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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21일 수요일

증인석 선 ‘고문기술자’ 이근안 “고문 없었다” 궤변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11-21일자 기사 '증인석 선 ‘고문기술자’ 이근안 “고문 없었다” 궤변'을 퍼왔습니다.

이근안 전 경기경찰청 대공분실장이 2008년 10월30일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개혁 교단의 목사 임직식에 참석해 목사 안수를 받으려 기다리고 있다. 이씨는 올해 1월14일 예수교장로회 합동개혁 총회의 긴급 징계위원회에서 ‘자질 논란’으로 목사직 면직을 당했다. <브레이크뉴스> 제공

목사직 잃고 행방 묘연했던 이씨
30여년전 납북어부 간첩사건 재심서
“오래전 일이라 기억 안난다”

함께 근무했던 수사관 증언에도
185일 불법구금 사실 잡아떼

올해 1월 목사직을 잃은 뒤 행방이 묘연했던 ‘고문기술자’ 이근안(74)씨가 최근 간첩 조작 의혹 사건의 누명을 벗겨달라고 유족들이 신청한 재심사건 재판에 나와 “불법구금이나 고문은 없었다”고 항변했다.이씨는 지난 13일 오후 인천지법 제13형사부(재판장 송경근) 심리로 열린 30여년 전 ‘납북어부 간첩 사건’의 안아무개(2006년 사망)씨 재심 사건에 검찰 쪽 증인으로 출석했다. 그는 20여분 동안 진행된 검찰과 변호인의 신문에서 불법구금과 고문에 의한 조작 의혹이 제기되자 “나는 목사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관련 의혹을 부인했다.이씨는 “오래돼서 언제 (안씨를) 연행했는지 알 수 없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가혹 행위에 대해서도 “(간첩 활동의) 의심이 나서 3개월 공작을 했고, 안씨가 다른 사람을 포섭중이었고, 이런 사실을 모두 자백했다. 불법구금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그러나 당시 경기경찰청 대공분실에 함께 근무했던 나아무개 수사관은 이씨의 증언 직전에 있었던 변호인 신문에서 “이씨가 조사하는 것을 보지 못해 고문 여부를 알 수 없지만 안씨를 185일간 영장 없이 구금한 게 맞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변호인이 전했다. 안씨는 같은 마을에 살던 어부들이 납북된 지 수년이 지나 간첩 사건이 터지자 1977년 2월 참고인으로 경찰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그는 조사과정에서 피의자로 바뀐 뒤 그해 8월 구속됐다.안씨의 변호인 쪽은 “이씨가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난다. 모르겠다’고 답변하는 반면, 유리한 것은 소설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세세한 부분까지 말했다. 이씨는 ‘편리한 기억력의 소유자’인 것 같다”고 말했다.이씨는 증언을 한 뒤 전직 동료 수사관으로 보이는 10여명에게 둘러싸여 당당히 법정을 빠져나갔다. 방청석에서 재판을 지켜보던 안씨의 아들(51)은 “이씨의 말대로 아버지가 순순히 자백했으면 뭐하러 185일간 불법구금을 했느냐”며 어이없어했다. 방청객 정아무개(63)씨는 “최근 자신을 소재로 한 영화 (남영동 1985)가 나오자 변명하려고 적극적으로 얘기하는 것처럼 들렸다”고 말했다.이씨는 1970년대 초부터 1988년까지 경기경찰청 대공분실장 등으로 근무하며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치다 불법체포와 고문 혐의로 오랜 수배 끝에 2000년 자수했다. 2008년 10월 안수를 받고 목회자로 변신했지만 각종 언론 인터뷰에서 ‘나는 애국자’라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다가 올해 1월 ‘자질 부족’ 등을 이유로 목사직을 박탈당했다.

인천/김영환 기자 ywkim@hani.co.kr

2012년 10월 8일 월요일

“김근태 고문당할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이글은 한겨레신문2012-10-07일자 기사 '“김근태 고문당할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를 퍼왔습니다.


베일 벗은 ‘남영동 1985’ 배우 박원상

‘김근태 고문실화’ 영화서 김근태역
물 공포증 이겨내며 갖은 고문 연기
“인간 해체시키는 고문 고통 막막해” 
이근안은 ‘국가’란 이름의 폭력 상징 
아픈 과거 반성해야 바른 미래 가능

영화가 끝나자 인재근 민주통합당 의원은 옆에 앉은 배우 박원상씨를 껴안고 흐느꼈다. 27년 전, 개처럼 바닥을 기어가는 모욕과 고문을 당했던 남편의 고통을 재현한 한 배우에 대한 고마움과, 지난해 말 훌쩍 세상을 떠난 ‘남편 김근태’에 대한 그리움이 북받친 것이다.인 의원은 “이미 아는 사실인데도 보는 게 힘들었다”며 “지난해 남편이 갑자기 그렇게 된 것이 전기고문 후유증이라 확신하기에 전기고문 장면에선 눈을 감았다”고 했다. 그는 “짐승처럼 당하고도 우리 곁에 돌아와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않았던, 하늘에 있는 나의 짝에게 고맙고 미안했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극중 이름은 이두한) 역을 맡은 이경영씨는 이어진 무대인사에서 마치 국가폭력에 대해 대신 사과하듯, 인 의원 앞에서 “죄송합니다” 하며 눈물을 흘렸다.부산국제영화제 개막 사흘째인 6일 공식 상영된 (남영동 1985)는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1985년 9월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 자격으로 붙잡혀 서울 남영동 옛 치안본부 대공분실 515호에서 22일 동안 고문당한 실화를 극화했다. 고춧가루를 넣은 코와 입 속으로 물을 뿌려 기절시키거나, 전기고문을 하고, 몽둥이로 패는 장면들이 상영 시간 내내 가혹하게 펼쳐진다. 그 끔찍한 상황에서 “나는 헌법을 유린한 (박정희 정권의) 5·16 쿠데타와 (전두환) 군부독재를 부정한다”고 맞서거나, 잔혹한 고문 앞에 결국 허물어진 자신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용서할 수 없어”라며 자책하는 ‘김근태’(극중 이름 김종태)의 모습에서 관객의 눈은 뜨거워지고 만다. 사법부를 겨냥한 (부러진 화살)에 이어 정지영 감독이 또다시 사회적 파장을 몰고올 신작을 내보였다.“다른 배우였다면 중간에 도망갔을 것”이란 감독의 말처럼, 실제 얼굴에 물을 퍼붓고, 발가벗은 몸으로 바닥을 뒹구는 고통의 연기를 감당한 박원상씨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영화다. 특히 그는 “어렸을 때 물에 빠져 죽을 뻔해 평소 물 공포증이 있었다”고 한다. 정작 힘들었던 건 “인간이 인간을 철저히 해체시키는 고문의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참고할 것이 없다는 막막함, 그리고 과연 이 연기와 이 인물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었다”고 그는 털어놓았다.“나는 (515호실을 재현한) 경기도 양수리 종합촬영소 6세트장에서 연기로 시늉을 내면서도 죽을 것 같았는데, 실제 김근태 상임고문이 고문당할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생각하니 너무 힘들었죠.”박원상씨는 군사정권 시절을 “비상식적이었던 야만의 시대”라고 표현했다. (야만의 시대)는 이 영화의 원제목이다. 그는 2012년에 ‘김근태’와 ‘고문’을 관객 앞으로 불러낸 이 영화를 “역사를 기억하는 영화”라고 말했다. “(이 사회가) 기억해야 할 것을 잊고, 짚어야 할 것을 짚지 못하며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대선 정국에서 ‘과거사 논쟁’ 대신 미래를 설계하자는 정치권 한쪽의 목소리에 대해 “온당치 못하다”고 했다.“부끄럽고 아픈 과거를 반성하고, 잘 정리하고 가야 미래를 향한 올바른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겁니다.”그는 영화 속 ‘이근안’(이두한)은 “서민과 불특정 다수에게 국가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성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누군가는 항상 그런 국가의 폭력성에 대해 끊임없이 용기있게 지적하고 발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지난 5월 말 영화촬영을 끝내고 그는 김근태 상임고문이 좋아했던 참외와 막걸리를 들고 묘역을 찾아가 “영화 잘 마무리하고 왔습니다”고 인사를 했다고 말했다.이 영화는 대선 직전 개봉을 목표로 한다. 정 감독은 “대선 후보들이 모두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며 “우리 모두가 아픈 과거와 김근태 같은 분들의 희생을 피상적으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공유해야 하며, 이런 과거를 극복할 때 통합과 화해로 나아갈 수 있다”고 했다.

부산/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2012년 1월 22일 일요일

고문기술자 이근안 목사직 면직


이글은 한겨레신문 조현기자 블로그 휴심정 2012-01-19일자 기사 '고문기술자 이근안 목사직 면직'을 퍼왔습니다.

지난 2008년 목사 안수를 받는 이근안씨 사진 인터넷스타2.0 캡쳐

고문기술자’로 알려진 이근안씨가 목사직을 잃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개혁총회(개혁총회·총회장·정서영 목사) 관계자는 19일“지난 14일 긴급 징계위원회를 열어 이근안 씨의 목사직을 면직했다”고 밝혔다. 교단에서 일단 면직이 결정되면 복직이 안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개혁총회쪽은 한국종교개혁시민연대와  한국교회정화운동협의회 등 교계 시민단체들이 이날 이근안씨에 대한 ‘목사직 안수 철회 요구서’와 탄원서를 서울 관악구 남현동 사무실에 제출하자 징계 사실을 뒤늦게 공표했다.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다 지난달 별세한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장례식 사진 <한겨레> 자료

개혁총회쪽은 김근태 고문의 별세소식이 전해진 뒤 인터넷 포털 다음에서 이근안씨 목사 안수 철회서명이 펼쳐지고, 보수단체인 한국교회언론회마저 논평에서 ‘무분별하게 목사직을 수여하는 교단의 행태’를 지적하는 등 비판이 고조되자 ‘이씨가 목사로서 품위를 훼손했다’는 이유를 들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경 대공분실 경감이었던 이근안씨는 1985년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이른바 ‘서울대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돼 수감됐을 때 잔인한 고문 사실이 1988년 보도로 드러나자 10년10개월 동안 도망다니다 공소시효가 끝난 1999년 10월 ‘자수’해 징역 7년을 살고 2006년 11월 출소했다.


지난 2000년 수감되는 이근안씨 사진 <한겨레> 자료

 그는 교도소에서 신학대 통신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출석 수업 등을 마친 뒤 2008년 10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목사가 된 뒤 교정 선교와 신앙 간증을 하면서 “나는 고문기술자가 아닌 애국자”라고 표현하며 고문을 정당화해 비판을 받아왔다.
 한편 이씨가 목사로서 소속됐던 개혁총회는 67개 노회에 3656개 교회가 소속돼 있으며,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가입 교단이라고 밝히고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2011년 12월 31일 토요일

"이근안, 이래도 고문이 예술이고 애국이었나?"


이글은 프레시안 2011-12-30일자 기사 '"이근안, 이래도 고문이 예술이고 애국이었나?"'를 퍼왔습니다.
김근태의 용서와 이근안의 파렴치

26년간 떨리던 민주당 김근태 상임고문의 손이 침대아래로 '툭' 떨어지자, 병실 주변에는 여명보다 안개가 먼저 깔렸다. 30일 새벽 5시 30분 '세상의 양심'은 시리디시린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64세의 지난한 삶을 놨다. 사인은 고문 후유증.

선대인 경제전략연구소장은 트위터(@kennedian3)에 "정녕 하나님은 있는 겁니까"라며 "평생 민주화와 정치 발전 위해 헌신했던 김근태 선생님은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시고, 그를 고문했던 이근안은 목사로 변신해 고문은 예술이고 애국이었다고 떠들고 다니는 세상"이라고 한탄했다.

"신문도 하나의 예술이다"

김근태 상임고문과 이근안 전 경감의 악연은 26년 전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시작됐다. 김 상임고문은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1985년 9월 4일 구속됐다. 그 후 그는 17일간 매일 5시간씩 이 전 경감에게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받았다.

"고문을 할 때는 온 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뉘면서 몸을 다섯 군데를 묶었습니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 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가면서 전기 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김근태 책 )

고문 트라우마는 '죽음의 그림자'처럼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그는 치과에 가는 것조차 꺼렸다고 한다. 의자에 반쯤 누운 채 얼굴을 가리는 순간, 바로 전기고문이 연상됐기 때문. 2001년 대선 경선 때 참모진은 물고문으로 얻은 비염과 축농증 때문에 전달력이 떨어진다며 수술을 권했다. 그렇게 수술대에 올라 마취를 하는 과정은 그를 다시 남영동 대공분실로 데려갔다. 수술 후 그는 "칠성판(고문대)에 다시 올라간 느낌이었다"고 했다.


▲ '고문 기술자' 이근안 ⓒ연합

하지만 '고문 기술자' 이근안의 기억은 다르다. 이 전 경감은 작년 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고문 행위가 "애국 행위"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신문(訊問) 기술자"로 지칭, "그런 의미에서 신문도 하나의 예술이다"라고 덧붙였다.

"(김근태 상임고문에게) 전기 고문을 한 건 사실이지만, 220볼트 전기를 쓴 게 아니고 면도기에 들어 있던 배터리를 썼다. 내가 취미 삼아 만든 모형 비행기 모터에서 'AA 건전지2개'를 가지고 겁을 준 것뿐... 몇 시간 전부터 '너 전기로 지질 거다'라고 겁을 준 다음에 전기 잘 통하라고 소금물 뿌린 발가락에 배터리를 갖다 대고 겁을 주니 지하조직 일체를 자백했다."

1985년 납북어부 김성한 씨 고문 혐의로 88년부터 수배를 받던 이 전 경감은 10년 10개월 만인 1999년 10월 검찰에 자수했다. 이미 김 상임고문 사건을 포함해 대부분의 사건이 도피생활 중 공소시효가 지난 상태였으나, '특정범죄가중처벌법 4조의2' 규정에 따라 7년 형을 선고 받았다.

자수는 했지만, '청룡봉사상'을 포함하여 재직 기간 중 모두 16차례의 표창을 받고 대공 분야에서는 "이근안 없으면 수사가 안 된다"는 말을 들었던 그는 '고문 기술자'라는 말이 억울했다. 그는 과의 인터뷰에서 "훈장을 타서 매달 10만 원씩 받을 수 있는 돈도 안 받았다"며 "내가 그 돈을 받기 위해서 애국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가 돈 받으려고 그랬나. 마찬가지다"라고 자신을 안중근 의사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런데 2010년 2월 7일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던 김 상임고문이 이 전 경감을 옥중면회 했다. 이 전 경감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김 장관이 들어오자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지난 일은 죄송하게 됐다'며 고개를 숙이자 김 장관이 양팔을 벌려 포옹을 해왔다. 그리고는 '그게 어떻게 개인의 잘못이냐. 이 시대가 낳은 비극 아니냐'며 위로를 건네는 게 아닌가."

정작 면회를 마친 김 상임고문은 그날 "밤잠을 설쳤다"고 한다. 면회 2주 뒤 자신의 홈페이지에 "저 사죄는 사실일까?"라며 혼란스러워했다. 자신의 사타구니에까지 전기고문을 가했던 자였다.

작가 공지영 씨는 관련 일화 한편을 트위터(@congjee)에 소개했다.

"몇 년 전 뵈었을 때, 우연히 이근안을 만났다고. 그가 울며 잘못했다 용서해달라고 했을 때 너무 가식처럼 느껴져 도저히!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고. 그게 몇 달 후까지 자신을 괴롭힌다고. 나 너무 옹졸한가? 물으셨죠."

이 전 경감은 2006년 11월 출소해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자신이 목회자로 입문한 건 "간첩죄로 잡아들인 애들이 후일 민주화 인사로 보상받는 걸 보고 울화가 치밀어 감옥에서, 믿을 수 있는 나라, 배신 없는 나라를 찾다 보니 하늘 나라를 찾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당신을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 이 자리에 왔다"

김근태는 애초 이근안을 만나야 할지 망설였고, 면회 사실 공개도 원치 않았다고 한다.

"언론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은 물론 이근안 씨를 만난 것이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 마음이 정리되지 않고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참회하겠다며 목사가 된 이의 마음은 미해결 사건으로 남을 것 같다. 김근태는 "당신을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 이 자리에 왔다"고 말했으나, 시대가 이근안을 용서했을지는 의문이다.



/이명선 기자

2011년 12월 30일 금요일

‘고문의 추억’, 민주화의 별 김근태 지다


이글은 대자보 2011-12-30일자 기사 '‘고문의 추억’, 민주화의 별 김근태 지다'를 퍼왔습니다.
[오용석의 정언생각] 이근안 지금 보고 있나? 고문이 아직도 예술이더냐?


▲ 민주화의 별, 그 혹독한 80년대 민주화의 여정 모습 ©김근태 미니홈피

이근안은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그 유명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근무하면서 매국 조선의 '청룡봉사상'을 포함하여, 재직기간 중 모두 16차례의 표창을 받았습니다. 당시 대공 분야에서는 "이근안 없으면 수사가 안 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답니다.

그가 이처럼 탁월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투철한 사명감과 남다른 고문기술 덕분입니다. 몽둥이찜질은 기본이고, 볼펜 고문… 관절 뽑기…, 나아가 일명 칠성판에 온몸을 묶고 얼굴에 수건을 뒤집어씌운 채 코와 입에 샤워기를 들이대고 고춧가루와 물을 퍼붓는 물고문, 그리고 새끼발가락에다 전기 줄을 감아 전류를 흘려보내 몸을 마치 불 인두로 지지듯이 바스러뜨리는 전기고문.

지금 고문기술자 이근안, 형기를 마치고 출소해서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자신이 목회자로 입문한 건 “간첩죄로 잡아들인 애들이 후일 민주화 인사로 보상받는 걸 보고 울화가 치밀어 감옥에서, 믿을 수 있는 나라, 배신 없는 나라를 찾다 보니 하늘나라를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보고 있나, 이근안? 고문이 아직도 예술이더냐?” 최근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80년대 심문(=고문)은 하나의 ‘예술’이었으며,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다.”라고 당당히 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직자입니다. 

2011년 12월 16일 금요일

글 제목 고문 피해자, 김근태는 돌아와야 한다


이글은 대자보 2011-12-13일자 기사 '고문 피해자, 김근태는 돌아와야 한다'를 퍼왔습니다.
[정문순 칼럼] 한국사회가 빚진 김근태, 아직 다 못 갚아 안타까움 더해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이 많이 아프다고 한다. 상임고문이라고 하니까 현실 정치에서 물러나 뒷방 노인으로 늙어가는 줄 알았는데 투병 중이었던 것이다. 김근태라고 하면, ‘그 유명한 고문 사건’이라는 타이틀이 자동적으로 붙는 인물이지만 지금 젊은 세대가 그 이름을 얼마나 알까. 모르는 것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고문’이니 ‘민주화’니 하는 이름을 떠올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산다면 다행이겠다. 

그 실력이나 자질을 생각할 때 기대에 못 미쳐서 안타까운 사람을 꼽는다면, 김근태가 그에 속한다고 본다. 한나라당 이름을 달고 선거에 나오더라도 미워하지 않을 사람이 있는지 헤아린 적도 있는데, 김근태가 그랬다. 불의와 죽음의 시대를 한 몸으로 감당한 인물이라면 그에 걸맞는 대접을 받고 실력을 발휘해야 할 것 같은데, 그는 둘 다 아쉬운 느낌을 준다. 

80년대를 거리와 감옥에서 보낸 그는 90년대 중반 민주개혁 세력의 대표자로서 제도권 정치에 입성했고 늘 일정한 지분을 누리기는 했다. 그러나 어떤 결정적인 문턱을 넘지 못했다. 2002년 대통령 경선 후보에 나왔지만 일찌감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는 경쟁자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 부류에게서 보이는 개성적이고 강렬한 면모가 부족했다. 어딘지 의기소침하고 유약해 보인다는 건 정치인에게 마이너스였다. 참여정부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을 맡을 때는 차기 대선 주자에서 라이벌로 일컬어지며 통일부 장관으로 승승장구하던 정동영 의원보다 뒤처지는 모습이었다. 정 의원보다 덜 개혁적이거나 뭔가를 잘못해선 그런 것도 아니었다. 계파를 만드는 데 골몰하지도 않았고 적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현실 정치라는 게 비정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참여정부 말기 부동산 정책으로 갈팡질팡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계급장 떼고 맞붙어 보자.”라며 호기롭게 맞서던 장면은 정치인 김근태가 그답지 않게 내뿜은 마지막 포스로 기억된다. 그리고 총선이 있었고, 상대도 안되는 ‘듣보잡’으로 봤던 ‘음주 방송’ 신지호 의원에게 졌다. 뉴라이트 출신에게도 못 이길 정도로 민주 투사의 상징은 초라해졌다. 그가 잃은 것은 국회의원 뱃지만이 아니었다. 고문으로 망가진 건강은 시간이 지난다고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남에게 알리지 않았지만 수년 전부터 뇌혈관 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한 인간을 처절히 능욕한 고문 가해자들은 악마였을까. 김근태는 자신에게 고문을 가했던 자들이 돌아서서 저들끼리 가족 걱정하고 자식 키우는 이야기를 나누더라고 했다. 현기영 소설가도 4.3항쟁을 조명한 소설을 쓴 후 공안기관에 잡혀가 고문을 당할 때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고문 기술자들은 악마가 아니고 평범한 가장이었는지 모른다. 고문을 가한 자들은 자신들의 죄를 죄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사람 같지도 않은 ‘빨갱이’ 잡는 것으로 생각했을 수 있다. 자신들은 악한 것이 아니라 악역을 담당할 뿐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런 자들이라면 반성하고 살기를 기대하기는 무리다. 

김근태의 관절을 뽑고 전기고문을 가하고 익사 직전으로 몰아간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그 악마의 손으로 십자가와 성경을 만지작거리는 사람이 되어 있다. 그는 옥중에서 죗값을 치르던 시절 면회 온 김근태로부터 용서를 받기까지 했다. 이근안은 김근태를 ‘칠성판’에 눕히면서 민주화가 되면 자신이 대신 누울 테니 똑같이 복수하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 약속은 못 지킬망정 그가 목회자로서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거나 교회에서 헛것을 배우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병석을 찾아가 손을 잡고 참회의 기도라도 올리기 바란다. 

많은 도전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집권자를 별로 안 예쁜 동물에 비유하며 욕이라도 할 수 있는 정도의 자유가 누구의 희생을 통해 얻어진 것인지 깨닫는다면, 여전히 우리 사회는 그에게 갚을 빚이 있고 그 자신도 역량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민주주의 유공자가 영화를 누리기는커녕 병마에 시달려 딸의 결혼식도 보지 못할 정도라면 너무 공평치 못하다. 

* 본문은 12.13 에도 게재했습니다.


* 필자는 <대자보> 편집위원이며, 문학평론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