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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6일 수요일

[데스크 칼럼]‘486 犬子론’ 나올까 겁난다


이글은 미디어스 2012-06-05일자 기사 '[데스크 칼럼]‘486 犬子론’ 나올까 겁난다'를 퍼왔습니다.
486정치인들, 주어진 권력은 자신들의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구국의 강철대오 전대협. 한때 자랑스러웠던 그 이름 아래 모였던 ‘486’들이 이제 한국사회를 이끌어가는 정치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언제부턴가 486들이 한국정치 권력의 1번지 여의도 국회에 다수 진출하게 되었고, 급기야 야당인 민주당과 통합진보당의 ‘지도부’로도 입성하는 상황이다. 486정치인들이  한국 정치 권력의 중심부로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하며 불태웠던 민족과 민중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다시 발휘한다면,  그동안 다져진 사회경험과 정치경험을 바탕으로  그 어느 정치인들보다 한국 정치를 잘 이끌어가리라 기대된다. 하지만 최근 486 정치인들이 중심에 놓인 일련의 사건들은  일부 486정치인들의  자질과 지도력을 의심해 보기에 충분하다. 권력의 단맛에 빠져,  ‘언행’의 균형감각을 상실하거나, 자신들만의 ‘패권의식’에 빠져 안하무인의 모습들이 보인다.   최근 탈북자와 관련해 '막말' 파동을 겪고 있는 ‘임수경’의원도 대표적인 486 정치인이다. 그가 벌인 일순간의 행동으로 보수세력에게 꼬투리가 잡히고, 민주통합당에까지 ‘종북논란’이 번지고 말았다. 백요셉이란 탈북자가 임의원 사진도 찍고, 녹취록까지 갖고 있다고 보도된 것으로 보아, 임 의원에게 일부러 접근하고, 자극해 행동을 촉발시켰을 것이란 의혹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한국의 보수기득권 세력과 그들에 동조하는 인사들이 야당 인사의 실수를 놓치지 않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은 대선을 코 앞에 둔 민감한 한국정치 현실에서 특별한 그 무엇이 아닌 기본적인 ‘상수’의 조건이다. 처신에 조심해야 하고, 신중해야 하는 것이 대선이란 대사를 앞둔 야당과 진보진영 정치인의 기본적인 자세이기에 임 의원에 대한 비판은 당연한 것이 된다.   애초 이 ‘종북주의’ 논란 촉발시킨 진보통합당 당권파의 버티기에도 486정치인이 등장한다. 다름아닌 이석기 의원과  이정희 통합진보당 전 대표이다. 그들이 대표했던 구 당권파의 ‘버티기’만 아니었으면, 통합진보당의 비례부정사건이 종북주의 논란으로까지 번지지도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정희 전 의원이 통합진보당의 대표로서 일파의 이해 관계에 휘둘리지 않고, 진보진영 전체를 대표해 결단하고 행동했다면, 이석기 의원이 사태초기 빨리 사퇴를 했다면,  이렇게까지 진보진영이, 야권연대가 코너에 몰릴 일도 없다.  이 사건에서도  마찬가지로 ‘조중동과 보수세력’을 탓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호시탐탐’ 진보진영의 흠집내기를 노리고 있다.  그 가장 주요한 무기 중 하나가 ‘친북 ㆍ종북 논란’이란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있는 이야기, 없는 이야기 모두 다 갖다붙여, ‘흠집내기’하려고 항상 준비된 자들이다. 상어들에게 피 흐르는 ‘상처’를 그냥 방치해 둔 사람이 물어 뜯기게 되는 건 당연한 이치다.   지난 번 패배한 총선의 결과를 두고서도 486정치인들에 대한 말들이 많았다. 흠결이 있던 임종석 전 의원이 ‘사무총장’이 되더니 공천과정을 주도하고, 스스로를 공천하며 민주당 공천과정의 잡음과 파열음을 냈다. 당시 민주당의 공천을 두고, ‘친노가 다 해먹었느니’ 말들이 많았지만,  486 특히 전대협 출신들로 일컬어지는 총선의 실무라인들에 대해 오히려 친노 본류들의 불만은 컸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당시  이해찬 의원이  이에 반발해 탈당하겠다는 얘기가 나왔을까.  공천권의 핵심에 접근한 ‘486’들이 애초 총선 공천권을 주도하려다 민주당 내 갈등이 커지면서 감동은 사라지고,  감동공천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새누리당에게 결국 패배했다는 것이 민주당안팍에서  공공연하게 회자되던 분석이다.  권력의 단맛에 취해 오만해진 486들이 ‘균형감각’은 사라지고, 자신들만 ‘최선’이라는 아집에 빠져, 패권적 성향을 드러냈다는 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86 정치인들은 한국정치를 이끌어나갈 중추세력이다. 그래서 더 이상 망가지지 않고, 한 때 자랑스럽던 그 이름들이 그대로 자랑스러운 존재로 남아있기를 소망한다. 80년 대학 문을 들어서며 운동을 결심하고 실행했던 그 초심을 유지해야 한다. 486정치인들은 권력으로부터 탄압을 받는 ‘존재’가 아닌 스스로 막강한 ‘정치권력’이 되었다는 사실 또한 명심해야 한다. 균형감각을 상실하고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조건 옳다고 강변하거나, 작은 권력에 도취돼 도를 넘는 언행을 하면, 이번에는 총선이 아니라 대선을 망친다.   지난 총선 직후 한때 사이버 상에서 ‘20대 개새끼론’이 있었다고 한다. 20대들이 기대만큼 투표에 적극 나서지 않아, 투표율이 낮아져 야권연대가 졌다며 20대들을 비난하는 야권지지 성향의 30대들이 만든 이야기였다고 한다. 별로 설득력이 없어 인터넷에서 잠깐 떠돌다 사라진 이야기라고 하지만, 총선 패배에 대한 야권성향의 젊은 지지자들의 절박한 마음을 잘 읽을 수 있는 이야기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486 정치인들의 신중하지 못한 빗나간 언행과 권력욕으로  빚어진 사건들로 말미암아  이번 대선에서도 진다면, 정말 ‘486개새끼론’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겸손하고, 스스로 반성하며, 스스로 희생하는, 그때의 그 자세를 486정치인들에게 기대해 본다. 

편집장 윤성한  |  gayajun@mediaus.co.kr

2012년 1월 26일 목요일

정연주 "KBS사장으로 돌아가서 임기 채울 것"


이글은 미디어스 2012-01-25일자 기사 '정연주 "KBS사장으로 돌아가서 임기 채울 것"'을 퍼왔습니다.
"최시중, 무슨 영광을 더?" "종편, 신문사까지 일망타진"

정연주 전 KBS 사장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정치적 이유로 인해) 프로그램에서 쫓겨났던 김제동, 윤도현, 김미화 등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 사회를 정상화시키기 위한 첫번째 조치"라며 "나 역시 KBS 사장으로 원상복귀해서 남은 임기를 끝까지 채우고 그만둘 것"이라고 밝혔다.

▲ 정연주 전 KBS 사장
2008년 8월, 임기를 15개월여 앞두고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강제 해임된 정연주 전 사장은 최근 해임의 주요 근거였던 배임 혐의에 대해 최종 무죄판결을 받았으며, 해임 무효 소송의 경우에도 1,2심 모두 승소해 현재 대법원 판결만을 앞두고 있다.
정연주 전 사장은 22일 한겨레의 인터넷방송인 하니TV 에 출연해 "채우지 못한 임기가 남아있기 때문에 (법원 무죄 판결의) 원칙과 정신을 받들어 원상회복을 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정치적 이유로 인해 자리를 잃은 김제동, 윤도현, 김미화 등 모두가 원상복귀돼야 한다"며 "우리 사회가 정상적으로 되돌아가는 첫번째 조치"라고 주장했다.
강제로 해임됐던 2008년 8월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실 그때 촛불시민들과 함께 저항하면서 사장실에 끝까지 버티고 앉아 있으려고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던 이유는 KBS 내부가 굉장히 분열돼 있었기 때문"이라고 회상했다.
"나를 쫓아내려는 수구 노조가 있었고, 현재 새 노조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젊은 기자 PD들이 강제 해임을 반대하고 있었는데 그 분열상이 굉장히 가슴 아팠다. 나까지 퇴출 저지 투쟁에 나서면 내부 분열이 더욱 극심해졌을 텐데, 그걸 감당하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며 "조직을 위해서 끝까지 버틸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정 전 사장은 대법원의 최종 무죄판결 직후, 최시중 방통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했으나 최 위원장은 '책임지는 것과 나의 사퇴는 별개의 일'이라며 선을 긋고 있는 상황이다.
정 전 사장은 최시중 위원장과 관련해 "나이 드셔가지고 무슨 영광을 더 보겠다고..."라며 연민을 드러냈다.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인 정 전 사장은 동아일보 선배인 최시중 위원장이 지난해 3월 17일 인사청문회에서 울먹거리며 "일부 언론에서 (나를) 언론자유 억압의 당사자라고 비방하는 것을 보고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독재정권에 항거해 고문을 당하기도 했고,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고 주장한 것과 관련해 "당시 최시중 위원장은 (투쟁의) 근방에 얼씬도 안했다"고 꼬집었다.
"독재정권 당시 언론자유 투쟁을 했다면 75년 봄 동아일보 대량해직사태를 의미할 텐데 최시중 위원장은 (투쟁현장에) 얼씬도 안했다. 언론자유 투쟁을 하다가 감옥에 간 적이 있다고 하는데 사실관계가 뒷받침되지 않은 이야기"라며 "구속된 적은 있으나 언론자유와는 전혀 관계없는 사건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 전 사장은 "최시중 위원장은 국회에 나와서 (정연주 사장이 강제 해임됐던 2008년 여름) '김금수 당시 KBS 이사장과 대학 동기라서 잠깐 만나 이야기한 적은 있지만, 정연주 사장에 대한 이야기는 안했다'고 하던데 이 역시 전혀 사실이 아니다. 김금수 이사장에게 여러 차례 직접 전해들었는데 최시중 위원장이 '정권을 잡았지만 정연주 때문에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며 "어떻게 국민이 지켜보는 자리에 나와서 저렇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정말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라고 비판했다.
정 전 사장은 이날 방송에서 "방송사업은 정말 어마어마한 인내가 필요한 작업이다. 신문 만들듯이 생각하면 안 된다"며 "5년 3개월간 방송사를 직접 운영해본 입장에서 봤을 때 조중동 종편은 종편 뿐만 아니라 신문까지 일망타진할 수 있는 길"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정 전 사장은 "종편 개국 후 6개월이 지나면, 광고주들은 구체적 숫자를 놓고 광고 효과를 분석할 것이다. 그런데 그 자료를 토대로 광고주가 '안하겠다'고 결정을 내리면, 아무리 칼을 들이밀어도 광고를 할 수는 없는 것"며 "광고 효과가 없는데 왜 많은 돈을 들여서 광고를 하겠느냐"라고 반문했다.
이어 "방송사를 직접 운영해본 입장에서 봤을때, 광고주들이 제일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구매력이 높은 2,30대가 주 시청층인 프로그램이다. 아무리 시청률이 높아도 주 시청층이 50대 이상인 프로그램에는 광고를 하지 않으려 한다"며 "그러나 종편의 시청층은 80%이상이 50대 이후 아니냐"고 지적했다. 
정 전 사장은 "평생동안 언론문제를 가슴에 품고 살아오면서, 수구언론, 조폭언론들이 역사의 심판을 받고 청산되는 것을 진정으로 원하고 있다. 예전에는 수구언론들이 워낙 강고해서 언제쯤 그런 날이 있을까 했는데, 요즘 시청률 0%대인 종편을 보면 '그냥 꿈만은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정 전 사장은 "언론인으로서 40년을 살아왔는데, 지금처럼 언론이 어느 한곳으로 쏠린 것을 본 적이 없다. 제도권 언론의 90%가 강자, 자본가, 기득권 세력의 논리에 의한 것"이라며 "강고한 성을 허무는 게 힘들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최근 1,2년 사이 나꼼수로 대표되는 팟캐스트와 SNS가 큰 인기를 끌면서 이 90%를 압도하고 있다. 이것이 진짜 혁명이고 희망"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방송에서 김어준 진행자는 "지난해 한국PD연합회 주최 행사에서 'KBS 사장이 바보인가, MBC 사장이 더 바보인가'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 모 MBC 간부가 나를 찾아와 반성문을 요구했다"고 폭로했다.
이에 대해 정 전 사장은 "현재 KBS도 그렇고, MBC도 그렇고 7,80년대 군부독재 시절에 저널리스 훈련을 받고 땡전뉴스를 했던 사람들과 그 후예들이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다"며 "전형적으로 7~80년대 사고인데 굉장히 유치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KBS 내부에는 학도호국단 출신으로 공채가 아닌 특채를 통해 들어온 이들도 있어서 국정감사에서 야당이 문제제기를 한 적도 있다"며 "(KBS 출신인) 권혁부 현 방통심의위 부위원장도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주공화당의 사무처 직원을 하다가 KBS 직원으로 들어온 케이스"라고 전했다. 

2011년 12월 31일 토요일

김근태의 마지막 말 "2012년을 점령하라"


이글은 프레시안 2011-12-30일자 기사 '김근태의 마지막 말 "2012년을 점령하라"'를 퍼왔습니다.
'세계의 양심수' 김근태, 하늘로 가다

"아름다운 꼴찌로 기억해 달라"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광주 경선을 앞두고 노무현 후보로의 개혁 후보 단일화를 위해 후보직을 사퇴하며 남긴 말이다. 그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심정으로 지금은 죽는다"고도 했다. 두 마디는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드라마틱한 말이었다. '6.3 세대'로 386 운동권 '대부'로 불렸던 김근태, 그는 현실정치에서 만년 비주류였다. '비주류의 정점'이라는 게 있다면 그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47년 2월 14일 경기도 부천에서 출생한 김근태는 중학교 3학년 때 5.16쿠데타를 목격했다. 강제로 교직을 그만두게 된 그의 아버지는 충격을 받았고 곧 심장판막증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어머님은 동대문 시장에서 여자 스타킹과 양말을 받아다 팔아 김근태를 키웠다.

그는 경기고를 졸업하고 1965년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71년 박정희 정권 부정선거 파동 반대 활동, 교련 데모에 적극 참여했고, 서울대 내란 음모 사건으로 수배를 당하게 된다. 당시 친구였던 조영래, 장기표, 심재권은 감옥에 들어갔다. 이후 74년 긴급조치 위반으로 또 다시 수배 생활을 해야 했다. 그렇게 도망하기를 7년, 박정희 정권이 무너졌다.


▲ 학창 시절의 김근태 ⓒ김근태 미니홈피
▲ 민청련 시절 김근태(오른 쪽은 장영달 전 의원)) ⓒ김근태 미니홈피

김근태는 새로 들어선 전두환 군부 독재에 맞서 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했고초대, 2대 의장을 지냈다. 후배들인 386세대, 반독재 민주화 운동 세력의 기획자이자 동지로 살았다. 그러나 민청련 활동으로 인해 그는 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이 전무'로 통하는 고문 기술자 이근안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했다. 전기와 물이 그의 몸을 할퀴고 지나갔다. 이후 그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며 남은 생을 살아야 했다.

이 사건에 관한 진술은 이미자의 '노래 테입' 중간에 녹음된 채로 미국 인권단체에 건네졌다. 이후 전 세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세계의 양심수'라는 수식이 김근태 이름 앞에 붙었다. 87년 로버트 케네디 국제 인권상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그를 가두고 고문했던 국가보안법은 21세기 하고도 11년이 지난 오늘, 아직도 살아있다.

그는 자신의 책 에서 '인간도살장' 안에 있던 느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고문을 할 때는 온 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뉘면서 몸을 다섯 군데를 묶었습니다...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 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가면서 전기 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 앞에 다가왔습니다. 이 때 마음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과연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했으며 이런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절망에 몸서리쳤습니다."


▲ '세계의 양심수' 김근태는 인권상 수상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김근태 미니홈피

87년 6월 항쟁을 감옥에서 맞은 그는 88년이 돼서야 석방됐다. 세상은 변했지만 '천지개벽'은 없었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결성을 주도하고 정책기획실장, 집행위원장을 지냈지만 시대는 그를 또 다시 구속했다.

노태우 정권이 끝난 뒤 3당 합당을 지켜본 그는 현실정치로 눈을 돌린다. 95년 민주당에 입당한 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계 복귀와 함께 새정치국민회를 꾸렸고, 부총재 직을 맡았다. 이 때 15대 총선을 치렀고, 서울 도봉갑에서 당선돼 내리 3선을 지냈다. 98년 출범한 국민의 정부 탄생에 힘을 보탠 그는, 곧바로 새천년민주당 쇄신 운동에 돌입했다. 역시 '비주류'였다.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과 대선 경선에서 맞붙었다. 이인제 후보와 경쟁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에 힘을 실어주면서 후보직을 사퇴했다. 이른바 '노풍'이 불기 시작한 광주 경선 직전이었다. 두 번째 민주 정부가 들어섰다. 노무현 탄핵 열풍을 딛고 '주류'로 올라선 열린우리당의 창당에 참여했지만 여전히 그는 '비주류'의 길을 걸으며 열린우리당을 지배했던 '중도실용노선'과 '투쟁'을 이어갔다.


▲ 보건복지부장관을 지내던 시절 김근태 ⓒ김근태 미니홈피
열린우리당 의장을 지낼 때는 부동산원가 공개에 반대하는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계급장 떼고 토론해보자"고 맞섰다. 그런 그를 노 전 대통령은 보건복지부 장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장관을 지내면서도 그는 영리병원을 반대하며 청와대와 각을 세웠다. 노무현 정부의 한미FTA 추진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여전한 '비주류'였다.

2011년 12월 29일 그가 떠나기 전, 지난 10월 18일 마지막으로 그의 블로그에 'posted by 김근태'로 남아 있는 글 역시, 그의 '인생'이 그대로 녹아들어가 있었다.

"(월가 시위의 요인은) 무엇보다 1%를 향한 99%의 분노 때문이다. 사회적 불평등과 정의롭지 못함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1%인지 5%인지는 중요치 않다. 이처럼 전 세계가 공감한다는 것은 미국이 주도한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제패했었다는 증거다. 선진국과 후진국, 강대국과 약소국, 민주국가와 비민주국가의 구분 없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세계적 대세였던 것이다. 그리고 2008년의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손인 월가의 실체가 드러났음에도 희생도, 반성도, 징벌도 없는 불공평함에 분노한 것이다.
...
우리는 미국보다 사정이 낫다. 미국보다 금융이 정치에 비해 권력이 강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굳이 증권사가 많은 동여의도를 점령할 필요는 없다. 국회가 있는 서여의도, 청와대가 있는 종로를 점령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운 좋게 내년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그가 남긴 마지막 글의 제목이다.

"2012년을 점령하라"



/박세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