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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6일 수요일

조선, “변희재·정미홍은 홍위병…거리둬야” 왜?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3-0205일자 기사 '조선, “변희재·정미홍은 홍위병…거리둬야” 왜?'를퍼왔습니다.
정우상 위원 “또 다른 홍위병 등장 막는다”… 변희재 “형편없는 칼럼” 강력 반발

조선일보 정우상 논설위원이 5일자 칼럼에서 변희재 빅뉴스 대표를 비판한 것이 화제가 되고 있다. 같은 보수진영 내에서 일종의 ‘노선 투쟁’ 비슷한 양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박근혜 정부에서 이념적이고 극우적인 인사들이 약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선일보 등 보수신문이 견제에 나선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정우상 논설위원은 조선일보 5일자 33면 (홍위병의 추억, 그리고 유혹)이란 칼럼에서 대선 이후 일부 우파인사들의 행태를 ‘반대편 짓밟는 홍위병’이라며 강도 높게 비판하고 나섰다.
정 위원은 “이번 대선이 우파의 승리로 끝나면서 우파 일부가 대선 기간 전투를 벌였던 반대 진영 인사들을 손보겠다고 나섰다”면서 대표적인 사람으로 아나운서 출신 정미홍 씨와 변희재 대표를 들었다.

정우상 “선거에서 이긴 세력은 이전보다 말과 행동 신중해야”

정 위원은 “아나운서 출신인 정미홍씨는 박원순 서울시장 등을 거명하며 ‘종북(從北) 성향 지방자치단체장을 기억해 내년 지방선거에서 퇴출시켜야 한다’고 했다”면서 “인터넷 논객 변희재씨는 야권 성향 포털 사이트의 퇴출 운동을 벌이고 조국 서울대 교수의 논문 자기 표절 의혹도 제기했다”고 지적했다.

조선일보 2013년 2월5일자 33면

정 위원은 “두 사람은 대선 전에도 종북과 포털 문제를 제기해왔기 때문에 새로운 주장은 아니다”고 언급하면서도 “그러나 같은 주장이라도 선거 전후(前後)에 반대 진영이 느끼는 체감온도는 다르다. 선거에 이긴 세력은 이전보다 말과 행동이 100배 더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새 정부가 들어서면 그 주변에는 권력의 달콤함을 누리려는 사람들로 붐빈다”면서 “눈치 없는 이들은 처음부터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끼려다 눈 밖에 나지만 세상 이치를 아는 사람들은 ‘자리에 연연 않고 대통령을 보호하겠다’ ‘반동(反動) 세력과 싸우겠다’며 스스로 ‘완장’을 차고 접근한다”고 강조했다.
정 위원은 “천 조각에 불과한 ‘완장’은 그 자체로는 권력이 아니지만 권력자가 자기를 지켜주겠다는 완장 세력에 기대는 순간, ‘완장’은 칼이 되고 망치가 된다”면서 “국민은 선거 때 ‘통합’을 약속했던 박근혜 당선인이 그들과 거리를 두는지, 그들에게 기대 또 다른 홍위병을 만드는 건 아닌지 지켜보고 있다”며 칼럼을 맺었다.
조선일보 정우상 논설위원은 5일 미디어오늘과의 통화에서 “칼럼에서 얘기한 게 전부다. 따로 할 얘기가 없다”고 말했다.
변희재 빅뉴스 대표는 정우상 논설위원의 칼럼을 강하게 비난했다. 변 대표는 5일 빅뉴스에  올린 (조선일보 방상훈은 정우상류를 멀리하라)는 글에서 “도무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막막할 정도의 형편없는 칼럼”이라면서 “조국 교수의 경우 익명의 과학자로부터 근거가 확실한 제보가 들어왔는데, 이것도 박근혜 당선자가 집권했으니, 이슈화 시키지 말라는 게, 언론사가 펼 수 있는 논리인가”라고 반박했다.

변희재 “포털 싸움과 폴리페서 논문 검증이 완장인가”

변 대표는 “글의 취지는 노무현 정권이 선동부대 홍위병에 의지하다 망했으니, 박근혜 정부도 홍위병들을 멀리 하라는 것이다. 글의 서두만 보면 박근혜 당선자의 막강한 팬클럽을 경계하는 듯한 내용”이라면서 “그러나 그 글에서 중심은 종북과 싸움을 하는 정미홍 전 KBS 앵커와, 포털과 싸우며 조국 교수 등 폴리페서들 논문 검증을 하는 필자가 중심이 된 한국인터넷미디어협회”라고 주장했다.

빅뉴스 2013년 2월5일자 화면캡처

그는 “정우상 위원은 마치 필자가 자리에 연연하지 않은 척하여, 완장의 칼을 쥘 것이니, 박근혜 당선자에게 거리를 두라고 조언하고 있다”면서 “박근혜 정권 내내 주간 미디어워치만 발전시킬 것이고, 인미협을 통해 포털 개혁을 할 것이라고, 물어볼 때마다 공개적으로 답변하고 있는데, 대체 뭘 더 어떻게 설명하란 말인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방상훈 사장은 이런 정우상류들을 멀리해야 한다”고 언급한 변 대표는 “김용민이 ‘박근혜 당선자, 정미홍과 변희재 멀리해야’라고 정리하여 트윗으로 퍼나르고 있다. 조선일보와 정우상 위원의 전략이 성공한 것에 대해 박수를 보낸다”며 글을 맺었다.
변희재 대표는 5일 미디어오늘과의 통화에서 “종북논쟁에 대한 지적은 이해하지만 포털과의 싸움까지 문제 삼는 건 이해할 수 없다”며 “논문표절 의혹도 언론 입장에서 보면 특종인데 이것도 박근혜 당선인과 연계시키고 있다”고 조선일보를 비판했다.
이번 논쟁을 보는 전문가들의 평가는 조금씩 엇갈린다. 신율 명지대 교수(정치외교학)는 “변희재 씨의 경우는 몰라도 합리적 보수라면 정미홍씨를 비판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냐”고 반문했다. 신 교수는 “홍위병의 기준은 정치에 뜻을 두고 있느냐 여부인데 변희재씨는 그쪽에 뜻이 없는 것 같다”면서 이 같이 말했다.

“진영 논리 벗어난 비판, 긍정평가” “극단적 주장에 대한 경계”

하지만 신 교수는 조선일보의 이번 칼럼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진보이든 보수이든 궁극적으로 합리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본다”면서 “그런 점에서 조선일보 정우상 논설위원이 칼럼을 통해 이들을 비판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해 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른바 ‘같은 편’이라도 비판할 사안이 있을 때 비판하는 건 장려해야 한다는 것.
신 교수는 “보수든 진보든 진영 논리에 빠져 자기 진영에 대해 비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더욱 큰 문제”라면서 “그런 점에서 진보언론도 반성해야 할 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강윤 시사평론가는 조금 다른 견해를 보였다. 이 평론가는 “조선일보 정우상 논설위원이 언급한 정미홍 아나운서와 변희재씨의 경우 과격한 표현과 논리전개라는 특성 때문에 홍위병처럼 보였을 수 있다”면서 “문제는 이제 이 같은 논리나 주장이 대중의 공감을 얻는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평론가는 “이번 대선은 진보·보수진영 모두에서 상식적 합리주의자들이 많이 늘어난 특징을 보였다”면서 “이들은 여야라는 입장보다는 사안별로 야당을 지지하기도 하고 여당을 지지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이 평론가는 “이런 합리적 중도층들이 앞으로 주요 선거의 향배를 결정해 나갈 가능성이 높은데 이른바 ‘과격한 사람들’이 설쳐서는 도움 될 게 하나도 없다”면서 “정우상 논설위원의 칼럼도 이 같은 점을 염려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민동기 기자 | mediagom@mediatoday.co.kr 

2012년 9월 1일 토요일

천안함 신상철 “이명박 개XX” 칼럼 무죄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08-31일자 기사 '천안함 신상철 “이명박 개XX” 칼럼 무죄'를 퍼왔습니다.
 남부지법 “권력자 비판일 뿐 협박·테러 아냐…표현자유 중요성”

검찰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딸 정연씨를 수사한다는 소식에 이명박 대통령을 향해 ‘이명박 개××, 노정연을 그냥 놓아누라’며 거친 표현을 담은 칼럼을 쓴 이유로 검찰에 기소된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전 천안함 민군합조단 민간위원)가 법원이 무죄를 선고해 주목된다.
판사는 부적절한 욕설이나 경멸적 언어가 반복되는 표현에 대해 도덕적 사회적 비난을 받을 수 있지만 이를 넘어서 국가의 형벌로 의율하는 것은 신중해야 하며, 최고 권력자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이 허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최근 헌법재판소가 인터넷실명제 위헌 판결을 통해 표현의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도 이 같은 취지와 같다고 평가했다.
서울남부지법 형사6단독 김영식 판사는 31일 모욕 및 협박 혐의로 기소된 신 대표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이 같이 판결했다.
김 판사는 욕설이 담긴 신 대표의 글이 본인(이명박 대통령)에게 도달했는지 여부에 대해 형사소송법 307조를 들어 합리적 의심없이 증명에 의해서여야 한다는 점에서 청와대 게시판과 조선일보의 일부 보도, 누구나 접근이 가능한 서프라이즈에 실었다는 이유 만으로는 이 대통령이 이를 인식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김 판사는 “구속요건이 되는 사건이려면 피해자 조사를 통해 입증돼야 하는데 피해자(이 대통령)가 아무런 증거도 제출하지 않아 피해자가 이를 인식했거나 피해를 봤다고 보기어렵다”며 “이는 검찰의 증거부제출에 의한 탓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신 대표의 글이 이 대통령에 전달돼 그 피해를 입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김 판사는 또하나의 쟁점인 ‘협박’의 근거인 ‘해악의 고지’가 있었느냐에 대해서도 “신 대표의 글은 검찰이 (노 전 대통령의 딸) 노정연 수사를 제기할 경우 국민의 저항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일종의 경고로 볼 수 있을 뿐 해악을 가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신 대표는 글을 씀으로 비판할 뿐 위해를 가하거나 폭력을 가한 적도 없다”고 밝혔다.
김 판사는 신 대표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을 반대하는 유명 정치웹진 사이트를 운영하는 언론인이며, 천안함 의혹을 제기했다가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며 “노씨에 대한 검찰 수사가 제기된다는 언론보도를 보고 분노해 글을 게시했다는 경위 등을 종합해 볼 때 (이 대통령에게) 해악을 고지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한 ‘국제테러단체의 암살과 동일하다’는 검찰 주장에 대해 “그렇게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다만 김 판사는 “언론인으로서 건전한 정치비판을 해야 함에도 신 대표의 글이 부적절한 욕설과 경멸적 언어를 반복해 도덕적, 사회적 비난을 받을 소지는 다분하다”면서도 “그러나 국가 최고권력자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이 허용돼야 하며 견제와 비판을 업으로 하는 언론인으로서 납득하기 어려운 표현을 썼다 해도 도덕적 비난을 넘어선 국가 형벌로 의율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 판사는 “최근 헌법재판소가 (인터넷실명제 위헌을 통해) 표현의 자유가 갖는 중요성을 다룬 것과 같다”며 “그러므로 피고는 무죄”라고 선고했다.
김 판사는 이날 판결하면서 신 대표의 의사를 물어본 뒤 무죄 판결 요지를 일간지에 공시하기로 한다고 선언했다. 김 판사는 신 대표에게 “내가 한 것은 여기까지이며 검찰이 기소할 것이니 항소심에서 재판 잘 받으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는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협박과 모욕의사가 없는 취지의 글이라는 것을 판사가 직접 확인해준 것”이라며 “자유로운 비판에 대한 재갈을 물리기 위해 무리하게 남발하고 있는 검찰의 행태에 제동을 걸었다는 의미의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신 대표는 “국민들의 권력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과 특히 언론의 비판 기능이 보장돼야 한다는 것을 새삼 확인해준 명판결”이라며 “무죄를 예상했으나 판사의 판결을 듣는 내내 감격스러웠다”고 밝혔다.
신 대표는 그 이유에 대해 “이명박 정권 들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경찰과 검찰에 불려다니는 등 고통을 받아왔다”며 “반면, 국민의 표현의 자유를 수호해야 할 기관인 검찰·사법부가 권력에 눈치보는 모습에 급급해 많은 국민이 절망해왔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조현호 기자 | chh@mediatoday.co.kr 

2012년 8월 11일 토요일

방송작가들 비상대책위 꾸려, “MBC 한판 붙자”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08-10일자 기사 '방송작가들 비상대책위 꾸려, “MBC 한판 붙자”'를 퍼왓습니다.
방송작가 모든 매체 기고문, 칼럼, 논평 등 집단 글쓰기로 국민 여론전 돌입

한국방송작가협회(이사장 이금림)가 ‘PD수첩 작가 전원 복직을 위한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상대책위)를 꾸렸다.
한국방송작가협회는 10일 오전 긴급 이사회를 열어 이금림 이사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각 장르 작가들의 연구회장과 이사장단 등 총 10명으로 구성된 비상대책위를 출범하기로 결정했다.
비상대책위를 구성한 것은 지난 8일 백종문 편성제작본부장이 이금림 이사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PD수첩 작가를 원직 복직 시킬 뜻이 없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밝히면서 더 이상 MBC에 기댈 게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비상대책위는 다각적으로 MBC를 압박할 수 있는 대응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비상대책위는 방송작가 유관단체인 문화체육관광부와 방송통신위원회,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까지 포함해 면담을 추진하고 PD수첩 작가 전원 해고에 대한 부당성을 설명할 예정이다.
특히 오는 14일부터 임명장을 받고 공식 임기를 시작하는 9기 방송문화진흥회를 방문해 새로운 이사들에게도 이번 해고 사태의 심각성을 전할 계획이다. 당일에는 방송통신위원회 앞에서 구성다큐 작가들이 기자회견을 준비 중이다.
방송작가협회 회원들도 각개 전투에 나선다. 비상대책위는 협회 회원인 방송작가들이 될 수 있는 한 모든 언론 매체에 PD수첩 해고 사태를 주제로 기고를 하거나, 칼럼과 논평 등을 쓰도록 해서 전면적인 국민 여론화 작업에 돌입하기로 했다. 실제 해고 사태에 대한 국민 여론의 체감도가 낮다는 점에서도 여론전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비상대책위를 꾸린 것은 한국방송작가협회가 이번 문제를 협회 자체의 존립 자체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고 어떡해서든지 실마리를 풀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풀이된다.

▲ ⓒ미디어오늘 자료사진

또한 비상대책위는 이사회의 의결 권한을 위임받은 만큼 발 빠르게 상황을 대처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이번 사태를 해결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의견을 모았다. 실제 방송작가협회에서 의결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 장르 작가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25명 이사진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일례로 성명서 한 장을 쓸 때도 자구 하나까지 동의를 얻어야 하는 등 최종 의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10명으로 구성된 비대위에서는 의결 권한을 위임받아 발빠른 결정이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긴급 이사회에서 비상대책위를 구성하는 데 전원 찬성 입장을 밝혔다. 특히 백종문 편성제작본부장이 이금림 이사장과 만나 나눈 대화가 방송작가협회를 오히려 전면 투쟁에 나서게 만드는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긴급 이사회에서 이사들은 백 본부장의 입장은 원직복직도 불가능하고, 해고 사태를 일으킨 인사에 대한 문책이나 사과도 없다는 것인데 백 본부장이 이금림 이사장에게 차 한잔 대접하지 못해 사과하러 왔다고 밝힌 대목을 두고 "전체 작가들을 우롱한 처사"라는 얘기가 나왔다.
또한 백 본부장이 PD수첩 작가들은 유능한 작가들이니 교체가 되더라도 충분히 다른 프로그램으로 갈 수 있다는 말에 분노를 표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사들은 '유능한 작가는 잘라도 되느냐, 그럼 유능한 기자와 유능한 경영자는 자르지 않느냐"며 '작가들의 존재를 얼마나 무시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며 격앙된 분위기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금림 이사장은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이번 사태는 단순히 방송작가들의 밥그릇 투쟁이 아니다"며 "PD수첩 작가진을 전원 교체할 수밖에 없다는 MBC의 변명, 분위기 쇄신 차원이라는 말이 얼마나 허구인지, 권력을 비판하고 국민이 알아야 할 권리를 보장하는 프로그램이 제대로 방송되지 않았을 때 전근대적인 시대로 돌아갈 수 있음을 온 매체를 통해서 확산시키는데 주력하겠다"고 말했다.

이재진 기자 | jinpress@mediatoday.co.kr  

2012년 7월 30일 월요일

박근혜의 첫 번째 ‘덫’


이글은 시사IN 2012-07-30일자 기사 '박근혜의 첫 번째 ‘덫’'을 퍼왔습니다.
정수장학회 사회 환원을 둘러싼 노사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유력 대선주자인 박근혜 의원에게도 아킬레스건이 될 전망이다. 민주당은 ‘정수장학회 사회 환원 결의안’을 당론으로 의결했다.

서너 발자국 걸어 (부산일보) 현관문 안으로 들어서면, 벌금이 100만원이다. 1988년에 입사했으니 24년째 다닌 회사다. 하지만 이제는 회사 건물에 출입하는 것만으로 벌금 100만원을 내게 된 것이다. 7월11일, 법원이 내린 판결이 그렇다. 그날 이후 이정호 (부산일보) 편집국장은 현관 옆에 작은 책상을 마련했다. 그렇게 그는 ‘거리의 편집국장’이 되었다.

이정호 국장은 1988년 11월 공채 31기로 (부산일보)에 입사했다. 그의 표현대로 “기자 초년 생활을 좋은 시절에 시작했다.” 1988년 7월 (부산일보)는 파업을 겪었다. 사회 민주화 열기가 뜨거울 때였다. 당시 경영진은 ‘우리 신문은 숙명적 여당지’라고 강조해 노조의 강한 반발을 샀고, 이것이 나중에 사장 퇴진까지 이어지는 불씨가 되었다. 6일간의 파업으로 얻은 성과가 ‘편집국장 3인 추천제’였다. 편집국 노조원이 추천하는 3인 중 편집국장을 임명하도록 함으로써 편집권 독립을 보장하려는 제도였다. 회사는 관례상 3인 가운데 최다 득표자를 편집국장으로 임명했다. ‘이정호 기자’는 이 파업 직후에 (부산일보)에 입사했다. 그리고 ‘편집국장 3인 추천제’에 따라 2010년 12월 편집국장에 임명되었다. 

ⓒ시사IN 조남진 <부산일보> 본사.

갈등이 표면화한 것은 2011년 11월이었다. 봄부터 노조와 회사가 사장 선임제와 관련해 협의를 해왔다. 노조 측은 (부산일보) 주식을 100% 갖고 있는 정수장학회가 사장을 선임할 것이 아니라 사원들의 의사가 반영된 ‘민주적 사장 선임제’를 도입할 것을 요구해왔다. 11월, 사장이 노조위원장을 징계하려 했다. 이정호 편집국장은 “그때까지만 해도 노조와 회사 사이의 문제였다”라고 말했다. 당시 이 국장은 사내게시판에 ‘노조위원장에 대한 징계가 부적절하다’는 글을 올렸다(이호진 노조위원장은 11월 말에 해고되었고, 2012년 4월에 법원의 조정으로 복직했다). 

그리고 11월17일 ‘정수장학회의 사회 환원’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서울에서 열렸고, 이 기사는 1면에 배치되었다. 사장은 ‘회사의 명예가 걸린 문제라 게재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고, 편집국장은 ‘회사의 문제이지만 또한 공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국민의 알 권리 측면에서 게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기사는 나갔고 국장에 대한 징계 얘기가 나왔다. 11월30일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김종렬 당시 사장은 1면 머리기사였던 ‘부산일보 사측 징계 남발, 노사 갈등 격화’ 기사와 2면 ‘부산일보 ‘정수재단 사회 환원 투쟁’ 갈등 원인은’ 기사를 문제 삼았다. 인쇄 단계에서 회사가 윤전기를 세우면서 결국 이날 신문은 나오지 않았다. 회사 측은 ‘신문 발행의 최종 책임은 발행인에게 있다’라고 인쇄를 중단한 이유를 설명했고, 이정호 편집국장은 ‘신문에 어떤 기사를 실을지 판단하는 것은 편집국 권한이다. 이번 사건은 편집권 독립 침해이다’라고 맞섰다. 

(부산일보) 사태의 발단

이 일이 있고 나서 회사 측은 ‘지시 불이행’ 등을 이유로 이정호 편집국장에 대해 대기 처분을 내렸다. 회사 측은 이정호 국장에 대한 두 차례 징계 사유에 대해 “사규를 어기고 업무 질서를 어지럽힌 것이다. 신문 지령 표시를 잘못하고, 발행인 표시를 하지 않는 등 신문법을 위반하는 식의 징계 사유가 많다. 경영진이 편집권에 압력을 넣었거나 하는 편집권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조남진 <부산일보> 이정호 부산일보 편집국장이 7월17일 부산일보 현관 앞에 마련한 책상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징계 이후 양측의 소송전이 이어졌다. 2월10일에는 이정호 편집국장이 승소했다. 회사 측이 제기한 ‘편집국장 직무집행 중지 가처분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부산일보)의 경우 사규에 ‘징계위원 3분의 2 찬성으로 징계한다’는 의결 규정을 두고, 단체협약에 ‘징계위는 노사 동수로 구성하고 위원장은 회사 측이 맡는다’는 구성요건을 두었다. 그런데 지난해 하반기 회사 측이 사규를 변경해 3분의 2 찬성을 과반 찬성으로 바꾸었다. 이에 따라 이정호 국장에 대한 징계가 이뤄진 것이다. 이에 대해 법원은 노동자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사규를 개정할 경우 노조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데 이런 과정이 없었던 만큼 절차상 하자가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따라서 본안소송까지는 편집국장 지위를 인정한다고 판결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뒤 회사 측은 임원과 국·실장으로 구성된 ‘포상징계위원회’를 열어 이정호 국장을 재차 징계했다. 그리고 다시 법정 대결을 벌였다. 7월11일 법원은 회사 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직무정지 및 출입 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편집국장은 비노조원이기 때문에 단체협약 규정을 따르지 않고, 사규만 적용해도 된다는 판단이었다. 이로써 이정호 국장은 편집국장 직무가 중지되고, 회사에도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현재 부국장이 편집국장 직무 대행을 하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정수장학회였다. 이정호 국장은 “그동안 잠복해 있던 갈등이 경영진이 윤전기를 세우면서 물 위로 드러났다”라고 말했다. 정수장학회는 (부산일보)의 주식 100%를 갖고 있다. 정수장학회 이사회에서 (부산일보) 사장을 임명한다. 박근혜 의원이 1995년부터 2005년까지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역임했다(18~20쪽 딸린 기사 참조). 이정호 국장은 “박근혜 의원이 한나라당 대표가 된 2004년부터 갈등이 시작되었다”라고 말한다. 박 의원이 1997년 정치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는 칩거하다시피 했고, 한나라당 대표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대구의 한 지역구 의원’ 정도의 비중이었기 때문에 그와 관련해 ‘보도할 거리가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2004년 17대 총선 당시 (부산일보)는 홍역을 치렀다. 당시 공보위 간사였던 이호진 (부산일보) 노조위원장에 따르면, 당시 기자들이 회의를 거쳐 결의문을 붙이기도 했다. “당시 젊은 기자들이 취재를 하면서 (부산일보) 보도가 왜 그러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박근혜 띄우기’ 보도가 심했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이 동아대 석좌교수로 임명되고 총학생회가 반발했는데, 이 내용을 다룬 기사가 빠진 일도 있었다. 이런 일이 연이어 벌어지면서 기자들이 격분했다.” 

2004년 노골적인 칼럼 한 편

당시 (부산일보)는 이런 칼럼(‘거리의 정치 평론가’)을 내보냈다. “박근혜 대표가 고해와 참회의 의식으로 취임 첫날 사찰에서의 108배, 성당에서의 고해 성사, 교회에서는 참회 예배를 갖기까지 한나라당은 참으로 먼 길을 돌아서 왔다. 2002년 12월 대선 패배 이후 1년3개월이 걸렸다. (중략) 그렇다. 변화란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중략) 총선일까지는 꼭 2주 남은 셈이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그러나 충분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그래도 다행스러울 정도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시사IN 조남진 이호진 <부산일보> 노조위원장이 박근혜 의원과 최필립 이사장 등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이 칼럼에 대해 부산 민언련은 ‘충성스러운 선거 참모와 같은 당부와 총선 후 재보선의 활용방안까지 안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호진 위원장은 2004년 이런 일을 겪은 만큼 지난해 하반기부터 이런 보도가 재발할까봐 위기의식이 커졌다고 말한다. “본인이 직접 대선 후보로 나서면 (부산일보)에 2004년 총선 때보다 몇 배로 충격이 올 수 있다고 보았다.”

2004년 총선의 경험은 ‘사장 선임’을 둘러싼 노사 갈등으로 이어졌다. 정수장학회의 사장 임명에 반발해 2006년과 2009년 노조가 사장실을 점거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회사 측은 ‘민주적 사장선임제’를 위해 노력한다고 했으나 어떤 방법으로 구체화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매번 미루어졌다. 이호진 위원장은 “2005년부터 7년 동안 최필립 이사장을 설득해왔다. 최 이사장은 자기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정수장학회와 (부산일보) 문제는 박근혜 후보가 직접 해결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회사 측은 “당시 노조의 요구를 재단 측에 전달했으나, 재단에서는 노조의 요구가 ‘경영권 침해’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편집국장이 편집권 독립을 주장하면서 8개월 동안 회사 측과 맞서는 상황.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누가 되든 편집국장 처지에서 해야 하는 일이었다. 정수장학회가 순수한 장학회라면 문제는 다르다. 거기에 연관이 있는 박근혜 의원이 특정 정당 후보로 대선에 나선다면, (부산일보)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편집권 독립은 언론사의 생명이다. 각오한 싸움이고,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라고 이정호 국장은 말했다. 

(부산일보)와 정수장학회 문제는 8월 이후에도 계속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는 ‘박근혜의 아킬레스건’ 가운데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부산일보)의 편집권 독립 문제는 유력 대선 후보의 ‘언론관’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크다. 정수장학회가 MBC의 주식 30%를 갖고 있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한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은 “MBC 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70% 소유)와 정수장학회가 파업 사태에 뒷짐을 졌다”라고 비판했다. 주주들이 책임을 못 졌다면서 ‘민영화’도 거론했다. 대선에 앞서 정수장학회와 언론((부산일보), MBC) 문제가 동시에 떠오를 수 있는 양상이다. 

법원 판결·야당 공세, 박근혜에게 부담

법원 판결도 박근혜 후보로서는 부담스럽다. 김지태씨의 유족들은 (부산일보)와 MBC 등 강탈당한 언론사 주식을 돌려달라며 국가와 정수장학회를 상대로 주식반환 청구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지난 2월 서울중앙지법은 ‘강압으로 주식을 증여한 사실은 인정되나 반환청구 시효가 지나 돌려받을 수는 없다’고 판결했다. 법원이 ‘강압’ 부분을 인정한 것은 박근혜 후보로서 부담스러운 대목이다(유족들은 이에 대해 항소를 한 상황이다). 

야당도 공세의 고삐를 당기고 있다. 7월20일 민주통합당은 ‘정수장학회 사회 환원 결의안’을 당론으로 의결했다. 기자 출신인 배재정 의원이 마련한 이 결의안은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부정한 과거사를 바로잡고 나아가 공익법인임에도 특정인에 의한 사유화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정수장학회를 사회에 환원할 것’을 촉구했다.

(부산일보) 안팎으로도 변수가 많다. 이정호 국장이 제기한 ‘대기처분 무효확인’

 본안 소송에 대한 1심 선고가 8월24일로 잡혀 있다. (부산일보) 노조는 파업 찬반 투표를 거쳐 이미 파업을 결의해놓은 상황이다. 

(부산일보) 입구에는 ‘독자가 주인입니다. 최고 신문 부산일보’라고 크게 적혀 있다. 그 아래에서 (부산일보)의 편집국장은 ‘거리의 편집국장’이 되어 앉아 있다. 그리고 1962년의 ‘부일장학회 강탈 사건’은 그로부터 50년 후에 (부산일보) 편집권 독립 문제로 불거져 있다. 현재 (부산일보)의 주인은, 정수장학회다.

차형석 기자 | cha@sisain.co.kr 

2012년 5월 17일 목요일

구 당권파, ‘조중동 프레임’에 매달리면 살 수 있나


이글은 미디어스 2012-05-17일자 기사 '구 당권파, ‘조중동 프레임’에 매달리면 살 수 있나'를 퍼왔습니다.
여러분을 적절하게 비판한 조선·중앙의 칼럼을 소개합니다

▲ 오늘자 조선일보 39면

“조중동이 만들어낸 거죠”, “이미 과거가 된 일을 현재형처럼 만들어내는 것이 조중동 프레임이다.”, “무서운 세상이다. 게시판에 누가 의혹을 던지고 조중동이 실으면 그게 현실이 된다.” 9일자 한겨레 2면 이석기 2번 당선자의 인터뷰에선 ‘조중동’이 세 번이나 언급된다. 각각 그가 당권파의 실세라는 주장, 종북주의라는 비판, 운영했던 CNP 그룹이 당권파의 자금줄이라는 주장에 대한 해명이다. 오늘 아침 YTN 김갑수의 출발 새아침에선 훨씬 더 심했다. 조중동이 만들어낸 걸 일부 진보언론이 받은 것이 문제고, 자신을 비판한 자당의 이청호 부산 금정구 의원도 조중동의 보도를 통해서만 봤다고 말할 정도였다. 마치 '조중동'이란 단어를 쓰지 않으면 말을 이어갈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이 해명들 중 일부는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부정경선 사태 전체가 '조중동의 소설' 안에만 존재한단 말을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이젠 참여정부 시절 전가의 보도처럼 '조중동 프레임'이란 말을 쓰던 노무현 지지자들조차도 통합진보당 구 당권파 지지자들이 이 단어를 쓰면 “대체 이 맥락에서 그게 왜 튀어나오냐”며 ‘멘붕’한다.
통진당 경선 부정 문제는 ‘조중동의 소설’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소리’를 제외한 남한의 모든 언론에서 철저하게 비판받은 문제다. 따라서 “너희들이 ‘조중동 프레임’에 놀아나고 있다”는 구 당권파 일각의 주장은 거론될 가치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생각해보자. 과연 이 문제에 관한 조중동의 칼럼엔 받아들일만한 부분이 없을까?
물론 조중동의 보도기조는 진보언론들에 비해서 볼 때 구 당권파를 친북세력으로 몰고, 그들이 장악한 통진당과 연대를 하는 민주당의 정권교체에 친북의 굴레를 뒤집어 씌우려는 의도가 보였다. 그러나 그런 의도와는 또 별개로, 조중동의 통진당에 대한 비판에도 들을 구석은 있다. 조중동이 이석기 등의 과거가 어땠는지만 가지고 물고 늘어진다면 ‘색깔론’이란 비판도 가능하겠으나, 이석기 등 통진당 인사들의 현재 생각까지 묻는다면 얘기가 또 다르다.
‘북한 3대세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북한 핵무기 개발이나 미사일 발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는 질문에 그들이 보편적 정의와 대중적 상식에 현저히 벗어나는 대답을 하거나 침묵한다면, 그 사실 자체가 언론이 시민들에게 마땅히 전해야 하는 정보가 되기 때문이다. 이석기나 김재연이 끝내 사퇴하지 않는다면 조중동은 그야말로 통진당을 야당세력을 대선 기간 내내 ‘조질 수 있는’ 꽃놀이패로 받아들이고 환호할 것이다. 이 상황도 사실상 그들이 자초한 것이지 무슨 논리나 윤리로 조중동의 행동이 잘못 되었다고 성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일반론을 넘어,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칼럼에는 진보진영에 대한 훌륭한 고언이나 통진당 구 당권파를 대하는 한국 사회의 바람직한 태도에 관한 성찰이 보이는 것들이 있다(동아일보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이석기나 김재연이 후안무치한 모리배 혹은 종교적 광신자라도 한미 FTA를 합당한 논거로 비판할 수 있는 것처럼,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에게도 물론 그와 같은 일이 가능하다. 악마의 신문 조중동은 읽지 않을 통진당 구 당권파를 위해 기자가 손수 몇 개를 뽑아왔으니 밑줄 쳐가며 읽었으면 좋겠다.   
먼저 오늘자 조선일보에 실린 정우상 논설위원의 칼럼이 있다. 라는 칼럼이 있다. 제목부터 가슴을 후벼판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자. (링크) 
당시 민노당 정책실에는 폐쇄적이지 않고 '진보의 현대화'를 고민했던 독종(毒種)들이 많았다. 이들은 '닥치고 반미(反美)' '닥치고 후보 단일화' 같은 이야기를 하면 코웃음을 쳤다. 이들이 만든 정책이 대형마트 규제, 상가 및 주택 임대차 보호법, 복지확대를 위한 조세개혁,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 같은 것들이었다. 대형마트 규제는 8년 뒤에 빛을 봤고, 조세개혁과 복지는 지금 정치권의 가장 큰 쟁점이다. 이들은 '자본주의 극복'을 이상으로 삼았지만 아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내놨다. 법과 제도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 상담하고 그 결과를 정책으로 만들었다.
(...) 지금은 통합진보당이 진보의 대표 행세를 하고 있지만, 진보정당이 현재의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기반을 닦았던 많은 사람들은 진보당과 손을 잡지 않았다. 진보신당에 남은 김종철 부대표에게 주사파들과의 재결합을 거부했던 이유를 물었더니 대답은 "진보정당 오래하고 싶다"는 거였다. 정권교체라는 이유만으로 북한 추종 노선을 묻어두고, 복지문제에는 관심도 없는 세력과 연합하면 진보정당은 곧 사라질 것이란 설명이었다. 그는 이번 총선에서 5% 득표율로 낙선했다. 뭐 하러 그 고생을 하며 진보정당을 하는지 물었더니 김종철은 "아직 불쌍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답했다.
한국에서 진보의 시작은 주체사상이 아니다. 숨 막히는 골방에서 여공들과 함께 눈물 흘리며 "불쌍한 평화시장 어린 동심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던 전태일이다. 진보는 다시 '전태일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당권이니, 야권연대니, '닥치고 뭐니' 하는 권력다툼은 그다음 일이다. 비정규직, 독거 노인, 다문화 가정, 그리고 폭압체제에서 헐벗고 있는 2400만 북한 주민들의 삶에서 다시 진보의 길을 찾아야 한다. 진보가 건강해야 이에 자극받은 보수도 혁신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구구절절하게 옳은 조언이다. 물론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만시지탄이다.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이 당시 민주노동당에 대해 이 정도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면, 민주노동당의 역사는 달라졌을 수 있다. 그들은 “진보가 건강해야 이에 자극받은 보수도 혁신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란 정론을 알았으나, 보수가 혁신하는 것보단 보수가 집권하는 것을 더 중시했기에, ‘건강한 진보’를 키워내는 것을 거부했다. 그 결과 그들은 정말로 자신들이 원하는, 친북이 진보를 참칭하는 세상에 살게 되었다고 비아냥대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얘기는 보수언론이 그렇게 했더라도 진보진영에서 자정능력이 있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기에 ‘제 얼굴에 침뱉기’기도 하다.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진보의 처지를 동정하는 세상이 서글프기만 하다.
다음으로 소개할 글은 16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권석천 논설위원의 라는 칼럼이다. 정파지들의 현실에 대한 비판과 자기반성이 눈에 띈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자. (링크)
팩트는 가차 없다.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환부는 곪을 대로 곪게 된다. 파이시티 사건과 통합진보당 사태엔 워치독(watch dog·감시견) 역할을 충실히 하지 못한 언론의 책임도 있다. 이런 상황은 지난 4년간 언론이 진영 논리의 포로가 됐다는 비판을 받아온 것과 무관치 않은 것 같다. (...) 정치세력들은 “좌파에 도움을 주려는 거냐” “보수의 프레임에 넘어가면 안 된다”며 그런 상황을 즐겼다. 시간이 흐르자 다른 매체에 뭐가 나와도 “그건 우리가 쓸 게 아닌데…” 하고 넘겨버렸다. 대신 스마트폰 세상에서 유명 인사들의 트윗을 실어 나르는 데 바빴다. (...) 제도권 언론이 보고 싶은 사실에 안주하는 동안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 ‘나는 꼼수다(나꼼수)’ 같은 유사 언론이었다. 

▲ 16일자 중앙일보 34면

이것이 과연 우리가 중앙일보에서만 보아야 할 글일까? 가령 한겨레 논설위원 중 하나라도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한겨레는 떳떳한가? 이제야 통진당이 진보세력과 나라를 망칠 것처럼 이런 저런 진보언론 지면에 글을 쓰는 진보지식인들은 정말로 떳떳한가? 기자의 생각으론 그런 것 같지 않다.
하나 더 살펴보자. 이번에 소개할 글은 15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이철호 논설위원의 이란 칼럼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칼럼 만큼은 구 당권파들이 반드시 읽었으면 좋겠다. 그들은 그들 사상에 대한 관용과 햇볕정책을 참 좋아하지 않던가? (링크)
진보진영 인사에 따르면 경기동부가 공식회의를 짓밟은 비밀은 따로 있다. 가장 예민한 뇌관이 ‘당원 명부’와 총무실이라고 한다. 그들은 당원 명부가 공안 당국에 넘어가면 끔찍한 탄압이 기다린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회계·재정을 주무르는 총무실을 넘기는 것도 악몽이다. 지난 8년간 유령당원, 당비 대납, 광고 몰아주기 등의 온갖 불법이 드러날 수 있다. 자칫 양심범이 아니라 횡령·배임의 파렴치범으로 몰리는 게 두려운 것이다.
이제 경기동부는 주홍글씨가 됐다. 그렇다고 공안 당국의 수사가 능사(能事)는 아니다. 한 번쯤 주사파의 과거를 되짚어 보았으면 한다. 1986년 옛 안전기획부는 구국학생연맹(구학련)의 서울대 법대생 김영환·하영옥·박○○군 등을 체포했다. 김영환은 “내가 강철서신을 썼다”고 자백했지만, 안기부는 “믿을 수 없다”며 끔찍한 고문을 가했다고 한다. 김씨는 “그때의 기억이 골수 주사파가 된 원형질”이라 고백했다. 이후 대학가의 지하서클 수준이던 구학련은 반제청년동맹→민족민주혁명당의 지하당까지 치달았다. (...)
경기동부도 햇살에 노출되자 단박에 거덜이 났다. 민주노총마저 등을 돌릴 분위기다. 하지만 더 이상 순교자를 만들 게 아니다. 당국의 칼날이 어른거리는 순간 ‘공안탄압’의 물타기와 단합의 빌미가 될지 모른다. 오히려 출당(黜黨)이든 봉합이든 진보진영에 온전히 맡겼으면 한다. 이미 국민들은 어느 쪽이 옳은지 충분히 판단하고 있다. 박 변호사의 변신이 증거하듯 나는 우리 사회의 상식과 건강함을 믿는 쪽이다. 

▲ 15일자 중앙일보 34면

체제와 국가보안법의 탄압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그들의 정당성의 근거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그들 인생의 험난한 경로와는 별도로, 그들은 탄압을 받음으로서 이렇게 남한 사회의 모든 언론에 등장하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진보진영 일각에서나 했던 얘기들을 이제는 보수언론 칼럼니스트가 하고 있다. 공안당국의 탄압이 사라진 세상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 구 당권파가 한 번 더 고민해 봤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칼럼은 16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오병상 수석논설위원의 이라는 칼럼이다. 당권파들의 행동의 근거가 되는 저 유명한 ‘군자산의 약속’이란 문건을 살피면서 그들의 정치적 행동의 원인을 추론해 보는 글이다. (링크) 이 역시 진보진영에서도 나오던 분석이다. 칼럼은 이렇게 끝난다.
10년의 노력 끝에 목표달성을 눈앞에 두고 부정·폭력사태가 터졌다. 무엇보다 정당정치를 수단으로 간주하는 태도가 화근이었다. 통일이라는 지고지순의 목표 앞에서 정당정치의 민주적 절차 따위는 무시됐다. 민주적 정당정치를 부정하면서 제도권 정치참여에 뛰어든다는 생각부터 모순이었다. NL끼리 덮고 감추어 온 모순이 PD와 국민참여당 세력들에 의해 온 세상에 공개됐다. 그간의 성공은 스스로를 감춘 덕분이었다. 언젠가 드러날 모순이었다. 그나마 대통령 선거 이전에 드러나 다행이다.

▲ 16일자 중앙일보 35면

구 당권파여, 당신들은 이 사람의 분석과 결론에 무슨 반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여전히 할 수 있는 말은 ‘조중동 프레임’이란 말 뿐인가? 진보진영에서 먼저 나오던 말을 중앙일보가 가져다 써도 ‘조중동 프레임’이라면, 대체 그것의 실체는 뭔가?
기자는 제목에서 이 글의 수신자를 구 당권파로 잡았고 다른 독자들에겐 여흥거리를 주는 척 했다. 하지만 사실은 기자가 상정했던 수신자는 그들을 넘어 본인이 진보개혁 세력에 속한다고 믿는 시민들 전체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상대방의 주장을 ‘조중동 프레임’이란 논거(?)로 무시하는 건 한국의 진보개혁 세력이 스스로의 부족한 정당성을 채우는 주요한 핑계 논리 중의 하나였다. 조중동에 의해 비판받으면  무슨 일을 했던 진보개혁 진영을 사수하는 투사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통진당 일부 구 당권파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조중동 프레임’이란 핑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때에, 정도의 차이는 있다지만 그간 우리 진보진영이  ‘조중동 프레임’을 우리의 허물을 감추기 위한 핑계로 남용한 경우는 없었는지 성찰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윤형 기자  |  ahriman@mediaus.co.kr

2011년 12월 17일 토요일

채널A? <동아일보>는 1975년에 죽었다!


이글은 프레시안 2011-12-16일자 사설 '채널A? 는 1975년에 죽었다!'를 퍼왔습니다.
[프레시안 books] 김삼웅의

이태 전쯤 인터넷을 뒤지다가 간부가 쓴 묘한 칼럼을 발견했다. 이른바 '87년 체제'를 낳은 1987년 6월 항쟁 때 동아일보가 한 대단한(?) 역할을 강조하면서 그때 태어나지도 않은 가 무슨 할 말 있느냐고 힐난하는 투의 글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무슨 망발이냐고 블로그에 몇 자 썼더니 댓글들이 붙었는데, 그 중에 기가 막힌 게 있었다.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1987년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을 "목숨을 걸고 맨 처음 보도한" 사람이 동아일보 아무개 기자였다며, 를 "악질적 옐로페이퍼"로 몰더니 이런 댓글을 하나 더 달았다.

"한마디만 더 하지요. 유신 시대에 동아투위, 조선투위가 얼마나 처절하게 유신정권에 저항했는지 한번 찾아보세요!"

이 득의양양 용감무쌍한 '논객'은 동아투위(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조선투위(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가 그 신문사 재직 기자들 조직이고, 그들이 속한 그 신문들이 피눈물 나게 싸운 덕에 저 역사적 6월 항쟁이 일어날 수 있었다고 믿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따위가 어디 감히! 뭐 그런 식이었는데, 칼럼을 쓴 간부의 의식 수준이 설마 동아투위, 조선투위가 그 신문사들 전위 조직쯤 되는 걸로 여긴 그 '논객'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그 양자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기도 했다.

그 1987년 여름 전두환 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휩쓸고 지나간 뒤 열리기 시작한 좁다란 자유의 공간을 비집고 노동자들의 대투쟁이 시작됐다. 그때 창원 공단에 그걸 취재하겠다고 카메라를 들고 갔던 나는 혼쭐이 났다. 지게차를 끌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현장 노동자들이 삽시에 나를 에워싸였다. 그들은 험악한 소리를 내지르며 카메라를 빼앗더니 그대로 바닥에 패대기쳤다. 박살난 카메라를 아까워하기는커녕 미처 뭐라 항변할 새도 없이 그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내 멱살을 잡았다. 그 긴박했던 순간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지만, 단말마의 비명과 외침이 오가는 우여곡절 끝에 어쨌든 간신히, 무사히 풀려났다.

그때 그들이 외친 구호가 놀랍게도 "기자들 다 죽여라!"였다. 설마 살인을 저질러도 좋다는 얘긴 아니었겠지만, 그만큼 언론사와 기자들에 대한 노동자들의 분노는 지금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격했다. (어쩌면 속으로 타고 있을 뿐,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때 그런 시위 현장에서 기자들은 기자가 아닌 양 행세해야 했다. 그런 판에 떡 하니 카메라를 들고 나가 겁 없이 여기저기 겨누며 셔터를 눌러댔으니.

그 시기를 직접 겪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당시 기자들은 그들에겐 거의 공적, 공공의 적이었다. 칼럼을 쓴 간부가 완전히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그때 그나마 한두 줄짜리 시국 관련 기사들을 흘리고, 아주 완곡하게 에둘러가긴 했지만 그래도 그 서슬 퍼런 체제에 싫은 소리를 하는 지사풍의 용감한 칼럼니스트들 글을 가끔이나마 내보낼 수 있었던 매체는 가 거의 유일했다. 그 정도는 분명 평가할 수 있다. 살벌했던 당시 상황에서 행보다는 행간을 읽어야 했던 일부 사람들에게 는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기자들 다 죽여라!"는 시위 군중의 구호가 상징하듯, 그때 한국 주류 언론은 사실상 완전히 죽어 있었다. 도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얼음 밑에서도 살아 움직이던 양심적인 기자들이 아주 없진 않았고 당연히 그들은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겠지만, 칼럼을 쓴 그 간부처럼 가 그렇게 으스댈 만한 역할을 한 건 전혀 아니었다고 해도 좋다.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옳지.

1975년 3월 15일 당시 편집국장 송건호가 사표를 냈다.

"한 둘도 아니고 수십 명을 내 이름으로 해임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양심상 도저히 그 자리에 그냥 눌러 있을 수가 없었다. 50여 명을 내 이름으로 해임한다는 것은 죽으면 죽었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도 사랑하는 처자가 있고 설혹 방법상 다소 이견이 있더라도 언론의 독립과 자유라는 어느 시대에 내놓아도 떳떳한 명분을 가지고 투쟁하는 그들을 해임할 수는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번 파동도 나를 위해 생긴 일이 아니었던가."


▲ <송건호 평전 : 시대가 투사로 만든 언론 선비>(김삼웅 지음, 책보세 펴냄). ⓒ책보세
그 전 해인 1973년 10월 23일 서울대학교 농업대학 학생 김상진이 유신 철폐를 주장하며 자결했다. 격렬한 교내 시위가 벌어졌지만 신문과 방송은 침묵했다. 그때 유일하게 1단짜리 기사로나마 그 소식을 전한 것이 였고, 그렇게 하도록 지시한 사람이 편집국장 송건호였다.

보이지 않는 행간을 읽어야 의미를 제대로 짐작할 수 있는 그 짤막한 기사가 나간 날 낯선 세 명의 기관원들이 들이닥쳐 송건호를 연행했다. 그렇게 연행될 줄 알고 그는 미리 속옷을 두툼하게 차려 입고 있었다.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한 번 가면 열다섯 시간은 족히 걸리는, "언제 끌려가도 기분 나쁜" 그 연행, 그가 "나를 위해 생긴 일"이라고 했던 그 "파동"을 낳은 연행이 그렇게 시작됐다.

기자들이 농성을 시작했고 다음날인 10월 24일 등의 기자 180여 명이 박정희의 유신 독재 이후 미동도 하지 않던, 나중에 폭로된 '보도 지침'에 압축된 끔찍한 언론 통제 체제에 대한 선전 포고인 '자유 언론 실천 선언'을 발표했다.

"신문·잡지·방송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하고, 기관원의 출입을 엄격히 거부하며, 언론인의 불법 연행을 일체 거부하고, 동료 기자가 연행되면 풀려날 때까지 퇴근하지 않기로 결의한다."

기자들의 자유 언론 수호 운동은 1973년 가을부터 시작됐으나 1974년 1월 초법적인 대통령 긴급 조치 선포로 움츠러들었다. 기자들은 무시로 연행됐고 구속당했으며 잘렸다. 당시 독재 정권은 일본 서울 지국까지 폐쇄하고 특파원을 추방했으며 국내 수입·배포도 금지했다. 방위병이 변심한 애인 집에 가서 불을 질러 집이 좀 타다 만 사건을 짤막하게 내보냈다고 와 편집국장들을 비롯한 10여 명이 끌려갔다.

신문사에 상주하며 기사 내용과 형식까지 통제하던 기관원들은 그들을 붙잡아다 놓고 "군과 민간을 이간질시켰다"며 '빨갱이'로 몰았다. 서울 달동네 연탄 값이 아랫마을보다 세 배나 더 비싸다는 기사를 쓴 기자는 상을 받는 대신 "민중 봉기를 획책했다"는 이유로 끌려가 죽도록 맞았다. 대학생 김상진이 할복 자결을 결심한 시절의 세상 꼴이 그랬다. 신문·방송 뉴스의 내용과 크기를 결정한 건 그들 기관원이었다.

기자들과 거의 동시에 기자들 150여 명도 자유 언론 실천 선언을 발표했다. 긴장한 정권은 신문사 사주를 압박해 수십 명의 기자들을 해고하고 윽박지르는 공작을 벌이다가 그게 먹혀들지 않자 직접 칼을 빼들었다. 1974년 12월 10일부터 시작된  광고 해약 사태가 그것이다. 다음해 1월 25일까지 광고의 98퍼센트가 떨어져 나갔다. 에 광고를 계속 실었다가는 기업이 망할 판국이니 광고주들도 어쩔 수 없었다.

1974년 12월 26일부터 광고 지면이 활자가 완전히 빠져버린 채 하얗게 나간, 언론 역사상 특기할 만한 백지 광고 사태가 시작되자 그 빈자리를 시민들이 자발적 개인 광고로 메우기 시작했다. 1975년 5월까지 하루 평균 350건, 모두 5만 건에 이르는 개인 광고들이 광고 지면을 장식했다. 봉기에 가까운 시민 저항이었다.

이 뜻하지 않은 사태 전개에 당황한 권력은 마침내 사주를 압박해 기자들을 무더기로 몰아냈다. 160여 명의 기자들, 30여 명의 기자들이 그때 쫓겨났다. 죽었으면 죽었지 그 쫓아내는 역할을 내 손으론 못하겠다며 스스로 자신을 자른 사람이 바로 송건호였다.

한국 언론사, 아니 한국사를 바꾼 그 사건으로 는 그때 다시 죽었다. 식민 지배자들이 폭발을 막기 위해 내준 '바람구멍'이었던 , 는 1930년대 일제에 완전히 투항하면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민족주의적 색깔마저 버렸다. 1931년 일제의 만주 침략과 함께 그들은 그때 죽었고, 광복 뒤 미국 점령군 치하 친일파 대변지를 자임하면서 거듭 죽었으며, 1975년 그때 또 죽었다. 그 이후, 는 살아났나?

저 용감무쌍한 '논객'이 얘기한 동아투위, 조선투위는 , 기자들이 제대로 된 보도를 쟁취하기 위해, "처절하게 유신 정권에 저항"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 아니라 유신에 철저하게 복무한 유신 기관지 , 와 싸우다 쫓겨난 기자들이 그 신문사들을 상대로 싸우기 위해 만든 조직이라는 사실조차 그 논객은 몰랐던 것이다.

그 자신 그 엄혹했던 시절의 투사요 기록자였던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책보세 펴냄)는 그 시절을, 송건호의 일대기를 매개로 일목요연하고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한다.

쫓겨난, 아니 자신을 쫓아낸 송건호는 당신께서도 거듭 자인했거니와 결코 타고난 투사가 아니었다. 통상적 의미의 대범과 호방도 그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를 진짜 투사로 단련시킨 건, 예컨대 이런 가혹한 현실이었다.

"아이들 여섯을 데리고 어떻게 사나? 다음 달은 어떻게 사나? 아니 내년엔 어떻게 될까? 온갖 잡념이 거의 24시간 쉴 새 없이 나를 괴롭혔다. 불안과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1976년이 되고 다시 77년이 되면서 처음 매일같이 집요하게 못살게 굴던 공포가 사나흘에 한 번씩 찾아오는 것이었다. 사나흘간은 전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별 탈 없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불안 공포가 찾아왔다. 이럴 때는 거의 미칠 것 같았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어쩌자고 이렇게 멍하니 있기만 하는가, 수입도 없고 하는 일도 없이 어떻게, 이런 일 저런 일을 생각하면 거의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런 세월은, 나이 쉰에 직장에서 쫓겨난 바로 그 다음날부터 줄곧 이어졌다. 다음해 12월 세상을 떠난 어머니 임종도 하지 못했다. 노모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여섯 자녀를 거느리고도 돈 한 푼 못 버는 자식의 앞날을 걱정하며 눈을 감았다"는 얘기를 "원고 집필에 바빠" 그는 전해 들어야만 했다. 편집국장 직을 쫓겨나자마자 생계를 감시와 억압 속에 이런 집필과 강연으로 꾸려야 했던 간난의 세월은 송건호를 좌절시킨 게 아니라 뛰어난 한국 현대사 연구자로 만들었고 그를 불퇴전의 재야 운동가로 단련시켰다.

저 1987년 6월 항쟁 직후 창원 공단에 카메라를 들고 간 것은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가 펴낸 비합법 지하 매체 기자로서의 현장 취재 때문이었다. 여기저기서 고함소리와 함께 다짜고짜 달려들어 내 멱살을 쥐었던 사람들에게 나는 거듭 외쳤다. "난 지 기자요!" 다행히 그들 중에 을 아는 사람들이 있었고 약간의 설명 끝에 나는 풀려났다. 비싼 것도 아니었지만 카메라가 박살난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맞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

1985년 5월에 창간호를 낸 그 을 만든 사람들이 동아투위, 조선투위 사람들이었고 송건호가 그 중심에 있었다. 1984년에 만들어진 민언협 기관지 이야말로 그 시절 다른 어떤 매체보다 언론 본연의 자세에 충실했던 언론 매체다. 을 특집호로 제작해 만천하에 그 존재를 드러내고,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협의해 세상에 공표한 것도 민언협과 이었다. 그나마 가 1단짜리로 가끔 실었던, 군사 정권이 보도 절대 엄금 지침을 내렸던 숱한 사건들과 그들의 구미에 맞지 않았던 세상 변화를 당시 가장 충실하게 보도한, 유일한 매체가 이었다.

비밀 장소에서 편집하고 식자 찍어 대장을 만들고 비밀리에 인쇄해 비밀리에 배포해야 했다. 들키면 모든 걸 압수당했고, 압수를 피해도 배포된 뒤 예외 없이 사무총장 등이 1주일 이상의 구류를 살아야 했던 은 전국적 배포망을 지닌 나름 인기 높은 매체였다. 송건호가 대표하는 민언협 멤버들과 민주화 운동 세력의 소식지 이 '87년 체제' 창출에 수행한 역할을 뒷날 역사 연구자들은 결코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6월 항쟁 당시의 전국 상황을 기자들을 현지에 파견해 가장 먼저 종합 정리한 매체도 이었고, '6월 항쟁'이란 말 자체를 '6월 항쟁 특집호' 제목으로 뽑아 그 시대의 상징어로 만들고 정착시킨 것도 이었고 민언협이었다. 그때 우리는 1946년 대구를 뒤흔들었던 10월 항쟁을 생각했다. 이 합법 매체로 기자들이 제 이름들을 밝히는 기명 기사를 쓰기 시작한 건 87년 체제 이후의 일이다.

그러니까, 이태 전 동아일보가 6월 항쟁에서 한 역할을 자랑하며 당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가 한 게 뭐냐고 묻던 그 간부의 칼럼은 의도적인 것이든 무지에서 비롯됐든 잘못된 것이다. 6월 항쟁 주역이 민언협 멤버도 그 한 축을 이뤘던 시민 운동 세력, 민주화 운동 세력이었다면 6월 항쟁의 정신을 고취하고 87년 체제를 만들어내는데 는 기념비적인 공을 세웠다.

왜냐하면 야말로 바로 와 가 쫓아낸 해직 기자들이 중심이 돼 만든 민언협과 의 모태로 태어난 것이며, 87년 체제의 가장 의미 있는 성과물 중의 하나가 국민주 형태로 모금해 주주가 6만 명이 넘는 의 탄생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서 지금도 그 평가에 걸맞게 잘 하고 있느냐는 핀잔과 비판을 받기도 하는 에 대한 평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은 그때의 그 세계를 송건호 자신의 얘기와 증언들을 인용해 압축적으로 요약하면서 김삼웅 사관에 입각해서 평가한다.

그 용맹무쌍한 '논객'이 얘기한 1987년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을 "목숨을 걸고 맨 처음 보도한" 아무개 기자를 1998년 도쿄에서 만났다. 그리고 2년쯤 뒤 그는 급성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훌륭한 기자였고 품성도 좋은 사람이었다. 그때가 이른바 'IMF 사태'로 불린 외환 위기 시절이었는데, 도쿄 특파원들은 갑자기 치솟은 원화 환율 때문에 실질 소득이 줄어 고생들을 했다. 도쿄 생활 비용은 차차 환율에 맞춰 조정이 되긴 했지만, 각사는 특파원 수를 줄이거나 아예 철수시키기도 했다.

의 그 기자는 그때 갑자기 불어난 일의 무게에 눌려 무척 힘들어 했다. 더 많은 술을 마셔야 하는 일을 덤으로 더 해야 했다. 1999년 연말연시든가 등산을 갔다가 통증을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그는 그게 계속되자 병원을 찾아갔다. 병원의 일본인 의사는 당장 수술을 받든지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든지 하라고 재촉했다. 서둘러 귀국하던 그와 그의 가족을 그의 집에서 동료 특파원들이 함께 모여 송별회 같은 걸 한 게 마지막이었다.

그 뒤 유족이 그의 산업재해 인정 여부를 놓고 회사와 소송을 벌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도 회사는 산재 인정을 거부하고 있었다. 에는 그런 좋은 기자들이 많았지만, 160여 명의 기자들을 한꺼번에 쫓아낸 그 회사가 그 뒤에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줬는지는 잘 모르겠다.

김삼웅이 인용한, 김대중 내란 음모죄라는 날조 사건에 영문도 모른 채 연루돼 잡혀 들어간 뒤 당한 지독한 고문 후유증이 분명한 파킨슨씨병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던 시절의 송건호 생애 마지막 저서 (1990년) 서문에 이런 구절이 있다.

"민족은 분열되어 서로 증오하고 국토도 분단되어 내 땅이면서도 마음대로 오가지도 못하고, 오늘은 여기에 붙었다가 내일은 저기에 붙고 외세에 아부하고 친해야만 '애국자' 소리를 듣는, 거꾸로 된 이 세상 더러운 시대에 왜 생을 얻어 이 고생인가 싶다. 내 죄와 고민은 하늘만이 심판할 수 있다."

김삼웅이 "모든 진정한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고 한 이탈리아 역사철학자 베네데토 크로체의 말, 그리고 "역사는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고 가장 현실적인 의미에서 현재에 관한 학문"이라는 스페인 생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말을 인용한 건 바로 송건호 한국 현대사 연구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 바로 그가 때론 남루하게, 절박하게, 눈물을 흘리고 피를 토하며 살아간 그때 한국이라는 나라의 '현재'였기 때문이다.

12호에 실린 '현대사 연구의 이모저모'(1992년)에서 송건호는 말한다.

"평생을 바친 언론계를 떠나 감시 속에서 괴로운 생활을 하다 보니 인생을 이것저것 생각하게 되고 점차 현대사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나는 괴로운 나날을 보내면서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 양심을 지키고 항일 운동을 한 애국선열들이 어떤 생활과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가를 알고 싶었다. 이리하여 나는 점차 현대사 연구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나는 당시 많은 자녀를 데리고 학비를 마련해야 할 경제적 곤궁과 권력의 감시 속에서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현실의 고통과 위기야말로 송건호 현대사 연구의 출발점이었고, 그 현실의 실천적 필요성, 절박성에 쫓긴 현재의 눈으로 한국 근현대를 재해석한 것이 그의 한국 현대사 연구였다. 모든 과거의 역사는 현재의 필요와 절박이라는 실천적 욕구를 통해 걸러지고, 재해석되고, 재구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모두, 예외 없이 현대사다. 달리 말하면, 그런 현재의 실천적 문제의식 없는 역사연구는 제대로 된 연구가 아니거나 의미 없는 헛짓이다.

송건호가 자신의 고통과 절박과 문제의식을 만들어낸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극히 실천적인 필요에 따라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들어가 파헤친 한국 근현대 역사의 진실은 식민 지배와 친일파, 일제를 대신한 미국의 한반도 분단과 친일파 기용을 통한 식민 잔재 재생산, 반공을 방패로 살아남은 친일파와 그들이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분단 모순, 민족 모순으로 요약할 수 있다.

개인적 야망과 '현실의 길'을 택한 기회주의적 국민주의자 이승만, 그 개인보다는 공공과 역사의 길을 택한 민족주의자 김구 등 그의 집요한 인물 탐구도 결국 송건호 자신이 그런 현실에서 어떤 좌표를 설정하고 살아갈 것인지 끊임없이 자문한 실존적 고뇌와 연결돼 있다. 그는 김원봉과 의열단 연구까지 나아갔다. 일제-이승만-박정희 등등으로 이어진 한국 근현대사에서 그가 택할 길은 자명했다. 그는 역사의 길을 택했고 죽는 날까지 흐트러짐이 없었다.

십중팔구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연구자의 존재 자체를 위태롭게 만들 이 위험한 주제를 한국의 역사 연구자들은 거의 다루지 않았다. 그들은 고대, 중세, 전근대라는 안전지대로 도피했다. 그 공백을 식민사관과 그 변주인 뉴라이트 사관이 차지했다. 한국 현대사 연구자 송건호의 또 다른 위대성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 터부를 과감하게 깨뜨렸다는 것이다. 등에 담긴 그의 생각은 청년들과 역사 연구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김삼웅 버전의 송건호 평전은 그의 이런 측면을 잘 드러낸다.

저 용맹무쌍 '논객'이 송건호와 이런 역사를 알았을 리 없다.

광복 65년이 넘도록 주류 국민주의 현실론자들이 신문 시장의 75퍼센트를 장악하고, 방송까지 합하면 90퍼센트 이상의 여론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현실에서 주류가 터부시하고 위험시하고 심지어 탄압까지 하는 그런 위험한 역사를 모르는 게 당연할 것이다. 일제에서 미국, 분단으로 이어진 시대를 통틀어 여전히 군림하고 있는 그런 주류가 재해석하고 재구성한 세계에서 줄곧 살아왔으니까.

이건 바꿔 말하면, 송건호가 온몸으로 저항하며 찾아 헤맨 저 시대의 과제, 문제의식이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펄펄 살아 있다는 얘기가 된다. 게다가 저들은 종합 편성 채널이라는 터무니없는 장치까지 만들어 기득권을 다지는 한편 반복 선전을 통해 특권유지의 기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단속하고 있다.

드라마 의 본원 정기준처럼. 송건호는, 말하자면, "역병처럼 번져가리라" 세종이 예언했던 한글처럼, 기득권의 역사를 뒤엎을 씨앗을 뿌렸다. 그것이 역병처럼,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기를 선지자 송건호도 바랐을까.



/한승동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