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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23일 금요일

‘고문, 당신도 아파보라’


이글은 2012-11-22일자 기사 '‘고문, 당신도 아파보라’'를 퍼왔습니다.
영화 는 시종일관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벌어지는 고문을 보여준다. 정지영 감독은 “우리가 같이 아파봐야 민주주의가 훼손될 때 또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필, 봄이었다. 경기도 양평 양수리 종합촬영소에도 꽃이 피었다. 숙소로 쓰는 후생관부터 6세트장에 이르는 길목에 꽃이 만발했다. 이른 아침 촬영장에 가는 거리, 햇빛은 그게 전부였다. 세트장은 암흑이고 촬영이 끝나면 늦은 밤이었다. 먼지 구덩이에서 8명의 남자 배우가 뒤엉켜 한 달 반 동안 영화를 찍었다.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515호를 재현한 세트장에는 욕조, 변기 따위가 전부였다. ‘감옥 생활’이라는 비유 그대로 (남영동 1985)의 스태프와 배우에게 지난 5월은 잔인한 봄이었다. 

1982년에 데뷔해 17편의 영화를 만든 정지영 감독에게도 (남영동 1985)는 가장 힘든 영화였다. “처음엔 왜 내가 힘들지? 화창한 봄날 그런 데 있어서 그런가 생각했어요.” 뒤늦게 고문 장면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고문당하는 연기를 계속 지켜봐야 하는 게 그에겐 고문이었다. 당사자인 배우 박원상은 더했다. 촬영을 끝낸 밤, 다시 그 길로 돌아오며 손이 매운 동료 배우 이천희와 이경영을 미워했다. 두 사람은 고문 수사관 역을 맡아 박원상의 입과 코를 거즈로 덮고 물을 들이부었다. 타고난 체력을 가진 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시사IN 이명익 <남영동 1985>를 연출한 정지영 감독.

11월22일 개봉하는 영화 (남영동 1985)는 알려진 대로, 고 김근태 전 민주당 의원의 자전적 수기 (남영동)을 원작으로 한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이던 1985년 9월 김 전 의원은 남영동 대공분실에 붙들려가 22일간 하루 한두 차례 5시간씩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했다.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의 배후로 지목됐고 가혹행위를 견디지 못해 조작된 혐의를 인정했다. 이후 전기고문의 유일한 흔적인 발뒤꿈치 상처를 통해 고문 사실을 밖으로 알렸고, 부인 인재근씨(현 국회의원)는 가수 이미자의 노래 테이프 중간에 그의 진술을 녹음해 미국 인권단체에 군부정권의 고문 사실을 알렸다. 영화는 드라마틱한 사건의 전말보다는, 남영동 고문 장면에 집중한다. 정 감독은 영화적 설정에 방해되는 부분을 제거했다. 관객들과 함께 고문실에 갇히고 싶었다고 한다. 같이 아파보자는 의도였다.  

“고문 기술자의 웃음을 잊을 수 없다”

자전적 수기 (남영동)에서 김근태 전 의원은 말한다. ‘1985년 초 남영동에서 전기고문, 물고문에 못 견뎌 나는 발가벗기고 두 눈이 가려진 채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면서 항복한다고 용서해 달라고 두 손을 빌었다. 그때 고문자인 김수현, 백남은, 그리고 전기고문 기술자(이근안) 입에 번졌던 소리 없는 웃음. 그 웃음을 나는 절대로 잊을 수가 없다.’ 영화는 그 참담함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러닝타임 106분 대부분은 고문 장면이다. 각오하고 본 관객으로서도 쉽지 않다. 특수한 고문대인 ‘칠성판’도 자주 등장한다. 고문의 강도보다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게 절망적이다. 왜 관객을 이렇게 아프게 하나. 정지영 감독은 그걸 의도했다. “당연한 거 아닌가. 그들은 그렇게 고통스럽게 자기를 던져가면서 알량한 민주주의를 얻어냈는데 힘 안들이고 얻어낸 많은 사람들은 그걸 공짜로 얻은 양 생각하는 것 같다. 민주주의가 훼손되어도 누가 해결하겠지 이런다. 같이 아파봐야 그럴 때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정 감독이 고문 가해자에 대해 영화화하기로 마음먹은 건 1980년대 후반. 장선우 감독이 고문 경찰관 이야기를 그린 임철우의 소설 (붉은 방)을 영화화하기로 했다가 무산되면서였다. 가정에서는 성실한 가장인데 일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고문 경찰관의 이야기를 보고 ‘고문하는 사람도 인간이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에 대한 이야기를 써두었다. 사석에서 소설가 천운영씨에게 말했더니 그가 소설로 쓰겠다고 했다. 그렇게 나온 소설 (생강)은 인간의 야수성을 작가 특유의 세계관으로 잘 묘사한 작품이다. 하지만 그가 영화화하려는 내용과는 거리가 있었다. 지난 1월 (부러진 화살) 개봉 즈음 김근태의 부음을 전해 듣고 (남영동)을 읽었다. 정 감독은 “내 숙제를 이렇게 해결하자. 이거다,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고문 피해자를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연출부와 충주의 작은 농장에 들어가 한 달 만에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물에 대한 공포가 있던 박원상은 이번 영화 이후 그 트라우마가 사라졌다고 한다. 연출부의 주문은 단순했다.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고 도저히 못 견딜 때 몸으로 표현하기로 한 것. 그는 “고통이 관객에게 최대한 전해질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원작 속 김 전 의원을 흉내 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끌려와 22일간 고문당한 김종태의 캐릭터에 집중하기로 했다. 극중 배역의 이름은 김근태, 이근안이 아니라 김종태, 이두한이다. 야만의 시대, 고문을 당한 사람이 김근태 한 명은 아니기 때문이다(28~31쪽 관련 기사 참조). 

<남영동 1985>의 한 장면. 배우 이경영씨(오른쪽)가 고문 기술자 이두한을 연기했다.

배우 이경영은 고문 기술자 이두한을 연기한 후 김근태 전 의원의 부인 인재근 의원에게 사과하고 눈물을 떨궜다. 영화를 보던 인 의원은 전기고문 장면에서 눈을 감았다. 오히려 고문 기술자(이경영)의 고문 장면은 괜찮았다. 전문가가 아닌 다른 사람(명계남)이 물고문을 하는 장면에서는 잘못해 죽는 게 아닌가 조마조마했다. 자전 수기에서 인간백정으로 묘사되는 이근안은 델타 상표의 사무 가방을 메고 출장을 다니는 전기고문 분야의 전문가였다. 이름 대신 장의사라 불렸다. 이경영은 이근안과 관련된 자료를 부러 보지 않았다. 그에게 동정심이 생길까봐서다. 실제 90㎏에 육박하는 거구의 이근안과 그는 닮지 않았지만 대신, 손이 두꺼웠다. 

영화 속 고문 장면 내내 함께 하는 건 라디오 소리다. 고문하는 중에도 수사관들은 프로야구 중계를 듣는다. 실제 수기에도 나온다. ‘정말 미웠던 것은 구걸하는 것 같은 비명 소리가 아니었다. 라디오 소리였다. 인간에게 파괴가 감행되는 이 밤중에, 오늘, 저 시적이고자 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영화 속 고문관은 발톱을 깎고 김종태에게 연애 상담을 한다. 정 감독은 되도록 고문 수사관을 생활인으로 그리고자 했다. 그들이 인간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다. 

(남영동 1985)는 (부러진 화살)과 마찬가지로 5억원 규모의 저예산 영화다. 스태프·배우 모두 노개런티로 참여한 덕이다. 문제는 배급이었다. 편집본을 본 메이저급 배급사 관계자들은 난감해했다.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 이후 반응이 좋자, 다시 한번 검토해보겠다고 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정 감독은 “영화는 괜찮은 것 같은데 꺼리는 걸 보고 아 이게 민감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구나 싶었다”라고 회상했다. 그가 짐작하는 민감함의 이유는 영화가 군사정권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두환 시대의 이야기이지만 박정희 시대의 이야기로도 해석한다는 것이다. “어느 정권이 들어설지 모르니까 사업에 지장을 주는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그걸 염려하는 거다. 그러니까 얼마나 슬픈가. 아직도 이런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게.” 

대선 전 개봉을 목표로 한 건 정지영 감독의 의도다. “대선에 영향을 끼치면 좋겠다. 어떻게는 나도 모르겠다. 아픈 과거사의 단면을 본 후보자들의 반응이나 그 반응을 본 관객에게 영향을 미칠 거라고 본다.” 

정 감독은 생전의 김 의원과 몇 차례 인연이 있다. 스크린쿼터 운동을 할 때 그에게 전화가 와 (김 전 의원이 관여했던) 한반도재단 이름으로 공로상을 주겠다고 했다. 2008년 촛불 정국 때 청계광장에서도 만났다. 정 감독을 보고 김 전 의원이 “여기 정지영 감독도 와 계십니다”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김 전 의원은 보건복지부 장관이던 시절 복역 중인 이근안을 만난 적이 있다. 그를 용서했다는 기사가 나왔지만 이후에도 괴로운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정지영 감독은 묻는다. “김종태 개인이 이두한을 용서했다고 해서 용서가 되는 문제인가? 김근태 의원도 용서를 못한 게 괴로웠나보다. 어느 목사한테 얘기했더니 한마디로 정의 내렸다고 한다. 그건 당신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이라고.” 감옥 안에서 용서를 빌던 이근안은 출소 후 ‘심문은 예술’이라고 말을 바꿨다.

ⓒ시사IN 자료 경찰인권센터로 바뀐 남영동 대공분실. 김근태 전 의원이 있던 5층은 창이 유난히 작다.

‘기억에 관한 영화’ 젊은 세대도 봐야

박원상은 이 영화를 ‘기억에 관한 영화’라고 정의했다. 그러니 그 시대를 겪지 않은 젊은 세대가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봤으면 한다는 것. 강 과장 역을 맡은 배우 김의성은 “(영화가) 대선용 좌파 선전 영화라고 하는데,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대선보다 크다. 과거로 갈 건가 더 나은 미래로 갈 건가 판단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11월6일 오전, 지금은 경찰인권센터로 바뀐 남영동 대공분실의 전시실 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 단체가 아니면 찾는 이가 뜸하다고 한다. 김근태 전 의원이 있던 5층 15호실은 구석에 있고 15개 방 중 큰 편에 속한다. 지금은 변기와 세면대만이 그 흔적을 말하고 있다. 박종철 열사가 죽은 9호실만 보존되어 있다.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건물의 5층 창은 다른 층에 비해 유난히 작다. 오전 시간에도 빛이 거의 들지 않았다. 김근태 전 의원은 27년 전 이 남영동 대문을 나와 구치소로 향하는 자동차 속에서 ‘죽음으로부터 돌아왔다는 걸’ 느꼈다고 한다. 따스한 오후의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비로소 살았다는 걸 깨달았던 것. 영화 (남영동 1985)에서도 햇빛을 찾기는 어렵다. 촬영장에서부터 인색하더니 상영 시간 대부분도 암흑을 마주한 기분이다. 그러니 더욱더, 햇빛이 절실했던 시대의 이야기다.

임지영 기자  |  toto@sisain.co.kr

2012년 7월 31일 화요일

5월 항쟁 죽이기에 맞선 기자들의 투쟁 언론과 권력 (52)


이글은 프레시안 2012-07-31일자 기사 '5월 항쟁 죽이기에 맞선 기자들의 투쟁 언론과 권력 (52)'를 퍼왔습니다.

▲ 학생들이 집회나 시위를 한 자리를 깨끗이 치우는 일조차 ‘보도 불가’라고 했으니 신군부가 학생들을 얼마나 무질서한 청년들로 보이게 하려고 했는지 여실히 알 수 있다. ⓒ 기자협회 삼십년사

1980년 5월 초부터 시국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한국기자협회는 각 회원사 분회의 구성원들과 정치부처 출입기자들을 통해 신군부의 동향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기협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황에서 쿠데타를 앞둔 전두환 일파는 5월 16일 아래와 같은 요지의 ‘검열지침’을 발표했다.
·학생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지지하는 식의 기사는 모두 불가 원칙·학생 구호 중 ‘부정축재 환수하라’ ‘김일성은 오판하지 말라’ ‘반공정신 이상 없다’ 등은 불가·시위현장에 나왔던 일부 학생들이 교통정리까지 했다는 사실 등은 불가·동료가 부상하자 경찰도 흥분, 학생들과 육탄전에 가까운 근접전투 벌였다 등은 불가·학생시위 기사 중 군 코멘트 불가·박 신민당 대변인의 신현확 총리 담화 논평 중 ‘그러나 오늘 사태의 악화에 대한 책임은 총리가 더 진지하게 성실한 자세를 보이지 않은 것이 유감’ ‘과도정부가 좀 더 일찍 신민당 주장에 귀를 기울였다면 오늘과 같은 시국 악화는 초래하지 않았을 것’ 등은 불가(윤석한, ‘기자협회의 검열 및 제작거부 결정’, , 69쪽)
이 보도지침에는 신군부의 음험한 정치적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 있었다. 학생들이 민주화와 계엄 해제를 외치다가 ‘좌경·불순’으로 몰릴 것을 걱정해서 ‘김일성은 오판 말라’고 외친 것까지 언론에 보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학생들이 집회나 시위를 한 자리를 깨끗이 치우는 일조차 ‘보도 불가’라고 했으니 신군부가 학생들을 얼마나 무질서한 청년들로 보이게 하려고 했는지 여실히 알 수 있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신군부가 정권을 탈취하려는 공작을 단계적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판단한 기협은 앞에 적었듯이 5월 16일 회장단, 운영위원, 분회장 연석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했다. 기협이 발표한 ‘검열 거부 선언문’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1.우리는 비상계엄의 이름으로 설치된 검열제도가 검열당국에 의해 여론을 조작, 왜곡하는 장치로 오용되고 있음을 국민 앞에 고발한다.1.우리는 검역제도가 더 이상 합법적 장치일 수 없음을 선언하며 이를 거부한다.1.언론계 내부의 유신잔재를 추방한다.1.우리는 작금의 긴급한 상황이 진실되고 정확하게 국민에게 전달됨으로써만 타개될 수 있다고 확신하며 이를 위해 어떠한 간섭에도 투쟁한다.
1.모든 기자들은 검열 철폐를 위해 극한투쟁을 불사한다.1.검열지침을 무시한다.”(앞의 책, 71쪽)
위의 선언문은 신군부가 권력을 탈취하려고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나왔다. 한국기자협회 회장단과 운영위원들은 온갖 탄압을 각오하고 그런 결의를 밝혔을 것이다.
기협 회장 김태홍을 비롯한 집행부는 제작거부 결의에 따라 토요일인 5월 17일 오후에도 퇴근을 미룬 채 언론계와 정치권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이며 비상근무를 하고 있었다. 오후 5시 반쯤 외부에 나가 있던 부회장 노향기가 전국 대학 총학생회장단 가운데 일부가 이화여대에서 모임을 갖고 있다가 연행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계엄사가 김태홍을 학생운동의 배후로 몰아 체포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기협 집행부는 급히 몸을 피했으나 신군부의 끈질기고 치밀한 검거작전에 한 사람씩 붙잡히고 말았다. 바로 그날 기협 부회장 고영재·정교용·이수언·이홍기와 감사 박정삼, 편집실장 김동선이 체포되었다. 회장 김태홍은 석 달이 넘게 도피생활을 하다가 전남 강진에서 정보기관원들에게 붙잡혔고, 부회장 노향기는 6월 28일 서울 성북경찰서에 자진 출두했다.
김태홍을 비롯한 기협 집행부는 정보기관에 끌려가자마자 모진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수사관들은 “김대중한테서 돈 얼마 받았어?” “학생들 선동해서 내란 일으키려고 했지?”라고 다그치면서 시인할 때까지 폭행과 가혹행위를 계속했다. 김태홍을 비롯한 5명은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계엄사 군인들은 5월 17일 밤 텅 비어 있던 기협 사무실에 난입해서 집기를 모두 부수고 서류를 탈취해 감으로써 한국의 대표적 기자 조직을 진공상태로 만들어버렸다.
기협이 초토화하기 전에 결의한 ‘제작거부’는 이미 전국의 언론사 기자들에게 전달되어 있었다. 경향신문사 기자들이 맨 처음 행동에 나섰다. 기자 100여 명은 5월 19일 긴급 모임을 열고 제작거부 실천방안을 논의하면서 기협 집행부 연행과 구금에 항의하는 뜻으로 밤샘 농성에 들어갔다. 21일부터는 경향신문사 평기자 전원이 제작거부에 참여했고, 외신부장 이경일을 비롯한 소수 부차장들도 합류했다. 간부들이 만든 경향신문은 4면으로 축소되거나 1판만 발행되었다. 기자들은 24일 회의를 열고 제작거부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논의했으나 구체적인 방안을 찾지 못하자 광주 5월 항쟁을 사실대로 보도한다는 전제조건 아래 27일부터 신문 제작에 들어갔다.

▲ 한국일보사 기자들은 5월 19일 총회를 열고 기협이 결의한 제작거부 운동에 관해 논의를 하면서 실천 방법을 검토했다. ⓒ 한국일보 40년사

한국일보사 기자들은 5월 19일 총회를 열고 기협이 결의한 제작거부 운동에 관해 논의를 하면서 실천 방법을 검토했다. 기협 분회는 기협의 ‘제작거부 결의문’을 회원들에게 나누어 준 뒤 대책을 물었으나 명백한 결론이 나지 않자 연행된 기협 집행부가 풀려날 때까지 태업을 하면서 사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기자들은 5월 20일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동아방송 기자들은 별도로 자유언론소위원회를 구성하고 지속적으로 활동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동아일보사의 제작거부 운동은 회사 측의 협박과 방해, 일부 기자들의 비협조적 태도 때문에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합동통신사 기자들은 5월 21일 총회를 열고 제작거부를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기협 분회는 계엄사 검열단에 나가 있던 기자를 불러들인 뒤 ‘유신언론인’의 명단을 작성하고 퇴진을 요구했다. 회사 측은 제작거부를 중단하라고 기자들에게 강하게 요구했으나 기자총회는 표결을 통해 제작거부를 강행하기로 결정하고 광주 5월 항쟁이 끝나던 날인 27일까지 제작을 거부했다.
동양통신사 기자들은 5월 19일과 20일에 잇달아 총회를 열고 5월 항쟁의 진상을 보도하라고 요구하면서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제작거부는 항쟁 기간 내내 지속되었다.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의 기자, 프로듀서 200여 명은 5월 20일 편집국에서 국장단과 부장단이 합석한 가운데 총회를 열고 “광주 항쟁에 관한 왜곡보도를 더 이상 간과할 수 없으며, 진상이 보도될 때까지 전원이 제작을 거부한다”고 결의했다. 그들은 보도의 방향이 전혀 개선되지 않자 20일부터 27일까지 제작을 거부했다.
문화방송 보도국 기자들은 5월 20일 총회를 열고 취재와 송고를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그래서 뉴스를 비롯한 일부 프로그램이 비정상적으로 방송되었다.
조선일보사 기자들은 한국기자협회에 가입하지는 않았으나 5월 21일 소장 기자들을 중심으로 5월 항쟁에 관한 왜곡보도와 검열에 항의하는 총회를 개최했다. 22일 기자들은 기협의 제작거부 결의에 호응하기로 결정하고 6월 초까지 싸움을 계속했다.
비상계엄 아래서 침묵을 지키던 기자들이 5월 항쟁을 계기로 저항운동을 시작하자 전두환은 5월 20일 언론사 사장들을 보안사령관실로 불러들였다. 그는 ‘광주사태’에 대한 신군부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제작거부를 주도하고 있는 언론인들에게 모종의 조치를 내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런 위협은 바로 현실로 나타났다.
“6월 9일 신군부는 ‘악성 유언비어를 유포시켜 국론통일과 국민적 단결을 저해하고 있는 혐의가 농후하여 8 명의 현직 언론인을 연행 조사할 방침’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곧 신군부는 경향신문의 서동구 조사국장, 이경일 외신부장, 박우정·홍수원·표완수·박성득 기자 등 6 명에게 용공 혐의를 덧씌워, 반공법 위반 혐의로 연행한다. 또 문화방송의 노성대 보도부국장은 회의석상에서 광주시민을 폭도로 모는 것에 이의를 제기했다는 이유로, 오효진 기자는 유언비어 날조 유포 혐의로 각각 구속된다. 이와 함께 동아일보의 심송무 기자도 반공법 위반 혐의로 체포된다.”(앞의 책, 71쪽)

▲ 남영동 대공분실.
경향신문사 외신부장 이경일은 당시 수사기관에서 고문당하던 실상을 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남영동’이라 불리는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된 지도 벌써 사흘이 되는 날이었다. 나는 연행된 첫 날과 다음날 새벽, 수사관으로부터 집중적 고문과 신문을 받아서인지 온몸이 나른한데다가 정신이 혼미해져 졸고 있었다. 바로 그날 오후쯤이었다. 나를 집중적으로 조사하던 이근안 경위가 어슬렁거리며 방안으로 들어왔다. (···)
그로부터 몇 시간 나는 이 경위와 다른 수사관들의 끈질긴 협박과 회유에 시달려야 했다. 그들은 은연중에 내 몸을 합기도술로 해체시킬 수도 있다고 겁주면서 끝까지 말을 듣지 않으면 또다시 고문실로 끌고 가 전기고문을 해서라도 자백을 받아내겠다고 을러댔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별로 읽지도 않은 공산주의 서적을 읽었다는 자백을 받아내서 멀쩡한 언론인을 빨갱이로 몰려는 이런 저질 코미디 같은 작태가 한국의 수사기관에서 벌어지다니·····. 지하의 마르크스가 통곡할 일이었다.”(앞의 책, 78쪽)

김종철 (언론인)  |  cckim999@naver.com

2012년 1월 22일 일요일

고문기술자 이근안 목사직 면직


이글은 한겨레신문 조현기자 블로그 휴심정 2012-01-19일자 기사 '고문기술자 이근안 목사직 면직'을 퍼왔습니다.

지난 2008년 목사 안수를 받는 이근안씨 사진 인터넷스타2.0 캡쳐

고문기술자’로 알려진 이근안씨가 목사직을 잃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개혁총회(개혁총회·총회장·정서영 목사) 관계자는 19일“지난 14일 긴급 징계위원회를 열어 이근안 씨의 목사직을 면직했다”고 밝혔다. 교단에서 일단 면직이 결정되면 복직이 안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개혁총회쪽은 한국종교개혁시민연대와  한국교회정화운동협의회 등 교계 시민단체들이 이날 이근안씨에 대한 ‘목사직 안수 철회 요구서’와 탄원서를 서울 관악구 남현동 사무실에 제출하자 징계 사실을 뒤늦게 공표했다.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다 지난달 별세한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장례식 사진 <한겨레> 자료

개혁총회쪽은 김근태 고문의 별세소식이 전해진 뒤 인터넷 포털 다음에서 이근안씨 목사 안수 철회서명이 펼쳐지고, 보수단체인 한국교회언론회마저 논평에서 ‘무분별하게 목사직을 수여하는 교단의 행태’를 지적하는 등 비판이 고조되자 ‘이씨가 목사로서 품위를 훼손했다’는 이유를 들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경 대공분실 경감이었던 이근안씨는 1985년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이른바 ‘서울대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돼 수감됐을 때 잔인한 고문 사실이 1988년 보도로 드러나자 10년10개월 동안 도망다니다 공소시효가 끝난 1999년 10월 ‘자수’해 징역 7년을 살고 2006년 11월 출소했다.


지난 2000년 수감되는 이근안씨 사진 <한겨레> 자료

 그는 교도소에서 신학대 통신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출석 수업 등을 마친 뒤 2008년 10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목사가 된 뒤 교정 선교와 신앙 간증을 하면서 “나는 고문기술자가 아닌 애국자”라고 표현하며 고문을 정당화해 비판을 받아왔다.
 한편 이씨가 목사로서 소속됐던 개혁총회는 67개 노회에 3656개 교회가 소속돼 있으며,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가입 교단이라고 밝히고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2011년 12월 30일 금요일

‘고문의 추억’, 민주화의 별 김근태 지다


이글은 대자보 2011-12-30일자 기사 '‘고문의 추억’, 민주화의 별 김근태 지다'를 퍼왔습니다.
[오용석의 정언생각] 이근안 지금 보고 있나? 고문이 아직도 예술이더냐?


▲ 민주화의 별, 그 혹독한 80년대 민주화의 여정 모습 ©김근태 미니홈피

이근안은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그 유명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근무하면서 매국 조선의 '청룡봉사상'을 포함하여, 재직기간 중 모두 16차례의 표창을 받았습니다. 당시 대공 분야에서는 "이근안 없으면 수사가 안 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답니다.

그가 이처럼 탁월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투철한 사명감과 남다른 고문기술 덕분입니다. 몽둥이찜질은 기본이고, 볼펜 고문… 관절 뽑기…, 나아가 일명 칠성판에 온몸을 묶고 얼굴에 수건을 뒤집어씌운 채 코와 입에 샤워기를 들이대고 고춧가루와 물을 퍼붓는 물고문, 그리고 새끼발가락에다 전기 줄을 감아 전류를 흘려보내 몸을 마치 불 인두로 지지듯이 바스러뜨리는 전기고문.

지금 고문기술자 이근안, 형기를 마치고 출소해서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자신이 목회자로 입문한 건 “간첩죄로 잡아들인 애들이 후일 민주화 인사로 보상받는 걸 보고 울화가 치밀어 감옥에서, 믿을 수 있는 나라, 배신 없는 나라를 찾다 보니 하늘나라를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보고 있나, 이근안? 고문이 아직도 예술이더냐?” 최근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80년대 심문(=고문)은 하나의 ‘예술’이었으며,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다.”라고 당당히 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직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