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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9일 토요일

노원(병) 보궐선거에 관한 생각


이글은 프레스바이플 2013-03--09일자 기사 '노원(병) 보궐선거에 관한 생각'을 퍼왔습니다.

월에 예정된 재․보궐선거에 안철수가 출마한다면 부산 영도를 도모하기를 나는 간절히 바란다. 안철수가 영도에 출마해서 당선된다면 자신의 존재감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지난 대통령 선거 이후 4개월 동안 민심의 동향을 확인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충정과 대의에서 나오는 이런 제안들은 단순히 “반대의 연대”를 위한 심술이 아니다. 한국에서 재벌과 국가와 군부와 언론이 결탁한 기득권 동맹은 강고한 지배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체제에서 직간접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는 유권자 가운데 상당수가 작년 두 차례 선거에서 지배 체제의 연장을 선택했다. 정보와 의견의 자유로운 유통을 심각하게 방해하는 언론 권력에 의해 조작된 결과고, 수십 년 찌들어 사는 동안 스스로 능동적 효능감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와 같으므로, 한국 정치에 무엇이든 새로운 기운을 불러일으키려면 무엇보다 선거에서 이겨야 하고, 선거에서 이기기 전에 일단 비등한 경합이라도 해보려면 민주진보개혁 세력이 연대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보도된 내용만 보면 안철수는 노원(병)에 출마할 생각인 듯하다. 아직 남은 기간에라도 생각을 바꾸기를 나는 바라지만, 이런 희망은 잠시 접고, 안철수가 노원(병)에 출마한다는 가정 아래 몇 가지 변수들을 검토해 보자.

첫째, 민주진보개혁 진영의 선거연합이 가능할까? 선거연합 또는 후보단일화는 어떤 경우에도 최종 목표도 아니고 승리를 위한 충분조건도 아니다.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식으로 연대가 이뤄진다면, 주어진 여건에서 최대치의 성과를 얻기 위한 방책이지만, 연대로 가는 과정에 불순물이 끼어들게 되면 부질없는 소동으로 끝나고 만다.

연대가 이뤄지려면 주요 행위자들이 연대의 가치에 공감하고 연대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이 있어야 하는데, “안철수 측”이라는 주체는 단일화의 필요에 공감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반드시 그 때문만은 아니겠으나) 진보정의당 역시 연대가 이뤄지지 않으리라고 보고, 독자 후보로 누구를 내세울지 대략 가닥을 잡은 듯하다. 이와 같은 상황이라면, 연대는 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민주통합당도 더이상 갈팡질팡하지 말고, 자체 후보를 서둘러 선정하는 편이 떳떳하다.

안철수가 대통령 후보의 지위에서 사퇴했기 때문에, 그 대가로 이번에 민주통합당이 노원(병)에서 양보해야 한다는 소리는 공직선거를 개인들 사이의 사적인 거래로 격하시키는 셈과 같다. 곽노현을 잡아 가둔 검찰과 법원의 억지주장을 그대로 적용하면 이런 거래는 사후매수죄에 딱 걸린다. 더군다나, 안철수가 작년 11월에 선거연합이라는 대의에 과연 협조한 것인지 아니면 방해한 것인지도 분명하지가 않다. 대의에 공감하고 헌신하고자 했다면 당연히 출마 의사를 밝힌 직후부터 단일화의 절차를 정하기 위한 협상에 전향적으로 임했어야 했다. 누가 봐도 필연일 수밖에 없는 일을 공연히 미루면서 시간을 허비한 바람에 막바지의 장면이 실망스럽게 끝났던 것이다.

둘째, 이렇게 되면 새누리당, 민주통합당, 진보정의당, 그리고 안철수 등, 최소한 4명의 후보가 경쟁하는 구도가 짜일 것이다. 대통령 선거, 또는 부산 영도 같은 곳에서 이런 구도면 새누리당의 승리가 거의 확실하겠지만, 노원(병)에서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민주당과 정의당의 후보들이 지금부터 선거일까지 사이에 어떤 식으로 유권자들에게 접근하느냐, 박근혜가 어떤 행보를 보이느냐, 그리고 안철수가 어느 정도의 바람을 일으키느냐, 등등, 여러 가지 변수에 따라 선거 결과는 달라질 것이다.

이렇게 4자 이상의 경합을 뚫고 안철수가 당선된다면, 하나의 새로운 정치세력으로서 안철수 신당은 강력한 입지를 확보하게 된다. 이에 비해, 민주당이나 정의당 쪽의 양보 위에서 안철수가 당선되는 것은 안철수 본인에게도 그렇고 민주당이나 정의당에게도 별로 도움이 안 될 것이다. 단일화의 필요를 별로 느끼지 않는 안철수를 위한 양보는 빚을 졌다는 사람은 없는데 빚을 줬다는 사람은 많은 형국으로 이어져서 어리석은 감정의 응어리만 남길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다자 경쟁에서 새누리당이 승리한다면, 이 역시 미래를 위해 많은 교훈을 남기는 하나의 확고한 사례가 된다. 안철수에게는 자신의 한계를 분명하게 깨달을 계기가 될 것이고, 민주당과 정의당은 지금보다도 훨씬 진지하게 연대의 가치와 방법을 고민하도록 이끌리게 될 것이다. 노회찬이 부당하게 빼앗긴 의석 하나를 새누리당에게 내주고, 그 대신 민주진보개혁 세력이 선거에서 서로 힘을 합해야만 할 이유를 명확하게 지각하는 계기가 마련된다면, 한국 정치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만약에 민주통합당이나 진보정의당 후보가 새누리당 후보와 안철수를 꺾고 당선되는 결과가 발생하는 경우, 대한민국의 정치판은 그야말로 신선한 새 얼굴 하나를 발굴하는 소득을 얻게 된다. 아울러 노원(병)의 유권자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에 관해서도 종전에 평론가나 분석가들이 전혀 몰랐던 요소들이 뚜렷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한국 정치가 인민의 불신을 받으면서도 개선의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척 많고 복잡하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정치학자들, 그리고 여타 정치에 관심이 있는 지식인들이 중구난방으로 공론장을 어지럽히기만 할 뿐,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이 필요한지에 관해 최소한의 공통분모조차 구성해내지 못하는 책임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유권자의 75%, 무려 3천만 명이 투표장에 몰려간 결과 박근혜가 당선된 사태는 민주진보개혁을 외쳐온 모든 사람에게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일들이 혹시 미망이 아니었는지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운동권 방식에서 탈피”, “패거리 의식 청산”, “이너 서클의 독단 방지”, 등등, 자주 거론되는 문제의식들에도 분명히 일리는 있다. 그러나 어쩌면 이런 상투어들의 틈바구니를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어떤 더욱 핵심적인 알맹이들이 있는지도 모른다. 기왕 안철수가 노원(병)에 출마하고, 후보 단일화를 위해 노력도 하지 않을 것이라면, 이번의 보궐선거에서는 한번 모두의 역량과 실상이 있는 그대로 숨김없이 드러나면 좋겠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날 진실을 거울삼아 각자의 과오와 오만을 반성하고 상대방의 장점과 덕목을 인정하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박동천 (전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  webmaster@pressbyple.com

2013년 1월 3일 목요일

헌법재판관은 우리 시대의 자베르! 장발장은?


이글은 프레시안 2013-01-03일자 기사 '헌법재판관은 우리 시대의 자베르! 장발장은?'을 퍼왔습니다.
[박동천 칼럼] 사법 제도의 근본적 개혁이 필요하다

헌법재판소가 직무를 포기하고 보신을 위해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법으로 정해진 선고 기일을 묵살할 때부터 드러났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선고를 내린다고 할 때부터 위헌 판결을 기대한다는 것은 이미 어불성설이었다. 그리하여 곽노현이 제기한 세 가지 헌법소원은 일단 기각되었다.

우선 지난 27일 헌법재판소 판결의 내용을 잠시 들여다본다. 곽노현은 공직선거법 제232조 1항 2호의 조항에서 "후보자를 사퇴한 데 대한 대가를 목적으로"라는 문구가 지나치게 불명확하므로 죄형 법정주의에 어긋나며, 과잉 금지의 원칙에 위배되므로 헌법에 위반된다는 소원을 제기했다.

금전을 제공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제공하는 시기가 언제인지, 후보 사퇴 당시에 금전 지급 합의 내지 이와 관련된 유인 행위가 있었는지를 불문하여 처벌하고, 가벌성 없는 정치 연합에 입각한 선거 비용 보전 행위까지 처벌 대상으로 삼고 있어 규제 범위가 필요 이상으로 광범위하기 때문에, 정치적 표현의 자유와 일반적 행동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므로 과잉금지 원칙에 위배된다는 호소였다.

헌법재판소의 다수 의견은 단순히 "대가"라는 말의 뜻이 한국어 사전에 나와 있고, 그 뜻을 누구나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에 이 조항이 불명확하지 않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는 문제의 핵심을 완전히 회피한 셈과 같다. 곽노현이 "불명확하다"고 호소한 사유는 사전에 매수하기로 묵계가 있었다면 같은 법 1호로 기소할 수가 있는데, 여기에 더해 2호를 정한 이유가 불명확하며, 따라서 2호가 겨냥하는 범죄의 종류가 어떤 것인지 불명확하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곽노현 전 서울시 교육감. ⓒ뉴시스

이 재판의 1심과 2심과 대법원은 모두민주적 선거의 "공정성과 염결성"이라는 공익을 위해서 후보 매수 행위는 엄단할 필요가 있다고 고상한 명분을 내걸었다. 헌법재판소도 마찬가지로 선거의 "공정성과 염결성"이라는 문구를 실컷 착취하고 있다. 그러나 선거의 공정성과 염결성을 위해서 후보 매수를 처벌하기로 하면 1호의 조항만으로 충분하고 남는다.

즉 선거 전에 사퇴의 대가로 금전을 제공했거나, 사퇴의 대가를 지불하기로 약속하고 나서 선거 후에 금전을 지급하는 행위는 모두 1호로 처벌이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2호의 조문이 왜 필요한지가 불명확한 것이다. 이것이 불명확하기 때문에 검찰이나 재판부가 이현령비현령 식으로 법을 적용할 여지를 열어주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과잉 금지의 원칙이 원천적으로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헌법재판관 중에 세 명은 바로 이 때문에 다수 의견에 반대했다. 이 2호의 조항이 목적범을 규정하고 있는지에 관해 두 차례의 하급심과 대법원의 의견이 이미 달랐다. 소수 의견에서는 이 사실을 적시하면서, 이와 같은 혼란이 불명확한 법조문 때문임을 적확하게 인지했다. 아울러 정치 연합 내지 선거 연대를 일방적으로 위축시켜서 "오히려 음성적인 금품 수수 행위를 초래하여 또 다른 의미에서 선거의 공정이나 자유 선거의 원칙을 몰각시킬 수도 있"음을 지적했다. 그렇기 때문에 위헌으로 판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재판관 가운데 다섯 명은 이 모든 문제 제기를 묵살하고, 한국어 사전에 "대가"라는 단어의 뜻이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큼 분명하다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핑계만으로 합헌 판정을 내리고 말았다.

이 재판에서 대한민국의 재판관들은 완악한 말장난으로 이치를 무지르는 작태를 여러 번 보였는데, 모두가 핵심 쟁점을 회피하고 엉뚱한 얘기를 갖다 붙인다는 공통점이 있다. 1심과 2심의 재판관들은 사전에 어떤 묵계도 없었음을 확인하고서도 곽노현이 "대가성을 인식하고" 돈을 건넸다는 억지를 부렸다.

박명기의 오해가 풀린 이후 강경선이 그야말로 신앙심에 따른 선의에서 곽노현에게 부조의 의무를 강권해서 돈이 제공되었음을 확인하고서도, 그 돈이 사퇴의 대가였다고 우겨댄 것이다. 대법원은 이 조항이 목적범을 규정하고 있다고 확인해 놓고서도, 목적범의 규정이 아니라고 해석한 하급심을 파기하지 않고 하급심 판사들의 "대가성" 주장을 승인했다.

그래 놓고는 민망했는지, 정작 긴급 부조를 강권한 강경선은 "대가성의 인식"이 없었으므로 무죄라고 판시했다. 그리고 헌법재판소는 이와 같은 얼렁뚱땅 판결의 전제이자 구실이 된 이 법 조항이 사전에 나온 단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명확하다고 판결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법관 가운데 다수가 법을 권력의 도구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법관의 의무가 법을 수호하여 권력의 남용을 제어하는 데 있다고 보지 못하고, 그저 월급쟁이로 직위를 유지하는 사익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법관이 이러는 것은 아니다. 헌법재판관 중 반대 의견을 낸 세 명과 더불어, 대법관 중에도 양심과 이치의 목소리를 내면에서 듣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현직 법관들 그리고 장차 법관이 될 법학도 가운데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에서 네 번의 재판부들이 노정한 비겁한 회피를 바라보면서 깊은 모욕감을 느꼈을 것이다.

현재 헌법재판소장을 맡고 있는 이강국은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을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제안한 적이 있다. 불과 두 달 전, 11월 5일에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관련 기사 : "이강국, '헌재재판관 모두 국회서 뽑아야'")

새누리당이 다수인 현실을 생각하면, 국회에서 선출하더라도 5대3의 지형이 3대5로 역전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개헌을 통해 헌법재판관만이 아니라 대법관도 모두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해야 한다고 믿으며, 이 칼럼에서 그렇게 주장한 적도 있다.(☞관련 기사 : "2030년 개헌을 준비하자")

이번에 다수 의견에 참여한 이강국이 특강에서 주장한 발언과 이번 판결을 어떻게 연결시킬지 궁금하다. 어쨌든 개헌을 향한 그의 입장만은 쉽게 포기하지 말기를 바란다.

개인적으로 곽노현과 그 가족에게 참혹할 정도로 송구하다. 여론을 움직일 만한 힘도 없는 주제에 사퇴하지 말고 끝까지 싸우라고 권유한 것이 무책임하지 않았는지 자책도 엄습한다. 그러나 내가 그의 입장이었다고 해도, 언론과 검찰의 협박 때문에 사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퇴하는 순간, 곤경에 처한 사람을 선의로 도운 사람이 교육감 자리를 위해 후보를 매수한 사람으로 둔갑해 버리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자기 살을 베어 선의로 이웃을 도운 사람에게 어처구니없는 꼬투리를 걸어 박해를 가하는 사회이다. 곽노현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정의로운 법의 보호는커녕 권력의 주구 노릇을 하는 법 때문에 고초를 겪고 있다. 유권자들에 의해 선출된 교육감마저 권력의 올가미에 걸릴 수 있다는 점을 곽노현은 몸소 보여줌으로써, 이 사회의 적나라한 실상을 드러내었다. 장발장과 자베르의 시대가 따로 없는 것이다.

나처럼 그의 신앙심에 감복한 사람이라면 모두 대오 각성하여, 자베르 같은 겁쟁이들이 법의 이름을 깔고 앉아서 저지르는 불의를 고치기 위해 영혼과 육신을 바쳐야 한다.


 /박동천 전북대학교 교수

2012년 12월 29일 토요일

장발장의 시대가 따로 없다


이글은 프레스바이플 2012-12-28일자 기사 '장발장의 시대가 따로 없다'를 퍼왔습니다.
사법제도의 근본적 개혁이 필요하다

헌법재판소가 직무를 포기하고 보신을 위해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법으로 정해진 선고기일을 묵살할 때부터 드러났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선고를 내린다고 할 때부터 위헌 결정을 기대한다는 것은 이미 어불성설이었다. 그리하여 곽노현이 제기한 세 가지 헌법소원은 일단 기각되었다.

우선 판결의 내용을 잠시 들여다본다. 곽노현은 공직선거법 제232조 1항 2호의 조항에서 “후보자를 사퇴한 데 대한 대가를 목적으로”라는 문구가 지나치게 불명확하므로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나며, 과잉금지의 원칙에 위배되므로 헌법에 위반된다는 소원을 제기했다. 금전을 제공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제공하는 시기가 언제인지, 후보 사퇴 당시에 금전지급 합의 또는 이와 관련된 유인행위가 있었는지를 불문하여 처벌하고, 가벌성 없는 정치연합에 입각한 선거비용 보전행위까지 처벌대상으로 삼고 있어 규제 범위가 필요 이상으로 광범위하기 때문에, 정치적 표현의 자유와 일반적 행동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므로 과잉금지 원칙에 위배된다는 호소였다.

헌법재판소의 다수 의견은 단순히 “대가”라는 말의 뜻이 한국어 사전에 나와 있고, 그 뜻을 누구나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에 이 조항이 불명확하지 않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는 문제의 핵심을 완전히 회피한 셈과 같다. 곽노현이 “불명확하다”고 호소한 사유는 사전에 매수하기로 묵계가 있었다면 같은 법 1호로 기소할 수가 있는데, 여기에 더해 2호를 정한 이유가 불명확하며, 따라서 2호가 겨냥하는 범죄의 종류가 어떤 것인지 불명확하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재판의 1심과 2심과 대법원은 모두 민주적 선거의 “공정성과 염결성”이라는 공익을 위해서 후보 매수 행위는 엄단할 필요가 있다고 고상한 명분을 내걸었다. 헌법재판소도 마찬가지로 선거의 “공정성과 염결성”이라는 문구를 실컷 착취하고 있다. 그러나 선거의 공정성과 염결성을 위해서 후보 매수를 처벌하기로 하면 1호의 조항만으로 충분하고 남는다. 즉, 선거 전에 사퇴의 대가로 금전을 제공했거나, 사퇴의 대가를 지불하기로 약속하고나서 선거 후에 금전을 지급하는 행위는 모두 1호로 처벌이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2호의 조문이 왜 필요한지가 불명확한 것이다. 이것이 불명확하기 때문에 검찰이나 재판부가 이현령비현령 식으로 법을 적용할 여지를 열어주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과잉금지의 원칙이 원천적으로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헌법재판관 중에 3명은 바로 이 때문에 다수 의견에 반대했다. 이 2호의 조항이 목적범을 규정하고 있는지에 관해 두 차례의 하급심과 대법원의 의견이 이미 달랐다. 소수 의견에서는 이 사실을 적시하면서, 이와 같은 혼란이 불명확한 법조문 때문임을 적확하게 인지했다. 

아울러 정치연합 내지 선거연대를 일방적으로 위축시켜서 “오히려 음성적인 금품수수행위를 초래하여 또 다른 의미에서 선거의 공정이나 자유선거의 원칙을 몰각시킬 수도 있음”을 지적했다. 그렇기 때문에 위헌으로 판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재판관 가운데 5명은 이 모든 문제제기를 단지 묵살하고, 한국어 사전에 “대가”라는 단어의 뜻이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큼 분명하다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핑계만으로 합헌 판정을 내리고 말았다.

이 재판에서 대한민국의 재판관들은 완악한 말장난으로 이치를 무지르는 작태를 여러 번 보였는데, 모두가 핵심 쟁점을 회피하고 엉뚱한 얘기를 갖다 붙인다는 공통점이 있다. 1심과 2심의 재판관들은 사전에 어떤 묵계도 없었음을 확인하고서도 곽노현이 “대가성을 인식하고” 돈을 건넸다는 억지를 부렸다. 박명기의 오해가 풀린 이후 강경선이 그야말로 신앙심에 따른 선의에서 곽노현에게 부조의 의무를 강권해서 돈이 제공되었음을 확인하고서도, 그 돈이 사퇴의 대가였다고 우겨댄 것이다. 대법원은 이 조항이 목적범을 규정하고 있다고 확인해 놓고서도, 목적범의 규정이 아니라고 해석한 하급심을 파기하지 않고 하급심 판사들의 “대가성” 주장을 승인했다. 그래놓고는 민망했는지, 정작 긴급부조를 강권한 강경선은 “대가성의 인식”이 없었으므로 무죄라고 판시했다. 그리고 헌법재판소는 이와 같은 얼렁뚱땅 판결의 전제이자 구실이 된 이 법조항이 사전에 나온 단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명확하다고 판결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법관 가운데 다수가 법을 권력의 도구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법관의 의무가 법을 수호하여 권력의 남용을 제어하는 데 있다고 보지 못하고, 그저 월급쟁이로 직위를 유지하는 사익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법관이 이러는 것은 아니다. 헌법재판관 중 반대의견을 낸 3명과 더불어, 대법관 중에도 양심과 이치의 목소리를 내면에서 듣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현직 법관들 그리고 장차 법관이 될 법학도 가운데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에서 네 번의 재판부들이 노정한 비겁한 회피를 바라보면서 깊은 모욕감을 느꼈을 것이다.

현재 헌법재판소장을 맡고 있는 이강국은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을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제안한 적이 있다. 불과 두 달 전, 11월 5일에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관련기사 ☞, “이강국, ‘헌재재판관 모두 국회서 뽑아야'"). 새누리당이 다수인 현실을 생각하면, 국회에서 선출하더라도 5대3의 지형이 3대5로 역전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개헌을 통해 헌법재판관만이 아니라 대법관도 모두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해야 한다고 믿으며, 이 칼럼에서 그렇게 주장한 적도 있다 (관련기사 ☞, “2030년 개헌을 준비하자”). 이번에 다수의견에 참여한 이강국이 특강에서 주장한 발언과 이번 판결을 어떻게 연결시킬지 궁금하다. 어쨌든 개헌을 향한 그의 입장만은 쉽게 포기하지 말기를 바란다.

개인적으로 곽노현과 그 가족에게 참혹할 정도로 송구하다. 여론을 움직일 만한 힘도 없는 주제에 사퇴하지 말고 끝까지 싸우라고 권유한 것이 무책임하지 않았는지 자책도 엄습한다. 그러나 내가 그의 입장이었다고 해도, 언론과 검찰의 협박 때문에 사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퇴하는 순간, 곤경에 처한 사람을 선의로 도운 사람이 교육감 자리를 위해 후보를 매수한 사람으로 둔갑해 버리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자기 살을 베어 선의로 이웃을 도운 사람에게 어처구니없는 꼬투리를 걸어 박해를 가하는 사회이다. 곽노현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정의로운 법의 보호는커녕 권력의 주구 노릇을 하는 법 때문에 고초를 겪고 있다. 유권자들에 의해 선출된 교육감마저 권력의 올가미에 걸릴 수 있다는 점을 곽노현은 몸소 보여줌으로써, 이 사회의 적나라한 실상을 드러내었다. 자베르와 장발장의 시대가 따로 없는 것이다. 나처럼 그의 신앙심에 감복한 사람이라면 모두 대오각성하여, 자베르 같은 겁쟁이들이 법의 이름을 깔고 앉아서 저지르는 불의를 고치기 위해 영혼과 육신을 바쳐야 한다.


박동천(전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2012년 10월 2일 화요일

전과 25범' 최갑복 vs. '29만원' 전두환…누가 장발장인가?


이글은 프레시안 2012-10-02일자 기사 '전과 25범' 최갑복 vs. '29만원' 전두환…누가 장발장인가?'를 퍼왔습니다.
[박동천 칼럼] 고문용 흉기가 되어버린 한국 언론

중세 유럽의 가톨릭 신학자들은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것을 천하고 악하게 취급하라고 가르쳤다. 영원한 신의 나라에 비해 현재의 속세는 더럽고 추하고 죄악으로 가득하다는 식이었다. 신앙이라 불리는 영혼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육체와 욕망이라는 나쁜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그들은 평신도들에게 설교했다. 추악한 성욕에 족쇄를 채우기 위해 일부일처제를 도덕률로 강제하고, 심지어 동정의 삶을 이상화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부자와 권력자들은 육욕, 물욕, 지배욕, 소유욕, 탐욕의 화신처럼 살았다.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서는 연애와 정사가 일상적으로 성행했다. 배우자를 두고 다른 상대를 사귀는 경우, 교회의 허락을 받아 이혼하고 재혼하는 경우, 교회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배우자를 살해하고 재혼하는 경우 등도 빈번했다. 왕족과 귀족은 또한 재물과 권력과 지위를 획득하고 확장하기 위해 음모와 배신과 폭행을 일삼았다. 교회는 이들과 친하게 지냈을 뿐만 아니라, 사제나 신학자들 자신이 대개 왕족 또는 귀족 집안의 후예였다.


문란한 성생활과 그악스러운 탐욕은 성직자들 사이에서도 희귀한 일이 아니었다. 교황이 공공연히 정부를 거느리면서 자식을 낳고, 그 자식에게 권력과 지위와 재산을 물려주기 위해 공작을 꾸미는 것도 모자라, 전쟁까지 일으키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을 저지르는 와중에서도 이들은 평신도들에게는 순결한 도덕률을 설교하면서, 티끌만큼이라도 위반이 있다면 가혹하게 처벌했다. 권력자가 누구를 처벌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상대가 도덕을 위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필요도 없었다. 아무 죄나 뒤집어씌우고 고문으로 자백을 받든지, 조작된 증인을 세우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권력이 이런 짓을 못하게 막으려고 여러 가지 장치들이 생겼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해야 한다는 원리에 토대를 둔 사법제도, 인민 주권의 원리에 토대를 둔 대의 정치와 선거 제도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런 제도가 마련되기만 하면 권력의 몹쓸 버릇이 고쳐지는 것이 아니다. 중세 유럽에도 사법부나 대의 제도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사법부나 대의제가 있어봤자 법관과 의원들이 권력과 이권에 휘둘리면 '도로아미타불'이었다.


문제의 핵심은 은폐할 수 있는 권력이 얼마나 허용되느냐에 있다. 강자가 가진 권력이란 단순히 약자를 괴롭힐 수 있다는 데서 그치지 않고, 더욱 중요하게는 자신의 소행을 은폐할 권력까지 가진다. 그러므로 약자의 처지 역시 단순히 강자에게 육체적·재산적 괴롭힘을 당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소행이 낱낱이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법 앞에 만인 평등이라는 원리 위에 공동체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따라서 공동체에 대한 범죄를 저질렀을지 모른다는 혐의를 받는 경우, 소행이 낱낱이 공론의 도마 위에 노출되어야 하는 평등이 관건이 된다.


하지만 누구든지 공론의 도마 위에 불려 나와 발가벗김을 당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특정인에게 범죄 의혹을 제기하는 행위에는 엄격한 제약이 첨가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범죄로 처단해야 할 행위와 그럴 필요가 없는 행위를 구분하는 엄정한 분별이 이뤄져야 한다. 처벌할 필요가 없는 행위 중에는 조금이라도 잘못이기는 하지만 경미해서 처벌하기보다는 훈방하는 편이 사회적으로 나은 경우, 그리고 애당초 아무 잘못이 아닌 때가 있다.


무고한 사람을 범죄라고 걸어서 고발하는 행위는 자체로 범죄 행위이다. 명예 훼손 또는 무고라는 죄목은 이래서 정해졌다. 무고까지는 아니지만 경미한 사안일 때에는 사정에 따라 달라진다. 가령 길동이가 책상 위에 1000원짜리 한 장을 놓고 점심 먹으러 나간 사이에 직장 동료 매향이가 그 돈을 슬쩍 주머니에 담았다고 할 때, 이를 알게 된 길동이가 고발해야 하는가? 이런 절도가 단지 한 번에 그쳤다면 처벌할 가치는 별로 없다. 그러므로 한 번에 그친 일을 가지고 고발하는 행위는 장려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1000원짜리 좀도둑이라도 지속해서 이뤄진다면 처벌해야 맞다. 법의 자비를 악용하여 공동체 내부의 신뢰를 갉아먹는 짓이기 때문이다.


한편, 매향이가 1000원을 슬쩍 집어넣은 행위를 길동이가 고발한 경우는 어떨까? 조금만 연장해서 생각해보자. 경찰이든 회사 내부의 감사 기관이든 또는 부서 구성원들이 모인 회의에서든, 이 일은 경미한 일이므로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받은 후 불문에 부치기로 했다고 쳐보자. 그런데 길동이가 계속해서 그 일을 문제 삼는다면? 1000원짜리를 한 번 슬쩍한 불미스러운 전력이 있는 매향이와 불문에 부치기로 한 공동체의 결정에도 그 일을 가지고 계속 매향이를 공격해대는 길동이 중에서 어느 편이 공동체에 더 해로운 짓을 하고 있는가? 양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길동이의 그악스러운 행위가 해롭다는 결론을 당연히 내릴 것이다.


권력이 부패하게 되면 1000억 원을 훔친 자들이 팔팔하게 행세하면서 도리어 1000원을 훔친 사람에게 법과 정의를 내세우며 주먹을 휘두르게 된다. 기실, 단위가 요즘은 천문학적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수십조 원을 훔친 도둑이 100만 원 훔친 도둑을 때려잡겠다고 설치는 셈이라 말해야 현실에 가까울 것이다. 흉악범의 경우에도, 수백 명을 살해하고도 떵떵거리는 자에 관해서는 포기하고 지내던 사람들이 어디서 살인 사건이나 아동 성폭행범이 하나 나오면 마치 그 때문에 말세라도 되었다는 양 "사형 집행"이니 "물리적 거세" 따위를 부르짖는다.


주류 언론의 이와 같은 행태는 중세 유럽에서 행해지던 고문의 역할을 대신하는 셈이다. 중세 유럽에서 큰 도둑놈들이 자신의 범죄 행각에 대한 공론의 관심을 따돌리기 위해 좀도둑 하나 잡아서 공개적으로 고문했던 수법을 정확하게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한국에서는 이 수법이 좀도둑이나 흉악범에 대해서만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 '안철수 불출마 협박 사건'을 폭로한 금태섭 변호사의 기자 회견 장면. ⓒ연합뉴스

노무현과 곽노현이 마치 무슨 '범죄'라도 저질렀다는 듯 떠들어댄 마녀 사냥이 바로 이와 같은 수법이었다. 공론 자체에 대해 고문이 행해졌던 것이다. 천안함 침몰과 관련해서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양심적인 시민에 대한 매카시즘도 공론에 대한 고문의 한 형태이다. 박원순에 대해 강용석이 떠벌인 헛소리를 마치 합당한 의혹인 양 대서특필했던 언론의 행태 역시 공론에 대한 고문이었다. 그리고 안철수에 대하여 지금 다시 사악하기 짝이 없는 고문이 시도되고 있다.

이런 고문에 시달리는 한국의 공론장에서, 금태섭에 대한 정준길의 '협박'은 흐지부지 묻혀버리고 도리어 금태섭의 폭로가 '네거티브'로 둔갑한다. 도둑이 오히려 몽둥이를 잡는다는 말이 이렇게 맞을 수가 없다. 표절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복사해서 편집한 것을 논문이랍시고 제출해서 학위와 지위를 차지한 인종을 비호하는 자들이, 멀쩡한 안철수의 논문에 득달같이 달려들어 물어뜯고 있다.

강용석을 용서한 박원순의 행위는 한 개인의 포용력으로서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강용석을 명예 훼손으로 걸어서 법정에 세웠더라도 무방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강용석이 작년과 같은 행위를 또다시 저지른다면 박원순이 아니라 그보다 마음이 만 배쯤 넓은 사람이라도 개인적으로 용서하고 넘어가면 안 되는 것이다. 살인자를 보고도 고발하지 않고 넘어가 버린다면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지난 일들은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공론장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악랄한 행위들을 앞으로도 용서만 하고 넘어간다면, 이 사회에 법과 정의는 영원히 자리 잡을 수 없다.

문재인은 검찰 개혁을 말하고 있지만, 개혁된 검찰의 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상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단계를 밟아나갈지 등의 구체적인 구상을 가졌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법원과 헌법재판소 그리고 경찰, 선거관리위원회, 인권위원회, 감사원, 저작권위원회, 언론중재위원회, 기타 등등 검찰 이외의 사법 기관들은 어떻게 개혁할지 나는 매우 궁금하다. 안철수는 이 방면에 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특히 최근 자신에 대해 가해지고 있는 언론의 공격을 선거판에서 으레 있기 마련인 공세 정도로 치부하고 있다면, 마음이 넓은 것이 아니라 순진한 것이다.

한국 사회는 큰 도둑이 권력과 지위를 차지하고서 작은 도둑을 때려잡는 구조로 형성되어 있다. 큰 도둑은 작은 도둑을 때려잡으면서 자신의 치부를 은폐한다. 이런 체제에서는 도둑이 아닌 사람도 큰 도둑의 필요에 따라 쉽게 도둑으로 둔갑해 버린다. 이렇게 도착(倒錯)된 구조를 정상화해내지 못한다면, 경제민주화도 복지 국가도 민주주의도 평화 체제도 모두 헛꿈으로 그친다.

궁극적으로 공론장의 건강을 회복하고 지켜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권력자들일수록 공론에 엄중하게 감시받고 조사받는 체제를 이룩해내야 한다. 정치인과 재벌은 물론이고, 법조계, 관료, 군대와 경찰, 기타 각종 공식 위원회에서 공적 판단을 내리는 자들의 직무 행위에 대해 해명을 받아내서 따질 수 있는 공론장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고 언론 종사자들이 공론을 빙자하면서 벌이는 영업 행위에 대해서도 공동체 차원의 규제가 있어야 한다.

빵 한 조각을 훔쳐 먹은 장발장은 그 때문에 결국 전과 19범이 되고 말았다. 지난 9월 28일 자 기사 "'배식구 탈출' 최갑복, 집주인에게 맞기만 했다"를 보면, 최갑복의 전과가 25개나 된 데에도 장발장처럼 억울한 면이 있을 것 같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곁에서 전두환은 "29만 원밖에 없다"고 능청을 떨면서 양주 파티를 벌인다. 증거가 없어서, 그리고 나 자신의 인격을 보전하기 위해서, 차마 실명을 거론하지는 않는다만, 이 나라에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오히려 몽둥이를 잡는 자가 전두환뿐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

대통령을 해보겠다는 사람들은 이 문제를 깊게 생각해야 성공한 대통령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문재인과 안철수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자기 아버지가 저지른 일에 관해 "사과" 두 글자를 모처럼 입에 담은 박근혜도 이 문제를 생각할 수 있기를 인간의 한 사람으로서 바란다. 아울러 은근히 차기나 차차기를 노리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이들 모두의 주변에서 한 자리 해먹고 싶어 두리번거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박동천 전북대학교 교수

2012년 9월 3일 월요일

노무현이 포퓰리스트라더니 박근혜는 왜?


이글은 프레시안 2012-09-03일자 기사 '노무현이 포퓰리스트라더니 박근혜는 왜?'를 퍼왔습니다.
[박동천 칼럼] 포퓰리즘의 나쁜 추억

한국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서양 정치인 중에 최소 두 사람은 전형적인 포퓰리스트다. 고대 아테네의 페리클레스와 20세기 초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다.

페리클레스는 기원전 461년부터 429년 죽을 때까지 아테네 민주파의 영수로서 아테네를 이끈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그는 열 명으로 이뤄진 장군단의 일원이었고, 이 직책은 임기 1년의 선출직으로 무한정 재선될 수 있었다. 페리클레스는 장군단 내에서 소수파였으므로, 제 뜻을 관철하기 위해 민회를 활용했다. 장군단 회의에 부쳤다가 부결된 안건을 민회에 올리고, 뛰어난 언변을 통해 민중에게 지지를 호소했던 것이다.

우드로 윌슨은 프린스턴 대학 정치학 교수 출신으로, 총장과 주지사를 거친 다음 1913년부터 1921년까지 미국 대통령으로 지냈다. 그는 민주당원이었던 동시에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당파와 상관없이 진행된 이른바 '진보 운동'의 지도자였다. 독점 규제와국제연맹 설립을 비롯한 그의 이상주의적 대내외 정책은 워싱턴의 기득권이라는 벽에 번번이 부딪쳤다. 공화당뿐 아니라 민주당 안에서도 반대가 많았다.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그는 인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전략을 택했다. 라디오라는 신기술을 이용한대중 연설을 통해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억누른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페리클레스와 윌슨은 선동가나 포퓰리스트라기보다는 민주적인 개혁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페리클레스와 윌슨에게 반대하는 세력들은 그들을 선동가로 매도했다. 반대파에게 페리클레스는 데마고그(demagogue), 윌슨은 포퓰리스트(populist)라 불렸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라는 구호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정치인 가운데는 찾아보기 어렵고, 논객이나 학자들 사이에서도 압도적으로 소수에 그친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뜻을 함축하는 말과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은 많다. 일부 문제만 불거져도 지방 선거 무용론, 국회 무용론을 입에 담는 사람들이 그렇다. 사회적 쟁점에 관한 논란이 자신의 이해력을 초과하여 진행하면 금세 짜증을 내며 왕조 시대나 독재 시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그렇다.

이런 사람들은 내심 민주주의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1987년 이후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라는 단어에 담긴 역사적이고 규범적인 의미에 정면으로 대들지는 못한다. 대신 '포퓰리즘'이라는 단어를 붙잡고 폭행하는 집단적인 광기를 보인다. 포퓰리즘은 라틴어 '포풀루스(populus=인민)'에서 나온 단어로, 그리스어 '데모스(demos=인민)'에서 나온 단어인 민주주의와 어의 상으로는 다를 바가 별로 없다. 둘 다 소수 기득권층보다다수 서민층의 형편과 의사를 중시한다. 또 다수의 집단 지성보다는 감정적 선동과 정략적 조작을 통해 빚어진 말초적 군중 심리에 의존할 경우 중우 정치로 빠질 공산이 있다.

김종필과 연대를 통해 집권했던 김대중에 비해, 2002년 노무현의 당선 과정은 훨씬 민주적이었다. 일부 기득권과 연대하지 않고도 민주 세력이 독자적인 과반수를 형성한 것이다. 탄핵소추에 대한 반발에 힘입어, 2004년 4월 혁명 이후 최초로 민주 세력이 국회 과반수를 차지하자 기득권 세력의 공포는 더욱 깊어졌다.

그들 기득권 세력은 대중에게 비교적 생소한 포퓰리즘이라는 단어를 끌어들여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을 조장했고, 이 전략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어설픈 지식인들이 포퓰리즘에 대한 공격에 동조했고, 상당수 민주 세력마저 어리석게도 이를 방치해 노무현식 포퓰리즘은 위험하다는 현대판 신화가 만들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러한 신화는 그 자체가 선동에 의해 날조된 것이다.

물론 포퓰리즘 전략은 페리클레스와 윌슨처럼 기득권과 대항하기 위해서만 사용되지 않는다. 기득권 세력이 인민을 속이기 위해 사용할 때도 많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와 3세 그리고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소련의 스탈린은 정권 유지를 위해 대중을 조작하고 선동한 전문가였다. 일본의 군국주의 정권, 북한의 김일성, 한국의 박정희와 전두환도 그랬다. 9·11 테러 이후 미국 사회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전쟁을 일으킨 조지 W. 부시도 대표적인 선동가에 해당한다.

마치 자기가 집권하면 경제가 살아날 것처럼 사기를 친 이명박, 뉴타운 개발로 서울 집값이 치솟을 것처럼 허풍을 떤 오세훈,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에 양념을 얹어 포장해 준 보수 언론들이 모두 선동과 조작에 앞장선 인물들이다. 그리고 박근혜는 "맞춤형 복지", "경제 민주화",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 따위에 더해 "국민 대통합"이라는 내용 없는 구호들로 선거판을 어떻게든 선동과 조작으로 타락시키기 위해 애쓴다.

▲ 오른쪽부터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 박 후보에게 '경제민주화' 공약을 제안한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위원장의 모습 ⓒ뉴시스

이 곁에서 보수 관료들과 재벌들은 여전히 복지 국가와 경제 민주화를 포퓰리즘으로 매도한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포퓰리즘은 박근혜를 겨냥하지 않는다. 오히려 박근혜만은 포퓰리즘이라는 낙인에서 교묘하게 면제를 받는다. 포퓰리즘이라는 단어가 노무현과 주변 인물들을 지목하는 낙인으로 정착돼버렸기 때문이다.

복지 국가와 경제 민주화는 박근혜조차 표절할 정도로 이미 하나의 시대정신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기득권 세력은 이 시대정신을 가로막거나 최소한 지연시킬 수 있는 충분한 힘이 있다. 이들은 포퓰리즘을 들먹이면서 민주 개혁 진영의 신뢰도에 상처를 입힌다. 통합진보당은 '진보'라는 단어 하나도 감당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고, 민주통합당은 '친노' 대 '비노' 프레임에 갇혀 포퓰리즘과 같은 프레임에는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이 틈에 진짜 선동가 박근혜가 독버섯처럼 기생한다.

노무현 정부를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했던 지식인들이 지금 벌어지는 포퓰리즘적 행태에는 왜 침묵할까? 이제는 그 말을 써도 누가 별로 알아주지 않기 때문일까? 이명박과 박근혜의 정치 행보가 선동적이지 않다고 보는 것일까? 대중을 조작해 민주주의를 중우 정치로 타락시키는 보수 언론의 몹쓸 버릇이 지금은 고쳐졌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지식인이라고 해봤자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은 어차피 극소수고, 대다수는 돈과 권력과 지위에 영혼을 팔아 연명하는 벌레와 다르지 않기 때문일까?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사람마다 사정이 다르고 이유도 다를 것이다. 좌우지간, 나에게 포퓰리즘의 추억은 하나의 나쁜 추억이다. 이 나라에 지성이 존재하는지 의문을 떨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박동천 전북대학교 교수

2012년 8월 29일 수요일

대통령의 '독도 방문'은 왜 바보짓인가?


이글은 프레시안 2012-08-29일자 기사 '대통령의 '독도 방문'은 왜 바보짓인가?'를 퍼왔습니다.
[박동천 칼럼] 독도를 둘러싼 '불편한 진실'

나는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고 믿는다. 따라서 일본정부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한다는 것은 뻔뻔한 짓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본 국민 대다수가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믿고 있더라도, 일본의 정치인만큼 뻔뻔한 것은 아니다. 무지해서 일본 정부와 정치인들의 민족주의적 선동에 넘어간 잘못이 없지는 않지만, 이는 팽창주의적 영토 야욕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한국의 정치인들도 민족주의적 선동을 자주 악용하고, 그럴 때마다 한국 국민들도 쉽사리 넘어가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의 영유권 주장이 괘씸하지만, 이를 혼내주기 위해 한국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해야 할 정도의 사안은 전혀 아니다. 독도와 관련해서 어떤 문제가 불거지더라도, 그 문제는 평화적으로 해결돼야 한다. 평화적인 해결은 진실에 기반을 두지 않으면 불가능하고, 이 경우 '진실'이란 우리끼리 또는 저들끼리의 진실이 아니라 한국인과 일본인을 합한 2억 명 가운데 충분히 많은 수가 공유할 수 있는 진실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에서 독도 담론은 항상 감정에 의해 휘둘리는 불행한 주제 중의 하나다. 한반도를 침략했던 일본의 과거 행각들 그리고 과거를 반성하기는커녕 지금도 침략할 틈새만 노리는 듯한 일본 정치인들의 뻔뻔함이 한국인의 감정을 자극하는 일차적 원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이 마냥 감정적으로만 반응할 수는 없다. 특히 한국 정부, 정치인들, 지식인들 그리고 언론계 종사자들이 일반인의 민족주의 감정을 부추기는 행태는 비판 받아야 한다.

언론의 선정적 보도의 예로는 의 2012년 8월 26일자 기사 따위를 들 수 있다. (☞관련 기사 : 이사부 '독도 복속' 군사 거점·출항지 찾았다) 강릉에서 이사부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토성을 찾은 것이 독도 정벌의 증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일본은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복한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산국에 독도가 포함된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런 기사를 보고 많은 한국인들은 다시 한 번 일본에 대해 반감을 다지겠지만, 이런 식의 선정 보도로 빚어진 반감은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는 방해만 된다.

한국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독도의 불편한 진실을 세 가지만 지적해 보자.

첫째, 독도는 분쟁 지역인가? 한국인들끼리는 "독도는 명백한 우리 땅"이라는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 일체감을 확인하고 단결을 과시한다. 그런데 국제적으로도 독도가 '명백히' 한국 영토라고 인정되고 있는가? 국제적인 통설은 "독도는 한국이 점유하고 있지만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해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이다.

한국 정부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지 않고 받아 적는 언론계 풍토 때문에, 독도가 분쟁 지역임을 인정하면 한국에 손해라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 하지만 이것은 맥락에 따라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는 이야기다. 이걸 모든 경우에 맞는 것처럼 생각해버리면 바로 그것이야말로 한국에게 손해다.

예컨대, 이번처럼 일본이 국제사법재판소로 함께 가자고 요청했을 때, "독도는 분쟁 대상이 아니므로 국제 재판이 필요 없다"는 말은 충분히 할 수 있다. 일본 측의 주장이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우리 측의 판단을 수사적으로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 "분쟁 대상이 아니"라는 문구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일본 측 주장을 묵살한다고 해서 일본이 입을 다물진 않는다. 우리가 일본 측의 주장을 무시한다고 해서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이탈리아, 브라질, 인도 등 다른 나라들도 우리를 따라 일본 측의 주장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분쟁 지역'인지 아닌지는, 영유권을 둘러싸고 말로든 무력으로든 다툼이 있는지 여부에 따라 가려진다.

독도를 분쟁 지역으로 인정하는 것과 일본 측 주장의 타당성을 인정하는 것은 별개다. 일본 측과 공개적으로 논쟁하기 위해 일단 상대방의 도전을 인정할 수도 있고, 또는 단순히 제3자적 입장에서 결론은 유보한 상태에서 양측이 논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만을 인정할 수도 있다.

나는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이 논쟁의 배경과 내용을 파고들어 확인할 의지나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결론을 유보한 상태에서 논쟁의 귀추를 지켜보는 편이 건강한 태도라고 본다.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이 문제에 관해선 울컥 열정부터 촉발되는 사람들은 논쟁의 내용을 스스로 살펴서 합리적으로 의견을 형성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언론 보도를 보니, 경기 지역 열일곱 개 초등학교 교사의 70퍼센트가 독도 논란의 배경을 잘 모른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고 한다. (☞관련 기사 : 초등 교사 70%, 독도 사태 배경 잘 모른다) 같은 조사에서 응답한 초등 교사의 77퍼센트는 독도에 관해 뭔가를 가르치는 모양이다. "독도는 분명한 우리 땅이고, 일본의 주장은 말도 안 된다"는 구호 이상으로 뭘 가르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주장은 오래된 사실이다. 이를 한국인들이 무시한다고 해서 지워질 일이 아니며, 일본 측이 물러날 일도 아니다. 오히려 일본 측의 주장을 제대로 반박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라도, 이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일본 정부는 '어떻게 말이 된다고' 우겨대는지 살필 필요가 있는 것이다.

 
▲ 지난 10일 경북 울릉군 독도에 도착한 이 대통령이 전망대에서 해안을 둘러보고 있다. ⓒ뉴시스

둘째, 한국 정부는 독도에 관해 국내 여론이 들끓을 때마다 "조용한 외교"를 전가의 보도처럼 되뇌어 왔다. 이 "조용한 외교"라는 말은 관료들과 정치인들이 국민을 상대로 벌이는 사기극의 일환이라는 것이 나의 오래된 의견이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한국 정부가 독도 문제에 관해 침묵을 지킨다고 해서 일본이 조용해지지도 않고 국제 정치의 현안 목록에서 이 문제가 지워지는 것도 아니다.

독도 문제는 "명백한 한국 땅"이라든지, "분쟁 대상이 아니"라는 식의 우격다짐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아주 골치 아픈 현안이다. 더군다나 이승만과 박정희가 일처리를 잘못해서 오늘날 일본 정부가 대들 수 있는 빌미를 (이 빌미가 있다고 해서 일본에게 영유권이 넘어갈 정도는 절대 아니다) 제공한 면도 아주 크다. "조용한 외교"라는 수사는 일차적으로 이와 같은 사정을 한국 정부가 국민에게 은폐하겠다는 심보를 담고 있는 말이다.

이미 대통령 이명박은 시끄러운 외교를 선택하고 말았다. 나로서는 기껏 현병철을 임명하기 전에 국내 여론의 관심을 돌리려고 이런 짓을 했다고밖에 추측이 안 되지만, 설사 백보를 양보해서 이명박에게 무슨 국익을 고려한 수읽기 비슷한 것이 있었다 치더라도, 이미 한국 정부는 지금 일본을 상대로 아주 도발적으로 시끄러운 외교를 시행한 다음이다. 그러므로 "조용한 외교" 따위의 대국민 사기성 표어는 이 일을 계기로 완전히 폐기되어야 한다.

이 말은 앞으로 '시끄러운 외교'를 하자는 말이 아니다. 언제 누구를 상대로 조용하고 언제 누구를 상대로 시끄러울지를 정교하게 분별해서 대응해야 한다는 말이다. 아울러, 국민들을 상대로는 성사될 수도 없을 비현실적인 감정만 잔뜩 부풀려놓고, 정작 일본 정부를 상대할 때에는 전략도 목표도 없이 우왕좌왕하는 꼴을 그만 둬야 한다는 말이다.

셋째, 한국 정부가 그동안 저지른 실책을 지적하는 진보 정치인과 진보 지식인들은 반드시 현실적인 대안을 구상해서 공표해야 한다. 박정희와 김종필이 "차라리 폭파해 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든지, '독도 밀약'이라는 게 아마도 있었을 거라든지 등에 관한 진상은 물론 밝혀져야 한다. 단, 박정희가 이 일을 잘못 처리했다고 할 때, 그렇다면 지금 어떻게 하는 것이 잘 하는 것인지를 진보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은 자문해야 한다.

일본을 욕하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정신이 간단한 박근혜는 "독도는 한국 영토이기 때문에 일본이 그걸 인정하면 간단히 해결된다"고 믿는지 몰라도, 일본이 그걸 인정하지 않는 동안 어떻게 할 것인지를 박근혜보다 간단하지 않은 정신의 소유자라면 생각을 해야 한다.

이명박이 독도를 뜬금없이 방문한다거나, 느닷없이 일왕의 사죄를 요구하는 등의 행위는 독도 문제에 관한 한 변명의 여지가 없는 멍청한 짓이다. 박정희가 맺은 한일 협정 이래 50년 가까이, 독도는 어업 협정상으로 '영유권과는 상관없는' 공동 어로 수역에 속한다. 독도 주변 해역이 한국의 배타적 경제 수역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한국 대통령이 독도를 한 번 방문해서 표지석을 세웠다고 일본이 독도 해역을 한국의 배타적 경제 수역으로 인정할 리는 만무하다.

한국의 역대 정권이 이 문제에 대해 잘못한 일은 화끈하게 해결하지 못한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지 못한 데에 있다고 진단해야 한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박정희 이래 역대 군사 정권은 속으로는 일본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반박하기는커녕 수세로 몰리면서도, 겉으로는 즉 국내 보도용으로는 일본 측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니 우리는 상대도 안 한다는 식의 허풍으로 일관했다. 일본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반박하지 못한이유는 물론 독도라는 의제 말고 다른 곳에서 일본의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이명박이 레임덕을 모면해보려고 독도 퍼포먼스를 벌인 생뚱맞은 작태는 독도가 정치꾼에 의해 어떻게 이용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진보 진영이 역대 정권에 화끈하지 못했다고 비난하면, 본인들이 집권했을 때 화끈한 모습을 보여줘야 할 책임이 따른다. 그런데 독도 문제에 관해 한국 정부가 화끈하게, 다시 말해 한국 국민들의 분이 풀릴 만큼 일본을 혼내줄 수 있는 길은 없다. 독도의 경우 현상을 유지하는 가운데, 일본의 주장이 억지임을 국제 사회의 이성과 일본인들의 양심에 가급적 널리 알리고 호소하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진보 세력은 이번과 같은 이명박의 퍼포먼스를 적극적으로 꾸짖어야 한다. 영토 문제라고 해서 아무런 책략도 계획도 목표도 없이 단지 일시적인 변덕만 가지고, 외교적 관심과는 상관없는 국내 정치적 의도에 따라, 상대방을 자극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상대가 강적일수록 (한국만이 아니라 어떤 나라에게도 일본은 적이 된다면 굉장한 강적이다) 가능한 한 상대의 감정을 건드릴 필요는 없다. 우리가 할 일과 할 말을 하다가, 상대가 허점을 보일 때 체계적인 전략을 가지고 공략해야 한다.

이명박은 이미 대북, 대중, 대미 관계를 국내 정치적인 고려만 중시하다가 망쳐 놨다. 그리고 이제 대일 관계도 망치고 있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국내 정치를 위해 외교를 망친 자들을 우리는 역적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진보 진영에서 이명박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단, 그 비판이 감정에 치우친 분풀이 수준이어서는 안 된다. 독도와 관련된 불편한 진실을 분명하게 파악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동천 전북대 교수

2011년 12월 11일 일요일

'최대주의 전략'의 어리석음과 무책임에 관하여


이글은 프레시안 2011-12-09일자 기사 ''최대주의 전략'의 어리석음과 무책임에 관하여'를 퍼왔습니다.
[미래연 주간논평]

한미 FTA 비준안의 국회통과를 저지하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통과되었다. 그러자 "날치기"를 성토하면서, 대통령의 서명을 막겠다고 했었다. "백만 명이 모이면 서명을 막을 수 있다"는 소리도 나왔다. 백만 명이 모이지도 않았고 서명을 막지도 못했다. 이제는 뭘 막자고 나서야 할까?

날치기가 있기 전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혼할 수 없는 결혼"과 같기 때문에 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었다. 국회 비준과 대통령 서명이 이뤄진 지금은 정권을 바꿔서 파기하자고 한다. 불과 한 달 전에는 파기불가능이라서 맺으면 안 되었던 협정이 어떻게 그 사이에 파기할 수 있는 협정으로 둔갑을 했을까?

감정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이것은 한 쪽에서 일방적인 의사표현만으로 파기가 가능한 협정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언제든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파기할 수 있다. 한국 쪽에서도 일방적으로 파기할 수 있고, 미국 쪽에서도 일방적으로 파기할 수 있다.

이 협정에 대해 제기되고 있는 우려 중에는 타당한 것도 없지 않다. 나아가 설사 과장 또는 오도의 결과로 분출되는 우려라고 할지라도 시민적 주권의 표현으로서 정치체제로부터 당연히 존중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않고 표결을 강행한 집권세력에 대한 비난과 성토는 당연하다. 실업률 통계를 조작하고 물가지수도 수학적으로 마사지하는 정부, 급기야 투표율까지 조작해보려고 더러운 짓을 벌인 집단에 대해 분노하고, 그 분노를 표출하는 것도 당연하다.

일반 시민들이 정부와 집권당의 처사에 항의하는 것은 사회를 위해 건강한 일이다. 하지만 정치인이라면, 특히 세상을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는 정치인이라면, "무엇"만이 아니라 "어떻게"에도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맘에 안 드는 일이라고 해서 그냥 없애버리면 된다는 생각은 자신의 전지전능을 믿는 유치한 착각 아니면 전제자가 되겠다는 불순한 무의식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심사에 젖은 사람들은 반대파로서 전투의 선봉에는 잘 나설지 몰라도, 책임감 있는 정책의 입안이나 시행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까마득한 소수 의석을 가지고 국회통과를 저지하겠다는 발상, 대통령의 손을 떨게 만들어 서명을 막겠다는 발상, 집권만 하면 당장 파기해버리겠다는 발상, 등은 모두 어리석고 무책임한 최대주의 전략에 해당한다. 맘에 안 드는 일이 있을 때,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시의적으로 최선인지를 묻기 전에, 그것을 없애버리는 길 말고 다른 길은 모두 막아버리는 전략이다. 북받친 시민들의 감정의 불에 기름을 끼얹는 선동적 효과는 있겠지만, 뒷감당을 어찌할지 애당초 복안 자체가 없기 때문에 오래 갈 수가 없다.

한미 FTA의 결과로 한국 전체의 국민경제가 어찌될지를 예측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더라도 논쟁의 주제다. 어느 쪽의 얘기가 맞을지는 두고 봐야 안다는 얘기다. 단, 예컨대 이로 인한 변화가 한국 농촌의 고령자들에게 편안하지는 않을 것이 뻔하다. 따라서 처음부터 이 사안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이 두 가지였다 - 국민경제 (및 사회구조) 전반에 걸쳐서 어떤 효과가 초래될 것인지를 최대한 정확하게 확인해서 정책판단의 기초로 삼아야 하고, 이로 인해 직접 이익을 보는 분야와 직접 손해를 보는 분야 사이에 편익과 비용을 공정하게 배분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의제가 핵심이라는 사실은 지금도 앞으로도 변함이 없다. 반면에 최대주의 전략을 취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우려만을 근거로 협정을 절대악이라 치부하면서,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는 데 전력을 다한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 자신감을 상실하고 있다는 징표에 지나지 않는다. 장차 상황이 전개됨에 따라 시의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고 절망해야 할 까닭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나 자신도 여러 번 얘기했고, 다른 사람들도 숱하게 지적한 바지만, 자기들이 집권했을 때를 가상해 봐도 최대주의 전략은 어리석다는 게 금방 드러난다. 정권이 바뀌어 협정을 파기하고자 할 때, 소수파가 육탄으로 저항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너희도 했으니 우리도 날치기한다"고 할 것인가, "너희가 하면 날치기지만 우리가 하면 다수결"이라고 할 것인가? 어버이 연합이 촛불을 들고 나서면 경찰력으로 진압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책임감을 가진 정치인이라면 시민들의 분노를 부추겨 폭발시키기 보다는 문제의 핵심을 짚어서 정치적 해법을 찾아 제시해야 한다. 시민들이 분노할 때마다 감정이 폭발하는 사회는 절대로 건강할 수가 없다. 분노의 폭발은 적절한 경로를 따라 조직되고 절제되어야 사회의 개선으로 이어지는 효과를 낳는다. 되지도 않을 무모한 목표로 선동을 계속하다가는 건강한 시민의식에게는 무력감만을 안기고, 오히려 이명박 식의 독주를 정당화해주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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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천 전북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