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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7일 목요일

그들은 왜 어마어마한 보수를 받는가?

이글은 프레시안 2013-03-06일자 기사 '그들은 왜 어마어마한 보수를 받는가?'를 퍼왔습니다.
[이정전 칼럼] (78) "CEO의 고액 보수 규제해야"


▲ 왼쪽부터 손경식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허창수 전경련 회장, 한덕수 무역협회장, 김기문 중기중앙회장, 이희범 경총회장. 이들은 지난달 13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세계 경제 위기 극복 유공자 훈장 수여식에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나란히 받았다. ⓒ연합뉴스

대기업 최고 경영자들은 왜 이렇게 엄청난 금액의 보수를 받게 되었을까? 생산성 제고나 이윤 창출에 기여한 당연한 결과라고 경제학자들은 말할 것이다. 완전한 자유경쟁시장에서 각 개인은 '생산에 기여한 정도'만큼을 보수로 받게 되어 있다는 이론이 19세기에 개발된 이래 많은 경제학자는 이 이론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어디까지나 완전한 자유경쟁시장을 전제하는 것이다. 경제학 용어로 말하면, 완전경쟁시장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대체로 경제학자들은 이런 중요한 전제를 살짝 빼놓고 결론만 얘기하기 일쑤다.

그러나 이들도 인정하듯이 완전경쟁시장은 현실에는 없는 이상적인 상황일 뿐이다. 현실의 시장은 독과점으로 그득하다. 특히 대기업은 대부분 독과점 기업이다. 독과점 기업은 완전경쟁시장의 가격보다 더 높은 가격을 고객에게 강요함으로써 독점이윤을 챙긴다. 이 독점이윤의 상당한 부분을 고위 경영자들이 나누어 먹기 때문에 이들은 생산에 기여한 것보다 더 많은 보수를 받게 된다. 실제로 대기업 고위 경영자의 고액 보수에 관한 한 연구는 이들의 소득이 기업 실적과 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독과점 행위는 공정거래위원회의 제재를 받는다. 독과점이 불공정 거래의 일종이라고 하면, 대기업 고위 경영자의 고액 보수는 불공정 거래로 얻은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독과점 이론만으로 최고 경영자의 엄청난 보수를 충분히 설명하기에는 미흡해 보인다. 현실적으로 보면, 실패한 고위 경영자들도 고액 보수를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1997년 IMF 경제위기 때 우리는 그런 사례들을 수없이 많이 보았고, 2008년 미국 금융 붕괴 때에도 그런 사례를 수없이 들었다. 그래서 고위 경영자의 고액 보수를 설명하려는 많은 다른 이론들이 등장하게 된다.

예를 들면, 공격적(위험을 덜 두려워하는) 경영을 위한 충분한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 고위 경영자에게 고액의 보수를 주게 된다는 이론도 있다. 대체로 주주들은 위험하더라도 수익률이 높은 사업을 선호하는 까닭에 회사가 공격적 경영을 해주기를 원한다. 주주의 입장에서 보면, 공격적 경영을 하다가 실패하더라도 이에 따른 금전적 손실은 다수의 주주에게 분산된다. 그래서 각 주주는 실패의 위험을 크게 느끼지 않으며, 위험보다는 수익률에 더 큰 관심을 두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형적인 고위 경영자는 위험에 매우 신중하다. 이들에게는 일생의 경력이 걸린 문제다. 공격적 경영을 하다가 실패하는 날이면 그 책임을 제일 먼저 뒤집어써야 할 뿐만 아니라 이들의 이력서에 치명적 오점을 남기게 된다. 이들의 경력은 회사의 성공 여부에 크게 달려 있다. 그래서 고위 경영진의 입장과 주주의 입장이 엇갈리게 된다. 주주는 회사 경영진이 좀 더 공격적이기를 원하지만, 이들은 고위 경영진의 업무 수행에 대한 구체적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아무래도 고위 경영진은 주주들보다 회사 돌아가는 상황을 훨씬 더 잘 알면서 각종 의사결정을 하기 마련이다. 주주는 오직 짐작만 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회사 경영진으로 하여금 좀 더 공격적인 경영을 하도록 만들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은 높은 보수로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도 보면, 돈이 많은 사람은 위험을 덜 두려워한다. 예를 들면, 거부들은 실직을 덜 두려워한다. 그만큼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조건이 같다면 고액 연봉을 받는 고위 경영자는 그렇지 않은 경영자에 비해서 위험을 덜 두려워할 것이며, 따라서 주주의 요구에 부응하여 공격적 경영을 할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이론도 있다. 최고 경영자들의 고액 보수를 연구한 하버드 법대의 어느 두 교수는 최고 경영자들과 이사진의 유착을 그 주된 원인으로 꼽고 있다. 이사회가 거리를 두고 경영진을 견제하기보다는 최고 경영자들에게 유리한 제도나 조치를 지지하거나 최소한 묵인하려는 유인을 가진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단체의식, 가까운 지인들 사이의 갈등을 회피하려는 성향, 그리고 지연, 학연, 혈연 등으로 엮인 감정, 충성심 등 여러 가지 사회적, 심리적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다.

최고 경영자의 비정상적 고액 보수의 궁극적 원인을 일반 국민의 무지의 탓으로 돌리는 학자도 있다. 일반인들은 비정상적 고액 보수를 둘러싼 복잡한 과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 미지근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 기업 내부의 속사정은 최고 경영자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 바로 이 점을 최대한 이용해서 최고 경영자들이 자신들의 탐욕을 최대한 채운 결과가 비정상적 고액 보수라는 것이다. 비정상적 고액 보수는 이를 정당화하는 신자유주의가 맹위를 떨치던 시대의 한 증상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가 개입해서 최고 경영자의 보수에 제한을 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도 스위스처럼 대기업 최고 경영자의 연봉을 규제하는 방안을 국민투표에 부쳐야 하지 않을까?


/이정전 서울대 명예교수

2012년 12월 4일 화요일

"박근혜, 경제민주화 모른다"


이글은 프레시안 2012-12-04일자 기사 '"박근혜, 경제민주화 모른다"'를 퍼왔습니다.
[이정전 칼럼] "박근혜, '신뢰받는 정치인' 맞나?"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대를 넘으면서 우리나라는 20-50클럽에 가입하였다. 1인당 소득 2만 달러는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문턱이다. 말하자면, 우리나라는 선진국 문턱을 넘어선 경제대국이다. 그렇다면, 우리 국민의 행복도는 선진국처럼 상당히 높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2008년 미국 발 세계경제위기 직후 한 해를 빼고는 경제성장이 꾸준히 지속되었고 소득수준도 계속 높아졌는데,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OECD국가 중에서 가장 높고, 출산율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축에 속한다. 안철수 전 후보의 말대로 높은 자살률은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열악한가를, 낮은 출산율은 우리의 미래가 얼마나 어두운가를 요약해서 말해주는 징표라고 할 수 있다. 2011년 한국개발원(KDI)은 우리나라의 '삶의 질'이 OECD 국가들 중에서 최하위권에 속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한국개발원이 개발한 지표에 따르면 삶의 질에서 우리나라는 OECD의 39개국 중에서 27위를 기록했다. 100명 중에서 70등 한 셈이다. 최근(2012년 10월) 한국기독교언론포럼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우리 국민의 삶의 만족도가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여론조사에서 눈에 띠는 점은, 소득수준이 높을수록 행복감의 정도도 높다는 것이다. 삶에 대한 만족도를 묻는 질문에 대하여 '높다'는 응답자의 비율이 월 소득 500만 원 이상의 계층에서는 38.3%인 반면,200만 원이하의 계층에서는 16%에 불과하였다. 이 결과는 선진국의 경우와 다르다.

지난 반세기에 걸친 선진국의 경험을 보면, 1인당 국민소득이 크게 증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선진국 국민의 행복지수는 높아지지 않았다. 이런 현상이 선진국에서 일관성 있게 관찰되면서 이른바 "행복의 역설"이라는 말이 나왔다. 과거 선진국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제 선진국 문턱을 넘어선 우리나라도 행복의 역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단계에 와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우리 국민 대부분이 행복의 역설을 그리 실감나게 느끼지 못한다. 왜 그럴까? 비록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대에 진입했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빈부격차가 워낙 커서 국민의 대부분이 아직도 먹고사는 문제에서 크게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진국에서 나타나는 행복의 역설은 오직 우리나라 소수의 부유층, 즉 3인 가족 기준으로 연봉 7,8천만 원 이상의 고소득층에만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고소득계층의 경우 소득수준이 높아지더라도 그들의 행복도는 크게 높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국민의 행복지수를 전반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중ㆍ저소득계층의 경제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긴요하다.

요즈음 정치권은 경제민주화 구호로 시끄럽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놓고 말이 많지만, 결국 그 핵심은 빈부격차 완화다. 어차피 양극화의 해소는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시급한 과제가 아닌가. 정치권이 진정 경제민주화를 이루려 한다면, 우리나라 중ㆍ저소득계층의 소득수준을 전반적으로 높이는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정치권이 떠드는 경제민주화는 왠지 변죽만 울리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나마 경제민주화를 가장 소리 높여 외치던 박근혜 후보가 최근 재벌규제에서 한 발 빼면서 경제민주화 구호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되고 말았다.

박근혜 후보의 전략은 경제성장과 경제민주화를 상충된 별개의 것으로 보고 각각을 따로 추진하겠다는 속셈이다. 이른바 "투 트랙" 전략이다. 이 전략을 재벌 쪽에서 강력하게 요구하였겠지만, 박후보 주위에 포진해있는 신자유주의 경제전문가들이 재벌 쪽의 요구에 적극 호응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제적인 문제는 시장의 자율에 맡겨야 하며 정부는 시장에서 최대한 손을 떼야 한다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기조다. 이런 신자유주의 '정경분리의 원칙'에서 보면, 성장은 경제적인 이슈고 경제민주화는 정치적인 이슈이기 때문에 이 둘은 별개의 것이다. 이런 신자유주의 입장은 '선 성장, 후 분배' 혹은 '선 효율, 후 형평'의 원칙과 맥을 같이 한다.

하지만, 바로 그런 신자유주의 사고방식에 대한 미국 재계 및 정계 지도자들의 맹신이 2008년 미국 금융붕괴를 가져오고 세계경제위기를 초래한 한 원인이라는 것이 자본주의 4.0을 쓴 칼레츠키의 진단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재계 지도자들의 잘못된 생각이 어떻게 한 나라 경제를 망치는지를 자세히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2008년 미국의 금융붕괴에 이은 세계경제위기가 우리에게 주는 한 가지 뼈아픈 교훈은, 성장과 분배 그리고 효율과 형평이 상충된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분배가 잘 되어야만 지속적 성장이 가능해질 정도로 오늘날 우리나라와 미국의 빈부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빈부격차가 너무 벌어져서 일반 서민의 지갑이 가벼워지다 보니 내수도 꽁꽁 얼어버렸고, 계층간 격차가 고착화되다보니 우리나라 경제의 기둥이 되어야 할 청장년층이 희망과 활기를 잃고 있다. 이런 마당에 어떻게 지속적 성장과 효율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경제민주화가 경제성장을 위축시킨다고 재벌들이 주장하지만, 그러면 과거 대기업 친화적 성장정책이 과연 서민들의 경제여건과 고용창출에 얼마나 기여하였던가. 지난 10년 고용 없는 경제성장을 우리는 맥없이 쳐다보기만 하지 않았던가.

경제민주화는 시장을 활성화시키고 그럼으로써 경제성장을 달성하기 위한 조건이다. 경제민주화가 제대로 이루어져서 시장의 질서가 바로 잡혀야만 비로소 중소기업이 활기를 찾게 되고 고용이 늘어나며, 나아가서 효율과 경제성장이 뒤따르게 된다. 요컨대, 경제민주화와 경제성장은 상충된 별개의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라는 것이다.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회 김종인 위원장의 경제민주화 구상도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애당초 박근혜후보는 김위원장의 이런 깊은 의도에 공감하고 힘을 실어줌으로써 경제민주화 논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박후보는 슬그머니 발을 뺐다. 그래서 박후보는 경제민주화를 모른다는 말이 나왔다. 이런 박후보의 변절은 '국민행복추진'의 취지에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평소 그녀가 높이 쳐들었던 '신뢰받는 정치인'의 구호조차도 의심스럽게 만들었다.

훌륭한 대통령이 되려면 시대의 큰 흐름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의 시대는 과거에 비해서 성장보다는 분배가 상대적으로 더 중요시되는 시대요, 효율보다는 공정성이 더 중요시되는 시대다. 박후보는 이런 시대의 큰 흐름을 읽지 못하고 있다.

▲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 ⓒ뉴시스

/이정전 서울대 명예교수

2012년 10월 16일 화요일

'초저성장 시대, 준비돼 있습니까?"


이글은 프레시안 2012-10-16일자 기사 ''초저성장 시대, 준비돼 있습니까?"'를 퍼왓습니다.
[이정전 칼럼] "'공정한 시장'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 경제가 이미 수년째 침체의 늪에 빠져 있다. 각종 경제단체들과 정부가 금년의 경제성장 전망치를 수차례 하향조정해 왔다. 지난 11일 한국은행은 올해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4%로 낮추어 제시했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는 연 3.0%이던 기준금리를 2.75%로 낮추었다. 경기침체의 장기화를 우려해서 조금이나마 돌파구를 마련해보자는 뜻인 것 같다. 결국 올해는 미국 발 전 세계 금융위기의 후폭풍으로 경제성장률이 0.3%에 그쳤던 2009년 이후 가장 나쁜 경제지표가 예상된다.

그렇다면, 언제 쯤 우리 경제가 침체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한은은 내년 하반기쯤으로 점쳤다. 그러나 이런 희망어린 전망은 유럽의 국가부채 위기가 해결되고 미국이 다시 경기침체에 빠지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하지만, 이 전제에 대해서도회의가 많이 일고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경기침체가 앞으로도 상당 기간 계속될 가능성이 무척 높다고 많은 전문가들이 말한다. 왜 그럴까? 과거 1930년대 세계대공황 때에는 각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할 수단을 가지고 있었고, 그 수단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사용할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세기의 석학, 케인스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선진국 정부들이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어서 시장에 적극 개입할 여력도 없고, 케인스와 같은 스승도 없다. 그저 선진국들이 우왕좌왕하면서 돈이나 마구 찍어댈 뿐이다.

설령 어찌어찌 해서 세계의 경제가 불황의 늪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그 후의 전망이 그리 밝지 않다. 세계의 경기가 회복되는 순간 원자재에 대한 수요가 다시 폭증하면서 원유 및 원자재 가격폭등이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다. 물론, 과거에도 원자재가격 폭등 사태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이 미래에는 자연자원 고갈 문제, 특히 에너지 수급의 문제가 과거보다 훨씬 더 심각한 양상으로 불거진다는 데에 입을 모으고 있다. 환경재해도 더욱 더 기승을 부릴 것이다. 특히 기후변화가 인류에게 큰 재앙을 더 빈번하게 안길 것이라는 우려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런 여러 요인들이 경제성장을 크게 제약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불황의 늪을 벗어나더라도 초저성장(超低成長)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치가들이나 관료들은 성장률을 올리는 데에만 급급하다. 대선 주자들도 경제성장에 대한 얘기만 하고 있다. 물론, 경제성장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초저성장의 시대가 대세라고 한다면, 이에 대하여 현명하게 대처할 채비도 갖추어야 한다. 초저성장 시대는 우리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미답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초저성장 사회는 어떤 사회가 될 것인가? 가장 먼저 우려되는 점은, 사회적 갈등이 한층 격화된다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과거 고도성장시대에는 열심히 일만 하면 모든 국민이 더 잘 살게 된다는 희망을 누구나 가질 수 있었다. 빈곤층에게도일자리가 주어졌다. 비록 시장경제에 빈부격차가 점점 더 심해지는 경향이 있다고는 하지만, 경제성장이 지속되는 한 빈곤층에게도 떡고물이 떨어졌다. 그래서 경제성장은 사회적 갈등을 완화하는 효과적인 정치적 구실이 되었고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명분이 되었다.

허나, 초저성장 시대에는 얘기가 사뭇 달라진다. 초저성장은 국민이 나누어먹을 파이의 크기가 거의 고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한 사람이 더 많이 차지하면 다른 사람이 차지할 몫이 줄어드는 영합게임(zero-sum game)의 상황이 벌어진다. 이럴 경우, 가난한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더 잘 사는 유일한 방법은 부자로부터 빼앗아 오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더 잘 살게 된다는 희망이 없다. 그러므로 영합게임의 상황에서는 계층 간 충돌이 첨예화되고 자칫 사회가 큰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이미 우리 사회는 양극화되어 있다. 빈부격차가 날로 심해질 뿐만 아니라 이들이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들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해야 할 지식인 사회도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으로 갈려서 대화가 단절되어 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지속가능성이 뿌리 채 흔들리게 된다. 이에 대한 근원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위해서나 지속가능한 사회를 꾸려나가기 위한 선결과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두 가지 돌파구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사회복지를 대폭 확대하고, 낙수효과를 저해하는 요인을 과감하게 제거하며, 계층 간 이동의 사다리를 크게 확충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시장의 공정성을 높이고 사회정의를 확고하게 세우는 것이다. 국민이 나누어 먹을 파이의 크기가 한정되어 있을 때에는 모두들 분배의 공정성에 더욱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수출증대 혹은 고도성장의 미명 아래 대기업의 비리를 적당히 눈감아줄 수 있었지만, 국민이 잔뜩 예민해지는 초저성장 사회에서는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대기업의 골목 상권 침해와 같은 시빗거리들이 줄이어 터지면서 우리 사회가 시장의 공정성 시비에 더욱 더 깊이 휘말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 초성장사회일수록 정의에 대한 요구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역사적으로 보면, 정의의 출발점은 대중의 분노이며, 정의 목적은 사회적 갈등을 원만하게 해소하는 것이다.

앞으로 초저성장 시대가 불가피하다면, 사회복지의 대폭 확충은 민주주의를 위해서나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도 피할 수 없는 당면 과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복지 문제를 놓고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 사이의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회복지 확충의 문제를 단순히 예산상의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시대적 흐름과 연결해서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지만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경제민주화 문제도 마찬가지다. 요즈음 여당이나 야당이나 한결 같이 경제민주화를 외치고 있다. 물론,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시장의 정의다. 경제성장의 시대에는 시장 거래의 공정성을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초저성장 시대에는 시장 거래의 공정성을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사회적 갈등을 잠재우기는 어려워 보인다. 정의의 문제도 좀 더 큰 틀에서 봐야 하지 않을까.

 
▲ 한 대형 마트 풍경. ⓒ뉴시스

/이정전 서울대 명예교수

2012년 9월 4일 화요일

경제민주화를 위한 국민적 대타협, 누가 할 것인가?


이글은 프레시안 2012-09-03일자 기사 '경제민주화를 위한 국민적 대타협, 누가 할 것인가?'를 퍼왔습니다.
[이정전 칼럼] "양극화 해소해야 경제도 산다"

요즈음 정치권의 최대 화두는 '경제민주화'다. 대권주자들도 한결같이 경제민주화를 외치고 있다. 그런 경제민주화에 재벌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들은 비교적 기업 프렌들리하다고 알려진 새누리당의 경제민주화 방안조차 거부하고 있다. 여당의 안이나 야당의 안 모두 대기업 때리기에 불과하다고 불평한다. 그러면서 경제가 매우 안 좋은 현 상황에서 이렇게 정치권이 기업 때리기를 일삼는다면 앞으로 우리 경제가 더욱 더 나빠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말이 경고이지 여기에는 협박이 담겨져 있다. 대기업 때리기를 계속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것인가? 국민들은 대기업이 고용과 저소득계층의 소득을 많이 창출하는 사업에 적극 투자해주기를 간절히 원하는데, 이것을 안 하겠다는 것이다. 8월 말 대한상공회의소, 전경련, 한국경총 등 경제 5단체의 회동에서 협박의 내용이 드러났다. 이들은 경제민주화를 살살 추진할 것을 요구하면서 이 요구를 들어주면 투자와 일자리 창출에 노력해 보겠노라고 말했다.

대기업의 협박은 말로만이 아니라 실천력을 가진 강력한 협박이다. 사실 재계는 과거에도 이런 협박을 수없이 해왔다. 과거 이 협박을 실천하는 가장 유력한 방법은 해외투자였다. 기업가들은 툭하면 우리나라는 기업 해먹기 어려운 나라라고 투덜댔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기업들이 이미 막대한 자본을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유럽 국가, 심지어 미국 등으로 이동시켰다. 전 세계가 시장화 되다 보니 자본이 국경을 넘어 자유스럽게 이동하게 되었다. 컴퓨터 클릭 하나로 대규모 자본이 국경을 넘나든다. 자본의 국가 간 자유로운 이동은 기업가 집단에 막강한 권력을 부여한다. 기업가들은 수틀리면 거액의 자본을 빼내 다른 나라로 옮겨버리겠다고 위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계 모든 나라가 자본유치에 혈안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기업의 이런 협박이야말로 위력적이 아닐 수 없다.

자본이 빠져나가면 당장 국내 산업이 위축되고 실업문제가 터진다. 이런 자본의 해외유출은 정권의 안위에도 심각한 타격을 줄 수가 있다. 경제상황과 실업률이 선거에 심대한 영향을 준다는 점을 민주정부는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기업하기 좋은 풍토의 마련에 정부가 온통 매달리지 않을 수 없다. 역대 대통령들은 당선되자마자 제일 먼저 재계의 거물들부터 만나 이들의 비위를 맞춘다. 바로 이런 약점을 이용해서 기업가들이 투정을 부리면 민주정부도 속수무책이다. 그래서 이런 기업가들의 투정을 어떤 학자는 "자본파업"이라고 표현하였다. 대기업이 자본파업의 카드를 만지작거릴 때마다 정부가 이들의 비위를 맞추다보니 오늘날 재벌의 비대화와 극심한 경제력 집중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고, 반사적으로 경제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면서 사회적 갈등이 크게 불거졌다.

물론, 노동파업처럼 자본가들이 반드시 집단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파업"을 벌이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자본은 수익률에 따라 민감하게 이동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정부의 정책이나 태도가 조금이라도 돈벌이에 지장을 준다 싶으면 누가 앞장서지 않아도 자본가들은 일제히 돈을 외국으로 빼돌릴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그러니 민주정부가 자본가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운신의 폭이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다. 1990년대 IMF경제위기 앞에서 우리 정부가 얼마나 무력하였던가를 우리 눈으로 직접 목격하지 않았던가. 2008년 세계 경제위기가 터지기 전에만 해도 도도하게 진행되어온 세계화가 국가 단위의 정부를 점차 무력화시킬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다.

그러나 2008년 세계경제위기 이후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 이래 최대의 경제 불황이라고 할 만큼 세계경제가 극도로 위축되어 있다. 심지어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리는 중국의 경제도 매우 부진하다. 그러니 해외투자의 여지도, 자본파업의 여지도 그리 크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는 우리 경제가 살아나야 대기업도 살 수 있다. 이런 사실을 대기업도 잘 알 것이다. 우리 경제를 살리려면 우선 우리 경제가 왜 이렇게 침체되어 있는지부터 깊이 짚어봐야 한다. 물론, 세계경제의 침체가 그 한 요인이지만, 더 근원적인 요인은 극심한 빈부격차다. 실제로 많은 전문가들이 우리 경제가 이제 내수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수년 간 민간소비는 극히 저조하다. 자본주의 경제가 대중소비사회라고 하는데 일반대중의 호주머니에 돈이 없으니 민간소비가 저조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민간소비를 활성화시키고 우리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중소기업을 육성하고, 중산층을 키우며, 저소득계층의 소득수준을 크게 끌어올리는 것이 급선무다. 그리고 이것이 경제민주화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양극화를 대폭 완화하기 위한 참된 경제민주화는 정치구호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단순히 대기업 때리기만으로는 자칫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킬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참된 경제민주화가 결국 대기업도 살고 중소기업도 살며 우리 모두가 사는 길임을 우리 모두 굳게 믿어야 하고, 특히 대기업으로 하여금 이를 믿도록 적극 설득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대타협과 노사 간의 대타협을 일구어내야 한다. 여기에는 진솔한 의사소통의 의지를 담은 정치적 리더십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러나 지금 정치권은 대기업을 살살 때릴 것인가 세게 때릴 것인가에 너무 집착하는 가운데 국민적 대타협을 위한 노력이 실종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오늘날과 같이 세계경제가 극도로 침체에 빠진 상황에서는 정치적 리더십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더 절실하다는 점을 지난 2월 스위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도 읽을 수 있다. 흔히 다보스포럼이라고 불리는 이 세계경제포럼은 정치ㆍ경제 분야의 세계적 지도자들이 모여서 세계경제를 조율하는, 가장 유서 깊은 토론의 장이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 자본주의의 현 주소를 가장 잘 읽을 수 있는 모임이기도 하다. 2012년 다보스회의에는 독일의 총리, 영국의 수상, 미국의 재무장관, 등 정ㆍ관계의 세계적 거물들을 포함하여 2천여 명의 명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겉으로는 성황을 이루었다고 하지만, 회의 분위기는 썰렁하였다. 첫날 회의주제가 "자본주의는 21세기 사회에서 실패하고 있는가"였다. 결국 이 회의는 구체적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한 채, 현 세계경제위기가 시장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이제 정부에 의한 돌파만이 남았다는 데에 대체로 동의하는 정도로 막을 내렸다.

문제는 정부에게도 마땅한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 때에는 최소한 재정지출 확대라는 보도(寶刀)가 선진국 정부의 손에 확실하게 쥐어져 있었지만, 오늘날 각국 정부의 손에는 이 보도가 없다. 북유럽의 국가들을 제외한 선진국 정부 대부분이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기 때문에 정부가 쓸 돈이 없다. 어느 나라나 증세에 대한 반발이 만만치 않다.

정부 재정지출의 적극적 확대가 곤란하다면, 남은 수단은 무엇인가? 참된 경제민주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민적 대타협이 있어야 한다. 이 어려운 시대를 맞아 우리도 과거 스웨덴이 그랬던 것처럼 대타협을 일구어낼 수는 없을까? 대권 주자들 중에서 이런 국민적 대타협을 일구어낼 만한 의사소통 능력과 리더십을 가진 인물은 과연 누구일까?

▲ 수출대기업에만 의존하는 방식으론 경제 살리기에 한계가 있다. ⓒ뉴시스

/이정전 서울대 명예교수

2012년 3월 19일 월요일

"양 날개가 균형이 잡혀야 날 수 있다"


이글은 프레시안 2012-03-19일자 기사 '"양 날개가 균형이 잡혀야 날 수 있다"'를 퍼왔습니다.
[이정전 칼럼] "중산층은 국민경제의 허리"

금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3% 대를 턱걸이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중국도 금년 경제성장률을 하향조정하였다. 2008년 세계경제 위기가 터진지 4년이 지났지만, 선진국 경제는 아직도 깊은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망은 더욱 더 어둡다. 이런 가운데 각국 경제는 내수의 활성화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제 수출로 경제를 살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선진국의 경제가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 경제도 침체상태인가? 소득과 부의 분배의 극심한 불평등이 그 원인이라고 라이시(R. B. Reich)교수는 분명히 못 박고 있다. 불평등은 그 자체가 정의의 차원에서도 문제지만, 또한 경제 위기와 민주주의 위기를 초래한다는 점에서도 심각한 문제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자본주의 경제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자랑거리는 높은 생산력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적 풍요는바로 이 높은 생산력 덕분이라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경제학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 생산력에만 관심을 집중한다. 그러나 충분한 구매력의 뒷받침이 없는 생산력은 소용이 없다. 기업이 생산한 것을 아무도 사주지 않는다면 그 기업이 망하듯이 한 나라에서 생산된 것들이 제대로 팔리지 않으면 그 나라 경제는 절단난다. 마치 새가 한쪽 날개로만 날 수 없듯이 생산력 하나만으로는 자본주의 경제가 날 수는 없다. 경제 전체로서 생산력(공급)과 구매력(수요)이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그 경제는 날아오를 수 있다. 공급과 수요는 자본주의 경제의 양 날개다. 아직도 보수성향의 경제학자들은 생산만 많이 해놓으면 구매력은 자동적으로 뒤따라온다고 믿고 있다. 다시 말해서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과거 수많은 불황이나 경기침체가 보여주듯이 자본주의 경제의 높은 생산력을 수요가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 경제의 양 날개가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가 아주 많다는 것이다. 한 쪽 날개의 힘이 빠진 새는 고꾸라질 수밖에 없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서문에서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산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수요는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것, 이것이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다." 바로 이 모순 때문에 자본주의 경제에서 불황과 경기침체가 무시로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런 말이 나올까? 흔히 자본주의는 대량생산 체제라고 말하지만, 또한 대중소비 사회라고 말한다. 이 말은 일반대중의 소비가 자본주의 경제의 수요에서 절대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대체로 보면, 가난한 사람들이나 중산층 사람들은 소득의 대부분을 소비에 지출한다. 따라서 이들의 소득이 늘어나면 이에 거의 비례해서 이들의 소비도 늘어난다. 하지만, 부자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럴 수도 없다. 예를 들어서 세계 굴지의 투자은행이었던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기 직전 당시 CEO였던 리처드 필드는 5억 달러의 연봉을 받았다고 하는데,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 돈을 몽땅 소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실제로 부유층은 소득의 극히 일부만을 소비한다. 결국 국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일반대중이 충분한 구매력을 갖추고 시장에 나온 상품을 사주어야 자본주의 경제가 날 수 있다. 일반대중의 소비가 양 날개의 균형을 잡아주는 버팀목이다.

일반대중의 대부분은 근로자다. 국민소득이 소수의 부유층의 손에 집중된 결과 근로자들의 몫이 감소해서 충분한 구매력을 가지지 못한다면, 시장에 나온 상품들이 잘 팔리지 않을 것이요, 결과적으로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하게 된다. 이런 상태가 오래 계속되면 경기침체가 오고 불황이 오게 되며 높은 실업률이 장기화된다. 경기가 나빠져도 부자들은 별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근로자들은 큰 타격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무시로 터지는 불황이나 경기침체가 근로자계층에게는 참으로 불공평한 시장의 변덕으로 느껴진다.

일반대중의 소비 중에서 특히 중산층의 소비가 큰 몫을 차지한다. 소득불평등이 심해진다는 것은 중산층이 몰락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지난 수년 간 우리나라에서도 빈부격차가 벌어지면서 중산층이 점차 엷어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중산층은 국민경제의 허리에 해당한다. 마치 허리가 약하면 사람이 힘을 못 쓰듯이 중산층이 엷어지면 국민경제가 힘을 쓰지 못한다. 요컨대, 극심한 빈부격차 그리고 이로 인한 중산층의 몰락이 미국의 경제위기를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이며, 우리나라의 경기침체를 초래한 원인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보수진영 인사들이나언론은 분배보다는 성장이 우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성장이 분배에 발목 잡혀있는데 성장만 얘기하면 무슨 소용인가.

선거철이 닦아 오면서 여야 가릴 것 없이 정치권이 "경제민주화"를 외치고 있다. 경제민주화의 주된 내용은 경제정의이며, 경제정의의 핵심은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다. 이런 점에서 경제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 내수를 늘리고 그럼으로써 우리 경제를 다시 날 수 있게 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 세계 굴지의 투자은행이었던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기 직전 당시 CEO였던 리처드 필드는 5억 달러의 연봉을 받았다고 하는데,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 돈을 몽땅 소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로이터=뉴시스

/이정전 서울대 명예교수 

2012년 1월 27일 금요일

"불의가 판치는 사회, '정의'만으론 부족하다"


이글은 프레시안 2012-01-27일자 기사 '"불의가 판치는 사회, '정의'만으론 부족하다"'를 퍼왔습니다.
[이정전 칼럼] 진정 정의로운 사회

총선과 대선이 있는 금년에도 작년에 이어서 '정의'가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될 것 같다. 정치가부터 정의사회의 구현을 외치고 있고 이에 부응하여 사회 각계각층에서 정의에 대한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다보니 마치 정의로운 사회가 낙원이나 되는 듯이 많은 사람들이 정의에 대한 분홍빛 환상에 젖어 있다. 물론, 불의가 판치는 사회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렇다고 정의로운 사회가 과연 이상적인 사회인가? 마르크스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한다. 정의로운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스위스에 가보자.

스위스에 루체른이라는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가 있다. 이 도시의 중심가에는 유명한 음악가 바그너가 자주 들렸다고 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중국음식점이 있고 거기에서 멀지 않은 공원에는 관광객이라면 으레 들려보는 유명한 사자의 상이 있다. 이것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사자는 용맹의 상징이다. 그런데, 커다란 암벽에 새겨진 이 사자는 한껏 용맹을 뽐내기는커녕 심장에 창을 맞고 죽어 가는 사자다. 그래서 이 사자 상을 '빈사의 사자 상'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 스위스 루체른의 '빈사의 사자 상'

스위스라고 하면 정밀한 시계나 아름다운 경치만을 연상하기 쉽다. 그러나 스위스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용병(傭兵)이 그것이다. 세계적으로 용맹을 떨쳤던 스위스의 용병은 프랑스 대혁명 때에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루이16세와 마리 앙뜨와네트 왕비가 기거하던 궁전으로 시민혁명군이 진격해 들어오자 궁전을 수비하던 프랑스 군대는 혼비백산해서 자기나라 왕을 버리고 도망가 버렸고 뒤따라 외국 용병들도 모두 도망갔다. 유독 스위스 용병만이 끝까지 남아서 남의 나라의 왕과 왕비를 위해서 싸우다가 220여명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한다. 창을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상징이 새겨진 방패를 끝까지 끌어안고 죽어 가는 루체른 공원 사자의 상에는 바로 그러한 스위스용병의 굳은 절개가 깊이 각인되어 있다. 언젠가 로마교황청이 위기에 처했을 때도 스위스 용병의 신의는 유감없이 발휘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로마 교황청의 최측근 경비는 스위스 용병에게 맡기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스위스 사람들은 이 관례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 일화는 스위스 사람들이 얼마나 신의를 잘 지키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시계처럼 틀림없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니 스위스 사회는 원칙이 잘 지켜지는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상당히 정의로운 사회인 셈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스위스 사람들은 유럽에서 제일 인기 없고 욕을 많이 얻어먹는다. 스위스 사람들은 눈을 번득이고 서로를 감시하다가 약간이라도 수틀리는 짓을 목격하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곧장 경찰에 고발해버린다. 스위스 사람들과는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기가 참 어렵다고 한다. 5만원어치 상품을 선물로 받자마자 그 상품의 가격을 알아보고 나서 곧장 시계처럼 정확하게 5만 원짜리 상품으로 되갚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아마도 정나미 떨어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스위스 사람들이 바로 그렇다고 한다. 모든 것이 깨끗하게 잘 정리되어 있고 질서가 잘 잡혀있지만, 숨 막히고 정나미 떨어지는 사회, 이것이 스위스 사회라고 그곳에서 오래 살아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러면서 스위스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오죽하면 스위스에 살다가 독일에만 가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느낌으로 한숨 돌리게 되고, 프랑스에 가면 더 사람 살만하다고 느끼게 되며, 이태리에 가면 절로 흥이 난다는 농담이 있을까. 우리나라는 어떤가?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제일 재미있는 지옥이라고 한다.

초등학교 때에 짝과 같이 쓰는 책상의 가운데에 금을 그어 놓고 금을 넘어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칼로 잘라버리던 짓을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을 것이다. 이런 못된 짓을 하는 짝은 결코 사이가 좋을 수가 없다. 이런 초등학교 어린애들의 짓이 유치해보이지만, 여기에서 정의의 원초적 모습을 볼 수 있다. 정의의 여신상을 보면 정의의 개념을 딱 두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저울과 칼이다. 각자의 정당한 몫을 저울로 재고 어긋나는 것은 가차 없이 칼로 베어버린다. 정의로운 사회는 이와 같이 우선 네 것과 내 것을 분명히 가르고 그리고 각자 자신의 몫을 빈틈없이 챙기는 데서 출발한다. 과연 그런 사회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사회인가? 저울과 칼이 우리 삶의 전부는 아니다.

가정에서 어머니가 정의의 여신과 같이 자식들의 모든 행동을 일일이 저울질하고 조금이라도 원칙에 벗어나면 가차 없이 칼로 응징한다고 하자. 과연 이런 가정이 좋은 가정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가정만은 허물을 감싸고 잘못을 용서하며, 사랑으로 충만하여 푸근하고 웃음이 넘쳐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사랑과 웃음이 충만한 곳에는 저울과 칼이 필요 없다. 누구나 엄마에 대하여 길게 얘기하다 보면 저절로눈물을 흘리게 된다. 엄마 얘기하다가 우는 배우를 TV에서 자주 보았을 것이다. 저울과 칼만 들이대는 어머니는 그런 눈물을 자아낼 수 없다. '행복한 가정'이라는 말은 있어도 '정의로운 가정'이라는 말은 없다. 정의가 구현된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사회가 된다는 보장도 없다. 정의는 행복을 위한 하나의 조건에 불과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만일 당신에게 친구가 있으면 당신은 정의가 필요 없다. 그러나 당신에게 정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친구가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 부정이 만연하다 보니 정의에 대한 요구가 빗발치는 것은 당연하며 따라서 정의사회의 구현은 시급한 우리 사회의 과제다. 하지만, 과연 어떤 사회가 정말 정의로운 사회인가? 판ㆍ검사가 할 일이 없어서 바둑으로 소일하는 사회, 법과대학이 인기가 없어서 늘 정원미달인 사회, 죄수가 없어서 감옥소에서 닭과 돼지를 기르는 사회, 이것이 진정 정의로운 사회다. 우리는 정의사회의 구현에 너무 집착해서 더 소중한 것을 망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정의에 대한 분홍빛 환상부터 버리라고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이정전 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