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29일 일요일

어설픈 흙돌담, 왜 무너지지 않았을까?


이글은 오마이뉴스 2012-01-27일자 기사 '어설픈 흙돌담, 왜 무너지지 않았을까?'를 퍼왔습니다.
[늘그막 백수들의 겨울여행3] 담양 소쇄원

▲ 소쇄원 흙돌담에 쓰여 있는 오곡문 표시 ⓒ 이승철

"담양에 와서 소쇄원 둘러보지 않고 그냥 갈순 없잖아?"
  
맛있는 대통밥 점심을 먹고 출발하자 일행 한 사람이 하는 말이다. 환벽당과 식영정을 둘러갈까 물으니 그냥 가자던 일행이다. 면앙정과 송강정을 연달아 돌아봐서 조금 싫증이 난 것 같았다. 그런데 소쇄원은 들러 가자는 것이다.

"소쇄원은 옛날 교과서에도 나왔던 곳 같은데. 내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네?"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옛날 초등학교인지 중학교인지 교과서에 소쇄원이 소개되었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그래서 일행은 소쇄원만큼은 꼭 둘러보고 싶은 것이었다. 소쇄원으로 향했다. 길가 오른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입구로 들어서니 좌우에 대나무 숲이 울창하다.

그러나 정작 소쇄원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나즈막한 산골짜기 개울가에 서 있는 허름한 옛 건물 몇 채가 고작이었다. 길가 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골짜기를 건너는 어설픈 다리를 건널까 하다가 지나치니 초가지붕 정자가 나타난다. 시골마을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정자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초가지붕 정자. 대봉대다.


▲ 소쇄원 대봉대 ⓒ 이승철

대봉대는 봉황을 기다리는 집이라는 뜻이다. 그럼 봉황은 무엇인가? 옛 '산해경' 기록에 의하면 '동방 군자의 나라에 출현한 봉황은 먹는 음식이 자연의 법도에 맞을 뿐만 아니라, 저절로 노래하고 춤추는데, 이 새가 나타나면 천하가 태평해진다'고 했다. 정자는 허술해 보여도 소쇄원 주인의 고상한 품격과 염원이 담긴 이름이다.

소쇄원은 조선 중종 때 홍문관 대사헌을 지낸 양산보가 세운 원림이다. 양산보는 은사인 개혁파 거두 조광조가 훈구파의 모함으로 유배당하자 스승과 함께 세상의 뜻을 버리고 낙향하여 이곳에 눌러앉은 것이다. 한문자 '소쇄'란 기운이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다

대봉대에서 낭떠러지로 뚝 떨어진 개울 건너 내려다보이는 전각이 광풍각이다. 외나무다리 같은 어설픈 다리를 건너 내려선 곳이 광풍각. 소쇄원의 사랑방이다. 존경하던 스승을 잃고 세상에 대한 뜻을 접은 선비 양산보가 찾아온 손님들과 함께 시를 읊고 술을 마시며 마음을 달래던 곳이다. 마루 아래 계곡은 오곡문을 통과한 계곡물이 거침없이 흐른다.


▲ 광풍각 옆모습 ⓒ 이승철

고풍스런 광풍각 마루에 누군가 칼끝으로 그어놓은 듯한 것은 장기판? 아니다, 그렇다고 바둑판도 아니고, 그래 바로 고누판이다, 낯선 모양이 또 하나 더 있다. 선비의 기개처럼 꼿꼿하게 서 있는 기둥들 중에 향단이 허리처럼 날렵하게 굽은 기둥 하나, 그런데 그것 참, 왜 보기 싫지 않고 그리 잘 어울릴까? 부조화 속에 조화로다.

뒤로 난 쪽문을 나서면 높직하게 솟아 있는 정자가 제월당이다. 그 옛날 중국의 송나라 명필이었던 황정견이 주돈이(북송시대 명성을 날렸던 학자)를 가리켜 '흉회쇄락 여광풍제월'이라 한 기록이 송사 주돈이 전에 전하는데 '광풍각'과 '제월당'은 여기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제월은 '비가 갠 뒤의 밝고 맑은 달'을 일컫는다. 제월당은 양산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던 곳이다. 높직한 토방 위에 기둥을 받치고 선 투박한 주춧돌들은 다듬지 않은 자연석 그대로여서 모나지도 두드러지지도 않은 고만고만한 모양이다.


▲ 제월당을 찾은 여행객들 ⓒ 이승철

조광조 문하 양산보가 세운 멋스러운 원림

"허허 과연 이만하면 명승이 맞네. 헛소문이 아니었구먼."
  
소쇄원에 들어설 때만 해도 조금은 실망한 듯 보였던 일행이 마루에 걸터앉으며 감탄하는 말이다. 계절이 겨울이어서 더욱 그랬다. 골짜기 아래 쪽 대나무 숲이 청청하고 소나무들이 있긴 했지만 산골의 겨울풍경은 조금은 황량했다. 그런데 제월당 마루에 걸터앉아 바라보는 풍경은 그게 아니었다.

발아래 광풍각 지붕너머로 바라보이는 대나무 숲이며, 골짜기를 타고 흘러온 개울이 대나무 숲 사이로 빠져드는 풍경이 그런대로 멋진 풍치다. 겨울 햇살이 밝게 비쳐드는 제월당 마루에 앉아 500여 년 전의 낙향선비 양반보를 그려보는 멋도 쏠쏠한 풍류였다.

"저쪽 오곡문을 보십시오? 계곡을 가로지른 저 담장이 아슬아슬해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일행들보다 먼저 도착한 여행객 몇 사람이 반대쪽으로 돌아 마당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에게 중년여성 한 사람이 계곡 위쪽을 가로막은 담장을 손으로 가리킨다.


▲ 대나무 숲길로 들어가는 소쇄원 입구 ⓒ 이승철

"담장 아래쪽을 보십시오. 비뚤비뚤 돌을 쌓아 담장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이 어설프지요?
그런데 저렇게 엉성해 보이는 돌담장이 어떻게 500여 년 동안 무너지지 않고 지금까지 버텨왔을까요?"

뜻밖의 질문이었다. 소쇄원에 들러 정자들과 주변 경치를 둘러보면서 위쪽에만 둘러있는 담장에는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을 듣고 담장 가까이 다가갔다. 담장은 붉은색이 감도는 황토와 돌을 섞어 쌓은 위에 기와를 얹은 모습이었다. 특별하다면 그 담장 벽면에 검정색 한문글씨로 오곡문(五曲門)이라 쓰여 있는 글씨가 조금 유별난 것이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모습을 발견했다. 담장이 계곡을 가로질러 건너고 있었는데 계곡 가운데 그 담장을 받치고 있는 단 한 줄의 돌들이 너무 아슬아슬했기 때문이다. 안정감이 전혀 들지 않는 모습, 정말 엉성한 모습이었다. 폭우라도 쏟아져 계곡물이 세차게 흘러내리면 금방이라도 휩쓸려 무너질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 대봉대에서 내려다본 광풍각(앞)과 제월당(뒤) ⓒ 이승철

그런데 거의 500여년, 더구나 근년 들어 자주 퍼부은 집중호우를 어떻게 견뎌내고 저렇게
말짱할 수 있단 말인가? 호기심이 발동했다. 흥미진진한 수수께끼를 푸는 소년처럼 주변과 계곡을 살펴보았다. 담장 끝 쪽 골짜기 길이 열려 있을 뿐 눈에 확 띄는 그 무엇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계곡물이 넘쳐 열린 길 위로 흘렀다면 담장은 절대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하! 바로 저거야, 계곡 물길에 장애가 되는 것은 저 한 줄의 담장 받침돌 밖에 없잖아요?"

일행 한 사람이 손뼉을 탁 친다. 바로 그것이었다. 담장 밑 계곡이 넓고 높게, 그리고 아주 시원하게 뻥 뚫려 있었다. 담장은 그냥 경계표시에 지나지 않았다. 뻥 뚫린 담장 밑 계곡으로는 황소라도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넓고 크게 열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폭우가 쏟아져도 계곡물의 흐름에 방해가 되지 않으니 비록 어설퍼 보이는 담장 받침도 무너지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뭐랄까? 마치 치마 걷어 올린 여인네의 종아리, 흙돌담의 모습이 그랬다. 요즘이라면, 아니 그 시절에도 어느 마음씨 좋은 양반 댁이 저렇게 담장 밑을 활짝 열어놓을 수 있었을까? 꼭꼭 닫아 가두는 것이 담장의 역할 아니던가. 그런데 제 가랑이 활짝 열어 가랑이 사이로 산바람, 시냇물, 온갖 짐승들까지 드나들게 만든 저건 담장인가? 문인가? 참으로 놀라운 발상과 배짱의 소산이다.


▲ 뻥 뚫린 계곡 위에 놓인 엉성한 받침돌 위에 걸려 있는 담장 ⓒ 이승철

500년을 견고히 서 있는 담장과 오곡문

요즘의 담장, 철옹성처럼 빈틈없이 안과 밖을 차단한 그런 담장하고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저 경계표시, 아니 어쩌면 담장의 역할보다 멋스러운 모양으로 그냥 쌓아 놓은 작은 구조물에 지나지 않는 그런 담장이었다. 참 너그럽고 소탈한 모습이다. 활짝 열려 있었던 양산보라는 주인의 마음을 닮은 모습이라고 생각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경계가 열려 길이 되고 장애가 막히지 않아 길이 된 소쇄원 오곡문과 흙돌담, 흐름을 가로막지 않으니 무너지지 않고, 경계는 있으되 장애가 되지 않는 담장, 그 담장에서 막히지 않은 참다운 세상을 보고 인생을 배운다. 바로 소통이었다. 요즘 어느 일방의 꽉 막힌 소통의 답답함이 소쇄원 오곡문에서 시원하게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 읽고 배웠던 전남 담양의 소쇄원은 기대했던 것만큼 대단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 여성 여행객이 툭 던진 말 한마디에 찬찬히 살펴본 오곡문과 흙돌담이 찬바람 부는 겨울 담양여행의 백미로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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