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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14일 일요일

철학과 원칙에서 제도와 대안까지


이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06-15일 제45호 기사 '철학과 원칙에서 제도와 대안까지'를 퍼왔습니다.
Corée | 6월항쟁 25주년 특집 | 개헌을 말한다

<그가 사라졌다 시리즈>, 2004-카르멘 칼보

오늘날 한국 사회의 전체 성격을 관통하는 핵심 중의 핵심 문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산업화·도시화·정보화·사회간접자본·정보기술(IT)·자동차·철강·전자를 포함해 이미 '세계 선두 수준'에 도달한 기술과 경제발전에도 불구하고 자살률, 출산율, 정부의 공적 지출, 형평, 복지, 남녀 임금 격차, 비정규직 비중, 자영업 비중 등 인간적 문제들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 수준'이라는 점이다. '인간 조건'의 급속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간 실존'은 너무 불안하고 불공정한 현실인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인간 조건의 급속한 발전'과 '인간 실존의 급격한 악화'가 공존하는 변종 공동체, 괴물 공화국을 만든 것일까?
둘째, 지속적인 민주주의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이념적·사회경제적 갈등은 점점 심화되고, 갈등의 제도화를 통한 갈등 해결 수준 역시 매우 낮다는 점이다. 민주화가 진전됐음에도 갈등은 왜 줄어들지 않고, 기존 국가제도들은 갈등을 수렴·해결하는 데 실패하는가? 민주주의의 발전은 갈등의 제도화를 통해 개인 삶의 평안성과 전체 사회의 안정성이 증대되는 것을 의미하나, 한국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한국 사회의 빛과 그늘, 밝음과 어둠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 상반되는 현실 모습은, 인간적인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우리 모두의 발본적인 지혜를 기다리고 있다. 과연 무엇이 문제였는가? 문제를 사실적 객관성과 실현 가능성의 범주로 좁혀볼 때 우리는 우선 제도 요인에 착목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사회에서 반복되는 현상들은, 인간적 요인을 제외할 경우 거의 전부 제도 요인에서 발원하기 때문이다. 특히 임기를 갖는 특정 지도자나 정부를 넘어 지속되는 현상들은 대개 제도에서 산생된다고 봐도 틀림없다.
제도는 어원 그대로 인간 개개인을 일정한 틀 속에 집어넣어 성품의 차이와 능력의 고하가 초래할지 모를 편차와 오류의 범위를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를 말한다. 인간들이 반복되는 동일 문제에 직면했을 때 제도 개혁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를 통해 예측 가능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인류의 발전이 제도 변화에서 초래된 연유는 이로부터 비롯된다.
모두(冒頭)의 두 가지 극적인 상반 현상들은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 현실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인물 요인, 정책 요인과 함께 거기에는 명백히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 경로와 제도 요인이 존재한다. 즉, 이런 현상은 다섯 번에 걸친 민주정부 및 대통령들 개별 차원을 넘는 요소와 관성의 산물임이 명백하다. 제도 문제의 중심에는 정부 형태, 공직 구성 방법, 경제체제를 포함하는 헌법 요인이 존재한다. 이때 말하는 헌법 요인은 한 사회를 근거짓는 헌법철학, 헌정제도, 헌정 절차와 헌법 개혁 사안을 모두 포함한다. 무엇보다 먼저 민주화 이후 모든 대통령들은 헌법 개혁에 합의했거나 헌법 개혁을 직접 제안했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대통령은 모두 헌법 개혁을 약속하거나 제안한 바 있다. 국정을 담당한 모든 대통령이 헌법 개혁을 약속·제안·추진했다는 점은 헌법 개혁이 특정 정부나 개인의 정략을 넘는 본질적인 문제임을 보여준다. 국가 운영의 기본 틀로서 현행 헌법이 지닌 문제가 분명하다. 즉, 헌법 개혁 문제는 한두 대통령과 정부에 한정된 사안이 아니었다.

현행 대통령제는 대통령 무책임제

둘째는 현행 6월항쟁 헌법이 초래하는 대통령 무책임제와 정당 무책임제의 문제다. 정책 무책임제와 정부 실패로 직결되는 이 점은 근대민주주의 원리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현행 헌법은 정부를 담당한 대통령과 정당에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구조이다. 현행 헌법하의 현임 대통령들은 전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탈당해 정치적 책임을 물을 수 없게 한다. 민주국가에서 유례없는 반민주적 통치 유형인 무정당 통치를 반복하는 대통령 무책임제이다. 게다가 대통령을 배출한 모든 정당은 집권 시기 내에 전부 소멸했다. 민주정의당(노태우), 민주자유당(김영삼), 새정치국민회의(김대중), 새천년민주당(노무현), 한나라당(이명박)이 모두 같은 운명이었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선거 당시' 정당의 '임기 중의' 예외 없는 소멸은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인 정당정치와 책임정치를 근저부터 차단한다. 정당 책임을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 부정으로서 정당 무책임제가 현행 헌법체제인 것이다. 또한 모든 대통령은 재임 중 '제왕'에서 '식물'로 그 위상이 급변한다는 점도 동일했다.
셋째는 '민주헌법'인 현행 헌법 제정 시점의 문제가 존재한다. 1987년 6월항쟁 헌법을 제정할 때 '민주헌법' 쟁취 운동을 주도한 시민들의 참여는 철저히 배제됐다. 운동 국면(독재 타도)과 제도 국면(헌법 개혁)의 완전한 분리였다. 더욱 큰 문제는 '대통령 직선'을 제외하면 당시 시민사회와 야당의 의견은 헌법 구조에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의 헌법 협상을 정밀 분석하면 '직선제'를 제외하면 다른 부문에서는 전두환·노태우 세력의 요구가 관철됐다. '3김'과 전두환·노태우의 단기적인 정치적 이해 교환의 산물로 등장한 현행 헌법은, 대통령 직선을 제외하면 거의 '전두환 헌법'이라고 할 정도로 집권 군부의 의도가 반영됐다. 이는 현행 민주헌법을 개혁해야 할 중대 사유로서, 헌법개혁운동은 사실 제2의 민주화운동 성격을 갖는다.
넷째는 현행 6월항쟁 헌법의 핵심 정신과 구조는 여전히 '박정희 헌법'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세 가지 측면에서 그러하다. △우선 박정희는 유신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건국 이래 유지돼오던 국가 근간으로서 '민주주의' 규정을 왜곡된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로 축소했다. 독재정부를 수립하면서 거꾸로 자유민주주의 요소를 삽입하고는 이를 국시로 주장해왔다. 현행 헌법에도 지속되고 있는 이 조항은 건국정신과 건국헌법의 부정이자 유린이었다. △박정희는 국가경제의 근본 원칙을 역전시켰다. 1948년 건국헌법 이래 경제원칙은 5·16 쿠데타 헌법과는 정반대였다. 건국헌법 제84조는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이다. 이것이 1962년 5·16 쿠데타 헌법에서는 다음과 같이 역전됐고, 이는 현재에도 거의 그대로다. 제111조 제1항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제2항 "국가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시키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하여 필요한 범위 안에서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한다". 현재의 경제민주화 조항들은, 재벌들의 요구처럼 완화돼야 하는 것이 아니라, 건국헌법과 정신으로 돌아가 더욱 강화돼야 한다. △5·16 쿠데타 헌법은 의회민주주의의 중심인 의회 규모를 대폭 축소해- 5대 국회 291명, 6대 국회 175명. 즉, 인구 10만 명당 의원 1명에서 20만 명당 1명으로 축소- 대통령 권력을 강화함으로써 의회민주주의의 결정적인 약화를 초래했다. 우리나라 건국 시기와 현재의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의 의회 절반 규모에 불과한, 박정희 시기의 급격한 의회 규모 축소로 인한 '대통령 권력 강화-의회 권력 약화' 구도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 사회의 다양한 갈등을 제도로 수렴·반영·해결하려면 의회 규모를 대폭 확대할 필요가 있다.

현행 헌법은 '박정희 헌법'

근본 원칙과 구조에서 현행 6월항쟁 헌법이 여전히 '박정희-전두환 헌법체제'라고 할 때, 민주화된 한국 사회가 25년 동안이나 근본적 문제제기 없이 이를 지속해온 점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이제 한국 사회의 질적 발전과 온전한 민주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박정희-전두환 헌법을 넘어 헌법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중요한 몇몇 헌법 개혁의 원칙과 방향을 고민해보자.
첫째는 권리장전으로서의 헌법을 지향한다. 이제 대한민국 헌법은 단순히 국민을 넘어 영토 내 모든 인간이 사람으로서 존엄과 권리를 누리는 권리장전이 돼야 한다.
둘째는 생명·생태 헌법을 추구한다. 인간 조건의 급속한 발전이 인간 실존과 인간 본질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재앙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생명·생태 가치와 병행하는 체제를 지향해야 한다.
셋째는 평화헌법, 통일을 준비하는 헌법이 되어야 한다. 1987년 헌법을 제정할 때는 여전히 냉전시대였기에 냉전 해체와 남북관계 발전, 북한의 쇠락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다. 이제 급속한 환경 변화에 맞춰 평화·영토·통일 조항에 대한 전향적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다.
넷째는 복지국가와 사회국가를 지향해야 한다. 박정희 시기에 실종된 국가경제 체제의 근본 원칙인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복원해 공정하고 정의로운 복지국가, 형평국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섯째는 자치헌법·자율헌법이 되도록 한다. 과도한 중앙집중의 폐해를 넘기 위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권능을 재배분해 명실공히 분권국가가 되도록 노력한다.

국가 구성의 원칙과 방법의 전면적 혁신 요구

특히 강조하고 싶은 점은 국가 구성의 원칙과 방법의 전면적 혁신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폴리비오스, 마키아벨리, 매디슨, 그리고 막스 베버에 이르기까지 지혜로운 정치사상들은 이상적인 국가 형태로서 혼합정체를 제시해왔다. 이제 한국 사회는 숱한 문제를 야기하는 현재의 대의민주주의 국가체제를 뛰어넘어,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크게 강화한 바람직한 혼합정체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국가-대표-시민 사이의 새로운 3권분립이다. 또는 국가(권력)-화폐(시장)-시민(사회) 사이의 3권분립이라고 해도 좋다. 시민권력의 대폭 확대를 통해, 공동체 전체가 시장이나 국가에 의해 지배되는 현재의 상황을 극복하고 3자 균형을 달성해야 한다.
둘째는 중앙과 지방 사이의 확고한 권력분립이다. 지방은 중앙의 하위 요소가 아니라, 지방의 연합으로서 중앙권력이 존재한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즉, 지방의 자치와 자율이 국가권력 구성과 일상 민주주의의 근본 원칙이 돼야 한다.
셋째는 확고한 수평적 중앙권력의 분립이다. 필자는 이 문제에 관해 오랫동안 3권분립을 넘는 4권분립을 주장해왔다. 즉 입법부·행정부·사법부에 더해 감독부를 독립 설치해, 국가권력의 획기적 분립 및 견제와 균형을 추구한다. 감독부에는 감사·검찰·공정거래(시장감독)·금융감독·선거관리처럼 국가기구와 공동체에 대한 감독과 관리 기능을 하는 부서들을 배치해 대통령 및 행정부로부터 독립시킬 필요가 있다. 이 기관들을 분리하면 이들에 대한 임면과 통제를 통해 제왕적 권력을 행사하던 대통령 권력은 크게 약화돼 자연스레 분권정부가 될 것이다. 물론 분권정부 수립에는 의회의 획기적인 확대 역시 필수적이다.
넷째는 정부-시민의 이중 거버넌스의 구축이다. 즉 입법부·감독부·행정부·사법부 외곽에 각각 반(半)시민조직·공공조직으로서 시민의회, 시민감독위원(시민공정위원·시민검찰위원), 시민호민관, 시민(국민)배심원을 병렬 배치해 정부조직에 공공-시민 이중 거버넌스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예컨대 의회의 경우 국회 내 결정이 일정한 비율 이하로 통과된 사안에 대해서는 시민의회의 재의에 부치는 방안이 있다. 법원 판결에서의 국민배심제와 유사한 시민조직을 주요 국가 거버넌스에 전부 병렬 배치해 시민의 참여를 제고하고, 국가·대표·시민 사이의 간극을 최대한 좁힌다.
다섯째는 선거 주기의 문제로서 2개의 순환주기를 설정해 '대통령 무책임제'와 '정당 무책임제'를 극복한다. 이를테면 대통령, 국회의원(지역대표와 비례대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주기를 일치시켜 대통령 임기 4년 동안, 예컨대 대통령 중임제로 할 경우 대통령과 지역대표 의원 선거를 제1조합으로, 비례대표·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제2조합으로 삼아 2년마다 선거를 실시해 확고한 책임정부를 구현하도록 한다.

일부 공직의 추첨제 도입 필요

끝으로, 국가 공직 구성의 방법 자체를 혁명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의 정부 공직 구성의 원리는 '선거'와 '임명' 두 가지였다. 그러나 이젠 전면 혁신이 필요하다. 근대 선거가 등장하기 이전 고전 고대와 중세 도시공화국 시기에는 오랫동안 '추첨'이 더 민주적이고 평등한 정부 구성의 원리였다. 따라서 대법원장, 검찰총장, 각급 법원장 및 지검장, 감사원장, 공정위원장, 금융감독원장을 포함해 사법부와 감독부의 주요 직위는 자격을 갖춘 일정한 인재풀에서 단계별로 전부 추첨제를 통해 선임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대통령 권력을 크게 약화시킴은 물론, 권력집중·부정부패·금권유착·인사비리·줄서기의 각종 폐해를 낳은 구조적 문제점을 거의 해결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현재 우리의 지혜를 기다리는 많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 헌법 개혁은 결코 만병통치약일 수 없다. 그러나 드러난 문제에도 불구하고 제도 개혁을 미루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다. 문제가 크고 반복적일수록 근본을 혁신해야 한다. 헌법 개혁이야말로 근본적 개혁의 요체 중의 요체일 것이다. 헌법 개혁을 필두로 한 제도 혁신을 통해 한국 사회가 더 바람직한 인간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게 지혜를 모으자. 그리하여 인간 조건의 개선이 인간 실존의 안녕과 평안으로 연결되는 이상적인 대한민국을 건설하자.

글•박명림 연세대대학원 지역학협동과정 교수. 고려대 정치학 박사. 미국 하버드대학 하버드-옌칭연구소 협동연구학자 역임.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2).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다음 국가를 말하다) (역사와 지식과 사회) 등의 저서가 있다. 

2012년 6월 24일 일요일

철학과 원칙에서 제도와 대안까지


이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06-12일자 기사 '철학과 원칙에서 제도와 대안까지'를 퍼왔습니다.
Corée | 6월항쟁 25주년 특집 | 개헌을 말한다

 <그가 사라졌다 시리즈>, 2004-카르멘 칼보

오늘날 한국 사회의 전체 성격을 관통하는 핵심 중의 핵심 문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산업화·도시화·정보화·사회간접자본·정보기술(IT)·자동차·철강·전자를 포함해 이미 '세계 선두 수준'에 도달한 기술과 경제발전에도 불구하고 자살률, 출산율, 정부의 공적 지출, 형평, 복지, 남녀 임금 격차, 비정규직 비중, 자영업 비중 등 인간적 문제들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 수준'이라는 점이다. '인간 조건'의 급속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간 실존'은 너무 불안하고 불공정한 현실인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인간 조건의 급속한 발전'과 '인간 실존의 급격한 악화'가 공존하는 변종 공동체, 괴물 공화국을 만든 것일까?
둘째, 지속적인 민주주의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이념적·사회경제적 갈등은 점점 심화되고, 갈등의 제도화를 통한 갈등 해결 수준 역시 매우 낮다는 점이다. 민주화가 진전됐음에도 갈등은 왜 줄어들지 않고, 기존 국가제도들은 갈등을 수렴·해결하는 데 실패하는가? 민주주의의 발전은 갈등의 제도화를 통해 개인 삶의 평안성과 전체 사회의 안정성이 증대되는 것을 의미하나, 한국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한국 사회의 빛과 그늘, 밝음과 어둠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 상반되는 현실 모습은, 인간적인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우리 모두의 발본적인 지혜를 기다리고 있다. 과연 무엇이 문제였는가? 문제를 사실적 객관성과 실현 가능성의 범주로 좁혀볼 때 우리는 우선 제도 요인에 착목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사회에서 반복되는 현상들은, 인간적 요인을 제외할 경우 거의 전부 제도 요인에서 발원하기 때문이다. 특히 임기를 갖는 특정 지도자나 정부를 넘어 지속되는 현상들은 대개 제도에서 산생된다고 봐도 틀림없다.
제도는 어원 그대로 인간 개개인을 일정한 틀 속에 집어넣어 성품의 차이와 능력의 고하가 초래할지 모를 편차와 오류의 범위를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를 말한다. 인간들이 반복되는 동일 문제에 직면했을 때 제도 개혁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를 통해 예측 가능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인류의 발전이 제도 변화에서 초래된 연유는 이로부터 비롯된다.
모두(冒頭)의 두 가지 극적인 상반 현상들은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 현실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인물 요인, 정책 요인과 함께 거기에는 명백히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 경로와 제도 요인이 존재한다. 즉, 이런 현상은 다섯 번에 걸친 민주정부 및 대통령들 개별 차원을 넘는 요소와 관성의 산물임이 명백하다. 제도 문제의 중심에는 정부 형태, 공직 구성 방법, 경제체제를 포함하는 헌법 요인이 존재한다. 이때 말하는 헌법 요인은 한 사회를 근거짓는 헌법철학, 헌정제도, 헌정 절차와 헌법 개혁 사안을 모두 포함한다. 무엇보다 먼저 민주화 이후 모든 대통령들은 헌법 개혁에 합의했거나 헌법 개혁을 직접 제안했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대통령은 모두 헌법 개혁을 약속하거나 제안한 바 있다. 국정을 담당한 모든 대통령이 헌법 개혁을 약속·제안·추진했다는 점은 헌법 개혁이 특정 정부나 개인의 정략을 넘는 본질적인 문제임을 보여준다. 국가 운영의 기본 틀로서 현행 헌법이 지닌 문제가 분명하다. 즉, 헌법 개혁 문제는 한두 대통령과 정부에 한정된 사안이 아니었다.

현행 대통령제는 대통령 무책임제

둘째는 현행 6월항쟁 헌법이 초래하는 대통령 무책임제와 정당 무책임제의 문제다. 정책 무책임제와 정부 실패로 직결되는 이 점은 근대민주주의 원리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현행 헌법은 정부를 담당한 대통령과 정당에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구조이다. 현행 헌법하의 현임 대통령들은 전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탈당해 정치적 책임을 물을 수 없게 한다. 민주국가에서 유례없는 반민주적 통치 유형인 무정당 통치를 반복하는 대통령 무책임제이다. 게다가 대통령을 배출한 모든 정당은 집권 시기 내에 전부 소멸했다. 민주정의당(노태우), 민주자유당(김영삼), 새정치국민회의(김대중), 새천년민주당(노무현), 한나라당(이명박)이 모두 같은 운명이었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선거 당시' 정당의 '임기 중의' 예외 없는 소멸은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인 정당정치와 책임정치를 근저부터 차단한다. 정당 책임을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 부정으로서 정당 무책임제가 현행 헌법체제인 것이다. 또한 모든 대통령은 재임 중 '제왕'에서 '식물'로 그 위상이 급변한다는 점도 동일했다.
셋째는 '민주헌법'인 현행 헌법 제정 시점의 문제가 존재한다. 1987년 6월항쟁 헌법을 제정할 때 '민주헌법' 쟁취 운동을 주도한 시민들의 참여는 철저히 배제됐다. 운동 국면(독재 타도)과 제도 국면(헌법 개혁)의 완전한 분리였다. 더욱 큰 문제는 '대통령 직선'을 제외하면 당시 시민사회와 야당의 의견은 헌법 구조에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의 헌법 협상을 정밀 분석하면 '직선제'를 제외하면 다른 부문에서는 전두환·노태우 세력의 요구가 관철됐다. '3김'과 전두환·노태우의 단기적인 정치적 이해 교환의 산물로 등장한 현행 헌법은, 대통령 직선을 제외하면 거의 '전두환 헌법'이라고 할 정도로 집권 군부의 의도가 반영됐다. 이는 현행 민주헌법을 개혁해야 할 중대 사유로서, 헌법개혁운동은 사실 제2의 민주화운동 성격을 갖는다.
넷째는 현행 6월항쟁 헌법의 핵심 정신과 구조는 여전히 '박정희 헌법'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세 가지 측면에서 그러하다. △우선 박정희는 유신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건국 이래 유지돼오던 국가 근간으로서 '민주주의' 규정을 왜곡된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로 축소했다. 독재정부를 수립하면서 거꾸로 자유민주주의 요소를 삽입하고는 이를 국시로 주장해왔다. 현행 헌법에도 지속되고 있는 이 조항은 건국정신과 건국헌법의 부정이자 유린이었다. △박정희는 국가경제의 근본 원칙을 역전시켰다. 1948년 건국헌법 이래 경제원칙은 5·16 쿠데타 헌법과는 정반대였다. 건국헌법 제84조는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이다. 이것이 1962년 5·16 쿠데타 헌법에서는 다음과 같이 역전됐고, 이는 현재에도 거의 그대로다. 제111조 제1항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제2항 "국가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시키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하여 필요한 범위 안에서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한다". 현재의 경제민주화 조항들은, 재벌들의 요구처럼 완화돼야 하는 것이 아니라, 건국헌법과 정신으로 돌아가 더욱 강화돼야 한다. △5·16 쿠데타 헌법은 의회민주주의의 중심인 의회 규모를 대폭 축소해- 5대 국회 291명, 6대 국회 175명. 즉, 인구 10만 명당 의원 1명에서 20만 명당 1명으로 축소- 대통령 권력을 강화함으로써 의회민주주의의 결정적인 약화를 초래했다. 우리나라 건국 시기와 현재의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의 의회 절반 규모에 불과한, 박정희 시기의 급격한 의회 규모 축소로 인한 '대통령 권력 강화-의회 권력 약화' 구도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 사회의 다양한 갈등을 제도로 수렴·반영·해결하려면 의회 규모를 대폭 확대할 필요가 있다.

현행 헌법은 '박정희 헌법'

근본 원칙과 구조에서 현행 6월항쟁 헌법이 여전히 '박정희-전두환 헌법체제'라고 할 때, 민주화된 한국 사회가 25년 동안이나 근본적 문제제기 없이 이를 지속해온 점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이제 한국 사회의 질적 발전과 온전한 민주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박정희-전두환 헌법을 넘어 헌법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중요한 몇몇 헌법 개혁의 원칙과 방향을 고민해보자.
첫째는 권리장전으로서의 헌법을 지향한다. 이제 대한민국 헌법은 단순히 국민을 넘어 영토 내 모든 인간이 사람으로서 존엄과 권리를 누리는 권리장전이 돼야 한다.
둘째는 생명·생태 헌법을 추구한다. 인간 조건의 급속한 발전이 인간 실존과 인간 본질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재앙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생명·생태 가치와 병행하는 체제를 지향해야 한다.
셋째는 평화헌법, 통일을 준비하는 헌법이 되어야 한다. 1987년 헌법을 제정할 때는 여전히 냉전시대였기에 냉전 해체와 남북관계 발전, 북한의 쇠락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다. 이제 급속한 환경 변화에 맞춰 평화·영토·통일 조항에 대한 전향적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다.
넷째는 복지국가와 사회국가를 지향해야 한다. 박정희 시기에 실종된 국가경제 체제의 근본 원칙인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복원해 공정하고 정의로운 복지국가, 형평국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섯째는 자치헌법·자율헌법이 되도록 한다. 과도한 중앙집중의 폐해를 넘기 위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권능을 재배분해 명실공히 분권국가가 되도록 노력한다.

국가 구성의 원칙과 방법의 전면적 혁신 요구

특히 강조하고 싶은 점은 국가 구성의 원칙과 방법의 전면적 혁신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폴리비오스, 마키아벨리, 매디슨, 그리고 막스 베버에 이르기까지 지혜로운 정치사상들은 이상적인 국가 형태로서 혼합정체를 제시해왔다. 이제 한국 사회는 숱한 문제를 야기하는 현재의 대의민주주의 국가체제를 뛰어넘어,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크게 강화한 바람직한 혼합정체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국가-대표-시민 사이의 새로운 3권분립이다. 또는 국가(권력)-화폐(시장)-시민(사회) 사이의 3권분립이라고 해도 좋다. 시민권력의 대폭 확대를 통해, 공동체 전체가 시장이나 국가에 의해 지배되는 현재의 상황을 극복하고 3자 균형을 달성해야 한다.
둘째는 중앙과 지방 사이의 확고한 권력분립이다. 지방은 중앙의 하위 요소가 아니라, 지방의 연합으로서 중앙권력이 존재한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즉, 지방의 자치와 자율이 국가권력 구성과 일상 민주주의의 근본 원칙이 돼야 한다.
셋째는 확고한 수평적 중앙권력의 분립이다. 필자는 이 문제에 관해 오랫동안 3권분립을 넘는 4권분립을 주장해왔다. 즉 입법부·행정부·사법부에 더해 감독부를 독립 설치해, 국가권력의 획기적 분립 및 견제와 균형을 추구한다. 감독부에는 감사·검찰·공정거래(시장감독)·금융감독·선거관리처럼 국가기구와 공동체에 대한 감독과 관리 기능을 하는 부서들을 배치해 대통령 및 행정부로부터 독립시킬 필요가 있다. 이 기관들을 분리하면 이들에 대한 임면과 통제를 통해 제왕적 권력을 행사하던 대통령 권력은 크게 약화돼 자연스레 분권정부가 될 것이다. 물론 분권정부 수립에는 의회의 획기적인 확대 역시 필수적이다.
넷째는 정부-시민의 이중 거버넌스의 구축이다. 즉 입법부·감독부·행정부·사법부 외곽에 각각 반(半)시민조직·공공조직으로서 시민의회, 시민감독위원(시민공정위원·시민검찰위원), 시민호민관, 시민(국민)배심원을 병렬 배치해 정부조직에 공공-시민 이중 거버넌스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예컨대 의회의 경우 국회 내 결정이 일정한 비율 이하로 통과된 사안에 대해서는 시민의회의 재의에 부치는 방안이 있다. 법원 판결에서의 국민배심제와 유사한 시민조직을 주요 국가 거버넌스에 전부 병렬 배치해 시민의 참여를 제고하고, 국가·대표·시민 사이의 간극을 최대한 좁힌다.
다섯째는 선거 주기의 문제로서 2개의 순환주기를 설정해 '대통령 무책임제'와 '정당 무책임제'를 극복한다. 이를테면 대통령, 국회의원(지역대표와 비례대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주기를 일치시켜 대통령 임기 4년 동안, 예컨대 대통령 중임제로 할 경우 대통령과 지역대표 의원 선거를 제1조합으로, 비례대표·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제2조합으로 삼아 2년마다 선거를 실시해 확고한 책임정부를 구현하도록 한다.

일부 공직의 추첨제 도입 필요

끝으로, 국가 공직 구성의 방법 자체를 혁명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의 정부 공직 구성의 원리는 '선거'와 '임명' 두 가지였다. 그러나 이젠 전면 혁신이 필요하다. 근대 선거가 등장하기 이전 고전 고대와 중세 도시공화국 시기에는 오랫동안 '추첨'이 더 민주적이고 평등한 정부 구성의 원리였다. 따라서 대법원장, 검찰총장, 각급 법원장 및 지검장, 감사원장, 공정위원장, 금융감독원장을 포함해 사법부와 감독부의 주요 직위는 자격을 갖춘 일정한 인재풀에서 단계별로 전부 추첨제를 통해 선임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대통령 권력을 크게 약화시킴은 물론, 권력집중·부정부패·금권유착·인사비리·줄서기의 각종 폐해를 낳은 구조적 문제점을 거의 해결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현재 우리의 지혜를 기다리는 많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 헌법 개혁은 결코 만병통치약일 수 없다. 그러나 드러난 문제에도 불구하고 제도 개혁을 미루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다. 문제가 크고 반복적일수록 근본을 혁신해야 한다. 헌법 개혁이야말로 근본적 개혁의 요체 중의 요체일 것이다. 헌법 개혁을 필두로 한 제도 혁신을 통해 한국 사회가 더 바람직한 인간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게 지혜를 모으자. 그리하여 인간 조건의 개선이 인간 실존의 안녕과 평안으로 연결되는 이상적인 대한민국을 건설하자.

글•박명림 연세대대학원 지역학협동과정 교수. 고려대 정치학 박사. 미국 하버드대학 하버드-옌칭연구소 협동연구학자 역임.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2).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다음 국가를 말하다) (역사와 지식과 사회) 등의 저서가 있다. 

2012년 6월 11일 월요일

그날의 함성 12월에 다시... "우리 승리하리라!"


이글은 오마이뉴스 2012-06-10일자 기사 '그날의 함성 12월에 다시... "우리 승리하리라!"'를 퍼왔습니다.
[현장] 6·10 25주년 기념행사 시민 2천여 명 민주화 합창

▲ 6월항쟁 25주년을 맞아 10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610 시민대합창 - 우리 승리하리라'에서 시민들이 '우리 승리하리라' '철망 앞에서' '그날이 오면'을 합창하고 있다. ⓒ 권우성

▲ '610 시민대합창'에 참여한 시민들이 6월 항쟁 25주년을 맞아 10일 오후 서울광장에 마련된 무대를 가득 채우고 합창을 하고 있다. ⓒ 권우성

"우리 승리하리라!"

무대를 가득 채운 합창단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마이크는 몇 대 놓이지 못했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래가 모여 광장을 가득 채우기 부족함이 없었다.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 "녹슨 철조망을 걷어버려요~",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25년 전 "호헌철폐! 독재타도! 전두환 퇴진!"을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인파들이 불렀던 노래, 그리고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불려야 할 노래들이었다.

6월 민주화운동 25주년을 맞이한 10일 오후, 서울광장에 마련된 가로 30미터 길이의 무대에 시민합창단 단원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그날의 노래를 다시 부르기 위해 모인 이들은 본래 계획했던 610명이 채 되지 못했지만 그 웅장함은 어느 공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합창단이 노래를 시작하자 광장에 앉아 있던 시민 2000여 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를 걸고 함께 노래를 불렀다.

이날 시민대합창단은 행사를 주최한 '6월항쟁25주년행사국민추진위원회'에서 모집해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구성됐다. 이들은 지난 5월 말부터 서울시립대 등에 모여 연습했고 400여 명이 이날 무대에 올랐다. 정은숙 성신여대 음대 석좌교수가 단장을 맡고 작곡가 류형선(48)씨가 지휘했다.

"국민의 힘 모아 총체적 난국 헤쳐가야"

호헌은 철폐됐고, 군부 독재는 끝났고, 전두환은 물러났지만 아직도 민주주의는 미완성이다. 언론장악과 민간인 사찰로 대표되는 독재의 그림자가 아직도 살아 있고, 시민을 학살한 독재자는 예비 장교들에게 사열을 받으며 쿠데타를 정당화한다.

이날 오전부터 하루 종일 계속된 행사는 바로 그 미완성의 목표,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 '6월 완성, 99%의 승리'를 주제로 진행됐다. 단순히 '민주화'만이 아닌 노동, 인권, 평화 등 사회 각 분야의 변화를 외치는 목소리가 모두 함께했다.

▲ 6월항쟁 25주년을 맞아 10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6월항쟁 25주년 국민행사'에서 민주통합당 이해찬 대표, 박지원 원내대표, 문재인 상임고문과 통합진보당 강기갑 혁신비대위원장 등 야당정치인과 시민들이 각자 소원을 적은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있다. ⓒ 권우성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한 기념행사에는 이해찬 대표, 손학규 전 대표 비롯한 민주통합당 의원들과 강기갑 통합진보당 비상대책위원장, 심상정 의원 등 야권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또한 시민사회와 학계, 종교계, 문화계를 대표하는 인사들도 함께했다.

이해찬 대표는 기념사에서 "지난 25년을 돌이켜보면 얻은 것은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의원 임기제뿐"이라며 "남북관계는 파탄지경이고 재벌독점은 강화되고 부자 감세로 17~18조 원을 감세해주고, 민생은 파탄이 나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4월 총선에서 실망시켜드린 점을 사과드린다. 반드시 12월엔 정권교체를 하겠다"고 말했다.

강기갑 비대위원장은 "6월 항쟁의 정신이 올바르게 계승되지 못한 이명박 정권 4년의 시간을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며 "다시는 이러한 후퇴가 없도록 제도와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돈을 가진 자들의 손에 자연스럽게 권력이 주어지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며 "권력이 돈을 가진 자들만을 위해 사용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참가자들은 '6월 항쟁 25주년 선언문'에서 "6월 항쟁을 통해 민주화를 이룩했지만 우리의 민주화는 정치적 민주화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며 "민주화 이후 오히려 재벌체제가 더욱 심화되어 경제적 민주화가 실현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군사독재의 산물인 지역대결구조와 남북대결 역시 아직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우리는 민주화의 자부심에 앞서 현실의 암담함과 미래의 암울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며 "다시 한 번 국민들의 힘으로 총체적 난국을 극복하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일에 모두의 지혜를 모아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조국 "박근혜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순간 지는 것"

이어지는 문화공연에서는 파업투쟁 중인 국립오페라합창단과 KBS, MBC노동조합 노래패가 무대에 올랐다. 또 6월 항쟁과 민주주의를 주제로 의 공저자인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와 오연호 대표의 토크가 이어졌다.

▲ 6월항쟁 25주년을 맞아 10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610 시민대합창 - 우리 승리하리라'에서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와 조국 서울대교수가 87년 6월 항쟁과 12월 대선을 앞둔 범진보진영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권우성

조국 교수는 "6월 항쟁의 시작점이 된 박종철 열사의 죽음은 당시 저를 비롯한 젊은이들을 엄청난 부채의식 속에 살게 했다. 그것이 이 자리에 나를 있게 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환점을 마련해야 한다"며 "박근혜 의원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마음을 놓아버리는 순간 이미 진 것이다. 분위기를 뒤집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리해고로 고통 받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을 돕고 있는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와 희망버스를 제안했던 송경동 시인도 무대에 올랐다. 이들은 22명이나 세상을 떠난 쌍용자동차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고 문제해결을 위해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정혜신 박사는 "정리해고를 당한 노동자들의 고통은 돌아가신 22명뿐 아니라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겪고 있는 일"이라며 "우리가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아야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송경동 시인도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문제 해결을 위해 16일 열리는 희망 걷기 대회에 참여해 달라"고 부탁했다.

▲ 6월항쟁 25주년을 맞아 10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610 시민대합창 - 우리 승리하리라'에서 정혜신 박사와 송경동 시인이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사태 등 벼랑끝으로 내몰려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권우성
▲ 6월항쟁 25주년을 맞아 10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610 시민대합창 - 우리 승리하리라'에서 투쟁중인 베스킨라빈스 하청노동자들이 노래에 맞춰 손을 흔들고 있다. ⓒ 권우성

"유신 세력 재집권 막아내자"

이에 앞서 오후 2시부터는 21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가 같은 장소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서는 유신 세력의 재집권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주를 이뤘다.

이강실 상임행사위원장은 "지난 100년 동안 우리민중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 고난과 고통, 피와 눈물의 세월 속에서 울어야 했다"며 "열사들과 희생자들의 고결한 결단이 있었기에 투쟁이 항쟁이 되고, 항쟁이 승리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박정희가 박근혜로 부활하면 유신이 부활하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박중기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 명예의장은 "유신 잔당들이 되살아나 70~80년대 야만의 작폐를 다시 획책하는 흉계가 눈앞에 보이는데도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박 의장은 "내 손으로 만든 당이 자정능력을 상실해 외부의 더러운 손길에 능욕을 당하고 있음에도 어찌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이어진 투쟁결의문에서 참가자들은 "지배세력이 아무리 가혹한 탄압과 회유를 통해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 할지라도 우리는 이에 굴종하지 않을 것"이라며 "제도정치권에만 의존하지 말고 전체 민중의 과제를 자신과 조직이 받아 안을 수 있게 한다"고 밝혔다.

▲ 고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회장이 10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6월항쟁 25주년행사 국민추진위 주최로 열린 '21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에서 유가족을 대표해서 인사를 하고 있다. ⓒ 권우성
▲ 10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6월항쟁 25주년행사 국민추진위 주최로 열린 '21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에서 고인들의 가족과 시민들이 헌화를 하고 있다. ⓒ 권우성

행사를 마치고 3시 45분께부터 분향 및 헌화를 시작한 참석자들은 4시부터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대열을 재정비해 민중올레를 시작했다. 태평로 구 삼성본관까지 행진했던 참가자들은 방향을 틀어 광화문 KT 본사까지 행진을 이어나가다 한국프레스센터 근처에서 경찰과 충돌을 빚었다. 이 과정에서 참가자 5명이 연행되고 한국프레스센터 주차장 차단기가 파손됐다.

참가자들은 세종로 서울파이낸스빌딩 앞에서 경찰에 막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KT 규탄 집회를 약식으로 진행했다. KT는 최근 가혹한 인사관리 시스템으로 직장을 잃거나 목숨을 잃는 노동자가 발생해 비판을 받고 있다.

한편, 6월민주화운동 기념행사는 이날 전국 14개 도시에서 동시에 진행됐으며 남은 6월 동안 각종 토론회와 전시 등이 계속될 예정이다.

▲ 고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씨가 10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6월항쟁 25주년행사 국민추진위 주최로 열린 '21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에서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다. ⓒ 권우성
▲ 10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6월항쟁 25주년행사 국민추진위 주최로 열린 '21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에서 아빠 품에 안긴 어린이가 한 영정사진을 가리키고 있다. ⓒ 권우성

미국에서 온 참가자, 마라도에서 판문점까지 걸어간 이유
유정석(41)씨는 미국 시민권자인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 6년 만에 고국을 찾았다. 고국을 방문한 그는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문구가 적힌 노란색 조끼를 입고 마라도에서 판문점까지 국토 종단에 나섰다. 20KG이 넘는 배낭을 들쳐 메고 행사장을 종횡무진 누비던 그를 만났다.

- 강정 마을 반대 조끼를 입은 이유가 궁금하다?
"미국에서 올 때 부터 강정마을에 가는 것이 목표였다. 강정에서 이틀을 묵으며 거기에 있는 분들께 여행 동안 조끼 입고 '위로의 인증샷'을 찍어 보내주기로 했다. 한라산에 올라가서도 찍고,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찍고, 광주 518 묘역에서 찍고, 오늘도 찍었다. 사람들을 만나면 강정 마을 이야기를 한다. 정치적 이야기를 떠나 강정마을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이야기 해주고 있다."

- 도보로 여행을 시작한 이유를 알고싶다.
"미국에 있지만 한국 뉴스를 보면 울컥할 때가 많다. 그런데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마음 만이라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걷는다. 이 땅에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발을 다쳐서 광주에서부터는 걷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 오랜만에 와 본 한국은 어떤가?
"서울은 시멘트에 발라져 버린 것 같다. 그게 이제는 서울 밖으로까지 퍼져 나가는 것 같다. 사람들이 콘크리트에 몰입되어 있는 것 같다. 구럼비도 그런 것 같다. 미국이라면 절대로 마구잡이로 개발하지 못한다."

- 610 시민대합창 행사장은 어떻게 찾아왔나?
"사실 이곳에서 행사가 있는 줄 몰랐다. 지나가다 행사가 열리는 것을 보고 참여하게 되었다. 전북 고창에서도 우연히 전봉준 생가를 발견하고 방문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여행 중 뜻깊은 일들을 자주 만나게 돼서 행운이다."

 최지용 (endofwinter) / 권우성 (kws21) / 정민규 (hello21)

2012년 5월 22일 화요일

박칼린도 못한 일...610명이 합창을?


이글은 오마이뉴스 2012-05-22일자 기사 '박칼린도 못한 일...610명이 합창을?'을 퍼왔습니다.
[인터뷰] 6월 항쟁 기념 합창단 지휘하는 작곡가 류형선씨

'87년 체제를 극복해야 한다.'

지난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달성된 '제도적 민주주의'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명박 정권에 들어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지적이 계속되면서 단순히 '대통령 직선제'가 아닌 민주주의 정신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정치수사적 표현으로 모호하게 사용되기도 하지만, 이후 25년이 지난 지금 새로운 민주주의를 위한 논의가 필요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또 6월이 다가온다. 항쟁 이후 5번의 대통령선거를 치렀고 2번의 정권교체가 있었다. 그리고 올해 다시 대선이 있다. 즉 6월 항쟁 이후 25년 동안 우리는 5번의 민주주의 시험을 봤고 올 연말 그 6번째 시험이 기다리는 것이다. 이번 6월은 지난 시험의 오답들을 정리하고 다가오는 시험을 준비하는 날이 될 것이다.

그 의미를 더 깊이 담기 위해 그날의 현장인 서울 광장도 열린다. 다가올 시험의 결정적인 참고서가 될 박원순 시장이 광장을 열고 시민들이 자리를 채운다. 항쟁 기념일인 6월 10일 오후 6시 서울광장에서 610명의 시민합창단이 무대에서 서는 기념공연 '우리 승리하리라'가 바로 그것이다. '6월항쟁 25주년 행사 국민추진위원회'가 주최하는 이번 행사에서 정은숙 성신여대 음대 석좌교수가 시민합창단 단장을 맡고 작곡가 류형선(48)씨가 지휘를 한다.

지난 18일 오후 서울 강북구 4·19기념탑 인근 식당에서 류씨를 만나 이번 합창공연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눴다. '많은물소리'라는 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그는 지난 6월 항쟁 당시 군복무 중이었고 이후 복학한 대학에서 학생운동에 참여한 '항쟁세대'에 속한다. 이후 국악 바탕의 음악 활동으로 이름을 알렸고 음반프로듀서와 음악감독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서울대학교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이번 공연을 "단순히 한 번의 이벤트가 아니라 6월이면 누구든 떠올리고 참여할 수 있는 행사로 만들고 싶다"며 "610명이라는 규모만 있는 합창이 아니라 예술적으로도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을 주는 무대를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는 25일까지 계속되는 합창단원 모집에 참여를 부탁했다. 기존 합창단에서 단체로 참가할 수 있고 개별 참가자들도 가능하다.(관련내용 자세히 보기)

"이 시대의 모습에 미안함을 가지고 참여한다"

▲ '610 시민의 합창' 모집 포스터 ⓒ 최지용

류씨가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과 담을 쌓아오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어떤 특정한 의미가 강조되는 행사에 적극 나선 적은 많지 않았다. 대개는 음악인 차원에서 이뤄지는 사회참여에 머물러 있었다. 그 스스로도 이번 지휘를 맡은 것을 놓고 자신은 "외딴 섬"이라며 "평소 나 같으면 하겠다고 말하지 않았을 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기독교적이면서 우리 전통과 역사를 향한 감수성으로 채워진 음악들을 하던 그가 이런 행사의 지휘자로 나선 것은 "미안한 마음" 때문이라고 한다. 이명박 정권 이후 벌어진 민주주의 후퇴 상황에 앞선 세대로서 미안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후배 세대인 청년들과 자녀세대에 대한 미안함이기도 하고 민주주의 가치를 지키지 못한, 스스로를 향한 자책이기도 했다.

"지금 시대가 욕망의 대로를 질주하는 시대라고 하지 않나? 민주주의라는 가치가 어떻게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조롱을 받는 시대가 됐는지…. 그런 시대를 내가 멀쩡히 살아가고 있다는, 어떤 빚진 심정이 있었다. 그 빚을 조금이라도 탕감하고 싶은 마음으로 지휘를 하게 되는 거 같다. 많은 사람들이 저와 같은 맥락으로 참여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거점"으로 6월 항쟁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87년 체제의 극복'이라는 말에도 "'약발'이 다 했다는 뜻"이라며 새로운 전환지점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단순히 지난 과거를 기념하는 게 아니라 어떠한 전기를 마련하기 위한 거점으로의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약발이 다 했다는 거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87년 체제 극복이라는 표현에 절대 공감한다. 4·19나 6월 항쟁과 같이 시민이 승리하는 보편적 경험이 그때처럼 전민항쟁으로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는 사람과 사람을 묶는 매체가 너무나 다양화됐기 21세기 네트워킹 방식으로 새로운 승리를 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문제는 그러한 보편적 승리의 경험 이후의 선택이었다. 87년 항쟁 이후 치러진 대선에서 김영삼-김대중 후보 분리 등 여러 요인이 있긴 했지만 다시 한 번 군부독재의 인물이 당선된 것. 그 이후 정권교체를 이뤘지만 또 다시 뒤집어졌고 그 후로 민주주의 후퇴가 일어난 다는 점에서 승리의 경험 이후의 선택은 훨씬 중요하다. 류씨도 이 점을 강조했다.

그는 "아마 그 선택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마지막 선택이 되지 않을까"라며 "승리의 보편적 경험을 함께 만들어내는 주체로 참여하면서 다시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25년 만에 다시 부르는 (그날이 오면)

▲ '610 시민의 합창'을 지휘하게 된 작곡가 류형선씨. ⓒ 류형선

무엇보다 걱정이 되는 건 610명이나 되는 단원을 통솔하는 일이다. KBS 예능프로 (남자의 자격)에서 합창단 프로젝트가 두 차례 방송되며 합창이 주는 매력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다. 개개인이 내는 목소리가 조화를 이루고 그러면서 목소리뿐 아니라 마음도 하나로 맞춰가는 게 합창의 매력이다. 프로그램을 본 사람은 알겠지만 대게 합창단의 인원은 적게는 30명에서 많게는 50~60명가량이다. 어떻게 610명을 지휘할 수 있을까.

"정말 방법을 구상 중이다. 상당히 많은 작전을 짜야 한다. 제일 많은 인원을 지휘해본 것도 130명이다. 그래서 더 욕심이 나고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연습도 충분히 돼야 하고 두 번 예정된 전체 연습도 절대 빠져서는 안 된다. 물론 어려움이 있겠지만 단순히 610명이 노래한다는 기획된 행사로만 끝난다면 이번 일은 아무 의미가 없다. 분명히 예술적인 성과를 남길 것이다."

그에게는 분명 예술가적 욕심이 있어보였다. 610명이라는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그 웅장함이 상당할 텐데, 그런 시각적 효과에만 기대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그는 "그냥 대충 한다면 시민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6월 항쟁이 가지는 가치를 음악에 담아야 하는데, 그런 기획적인 요인만 남기는 건 예술가의 양심불량"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부를 노래들이 다 6월 항쟁 과정에서 그 주역들의 심장에 박혀 있는 노래다. 25년이 지나 지금 다시 불리는 것인데, 역사의 감수성이 담긴 노래들이다. 이 노래의 가치를 지금 시대의 노래들이 수혈받아야 한다. 우리 시대의 음악에는 자극적이고 개별적이고 상업적 소통만 남아 있다. 이 노래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과시해보려고 한다. 또 작곡가로서 이 노래가 어떻게 불려야 사람들의 가슴을 꿰뚫고 갈 수 있는지를 연구하고 그걸 현실로 옮기는 작업을 하려고 한다."

그의 말대로 이번 행사에서는 (그날이 오면) (우리 승리하리라) (철망 앞에서) (동지를 위하여) 등 항쟁 당시 불렸던 노래들이 다시 불려진다. 그는 "이 노래들이 앞으로도 불려야 한다, 지금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은 과거에 대한 회상 정도"라며 "이 가치들이 앞으로도 계속 불리기 위해서는 음악적 완성도가 필요하다, 610명이 만들어 내는 무대가 음악적으로 완성도를 높이고 예술을 담게 되면 그 가치도 지속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역사가 준 선물, 포장만 보고 버릴 것인가"

류씨는 또 이번 합창이 올해 6월 항쟁 기념일에만 불리는 게 아니라 "매년 정례화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프랑스가 시민혁명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문화를 형성한 것처럼, 우리도 6월 항쟁을 통해 민주주의 가치를 정립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6월 항쟁이 중도개혁적인 사람들의 잔치로 특화돼버리면 그 의미를 살려나갈 수 없다. 역사가 우리에게 안겨준 선물을 포장만 보고 버리는 꼴이 된다. 그 안의 내용물이 뭐가 있는지는 봐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시민 모두의 잔치가 돼야 한다. 6월 항쟁과 정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그 의미와 가치를 축소시킬 것이기 때문에 그 외연을 시민들이 확장해줘야 한다. 이 일이 가진 민주주의의 가치들을 가지고 6월 항쟁이 그걸 지키는 거점이 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는 "우리가 지금 욕망의 프레임에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파괴되는 모습을 봐도 그냥 가만히 있게 되는 것"이라며 "시민들이 함께 모인다면, 이 합창이 매년 불리고 자연스러운 문화로 만들어진다면 사회를 보다 나은 모습으로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류씨는 끝으로 "사회적으로 저명한 사람들, 소셜테이너들의 참여가 이뤄지면 좋겠다"며 "대신 연습은 꼭 참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 또 다시 불참했다. 다가오는 이번 6월 항쟁 기념식에도 나타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면 임기 중 단 한 번도 '민주화'라는 역사적 사건을 기리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호언철패, 독재타도'라는 구호로 1987년 항쟁을 기억한다. 그리고 얻어낸 대통령 직선제. 그 선거로 당선된 사람은 지금 그날을 기념할 것을 거부하고 있다. 610명의 목소리가 부를 (그날이 오면)이 다시 기다려지는 이유다.

 최지용 (endofwinter)

2011년 12월 17일 토요일

채널A? <동아일보>는 1975년에 죽었다!


이글은 프레시안 2011-12-16일자 사설 '채널A? 는 1975년에 죽었다!'를 퍼왔습니다.
[프레시안 books] 김삼웅의

이태 전쯤 인터넷을 뒤지다가 간부가 쓴 묘한 칼럼을 발견했다. 이른바 '87년 체제'를 낳은 1987년 6월 항쟁 때 동아일보가 한 대단한(?) 역할을 강조하면서 그때 태어나지도 않은 가 무슨 할 말 있느냐고 힐난하는 투의 글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무슨 망발이냐고 블로그에 몇 자 썼더니 댓글들이 붙었는데, 그 중에 기가 막힌 게 있었다.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1987년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을 "목숨을 걸고 맨 처음 보도한" 사람이 동아일보 아무개 기자였다며, 를 "악질적 옐로페이퍼"로 몰더니 이런 댓글을 하나 더 달았다.

"한마디만 더 하지요. 유신 시대에 동아투위, 조선투위가 얼마나 처절하게 유신정권에 저항했는지 한번 찾아보세요!"

이 득의양양 용감무쌍한 '논객'은 동아투위(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조선투위(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가 그 신문사 재직 기자들 조직이고, 그들이 속한 그 신문들이 피눈물 나게 싸운 덕에 저 역사적 6월 항쟁이 일어날 수 있었다고 믿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따위가 어디 감히! 뭐 그런 식이었는데, 칼럼을 쓴 간부의 의식 수준이 설마 동아투위, 조선투위가 그 신문사들 전위 조직쯤 되는 걸로 여긴 그 '논객'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그 양자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기도 했다.

그 1987년 여름 전두환 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휩쓸고 지나간 뒤 열리기 시작한 좁다란 자유의 공간을 비집고 노동자들의 대투쟁이 시작됐다. 그때 창원 공단에 그걸 취재하겠다고 카메라를 들고 갔던 나는 혼쭐이 났다. 지게차를 끌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현장 노동자들이 삽시에 나를 에워싸였다. 그들은 험악한 소리를 내지르며 카메라를 빼앗더니 그대로 바닥에 패대기쳤다. 박살난 카메라를 아까워하기는커녕 미처 뭐라 항변할 새도 없이 그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내 멱살을 잡았다. 그 긴박했던 순간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지만, 단말마의 비명과 외침이 오가는 우여곡절 끝에 어쨌든 간신히, 무사히 풀려났다.

그때 그들이 외친 구호가 놀랍게도 "기자들 다 죽여라!"였다. 설마 살인을 저질러도 좋다는 얘긴 아니었겠지만, 그만큼 언론사와 기자들에 대한 노동자들의 분노는 지금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격했다. (어쩌면 속으로 타고 있을 뿐,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때 그런 시위 현장에서 기자들은 기자가 아닌 양 행세해야 했다. 그런 판에 떡 하니 카메라를 들고 나가 겁 없이 여기저기 겨누며 셔터를 눌러댔으니.

그 시기를 직접 겪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당시 기자들은 그들에겐 거의 공적, 공공의 적이었다. 칼럼을 쓴 간부가 완전히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그때 그나마 한두 줄짜리 시국 관련 기사들을 흘리고, 아주 완곡하게 에둘러가긴 했지만 그래도 그 서슬 퍼런 체제에 싫은 소리를 하는 지사풍의 용감한 칼럼니스트들 글을 가끔이나마 내보낼 수 있었던 매체는 가 거의 유일했다. 그 정도는 분명 평가할 수 있다. 살벌했던 당시 상황에서 행보다는 행간을 읽어야 했던 일부 사람들에게 는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기자들 다 죽여라!"는 시위 군중의 구호가 상징하듯, 그때 한국 주류 언론은 사실상 완전히 죽어 있었다. 도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얼음 밑에서도 살아 움직이던 양심적인 기자들이 아주 없진 않았고 당연히 그들은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겠지만, 칼럼을 쓴 그 간부처럼 가 그렇게 으스댈 만한 역할을 한 건 전혀 아니었다고 해도 좋다.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옳지.

1975년 3월 15일 당시 편집국장 송건호가 사표를 냈다.

"한 둘도 아니고 수십 명을 내 이름으로 해임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양심상 도저히 그 자리에 그냥 눌러 있을 수가 없었다. 50여 명을 내 이름으로 해임한다는 것은 죽으면 죽었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도 사랑하는 처자가 있고 설혹 방법상 다소 이견이 있더라도 언론의 독립과 자유라는 어느 시대에 내놓아도 떳떳한 명분을 가지고 투쟁하는 그들을 해임할 수는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번 파동도 나를 위해 생긴 일이 아니었던가."


▲ <송건호 평전 : 시대가 투사로 만든 언론 선비>(김삼웅 지음, 책보세 펴냄). ⓒ책보세
그 전 해인 1973년 10월 23일 서울대학교 농업대학 학생 김상진이 유신 철폐를 주장하며 자결했다. 격렬한 교내 시위가 벌어졌지만 신문과 방송은 침묵했다. 그때 유일하게 1단짜리 기사로나마 그 소식을 전한 것이 였고, 그렇게 하도록 지시한 사람이 편집국장 송건호였다.

보이지 않는 행간을 읽어야 의미를 제대로 짐작할 수 있는 그 짤막한 기사가 나간 날 낯선 세 명의 기관원들이 들이닥쳐 송건호를 연행했다. 그렇게 연행될 줄 알고 그는 미리 속옷을 두툼하게 차려 입고 있었다.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한 번 가면 열다섯 시간은 족히 걸리는, "언제 끌려가도 기분 나쁜" 그 연행, 그가 "나를 위해 생긴 일"이라고 했던 그 "파동"을 낳은 연행이 그렇게 시작됐다.

기자들이 농성을 시작했고 다음날인 10월 24일 등의 기자 180여 명이 박정희의 유신 독재 이후 미동도 하지 않던, 나중에 폭로된 '보도 지침'에 압축된 끔찍한 언론 통제 체제에 대한 선전 포고인 '자유 언론 실천 선언'을 발표했다.

"신문·잡지·방송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하고, 기관원의 출입을 엄격히 거부하며, 언론인의 불법 연행을 일체 거부하고, 동료 기자가 연행되면 풀려날 때까지 퇴근하지 않기로 결의한다."

기자들의 자유 언론 수호 운동은 1973년 가을부터 시작됐으나 1974년 1월 초법적인 대통령 긴급 조치 선포로 움츠러들었다. 기자들은 무시로 연행됐고 구속당했으며 잘렸다. 당시 독재 정권은 일본 서울 지국까지 폐쇄하고 특파원을 추방했으며 국내 수입·배포도 금지했다. 방위병이 변심한 애인 집에 가서 불을 질러 집이 좀 타다 만 사건을 짤막하게 내보냈다고 와 편집국장들을 비롯한 10여 명이 끌려갔다.

신문사에 상주하며 기사 내용과 형식까지 통제하던 기관원들은 그들을 붙잡아다 놓고 "군과 민간을 이간질시켰다"며 '빨갱이'로 몰았다. 서울 달동네 연탄 값이 아랫마을보다 세 배나 더 비싸다는 기사를 쓴 기자는 상을 받는 대신 "민중 봉기를 획책했다"는 이유로 끌려가 죽도록 맞았다. 대학생 김상진이 할복 자결을 결심한 시절의 세상 꼴이 그랬다. 신문·방송 뉴스의 내용과 크기를 결정한 건 그들 기관원이었다.

기자들과 거의 동시에 기자들 150여 명도 자유 언론 실천 선언을 발표했다. 긴장한 정권은 신문사 사주를 압박해 수십 명의 기자들을 해고하고 윽박지르는 공작을 벌이다가 그게 먹혀들지 않자 직접 칼을 빼들었다. 1974년 12월 10일부터 시작된  광고 해약 사태가 그것이다. 다음해 1월 25일까지 광고의 98퍼센트가 떨어져 나갔다. 에 광고를 계속 실었다가는 기업이 망할 판국이니 광고주들도 어쩔 수 없었다.

1974년 12월 26일부터 광고 지면이 활자가 완전히 빠져버린 채 하얗게 나간, 언론 역사상 특기할 만한 백지 광고 사태가 시작되자 그 빈자리를 시민들이 자발적 개인 광고로 메우기 시작했다. 1975년 5월까지 하루 평균 350건, 모두 5만 건에 이르는 개인 광고들이 광고 지면을 장식했다. 봉기에 가까운 시민 저항이었다.

이 뜻하지 않은 사태 전개에 당황한 권력은 마침내 사주를 압박해 기자들을 무더기로 몰아냈다. 160여 명의 기자들, 30여 명의 기자들이 그때 쫓겨났다. 죽었으면 죽었지 그 쫓아내는 역할을 내 손으론 못하겠다며 스스로 자신을 자른 사람이 바로 송건호였다.

한국 언론사, 아니 한국사를 바꾼 그 사건으로 는 그때 다시 죽었다. 식민 지배자들이 폭발을 막기 위해 내준 '바람구멍'이었던 , 는 1930년대 일제에 완전히 투항하면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민족주의적 색깔마저 버렸다. 1931년 일제의 만주 침략과 함께 그들은 그때 죽었고, 광복 뒤 미국 점령군 치하 친일파 대변지를 자임하면서 거듭 죽었으며, 1975년 그때 또 죽었다. 그 이후, 는 살아났나?

저 용감무쌍한 '논객'이 얘기한 동아투위, 조선투위는 , 기자들이 제대로 된 보도를 쟁취하기 위해, "처절하게 유신 정권에 저항"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 아니라 유신에 철저하게 복무한 유신 기관지 , 와 싸우다 쫓겨난 기자들이 그 신문사들을 상대로 싸우기 위해 만든 조직이라는 사실조차 그 논객은 몰랐던 것이다.

그 자신 그 엄혹했던 시절의 투사요 기록자였던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책보세 펴냄)는 그 시절을, 송건호의 일대기를 매개로 일목요연하고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한다.

쫓겨난, 아니 자신을 쫓아낸 송건호는 당신께서도 거듭 자인했거니와 결코 타고난 투사가 아니었다. 통상적 의미의 대범과 호방도 그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를 진짜 투사로 단련시킨 건, 예컨대 이런 가혹한 현실이었다.

"아이들 여섯을 데리고 어떻게 사나? 다음 달은 어떻게 사나? 아니 내년엔 어떻게 될까? 온갖 잡념이 거의 24시간 쉴 새 없이 나를 괴롭혔다. 불안과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1976년이 되고 다시 77년이 되면서 처음 매일같이 집요하게 못살게 굴던 공포가 사나흘에 한 번씩 찾아오는 것이었다. 사나흘간은 전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별 탈 없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불안 공포가 찾아왔다. 이럴 때는 거의 미칠 것 같았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어쩌자고 이렇게 멍하니 있기만 하는가, 수입도 없고 하는 일도 없이 어떻게, 이런 일 저런 일을 생각하면 거의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런 세월은, 나이 쉰에 직장에서 쫓겨난 바로 그 다음날부터 줄곧 이어졌다. 다음해 12월 세상을 떠난 어머니 임종도 하지 못했다. 노모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여섯 자녀를 거느리고도 돈 한 푼 못 버는 자식의 앞날을 걱정하며 눈을 감았다"는 얘기를 "원고 집필에 바빠" 그는 전해 들어야만 했다. 편집국장 직을 쫓겨나자마자 생계를 감시와 억압 속에 이런 집필과 강연으로 꾸려야 했던 간난의 세월은 송건호를 좌절시킨 게 아니라 뛰어난 한국 현대사 연구자로 만들었고 그를 불퇴전의 재야 운동가로 단련시켰다.

저 1987년 6월 항쟁 직후 창원 공단에 카메라를 들고 간 것은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가 펴낸 비합법 지하 매체 기자로서의 현장 취재 때문이었다. 여기저기서 고함소리와 함께 다짜고짜 달려들어 내 멱살을 쥐었던 사람들에게 나는 거듭 외쳤다. "난 지 기자요!" 다행히 그들 중에 을 아는 사람들이 있었고 약간의 설명 끝에 나는 풀려났다. 비싼 것도 아니었지만 카메라가 박살난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맞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

1985년 5월에 창간호를 낸 그 을 만든 사람들이 동아투위, 조선투위 사람들이었고 송건호가 그 중심에 있었다. 1984년에 만들어진 민언협 기관지 이야말로 그 시절 다른 어떤 매체보다 언론 본연의 자세에 충실했던 언론 매체다. 을 특집호로 제작해 만천하에 그 존재를 드러내고,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협의해 세상에 공표한 것도 민언협과 이었다. 그나마 가 1단짜리로 가끔 실었던, 군사 정권이 보도 절대 엄금 지침을 내렸던 숱한 사건들과 그들의 구미에 맞지 않았던 세상 변화를 당시 가장 충실하게 보도한, 유일한 매체가 이었다.

비밀 장소에서 편집하고 식자 찍어 대장을 만들고 비밀리에 인쇄해 비밀리에 배포해야 했다. 들키면 모든 걸 압수당했고, 압수를 피해도 배포된 뒤 예외 없이 사무총장 등이 1주일 이상의 구류를 살아야 했던 은 전국적 배포망을 지닌 나름 인기 높은 매체였다. 송건호가 대표하는 민언협 멤버들과 민주화 운동 세력의 소식지 이 '87년 체제' 창출에 수행한 역할을 뒷날 역사 연구자들은 결코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6월 항쟁 당시의 전국 상황을 기자들을 현지에 파견해 가장 먼저 종합 정리한 매체도 이었고, '6월 항쟁'이란 말 자체를 '6월 항쟁 특집호' 제목으로 뽑아 그 시대의 상징어로 만들고 정착시킨 것도 이었고 민언협이었다. 그때 우리는 1946년 대구를 뒤흔들었던 10월 항쟁을 생각했다. 이 합법 매체로 기자들이 제 이름들을 밝히는 기명 기사를 쓰기 시작한 건 87년 체제 이후의 일이다.

그러니까, 이태 전 동아일보가 6월 항쟁에서 한 역할을 자랑하며 당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가 한 게 뭐냐고 묻던 그 간부의 칼럼은 의도적인 것이든 무지에서 비롯됐든 잘못된 것이다. 6월 항쟁 주역이 민언협 멤버도 그 한 축을 이뤘던 시민 운동 세력, 민주화 운동 세력이었다면 6월 항쟁의 정신을 고취하고 87년 체제를 만들어내는데 는 기념비적인 공을 세웠다.

왜냐하면 야말로 바로 와 가 쫓아낸 해직 기자들이 중심이 돼 만든 민언협과 의 모태로 태어난 것이며, 87년 체제의 가장 의미 있는 성과물 중의 하나가 국민주 형태로 모금해 주주가 6만 명이 넘는 의 탄생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서 지금도 그 평가에 걸맞게 잘 하고 있느냐는 핀잔과 비판을 받기도 하는 에 대한 평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은 그때의 그 세계를 송건호 자신의 얘기와 증언들을 인용해 압축적으로 요약하면서 김삼웅 사관에 입각해서 평가한다.

그 용맹무쌍한 '논객'이 얘기한 1987년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을 "목숨을 걸고 맨 처음 보도한" 아무개 기자를 1998년 도쿄에서 만났다. 그리고 2년쯤 뒤 그는 급성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훌륭한 기자였고 품성도 좋은 사람이었다. 그때가 이른바 'IMF 사태'로 불린 외환 위기 시절이었는데, 도쿄 특파원들은 갑자기 치솟은 원화 환율 때문에 실질 소득이 줄어 고생들을 했다. 도쿄 생활 비용은 차차 환율에 맞춰 조정이 되긴 했지만, 각사는 특파원 수를 줄이거나 아예 철수시키기도 했다.

의 그 기자는 그때 갑자기 불어난 일의 무게에 눌려 무척 힘들어 했다. 더 많은 술을 마셔야 하는 일을 덤으로 더 해야 했다. 1999년 연말연시든가 등산을 갔다가 통증을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그는 그게 계속되자 병원을 찾아갔다. 병원의 일본인 의사는 당장 수술을 받든지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든지 하라고 재촉했다. 서둘러 귀국하던 그와 그의 가족을 그의 집에서 동료 특파원들이 함께 모여 송별회 같은 걸 한 게 마지막이었다.

그 뒤 유족이 그의 산업재해 인정 여부를 놓고 회사와 소송을 벌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도 회사는 산재 인정을 거부하고 있었다. 에는 그런 좋은 기자들이 많았지만, 160여 명의 기자들을 한꺼번에 쫓아낸 그 회사가 그 뒤에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줬는지는 잘 모르겠다.

김삼웅이 인용한, 김대중 내란 음모죄라는 날조 사건에 영문도 모른 채 연루돼 잡혀 들어간 뒤 당한 지독한 고문 후유증이 분명한 파킨슨씨병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던 시절의 송건호 생애 마지막 저서 (1990년) 서문에 이런 구절이 있다.

"민족은 분열되어 서로 증오하고 국토도 분단되어 내 땅이면서도 마음대로 오가지도 못하고, 오늘은 여기에 붙었다가 내일은 저기에 붙고 외세에 아부하고 친해야만 '애국자' 소리를 듣는, 거꾸로 된 이 세상 더러운 시대에 왜 생을 얻어 이 고생인가 싶다. 내 죄와 고민은 하늘만이 심판할 수 있다."

김삼웅이 "모든 진정한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고 한 이탈리아 역사철학자 베네데토 크로체의 말, 그리고 "역사는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고 가장 현실적인 의미에서 현재에 관한 학문"이라는 스페인 생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말을 인용한 건 바로 송건호 한국 현대사 연구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 바로 그가 때론 남루하게, 절박하게, 눈물을 흘리고 피를 토하며 살아간 그때 한국이라는 나라의 '현재'였기 때문이다.

12호에 실린 '현대사 연구의 이모저모'(1992년)에서 송건호는 말한다.

"평생을 바친 언론계를 떠나 감시 속에서 괴로운 생활을 하다 보니 인생을 이것저것 생각하게 되고 점차 현대사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나는 괴로운 나날을 보내면서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 양심을 지키고 항일 운동을 한 애국선열들이 어떤 생활과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가를 알고 싶었다. 이리하여 나는 점차 현대사 연구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나는 당시 많은 자녀를 데리고 학비를 마련해야 할 경제적 곤궁과 권력의 감시 속에서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현실의 고통과 위기야말로 송건호 현대사 연구의 출발점이었고, 그 현실의 실천적 필요성, 절박성에 쫓긴 현재의 눈으로 한국 근현대를 재해석한 것이 그의 한국 현대사 연구였다. 모든 과거의 역사는 현재의 필요와 절박이라는 실천적 욕구를 통해 걸러지고, 재해석되고, 재구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모두, 예외 없이 현대사다. 달리 말하면, 그런 현재의 실천적 문제의식 없는 역사연구는 제대로 된 연구가 아니거나 의미 없는 헛짓이다.

송건호가 자신의 고통과 절박과 문제의식을 만들어낸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극히 실천적인 필요에 따라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들어가 파헤친 한국 근현대 역사의 진실은 식민 지배와 친일파, 일제를 대신한 미국의 한반도 분단과 친일파 기용을 통한 식민 잔재 재생산, 반공을 방패로 살아남은 친일파와 그들이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분단 모순, 민족 모순으로 요약할 수 있다.

개인적 야망과 '현실의 길'을 택한 기회주의적 국민주의자 이승만, 그 개인보다는 공공과 역사의 길을 택한 민족주의자 김구 등 그의 집요한 인물 탐구도 결국 송건호 자신이 그런 현실에서 어떤 좌표를 설정하고 살아갈 것인지 끊임없이 자문한 실존적 고뇌와 연결돼 있다. 그는 김원봉과 의열단 연구까지 나아갔다. 일제-이승만-박정희 등등으로 이어진 한국 근현대사에서 그가 택할 길은 자명했다. 그는 역사의 길을 택했고 죽는 날까지 흐트러짐이 없었다.

십중팔구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연구자의 존재 자체를 위태롭게 만들 이 위험한 주제를 한국의 역사 연구자들은 거의 다루지 않았다. 그들은 고대, 중세, 전근대라는 안전지대로 도피했다. 그 공백을 식민사관과 그 변주인 뉴라이트 사관이 차지했다. 한국 현대사 연구자 송건호의 또 다른 위대성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 터부를 과감하게 깨뜨렸다는 것이다. 등에 담긴 그의 생각은 청년들과 역사 연구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김삼웅 버전의 송건호 평전은 그의 이런 측면을 잘 드러낸다.

저 용맹무쌍 '논객'이 송건호와 이런 역사를 알았을 리 없다.

광복 65년이 넘도록 주류 국민주의 현실론자들이 신문 시장의 75퍼센트를 장악하고, 방송까지 합하면 90퍼센트 이상의 여론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현실에서 주류가 터부시하고 위험시하고 심지어 탄압까지 하는 그런 위험한 역사를 모르는 게 당연할 것이다. 일제에서 미국, 분단으로 이어진 시대를 통틀어 여전히 군림하고 있는 그런 주류가 재해석하고 재구성한 세계에서 줄곧 살아왔으니까.

이건 바꿔 말하면, 송건호가 온몸으로 저항하며 찾아 헤맨 저 시대의 과제, 문제의식이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펄펄 살아 있다는 얘기가 된다. 게다가 저들은 종합 편성 채널이라는 터무니없는 장치까지 만들어 기득권을 다지는 한편 반복 선전을 통해 특권유지의 기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단속하고 있다.

드라마 의 본원 정기준처럼. 송건호는, 말하자면, "역병처럼 번져가리라" 세종이 예언했던 한글처럼, 기득권의 역사를 뒤엎을 씨앗을 뿌렸다. 그것이 역병처럼,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기를 선지자 송건호도 바랐을까.



/한승동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