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24일 금요일

[최명애의 북위66.5도](24)북극을 동경한 사진가의 ‘바람같은 이야기’

이글은 주간경향의 기사를 퍼왔습니다.
ㆍ좌충우돌 해외방랑기 ‘알래스카 페어뱅크스’

호시노 미치오란 일본인 사진작가가 있다. 어려서부터 북극을 동경했던 그는 1978년 알래스카로 건너와 평생을 여기서 보냈다. 이 여행기의 ‘시스마레프’ 편에도 잠깐 나온다. 까까머리 소년 시절에 시스마레프에서 여름 한 철을 보내기도 했으니까. 15권에 이르는 그의 책은 2000년대 중반부터 우리나라에 차례로 번역됐는데, 그 중 <바람 같은 이야기>는 대한항공의 알래스카 취항 광고 제목으로 쓰이기도 했다.

알래스카 페어뱅크스의 ‘북극박물관’ 앞에서 본 풍경. 눈을 뒤집어쓴 산이 매킨리, 원주민 말로는 ‘데날리’라고 부르는 산이다.

그 책에 컬러 화보로 실려 있던 카리부떼의 사진을 잊을 수 없다. ‘여기에는 야생사진이라는 말로는 다 담지 못할 만큼의 삶과 죽음과 사랑이 가득 차 있다’라는 철학자스러운 멘트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호시노 미치오의 사진은 유난히 초록색이 ‘쨍’하게 나오는 후지 벨비아 필름으로 찍은 것처럼, 어떻게 보면 좀 촌스러워도 보인다. 그러나 그 투박한 사진과 세련되지 못한 글에서 나는 말로는 어떻게 설명하지 못할 진정성을 느꼈다. 지금도 느낀다. 그는 1996년 러시아 캄차카에서 불곰을촬영하다 습격당해 목숨을 잃었다. 작정하고 연출하려 해도 쉽지 않았을 자연 다큐 작가다운 죽음이었다.

“호시노 미치오는 일본인들에게 신”
나는 알래스카 중부 페어뱅크스에 와 있었다. 정확히는 알래스카대학 페어뱅크스 분교(UAF)의 ‘북극 박물관(Museum of the North)’ 복도였다. 여기엔 호시노 미치오의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그는 80년대 초반 이 대학 야생동물학부의 학생이었다. 호시노 미치오가 사망한 뒤 부인 나오코는 그의 사진 150여점을 대학에 기증했다. 평생 극북의 마을들을 떠돌았지만 그의 ‘집’은 페어뱅크스였다. 해안의 에스키모와 내륙의 인디언들이 교역하던 알래스카의 오랜 옛 마을. 지도에서 알래스카를 잘라 들고 연필 위에 놓으면 무게중심은 페어뱅크스에 찍혀 있을 것이다.

그 페어뱅크스에 여름이면 일본인 관광객들이 전세기까지 대절해 날아온다. 호시노 미치오 ‘성지순례’를 오는 것이다. 우리 B&B의 소심한 주인 아저씨는 “일본인들에게 호시노 미치오는 신”이라고 삐쭉거리면서도 간판 밑에 일본어로 ‘방 있음’이라고 붙여 놓았다. 북극박물관도 ‘성지순례’ 코스여서, 아니나 다를까 호시노 미치오 사진집이 오로라 사진집과 패키지로 팔리고 있었다. 일본인 관광객을 위한 맞춤 상품 되겠다. 호시노 미치오 못지않게 일본인 관광객이 사랑하는 것이 오로라다. 전 세계에서 가장 오로라가 잘 보이는 캐나다 옐로나이프 오로라 관광객의 90%가 일본인이다. 신혼부부가 오로라를 보면 천재를 낳는다는, 관광업계 발 전설도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에스키모 어린이들은 다 아인슈타인이 됐어야 하는 것 아닌가.

UAF가 자랑하는 북극박물관은 명성대로였다. 가히 알래스카의 ‘대영박물관’이라 할 만하다. 여기서 알래스카에도 대학이 있느냐고 묻는 분들께 말씀드리자면, 알래스카대학 본교가 앵커리지에 있고, 페어뱅크스에 분교가 있다. 특히 UAF는 북극 연구가 특화돼 ‘북극학과’ ‘알래스카 원주민어학과’ ‘고지대 농업’ 같은 과들이 있다. 나는 언젠가 북극곰(여행 동행자)을 UAF 북극학과 석사과정에 입학시키고 나는 ‘사커맘’이 되어 두 해쯤 페어뱅크스에서 잘 살아 보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우리는 북극박물관을 구경하러 가는 바쁜 길에 틈을 내 학교 행정실에 들러 혹시 석 달쯤 해볼 만한 어학연수 코스가 없느냐고 물어봤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찼다.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가고, 주말에는 도시락을 싸서 빙하로 하이킹을 떠나고, 금요일 밤엔 ‘알래스칸 라이프스타일(Alaskan Lifestyle)’에서 곰 퇴치 스프레이며 방울 같은 것들을 사는 거다. 행정실 직원은 냉정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뇨,어학연수하러 여기까지 몇 명이나 오겠어요?”



페어뱅크스 교외를 지나가는 알래스카 송유관의 모습.
다음날은 렌터카를 몰고 북쪽으로 달려갔다. 노랗게 물든 자작나무 잎과 참새의 혀처럼 뾰족 내민 침엽수의 새 잎들이 점점이 찍혀, 풍경은 점묘화가의 작품 같았다. 우리는 교외의 UAF 연구소에 잠깐 들러 사향소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사향소는 둥글게 말린 뿔 두 개가 갈기와 함께 달려 있는 북극 소다. 사향소떼가 씩씩거리며 눈밭을 달려오는 사진을 보면, 매머드와 함께 마지막 빙하기를 보냈어야 할 것 같이 생겼다. 연구용 사향소 농장이 있다고 했는데, 정말 사향소 10여 마리가 풀을 뜯고 있었다. 갈기는 침이라도 발라 빗어놓은 것처럼 단정하게 앞가르마가 타져 있었다. 크지도 않았다. 송아지만 했다. 나는 사향소가 매머드만은 못해도 코끼리만은 할 줄 알았다. 눈발이 붙어 있는 갈기를 휘날리며 준엄하게 인류를 꾸짖을 줄만 알았다. 나의 실망한 마음따위는 아랑곳 않고, 사향소들은 ‘영구’ 같은 얼굴을 참으로 싹싹하게도, 자꾸만 들이댔다.

한 시간쯤 달리니 알래스카 송유관이 나왔다. 북극해에서 시추한 석유를 남부의 프린스 윌리엄 해협까지 옮기는 거대한 파이프다. ‘관제 설명’은 알래스카에 강림하신 과학기술의 경이를 칭송하고 있었는데, 영구동토층에 파이프를 세우기 위해 3년간 노력한 끝에 1977년 첫 석유가 송유관 속으로 들어갔다, 석유는 프루도 베이에서 장장 800마일을 달려 한 달 뒤에야 발데즈 해안 터미널에 도착했다,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송유관 조사팀에서라도 나온 듯 면밀하게 다각도로 사진을 찍던 관광객 아저씨는 주머니에서 지구 모양의 조그만 공을 꺼내더니 송유관 이음새 틈에 끼우고 사진을 찍었다.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가을날 오후였다.

석유 배당금 대신 살 권리를 선택한 그위친족
그러나 알래스카 송유관은 원주민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연방정부는 석유가 발견되는 땅에 사는 부족들에게 배당금을 지급했다. 그러나 북극해에 면한 배로우는 같은 에스키모 마을이라도 부자 마을이다. 이 배당금 제도는 에스키모 ‘우민화 정책’이란 비판도 받았다. 일자리는 주지 않고, 돈만 줘서다. 정부의 ‘돈 폭탄’에도 넘어가지 않은 부족이 있었으니, 바로 알래스카 중부의 아크틱 빌리지(Arctic Village)에 사는 그위친족이다. 광활한 알래스카를 유목하며 살아온 그들은 석유 배당금 대신 살 권리를 선택했다.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으며, 세금도 내지 않는다. 아크틱 빌리지를 방문하려는 자는 부족장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북극곰은 몇 년 전 아마도 한국 기자로는 최초로 아크틱 빌리지를 다녀왔다. 장작을 패서 불을 때고, 원주민과 친해 보고자 순록 고기를 집어먹다 온몸에두드러기가 나기도 했단다.

페어뱅크스 시내의 ‘걸리버 북스토어’에는 알래스카 섹션이 따로 있었다. 훌륭한 서점이었다. 새 관측 가이드만 책장 하나다. 개썰매를 몰고 캐나다에서 알래스카까지 24번 탐험했다는 크누트 라스문센이며, 알래스카 북부 국립야생동물보호지구에 사는 덫사냥꾼 하이모 코스며, 오지의 마을과 섬들을 연결하는 소규모 독립 항공의 부시 파일럿들 이야기도 책장 가득이었다. 알래스카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부시 미국 대통령 사진을 하루하루 붙여놓은 365일 달력도 있었다. ‘1년 동안 꾸준히 보시면 다시는 찍지 않으실 겁니다’라는 광고 문구도 함께다. 우리는 홀리기라도 한 듯 10권의 책을 사고, 9장의 지도를 샀다. 주머니를 탈탈 터니 39 달러와 동전 한 줌이 나왔다. 이번 여행은 여기까지다.

<글·사진 최명애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 glauk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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