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7일 목요일

‘종편 떼창’ 수준의 언론으로 방치할 것인가


이글은 미디어스 2012-12-26일자 기사 '‘종편 떼창’ 수준의 언론으로 방치할 것인가'를 퍼왔습니다.
[한줌의 미디어렌즈] ‘52대48’ 대선과 ‘언론으로부터의 자유’

대선 다음날 꼬박 하루를 ‘은둔형 외톨이’처럼 보낼 때였다. TV를 켜놓고 이리저리 채널 돌리며 ‘보도’를 피해가는 와중에 무슨 종편 하나가 잠시 걸렸다. 다음 채널로 넘어가는 2초 안팎의 시간동안 눈에 박힌 화면이 선명했다. 또 무슨 점술인을 불러낸 모양이었다. 진행자가 “이런 결과가 나올지 예견했나요?”라고 물어보던 참이었다. 참 가지가지 한다. 덕분에 대선이 아닌, 언론을 생각하게 됐다. 이전 자료를 뒤적이다가 2007년 2월 2일자 한겨레신문에 실린 칼럼을 다시 봤다. 당시 이윤재 코레이 대표가 쓴 칼럼의 한 대목은 이렇다.
이 시대, 언론의 자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언론권력의 상대화 곧, 언론의 보도 내용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고 믿는 사회적 상상력을 갖는, ‘언론으로부터의 자유’일 것이다.

그들이 만든 세상에 규정 당하지 않으려면


선거를 앞두고 미디어스에 (대선, 그들이 보여주지 않는 것을 보라)는 칼럼을 써서만은 아니었다. ‘언론권력의 상대화’, ‘언론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관점이 새삼스러웠다. 언론을 접하는 사람들, 수용자 혹은 소비자 입장을 떠올린 건 그래서였다.
언론진흥재단이 언론재단 시절부터 해왔던 조사 가운데 언론수용자 의식조사가 있다. 수치가 고스란히 실체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1993년부터 시작한 이 조사에서 신문의 가구 구독률은 지속적이고 가파르게 하락했다. 1996년 70%에 달했던 가구 구독률은 2000년 59.8%에서 2004년 절반 이하인 48.3%로 떨어졌다. 이어 40.0%(2006년), 36.8%(2008년), 29.0%(2010년)로 내려가더니만 지난해인 2011년에는 24.8%로, 20%대에 ‘안착’했다. 1996년에 비해 15년 만에 1/3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다. 2011년 조사에 따르면 그 와중에 50대(35.3%)와 40대(34.3%)의 구독률이 가장 높은 게 눈에 띈다.
물론 신문기사를 다른 경로를 통해 보는 경우가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2011년 조사에서 ‘지난 1주일간 신문기사를 본 경로’를 묻는 질문에 ‘PC를 통한 인터넷’이 51.5%로 가장 많았고 ‘종이신문’이 44.6%로 뒤를 이었다(중복응답). 허나, 아예 본 적이 없다는 응답도 23.5%에 달했다.

신문과 방송, 신뢰도 추락과 상승의 양면

‘콘크리트 구독층’이 있어서 신뢰도는 흔들림이 없을까. 이 또한 계속 떨어진다. 해당 조사에는 ‘신문, TV, 잡지, 라디오, 인터넷 등 5개 매체가 동시 보도했을 경우 어떤 매체의 보도내용을 가장 신뢰하는가’라는 문항이 있다. 신뢰도는 2008년 60.7%, 2010년 75.4%, 2011년 72.1%를 기록한 TV가 가장 높다. 신문은 16.0%(2008년), 13.1%(2010년), 11.8%(2011년)로 TV보다 한참 떨어진다. 같은 기간 20.0%(2008년), 10.8%(2010년), 13.8%(2011년)인 인터넷보다 신뢰도가 낮다. 추이로 보자면 종편이란 변수는 반영되지 않았겠으나 방송은 나름 상승세이고 인터넷, 특히 신문은 완연한 하락세다.
네 가구 중에 한집 꼴로 구독하는 신문, 그나마 신뢰하는 사람은 열 중 한명 꼴인 신문과 MB정부 하에서도 여전히 70% 넘는 신뢰도를 기록하는 방송. 조사결과를 따르자면 그렇다. 방송은 추락하는 신문으로부터 반사이익을 얻었다고 해석해야 할까.
서두로 돌아가자면, 대선이 끝났다. 그들이 이겼다. 언론도 그들 쪽이 이겼다. 언론까지 선거를 통해 승부를 가르는 상황은 분명 비정상적이지만 공개지지 표명 없이 노골적인 편들기로 선거보도가 점철된 것 또한 오래된 현실이다. 신문의 구독률·신뢰도 추락을 안타깝게 여길 생각은 없다. 문제는 ‘구독률과 신뢰도는 떨어지는데 부적절한 영향력은 온존하는’ 상황에 있다. 그렇다면 방송은? ‘공공·공영성은 찌그러지는데 신뢰도는 높아지는’ 형국이다. 정권과 관계, 언론시장의 현실 등 여러 변수가 있겠으나 언론소비자 혹은 시민의 입장에서는 ‘언론권력의 상대화’, ‘언론으로부터의 자유’가 더 가속화할 필요가 있겠다. 그들 처지에 합당한 위상과 영향력만 돌려주자는 말이다. 신문은 딱 그만큼만 주어지는 구조를, 방송은 공영성 왜곡과 추락이 신뢰도 동반하락으로 이어지는 정상적인 ‘비례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그들이 보여주지 않는 것을 보는, 몇몇 언론이 만든 세상에 규정 당하지 않는 ‘언론으로부터의 자유’를 되짚는 이유다.

다른 것 보고 다른 것 알려야 길 열린다

근데, 이를 위해서는 다른 언론들의 다른 역할이 필요하다. 유착이 어떻게 이어지고 왜곡이 어떻게 생명력을 유지하는지 기록하고 보여줘야 한다. 그런 기록 외에 언론계 내부에서도 저항의 기록을 남겨야 한다. 지난 5년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그럼에도 언론사(史)에서 향후 5년을 침묵의 시기로 방치할 수는 없다. 그것이 안팎의 적극적인 보도감시나 비평이어도 좋고 ‘국민방송’이어도 좋다. 그래야 언론소비자와 언론이 다시 만나고 언론 혹은 언론노동자들이 제 역할하며 살아남는 길이 열린다.
결국 세 싸움하면 지는 거 아니냐고? 언론계는 이번 선거에서 나온 52 대 48의 지형만 이루어도 괄목상대다. 패퇴의 원인을 분석하는 언론도 마찬가지다. 언론지형은 그네들이 질타하고 각성을 촉구하는 ‘선거판’보다 한참 뒤쳐져 있잖은가. 갈 길은 더 멀지만 우리 언론이 종편의 ‘떼창’ 수준으로 전락하길 바라진 않는다. ‘언론으로부터의 자유’와 ‘바른 언론’은 멀리 있지 않다. 다른 길은 또 뭐가 있겠는가.

김상철 ‘야만의 언론, 노무현의 선택’ 공저자  |  webmaster@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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