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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31일 토요일

김근태의 마지막 말 "2012년을 점령하라"


이글은 프레시안 2011-12-30일자 기사 '김근태의 마지막 말 "2012년을 점령하라"'를 퍼왔습니다.
'세계의 양심수' 김근태, 하늘로 가다

"아름다운 꼴찌로 기억해 달라"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광주 경선을 앞두고 노무현 후보로의 개혁 후보 단일화를 위해 후보직을 사퇴하며 남긴 말이다. 그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심정으로 지금은 죽는다"고도 했다. 두 마디는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드라마틱한 말이었다. '6.3 세대'로 386 운동권 '대부'로 불렸던 김근태, 그는 현실정치에서 만년 비주류였다. '비주류의 정점'이라는 게 있다면 그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47년 2월 14일 경기도 부천에서 출생한 김근태는 중학교 3학년 때 5.16쿠데타를 목격했다. 강제로 교직을 그만두게 된 그의 아버지는 충격을 받았고 곧 심장판막증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어머님은 동대문 시장에서 여자 스타킹과 양말을 받아다 팔아 김근태를 키웠다.

그는 경기고를 졸업하고 1965년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71년 박정희 정권 부정선거 파동 반대 활동, 교련 데모에 적극 참여했고, 서울대 내란 음모 사건으로 수배를 당하게 된다. 당시 친구였던 조영래, 장기표, 심재권은 감옥에 들어갔다. 이후 74년 긴급조치 위반으로 또 다시 수배 생활을 해야 했다. 그렇게 도망하기를 7년, 박정희 정권이 무너졌다.


▲ 학창 시절의 김근태 ⓒ김근태 미니홈피
▲ 민청련 시절 김근태(오른 쪽은 장영달 전 의원)) ⓒ김근태 미니홈피

김근태는 새로 들어선 전두환 군부 독재에 맞서 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했고초대, 2대 의장을 지냈다. 후배들인 386세대, 반독재 민주화 운동 세력의 기획자이자 동지로 살았다. 그러나 민청련 활동으로 인해 그는 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이 전무'로 통하는 고문 기술자 이근안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했다. 전기와 물이 그의 몸을 할퀴고 지나갔다. 이후 그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며 남은 생을 살아야 했다.

이 사건에 관한 진술은 이미자의 '노래 테입' 중간에 녹음된 채로 미국 인권단체에 건네졌다. 이후 전 세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세계의 양심수'라는 수식이 김근태 이름 앞에 붙었다. 87년 로버트 케네디 국제 인권상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그를 가두고 고문했던 국가보안법은 21세기 하고도 11년이 지난 오늘, 아직도 살아있다.

그는 자신의 책 에서 '인간도살장' 안에 있던 느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고문을 할 때는 온 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뉘면서 몸을 다섯 군데를 묶었습니다...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 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가면서 전기 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 앞에 다가왔습니다. 이 때 마음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과연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했으며 이런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절망에 몸서리쳤습니다."


▲ '세계의 양심수' 김근태는 인권상 수상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김근태 미니홈피

87년 6월 항쟁을 감옥에서 맞은 그는 88년이 돼서야 석방됐다. 세상은 변했지만 '천지개벽'은 없었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결성을 주도하고 정책기획실장, 집행위원장을 지냈지만 시대는 그를 또 다시 구속했다.

노태우 정권이 끝난 뒤 3당 합당을 지켜본 그는 현실정치로 눈을 돌린다. 95년 민주당에 입당한 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계 복귀와 함께 새정치국민회를 꾸렸고, 부총재 직을 맡았다. 이 때 15대 총선을 치렀고, 서울 도봉갑에서 당선돼 내리 3선을 지냈다. 98년 출범한 국민의 정부 탄생에 힘을 보탠 그는, 곧바로 새천년민주당 쇄신 운동에 돌입했다. 역시 '비주류'였다.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과 대선 경선에서 맞붙었다. 이인제 후보와 경쟁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에 힘을 실어주면서 후보직을 사퇴했다. 이른바 '노풍'이 불기 시작한 광주 경선 직전이었다. 두 번째 민주 정부가 들어섰다. 노무현 탄핵 열풍을 딛고 '주류'로 올라선 열린우리당의 창당에 참여했지만 여전히 그는 '비주류'의 길을 걸으며 열린우리당을 지배했던 '중도실용노선'과 '투쟁'을 이어갔다.


▲ 보건복지부장관을 지내던 시절 김근태 ⓒ김근태 미니홈피
열린우리당 의장을 지낼 때는 부동산원가 공개에 반대하는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계급장 떼고 토론해보자"고 맞섰다. 그런 그를 노 전 대통령은 보건복지부 장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장관을 지내면서도 그는 영리병원을 반대하며 청와대와 각을 세웠다. 노무현 정부의 한미FTA 추진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여전한 '비주류'였다.

2011년 12월 29일 그가 떠나기 전, 지난 10월 18일 마지막으로 그의 블로그에 'posted by 김근태'로 남아 있는 글 역시, 그의 '인생'이 그대로 녹아들어가 있었다.

"(월가 시위의 요인은) 무엇보다 1%를 향한 99%의 분노 때문이다. 사회적 불평등과 정의롭지 못함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1%인지 5%인지는 중요치 않다. 이처럼 전 세계가 공감한다는 것은 미국이 주도한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제패했었다는 증거다. 선진국과 후진국, 강대국과 약소국, 민주국가와 비민주국가의 구분 없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세계적 대세였던 것이다. 그리고 2008년의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손인 월가의 실체가 드러났음에도 희생도, 반성도, 징벌도 없는 불공평함에 분노한 것이다.
...
우리는 미국보다 사정이 낫다. 미국보다 금융이 정치에 비해 권력이 강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굳이 증권사가 많은 동여의도를 점령할 필요는 없다. 국회가 있는 서여의도, 청와대가 있는 종로를 점령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운 좋게 내년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그가 남긴 마지막 글의 제목이다.

"2012년을 점령하라"



/박세열 기자 

"이근안, 이래도 고문이 예술이고 애국이었나?"


이글은 프레시안 2011-12-30일자 기사 '"이근안, 이래도 고문이 예술이고 애국이었나?"'를 퍼왔습니다.
김근태의 용서와 이근안의 파렴치

26년간 떨리던 민주당 김근태 상임고문의 손이 침대아래로 '툭' 떨어지자, 병실 주변에는 여명보다 안개가 먼저 깔렸다. 30일 새벽 5시 30분 '세상의 양심'은 시리디시린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64세의 지난한 삶을 놨다. 사인은 고문 후유증.

선대인 경제전략연구소장은 트위터(@kennedian3)에 "정녕 하나님은 있는 겁니까"라며 "평생 민주화와 정치 발전 위해 헌신했던 김근태 선생님은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시고, 그를 고문했던 이근안은 목사로 변신해 고문은 예술이고 애국이었다고 떠들고 다니는 세상"이라고 한탄했다.

"신문도 하나의 예술이다"

김근태 상임고문과 이근안 전 경감의 악연은 26년 전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시작됐다. 김 상임고문은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1985년 9월 4일 구속됐다. 그 후 그는 17일간 매일 5시간씩 이 전 경감에게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받았다.

"고문을 할 때는 온 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뉘면서 몸을 다섯 군데를 묶었습니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 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가면서 전기 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김근태 책 )

고문 트라우마는 '죽음의 그림자'처럼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그는 치과에 가는 것조차 꺼렸다고 한다. 의자에 반쯤 누운 채 얼굴을 가리는 순간, 바로 전기고문이 연상됐기 때문. 2001년 대선 경선 때 참모진은 물고문으로 얻은 비염과 축농증 때문에 전달력이 떨어진다며 수술을 권했다. 그렇게 수술대에 올라 마취를 하는 과정은 그를 다시 남영동 대공분실로 데려갔다. 수술 후 그는 "칠성판(고문대)에 다시 올라간 느낌이었다"고 했다.


▲ '고문 기술자' 이근안 ⓒ연합

하지만 '고문 기술자' 이근안의 기억은 다르다. 이 전 경감은 작년 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고문 행위가 "애국 행위"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신문(訊問) 기술자"로 지칭, "그런 의미에서 신문도 하나의 예술이다"라고 덧붙였다.

"(김근태 상임고문에게) 전기 고문을 한 건 사실이지만, 220볼트 전기를 쓴 게 아니고 면도기에 들어 있던 배터리를 썼다. 내가 취미 삼아 만든 모형 비행기 모터에서 'AA 건전지2개'를 가지고 겁을 준 것뿐... 몇 시간 전부터 '너 전기로 지질 거다'라고 겁을 준 다음에 전기 잘 통하라고 소금물 뿌린 발가락에 배터리를 갖다 대고 겁을 주니 지하조직 일체를 자백했다."

1985년 납북어부 김성한 씨 고문 혐의로 88년부터 수배를 받던 이 전 경감은 10년 10개월 만인 1999년 10월 검찰에 자수했다. 이미 김 상임고문 사건을 포함해 대부분의 사건이 도피생활 중 공소시효가 지난 상태였으나, '특정범죄가중처벌법 4조의2' 규정에 따라 7년 형을 선고 받았다.

자수는 했지만, '청룡봉사상'을 포함하여 재직 기간 중 모두 16차례의 표창을 받고 대공 분야에서는 "이근안 없으면 수사가 안 된다"는 말을 들었던 그는 '고문 기술자'라는 말이 억울했다. 그는 과의 인터뷰에서 "훈장을 타서 매달 10만 원씩 받을 수 있는 돈도 안 받았다"며 "내가 그 돈을 받기 위해서 애국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가 돈 받으려고 그랬나. 마찬가지다"라고 자신을 안중근 의사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런데 2010년 2월 7일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던 김 상임고문이 이 전 경감을 옥중면회 했다. 이 전 경감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김 장관이 들어오자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지난 일은 죄송하게 됐다'며 고개를 숙이자 김 장관이 양팔을 벌려 포옹을 해왔다. 그리고는 '그게 어떻게 개인의 잘못이냐. 이 시대가 낳은 비극 아니냐'며 위로를 건네는 게 아닌가."

정작 면회를 마친 김 상임고문은 그날 "밤잠을 설쳤다"고 한다. 면회 2주 뒤 자신의 홈페이지에 "저 사죄는 사실일까?"라며 혼란스러워했다. 자신의 사타구니에까지 전기고문을 가했던 자였다.

작가 공지영 씨는 관련 일화 한편을 트위터(@congjee)에 소개했다.

"몇 년 전 뵈었을 때, 우연히 이근안을 만났다고. 그가 울며 잘못했다 용서해달라고 했을 때 너무 가식처럼 느껴져 도저히!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고. 그게 몇 달 후까지 자신을 괴롭힌다고. 나 너무 옹졸한가? 물으셨죠."

이 전 경감은 2006년 11월 출소해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자신이 목회자로 입문한 건 "간첩죄로 잡아들인 애들이 후일 민주화 인사로 보상받는 걸 보고 울화가 치밀어 감옥에서, 믿을 수 있는 나라, 배신 없는 나라를 찾다 보니 하늘 나라를 찾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당신을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 이 자리에 왔다"

김근태는 애초 이근안을 만나야 할지 망설였고, 면회 사실 공개도 원치 않았다고 한다.

"언론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은 물론 이근안 씨를 만난 것이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 마음이 정리되지 않고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참회하겠다며 목사가 된 이의 마음은 미해결 사건으로 남을 것 같다. 김근태는 "당신을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 이 자리에 왔다"고 말했으나, 시대가 이근안을 용서했을지는 의문이다.



/이명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