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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3일 월요일

‘남영동1985’ 본 박원순 큰소리…왜?


이글은 경향신문 2012-12-02일자 기사 '‘남영동1985’ 본 박원순 큰소리…왜?'를 퍼왔습니다.

박원순 서울 시장이 고(故)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의 자전적 수기를 바탕으로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벌어진 고문기록을 담은 영화 (남영동1985)를 관람했다.
 

박 시장은 2일 오후 시내 한 영화관에서 보좌관 등 시 관계자 서너명과 함께 (남영동1985)를 관람한 뒤 정지영 감독, 배우 박원상, 이경영, 김의성과 함께 티타임을 통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20여분간 진행된 이 자리에서 박 시장은 “배우들이 (영화찍느라) 매우 힘들었을 것 같다”며 “누구나 한번은 봐야할 영화다. 이런 사회가 저절로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영화”라고 말했다.


2일 오후 서울의 한 영화관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왼쪽에서 세번째)이 영화 (남양동1985)를 관람한 후 배우 김의성씨, 정지영 감독, 배우 박원상씨 등(왼쪽부터)과 함께 포스터 앞에서 사진 을 찍고 있다. /서울시 제공
이어 “(나도)고문자들을 변호하다가 이거 보통 일이 아니다 싶어 일제시대부터 노무현 시대까지 고문 자료를 모아 (야만시대의 기록)이라는 책을 썼다”고 덧붙였다. 이에 정 감독은 “원래 시나리오를 썼을 때 (그 책 제목을 본따서) ‘야만의 시대’라고 제목을 붙였는데 TV 대하드라마 같아서 바꿨다”고 말했다.
 

또 정 감독이 “수능을 끝낸 고등학생들이 오히려 이 영화를 더 잘 보고 잘 받아들인다”고 하자 박 시장은 “제 트위터에 글 올린 거 보면 요즘 중고등학생들이 얼마나 똑똑한 지 모른다”고 응수했다.

이밖에 박 시장은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근황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눈 뒤 영화 관계자들과 기념 사진을 촬영했다.
 

박 시장의 영화 관람에 대해 서울시 관계자는 “박 시장이 지난 9월 를 개인적으로 관람한 이후 (남영동1985)와 (26년)도 보고싶다고 얘기해 와 공식 스케줄로 잡았다”고 말했다.
 

(남영동1985)는 야권 대선주자로 나선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후보와 무소속 안철수 전 후보도 본 적이 있을 만큼 정치계에서도 주목을 받은 영화다. 또 진보정의당 심상정 전 후보,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 도 나란히 관람한 바 있다.

문주영 기자 mooni@kyunghyang.com

2012년 11월 15일 목요일

몽둥이 찜질에 똥 지리고... 왜 말 못했냐고요?


이글은 오마이뉴스 2012-11-14일자 기사 '몽둥이 찜질에 똥 지리고... 왜 말 못했냐고요?'를 퍼왔습니다.
[리뷰] '진실을 위한 고통' 영화 (남영동1985)

  
▲ 영화 <남영동1985> 포스터 ⓒ 아우라픽쳐스

"고통스러운 영화다." 

남영동 1985) 시사회를 마치고 함께 영화를 본 동료들이 이구동성으로 내뱉었다. 영화를 보고 감동이나 재미를 느끼는 게 보통이다. 호러물, 납량극처럼 공포를 주는 영화도 있지만, 그러나 (남영동 1985)는 '고통' 그 자체다. 

12일 저녁 서울 코엑스 메가박스 M2관. 정지영 감독의 (남영동 1985) 시사회가 열렸다. 주최 측의 배려인지는 모르겠으나 고 김근태 의장(민주화운동청년연합 초대의장, 민주당 상임고문)과 함께 활동했던 '민청련동지회' 회원들에게 맨 앞열(A열)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미 한 여성회원은 집에서 심장약을 먹고 왔다며 영화에서 받을 충격을 걱정했다.

회원들은 김근태 의장의 부인인 인재근 의원이 끝까지 영화를 볼 수 있을지를 걱정했다. 김 의장과 함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하고 지금까지도 고통을 받고 있는 민청련 회원과 가족들은 아예 참석하지 않았다. 문재인, 안철수, 심상정, 이정희 대선후보들도 객석 중앙에 나란히 앉았다. 

시사회에 앞서 감독과 배우들이 무대에 올라 객석을 향해 인사를 했다. 정지영 감독은 "김근태 의장이 받았던 그 고통을 공유하자"며 영화 내용을 암시했다. 김근태 의장에 해당하는 '김종태' 역을 맡은 박원상씨에 이어서 고문기술자 이근안에 해당하는 '이두한' 역(극중에서는 '장의사'라는 별명으로 불린다)을 맡은 배우 이경영씨가 나서서 인사말을 했다. 

"다시는 (남영동) 같은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유명 배우, 화려한 무대에 즐거워야 할 시사회는 곧 무언가 터질 것 같은 긴장감으로 가득찼다.         

'완전한 항복'을 받아내는 고문의 기술들

▲ 민청련 김근태 의장(맨 왼쪽)이 1988년 6월 30일 김천교도소에 출소한 날 아침 후배 이해찬 의원, 장영달 전 의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뒤쪽 오른쪽 현수막을 들고 있는 이가 필자다. ⓒ 진성준 의원실

영화는 27년 전인 1985년 9월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시작된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민청련 초대의장 김종태를 잡아들였다. 처음에는 북한 간첩과 접선을 하고, 부산에서 몰래 배를 타고 평양을 다녀온 '빨갱이 간첩'으로 몰아갔다. 그러나 고문을 통해 거짓 자백을 받아내는 형식으로 이런저런 알리바이를 맞춰보지만 '오바했다'고 판단한다. 결국 수사관들은 김종태를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해 국가전복을 노리는 '폭력 혁명가'로 만들어낸다. 

여기에는 고문이 동원된다. 잠 안 재우기, 반복해서 조서 쓰기, 몽동이 찜질과 발길질, 욕탕에 머리 처박기 등 '낮은 단계의 고문'이 시작된다. 김종태는 이 단계에서 이미 무너지고 '항복'을 하게 된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진술서는 작성된다. 그리고 고문 때문에 항복했다는 수치심과 자신의 허위 자백으로 끌려와 자신과 같은 고문을 당할 동지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극한의 고뇌에 몸부림친다. 사랑하는 아내, 아들딸은 환상 속에서 맴돈다.

그러나 그들의 고문은 계속된다. 이른바 '높은 단계의 고문'이 김종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것을 '공사를 치른다'고 했다. 칠성판에 발가벗겨진 채 몸은 묶인다. 그들은 '완전한 항복'을 요구한다. 신념은 물론 자존심, 인격, 체면, 수치심 등 모두 내던질 것을 요구한다. 물고문, 고춧가루고문, 성기고문, 전기고문…. 

이러는 사이 고문기술자를 비롯한 수사관들은 프로야구 중계를 듣고, 여자친구 문제, 가족들 문제, 시험과 승진 등 일상의 대화를 나눈다. 야만성, 잔혹한 자신의 행위 곁에는 항상 그들의 일상이 자연스럽게 놓여져 있다. 고문기술자 이두한은 물고문, 전기고문을 하면서 휘파람으로 (클레멘타인) 노래를 분다. 그는 고문을 즐긴다.

잠시 고문이 멈춘 사이, 항복한 줄 알았던 김종태는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을 뿐이다"라고 마지막 외마디를 지른다. 이 말에 격분한 남영동 '윤사장'(문성근 분)과 이두한은 김종태의 목에 개줄을 달고 개처럼 기어서 짖게 하고 개밥을 먹게 하고, 또 다시 칠성판에 들어오게 한다.

트라우마, 진실을 대할 때 풀린다

▲ 김근태 민청련 초대의장. 1988년 9월 30일 성남민청련 창립식에서 '민족민주운동의 진로'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 최경환

세월이 흘러 김종태는 정부의 장관이 되어 감옥에 갇힌 고문기술자 이두한을 찾아간다. 이두한은 김종태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김종태의 귓가엔 그가 고문을 하면서 천연덕스럽게 부르던 (클레멘타인) 휘파람 소리가 들려온다. '트라우마'다. 가해자가 아무리 용서를 구해도 끝까지 남아있는 지울 수 없는 고통과 치욕의 기억. 

고문, 수감, 의문사, 열사, 반인권적 공권력 희생자, 민간인학살 등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자들이 너무도 많다. 그들과 그 가족들은 지금도 육체적, 정신적 고통 속에 살고 있다. 김근태 의장은 고문의 피해가 파킨슨병으로 전이되어 1년 전 세상을 떠났다. 고문의 피해는 대인기피, 우울증, 피해의식, 반복되는 악몽 등 그 증상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한다. 

필자도 남영동 대공분실 '출신'이다. 대학 3학년 때인 1981년 6월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30여 일 동안 '낮은 단계의 고문' 상태에서 지냈다(그뒤 옥인동 대공분실에서 10여일, 모두 43일간 불법 감금상태에 있었다). 김근태 의장이 남영동에 끌려가기 4년 전 일이다. 이른바 '학림사건' 관계자다. 지난 6월 대법원의 무죄판결이 나면서 신경정신과를 찾았다. 

의사가 물었다. "왜, 그런 고통을 주위에 말하지 않느냐?'고. 나는 한순간 말을 잇지 못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치욕을 당한 건 말하기 힘들어요. 본능이지요. 감추려고 하는 거지요. 몽둥이 찜질을 당하면서 나도 모르게 똥을 지리고, 군홧발에 걷어차이면서 죽을 것 같아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여자선배를 목욕탕에 들여놓고 그것을 훔쳐본 경찰놈들을 눈앞에서 보면서 한마디도 하지 못한 무기력한 내 모습을 누구한테 말할 수 있겠습니까. 평생 가지고 사는 거지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기가 두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화를 보아야 한다. 지난 10월 18일 국가폭력 희생자들의 치유를 목적으로 광주에 트라우마센터가 세워졌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이 센터의 책임을 맡은 강용주 선생은 1985년 이른바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고문을 당하고 무려 14년간이나 감옥생활을 했다. 그는 비전향 최연소 장기수다. 그 또한 고문 피해자이면서 트라우마 치료 의사다. 내가 신경정신과 의사와 나눈 대화 내용을 소개하자 강용주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말해야 합니다. 말해야 풀립니다. 감춰둔다고 해서 감춰질 수 없고, 그게 트라우마를 더욱 깊게 합니다. 치욕, 분노는 잠재의식으로 내면에 쌓이게 되고 다른 방식으로 '배설'을 하게 됩니다. '배설'은 치유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더욱 깊게 파괴하는 것입니다. 진실을 회피해서는 치유될 수 없는 게 트라우마입니다."

(남영동1985)도 마찬가지다. 진실을 접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진실을 시각영상으로 확인하는 일은 더욱 두려운 일이다. 아유슈비츠의 진실도, 마루타의 진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남영동 1985)는 비정상적인 국가체제가 인간을 얼마나 잔악하게 만드는지, 또 인간의 본성, 영혼이 얼마나 쉽게 파괴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이 영화를 꼭 보아야 하는 이유는 진실을 직면했을 때 치유의 길이 있기 때문이다.

휘파람 소리에 섞여 있는 비웃음 

▲ 김근태 의장은 고문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았다. 김근태 의장은 2011년 12월 30일 향년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최경환

감옥에 갇힌 고문기술자 이두한이 김종태에게 용서를 구할 때 김종태의 귓가에 들린 (클레멘타인) 휘파람을 들으며 나는 또 다른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나는 그 휘파람이 아직도 고문을 하고 인권을 유린한 세력의 후예들, 그 정치적 유산과 기득권과 가치들을 공유하고 있는 세력들이 고문 피해자들과 가족들을 비웃는 소리로 들렸다.

그 휘파람에는 (남영동1985) 같은 영화를 냉소하는 비웃움이 섞여 있었다. 나만의 느낌이었을까. 숨죽여 고통 속에 영화를 보고 있는 나를 포함한 관객 모두를 조롱하는 휘파람 소리였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너희들 해봤자지, 너희들은 우리한테 당하게 돼 있어.'

최근 강기훈 유서대필조작사건, 장준하 선생 암살 의혹, 민청학련 사법살인 등 과거사의 여러 현안들에 대한 일부 정치권과 보수진영의 태도를 볼 때 그 휘파람 소리는 영화 속 한 장면이 아니라 지금 우리 현실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역사의 화해는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여기에는 세 가지 조건이 따라야 한다. 진실의 규명, 가해자의 사과, 정의의 회복이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진실 규명은 기득권 권력 앞에 가로막히고, 가끔 보여주는 가해자들의 사과는 정치쇼에 불과하고 진심이 없다. 더욱이 정의의 회복, 즉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제도화하고 굳건히 세우는 일은 아직도 과제로 남아 있다.

이번 대선에서 좋은 정부가 세워져 과거사 현안들을 정리하고, 지금도 트라우마로 육제척,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는 수많은 국가폭력희생자들의 치유와 재활을 위해 국가와 사회가 함께 나설 수 있기를 바란다. (남영동 1985)과 같은 영화가 많이 나와, 거들먹거리며 휘파람을 불고 있는 가해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개인의 트라우마를 넘어서 우리 사회의 트라우마를 치유해야 한다.  

서독의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은 1985년 5월 8일 서독의회에서 독일 패전 40주년 기념연설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비록 이 연설은 독일 민족이 저지른 나치 전쟁과 유태인 학살을 반성하는 말이지만 지금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거에 눈을 감은 사람은 현재에 대해서도 소경이 되며, 비인도적 행위를 기억할 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또다시 그 과오를 저지를 위험성이 있다."

비록 (남영동 1985)는 두렵고 무서운, 고통을 주는 영화이지만, 진실을 바라볼 줄 아는 용기를 가진 국민만이 미래를 열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 11월 22일 개봉 예정. * 필자 최경환은 김대중평화센터 공보실장, (사)행동하는 양심 상임이사로 일하고 있다. 1981년 '학림사건'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43일간 불범감금되어 고문을 당하고 1년 6개월 수감생활을 했다. 출소 후 김근태 의장과 민청련 활동을 함께 했으며, 지금은 '민청련동지회' 회장으로 있다.


최경환(beyondiom)

2012년 10월 26일 금요일

“박근혜, 사과할 것 수백 가지 넘어” 김근태… YH무역…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10-25일자 기사 '“박근혜, 사과할 것 수백 가지 넘어” 김근태… YH무역…'을 퍼왔습니다.
[동아투위 기획] ③ 마지막회, 동아투위 기자들이 본 박근혜 “제대로 된 언론관 가지고 있지 못할 것”

동아일보 기자들이 박정희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서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했던 1974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가 사망한 해이기도 하다. 육 여사는 8월15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8·15 기념식에서 문세광의 총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영등포경찰서 출입기자였던 김종철 전 연합뉴스 사장은 사건 현장에 급파됐다. 김 전 사장은 “동아일보가 초록색 차를 보내더니 현장을 가보라고 했다”며 “국립극장(현 장충체육관)에 왔는데 아무도 없어서 현장을 살펴봤더니 육영수가 문세광의 총에 맞아 죽은 것은 아닌 것 같았다”고 말했다. 경호실, 중앙정보부 요원도 비표 없이 행사장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데 문세광만 비표 없이 입장했다는 것이 이상했다는 것. 실제 문세광의 저격설에 대해서는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등에서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 시간 프랑스 유학 중이던 영애 근혜양은 ‘급히 귀국하라’는 소식을 듣고 공항에 도착, 그곳에 있던 신문을 통해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알게 됐다고 했다.

당시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박 후보는 배화여고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바쁜데 와주셔서 고맙다. 힘껏 싸워 돌아가신 어머님의 뜻을 받들어 이 대회를 빛내달라’는 연설을 했다. 이후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당시 영애로서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 ‘제2인자’가 됐다. 

지난 2008년 11월 17일 동아투위 해직기자들이 서울 태평로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진실화해위의 ‘화해조치 권고’를 정부와 동아일보사가 조속히 이행할 것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육 여사의 죽음 뒤 바로 퍼스트레이디가 된 22살의 영애에 대해 김 전 사장은 “어렸으니 전혀 한 게 없다고 말할 수 없고 퍼스트레이디로서 각종 정보보고를 다 받았을 것이다. 동아일보의 광고탄압과 격려 광고 사태를 알지 못했다면 아마 거짓말일 것”이라고 말했다. 인혁당, 민청학련 등 사법살인뿐만 아니라 YH무역 김경숙 사망 사건, 김근태 고문사건 등 박 후보가 사과해야 할 과거사는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 김 전 사장은 “요즘 몇 가지 사과한 것으로 재미를 보는 것 같은데 그가 사과할 것은 수백 가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육영수 여사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부터 박정희 시대에 일어난 각종 고문·폭력 사건에 대해 당시 언론들은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다. 박 전 대통령의 광범위한 언론탄압 탓이다. 박 전 대통령의 재임 1년 동안 체포되거나 재판에 회부된 기자만 960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이 저지른 가장 대표적인 언론탄압은 ‘부일장학회 강탈’이다. 박 전 대통령은 부산지역의 재력가 고 김지태씨가 소유했던 부일장학회를 강제헌납 받았다. 부일장학회는 부산일보, 부산문화방송, 문화방송 등 언론사를 소유하고 있었다. 부일장학회는 5·16장학회로 이름이 바뀐 후 박정희의 ‘정’과 육영수의 ‘수’를 딴 정수장학회로 변경됐다. 

동아투위에서 활동했던 김태진 다섯수레 출판사 대표는 박 후보가 줄곧 정수장학회의 덕을 보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김 대표는 “강제로 빼앗은 것도 문제지만 줄곧 정치적으로 활동한 것이 더 큰 문제”라며 “장학금을 전국적으로 골고루 준 것이 아니라 대구와 경상도 중심으로 장학금이 지급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자신에게 몰표를 주는 지역에만 장학금을 푼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근에도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과 이진숙 MBC 기획본부장이 정수장학회가 보유한 MBC·부산일보 지분을 팔아서 부산·경남지역 대학생들에게 반값등록금 지원 사업을 추진할 것이 폭로돼 비판이 쏟아졌다.

아버지 박 전 대통령의 DNA를 이어받았다고 평가받는 박 후보 역시 제대로 된 언론관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정동익 전 동아투위 위원장은 “제대로 된 언론관을 가지고 있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며 “더군다나 정수장학회 문제는 누가 봐도 군사쿠데타를 통해 강탈한 장물인데 이런 상식적인 사안조차도 부정하고 있으니 민주주의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언론자유에 대해 올바른 시각을 정립한 분인지 도저히 신뢰가 가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정 전 위원장은 이어 “아버지로부터 엄청나게 언론탄압을 받고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지 38년이 지났다. 박 후보가 당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고 현재도 권력의 핵심부에 있다면 한 번쯤은 사죄하고 피해 기자들에게 나름의 의사표시를 하는 것이 공인으로서 해야 할 떳떳할 도리라고 보는데 동아투위 사태에 대해 언급조차 한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MBC 김재철 사장의 퇴진에 대해 여야가 합의하고도 이를 이행하지 않는 점도 박 후보의 언론관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라는 비판도 나왔다. 정 전 위원장은 “다수 정당의 수장으로서 합의 정신을 지켜서 국회 차원에서의 허심탄회한 논의를 했어야 했다”며 “더군다나 MBC 지분 30%를 가지고 있는 정수장학회의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당사자로서 MBC 사태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는데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 자체가 공인으로서 있을 수 없는 자세”라고 꼬집었다. 

조수경 기자 | jsk@mediatoday.co.kr  

2012년 10월 8일 월요일

“김근태 고문당할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이글은 한겨레신문2012-10-07일자 기사 '“김근태 고문당할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를 퍼왔습니다.


베일 벗은 ‘남영동 1985’ 배우 박원상

‘김근태 고문실화’ 영화서 김근태역
물 공포증 이겨내며 갖은 고문 연기
“인간 해체시키는 고문 고통 막막해” 
이근안은 ‘국가’란 이름의 폭력 상징 
아픈 과거 반성해야 바른 미래 가능

영화가 끝나자 인재근 민주통합당 의원은 옆에 앉은 배우 박원상씨를 껴안고 흐느꼈다. 27년 전, 개처럼 바닥을 기어가는 모욕과 고문을 당했던 남편의 고통을 재현한 한 배우에 대한 고마움과, 지난해 말 훌쩍 세상을 떠난 ‘남편 김근태’에 대한 그리움이 북받친 것이다.인 의원은 “이미 아는 사실인데도 보는 게 힘들었다”며 “지난해 남편이 갑자기 그렇게 된 것이 전기고문 후유증이라 확신하기에 전기고문 장면에선 눈을 감았다”고 했다. 그는 “짐승처럼 당하고도 우리 곁에 돌아와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않았던, 하늘에 있는 나의 짝에게 고맙고 미안했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극중 이름은 이두한) 역을 맡은 이경영씨는 이어진 무대인사에서 마치 국가폭력에 대해 대신 사과하듯, 인 의원 앞에서 “죄송합니다” 하며 눈물을 흘렸다.부산국제영화제 개막 사흘째인 6일 공식 상영된 (남영동 1985)는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1985년 9월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 자격으로 붙잡혀 서울 남영동 옛 치안본부 대공분실 515호에서 22일 동안 고문당한 실화를 극화했다. 고춧가루를 넣은 코와 입 속으로 물을 뿌려 기절시키거나, 전기고문을 하고, 몽둥이로 패는 장면들이 상영 시간 내내 가혹하게 펼쳐진다. 그 끔찍한 상황에서 “나는 헌법을 유린한 (박정희 정권의) 5·16 쿠데타와 (전두환) 군부독재를 부정한다”고 맞서거나, 잔혹한 고문 앞에 결국 허물어진 자신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용서할 수 없어”라며 자책하는 ‘김근태’(극중 이름 김종태)의 모습에서 관객의 눈은 뜨거워지고 만다. 사법부를 겨냥한 (부러진 화살)에 이어 정지영 감독이 또다시 사회적 파장을 몰고올 신작을 내보였다.“다른 배우였다면 중간에 도망갔을 것”이란 감독의 말처럼, 실제 얼굴에 물을 퍼붓고, 발가벗은 몸으로 바닥을 뒹구는 고통의 연기를 감당한 박원상씨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영화다. 특히 그는 “어렸을 때 물에 빠져 죽을 뻔해 평소 물 공포증이 있었다”고 한다. 정작 힘들었던 건 “인간이 인간을 철저히 해체시키는 고문의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참고할 것이 없다는 막막함, 그리고 과연 이 연기와 이 인물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었다”고 그는 털어놓았다.“나는 (515호실을 재현한) 경기도 양수리 종합촬영소 6세트장에서 연기로 시늉을 내면서도 죽을 것 같았는데, 실제 김근태 상임고문이 고문당할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생각하니 너무 힘들었죠.”박원상씨는 군사정권 시절을 “비상식적이었던 야만의 시대”라고 표현했다. (야만의 시대)는 이 영화의 원제목이다. 그는 2012년에 ‘김근태’와 ‘고문’을 관객 앞으로 불러낸 이 영화를 “역사를 기억하는 영화”라고 말했다. “(이 사회가) 기억해야 할 것을 잊고, 짚어야 할 것을 짚지 못하며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대선 정국에서 ‘과거사 논쟁’ 대신 미래를 설계하자는 정치권 한쪽의 목소리에 대해 “온당치 못하다”고 했다.“부끄럽고 아픈 과거를 반성하고, 잘 정리하고 가야 미래를 향한 올바른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겁니다.”그는 영화 속 ‘이근안’(이두한)은 “서민과 불특정 다수에게 국가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성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누군가는 항상 그런 국가의 폭력성에 대해 끊임없이 용기있게 지적하고 발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지난 5월 말 영화촬영을 끝내고 그는 김근태 상임고문이 좋아했던 참외와 막걸리를 들고 묘역을 찾아가 “영화 잘 마무리하고 왔습니다”고 인사를 했다고 말했다.이 영화는 대선 직전 개봉을 목표로 한다. 정 감독은 “대선 후보들이 모두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며 “우리 모두가 아픈 과거와 김근태 같은 분들의 희생을 피상적으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공유해야 하며, 이런 과거를 극복할 때 통합과 화해로 나아갈 수 있다”고 했다.

부산/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2012년 2월 13일 월요일

김현종, 美에 “FTA 개성공단 좌파이슈”…노무현‧김근태 속여


이글은 뉴스페이스 2012-02-12일자 기사 '김현종, 美에 “FTA 개성공단 좌파이슈”…노무현‧김근태 속여;를 퍼왔습니다.
“盧 훈령 어겨…국회가 압박한다 美에 호소”

김현종 당시 협상교섭본부장은 2007년 한미FTA 추진 당시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이 강력하게 요구했던 개성공단 문제를 철저히 속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3회는 여러 개의 미국 외교문서를 근거로 김 본부장의 ‘이중 행보’를 짚었다. 

한미FTA 찬반 여부를 떠나 개성공단 문제는 자주 언급된다. 추진 당시 개성공단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한미FTA에 함께 포함시키는 문제는 노무현 정부의 큰 관심사였지만 해결되지 못한 해 한미FTA는 타결됐다. 이와 관련해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외교문건에는 개성공단이 왜 협정문에서 빠졌는지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들이 들어 있다. 

김현종 협상교섭본부장은 2007년 4월 2일 한미FTA 협정 타결 직후 “개성공단 제품도 한미FTA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김 본부장은 “역외 가공 지역을 지정할 수 있도록 하는데 미 측이 원칙적으로 수용을 했다”며 “이제 남은 것은 양국이 한반도 역외가공지역위원회를 설치하고 이 위원회에서 역외가공지역을 지정하면 한국산과 동일하게 한미FTA 특혜 관세를 적용받게 된다”고 설명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대국민 담화를 통해 개성공단을 한미FTA 협상의 대표적 성과로 꼽으며 “앞으로 개성공단 뿐 아니라 북한 전역이 이 근거에 혜택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미국측 입장은 이와는 전혀 달랐다. 바티야 미 무역대표부 부대표는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제품을 현재 한미FTA의 적용을 받지 않게 돼 있다”면서 “개성공단 제품을 미국으로 수출할 때 한국산으로 원산지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했다. 

실제 한미FTA 협정문에는 ‘개성공단’이라는 용어는 찾아 볼 수 없다. 협정 발효 1년 후 한미 공동으로 한반도 역외가공위원회를 설립해 역외가공지역 제품의 한미FTA 적용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나타났다. 결정기준도 북한 비핵화와 역외가공지역들의 노동 임금 조건들이서 결국 미국 손에 달린 셈인 것으로 드러났다. 

개성공단 제품도 한미FTA 포함시키려 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가장 큰 목표 중 하나였지만 협상 결과는 이처럼 보잘 것 없었던 것이다. 

뉴스타파는 노무현 정부 협상책임자들은 개성공단 이슈 관철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지를 외교문서를 근거로 따져나갔다. 

지난 2007년 3월 당시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이 방한 내용을 기록한 주한 미 대사관 3급 비밀전문에 따르면 김현종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은 폴슨 장관에게 “개성공단 이슈는 노무현 정부의 좌익 지지자들에게 중요한 문제다”라고 말한 것으로 적혀있다. 


ⓒ 뉴스타파 화면캡처

또 김현종 본부장은 “당시 북미 관계의 개선이 통상교섭본부장으로서의 자기 직무를 더 어렵게 만든다”고 말했으며 “국회가 개성공단 제품을 FTA에 포함하라고 자신을 더 세게 압박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이 만난 시점은 한미FTA의 마지막 협상을 앞둔 시점이었고 김 본부장의 “개성공단 문제가 좌익들에게 중요한 이슈”라는 언급이 미국 측에 어떤 신호가 됐는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는 보도했다. 

2006년 6월 14일자 주한미국 대사관 외교 전문은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FTA 1차 협상때 우리측 대표단이 “개성공단 문제를 최초 요구사항에 포함시키라는 정부의 확고한 훈령을 어겼다”는 외교통상부 북미 국장의 발언도 담고 있다. 

한미FTA 초기부터 우리 협상 대표단이 청와대의 입장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한미FTA 협상 막바지인 2007년 3월 주한 미 대사관 외교전문은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의 발언도 담고 있다. 

김 의장은 미 대사와 만나 “한미FTA는 더 면밀하게 검토해 다음 정권에서 결론을 내야 하며, 개성공단 제품을 FTA에 포함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해 당시 미 대시 버시바우는 “한미FTA는 지금 아니면 안 되고, 개성공단 관련 요구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퇴임 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신이 시작한 한미FTA결과에 대해 별로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못했다. 2008년 9월 주한 미 대사관 외교전문에 따르면 버시바우 대사가 이임 인사차 노 전 대통령을 방문해 “무엇보다 한미FTA 타결에 대해 감사한다, 미국에 돌아가 한미FTA 비준 위애 노력하겠다”고 덕담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별 반응 보이지 않았다. 버시바우 대사는 “자신의 성취에 대해선 별로 자긍심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당시 분위기를 기록했다. 

결국 한미FTA는 이명박 정부 들어 더 개악된 채 날치기 통과됐고 노무현 정부 당시 한미FTA 협상 책임자는 삼성그룹 사장으로 갔다. 또 협상과 재협상의 주역은 여전히 통상교섭 업무를 지휘하고 있다.

위키리스크 전문은 지난해 터져 나왔지만 지상파와 기성 언론이 외면하는 상황에서 대안언론 ‘뉴스타파’가 이같이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자 트위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트위터에는 “뉴스타파 3회 봤다면 왜 노무현 정부가 FTA를 추진했는지 알 게된다. 바로 개성공단 때문이었다. 개성공단을 살려서 남북한이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이기를 바랬다”, “한미FTA와 개성공단.. FTA실무자들은 애초부터 개성공단제품 따위엔 관심이 없었음이 위키리크스 자료 통해 드러났다. 노무현 대통령의 관심과 지시가 있었음에도..김현종,김종훈..와..참 잘했다 니들..”, 

“뉴스타파 3회를 보니 노무현 정부가 한미FTA 국익에 도움되지 않는다면 안해도 된다고 했는데 김종훈 김현종 등 통상외교쪽 몇 놈들의 장난에... 정부의 명령을 어기고..노무현 대통령과 김근태 장관 역시 개성공단제품을 국내 상품으로 인정하는 줄 알았는데...저놈들의 장난이?”, “참여정부 당시 통상관료들이 한미FTA를 추진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개성공단 제품이 한국산으로 인정된다고 보고하고 미국에게는 인정되지 않는 것으로 협상을 진행했다. 사실상 고의로 대통령 행정명령인 훈령을 어긴 것이다” 등의 비난이 이어졌다. 

김영삼 전 대통령 패러디봇인 ‘김빙삼’은 “결국 노무현대통령은 한미FTA를 통해 북한을 미국과 경제적으로 연결 시키면서 개방하게 하는, 그래서 남북관계 개선을 할라카는 전략을 염두에 둔 것이었구만. 그거를 미국 간첩 김현종이캉 매국노 김종훈이 어그러뜨린기네”라고 일침을 가했다.

2012년 1월 22일 일요일

고문기술자 이근안 목사직 면직


이글은 한겨레신문 조현기자 블로그 휴심정 2012-01-19일자 기사 '고문기술자 이근안 목사직 면직'을 퍼왔습니다.

지난 2008년 목사 안수를 받는 이근안씨 사진 인터넷스타2.0 캡쳐

고문기술자’로 알려진 이근안씨가 목사직을 잃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개혁총회(개혁총회·총회장·정서영 목사) 관계자는 19일“지난 14일 긴급 징계위원회를 열어 이근안 씨의 목사직을 면직했다”고 밝혔다. 교단에서 일단 면직이 결정되면 복직이 안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개혁총회쪽은 한국종교개혁시민연대와  한국교회정화운동협의회 등 교계 시민단체들이 이날 이근안씨에 대한 ‘목사직 안수 철회 요구서’와 탄원서를 서울 관악구 남현동 사무실에 제출하자 징계 사실을 뒤늦게 공표했다.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다 지난달 별세한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장례식 사진 <한겨레> 자료

개혁총회쪽은 김근태 고문의 별세소식이 전해진 뒤 인터넷 포털 다음에서 이근안씨 목사 안수 철회서명이 펼쳐지고, 보수단체인 한국교회언론회마저 논평에서 ‘무분별하게 목사직을 수여하는 교단의 행태’를 지적하는 등 비판이 고조되자 ‘이씨가 목사로서 품위를 훼손했다’는 이유를 들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경 대공분실 경감이었던 이근안씨는 1985년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이른바 ‘서울대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돼 수감됐을 때 잔인한 고문 사실이 1988년 보도로 드러나자 10년10개월 동안 도망다니다 공소시효가 끝난 1999년 10월 ‘자수’해 징역 7년을 살고 2006년 11월 출소했다.


지난 2000년 수감되는 이근안씨 사진 <한겨레> 자료

 그는 교도소에서 신학대 통신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출석 수업 등을 마친 뒤 2008년 10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목사가 된 뒤 교정 선교와 신앙 간증을 하면서 “나는 고문기술자가 아닌 애국자”라고 표현하며 고문을 정당화해 비판을 받아왔다.
 한편 이씨가 목사로서 소속됐던 개혁총회는 67개 노회에 3656개 교회가 소속돼 있으며,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가입 교단이라고 밝히고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2012년 1월 3일 화요일

이준석 검증 없이 띄우기에 급급한 언론들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01-02일자 기사 '이준석 검증 없이 띄우기에 급급한 언론들'을 퍼왔습니다.
연합, 트위터 추모를 “먼발치서 애도”로 둔갑… 조중동 “여당 구원투수” 극찬일색

친여·보수성향의 언론들이 이준석 한나라당 비대위원 띄우기에 나섰다.
조선·중앙·동아·연합은 비대위가 출범한 12월 말에 이어 연초까지 이 위원에 대한 기사를 쏟아내면서도, 논란이 되고 있는 천안함, 카이스트, 무상급식, 전철연에 대한 이 위원의 과거 발언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검증은 하지 않고 칭찬 일색의 기사만 내놓는 보수언론의 태도에 시민들은 ‘이준석을 노골적으로 띄우는 것 아니냐’며 비판하고 있다.

연합뉴스는 임진년 새해 아침인 지난 1일 이 위원 인터뷰 기사를 내보냈다. 비대위 활동 일주일에 대한 평가와 앞으로 포부에 대한 문답이 중심이다. 인터뷰 말미에 ‘그저 엄친아이지 20대의 목소리와 관계없다’는 지적에 대해서 물었지만 이 위원은 “‘20대의 목소리가 뭔데요?’라고 묻고 싶다”고 답하는 등 사실상 이 위원에 대한 홍보성 기사였다는 평가다.

연합은 같은날 오후에도 이 위원이 트위터로 고 김근태 한반도재단 이사장을 추모한 것을 두고 ‘이준석, 故김근태 먼발치서 애도’라고 보도했다. 연합은 이 위원이 지난해 12월 31일 빈소를 직접 방문하지 않고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고 김근태 이사장이 고문을 당했던 남영동의 거리 사진과 함께 “이렇게 가까운데 한마디도 못해서 죄송해요...나중에 받아주세요..”라고 쓴 글을 인용했다.


이준석 한나라당 비대위원의 트위터

포털사이트 다음에 송고된 연합뉴스의 이 기사에는 2일 오후 현재 800여 개의 댓글이 달렸다. “왜 자꾸 띄워주지? 이게 기삿거리인가? … 광고성기사가 올라온다.”, “이젠 사람 마음까지 읽어서 기사 쓰냐?” 등 기사를 풍자하거나 비꼬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유체이탈 조문이냐?”, “거기에서 허수아비 짓 그만하고 진정 이 나라를 위하는 사람으로 사시오” 등 이 위원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젊음, 도전정신과 같은 이미지를 안고 비대위 활동을 시작한 이준석 위원은 정작 그 철학이나 문제의식 등 알맹이를 꼼꼼히 살펴보면 전형적인 ‘한나라당맨’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연합뉴스를 비롯한 조중동 등 친여·보수성향의 언론은 그의 ‘이력서’에만 급급한 채 그의 철학과 문제의식과 같은 정치력을 보여줄 수 있는 자질에 대한 검증은 외면하고 있다.
특히 이준석 위원은 전국철거민연합을 ‘미친놈들’이라고 비난한 게 논란이 되자 사과했고, 과거 천안함 사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과학자들을 ‘정치과학자’로, 카이스트 자살 사건을 두고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는 식의 글을 남겨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또한 이 위원은 친환경 무상급식에 대해 “차라리 ‘원적외선 바이오맥반석은나노 향균 저탄소 자기주도적 친환경 e-무상급식’이라고 하지 그러냐?”고 표현하는 등 고민이 깊지 않고 경솔한 언행을 드러내왔다. 반면 그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는 ‘자수성가형’으로 두둔하며 ‘내가 해봤는데’ 발언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찢어지게 가난해본 적이 있는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트위터와 일부 언론은 이 같은 그의 과거 발언 등을 검증하려는 노력을 했지만, 조선·중앙·동아는 되레 이 위원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데 급급했다.


조선일보 12월 28일자 1면

조선일보 종편인 TV조선은 2일 밤 11시 방송분에 ‘최·박의 시사토크 판’에 이 위원을 섭외해 녹화를 마쳤다. TV조선은 방송을 앞두고 이 위원을 “여당 구원투수로 나선 스물일곱 젊은이”로 소개했지만, 내용 어디에도 이 위원에 대한 세간의 평가와 비판은 보이지 않았다. 조선일보 역시 지난해 12월 28일자 1면에 태블릿PC를 사용하는 이 위원을 찍은 사진과 함께 ‘26세, 한나라를 바꾸나’라는 제목의 기사를 싣기도 했다.

중앙일보도 같은 날짜 3면 머리기사에서 이 위원에 대해 “‘안철수스러움’이 풍긴다”며 “한나라당이 목말라했던 ‘이미지 자산’”이라고 극찬했다. 동아일보도 4면 머리기사에서 이 위원을 소개하는데 3분의 1 가량을 할애했지만 검증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하버드 수재’, ‘젊은 벤처사업가’ 등으로 치장하기 바쁜 지면들이었다.

‘친박’ 유승민 의원실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기도 한 이 위원은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직접 영입한 인물로 ‘검찰수사국민검증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이 위원은 선관위 홈피 디도스 공격에 대한 검찰수사를 당 차원에서 조사하고 있다.


동아일보 12월 28일자 4면

2012년 1월 1일 일요일

최강욱 "김근태 유죄?…'검사는 사냥개', '판사는 괴물'"


이글은 오마이뉴스 2011-12-31일자 기사 '최강욱 "김근태 유죄?…'검사는 사냥개', '판사는 괴물'"'을 퍼왔습니다.
민주화 대부 김근태 영면에 페이스북 통해 검찰과 법원 통렬히 비판


▲ 최강욱 변호사(사진=페이스북)
고문 후유증으로 타계한 '민주화의 대부' 김근태 의장과 관련, 최강욱 변호사가 고문수사를 촉구하는 '김근태'의 호소를 외면한 채 고문경관을 처벌하기는커녕 공산주의자로 몰아간 검사와 유죄를 인정했던 판사 그리고 반성 없이 그들이 검사장과 대법관까지 오르게 한 검찰과 법원을 통렬히 비판했다.

국방부 검찰단 고등검찰부장을 역임한 최 변호사는 최근엔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의 피해자인 김종익 씨 변호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그동안 사법부에 대해 쓴소리를 해왔다.

최강욱 변호사는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먼저 "영웅은 떠나 별이 되었다. 한 때 그의 동지였던 이들, 심상정과 박노해의 거처를 불지 않는다는 이유로 알몸상태에서 갖은 고문을 당했던 오늘의 '실세' 김문수와 이재오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이어 "김근태의 영정 앞에 떳떳이 설 수 있을까? 변절에 대한 숱한 변명과 궤변을 이제는 진솔하게 마음속으로나마 사과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는 고인과 함께 민주화운동을 펼쳤던 이들이 현재인 고인과 대척점에 있는 한나라당에 몸담고 있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최 변호사는 특히 고문피해자인 '김근태'를 오히려 '빨갱이'로 기소하고 유죄판결을 내렸던 검사와 검찰 그리고 판사와 법원을 싸잡아 비난했다.

그는 "고문 피해를 밝히며 수사를 촉구하는 김근태의 호소를 애써 외면한 채 '그건 그것이고 이건 이것'이라며, 고문경관을 처벌하기는커녕 김근태를 속속들이 빨갛게 물든 공산주의자로 몰아갔던 정권의 개. 사냥개로서의 사명에 충실해 결국 검사의 별이라는 검사장으로 출세를 거듭한 검사 K씨"라고 실명을 거론하며 '정권의 사냥개'로 신랄하게 비난했다.

이어 "후일까지 '고문사실에 대하여는 피의자 김근태의 주장만이 있을 뿐 이를 뒷받침할 하등의 자료가 없었으며 관련 재판부에서도 이러한 피의자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변명한 대단한 K씨"라고 지적하며 "물론 이근안의 고문사실이 밝혀져 처벌받은 뒤까지 단 한 번도 반성하지 않은 대한민국 검찰"이라고 비판했다.

또 "법정에서 고문 사실을 호소하는 피고인 김근태의 진실을 철저히 외면하고, 그에게 유죄를 인정해 징역 7년을 선고한 판사 S씨. 그리하여 K씨가 변명하고 기댈 언덕을 만들어 준 괴물"이라며 "그토록 탁월한 '재판 능력'을 바탕으로 사법부의 요직을 섭렵하며 후일 대법관까지 지낸 사람"이라고 질타했다.

아울러 "과거사를 반성한다면서도 검찰의 잘못일 뿐 법원은 어쩔 수 없었다며 짐짓 헛기침만 날리는 대한민국 법원"이라고 일갈했다.

최 변호사는 "이들은, 이 조직은 김근태의 죽음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라는 질문을 던진 뒤 "설마 자신들의 '품위 넘치는 삶'과 김근태의 신산한 삶을 비교하며 안도감에 휩싸이진 않았겠지. 그저 덮이고 말았을 일을 굳이 밝혀내 자신들의 명예에 흠집을 낸 사람으로 김근태를 기억하진 않겠지. 그들이 누리는 달콤한 삶과 권력이 결국 김근태의 헌신과 희생을 딛고 이루어진 것이란 점을 부인하진 않겠지. 최소한의 도리를 아는 인간이라면, 설마 지금은 진심으로 천벌을 두려워하겠지"라고 자답했다.

그는 또 "자신을 알아 달라며, 출세한 자신에게 즉각적인 존경과 복종을 표현하라며 아랫사람을 을러대다 결국 억지 화해까지 만들어낸 변절자들은 지금도 자신의 삶이 김근태의 그것보다 나은 것이라 자위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건 아니겠지. 심문을 했을 뿐 고문을 하지 않았으며, 예술의 경지에까지 승화시킨 기술로 빨갱이를 잡았을 뿐이라 간증하신다는 이근안 목사님도 김근태의 서거를 보며 이제 고통이 끝났다고 기꺼워하는 것은 아니겠지"라고 꼬집었다.

최 변호사는 그러면서 "제발,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들이 사람이라면. 최소한 사람의 탈을 쓴 생물이라면"라고 간절히 바랬다.

그는 "다시 사마천의 탄식이 떠오르는 날이다. 묵은해는 이토록 안타까운 별을 하늘로 보내며 저물어간다"고 고인을 그리워하며 "그래서 나는 저기에 등장한 것들의 삶을 기억할 것이다. 절대 잊지 않고 지켜볼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탄식은 과연 천도(天道)라는 것은 있는 것인가? 착한 이가 곤경에 빠지는 것이 하늘의 도인가? 라는 것이다.

"하늘의 도(天道)는 사사롭지 않고 늘 착한 이와 함께 한다고 하는데, 백이와 숙제 같은 사람은 착한 사람인가? 그들은 행실이 그토록 고결해도 굶어죽었다. 공자는 자신의 제자들 가운데 진정 학문을 좋아하는 이는 안연이라 했지만, 안연은 자주 궁핍하여 굶주리다가 끝내 요절했다. … 극악무도한 도척은 날마다 무고한 이를 죽이고 사람의 간을 꺼내 먹었으며 무리 수천 명을 모아 포악방자하게 천하를 횡행했지만 끝내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 … 이른바 하늘의 도라고 하는 것은 과연 옳은가 그른가(是邪非邪)?"

최 변호사는 끝으로 "김근태 의장님. 이제 편히 쉬세요. 남은 일은 저희에게 맡기시고..."라고 영면을 기원했다.

한편, 최 변호사의 이 글에는 220명이 넘는 친구들이 추천했고, "멋진 글이어서 더 서럽군요"라는 등 30개가 넘는 공유 댓글이 달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법률전문 인터넷신문 [로이슈](www.lawissue.co.kr)에도 실렸습니다. 

2011년 12월 31일 토요일

김근태의 마지막 말 "2012년을 점령하라"


이글은 프레시안 2011-12-30일자 기사 '김근태의 마지막 말 "2012년을 점령하라"'를 퍼왔습니다.
'세계의 양심수' 김근태, 하늘로 가다

"아름다운 꼴찌로 기억해 달라"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광주 경선을 앞두고 노무현 후보로의 개혁 후보 단일화를 위해 후보직을 사퇴하며 남긴 말이다. 그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심정으로 지금은 죽는다"고도 했다. 두 마디는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드라마틱한 말이었다. '6.3 세대'로 386 운동권 '대부'로 불렸던 김근태, 그는 현실정치에서 만년 비주류였다. '비주류의 정점'이라는 게 있다면 그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47년 2월 14일 경기도 부천에서 출생한 김근태는 중학교 3학년 때 5.16쿠데타를 목격했다. 강제로 교직을 그만두게 된 그의 아버지는 충격을 받았고 곧 심장판막증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어머님은 동대문 시장에서 여자 스타킹과 양말을 받아다 팔아 김근태를 키웠다.

그는 경기고를 졸업하고 1965년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71년 박정희 정권 부정선거 파동 반대 활동, 교련 데모에 적극 참여했고, 서울대 내란 음모 사건으로 수배를 당하게 된다. 당시 친구였던 조영래, 장기표, 심재권은 감옥에 들어갔다. 이후 74년 긴급조치 위반으로 또 다시 수배 생활을 해야 했다. 그렇게 도망하기를 7년, 박정희 정권이 무너졌다.


▲ 학창 시절의 김근태 ⓒ김근태 미니홈피
▲ 민청련 시절 김근태(오른 쪽은 장영달 전 의원)) ⓒ김근태 미니홈피

김근태는 새로 들어선 전두환 군부 독재에 맞서 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했고초대, 2대 의장을 지냈다. 후배들인 386세대, 반독재 민주화 운동 세력의 기획자이자 동지로 살았다. 그러나 민청련 활동으로 인해 그는 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이 전무'로 통하는 고문 기술자 이근안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했다. 전기와 물이 그의 몸을 할퀴고 지나갔다. 이후 그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며 남은 생을 살아야 했다.

이 사건에 관한 진술은 이미자의 '노래 테입' 중간에 녹음된 채로 미국 인권단체에 건네졌다. 이후 전 세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세계의 양심수'라는 수식이 김근태 이름 앞에 붙었다. 87년 로버트 케네디 국제 인권상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그를 가두고 고문했던 국가보안법은 21세기 하고도 11년이 지난 오늘, 아직도 살아있다.

그는 자신의 책 에서 '인간도살장' 안에 있던 느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고문을 할 때는 온 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뉘면서 몸을 다섯 군데를 묶었습니다...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 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가면서 전기 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 앞에 다가왔습니다. 이 때 마음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과연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했으며 이런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절망에 몸서리쳤습니다."


▲ '세계의 양심수' 김근태는 인권상 수상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김근태 미니홈피

87년 6월 항쟁을 감옥에서 맞은 그는 88년이 돼서야 석방됐다. 세상은 변했지만 '천지개벽'은 없었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결성을 주도하고 정책기획실장, 집행위원장을 지냈지만 시대는 그를 또 다시 구속했다.

노태우 정권이 끝난 뒤 3당 합당을 지켜본 그는 현실정치로 눈을 돌린다. 95년 민주당에 입당한 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계 복귀와 함께 새정치국민회를 꾸렸고, 부총재 직을 맡았다. 이 때 15대 총선을 치렀고, 서울 도봉갑에서 당선돼 내리 3선을 지냈다. 98년 출범한 국민의 정부 탄생에 힘을 보탠 그는, 곧바로 새천년민주당 쇄신 운동에 돌입했다. 역시 '비주류'였다.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과 대선 경선에서 맞붙었다. 이인제 후보와 경쟁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에 힘을 실어주면서 후보직을 사퇴했다. 이른바 '노풍'이 불기 시작한 광주 경선 직전이었다. 두 번째 민주 정부가 들어섰다. 노무현 탄핵 열풍을 딛고 '주류'로 올라선 열린우리당의 창당에 참여했지만 여전히 그는 '비주류'의 길을 걸으며 열린우리당을 지배했던 '중도실용노선'과 '투쟁'을 이어갔다.


▲ 보건복지부장관을 지내던 시절 김근태 ⓒ김근태 미니홈피
열린우리당 의장을 지낼 때는 부동산원가 공개에 반대하는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계급장 떼고 토론해보자"고 맞섰다. 그런 그를 노 전 대통령은 보건복지부 장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장관을 지내면서도 그는 영리병원을 반대하며 청와대와 각을 세웠다. 노무현 정부의 한미FTA 추진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여전한 '비주류'였다.

2011년 12월 29일 그가 떠나기 전, 지난 10월 18일 마지막으로 그의 블로그에 'posted by 김근태'로 남아 있는 글 역시, 그의 '인생'이 그대로 녹아들어가 있었다.

"(월가 시위의 요인은) 무엇보다 1%를 향한 99%의 분노 때문이다. 사회적 불평등과 정의롭지 못함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1%인지 5%인지는 중요치 않다. 이처럼 전 세계가 공감한다는 것은 미국이 주도한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제패했었다는 증거다. 선진국과 후진국, 강대국과 약소국, 민주국가와 비민주국가의 구분 없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세계적 대세였던 것이다. 그리고 2008년의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손인 월가의 실체가 드러났음에도 희생도, 반성도, 징벌도 없는 불공평함에 분노한 것이다.
...
우리는 미국보다 사정이 낫다. 미국보다 금융이 정치에 비해 권력이 강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굳이 증권사가 많은 동여의도를 점령할 필요는 없다. 국회가 있는 서여의도, 청와대가 있는 종로를 점령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운 좋게 내년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그가 남긴 마지막 글의 제목이다.

"2012년을 점령하라"



/박세열 기자 

"이근안, 이래도 고문이 예술이고 애국이었나?"


이글은 프레시안 2011-12-30일자 기사 '"이근안, 이래도 고문이 예술이고 애국이었나?"'를 퍼왔습니다.
김근태의 용서와 이근안의 파렴치

26년간 떨리던 민주당 김근태 상임고문의 손이 침대아래로 '툭' 떨어지자, 병실 주변에는 여명보다 안개가 먼저 깔렸다. 30일 새벽 5시 30분 '세상의 양심'은 시리디시린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64세의 지난한 삶을 놨다. 사인은 고문 후유증.

선대인 경제전략연구소장은 트위터(@kennedian3)에 "정녕 하나님은 있는 겁니까"라며 "평생 민주화와 정치 발전 위해 헌신했던 김근태 선생님은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시고, 그를 고문했던 이근안은 목사로 변신해 고문은 예술이고 애국이었다고 떠들고 다니는 세상"이라고 한탄했다.

"신문도 하나의 예술이다"

김근태 상임고문과 이근안 전 경감의 악연은 26년 전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시작됐다. 김 상임고문은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1985년 9월 4일 구속됐다. 그 후 그는 17일간 매일 5시간씩 이 전 경감에게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받았다.

"고문을 할 때는 온 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뉘면서 몸을 다섯 군데를 묶었습니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 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가면서 전기 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김근태 책 )

고문 트라우마는 '죽음의 그림자'처럼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그는 치과에 가는 것조차 꺼렸다고 한다. 의자에 반쯤 누운 채 얼굴을 가리는 순간, 바로 전기고문이 연상됐기 때문. 2001년 대선 경선 때 참모진은 물고문으로 얻은 비염과 축농증 때문에 전달력이 떨어진다며 수술을 권했다. 그렇게 수술대에 올라 마취를 하는 과정은 그를 다시 남영동 대공분실로 데려갔다. 수술 후 그는 "칠성판(고문대)에 다시 올라간 느낌이었다"고 했다.


▲ '고문 기술자' 이근안 ⓒ연합

하지만 '고문 기술자' 이근안의 기억은 다르다. 이 전 경감은 작년 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고문 행위가 "애국 행위"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신문(訊問) 기술자"로 지칭, "그런 의미에서 신문도 하나의 예술이다"라고 덧붙였다.

"(김근태 상임고문에게) 전기 고문을 한 건 사실이지만, 220볼트 전기를 쓴 게 아니고 면도기에 들어 있던 배터리를 썼다. 내가 취미 삼아 만든 모형 비행기 모터에서 'AA 건전지2개'를 가지고 겁을 준 것뿐... 몇 시간 전부터 '너 전기로 지질 거다'라고 겁을 준 다음에 전기 잘 통하라고 소금물 뿌린 발가락에 배터리를 갖다 대고 겁을 주니 지하조직 일체를 자백했다."

1985년 납북어부 김성한 씨 고문 혐의로 88년부터 수배를 받던 이 전 경감은 10년 10개월 만인 1999년 10월 검찰에 자수했다. 이미 김 상임고문 사건을 포함해 대부분의 사건이 도피생활 중 공소시효가 지난 상태였으나, '특정범죄가중처벌법 4조의2' 규정에 따라 7년 형을 선고 받았다.

자수는 했지만, '청룡봉사상'을 포함하여 재직 기간 중 모두 16차례의 표창을 받고 대공 분야에서는 "이근안 없으면 수사가 안 된다"는 말을 들었던 그는 '고문 기술자'라는 말이 억울했다. 그는 과의 인터뷰에서 "훈장을 타서 매달 10만 원씩 받을 수 있는 돈도 안 받았다"며 "내가 그 돈을 받기 위해서 애국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가 돈 받으려고 그랬나. 마찬가지다"라고 자신을 안중근 의사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런데 2010년 2월 7일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던 김 상임고문이 이 전 경감을 옥중면회 했다. 이 전 경감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김 장관이 들어오자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지난 일은 죄송하게 됐다'며 고개를 숙이자 김 장관이 양팔을 벌려 포옹을 해왔다. 그리고는 '그게 어떻게 개인의 잘못이냐. 이 시대가 낳은 비극 아니냐'며 위로를 건네는 게 아닌가."

정작 면회를 마친 김 상임고문은 그날 "밤잠을 설쳤다"고 한다. 면회 2주 뒤 자신의 홈페이지에 "저 사죄는 사실일까?"라며 혼란스러워했다. 자신의 사타구니에까지 전기고문을 가했던 자였다.

작가 공지영 씨는 관련 일화 한편을 트위터(@congjee)에 소개했다.

"몇 년 전 뵈었을 때, 우연히 이근안을 만났다고. 그가 울며 잘못했다 용서해달라고 했을 때 너무 가식처럼 느껴져 도저히!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고. 그게 몇 달 후까지 자신을 괴롭힌다고. 나 너무 옹졸한가? 물으셨죠."

이 전 경감은 2006년 11월 출소해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자신이 목회자로 입문한 건 "간첩죄로 잡아들인 애들이 후일 민주화 인사로 보상받는 걸 보고 울화가 치밀어 감옥에서, 믿을 수 있는 나라, 배신 없는 나라를 찾다 보니 하늘 나라를 찾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당신을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 이 자리에 왔다"

김근태는 애초 이근안을 만나야 할지 망설였고, 면회 사실 공개도 원치 않았다고 한다.

"언론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은 물론 이근안 씨를 만난 것이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 마음이 정리되지 않고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참회하겠다며 목사가 된 이의 마음은 미해결 사건으로 남을 것 같다. 김근태는 "당신을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 이 자리에 왔다"고 말했으나, 시대가 이근안을 용서했을지는 의문이다.



/이명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