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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21일 수요일

증인석 선 ‘고문기술자’ 이근안 “고문 없었다” 궤변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11-21일자 기사 '증인석 선 ‘고문기술자’ 이근안 “고문 없었다” 궤변'을 퍼왔습니다.

이근안 전 경기경찰청 대공분실장이 2008년 10월30일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개혁 교단의 목사 임직식에 참석해 목사 안수를 받으려 기다리고 있다. 이씨는 올해 1월14일 예수교장로회 합동개혁 총회의 긴급 징계위원회에서 ‘자질 논란’으로 목사직 면직을 당했다. <브레이크뉴스> 제공

목사직 잃고 행방 묘연했던 이씨
30여년전 납북어부 간첩사건 재심서
“오래전 일이라 기억 안난다”

함께 근무했던 수사관 증언에도
185일 불법구금 사실 잡아떼

올해 1월 목사직을 잃은 뒤 행방이 묘연했던 ‘고문기술자’ 이근안(74)씨가 최근 간첩 조작 의혹 사건의 누명을 벗겨달라고 유족들이 신청한 재심사건 재판에 나와 “불법구금이나 고문은 없었다”고 항변했다.이씨는 지난 13일 오후 인천지법 제13형사부(재판장 송경근) 심리로 열린 30여년 전 ‘납북어부 간첩 사건’의 안아무개(2006년 사망)씨 재심 사건에 검찰 쪽 증인으로 출석했다. 그는 20여분 동안 진행된 검찰과 변호인의 신문에서 불법구금과 고문에 의한 조작 의혹이 제기되자 “나는 목사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관련 의혹을 부인했다.이씨는 “오래돼서 언제 (안씨를) 연행했는지 알 수 없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가혹 행위에 대해서도 “(간첩 활동의) 의심이 나서 3개월 공작을 했고, 안씨가 다른 사람을 포섭중이었고, 이런 사실을 모두 자백했다. 불법구금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그러나 당시 경기경찰청 대공분실에 함께 근무했던 나아무개 수사관은 이씨의 증언 직전에 있었던 변호인 신문에서 “이씨가 조사하는 것을 보지 못해 고문 여부를 알 수 없지만 안씨를 185일간 영장 없이 구금한 게 맞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변호인이 전했다. 안씨는 같은 마을에 살던 어부들이 납북된 지 수년이 지나 간첩 사건이 터지자 1977년 2월 참고인으로 경찰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그는 조사과정에서 피의자로 바뀐 뒤 그해 8월 구속됐다.안씨의 변호인 쪽은 “이씨가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난다. 모르겠다’고 답변하는 반면, 유리한 것은 소설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세세한 부분까지 말했다. 이씨는 ‘편리한 기억력의 소유자’인 것 같다”고 말했다.이씨는 증언을 한 뒤 전직 동료 수사관으로 보이는 10여명에게 둘러싸여 당당히 법정을 빠져나갔다. 방청석에서 재판을 지켜보던 안씨의 아들(51)은 “이씨의 말대로 아버지가 순순히 자백했으면 뭐하러 185일간 불법구금을 했느냐”며 어이없어했다. 방청객 정아무개(63)씨는 “최근 자신을 소재로 한 영화 (남영동 1985)가 나오자 변명하려고 적극적으로 얘기하는 것처럼 들렸다”고 말했다.이씨는 1970년대 초부터 1988년까지 경기경찰청 대공분실장 등으로 근무하며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치다 불법체포와 고문 혐의로 오랜 수배 끝에 2000년 자수했다. 2008년 10월 안수를 받고 목회자로 변신했지만 각종 언론 인터뷰에서 ‘나는 애국자’라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다가 올해 1월 ‘자질 부족’ 등을 이유로 목사직을 박탈당했다.

인천/김영환 기자 ywkim@hani.co.kr

2012년 1월 22일 일요일

고문기술자 이근안 목사직 면직


이글은 한겨레신문 조현기자 블로그 휴심정 2012-01-19일자 기사 '고문기술자 이근안 목사직 면직'을 퍼왔습니다.

지난 2008년 목사 안수를 받는 이근안씨 사진 인터넷스타2.0 캡쳐

고문기술자’로 알려진 이근안씨가 목사직을 잃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개혁총회(개혁총회·총회장·정서영 목사) 관계자는 19일“지난 14일 긴급 징계위원회를 열어 이근안 씨의 목사직을 면직했다”고 밝혔다. 교단에서 일단 면직이 결정되면 복직이 안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개혁총회쪽은 한국종교개혁시민연대와  한국교회정화운동협의회 등 교계 시민단체들이 이날 이근안씨에 대한 ‘목사직 안수 철회 요구서’와 탄원서를 서울 관악구 남현동 사무실에 제출하자 징계 사실을 뒤늦게 공표했다.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다 지난달 별세한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장례식 사진 <한겨레> 자료

개혁총회쪽은 김근태 고문의 별세소식이 전해진 뒤 인터넷 포털 다음에서 이근안씨 목사 안수 철회서명이 펼쳐지고, 보수단체인 한국교회언론회마저 논평에서 ‘무분별하게 목사직을 수여하는 교단의 행태’를 지적하는 등 비판이 고조되자 ‘이씨가 목사로서 품위를 훼손했다’는 이유를 들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경 대공분실 경감이었던 이근안씨는 1985년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이른바 ‘서울대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돼 수감됐을 때 잔인한 고문 사실이 1988년 보도로 드러나자 10년10개월 동안 도망다니다 공소시효가 끝난 1999년 10월 ‘자수’해 징역 7년을 살고 2006년 11월 출소했다.


지난 2000년 수감되는 이근안씨 사진 <한겨레> 자료

 그는 교도소에서 신학대 통신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출석 수업 등을 마친 뒤 2008년 10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목사가 된 뒤 교정 선교와 신앙 간증을 하면서 “나는 고문기술자가 아닌 애국자”라고 표현하며 고문을 정당화해 비판을 받아왔다.
 한편 이씨가 목사로서 소속됐던 개혁총회는 67개 노회에 3656개 교회가 소속돼 있으며,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가입 교단이라고 밝히고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2011년 12월 31일 토요일

"이근안, 이래도 고문이 예술이고 애국이었나?"


이글은 프레시안 2011-12-30일자 기사 '"이근안, 이래도 고문이 예술이고 애국이었나?"'를 퍼왔습니다.
김근태의 용서와 이근안의 파렴치

26년간 떨리던 민주당 김근태 상임고문의 손이 침대아래로 '툭' 떨어지자, 병실 주변에는 여명보다 안개가 먼저 깔렸다. 30일 새벽 5시 30분 '세상의 양심'은 시리디시린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64세의 지난한 삶을 놨다. 사인은 고문 후유증.

선대인 경제전략연구소장은 트위터(@kennedian3)에 "정녕 하나님은 있는 겁니까"라며 "평생 민주화와 정치 발전 위해 헌신했던 김근태 선생님은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시고, 그를 고문했던 이근안은 목사로 변신해 고문은 예술이고 애국이었다고 떠들고 다니는 세상"이라고 한탄했다.

"신문도 하나의 예술이다"

김근태 상임고문과 이근안 전 경감의 악연은 26년 전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시작됐다. 김 상임고문은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1985년 9월 4일 구속됐다. 그 후 그는 17일간 매일 5시간씩 이 전 경감에게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받았다.

"고문을 할 때는 온 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뉘면서 몸을 다섯 군데를 묶었습니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 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가면서 전기 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김근태 책 )

고문 트라우마는 '죽음의 그림자'처럼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그는 치과에 가는 것조차 꺼렸다고 한다. 의자에 반쯤 누운 채 얼굴을 가리는 순간, 바로 전기고문이 연상됐기 때문. 2001년 대선 경선 때 참모진은 물고문으로 얻은 비염과 축농증 때문에 전달력이 떨어진다며 수술을 권했다. 그렇게 수술대에 올라 마취를 하는 과정은 그를 다시 남영동 대공분실로 데려갔다. 수술 후 그는 "칠성판(고문대)에 다시 올라간 느낌이었다"고 했다.


▲ '고문 기술자' 이근안 ⓒ연합

하지만 '고문 기술자' 이근안의 기억은 다르다. 이 전 경감은 작년 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고문 행위가 "애국 행위"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신문(訊問) 기술자"로 지칭, "그런 의미에서 신문도 하나의 예술이다"라고 덧붙였다.

"(김근태 상임고문에게) 전기 고문을 한 건 사실이지만, 220볼트 전기를 쓴 게 아니고 면도기에 들어 있던 배터리를 썼다. 내가 취미 삼아 만든 모형 비행기 모터에서 'AA 건전지2개'를 가지고 겁을 준 것뿐... 몇 시간 전부터 '너 전기로 지질 거다'라고 겁을 준 다음에 전기 잘 통하라고 소금물 뿌린 발가락에 배터리를 갖다 대고 겁을 주니 지하조직 일체를 자백했다."

1985년 납북어부 김성한 씨 고문 혐의로 88년부터 수배를 받던 이 전 경감은 10년 10개월 만인 1999년 10월 검찰에 자수했다. 이미 김 상임고문 사건을 포함해 대부분의 사건이 도피생활 중 공소시효가 지난 상태였으나, '특정범죄가중처벌법 4조의2' 규정에 따라 7년 형을 선고 받았다.

자수는 했지만, '청룡봉사상'을 포함하여 재직 기간 중 모두 16차례의 표창을 받고 대공 분야에서는 "이근안 없으면 수사가 안 된다"는 말을 들었던 그는 '고문 기술자'라는 말이 억울했다. 그는 과의 인터뷰에서 "훈장을 타서 매달 10만 원씩 받을 수 있는 돈도 안 받았다"며 "내가 그 돈을 받기 위해서 애국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가 돈 받으려고 그랬나. 마찬가지다"라고 자신을 안중근 의사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런데 2010년 2월 7일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던 김 상임고문이 이 전 경감을 옥중면회 했다. 이 전 경감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김 장관이 들어오자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지난 일은 죄송하게 됐다'며 고개를 숙이자 김 장관이 양팔을 벌려 포옹을 해왔다. 그리고는 '그게 어떻게 개인의 잘못이냐. 이 시대가 낳은 비극 아니냐'며 위로를 건네는 게 아닌가."

정작 면회를 마친 김 상임고문은 그날 "밤잠을 설쳤다"고 한다. 면회 2주 뒤 자신의 홈페이지에 "저 사죄는 사실일까?"라며 혼란스러워했다. 자신의 사타구니에까지 전기고문을 가했던 자였다.

작가 공지영 씨는 관련 일화 한편을 트위터(@congjee)에 소개했다.

"몇 년 전 뵈었을 때, 우연히 이근안을 만났다고. 그가 울며 잘못했다 용서해달라고 했을 때 너무 가식처럼 느껴져 도저히!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고. 그게 몇 달 후까지 자신을 괴롭힌다고. 나 너무 옹졸한가? 물으셨죠."

이 전 경감은 2006년 11월 출소해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자신이 목회자로 입문한 건 "간첩죄로 잡아들인 애들이 후일 민주화 인사로 보상받는 걸 보고 울화가 치밀어 감옥에서, 믿을 수 있는 나라, 배신 없는 나라를 찾다 보니 하늘 나라를 찾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당신을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 이 자리에 왔다"

김근태는 애초 이근안을 만나야 할지 망설였고, 면회 사실 공개도 원치 않았다고 한다.

"언론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은 물론 이근안 씨를 만난 것이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 마음이 정리되지 않고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참회하겠다며 목사가 된 이의 마음은 미해결 사건으로 남을 것 같다. 김근태는 "당신을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 이 자리에 왔다"고 말했으나, 시대가 이근안을 용서했을지는 의문이다.



/이명선 기자

2011년 12월 30일 금요일

‘고문의 추억’, 민주화의 별 김근태 지다


이글은 대자보 2011-12-30일자 기사 '‘고문의 추억’, 민주화의 별 김근태 지다'를 퍼왔습니다.
[오용석의 정언생각] 이근안 지금 보고 있나? 고문이 아직도 예술이더냐?


▲ 민주화의 별, 그 혹독한 80년대 민주화의 여정 모습 ©김근태 미니홈피

이근안은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그 유명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근무하면서 매국 조선의 '청룡봉사상'을 포함하여, 재직기간 중 모두 16차례의 표창을 받았습니다. 당시 대공 분야에서는 "이근안 없으면 수사가 안 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답니다.

그가 이처럼 탁월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투철한 사명감과 남다른 고문기술 덕분입니다. 몽둥이찜질은 기본이고, 볼펜 고문… 관절 뽑기…, 나아가 일명 칠성판에 온몸을 묶고 얼굴에 수건을 뒤집어씌운 채 코와 입에 샤워기를 들이대고 고춧가루와 물을 퍼붓는 물고문, 그리고 새끼발가락에다 전기 줄을 감아 전류를 흘려보내 몸을 마치 불 인두로 지지듯이 바스러뜨리는 전기고문.

지금 고문기술자 이근안, 형기를 마치고 출소해서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자신이 목회자로 입문한 건 “간첩죄로 잡아들인 애들이 후일 민주화 인사로 보상받는 걸 보고 울화가 치밀어 감옥에서, 믿을 수 있는 나라, 배신 없는 나라를 찾다 보니 하늘나라를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보고 있나, 이근안? 고문이 아직도 예술이더냐?” 최근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80년대 심문(=고문)은 하나의 ‘예술’이었으며,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다.”라고 당당히 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직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