 반(反)노조 정책을 폐기하라”고 요구했다.ⓒ미디어스

기자회견문을 낭독한 민변 노동위원회 이선경 변호사의 목소리는 고 최강서 씨가 죽음을 맞은 대목에 이르자 약간 더듬거렸다. 울음을 참느라 꽉 멘 목소리를 가다듬은 이선경 변호사는 다시금 “박근혜 당선자는 선거 기간 동안 입버릇처럼 ‘국민 행복’ 시대를 열겠다고 했는데 그 국민에 ‘노동자’가 배제되는 것은 아니길 바란다”며 “지금이라도 현저히 부족한 자신의 노동정책을 개선하고 올바른 견해를 가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변호사는 이어 “그러한 의지를 가늠케 하는 첫 시도로서 쟁의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를 제안하는 노조법 개정과 이명박 정부에서 계속된 반(反)노조 정책의 전환을 명시적으로 밝힐 것”을 촉구했다.

‘서울 중구 태평로2가 58 대한문 앞 쌍용차 분향소’

▲ 대한문 쌍용차 분향소 천막 앞에는 한진중공업 노동자 고 최강서 씨, 현대중공업 이운남 조직부장을 추모하기 위한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미디어스

기자회견이 끝난 뒤, 곧장 마을버스를 타고 덕수궁 대한문 앞을 찾았다. 두세 명 남짓 되는 사람들이 분향소를 지키고 있었다. 찬바람을 맞아 시든 국화꽃 다발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19일 이후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놓인 꽃들이었다.
덕수궁 대한문 앞 쌍용차 분향소 ‘지킴이’ 역할을 맡았다는 쌍용차 노조 조합원 윤충렬 씨는 “항상 여기서 조문을 받는다”며 “쌍용차 문제를 궁금해 하며 오신 분들도 많아서 그에 관해 설명을 드려야 한다”고 설명했다.
“지금도 사람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그만큼 (쌍용차 문제에 대해) 모르는 분들이 많다는 것이죠. 분향소에 오셔서 ‘이제 알았다’, ‘늦게 와서 미안하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쌍용차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대선 후보 토론회에도 나왔는데 모르는 분들이 아직도 계세요.”

▲ 대한문 앞 쌍용차 분향소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쌍용차 문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찾아온다.ⓒ미디어스

윤 씨의 역할은 잠시 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남녀 한 쌍이 찾아와 천막 안쪽을 기웃거리자, 윤 씨는 바로 “들어오세요!”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이 천막 안쪽에 들어오기를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자 직접 밖으로 나갔다. 방명록과 모금함이 올려진 탁자를 잠시 살피던 여성은 무엇인가를 적기 시작했다.
대선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던 시절,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무소속 안철수 후보도 분향소에 한 번씩 다녀갔다. 박근혜 당선자만이 대한문 앞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일터로 돌아가지 못하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고충에 대해서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박 당선자에게 노동 문제를 해결할 의지나 비전이 없다고 여겨지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명박 정권 5년간 쌍용자동차 분향소는 한진중공업 희망버스와 함께 노동 이슈의 첨병으로 떠올랐지만, 박 당선자는 두 현장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구체적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윤 씨는 비관보다는 낙관을 통해 마음을 다잡으려는 듯했다. “그래도 새누리당에서 쌍용자동차 국정조사를 실시하겠다고 약속했으니 믿어야 한다”며 윤 씨는 옅게 웃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공약은 공약이고 지금은 지금’이라고 말했는데, 이제는 그렇게는 못할 것 같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 천막에 머무른 시간은 불과 3~40분 남짓. 그동안 ‘서울 중구 태평로2가 58 대한문 앞 쌍용차 분향소’ 앞으로 보내는 택배가 두 번이나 왔다.ⓒ미디어스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천막 문이 불쑥 들렸다. “택배 왔습니다!” 깜짝 놀라 분향소에도 주소가 있느냐고 묻자, 윤 씨는 “주소가 생긴 지는 오래되었다”고 답했다.
천막 안에는 주소란에 ‘서울 중구 태평로2가 58 대한문 앞 쌍용차 분향소’라고 적힌 큰 택배 상자가 놓여 있었다. 처음에는 분향소의 위치를 몰라 헤매던 택배 노동자들도 이제는 곧잘 택배를 던져 놓고 사라진다고 한다.
“법관들이 ‘관례적인 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여기에도 사람이 사는 ‘농성촌’이니까 주소가 생기는 것이죠. 여러 가지를 해내고 있습니다. 대한문 앞에 텐트를 치고 버텨낸 것도 쌍용차 노동자들이 처음이고, 이걸 함으로써 많은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활기차게 이어지던 윤 씨의 말은 걱정이 덧붙여지면서 차츰 무겁게 가라앉았다.
“잘 되어야 할 텐데, 잘 안 되었을 때의 절망감이 걱정입니다. 그래서 세 분이 철탑에 오르셨어요. 어떻게든 끝내야 한다는 마음으로요. 2009년처럼 또 패배감을 주면 우리는 역사에 죄를 짓는 거예요.”
천막 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유례없는 강추위 속에서 30m 높이의 철탑에 매달려 있을 한상균 전 지부장, 문기주 정비지회장, 복기성 비정규직지회 수석부지회장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생계를 이어가기 힘들고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동지들을 안타깝게 지켜볼 수밖에 없을 다른 조합원들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함께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쌍용차 노동자들을 어떻게 역사의 죄인으로 치부할 수 있겠느냐고 섣불리 위로할 수도 없었다.

▲ 분향소 천막 앞에는 한상균 전 지부장, 문기주 정비지회장, 복기성 비정규직지회 수석부지회장의 모습과, 이들이 오른 송전탑의 모습을 재현한 모형이 설치되어 있다.ⓒ미디어스

언론이 쌍용차 노동자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물으니, 윤 씨는 몇 번이고 ‘진실을 알려달라’고 강조했다.
“사실대로만 알리면 됩니다. 더 이상 우리 이야기를 미화해달라고 하지 않아요. 미화했다는 게 나중에 알려지면 더 나빠지거든요. 오직 진실만 알리면 됩니다. 정확한 내용만. 우리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사측과 자본의 내용도 같이 써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야 읽는 사람들이 정확히 판단할 수 있을 겁니다.”
이윽고 다른 조합원들이 천막에 들어오면서 안쪽의 분위기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다른 투쟁사업장에 보낼 핫팩을 포장해야 한다며 활짝 웃는 조합원들을 방해하기 민망해 조용히 천막을 빠져나왔다. 시청 앞 광장 옆에 작은 둥지를 튼 쌍용차 조합원들은 우직하고 꿋꿋하게 자신들의 자리에서 연대를 계속하고 있었다.

▲ 바삐 길을 가는 와중에도 분향소 앞에 잠시 멈추어 서명지에 이름을 올리는 행인들이 더러 있었다.ⓒ미디어스

또, 얼굴을 할퀴는 겨울바람을 맞으며 바삐 제 갈 길을 가는 사람들 중에서도 더러 분향소를 돌아보며 연대의 손길을 내밀 줄 아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를 사들고 다시 길을 떠나거나, 서명지에 이름을 올렸다. 잠시 멈추어 서서 진지한 얼굴로 현수막에 적힌 내용을 읽는 사람도 있었다.
야권의 역량을 있는 대로 끌어 모은 선거에 패배한 상황에서 모두가 ‘멘붕’을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라는 낯선 9글자에도 익숙해져야만 한다. 선거 결과 자체에 집착하며 재검표 요구를 하기보다는,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을 다시금 일구어나갈 때가 되었다. 투쟁사업장에 보여 주었던 관심이 선거가 끝나고 반짝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연대로써 증명하는 것이 그 첫 단추가 될 것이다.

▲ 서울 중구 태평로2가 58 대한문 앞 쌍용차 분향소. 이 곳에는 ‘터전을 일구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연대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미디어스

윤다정 기자  |  songbird@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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