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16일 목요일

지뢰밭이 지킨 '평화의 숲'…생태계 신비 고스란히

숲 로고.jpg   ③철원 소이산
논밭과 집터는 숲과 습지로…출입통제 덕에 평지 숲 원형 간직
연료림 심은 아까시나무 우세, 조사 전무해 "뭐가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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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이산 부근 지뢰지대 안의 숲 모습. 평지여서 과거 논이거나 집터였을 것이다.

텃밭이 딸린 집터를 60년쯤 방치하면 어떻게 될까. 흙먼지 날리던 학교 운동장은 그 기간 동안 어떻게 바뀔까.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사요리에 가면 그 해답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한국전쟁으로 황폐화한 뒤 군사목적으로 매설한 지뢰가 사람의 간섭을 최소화했기 때문이다.

지난 7일 사요리 산 1번지가 주소인 소이산(해발 362m)을 찾았다. 북한이 1946년 지은 3층짜리 건물인 노동당사 건너편에 위치한 야트막한 산이다. 산을 희게 물들이고 있는 아까시나무 꽃을 따라 온 양봉가의 벌통이 널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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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이산 전경. 해발 362m의 낮은 산이지만 철원평야의 조망점이다.

labor.jpg북한이 1946년 건설한 노동당사.

소이산은 민통선 밖에 있지만 주요한 군사시설이 많아 출입이 통제돼 왔다. 읍내 야산이 전쟁 이후 반세기 동안 스스로 변화해 온 모습이 간직돼 있다.

일제 때 사방림과 연료림으로 많이 심은 아까시나무가 아직도 숲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길가에 무리지어 돋아난 외래종이자 생태교란종인 단풍잎돼지풀은 이곳에 오랫동안 군사기지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동행한 마상규 박사(한국산림기술인협회 회장)는 “이곳은 외래종인 아까시나무가 향토수종에 앞서 황폐한 땅을 선점한 이후 앞으로 어떻게 바뀌어나갈지를 생태사회학적으로 연구할 최적지”라고 말했다.

산 중턱 이후부터는 아까시나무가 줄고 생강나무, 갈참나무, 때죽나무 등 토종 나무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그대로 놔두면 아까시나무가 산을 점령할 것이란 우려는 근거가 없음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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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이산에서 바라본 철원평야의 전경. 멀리 앞에 보이는 녹지가 비무장지대이고 그 너머 산지는 북한이다.

oldtown.jpg1930년대 소이산 정상에서 본 철원읍 전경. 크고 작은 건물이 밀집해 있는 모습이 현재와 대조된다. 건물이 들어선 곳은 현재 지뢰지대이다. 출처 <철원군지>.

소이산 정상에 오르자 눈앞이 확 틔었다. 주변과 표고차가 200여m밖에 안 되지만 1000m급 고산에 오른 느낌이 들었다. 널찍한 철원평야와 비무장지대, 그리고 그 건너 북한의 평강고원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이 산이 없었다면 전쟁 때 철원평야를 지킬 수 없었을 것”이라는 김준락 육군 제6보병사단 공보참모의 설명이 실감났다.

소이산은 철원평야 논의 바다에 떠있는 작은 섬이다. 철원평야를 한 눈에 굽어보는 가치 때문에 이곳엔 고려 때부터 봉수대가 설치돼 함경도 경흥에서 서울로 연결되던 경흥선 봉수로에 속해 있었다.

사요리는 옛 철원읍의 중심지로 농축산물이 모이고 경원선과 금강산 전철이 다녀 관광객이 북적이던 곳이었다. <철원군지>에 실린 1930년 소이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산밑에까지 크고 작은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찬 모습을 볼 수 있다. 김철암 철원문화원 사무국장은 “해방 때 철원읍 인구는 8만이었고 은행 2개와 여고, 도립병원도 있었는데 현재 철원읍 인구는 그 절반 가까운 4만 7000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농산물검사소 등 과거의 주요 건물은 근대문화유적으로 남았지만 농가와 논밭의 상당수는 습지와 숲으로 바뀌었다. 마상규 박사는 “통일이 돼 철원에 평화도시가 조성된다면 소이산은 그 조망점으로서 서울의 남산과 같은 구실을 할 것”이라며 “평화의 숲이자 도시의 산림공원으로서 보전하고 개발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시민단체 ‘생명의 숲’이 2006년 소이산을 ‘천년의 숲’ 수상지로 선정한 것도 ‘평화의 숲’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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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농가 주변임을 보여주는 지뢰지대 안의 대형 뽕나무.
 
소이산의 북쪽 산자락은 모두 지뢰지대이다. 노동당사에서 국도 87호선을 따라 대마리로 향하는 길 양쪽은 옛 철원의 시가지였지만 지난 60여년 동안 지뢰 통제구역으로 묶였다. 
그 동안 묵논은 습지로, 묵밭과 집터는 숲으로 바뀌었다. 소이산 자락에서 출입영농을 하는 현응기(71)씨는 “지뢰지대 안에 고사리와 고라니가 많지만 폭발사고가 나 사람들이 들어가길 꺼린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이곳에 대한 생태조사도 이뤄진 적이 없다.
 
전문가들은 소이산의 생태적 가치는 훼손이 심한 산 위보다 산자락의 지뢰지대가 높을 것으로 본다. 도로를 따라 지뢰지대를 보면 아까시나무, 버드나무, 신나무와 함께 마을에서 심어 기르던 호두나무, 뽕나무 등도 눈에 띈다. 마 박사는 “지금은 모두 사라진 서울의 평지 숲의 원형이 여기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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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찍은 철원공립보통학교 전경. 출처 <철원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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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과 습지로 변한 철원공립보통학교 터(정면 초원 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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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먼지 날리던 학교 운동장, 60년 뒤의 모습.

소이산 건너편의 지뢰지대는 넓은 초지를 키 큰 포플러와 아까시나무가 둘러싼 모습이 독특하다. 해방 때 2600여 명의 졸업생을 냈던 철원공립보통학교 터이다. 운동장은 초원이 됐고 귀퉁이는 고랭이, 부들 등이 자라는 습지가 됐다.
 
온대지역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사람의 간섭이 중단된 채 생태계의 천이와 복원이 이뤄진 곳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그러나 이곳이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소규모 지뢰지대여서 인접한 도로와 군부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의 손길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란 지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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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읍 곳곳에 흩어져 있는 지뢰지대. 과거 평지였던 곳이 60여년 동안 식생천이를 거친 곳이어서 주목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쟁의 유물인 지뢰밭이 지킨 숲의 가치는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김명진 국립환경과학원 자연평가연구팀장은 “최근 민통선 지역인 백암산에서 희귀한 사향노루 서식지가 발견된 것처럼 사람의 발길이 뜸해진 민통선 인근 지역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생태적 가치가 발견될 잠재력을 지닌다”고 말했다.
철원/글·사진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천안함 사태 뒤 DMZ 생태조사 ‘올 스톱’
 
분단 뒤 첫 생태조사로 기대를 모았던 환경부의 비무장지대 생태조사는 지난해 천안함 침몰 이후 전면중단된 상태이다.
 
해부터 서해까지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약 2㎞ 지역을 가리키는 비무장지대(DMZ)는 군사활동과 산불로 인한 교란이 계속되기는 했어도 반세기 이상 사람의 접근이 철저히 차단된 곳이어서 세계적 주목을 받는 지역이다.
 
이제까지 철책선 밖에서 망원경 등으로 관찰하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2008년 11월 환경부와 각 분야 전문가 20여명은 유엔군사령부의 허가를 받아 비무장지대 안에서의 생태조사를 처음 시작했다.
 
2008년 11~12월엔 경기도 파주, 연천 등 비무장지대 서부지역의 조사가 이뤄져 독특한 습지생태계를 발견하는 등의 성과를 올렸다. 이듬해 11~12월엔 강원도 철원 지역의 조사를 마쳤다.
 
그러나 스라소니, 표범 등 대형 포유류의 서식 여부로 관심을 모았던 강원도 화천, 양구, 고성 등 동부지역 조사는 천안함 사태 이후 악화한 남북관계로 이뤄지지 못했다.
 
생태조사뿐 아니라 6·25 60돌을 맞아 15개 언론사가 국방부의 협조로 추진하던 비무장지대 취재계획도 북한이 비무장지대를 대북 심리전장으로 만들려고 한다며 ’인명피해’를 위협하는 바람에 취소됐다.
 
유제철 환경부 자연정책과장은 “여건만 풀리면 비무장지대 언제든지 생태조사를 재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아까시나무의 쇠퇴…황무지 녹화 큰 구실, 조림 중단에 노화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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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이산 지뢰지대의 아까시나무. 꼭대기가 말라죽는 쇠퇴현상을 보이고 있다.
 
한여름에 아까시나무의 잎이 노랗게 물들어 낙엽이 지는 현상이 2000년대 중반에 전국에 나타났다. 이 ‘아까시나무 쇠퇴현상’의 주요 원인은 1970년대 이후 아까시나무 조림이 중단되면서 나타난 노화 때문이라는 설명이 유력했다.
 
그러나 요즘 이런 황화 현상은 보이지 않는다. 아까시나무의 쇠퇴는 멈춘 걸까. 신준환 국립산림과학원 산림생태연구과 박사는 “황화가 심하지 않다 뿐이지 쇠퇴가 중단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큰 아까시나무의 꼭대기 부분이 말라죽는 현상을 지금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그 증거다.
 
신 박사는 “아까시나무는 토양이 황폐한 곳에 먼저 들어오는 선구 수종이어서 다른 나무와 경쟁을 하거나 그늘진 환경에서는 잘 견디지 못한다”고 말했다. 뒤집어 얘기하면 전후 황폐했던 국토를 녹화하는데 아까시나무는 큰 구실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북미 원산인 아까시나무는 19세기 말 들여와 1970년대까지 심은 대표적 조림수종이다. 특히 어릴 때 베어내면 이듬해 또 그만큼 자랄 만큼 생장력이 왕성하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 연료림과 사방림으로 널리 심었다. 절정기는 1970년대로 전국의 아까시나무 면적은 지금보다 5배 이상 많은 32만㏊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꿀 공급 식물이자 산림녹화에 기여했지만, 아까시나무는 생활력이 너무 강해 퇴치가 곤란한 나무라는 편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아까시나무는 뿌리가 얕고 목재의 비중이 커 바람 피해를 잘 받아 대개 50년을 넘기지 못한다. 무엇보다 산림이 건강해지면서 아까시나무의 설 자리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이 기획은 복권기금(산림청 녹색사업단 녹색자금)의 지원으로 마련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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