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20일 화요일

[사설]조의 표명, 남북관계 개선 계기 될 수 있다


이글은 경향신문 2011-12-19일자 사설 '[사설]조의 표명, 남북관계 개선 계기 될 수 있다'를 퍼왔습니다.
김일성 주석 사망 3일 뒤인 1994년 7월11일 당시 민주당 이부영 의원은 임시국회에서 정부에 조문 의사가 있는지 질의했다. “정부가 대화의 필요성을 갖고 있다면” “이미 결정된 남북정상회담을 계속 추진해야 한다면” 등의 전제가 달린 조심스러운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 의원의 발언은 남한 사회에 내재돼 있던 냉전의 광기를 터뜨리는 기폭제가 됐다. 수구언론은 ‘수백만명을 죽인 전범에게 무슨 조문이냐’며 연일 융단폭격을 가했고, 이 의원 등을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망동분자’로 몰아붙였다. 이 때문에 온 나라가 한바탕 홍역을 치러야 했다. 

17년 전의 일을 새삼 거론하는 까닭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과 관련해 제2의 조문파동이 발생하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다. 물론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른 데다 북한도 장례가 끝나는 28일까지 외국의 조문사절을 받지 않겠다고 밝힌 만큼 이러한 평지풍파가 일어날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김 위원장의 사망에 정중하고도 격식을 갖춘 정부 차원의 조의 표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형식이 조전(弔電)이 됐건, 정부 당국자의 구두 성명이 됐건 구체적인 방법과 수준은 논의하면 될 일이다. 요컨대 남한 정부가 북한 최고지도자의 사망에 예의를 갖춘 조의를 표명함으로써 남쪽에 대한 북쪽의 뿌리깊은 불신과 의구심을 일정하게 씻어줄 수 있는 것이다. 평범한 사인(私人)들 사이에도 해묵은 반목과 질시, 갈등과 증오가 진심어린 조상(弔喪)을 계기로 어느 정도 극복되고 치유되는 경우가 있다. 국가와 국가의 사이도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참혹한 동족상잔을 겪었으며, 최근까지도 무력충돌을 경험한 남북한 사이에는 이러한 필요성이 더욱 높다고 하겠다. 

극단적인 수구냉전세력이 아니더라도 ‘연평도에 포탄을 퍼부어 사람을 죽였는데 무슨 조의표명이냐’는 목소리가 일반인들 가운데서도 나올 수 있다고 본다. 자연인이라면 자신의 도덕률과 감정에 따라 행동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국가공동체 전체의 이익에 부합한다면 적에게도 예의를 갖출 수 있어야 한다. 국공내전의 당사자였던 중국과 대만도 각각 상대의 최고지도자인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사망했을 때 조의를 표명하지 않았던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4년간의 남북관계는 민간 차원까지 얼어붙을 정도로 악화돼 있다. 정부는 북측 최고지도자의 죽음에 조의를 표명함으로써 최소한의 신의를 쌓고, 이를 경색된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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