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9일 토요일

장발장의 시대가 따로 없다


이글은 프레스바이플 2012-12-28일자 기사 '장발장의 시대가 따로 없다'를 퍼왔습니다.
사법제도의 근본적 개혁이 필요하다

헌법재판소가 직무를 포기하고 보신을 위해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법으로 정해진 선고기일을 묵살할 때부터 드러났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선고를 내린다고 할 때부터 위헌 결정을 기대한다는 것은 이미 어불성설이었다. 그리하여 곽노현이 제기한 세 가지 헌법소원은 일단 기각되었다.

우선 판결의 내용을 잠시 들여다본다. 곽노현은 공직선거법 제232조 1항 2호의 조항에서 “후보자를 사퇴한 데 대한 대가를 목적으로”라는 문구가 지나치게 불명확하므로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나며, 과잉금지의 원칙에 위배되므로 헌법에 위반된다는 소원을 제기했다. 금전을 제공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제공하는 시기가 언제인지, 후보 사퇴 당시에 금전지급 합의 또는 이와 관련된 유인행위가 있었는지를 불문하여 처벌하고, 가벌성 없는 정치연합에 입각한 선거비용 보전행위까지 처벌대상으로 삼고 있어 규제 범위가 필요 이상으로 광범위하기 때문에, 정치적 표현의 자유와 일반적 행동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므로 과잉금지 원칙에 위배된다는 호소였다.

헌법재판소의 다수 의견은 단순히 “대가”라는 말의 뜻이 한국어 사전에 나와 있고, 그 뜻을 누구나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에 이 조항이 불명확하지 않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는 문제의 핵심을 완전히 회피한 셈과 같다. 곽노현이 “불명확하다”고 호소한 사유는 사전에 매수하기로 묵계가 있었다면 같은 법 1호로 기소할 수가 있는데, 여기에 더해 2호를 정한 이유가 불명확하며, 따라서 2호가 겨냥하는 범죄의 종류가 어떤 것인지 불명확하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재판의 1심과 2심과 대법원은 모두 민주적 선거의 “공정성과 염결성”이라는 공익을 위해서 후보 매수 행위는 엄단할 필요가 있다고 고상한 명분을 내걸었다. 헌법재판소도 마찬가지로 선거의 “공정성과 염결성”이라는 문구를 실컷 착취하고 있다. 그러나 선거의 공정성과 염결성을 위해서 후보 매수를 처벌하기로 하면 1호의 조항만으로 충분하고 남는다. 즉, 선거 전에 사퇴의 대가로 금전을 제공했거나, 사퇴의 대가를 지불하기로 약속하고나서 선거 후에 금전을 지급하는 행위는 모두 1호로 처벌이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2호의 조문이 왜 필요한지가 불명확한 것이다. 이것이 불명확하기 때문에 검찰이나 재판부가 이현령비현령 식으로 법을 적용할 여지를 열어주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과잉금지의 원칙이 원천적으로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헌법재판관 중에 3명은 바로 이 때문에 다수 의견에 반대했다. 이 2호의 조항이 목적범을 규정하고 있는지에 관해 두 차례의 하급심과 대법원의 의견이 이미 달랐다. 소수 의견에서는 이 사실을 적시하면서, 이와 같은 혼란이 불명확한 법조문 때문임을 적확하게 인지했다. 

아울러 정치연합 내지 선거연대를 일방적으로 위축시켜서 “오히려 음성적인 금품수수행위를 초래하여 또 다른 의미에서 선거의 공정이나 자유선거의 원칙을 몰각시킬 수도 있음”을 지적했다. 그렇기 때문에 위헌으로 판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재판관 가운데 5명은 이 모든 문제제기를 단지 묵살하고, 한국어 사전에 “대가”라는 단어의 뜻이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큼 분명하다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핑계만으로 합헌 판정을 내리고 말았다.

이 재판에서 대한민국의 재판관들은 완악한 말장난으로 이치를 무지르는 작태를 여러 번 보였는데, 모두가 핵심 쟁점을 회피하고 엉뚱한 얘기를 갖다 붙인다는 공통점이 있다. 1심과 2심의 재판관들은 사전에 어떤 묵계도 없었음을 확인하고서도 곽노현이 “대가성을 인식하고” 돈을 건넸다는 억지를 부렸다. 박명기의 오해가 풀린 이후 강경선이 그야말로 신앙심에 따른 선의에서 곽노현에게 부조의 의무를 강권해서 돈이 제공되었음을 확인하고서도, 그 돈이 사퇴의 대가였다고 우겨댄 것이다. 대법원은 이 조항이 목적범을 규정하고 있다고 확인해 놓고서도, 목적범의 규정이 아니라고 해석한 하급심을 파기하지 않고 하급심 판사들의 “대가성” 주장을 승인했다. 그래놓고는 민망했는지, 정작 긴급부조를 강권한 강경선은 “대가성의 인식”이 없었으므로 무죄라고 판시했다. 그리고 헌법재판소는 이와 같은 얼렁뚱땅 판결의 전제이자 구실이 된 이 법조항이 사전에 나온 단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명확하다고 판결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법관 가운데 다수가 법을 권력의 도구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법관의 의무가 법을 수호하여 권력의 남용을 제어하는 데 있다고 보지 못하고, 그저 월급쟁이로 직위를 유지하는 사익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법관이 이러는 것은 아니다. 헌법재판관 중 반대의견을 낸 3명과 더불어, 대법관 중에도 양심과 이치의 목소리를 내면에서 듣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현직 법관들 그리고 장차 법관이 될 법학도 가운데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에서 네 번의 재판부들이 노정한 비겁한 회피를 바라보면서 깊은 모욕감을 느꼈을 것이다.

현재 헌법재판소장을 맡고 있는 이강국은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을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제안한 적이 있다. 불과 두 달 전, 11월 5일에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관련기사 ☞, “이강국, ‘헌재재판관 모두 국회서 뽑아야'"). 새누리당이 다수인 현실을 생각하면, 국회에서 선출하더라도 5대3의 지형이 3대5로 역전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개헌을 통해 헌법재판관만이 아니라 대법관도 모두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해야 한다고 믿으며, 이 칼럼에서 그렇게 주장한 적도 있다 (관련기사 ☞, “2030년 개헌을 준비하자”). 이번에 다수의견에 참여한 이강국이 특강에서 주장한 발언과 이번 판결을 어떻게 연결시킬지 궁금하다. 어쨌든 개헌을 향한 그의 입장만은 쉽게 포기하지 말기를 바란다.

개인적으로 곽노현과 그 가족에게 참혹할 정도로 송구하다. 여론을 움직일 만한 힘도 없는 주제에 사퇴하지 말고 끝까지 싸우라고 권유한 것이 무책임하지 않았는지 자책도 엄습한다. 그러나 내가 그의 입장이었다고 해도, 언론과 검찰의 협박 때문에 사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퇴하는 순간, 곤경에 처한 사람을 선의로 도운 사람이 교육감 자리를 위해 후보를 매수한 사람으로 둔갑해 버리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자기 살을 베어 선의로 이웃을 도운 사람에게 어처구니없는 꼬투리를 걸어 박해를 가하는 사회이다. 곽노현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정의로운 법의 보호는커녕 권력의 주구 노릇을 하는 법 때문에 고초를 겪고 있다. 유권자들에 의해 선출된 교육감마저 권력의 올가미에 걸릴 수 있다는 점을 곽노현은 몸소 보여줌으로써, 이 사회의 적나라한 실상을 드러내었다. 자베르와 장발장의 시대가 따로 없는 것이다. 나처럼 그의 신앙심에 감복한 사람이라면 모두 대오각성하여, 자베르 같은 겁쟁이들이 법의 이름을 깔고 앉아서 저지르는 불의를 고치기 위해 영혼과 육신을 바쳐야 한다.


박동천(전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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