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23일 월요일

돌려막기 경제, 남은 카드가 없다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01-21일자 기사 '돌려막기 경제, 남은 카드가 없다'를 퍼왔습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바로가기

» 독일 프랑크푸르트 중심가에 위치한 유럽중앙은행(ECB) 앞에 세워진 대형 유로화 상징물 밑으로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2008년 이후 금융 상황이 쉴 새 없이 악화되는 것을 가리키기 위해 쓰고 있는 ‘위기’라는 개념은 어떤 유구한 체계에 느닷없이 이상이 생겼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원상복구를 하기 위해 무절제했던 그동안의 행태를 고치는 것 정도로 충분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사태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국가들에 도입된 민주자본주의가 넘을 수 없는 어떤 혼돈을 내포하고 있다면 어떨까?
매일같이 현 경제위기를 수놓고 있는 사건들을 보면 ‘시장’이 국가를 지배함을 알 수 있다. 자칭 ‘민주주의 주권국가’라고 하나 국가는 시민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에 한계를 그어놓고 시민이 요구할 수 있는 것에 양보를 종용하는 모습이다. 국민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확인한다. 바로 정치 지도자들이 자국민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국가나 민주주의의 준엄한 원리에서 비켜 있는 유럽연합(EU)이나 국제통화기금(IMF) 같은 국제기구들을 위해 봉사한다. 대부분은 지금 이런 상황에 대해 대체로 안정적 기초경제 여건에 사소한 장애가 발생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냥 위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대불황’(Great Recession)과 그로 인해 거의 붕괴된 공공재정은 모두 시장의 요구와 민주주의의 요구 간 줄다리기에서 결국 자본주의 사회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시장과 민주주의 간의 갈등은 혼란과 불안정을 낳는다. 따라서 현 경제위기를 이해하려면 본질적으로 갈등을 내포한 ‘민주자본주의’라 부르는 이 체제의 변환을 조명해야 한다.
1960년대 말 이후 정치민주주의와 시장자본주의 사이의 모순을 뛰어넘기 위해 세 가지 방안이 차례로 도입됐다. 첫째 해결 방안은 인플레이션, 둘째는 공공부채, 셋째는 민간부채다. 각 방안의 해결 방식에 따라 경제세력, 정치권, 사회세력 사이에는 특별한 관계가 형성됐다. 그러나 이런 방안은 차례로 위기에 봉착했다. 2008년 금융 환란은 결국 세 번째 방안의 종언과 함께, 그 성격이 어떠할지 불확실한 새로운 관계의 시작을 보여준다.

민주주의와 시장, 태생적 갈등관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민주자본주의는 1960년대 말부터 첫 위기를 겪었다. 당시 서방세계 전체에 인플레이션의 소용돌이가 시작되고 있었다. 경제성장 침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노사 갈등 해소와 평화로운 관계의 지속성을 급작스럽게 위협했다. 당시까지 수용된 관계 방식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노동계층은 정치민주주의에 대한 대가로 시장경제와 사유재산제를 수용했다. 당시 정치민주주의는 사회보장과 지속적인 생활수준 향상을 보장했다. 20여 년간, 통제 없는 경제성장이 계속되면서 사회·경제적 진보가 민주시민권을 형성한다는 신념을 고착화했다. 정치 지도자들은 이런 세계관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나, 다양한 정치적 요구들이 불거졌다. 복지국가 확장, 자유로운 단체협상에 관한 노동자의 권리와 완전고용의 정치적 보장 같은 요구였다. 정부는 케인스 경제정책을 대대적으로 실행함으로써 이 모든 요구 사항의 수용에 나섰다.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성장세가 둔화되면서 이런 관계는 지속되기 힘든 상태에 이른다. 노동사회적 저항이 전세계에 확산되면서 불안정이 대두됐다. 아직 실업의 공포를 실감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생활수준 향상 같은 자신의 진보적 권리라고 여겼던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이후 몇 년에 걸쳐 서방세계의 정부는 모두 같은 문제에 직면한다. 어떻게 완전고용에 대한 케인스식 비전을 고수하면서 노조의 임금 인상 요구를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1970년대, 대부분의 서방 정부는 실질임금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실업률 상승을 내버려두면 자신의 존립 기반이나 민주자본주의를 위협하게 된다고 믿었다(이는 국가 최고위 계층에서 공유된 신념이기도 했다). 각국 정부는 이런 난관에서 벗어나려 완전고용과 자유로운 단체협상을 동시에 지속하면서 하나의 방안을 강구하게 되었다. 바로 인플레이션 확대를 각오하고 통화정책을 완화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노동자에게 물가 상승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물가 상승에 실질임금을 연동하도록 강요할 수 있는 상당히 강한 노조가 이들을 대변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플레이션은 채권자와 금융자산 보유자, 즉 상대적으로 노동자층이 거의 없는 계층의 자산을 침식하면서 손해를 입혔다. 이런 점에서 인플레이션은 분배의 갈등이 통화를 통해 그대로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쪽은 고용 안정과 국가 수입에 대한 더 많은 지분을 요구하는 노동자 계층이고, 다른 한쪽은 투자에 대한 이익 환수를 최대화하려 애쓰는 자본가 계층이다. 양쪽은 각자 회귀하게 되는, 서로 양립이 불가능한 사상을 토대로 한다. 한쪽은 시민권을 주장하고 다른 한쪽은 사유재산과 시장을 내세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인플레이션은 한 사회의 아노미를 표출한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사회정의의 공통 기준에 대한 합의점에 도달할 수 없는 아노미다.

성장 둔화와 마주친 케인스주의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각국 정부들이 경제성장을 통해 계층 간 반목을 완화할 수 있었다면, 인플레이션은 실질 경제가 생산하지 않은 자원을 짜내면서 소비수준과 소득의 재분배를 유지할 수 있게 했다.
어쨌든 이런 갈등 중재 전략은 효과적이었지만 무한정 지속될 수 없었다. 결국 자산 보호에 고심하던 자본가 쪽의 반발을 야기했다. 이들의 대응으로, 처음에는 노동자에게 유리했던 인플레이션이 실업을 낳으면서 노동자를 벌하게 된다. 시장의 압력을 받은 각국 정부는 재분배 중심의 임금 합의를 포기하고 통화 규제로 돌아서게 된다.
제임스 카터 미국 대통령(1977~81)에 의해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으로 새로 지명된 폴 보커가 전례 없는 금리 인상을 단행하기로 결정하면서 인플레이션은 1979년 이후 안정됐다. 금리 상승 때문에 대공황 이후 초유의 실업을 기록하게 되었다. ‘폴 보커의 쿠데타’는 투표를 통해 인정받게 된다. 처음에는 보커가 취한 디플레이션 정책의 여파를 우려한다고 말했던 로널드 레이건이 1984년 재집권한 것이다. 1983년 영국에서는 미국 정책을 따르는 엄격한 통화정책으로 실업자가 급증하고 급속한 탈산업화가 야기됐음에도 마거릿 대처가 총리 연임에 성공했다. 두 나라에서 디플레이션은 노조에 대한 합법화된 탄압을 동반했다. 이후 몇 년에 걸쳐 자본주의 국가 전체에서 인플레이션은 제어됐지만 실업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특히 프랑스의 실업률은 1980년 5%에서 1988년 9%로 증가했다. 같은 때 노조가입률은 급감했고 파업도 드물어져 일부 국가에서는 집계조차 그만두었다.
신자유주의 시대는 앵글로색슨 국가들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민주자본주의의 한 축을 폐기 처분한 시점에 시작됐다. 그 축이란 실업은 집권 정부뿐 아니라 사회 구성 방식의 존립 기반인 정치적 지지를 무너뜨린다는 생각이다. 전세계의 정치 지도자들은 레이건과 대처가 이끈 정책 경험을 큰 관심을 갖고 추종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을 끝내면 경제 무질서가 해결될 것이라고 희망하던 자들은 곧 스스로 그 비용을 치르게 되었다. 인플레이션은 멈추었지만 공공부채가 그 자리를 대신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공공부채는 하늘로 치솟았다. 그 이유는 다양하다.
인플레 확대 동반한 임금 상승
먼저 경기침체로 납세자들은 세금 납부에 적대적으로 변했다. 부유하고 사회적 영향력이 큰 사람들이 유독 심했다. 물가 상승을 억제하면서 자동적으로 세수 증가(소득 증가에 연동한)도 멈추었다. 이는 국가 통화의 가치를 하락시켜 공공부채를 지속적으로 경감하는 것도 끝났음을 의미했다. 사실 통화가치 하락은 초기에는 경제성장을 보완했다가 점차 부채를 줄이기 위한 최상의 수단으로 변해왔다. 통화 안정화에 따른 실업 상승으로 국가는 사회 지원 비용을 늘려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게다가 1970년대 노조의 임금 상승 완급 조절 수용(일종의 차등화된 임금체계)을 대가로 형성된 여러 사회적 권리들에 대한 요구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는 점차 공공재정을 무겁게 짓눌렀다.
시장의 압력, 통화 규제로 급선회
시민과 시장의 요구 사이의 간극을 해소하기 위해 인플레이션을 다시 활용하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사회 평화를 유지하는 부담은 국가에 돌아갔다. 한동안 공공부채는 기능적으로 인플레이션 같은 유용한 도구였다. 실제 인플레이션과 똑같이, 공공부채는 분배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정부가 아직 생산된 바 없는 자원을 유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달리 말하면 미래의 자원을 가져와 오늘 필요한 자원으로 충당하는 것이다. 시장과 사회의 요구 간 다툼이 생산의 터에서 정치의 터로 옮겨가면서 노조투쟁은 선거 압력으로 바뀌었다. 돈을 계속 찍어내는 대신, 정부가 먼저 나서 돈을 더 빌려오게 된다. 인플레이션 정도가 미미했기에 채권자들은 국채의 장기적 가치에 안심했고, 이런 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공공부채 늘리며 노동자 달래기
그러나 공공부채 축적도 영원히 지속될 수 없었다. 오래전부터 경제학자들은 공공적자가 유용가능한 재원을 고갈시키고 금리 상승과 경기 둔화를 야기하며 민간 투자를 고사시킬 것이라고 정권에 경고해왔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임계점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렇더라도 한동안은 금융시장 규제를 완화하면서 상대적으로 저금리를 유지하고, 노조를 무력화하면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저축률이 예외적으로 낮은 미국은 곧바로 자국민과 외국 투자자들에게까지 국부펀드를 포함해 국채를 팔기 시작했다. 더구나 부채 부담이 커질수록 공공재정에서 이자를 지급하는 비중이 증가했다. 특히 사전에 규정할 수 없는 어느 시점에 국내외 채권자들은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할 터였다. 따라서 ‘시장’은 국가에 재정 규율과 이자 보전에 필요한 엄격한 공공예산을 실행하도록 압박하기 시작했다.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이중 적자 문제가 주요 쟁점이었다. 연방정부 적자와 국가 전체의 무역수지 적자였다. 이 문제를 선거 전략 중심으로 삼은 빌 클린턴이 승리하면서 ‘재정 건전화’(Fiscal Consolidation)에 역점을 둔 정책의 신호탄이 울린다. 전세계적으로 미국의 주도 아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IMF 등이 이런 노력을 적극적으로 약속했다. 초기 민주당 내각은 대대적인 사회 개혁을 통해 경제성장을 진작하고 세금을 올리면서 적자를 줄이려 했다. 그렇지만 1994년 민주당은 중간선거에서 의석 과반수를 얻지 못한다. 클린턴은 노선을 급선회해 공공비용 감축이 골자인 긴축정책을 받아들인다. 수십 년에 걸쳐 처음으로 1998∼2000년 미국 연방정부는 예산 흑자를 기록한다.


» 지난해 11월 ‘탐욕’ ‘그릇된 우상’이라 적힌 황금소 모형을 메고 월가를 행진하는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대.

시장의 새 압력, 재정 건전화
그러나 클린턴 행정부는 항구적으로 민주자본주의 정치의 경제를 순조롭게 진행시키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그의 사회갈등 조정 전략은 많은 부분에서 레이건 정권 때 이미 시작된 금융 분야 규제 완화를 확대하는 내용이었다. 노조의 지속적 쇠락과 사회보장 지출의 대대적 삭감, 재정 건전화 정책으로 위축된 수요 등으로 소득 불평등이 급속히 심화되자, 이를 상쇄하기 위해 개인과 기업들에 전례 없는 수준의 대출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공공부채가 민간부채로 대체된 것을 가리키는 그럴듯한 이름의 ‘민간 케인스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정부는 더 이상 양질의 주택을 평등하게 공급하거나 노동자를 교육할 비용을 대기 위해 돈을 빌리지 않는다. 이제는 개인들이 자신의 교육, 또는 더 나은 주거지로 옮기는 비용을 대기 위해(4) 위험과 리스크를 각오하고 대출 계약을 하게 된다(실제 거의 선택의 여지가 없다).
대출 확대, 공공부채를 민간부채로
클린턴 행정부에서 도입한 정책은 상당한 행복을 창출했다. 부자들은 세금을 덜 냈고, 그중에서 미리 눈치채고 금융 분야에 투자한 이들은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그런데 빈곤층도 전혀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적어도 초기에는 그랬다. 서브프라임 신용과 이에 따른 ‘부의 신기루’가 복지 지원금 삭감과 임금 상승(‘유연화’된 노동시장의 최하위층에서는 존재하지 않던)을 대체했다. 특히 흑인들에게 주택 취득은 단순히 ‘아메리칸드림’을 실현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들이 일자리에서 보장받지 못했고, 지속적인 긴축에만 매진하는 정부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던 퇴직연금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민간 케인스주의’로 금융 초호황
따라서 자유화는 재정 건전화와 공공 긴축정책을 상쇄했다. 공공부채에 이어 민간부채까지 가세해 국가 주도의 공공 수요를 대체하게 된다. 고용과 이익을 지탱하는 것은 개인 수요였고, 특히 부동산 부문은 더욱 심했다. 이런 동력은 앨런 그린스펀이 이끄는 FRB가 경기침체 및 실업률 재상승을 막기 위해 저금리를 도입하는 2001년부터 가속화했다. 그러나 ‘민간 케인스주의’는 금융 분야에서 사상 최대의 이익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경제 호황의 중심축이기도 했다. 이는 유럽 노조들의 한없는 부러움을 샀다. 유럽 노조는 미국 사회의 급속한 부채 확산을 야기한 그린스펀의 통화 확대 정책을 모델로 한 정책을 입안한다. 유럽 노조는 유럽중앙은행과 달리 미국 FRB가 통화 안정을 지키는 것뿐 아니라 높은 고용을 유지해야 할 법적 의무를 지닌 점에 열렬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2008년 이것들은 모두 끝나버린다. 국제 신용의 피라미드가 갑자기 붕괴하면서 말이다. 이 피라미드는 1990년대 말과 2000년 초기 경제 번영의 토대였다.
인플레이션, 공공적자, 그리고 민간부채로 이어지는 시대를 지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민주자본주의는 이제 네 번째 단계로 진입했다. 전세계 금융 시스템이 내폭하려고 하자 국가들은 그 전에 재정 건전화 정책을 상쇄할 목적으로 용인한 치명적 대출을 사회화하면서 경제 신뢰를 회복하려 했다. 실물 경제 붕괴를 막는 데 필요한 경기 부양과 맞물려 이런 조처는 공공적자를 더욱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했다. 그 경과를 보면 알겠지만 이런 사태는 일부 이론의 주장과 달리, 세계은행과 IMF 체제하의 1990년대에 벌어진 기회주의 지도자나 공공기관의 잘못된 지출 탓이 아니었다.
위기, 그리고 부실채권의 사회화
그 경과는 이렇다. 2008년 이후 민주자본주의에 내재된 분배 갈등은 국제 금융 투자자들과 각 주권국가 간의 치열한 싸움으로 바뀌었다. 과거에는 노동자와 사장, 시민과 재정 부처, 개인 채무자와 민간은행 간의 싸움이었지만 오늘날은 금융기관들이 국가와 진검승부를 벌이고 있다. 금융기관들은 최근까지 국가를 협박해 자신을 구제하도록 요구했다. 앞으로는 이런 상황의 근본인 그 역학관계가 어떤 것인지 규정하는 일이 남았다.
실례로 금융위기 초기 이후부터 금융시장은 국가별로 상이한 금리를 요구했다. 금융시장이 각국 정부에 차등적으로 압력을 행사하면서 해당 국가의 국민은 전례 없는 재정 감축을 감내해야 했다. 천문학적인 금액의 부채가 국가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에, 아주 미미한 수준의 국채 금리 상승도 여차하면 재정 파탄을 야기할 수 있다. 동시에 국가들이 디폴트(채무불이행)를 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시장은 국가를 너무 강하게 압박해서도 안 되는 상황이다. 따라서 일부 국가들은 가장 위태로운 상황에 있는 다른 국가들을 기꺼이 도우려 한다. 그렇게 해서 국채 금리 상승을 대비하는 것이다.
시장이 기대하는 것은 단지 재정 건전화만이 아니다. 시장은 경제성장에 대한 합리적인 전망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재정 건전화와 경제성장, 이 둘을 어떻게 동시에 달성할 것인가? 아일랜드가 재정 적자 감소를 위한 강력한 조처를 약속했을 때 아일랜드 부채의 리스크 프리미엄은 낮아졌다. 그러나 몇 주 뒤 프리미엄은 다시 상승했다. 경제재건 계획이 너무 혹독해 어떤 경기회복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민주자본주의 정치를 실행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대공황 이후 정책 결정자들이 이렇게 불확실성이 큰 상황과 대면한 적은 없었던 듯하다.
게다가 일부에서는 사상 초유로 저금리의 돈이 넘쳐나면서 새로운 거품이 형성되고 있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서브프라임 모기지에 대한 투자가 더 이상 이루어지고 있지 않지만, 원자재나 새로운 인터넷 경제 전망은 매력적이다. 금융회사들은 주요 고객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새로운 성장 분야’가 될 것으로 보이는 분야에 중앙은행이 공급해준 넘치는 유동성을 이용할 소지가 충분하다. 어쨌든 금융 분야 규제를 목표로 한 개혁들이 거의 실패하는 바람에 자본은 예전보다 더 성마르게 요구 사항을 내놓을 수 있게 됐다. 2008년 ‘대마불사’(大馬不死)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 은행들은 2012년이나 2013년에도 같은 도움을 바랄지 모른다. 그리하여 3년 전 국가를 상대로 능수능란하게 펼쳤던 협박을 다시 실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본주의의 공공구제는 불가능할지 모른다. 공공재정이 능력의 한계치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민주자본주의에 남은 카드는 있나
현재 민주주의의 위기는 경제를 짓누르는 위기만큼이나 심각하다. 현대사회의 ‘시스템 통합’, 즉 자본주의 경제의 효율적 운영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을 뿐 아니라 ‘사회적 통합’도 흔들리고 있다. 새로운 긴축 시대가 열리면서 시민의 권리와 자본 축적의 요구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각국의 능력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또한 국가 간 상호의존 관계가 더욱 심화되면서 경제와 사회, 또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간의 갈등을 국내 차원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은 갈수록 현실성이 떨어지고 있다. 어떤 정부도 더 이상 국제사회의 제약과 의무, 특히 자국민을 희생시켜야 하는 금융시장의 강요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자본주의의 위기와 모순은 국가 내에서뿐만 아니라 국가 관계에서도 아직은 알 수 없는 조합과 교체를 진행하며 점차 국제적 양상으로 확산되고 있다.
1970년대 이후 경제위기의 흐름을 관찰해볼 때, 민주자본주의가 사회 갈등을 조정할 (한시적이긴 해도) 새로운 방안을 찾게 될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치적으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위치에 견고히 버티고 있는 자본가 계층, 즉 국제 금융산업에 전적으로 유리한 방향일 것이다.
글 / 볼프강 스트리크 Wolfgang Streeck
막스플랑크 사회연구소(쾰른) 소장. 본문은 2011년 9~10월 발행된 (New Left Review) 71호(런던)에 게재된 분석 내용을 축약한 것이다.

번역 / 박지현 sophile@gmail.com
남극보호연합(ASOC) 동아시아지부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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