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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25일 일요일

한 편의 영화가 세상을 바꿀 때


이글은 한겨레21 2012-11-26일자 제937호 기사 '한 편의 영화가 세상을 바꿀 때'를 퍼왔습니다.
[크랭크인] 주연 배우 박원상·이경영이 말하는 영화 촬영 뒷이야기들“나쁜 역사 반복되지 않도록 부모가 자녀와 함께 보면 좋겠다”


영문도 모른 채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와 며칠째 모진 고문을 당하던 김종태는 어느 날 비교적 말쑥하고 점잖게 차려입은 남자의 방문을 받는다. 남자는 들어오자마자 김종태의 눈에 플래시를 비추며 이리저리 들여다보기도 하고 어깨 근육을 포함해 여기저기를 검사한다. 김종태는 그가 의사라고 생각한다. 그는 다급하게 남자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한다. 지금까지 고문을 당했고 법적 근거 없이 며칠째 감금돼 있다고. 옆에서 수사관들이 갑자기 낄낄대기 시작한다. 그리고 남자는 순간적으로 김종태의 어깨를 잡아 뺀다. 이른바 어깨빼기다. 김종태는 극심한 고통으로 바닥에 나뒹군다. 김종태는 순간적으로 깨닫게 된다. 진짜 고문기술자가 왔다는 것을. 지금까지의 고문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김종태에게는 곧 물고문과 고춧가루 고문, 전기고문까지 당하는 진짜 지옥이 시작된다.

» 영화 <남영동 1985>에서 김근태 역을 맡은 배우 박원상(왼쪽)과 이근안 역을 맡은 배우 이경영. 씨네21 손홍주 기자

상업영화로도 성공 가능성 높아

“정지영 감독께서 전화도 주시고 이메일도 주셨다. 이두한 역을 내가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셨다. 감독님의 그런 간곡한 청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당연히 이 역을 하려고 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두한 역을 정말 하고 싶었다. 매력적인 배역이기 때문이다. 이런 역할, 쉽게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다. 배우라면 모두들 이두한 역에 욕심을 냈을 것이다.” 선입견이었을까. 적어도 이경영에게서는, 감독으로부터 역할 제의를 받고 많은 고민을 했다는 얘기를 듣게 될 줄 알았다. 그는 정지영 감독의 영화 (남영동 1985)에서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극중 이름 이두한 역을 맡았다. 영화는 약 1시간46분의 러닝타임 동안 오로지 고문을 하고, 고문을 당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고문을 당하는 김종태 역의 박원상도 박원상이지만 끝 간 데 없이 잔인한 인간을 연기한 이경영에게 시선이 쏠린다. 극중에서 이두한은 한 번도 흥분하지 않는다.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정확하게 상대를 고문한다. 죽음 직전까지. 이때 이경영의 무표정하면서도 차분한 연기는 보는 사람들의 치를 떨게 만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휘파람! (클레멘타인)을 읊조리는 그 휘파람 소리. 고문 장비를 준비하며 이두한은 나지막하게 휘파람을 분다. 김종태는 이제 휘파람 소리만 들어도 오금이 저리고 머리털이 바짝바짝 선다. 그건 고문의 순간보다 더 고통스럽다.
“이두한 역을 준비하며 실제 인물인 이근안을 연구하거나 분석하지 않았다. 오히려 방해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이근안, 내가 상상하는 이근안으로 연기하려고 애썼다. 스스로 그 캐릭터에 대한 설정을 만들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게 더 이근안스러웠다는 얘기를 듣고 있다.”

“박원상의 칠성판 원샷이 하이라이트”

(남영동 1985)를 본다는 건 엄청난 고통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그 잔인한 역사의 진실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적으로 흥미롭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시간이 휙 갈 만큼 영화는 재밌다. 그건 이상한 역설이자, 기묘한 배반의 정서 같은 것이다. (남영동 1985)는 상업영화로서도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김근태의 극중 이름 김종태 역을 맡은 배우 박원상이, 당연히, 고생이 많았던 작품이다. 박원상은 전작 (부러진 화살)에 이어 정지영 감독의 영화에 잇따라 주연으로 출연했다. 가해자 역인 이경영보다 피해자 역인 박원상이 오히려 약간 주저했다는 후문이다. “감독님에 대한 신뢰가 워낙 컸고, 이런 작품은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이게 평범한 역할은 아니니까 과연 촬영 끝까지 내 몸이 견딜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긴 했다. 감독님께 부탁했던 건, 몸을 준비할 수 있도록 시간을 좀 달라는 것이었다.”
영화에서 그는 정면 누드를 보여준다. 칠성판 위에 사지가 묶인 채 눈을 가리고 누워 있는 신이다.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참혹하며,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장면이다. 정지영 감독은 전기고문으로 이곳저곳이 타들어간데다 오로지 가린 곳이라곤 눈밖에 없는 몸통을 부감샷으로, 그것도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프레임 바깥에서는 수사관들이 희희덕거리는 소리가 깔린다. 인간과 비인간, 사람과 짐승의 접경은 생각보다 가깝다. 가 얘기하려는 것은 이 장면 하나에 다 모여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감독님이 그 장면을 찍자고 했을 때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다. 오히려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정도다.”(박원상) “처음엔 수사관들이 두런두런 일상의 얘기를 하고 있는 모습까지 프레임 안에 더 넣어서 풀샷으로 찍으려고도 하셨다. 그게 더 비인간적인 느낌이니까. 그런데 막상 박원상의 벌거벗은 모습 원샷을 찍고 나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하시더라. 지금 보니 그 판단이 맞았던 것 같다.”(이경영) 박원상과 이경영도 이 장면이 최고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하는 듯싶다.
두 사람은 이 대목에서만 입을 맞추는 게 아니다. 이 영화가 가진 대중적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이 같다. 둘은 동시에 번갈아가며 이렇게 말했다.
“다시는 과거의 그같은 일이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의 손을 잡고 이 영화를 봤으면 한다. 설령 아들에게서 저런 일을 당하고도 아직 우리 사회가 이 정도밖에 안 됐느냐는 얘기를 들을지언정, 과거에 얼마나 끔찍한 일이 있었고,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빚지고 살고 있으며,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아야 함을 같이 얘기하는 분위기였으면 좋겠다. 다행히 이 영화는 15세 관람가로 나왔다.”
(남영동 1985)는 치열한 세계관을 일관되게 지켜온 한 감독의 노력이 없었다면 만들어질 수 없었던 작품이다. 한편으론 이경영·박원상 같은 배우가 없었다면 절대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었던 영화이기도 하다. 고문을 가하는 것, 혹은 당하는 것은, 아무리 연기라 한들 고도의 집중력이 없으면 표현하기 힘든 것이다. 두 사람 모두 한 장면 한 장면 찍으며 육체보다 정신적으로 심하게 탈진됐던 건 그 때문이다. “감독님, 배우들, 스태프들 모두 한마음이 아니었으면 완성되기 어려웠던 영화다. 자칫 사고가 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박원상은 덧붙인다.

관객 많아질수록 세상 달라질 것

쉽게 써지고, 편하게 얘기되는 영화가 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컴퓨터 앞에 앉으면 스크린이 백지장처럼 하얗게만 보일 뿐 한 줄이 제대로 나가지 못하는 영화가 있다. 말하지 않는 것, 그건 침묵과는 조금 다른데, 어쨌든 그럼으로써 더 많은 말을 전달하게 될 때가 있는 법이다. (남영동 1985)가 바로 그런 영화다. 앞으로 극장 박스오피스 앞에 침묵과 자성과 각오의 줄이 이어질 것이다. 관객이 많아질수록 세상이 좀 달라질 것이다. 한 편의 영화가 세상을 바꿀 때가 있다는 얘기는 이래서 나온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2012년 10월 8일 월요일

“김근태 고문당할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이글은 한겨레신문2012-10-07일자 기사 '“김근태 고문당할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를 퍼왔습니다.


베일 벗은 ‘남영동 1985’ 배우 박원상

‘김근태 고문실화’ 영화서 김근태역
물 공포증 이겨내며 갖은 고문 연기
“인간 해체시키는 고문 고통 막막해” 
이근안은 ‘국가’란 이름의 폭력 상징 
아픈 과거 반성해야 바른 미래 가능

영화가 끝나자 인재근 민주통합당 의원은 옆에 앉은 배우 박원상씨를 껴안고 흐느꼈다. 27년 전, 개처럼 바닥을 기어가는 모욕과 고문을 당했던 남편의 고통을 재현한 한 배우에 대한 고마움과, 지난해 말 훌쩍 세상을 떠난 ‘남편 김근태’에 대한 그리움이 북받친 것이다.인 의원은 “이미 아는 사실인데도 보는 게 힘들었다”며 “지난해 남편이 갑자기 그렇게 된 것이 전기고문 후유증이라 확신하기에 전기고문 장면에선 눈을 감았다”고 했다. 그는 “짐승처럼 당하고도 우리 곁에 돌아와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않았던, 하늘에 있는 나의 짝에게 고맙고 미안했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극중 이름은 이두한) 역을 맡은 이경영씨는 이어진 무대인사에서 마치 국가폭력에 대해 대신 사과하듯, 인 의원 앞에서 “죄송합니다” 하며 눈물을 흘렸다.부산국제영화제 개막 사흘째인 6일 공식 상영된 (남영동 1985)는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1985년 9월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 자격으로 붙잡혀 서울 남영동 옛 치안본부 대공분실 515호에서 22일 동안 고문당한 실화를 극화했다. 고춧가루를 넣은 코와 입 속으로 물을 뿌려 기절시키거나, 전기고문을 하고, 몽둥이로 패는 장면들이 상영 시간 내내 가혹하게 펼쳐진다. 그 끔찍한 상황에서 “나는 헌법을 유린한 (박정희 정권의) 5·16 쿠데타와 (전두환) 군부독재를 부정한다”고 맞서거나, 잔혹한 고문 앞에 결국 허물어진 자신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용서할 수 없어”라며 자책하는 ‘김근태’(극중 이름 김종태)의 모습에서 관객의 눈은 뜨거워지고 만다. 사법부를 겨냥한 (부러진 화살)에 이어 정지영 감독이 또다시 사회적 파장을 몰고올 신작을 내보였다.“다른 배우였다면 중간에 도망갔을 것”이란 감독의 말처럼, 실제 얼굴에 물을 퍼붓고, 발가벗은 몸으로 바닥을 뒹구는 고통의 연기를 감당한 박원상씨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영화다. 특히 그는 “어렸을 때 물에 빠져 죽을 뻔해 평소 물 공포증이 있었다”고 한다. 정작 힘들었던 건 “인간이 인간을 철저히 해체시키는 고문의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참고할 것이 없다는 막막함, 그리고 과연 이 연기와 이 인물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었다”고 그는 털어놓았다.“나는 (515호실을 재현한) 경기도 양수리 종합촬영소 6세트장에서 연기로 시늉을 내면서도 죽을 것 같았는데, 실제 김근태 상임고문이 고문당할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생각하니 너무 힘들었죠.”박원상씨는 군사정권 시절을 “비상식적이었던 야만의 시대”라고 표현했다. (야만의 시대)는 이 영화의 원제목이다. 그는 2012년에 ‘김근태’와 ‘고문’을 관객 앞으로 불러낸 이 영화를 “역사를 기억하는 영화”라고 말했다. “(이 사회가) 기억해야 할 것을 잊고, 짚어야 할 것을 짚지 못하며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대선 정국에서 ‘과거사 논쟁’ 대신 미래를 설계하자는 정치권 한쪽의 목소리에 대해 “온당치 못하다”고 했다.“부끄럽고 아픈 과거를 반성하고, 잘 정리하고 가야 미래를 향한 올바른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겁니다.”그는 영화 속 ‘이근안’(이두한)은 “서민과 불특정 다수에게 국가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성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누군가는 항상 그런 국가의 폭력성에 대해 끊임없이 용기있게 지적하고 발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지난 5월 말 영화촬영을 끝내고 그는 김근태 상임고문이 좋아했던 참외와 막걸리를 들고 묘역을 찾아가 “영화 잘 마무리하고 왔습니다”고 인사를 했다고 말했다.이 영화는 대선 직전 개봉을 목표로 한다. 정 감독은 “대선 후보들이 모두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며 “우리 모두가 아픈 과거와 김근태 같은 분들의 희생을 피상적으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공유해야 하며, 이런 과거를 극복할 때 통합과 화해로 나아갈 수 있다”고 했다.

부산/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