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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6일 월요일

아프니까 장애인이다? 사회가 손상을 장애로 만든다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08-05일자 기사 '아프니까 장애인이다? 사회가 손상을 장애로 만든다'를 퍼왔습니다.
[리뷰]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배제된 일할 수 없는 몸"

대다수 선진국의 ‘장애’ 규정에 준거가 되는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의 국제장애분류기준에 비추어 볼 때 장애에 대한 한국의 법적 정의는 한참 뒤떨어져 있다. 세계보건기구는 장애를 의학적이거나 생물학적 기능장애로 보지 않고, 장애의 사회적 모습을 고려한다(ICF takes into account the social aspects of disability and does not see disability only as a ‘medical’ or ‘biological’ dysfunction.). 세계보건기구는 1997년부터 여러 차례 장애에 대한 정의를 수정하면서 상황적(contextual)·환경적(environmental) 요인을 추가했다.

그러나 는 보건기구의 정의 또한 “주류적 정의”라고 평가하며 “‘의료 모델’에 기초해 있다”고 지적한다. 현재 한국의 장애인복지법은 장애인을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오랫동안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상당한 제약을 받는 자”로 본다. 보건기구의 정의에도 미치지 못할뿐더러 ‘상당한 제약’의 근거로 개인의 ‘신체적·정신적 장애’를 든다.

책을 쓴 김도현은 “‘손상→기능제약→사회적 불리’라는 3단계 도식에서 장애의 본질과 원인은 결국 개인이 몸에 지니는 손상에 있으며, 따라서 장애 문제 역시 이러한 손상을 잘 치료하거나, 치료하다가 안 되면 재활을 통해 소위 잔존 능력을 강화시켜 해결하고자 한다”며 장애에 대한 주류적 정의와 인식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음을 밝힌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에 대한 명칭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추적하면서 정치적 함의를 찾는다. 그에 따르면 1970년대까지 한국에서는 불구자나 폐질자라는 용어가 쓰였다. 폐질은 고질(고칠 수 없는 병)을 뜻하며 고려 때부터 장애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문헌에 등장한다. “이러한 용어법은 장애를 질병과 구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역시 의료적 관점에 굳게 기초해 있지만, 그 의미상 더 이상 치료나 재활을 도모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근대의 장애 개념보다 나은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인다.

1981년 심신장애자복지법이 제정되고 장애라는 표현이 공식화된다. 이 법은 1990년에 장애인복지법으로 개정되고 장애인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김도현은 이를 영어 disability를 번역한 일본어 ‘장해자’를 참고해 옮긴 것이라고 지적한다.

정치권을 비롯해 일부 장애인단체에서는 여전히 ‘장애우’라는 말을 쓴다. 이에 대해 김도현은 “장애인이 자기 자신을 주체적으로 나타내는 1인칭의 표현일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그의 말대로 “나는 장애우입니다”라는 표현은 성립할 수 없다. 이는 “비장애인과의 관계에서 불평등한 권력 관계가 반영돼 있다”고 할 수 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김도현은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의 마서즈 비니어드에서 농인(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은 장애인이 아니라는 얘기를 한다. 왜냐면 섬의 모든 사람들이 영어와 수화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바이링귀스트(bilinguist)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장애를 만드는 사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10대 중 1대만 저상버스인 한국의 대중교통은 나머지 9대를 이용하는 사람들 중 일부에게 ‘장애’를 느끼게 한다. 휠체어 이용 시민은 저상버스에서 장애를 느끼지 않는다. 2011년 기준 전국의 저상버스 도입 비율은 12%고, 서울의 경우 24%다.

텔레비전 시청도 마찬가지. 수화 비율이 10%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농인은 텔레비전 앞에서 장애인이 되고, 드라마 생방송에 화면해설이 거의 나오지 않기 때문에 맹인은 장애인이 된다.

이 같은 사례는 특정한 ‘손상’이 바로 ‘장애’가 되는 경우가 아니다. 사회가 장애를 만드는 경우다. 마치 사고로 깁스를 한 사람에게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데 힘든 것처럼 장애는 손상을 차별하는 사회가 원인이라는 시각이다.

김도현은 ‘장애’가 자본주의의 자본-임금노동 관계에서 생겨난 개념이라며 “일을 할 수 있는 몸(the able bodied)를 선별하기 위해 일을 할 수 없는 몸(the disabled bodies)를 명확히 규정하고자 했다”고 지적한다. 테일러·포드주의 시스템 등 엄격한 노동규율과 표준화된 동작을 요구하는 시스템은 장애인을 노동에서 배제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최저임금법’이다. 한국에서 최저임금법 적용의 예외 대상은 유일하게 ‘정신장애나 신체장애로 근로능력이 현저히 낮은 자’다. 장애인을 노동에서 배제하는 이러한 시각은 북유럽 복지국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김도현은 “스웨덴의 경우에도 장애인은 ‘신체적 결손, 정신적 결손, 사회적 장애(알코올·약물중독, 언어장애가 있는 이민자)로 인해 취업이나 직장유지가 곤란한 자’로 정의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김도현은 장애인을 비정상인으로 보는 비뚤어진 시각이 우생학의 유령을 되살아나게 했다고 지적한다. 그는 황우석 사태를 예로 들며 ‘척수 장애인을 번쩍 일어나 걷게 만들겠다’는 황우석의 발언은 장애인을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다고 덧붙인다. 현재도 모자보건법은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을 근거로 장애여성에 대한 임신중절 수술을 합법적·예외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김도현은 장애인운동의 근본적 과제로 통합이 아닌 변혁을 든다. 그는 “우리의 신체성 자체가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있다”는 1960년대 일본의 급진적 장애인 운동의 구호를 소개하면서 진보적 장애운동이 자본주의 사회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단순히 배제만이 문제라면 장애인들을 현재의 사회에 통합시키면 된다”면서 “그러나 기존의 사회 자체가 장애인의 실존 자체와 충돌한다면 그러한 통합은 새로운 체제, 새로운 문명으로의 전환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김도현 지음/ 메이데이/ 2007년 4월

박장준 기자 | weshe@mediatoday.co.kr 

2012년 6월 10일 일요일

번져가는 유로존 위기 ― 반자본주의 대안을 건설하자 고장 난 자본주의는 고칠 수도 없다


이글은 레프트21 2012-06-11일자 기사 '번져가는 유로존 위기 ― 반자본주의 대안을 건설하자고장 난 자본주의는 고칠 수도 없다'를 퍼왔습니다.

유로존 위기의 파장이 세계경제 전체로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그리스뿐 아니라 스페인도 디폴트를 선언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뱅크런(예금 대량 인출)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우선, 현재 유로존 위기는 2008년 시작한 세계적 대불황의 연속이다. 그때부터 유로존 국가들을 포함한 전 세계 국가들이 부실해진 금융을 살리려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 

 △파업하고 있는 스페인 공공부문 노동자들 ⓒ사진 출처 ccoodegranada2 (플리커)

그래서 위기가 금융위기에서 재정위기로 전화했다. 유로존 국가들은 구멍난 재정을 메우려 긴축 정책을 추진했는데 이 때문에 경제는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었다.
1999년 유로화 도입 이후 정착된 유로존 국가들 사이의 경제 구조도 상황을 악화시켰다. 유로존 ‘중심’ 국가인 독일은 유로존 ‘주변’ 국가들에 대한 수출로 벌어들인 여유 자금을 다시 ‘주변’ 국가들에게 싸게 빌려줬다. 이 돈은 주로 건설ㆍ부동산ㆍ관광업 등에 투자돼 거품이 계속 커졌다.
이런 구조는 경제 위기가 일어나자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남유럽의 ‘주변’ 국가들은 수출을 늘려 빚을 갚기 힘들고, 돈을 더 빌릴 수도 없는 처지가 됐다. 이 과정에서 남유럽에 엄청난 돈을 빌려 준 ‘중심’ 국가들의 은행들도 함께 수렁에 빠져 들었다.
정치 위기
이 상황에서 유럽 지배자들은 어떠한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경제 위기 이후 긴축 정책으로 노동자들의 삶은 점점 더 피폐해졌지만 경제는 오히려 악화됐다.
최근 유로존 위기를 촉발한 것이 그리스 총선 결과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사실 그리스는 지난해 말부터 사실상 국가파산 상태였다.
그런데 그리스 총선 결과로 더는 이전 방식으로 불만을 관리하고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 밝히 드러났다. 2008년 겨울부터 시작된 급진적인 학생들의 투쟁과 2년간 17차례나 진행된 총파업을 통해 급진화된 노동자들은 더는 긴축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러자 그리스가 통제가능하다는 ‘시장의 확신’이 사라졌고 불안이 상황을 압도하게 됐다.
IMF와 OECD 같은 경제기구들은 서둘러 암울한 경제 전망을 내놓았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당장 유럽계 자본이 이탈하면서 주가가 급락했다. 실물부분에서도 유럽 시장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조선ㆍ선박업 등이 영향을 받고 있다. 유럽 시장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중국 경제의 침체가 더 심화하면 한국 경제에 큰 타격을 가할 것이다.
유로존 위기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자본주의는 고장 났고 지배자들이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크루그만 등은 독일이 다른 국가들에 긴축정책을 강요하는 정책을 포기하고 성장으로 돌아서야 한다고 주문한다.
루비니 교수는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와 독자적인 환율정책이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이 모든 방안들은 수렁에 빠진 자본주의를 구하기 위해 더욱더 노동자들을 쥐어짜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기존 지배자들의 정책이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유럽 전역에 극우와 급진좌파로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위기의 근원인 자본주의 자체를 뛰어넘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더없이 중요하다.
그리스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디폴트, 유로존 탈퇴, 은행과 주요 산업의 국유화와 노동자 통제 등을 주장하고 있다.
최근 유럽의 정치양극화를 낳은 가장 큰 배경은 바로 급진적인 청년과 노동자 들의 투쟁이었다. 그리고 이 투쟁들을 통해서만 급진적 대안이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
특히 유로존처럼 긴밀하게 연결된 지역에서 한 국가에서 발생한 노동자 투쟁은 금방 전체 유로존으로 확대될 수 있다. 그리스에서 촉발된 경제 위기가 빠르게 번져갔듯이 말이다.
유로존의 상황은 한국의 노동자와 투사 들에게도 많은 영감과 자신감, 교훈을 주고 있다.

최용찬

2012년 5월 7일 월요일

"그들은 신자유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글은 프레시안 2012-05-07일자 기사 '"그들은 신자유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를 퍼왔습니다.
[한국 경제 성격 논쟁] 장하준·정승일·이종태의 주장에 답한다

- 장하준·정승일·이종태의 주장에 답한다 
"재벌개혁이 낡은 화두?…그들은 쾌도난마하지 못했다"

장하준과 정승일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이하 )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매우 넓다. MB정부 시기는 물론 97년 '외환위기'이후 한국경제, 나아가 근대화 50년 한국자본주의의 굵직한 주제들을 거의 포괄한다. 게다가 2008년 미국 '금융위기'이후 세계경제 현안에 대해서도 중요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 그들은 나라안팎 경제사정을 아울러 어지간히 큰 지식용량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흉내내기 어려운 종합적 작업을 수행했다. 그것만으로 (선택)은 (쾌도난마 한국경제)(이하 (쾌도난마))에 이어 또 다시 '경제 시민'들에게 큰 선물이 된다. 그렇지만 이 글에서는 의외로 모호한 구석이 있는 신자유주의 개념에 대해 장하준, 정승일이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그 개념 위에서 한국경제의 주요 문제 또는 '주요 모순'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리고 그기에 어떤 강점과 약점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나는 (선택)과 (쾌도난마) 전체를 관통하는 그들의 핵심 논지에 대해 검토할 것이다. 그 기본 논지는 (쾌도난마)이래 (선택)에서도 별 변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장하준, 정승일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세 가지 명제

신자유주의라는 말은 널리 쓰이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각인 각색이고 그래서 다소 혼란스럽기도 하다. 통상적으로 이 말은 간단히 탈규제 자유화, 사유화, 부자 감세, 노동시장 유연화, 개방화 등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의외로 딱 집어 정확히 무엇을 신자유주의라고 볼 것인가에 대해서 충분한 이해와 합의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예컨대 신자유주의가 단지 정책만 지칭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의 축적체제(regime) 또는 하나의 자본주의 유형인지, 둘다인지, 그리고 하나의 단일한 신자유주의 형태만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여러 잡종(雜種, hybrid) 신자유주의 형태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지도 분명치 않다. 그런 까닭인지 아예 '신자유주의 타령'은 그만하고 시장근본주의, 또는 시장만능주의라는 말을 써자는 주장까지 있다(김기원). 그러면 장하준 ,정승일의 경우는 어떤가. 그들은 신자유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명제1)- "신자유주의는 저성장주의이며 저성장을 위한 체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금융자본을 위한 자본주의이기 때문입니다. 금융자본이 기업경영의 주도권을 장악한 시스템인 것입니다"((쾌도난마), p.17).즉 그들의 경우, 신자유주의란 곧 금융자본주의, 또는 주주자본주의다. 금융이 몸통이고 실물이 꼬리로 거꾸로 선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인 것이다. 이어서 그들은 신자유주의는 좌파와 우파의 '두가지 버전'이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명제2)- " 좌파 신자유주의라 할 수 있는 미국 민주당의 클린턴이나 영국노동당의 블레어는...금융자본주의 노선을 밀어붙이고 노동시장에 최소한의 보호장치는 존속시키지만 기본적으로 유연화를 지지하고 노동조합이 자본에 밀려 약체가 되는 것을 방관하고 공공 부문 민영화를 지지한 것도 그래서이죠. 그러면서 공정한 시장을 주장하니까 독점은 규제하고요. 그에 비해 이명박 정부같은 원조 신자유주의는 노동시장의 완전한 유연화를 주장합니다. 심지어는 최저임금제에도 반대해요. 또 독점대기업도 용인합니다... 그러니까 이명박 정권은 레이건과 대처정권에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클린턴과 블레어 정권에 비교할 수 있어요((선택), p.22-3).

그런데, 이렇게 신자유주의를 금융자본주의, 주주자본주의라 규정한 다음, 그들은 " 오늘날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의 주체는 재벌이 아니라 세계화된 금융자본이다"라고 말한다( (쾌도난마), p.237). 그들의 이런 생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노동운동의 주적이 세계화된 금융자본"이라는 대목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명제3)- "한국노동운동의 가장 큰 착각중 하나는 반재벌투쟁과 반신자유주의 투쟁이 함께 갈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겁니다. 둘 다 '노동자의 적'이라고 생각하니까 재벌과 신자유주의를 '같은 편'으로 간주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재벌을 타도한다고 노동시장 유연화가 극복되고 신자유주의를 저지할 수 있는 걸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노동시장 유연화는 반재벌투쟁을 통해 극복될 수 없는 문제라는 거죠"( (쾌도난마), p 174).장하준, 정승일에 대한 공감

우리는 장하준, 정승일의 말이 마땅히 진지하게 경청해야 할 대목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자본주의 패권국 미국이 금융주도 신자유주의 길로 돌진해 그 질병을 세계적 규모로 전염시킨 사실, 그리고 마침내 2008년 미국 '금융위기'가 터져 그 위기 또한 세계화되었으며 금융과두제와 양극화에 항의해 '월가 점령'운동까지 전개된 경과를 생각할 때, 그들이 신자유주의를 금융자본의 지배 체제로 파악하고 그 파괴적 효과와 위험에 대해 질타한 것은 시의적절하다 하겠다. 뿐만 아니라 금융 주도 주주자본주의의 위험은 결코 바다 건너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곧 우리 이야기이기도 하다. '뼈속까지 친미적인' 이명박 정부는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이전 김대중 ㆍ노무현 정부도 재벌개혁을 비롯한 구조조정을 통해 한국경제를 미국식의 신자유주의, 주주 자본주의쪽으로 개조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구개발주의를 결정적으로 해체한 한국경제 '97년 체제'의 골격은 김대중 정부 시기 IMF관리체제아래 만들어 졌었다.재벌개혁의 성격은 전면 개방된 금융시장의 힘과 주주가치로 재벌을 규율하는 기조를 가졌었다. 그 결과 재벌체제-민영화된 공기업도-는 현저히 주주가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개편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97년이후 재벌체제는 그 이전과 연속적 측면을 가지면서도, 주주가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질적 변화를 겪었다고 봐야 한다. 97년이전이나 이후나 한국경제는 그저 변함없는 재벌자본주의 또는 총수자본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게 연속성만 봐서는 97년이후, 2008년이후 양극화 축적체제의 전모를 설명하기 어렵다. 나는 이 대목에서는 장하준,정승일의 한국경제 진단과 같이가며 주류 재벌개혁론자와는 갈라진다. 장하준은 다음과 같이 통렬하게 말하고 있다.

"한국의 대기업은 지난 수십년간 국민이 함께 키워온 거예요. 그런 대기업을 재벌개혁이란 명분하에 국내외 자본투자자들이나 재테크 세력에게 내주면 안됩니다. 그런 재벌개혁이라면 과거 재벌 가문사람들 500명 정도만 잘 먹고 잘 살던 걸 기껏 5만이나 50만명의 금융 자산 부자들까지 잘 먹고 잘 살게 만드는 경제민주화로 끝날 수 밖에 없어요. 우리는 그러지 말고 5000만 국민 전체가 골고루 잘 먹고 잘 사는 복지국가를 이룰 수 있는 방향으로 재벌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겁니다"(< 선택>, p.266).나는 장하준의 이 견해에 전폭적으로 동의한다. 나 또한 거의 같은 의미로 다음과 같이 쓴 바가 있다.

"이 자본의 정치적 해방의 시대에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한강의 기적과 세계 속의 한국경제를 일구는 데 가장 무거운 부담을 져 온 근로대중은 고용불안과 생존권 위기 상황에 내몰려 있다. 재벌의 부는 국민의 부(commonwealth)로,근로 대중의 생활향상으로 확산 균점되는 것이 아니라 주로 국제금융자본이 뜯어먹고 있다" (이병천, "반공개발독재와 돌진적 산업화",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 한울, 2007, pp.139-140).

주주자본주의적 개혁으로 인해 지난 날 한국경제의 '집단적 협력자본주의'- 권위주의적이고 불공정 공유형태이긴했지만- 성격은 결정적으로 파괴되었고 지난 수십년간 국민 대중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함께 키워온 재벌의 과실은 재테크 세력, 금융투자자들에게 내어주기에 이르렀다. 반면 노동자와 서민, 그리고 여러 중간 집단들조차 패배자의 처지로 떨어졌다. 그러므로 더 많은 주주 자본주의를 추동하고 심화시키는 재벌개혁에는 반대하며 주주자본주의를 견제해야 한다고 보는 장하준 정승일의 주장에 나는 공감한다. 그런 개혁은 재벌과 금융자본과 유착, 공생하는 과두지배체제를 강화하고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한층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따라서 단지 재벌개혁, 경제민주화가 아니라 '어떤 개혁인가', '어떤 민주화인가'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관련 기사 : 재벌개혁과 한국경제 새판짜기). 금융 자유화와 주주가치를 더 심화시키는 게 아니라, 그것을 억제하고 통제하는 경제민주화여야 한다. 금융 통제와 양극화 해소는 민주적 대안의 길에서 같이 가야 할 두 바퀴 친구가 되어야 한다. 재벌 개혁과 경제 민주화는 금융통제없이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재벌에 면죄부를 주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장하준, 정승일과 나는 어디서 갈라지는가? 위에서 인용한 나의 글에는 다음 문장이 이어지고 있다." 삼성과 같은 슈퍼재벌의 무법 무책임의 횡포가 국가권력의 비호아래 자행되고 있다". 그러나 장하준,정승일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재벌을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재벌 개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 예각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그리고 당연히 대안의 길에서 어떤 재벌개혁인가, 어떤 경제민주화인가 하는 게 문제다. 나는 장하준, 정승일의 논리에서 중대한 문제는 앞서 본 (명제 3)에 있다고 생각한다. (명제3)에서 그들은 신자유주의 축적 체제와 축적 기획의 주체가 금융자본, 무엇보다 월가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화된 금융자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재벌을 한국 신자유주의 지배세력에서 떼어내 버린다. 이제 재벌은 신자유주의 축적체제와 기획의 중심 지배세력이기는 커녕 노동자들과 함께 초국적 금융자본의 공격을 받는 대상으로 설정된다.( 쾌도난마, pp.85-6). 그리고 공정시장을 위한 개혁은 결국 영미식 주주자본주의를 하자는 것이라고 이해된다 (선택, pp.188- 194).

이런 논지에 대해서는 오히려 재벌이 신자유주의를 선도한 세력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장하준은 이렇게 말한다.

"재벌들이 바보같은 짓을 한 거예요. 시장주의(자유주의)를 들여오면 정부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1990년대 중반 자유기업원 등을 만들어 미국 공화당 극우파들의 극단적 개인주의나 수입하고 주주자본주의 이론 들여오고 그랬거든요. 자기 발등을 자기가 찍은 거죠"((쾌도난마), p. 83).그동안 '월가- 미국 재무부-IMF 복합체'(웨이드)의 프로그램과 그 지배 복합체가 해온 짓을 생각한다면, 나는 장하준, 정승일의 주장이 완전히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들 지배 복합체와 그 정책 체계로서 '워싱턴 컨센서스'가 제시하는 탈규제, 경쟁시장, 사적 소유권정립, 대외개방 등은 결국 개발도상국의 발전을 도우는 게 아니라 봉쇄하는 것이었다. 세계를 '평평하게' 하는 작업은 약소국을 강대국에 무장해제 시키는 '사다리 걷어차기'전략이 될 수 있다.그리고 우리의 경우에도 그들 지배 복합체는 재벌 해체 등 미국을 위한 극단적 구상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에서 재벌조직을 옹호하는 게 아니라 주주자본주의론을 주장하면서 장하준을 비판하고 있는 걸 보노라면 ( 송원근 , 강성원 지음, (장하준이 말하지 않은 23가지),북오션, 2011 참조), 재벌들이 바보같은 했다는 장하준의 말이 전혀 틀린 것도 아니다. 재벌 연합체 산하 연구소가 주주자본주의를 주장하면서, 재벌을 옹호해 주는 세계적인 학자 장하준을 비판하다니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재벌이 한국 신자유주의 체제의 지배세력이 아니라니. 한국의 민주화이후 민주주의에서 가장 큰 과실을 얻고 최대의 승리자가 되었다 할 재벌을 반(反)신자유주의 대열의 주체세력으로 올려 세우다니. 그리고 진보적으로 가져와야 할 공정시장을 위한 개혁을 영미식 주주자본주의로 가는 길이라고만 내던지다니. 이 대목에서 나의 생각은 장하준,정승일과 갈라진다. 재벌은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다. 그러나 바보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불쾌하게 생각할 것이다. 재벌산하 연구소가 ( 장하준이 말하지 않은 23가지) 같은 책만 내는 건 아니다. 우리는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발간한 (한국경제 20년의 재조명) (홍순영 장재철 외, 2006) 같은 책도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장하준 정승일과 비슷하게 주주자본주의의 폐해를 비판하면서 재벌 조직을 옹호하는 논지를 펴고 있다. 그러면서도 의외로 경제적 자유화를 '기초적 자유화'와 '선진화된 자유화'로 구분한다. 그러면서 영미형 자본주의는 법의 지배와 선진화된 시장의 조합으로, 유럽형은 사회적 통합과 기본적 자유화의 조합으로 파악한다. 뿐만 아니라 "외환위기이후의 기업지배구조 개혁은 주식시장 규율이 강화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에 따른 많은 부정적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 (p29, 243)라고 쓰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나온 연구인데도 불구하고 장하준 정승일같이 극단적 주장을 하지는 않고 있는 것이다. 한국 최고의 재벌연구소에서조차 나름대로는 균형잡힌 말을 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이는 장하준 정승일의 주장이 그만큼 한국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보기에 장하준 정승일은 한국자본주의의 '주요 모순'을 '쾌도난마' 한 것 같지 않다. 이는 그들이 한국 경제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조사 연구와 안목이 부족한 탓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서는 신자유주의를 금융자본의 단일 지배로만 파악한 탓일 수도 있다(명제 1). 신자유주의가 단지 금융자본의 지배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고 보다 포괄적으로 지배적 계급권력의 보수적 복원, 인간과 세계의 재상품화 기획이라고 보지 않고 말이다. 그들이 한국경제를 쾌도난마하는데 빈틈을 갖게 된 것은 아마 둘다 때문일지 모른다.(계속)

▲ 이종태 <시사IN> 기자(왼쪽),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부키

이병천 강원대 교수, (시민과 세계) 공동편집인

2012년 3월 19일 월요일

"양 날개가 균형이 잡혀야 날 수 있다"


이글은 프레시안 2012-03-19일자 기사 '"양 날개가 균형이 잡혀야 날 수 있다"'를 퍼왔습니다.
[이정전 칼럼] "중산층은 국민경제의 허리"

금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3% 대를 턱걸이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중국도 금년 경제성장률을 하향조정하였다. 2008년 세계경제 위기가 터진지 4년이 지났지만, 선진국 경제는 아직도 깊은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망은 더욱 더 어둡다. 이런 가운데 각국 경제는 내수의 활성화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제 수출로 경제를 살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선진국의 경제가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 경제도 침체상태인가? 소득과 부의 분배의 극심한 불평등이 그 원인이라고 라이시(R. B. Reich)교수는 분명히 못 박고 있다. 불평등은 그 자체가 정의의 차원에서도 문제지만, 또한 경제 위기와 민주주의 위기를 초래한다는 점에서도 심각한 문제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자본주의 경제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자랑거리는 높은 생산력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적 풍요는바로 이 높은 생산력 덕분이라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경제학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 생산력에만 관심을 집중한다. 그러나 충분한 구매력의 뒷받침이 없는 생산력은 소용이 없다. 기업이 생산한 것을 아무도 사주지 않는다면 그 기업이 망하듯이 한 나라에서 생산된 것들이 제대로 팔리지 않으면 그 나라 경제는 절단난다. 마치 새가 한쪽 날개로만 날 수 없듯이 생산력 하나만으로는 자본주의 경제가 날 수는 없다. 경제 전체로서 생산력(공급)과 구매력(수요)이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그 경제는 날아오를 수 있다. 공급과 수요는 자본주의 경제의 양 날개다. 아직도 보수성향의 경제학자들은 생산만 많이 해놓으면 구매력은 자동적으로 뒤따라온다고 믿고 있다. 다시 말해서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과거 수많은 불황이나 경기침체가 보여주듯이 자본주의 경제의 높은 생산력을 수요가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 경제의 양 날개가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가 아주 많다는 것이다. 한 쪽 날개의 힘이 빠진 새는 고꾸라질 수밖에 없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서문에서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산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수요는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것, 이것이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다." 바로 이 모순 때문에 자본주의 경제에서 불황과 경기침체가 무시로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런 말이 나올까? 흔히 자본주의는 대량생산 체제라고 말하지만, 또한 대중소비 사회라고 말한다. 이 말은 일반대중의 소비가 자본주의 경제의 수요에서 절대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대체로 보면, 가난한 사람들이나 중산층 사람들은 소득의 대부분을 소비에 지출한다. 따라서 이들의 소득이 늘어나면 이에 거의 비례해서 이들의 소비도 늘어난다. 하지만, 부자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럴 수도 없다. 예를 들어서 세계 굴지의 투자은행이었던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기 직전 당시 CEO였던 리처드 필드는 5억 달러의 연봉을 받았다고 하는데,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 돈을 몽땅 소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실제로 부유층은 소득의 극히 일부만을 소비한다. 결국 국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일반대중이 충분한 구매력을 갖추고 시장에 나온 상품을 사주어야 자본주의 경제가 날 수 있다. 일반대중의 소비가 양 날개의 균형을 잡아주는 버팀목이다.

일반대중의 대부분은 근로자다. 국민소득이 소수의 부유층의 손에 집중된 결과 근로자들의 몫이 감소해서 충분한 구매력을 가지지 못한다면, 시장에 나온 상품들이 잘 팔리지 않을 것이요, 결과적으로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하게 된다. 이런 상태가 오래 계속되면 경기침체가 오고 불황이 오게 되며 높은 실업률이 장기화된다. 경기가 나빠져도 부자들은 별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근로자들은 큰 타격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무시로 터지는 불황이나 경기침체가 근로자계층에게는 참으로 불공평한 시장의 변덕으로 느껴진다.

일반대중의 소비 중에서 특히 중산층의 소비가 큰 몫을 차지한다. 소득불평등이 심해진다는 것은 중산층이 몰락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지난 수년 간 우리나라에서도 빈부격차가 벌어지면서 중산층이 점차 엷어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중산층은 국민경제의 허리에 해당한다. 마치 허리가 약하면 사람이 힘을 못 쓰듯이 중산층이 엷어지면 국민경제가 힘을 쓰지 못한다. 요컨대, 극심한 빈부격차 그리고 이로 인한 중산층의 몰락이 미국의 경제위기를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이며, 우리나라의 경기침체를 초래한 원인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보수진영 인사들이나언론은 분배보다는 성장이 우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성장이 분배에 발목 잡혀있는데 성장만 얘기하면 무슨 소용인가.

선거철이 닦아 오면서 여야 가릴 것 없이 정치권이 "경제민주화"를 외치고 있다. 경제민주화의 주된 내용은 경제정의이며, 경제정의의 핵심은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다. 이런 점에서 경제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 내수를 늘리고 그럼으로써 우리 경제를 다시 날 수 있게 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 세계 굴지의 투자은행이었던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기 직전 당시 CEO였던 리처드 필드는 5억 달러의 연봉을 받았다고 하는데,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 돈을 몽땅 소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로이터=뉴시스

/이정전 서울대 명예교수 

2012년 3월 18일 일요일

기업, 주주에게만 맡기지 말라


이글은 Economy Insight 2012-03-01일자 기사 '기업, 주주에게만 맡기지 말라'를 퍼왔습니다.
[Special Report Ⅰ] 변화 필요한 주주자본주의 - ① 이해관계자 기업 모델 대안으로 거론


“기업지배구조 이론은 실패했다!”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프랑스의 가 최신호에서 도발적인 선언을 했다. 주주의 권한과 이익을 우선시하는 기업지배구조 이론이 소개된 지 40년이 지난 지금, 세계는 “끔찍한 위기에 봉착해 있다”는 것이다. 주주 이익 극대화를 위해 금융계가 위험천만한 투자에 나서는가 하면, 기업들은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생산공장 해외 이전에 ‘올인’하다시피 했다. 결국 기업의 단기적인 성장주의를 부추겨 오히려 성장하지 못하고 쇠락의 길을 걷는 ‘불임 기업’을 양산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업지배구조 이론의 참담한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주주뿐 아니라 종업원과 소비자, 지역사회 등 이해관계자 모두의 이익을 위한 새로운 자본주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의 주장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무리다. 재벌에 의한 전횡이 시장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인 상황에서 재벌을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업지배구조 이론이기 때문이다. 재벌의 전횡을 막으면서 소외된 이해관계자도 나오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없을까. _편집자
환경비용 등 고려 대상 늘어… 주주들만의 자본주의 벗어나야 ‘미래 비전’ 가능
기업지배구조 이론은 참담한 결과를 초래했다. 모든 이해관계자가 참여하고, 기업 활동이 사회나 환경에 미치는 영향까지 고려한 새로운 종류의 기업 모델을 모색해야 한다.
이미 수십 년째 기업지배구조(Corporate Governance) 이론이 대기업의 경영 원칙으로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요컨대 경영자는 기업의 법적 주인인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논리대로라면 기업지배구조 이론에 따라 경영자를 압박하면 만인이 그 혜택을 입을 수 있다. 경영자가 기업을 더 효율적으로 운영하거나, 새로운 수요 변화에 맞춰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하도록 자극하기 때문이다.
40년이 지난 지금, 기업지배구조 이론이 가져온 결과는 참담하다. 특히 금융계가 기업지배구조 이론을 따른 결과, 오늘날 우리는 끔찍한 위기에 봉착해 있다. 기업지배구조 이론은 단순히 금융계가 위험천만한 투자에 나서도록 부채질만 한 것이 아니었다.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생산공장 해외 이전 광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불행히도 구조조정과 그에 따른 생산지 이전은 산업국을 더욱 빈곤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기업지배구조 이론은 기업의 단기주의 경영전략도 부추겼다. 기업의 근시안적 경영은 해당 기업의 성장에 걸림돌이 되었지만, 그런 경영원칙을 따르지 않는 다른 나라, 특히 아시아의 기업이 성공하는 데 유리한 토양을 제공했다.

주주 이익 극대화의 함정
1970년대 모퉁이를 돌기 전까지 수십 년 동안, 대기업 경영자는 협력적 방식으로 부를 생산하는 관료조직의 수장이자 일원으로 자리했다. 무엇보다 업무능력과 통솔력이 있는 자가 경영자로 선출됐다. 경영자는 장기적 비전에 따라 기업을 운영했다.
미국의 정치·경제평론가 제임스 버넘이 1941년 저서 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기업 경영에서 무엇보다 재생산이 우선시될 정도였다. 버넘의 이론은 20년 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와, 프랑스의 사회학자 레몽 아롱의 에 의해 계승됐다.
이미 1932년부터 미국의 아돌프 벌과 가디너 민즈는 에서 거대 산업체를 지휘하는 경영자가 실질적 경제권을 쥐기 시작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주주가 여러 명으로 분산되고, 특히 경영자의 전문적 역할이 중시되면서 그런 변화가 일어났다.
하지만 이는 얼마 못 가 ‘경영자가 주주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는 말로 이해됐다. 특히 기업지배구조 이론을 지지하는 이들은 이 책을 근거로, 경영자가 그저 주주의 완전한 재산권을 행사하기 위한 수임자나 대리인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주주의 권한이 강화됨과 동시에, 연기금이나 기타 기관투자자들의 세력도 함께 확대됐다. 가계 자산에서 금융 자산의 비중이 늘어난 덕분이었다. ‘영광의 30년’(제2차 세계대전 이후 30년 동안의 경제호황기)이라 불리는 호황기 동안 산업국에서는 임금노동이 급속도로 성장했다. 노동자는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노동자 역시 저축금을 기반으로 수익을 챙겼다. 노동자가 맡긴 종잣돈은 점차 유가증권 등의 형태로 투자됐다. 일반 법인이 직접 관리하던 노동자의 예금은 점차 전문기관의 손에 운용되기 시작했다. 이 전문기관들은 무엇보다 주주의 수익 증대에 역점을 두라고 경영자를 압박했다.
이렇게 기업 환경이 변화하면서, 경영자는 밥그릇을 잃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좀더 생산성 있는 일에 몰두하기보다는 상당한 시간을 투자자를 설득하는 데 보내야 했다. 동시에 이런 변화 덕분에 경영자 자신도 배를 불릴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다. 경영자는 ‘주주의 이익 증대’라는 미명 아래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자신 역시 그에 비례하는 천문학적 액수의 연봉을 챙겼다.
그렇다고 기업지배구조 이론이 지닌 최악의 모순이 비단 경제침체기에도 경영자의 보수가 인상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리라. 어쨌든 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주 이익을 수호하는 것이 자산관리자뿐 아니라 경영자에게도 자신의 어마어마한 소득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은 아닌지 의문이 들기까지 한다.


주주 이익 수호에 대한 압력이 거세지면서 1980년대부터 기업은 바야흐로 ‘핵심사업 집중화’ 전략에 나서기 시작했다. 경영 컨설턴트들은 복합기업(Conglomerate·서로 별 연관이 없는 다양한 부문에서 활동하는 기업들의 그룹)과 수직통합형 기업(Vertical Integration·한 기업이 생산에서 유통까지 전 단계에 진출하는 것)에 다양한 사업부문을 인수해 발전시키기보다 불필요한 사업부문을 정리하라고 조언했다. 시장점유율 확대를 바라는 다른 경쟁사에 이문을 남기고 팔 수 있는 부문을 매각하도록 권했다.
이처럼 사업영역을 전문화하면서 기업은 핵심부문의 몸집을 불리거나,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기업이 취약해지는 역효과도 일어났다. 자산 증식에만 목매는 근시안적 경영은 총체적 경제성장이나 혁신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많은 기업이 자사가 가장 잘하는 부문에 역량을 집중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올렸지만, 그로 인해 일부 자회사나 사업부문을 접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일정 시기에는 다소 수익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자회사나 사업부문도 한 기업의 노하우나 역량의 폭을 넓혀 결국 미래 성장 잠재력 확대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랬다면 기술 변화가 급격한 시기에도 기업은 좀더 다양한 경영전략을 펼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기업지배구조’가 인기 없는 까닭
기업지배구조 이론이 맬서스주의적인 축소 지향 경향을 띠는 탓인지, 고도성장을 구가하는 신흥국에서 이 이론은 좀처럼 인기가 없다. 다른 나라와 정반대로 신흥국의 기업들은 ‘경영자 중심 자본주의’(Managerial Capitalism)에 입각한 경영전략을 펼치고 있다. 내적 성장에 역점을 두고 사업 다각화나 수직 통합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한국의 ‘재벌’이다. 비단 신흥국 기업만이 아니다. 전통적인 유럽 산업국을 비롯해 다른 나라 기업 중에도 여전히 주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장기적 시각의 경영전략을 펼치거나 다양한 상품군을 유지하면서 주주의 요구까지 충족한 기업들이 더러 있다. 대표적인 예가 생고뱅과 제너럴일렉트릭(GE)이다. 더욱이 GE는 금융부문 악화로 고전을 면치 못했던 기업이어서 더욱 놀랍다.
어쨌든 기업지배구조 이론은 적어도 주주의 수익을 늘리는 데는 기여하지 않았을까? 사실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먼저 기업지배구조 이론이 임금노동자에게 이롭지 않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주주를 위한 가치 창출’이라는 미명 아래 구조조정과 생산공장 해외 이전의 붐이 일어나면서 노동자는 고용불안의 제물로 전락했다.
여기에 저성장과 그로 인해 발생한 대량실업은 자본에 대한 노동의 지위를 더욱 약화시켰다. 경제호황기 동안 노동자에게 더 많은 안전망을 제공하는 사회적 협약이 반드시 주주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주주는 배당금 형태의 수익 배분 비중이 줄어들었고, 생산성 향상에 따라 노동자에게 더 많은 임금을 지급하며 성장의 파이를 함께 나눠먹어야 했다. 동시에 수익 가운데 일부가 주주에게 배분되지 않고 기업에 재투자된 덕분에 장기적으로 주주의 수익이 더욱 배가됐다. 반면 오늘날 기업은 매번 막대한 규모의 배당금 배분에 나서야 하는 까닭에 정작 투자나 발전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과거에는 비교적 대출금리가 낮고 물가상승률이 높은 탓에 은행의 자본이 대개 금융 외 기업으로 흘러들어갔다. 반면 오늘날에는 모든 자본이 금융권으로 쏠리고 있다. 심지어 일부 기업은 단기 수익을 올릴 별다른 투자처를 찾지 못한 채 자사주를 매입하는 데 막대한 현금을 쏟아붓고 있다.
한 예로 2010년 프랑스 CAC40 상장기업이 자사주 매입에 지출한 금액은 무려 59억유로(약 8조7252억원)에 달했다. 이처럼 기업은 어떻게 부를 창출할지 몰라 그저 파이를 나눌 입이라도 줄여보겠다며 자기자본을 잠식하고 있다. 훨씬 더 맬서스주의적 행태를 보이는 셈이다. 그럼에도 그토록 생각이 짧은 경영진에게 어쩌자고 후한 보수를 챙겨주는 것일까?
하루빨리 ‘게임의 법칙’을 바꾸어야 한다. 과거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영광의 30년’ 시대의 기업 경영은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 적합한 방식이었다. 당시 유럽은 오늘날 신흥국과 같이 전쟁으로 무너진 경제를 재건하고 낙후된 경제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고도의 경제성장기를 구가했다. 

미국 뉴욕의 주식시장에서 미국 기업 메릴린치 직원들이 상황판을 들여다보고 있다. 주주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세계경제가 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뉴시스 AP.

이해관계자 기업 모델로 가야
앞으로는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부를 측정하고 환경비용까지 고려해야 하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런 새로운 세상에 적합한 좀더 장기적인 비전에 입각한 시장경제를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이 스스로 사회와 환경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 외에 새로운 규범과 규칙을 부과해야 한다.
주주의 이윤 증대를 강요하는 독재적인 경영과 단절한 새로운 형태의 기업 모델을 창안해야 한다. 모든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기업을 만들어야 한다. 다시 말해 (노동자뿐 아니라 납품업체, 고객, 토지 소유자까지) 위험부담을 나눠가져서, 장기적으로 기업이 잘 운영되는 게 이로운 모든 이들이 동참할 수 있는 기업 모델을 모색해야 한다. 

 / 필리프 프레모 Philippe Fremaux 기자 ⓒ Alternatives Economiques·번역 허보미 위원

2012년 1월 28일 토요일

한나라당, 경제민주화가 뭔줄은 알고 있나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01-27일자 기사 '한나라당, 경제민주화가 뭔줄은 알고 있나'를 퍼왔습니다.
[뉴스분석] 백 마디 말보다 중요한 건 ‘의지’와 ‘능력’

“자본주의가 뿌리째 불신받고 있다. 큰 위기에 빠졌다.”
중앙일보 27일자 사설의 첫 줄이다. 사설의 제목은 라고 붙였다. “전 세계적으로 소득 양극화는 깊어가고, 미국의 리먼사태와 유럽의 재정위기에서 보듯 국제 금융시스템은 여전히 불안정하다”거나 “시장 기능을 맹신하는 신자유주의는 적절한 정부개입마저 봉쇄했다”는 지적도 덧붙였다.
조선일보도 거들었다. 조선은 같은 날 사설에서 “지금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심각한 결함을 드러내고 있다”면서 “이 체제는 시장 참여자들의 지나친 무절제·탐욕 때문에 경기 과열과 거품을 낳으며 위기를 불러왔다”고 진단했다. 또 “한국도 예외가 아니”라며 “경제력의 재벌 집중이 심화돼 중소기업 생태계가 무너지고, 빈부격차·양극화의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고 썼다.


▲ 조선일보 27일자 2면.

‘부자들의 사교장’으로 불리던 다보스포럼에서도 새삼 ‘위기’가 화두로 떠올랐다. 지난 25일 개막된 올해 다보스포럼은 ‘대전환-새로운 모델 만들기’를 주제로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토론이 준비됐다. 으레 경제 전망을 중심으로 첫날 프로그램이 진행됐던 것과는 달리, 올해 첫 세션의 주제는 ‘20세기 자본주의는 21세기 사회에서 실패하고 있는가’였다. 다보스포럼 창립자인 클라우스 슈파브 WEF 회장은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 시스템은 더는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며 “우리는 죄를 지었다”고 토로했다.
때마침 한나라당은 ‘경제민주화’ 개념을 새로 마련될 정강·정책 개정안에 도입하기로 했다. 비상대책위원회 정책쇄신분과위원회 권영진 의원은 27일 “재벌들의 과도한 탐욕이 시장질서를 무너뜨리고 중소기업·자영업자들의 영역까지 침해하는 것은 공정한 시장이 될 수 없다”며 “그런 관점에서 재벌 대기업의 사회적 책무를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담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친재벌 정당’으로 인식되어 왔던 것에 비하면 눈에 띄는 변화다.
변화의 조짐은 이미 일찌감치 감지됐다. 한나라당 이주영 정책위의장은 지난해 6월말 원내대책회의에서 “대기업들이 공정시장 유지를 위해 얼마나 사회적 책임을 다해왔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며 대기업의 성장이 “시장원리에 반하는 각종 특혜와 정부의 보호정책에 상당부분 의존해온 것도 사실”이라고 직설을 날렸다. 김성식 당시 정책위 부의장도 “당정회의에서 재계가 갑갑할 정도의 대책이 나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국내 대기업들의 ‘일감 몰아주기’와 소모성자재구매대행(MRO) 시장 진출 등을 비판한 대목이었지만, 뿌리는 그보다 훨씬 깊다.
당장 청와대에서부터 ‘대기업에 배신당했다’는 불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임기 초반 고환율 정책과 법인세 인하,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 금산분리 완화 등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책으로 대기업을 지원했다. 2008년 금융위기가 지나면 대기업이 투자나 고용을 늘릴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짝사랑’이었다. 청와대는 ‘아랫목만 뜨겁고 윗목은 냉기만 가득하다’는 민심이 결국 2010년 지방선거 참패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이를 두고 당시 청와대의 한 관계자가 “순진하게 재벌에게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다”며 ‘각오’를 다지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 조선일보 2011년 4월28일자 6면.

그 해 광복절 축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 후반기 과제로 꼽은 ‘공정사회’는 그 배경에서 나왔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동반성장위원회를 통한 대·중소기업 상생을 강조하고 나선 것이나 지난해 4월 ‘심복’인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을 통해 ‘연기금 주주권 행사’로 대기업을 견제하겠다고 밝힌 것도 그 맥락이다. 일부 경제지를 제외하고 대기업의 SSM 진출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던 보수신문들도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기업의 속성이라고 하지만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있는 법”이라고 거들고 나섰다.
역시 조선일보가 가장 빨랐다. 조선일보는 지난해 ‘자본주의4.0’이라는 대형 기획을 들고 나왔다. 한국 경제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따뜻한 자본주의’라는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에 앞서 4월에는 라는 장문의 사설에서 “성장보다는 안정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뒤이어 동아일보나 중앙일보 등도 대기업의 탐욕을 비판하며 ‘지속 가능한 경제’를 논하기 시작했다. 보수 언론이 보기에도 이미 그만큼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역시 관건은 방법이고, 행동이다. 청와대와 한나라당, 그리고 보수신문의 그러한 상황인식과는 별개로 대기업의 탐욕을 규제하고 ‘경제민주화’를 추진할 계획과 의지, 그리고 능력이 있느냐를 눈여겨봐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까지만 놓고 보면 말은 무성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는 평가가 많다. 말만 앞세울 것이 아니라 실효성 있는 정책과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한나라당이 ‘경제민주화’ 조항을 강령에 넣고 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일례로 한나라당이 지난해 9월 고위당정회의에서 내놓았던 ‘일감 몰아주기 방지 대책’은 실제로 대부분의 MRO업체에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나 실효성 논란에 휘말렸다. 또 중소기업에 납품단가 조정 협의 신청권 부여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하도급법 개정안도 중소기업협동조합에 집단교섭권을 줘야 한다는 개별 중소기업의 요구를 외면한 ‘반쪽짜리’라는 비판에 시달렸다. 때문에 겉으로는 ‘동반성장’을 외치며 정부 방침에 화답하던 대기업들이 실제로는 협력업체들의 납품단가를 후려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비대위원장은 최근 출총제 부활에 대해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며 ‘보완’하면 된다는 인식만 드러냈을 뿐이다.


▲ ▲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지난달 14일 당내 '쇄신파' 의원들과 회동을 갖고 있다. ⓒCBS 노컷뉴스=윤성호 기자

보수언론이 앞 다투어 내놓고 있는 ‘지속가능한 경제론’도 모순투성이다. “소득 양극화 추세를 방치하면 사회통합이 위태로울 지경”(중앙 27일자 사설)이라면서 정치권의 복지 대책에는 ‘포퓰리즘’ 딱지를 붙여왔던 게 대표적이다. “기존체제가 낳은 지나친 탐욕과 온갖 불공정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은 우리에게도 가장 큰 고민거리”(매일경제 27일자 사설)라면서도 ‘정부의 지나친 시장 개입은 안 된다’는 말만 고장 난 축음기처럼 되풀이하고 있다. 복지도 ‘보이지 않는 손’과 대기업들의 ‘선의’에 의해 해결해야 한다는 뿌리 깊은 믿음의 반복인 셈이다.
교육과 의료의 공공성을 높여 서민들의 부담을 줄이자는 주장에는 ‘특목고’와 ‘영리병원’으로 맞섰던 게 이들 한나라당과 정부여당, 보수신문의 ‘카르텔’이다. 대다수 서민들의 삶을 팍팍하게 할 것이 분명한 한미 FTA에 대해 이들이 보여 왔던 태도는 어떤가. ‘지금의 체제는 안 된다’면서도 지난 시대의 상징적 유물로 남을 한미 FTA를 향해 만세를 외치는 분열적 증세를 어떻게 봐야 하나. 그리스가 겪고 있는 경제위기가 ‘무분별한 복지로 인한 재정위기 때문’이라고 사실을 호도하며 반값등록금이나 무상급식을 반대해왔던 건 그에 비하면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 조선일보 2011년 7월4일자 4면.

무엇보다 ‘동반성장’과 ‘지속가능한 경제’ 논의에 노동이 빠져있다는 점은 가장 큰 문제다. 끊임없는 고용불안과 실질임금 감소, 가계부채에 시달리는 노동자를 위한 정책은 어디에도 없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상생하면 자연히 노동자의 사정도 나아질 거라는 믿음은 근거가 약하다. 청와대와 정부여당, 그리고 보수신문의 뒤늦은 고백처럼 대기업이 성장한다고 그 과실이 자연스레 중소기업으로 흘러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최소한의 ‘존엄할 권리’를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하고 제 몸에 불을 붙이는 노동자를 공권력으로 짓밟고 대기업 편을 들었던 게 누구인지 돌아볼 일이다.

진보신당은 27일 “뜻도 모르는 경제민주화를 함부로 운운하는 건, 한글도 못 뗀 아이가 천자문 읽겠다고 설레발치는 꼴불견이나 마찬가지”라고 논평했다. 한나라당의 변화 의지를 섣부르게 폄하할 이유는 없지만, 세간의 여전한 의구심과 의심을 생각하면 한나라당의 어깨가 무거워 보인다. 보수신문들도 좀 더 세밀한 분석과 일관성 있는 태도를 보여야 할 시점이 아닐까.


▲ 중앙일보 2011년 6월24일자 사설.

▲ 동아일보 2011년 6월15일자 사설.

▲ 조선일보 2011년 4월6일자 사설.

▲ 조선일보 27일자 사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