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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2일 토요일

영세자영업자의 몰락, 그 이유는?


이글은 레디앙 2013-01-31일자 기사 '영세자영업자의 몰락, 그 이유는?'을 퍼왔습니다.
[경제와 사민주의]민주주의로 포장되었던 주주자본주의와 단절해야

또한 주주자본주의와 결합된 잘못된 재벌 규제는 영세자영업자의 처지를 악화시킨다. 우리나라 경제활동 인구의 33% 즉 1/3 가량이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다. 즉 돈을 버는 이들의 1/3 가량이 식당, 술집, 호프집, 이발소/미용실, 카페, 문방구, 꽃집 등의 주인 또는 종업원이다. 자영업자들의 고달픈 살림살이는 곧 5천만 국민의 1/3이 살아가는 고달픈 삶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재벌 빵집 논란과 함께 여와 야,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모두가 빈곤한 영세자영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통닭과 커피를 아무리 팔아도 도무지 수익을 낼 수 없는 점포들, 달콤한 말로 편의점 창업을 꼬여놓고는 패망하면 막대한 돈을 약탈하는 프랜차이즈 지점들, 음식이 날개 돋친 듯 팔려도 망할 수밖에 없는 높은 임대료 문제 등이 그들의 이야기이다.
또한 가게를 운영하기 위해 빌린 은행대출, 카드대출의 연체와 신용불량자로의 전락, 채권추심 또한 그들의 이야기이다. 전체 자영업 창업자의 80%가 실패하여 신용불량자로 전락하고 그 중 상당수가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다.
자영업자들의 삶은 왜 이렇게 힘든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영업에 뛰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영업에 뛰어들까?
그 이유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1997년의 외환위기 이후 허리 역할을 하는 중견 대기업들이 재벌개혁 과정에서 대거 퇴출되었고, 기업의 명예퇴직과 희망퇴직, 정리해고와 인력 절감도 상시화되었다. 어느 누구도 안정적인 일자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 결과 비정규직과 함께 생계형 자영업자가 급증하고 있다. 망한 자영업자들이 속출하는데도 여전히 무수한 사람들이 신규로 자영업에 뛰어든다. 뒤로 물러날 곳이 없는데도 앞에서 밀려드는 군중의 미는 힘을 이기지 못하여 절벽 가장자리에 선 사람들은 결국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참혹한 상황이다.
공정시장 우선론자들(즉 경제민주화론자들)은 재벌-대기업 규제가 영세자영업 보호를 위해서도 가장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재벌 빵집 논란과 대형마트 골목상권 침식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빵집과 통닭집, 피자집과 같은 골목 상권에 대자본이 마구잡이로 진입하는 것은 법률로 막아 규제해야 한다. 신용카드 대기업의 수수료 횡포도 규제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영세자영업종에서의 무시무시한 과당 경쟁을 막을 수 없다. 불공정 경쟁(따라서 공정한 시장질서의 확립)도 중요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과당 경쟁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폐업처리 공고와 자영업자의 추이

1998년 이후 만성화 되어 지금도 상시적으로 계속되는 대기업과 은행, 금융권 등에서의 대규모 명예퇴직과 정리해고는 불가항력적인 운명적 힘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명백하게 1998년 이후 대기업과 은행, 금융회사들의 기업지배구조 및 경영원리가 미국 월스트리트 형의 단기수익성 제일주의, 현금흐름(cash flow) 및 자기자본 수익률(ROE) 제일주의로 재편되면서 일어난 일이다.
1년 안에 매출 및 수익 증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업부와 종업원을 바로 퇴출, 퇴직시키는 일은 97년 이전에는 생소한 일이었는데, 미국식 회계기준과 수익기준이 모든 대기업들의 경영에 전면화된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에 그것은 흔해빠진 일이 되었다. 이 모든 일이 ‘경제민주화’라는 아름다운 이름하에 일어났다.

경제민주화는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경제민주주의는 반드시 필요하다. 민주주의 즉 민(people)이 주인이 되는 통치 원리는 정치 및 국가 영역만이 아니라 경제 영역에서도 관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경제체제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이고, 민(民)이 아닌 자본과 시장이 주인인 체제이다. 과연 자본과 시장이 지배하는 이 체제를 5대 재벌 또는 30대 재벌을 규제하여 그 계열사 숫자를 줄이고, 재벌 총수들의 범법 행위를 엄단한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을까? 그렇게 하면 민이 지배하는 새로운 경제 체제로 바꿀 수 있을까?
지난 민주 정부의 경험을 보면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오히려 거꾸로, 주식투자 펀드들, 재테크 세력, 금융자산가 등 국내외 금융자본의 힘은 엄청나게 커졌는데 반하여 서민들과 노동자들, 빈민들의 처지는 크게 악화되었다. 경제 민주화가 아니라 경제 독재화의 길을 간 것이다.
앞에서 말한 50대의 변절(?)로 되돌아 가보자.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간 그들의 살림살이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유린되었다. 경제민주화의 이면은 대규모의 기업구조조정이었고, 재벌개혁 및 재벌해체와 함께 대규모의 계열분리, 해외매각, 인수합병, 사업재편, 부채축소 등의 사태가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서 명퇴, 정리해고 당한 당시 40대, 50대 사람들에게 우리 사회는 ‘사오정’이라는 이름도 붙여줬다. 당시 30대였던 386 세대는 경제 민주화와 재벌 개혁에 열광했다. 기업의 인력 및 사업 구조조정과 함께 진행된 인사제도 재편(팀제 도입)과 임금 제도 재편(성과주의 및 미국식 연봉제 도입) 등에 앞장서면서 미국식 기업 문화를 도입하는데 열심이었던 것도 386 세대였다.
그 ‘경제 민주화’ 과정에서 당시 40대, 50대였던 인물들은 ‘사오정’으로 낙인찍혀 쓸쓸히 퇴출당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이번 선거에서 이제 50~60대에 접어든 된 왕년의 ‘사오정’이 자신들의 살림살이를 망가뜨린 민주주의 및 경제민주화에 정치적으로 복수한다.
50-60대 인구의 비중 확대를 고려할 때, 앞으로 50-60대의 정치적 지지가 없다면 민주주의가 전진하기 힘들다. 그런데 그들의 바람은 소박하다. 20-30대에 비해 더 불안하고 더 빈곤한 자신들의 살림살이도 풍요롭고 여유로우며 안정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 바램을 학자들은 ‘실질적 자유’(형식적·절차적 자유가 아닌)라고 말한다. 그에 반해 지금까지 진보 정치권이 주장해온 민주주의와 경제민주화는 여전히 구자유주의의 패러다임에 머무르고 있다. 즉 실질적 자유가 아닌 형식적·절차적 자유에 불과하다.
구자유주의로는 5년 뒤에도 희망이 없다. 지금부터라도 구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민주주의 즉 실질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자유, 그것을 위한 새로운 경제민주주의를 이야기하여야 한다. 20-30대만이 아니라 40대와 50-60대까지 모든 세대에서 지지받는 ‘밥 먹여주는 민주주의’를 이야기하여야 한다. 그리고 모든 세대, 모든 국민들이 골고루 풍요롭고 여유로울 수 있는 살림살이 경제에 대한 해답은 구자유주의 또는 개혁적(진보적) 자유주의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특히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에 있다고 나는 본다.

정승일

2012년 6월 1일 금요일

"'재벌과 투기자본, 뭐가 더 나쁜가?"


이글은 프레시안 2012-06-01일자 기사 '"'재벌과 투기자본, 뭐가 더 나쁜가?"'를 퍼왔습니다.
['한국경제와 복지국가' 강연] 이종태 "복지국가냐, 주주자본주의냐"

"민영화는 나쁘다. 그 중에서 공공부문이 외국 투기자본에 넘어가는 경우는 최악이다. 그나마 국내 재벌기업에 넘어가는 것은 차악이다. 그런데 일부 진보진영에서는 '재벌기업 민영화'는 극렬히 반대하면서 '투기자본 민영화'에는 침묵한다."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위원이 한 말이다. 국내 재벌들이 적어도 '지속가능한 기업경영'을 고려하는 것과는 달리, 기업의 존폐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주주의 이익에만 봉사하는 투기자본은 국내 사회·경제에 최악의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이다. 정 연구위원이 재벌개혁보다는 주주자본주의 규제를 강조하는 이유다.

'금융자본주의와 주주자본주의'라는 주제로 30일 서울 마포구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교육실에서 강연한 이종태 (시사IN) 기자는 정 연구위원의 문제의식에 살을 덧붙였다. 정 연구위원과 함께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이하 (선택))의 공저자이기도 한 이종태 기자는 최악의 민영화의 예로 최근 요금 인상 논란을 불러일으킨 서울시 메트로 9호선을 꼽았다.


"메트로 9호선이 수익 낼 수 없는 이유? 주주 탓!"

이 기자는 "아무리 지하철 요금을 올려줘도 메트로 9호선의 경영 상황은 절대 개선될 수 없다"면서 "메트로 9호선의 부실기업화는 주주자본주의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주장했다. 메트로 9호선의 수익이 주주의 이익에 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메트로 9호선은 자본금인 1671억 원보다 3배가량 많은 5000억 원을 대출받았고, 적게는 6%에서 많게는 15%에 달하는 고금리 이자를 물면서 '부실기업화'의 수순을 밟았다. 2009년 개통 이후 메트로 9호선이 기록한 순손실 1634억 원 가운데 대출 이자비용은 무려 1000억 원에 이른다.

메트로 9호선이 '울며 겨자 먹기'로 고금리 이자를 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메트로 9호선의 금융계 주주가 곧 채권자들이기 때문이다. 메트로 9호선의 주주인 맥쿼리한국인프라투융자사, 신한은행 등은 메트로 9호선 운영에 필요한 자본금 5000억 원을 '투자'하는 대신 고금리로 '빌려주기'로 결정했다.

주주들이 메트로 9호선의 순이익을 늘리는 데 관심이 없는 이유에 대해 이 기자는 "메트로 9호선에서 순수익이 발생하면 주주들은 법인세를 제하고 줄어든 배당을 받아야 한다"며 "반면에 적자라면 수익이 없는 만큼 메트로 9호선은 법인세를 낼 필요가 없고, 주주들은 고금리 대출이자를 통해 메트로 9호선이 내지 않은 법인세를 포함한 더 많은 수익을 챙길 수 있다"고 분석했다.


ⓒ뉴시스

이 기자는 "문제는 이처럼 기업의 지속가능성에는 관심이 없는 주주자본주의가 전 세계가 돌아가는 법칙으로 받아들여진다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기업 입장에서 투자자들은 그저 외부인이었지만 1970년대 후반 이후부터 기업의 주인은 주주라는 분위기가 광범위하게 확산됐다"고 말했다.

이전까지 고용창출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중시했던 분위기도 1970년대를 전후로 오로지 주주에 대한 봉사만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한국에서도 비정규직 확산, 기업 인수합병 시장의 활성화, 외주화 증대 등 신자유주의적인 변화가 이뤄졌다고 이 기자는 지적했다.

"신자유주의가 태양계라면, 금융자본주의는 태양"

주주자본주의 규제보다는 재벌개혁을 강조한 김상조 한성대 교수,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과 이병천 강원대 교수는 의 저자들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진단을 어떻게 달리할까.

이 기자는 "정태인 원장, 이병천 교수는 금융자본주의를 신자유주의 현상의 단지 일부로만 간주하는 것 같다"며 "하지만 나를 비롯한 (선택)의 저자들은 신자유주의의 핵심을 주주자본주의, 혹은 (금융자본이 경제를 지배하는 현상인) 금융자본주의라고 본다"고 말했다.

"신자유주의가 태양계라면 금융자본주의는 태양계의 핵심인 태양이다. 노동시장 유연화, 공기업 민영화, 시장 개방 등의 현상은 태양을 둘러싼 행성들이다. 그런데 정태인 원장은 (금융자본주의가 아니라) 노동시장 유연화, 공기업 민영화, 시장 개방 등의 현상을 묶어 신자유주의라고 본다. 그러면서 '재벌 규제 방안'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조 설립, 최저임금 인상, 하청기업의 집단교섭권 부여, 공정거래위원회 강화, 소비자권리 강화 등을 제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 원장이 제시한 '재벌 규제 방안'조차 금융자본주의를 규제하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

다시 말해 금융자본주의를 규제하지 않고는 다른 사회·경제적인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는 (선택)의 저자들이 주주가치에 기반을 둔 운동인 '소액주주 운동'에 비판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소액주주 운동이 금융자본주의 체제에 기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쟁과 관련해 정태인 원장은 (프레시안) 기고에서 "금융세계화와 주주자본주의가 양극화의 근원이라는 점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 원장은 "(선택)이 재벌의 경영권 보호를 제시하고 있을 뿐"이라며 "과연 경영권을 보호해주면 재벌들이 배당금을 줄여서 투자를 늘리고 하청단가도 올려주며 노동자 임금도 끌어올릴까"라고 반문했었다.

정 원장은 또 "한 국가에서 (주주자본주의를 규제하는) 효과를 낼 뾰족한 정책은 별로 없다. (다만) 동아시아 국가들의 공조와 세계적인 금융규제 강화의 진행에 맞춰 주주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시정해야 한다"며 "동아시아가 공동의 환율정책, 외환보유고 관리 정책을 사용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이러한 발언을 소개하며 이 기자는 "동아시아가 공동의 환율정책을 쓰는 것은 자본통제보다 어렵고 시간도 더 걸린다"며 "동아시아 공동 환율정책이 이뤄질 때 주주자본주의를 규제하자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말자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정 원장을 비판했다.

"1주10표제 도입해 '창업자 프리미엄' 주자"

강연이 끝나자 청중의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주주자본주의 규제' 방안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오자 답변에 나선 정승일 연구위원은 기업을 안정적으로 꾸릴 만한 경영자나 창업자에게 이를테면 '1주10표'를 주자고 제안했다.

"우리나라는 1주 1표밖에 허용이 안 된다. 반면에 미국에서는 1주 1000표인 주식도 발행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페이스북이 상장하기 전 주식을 발행할 때, 창업자인 마크 주커버그가 20% 지분을 갖더라도 의결권을 60% 넘게 행사할 수 있게 하는 제도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러면 주커버그는 60%의 의결권에 대한 주식을 시중에 매각하지 않고 1주 1표짜리만 매각하면 된다. 창업자 프리미엄이 발동하는 것이다."

정 연구위원은 삼성그룹을 예로 들며 "삼성의 주주 중 80%가 마음만 먹으면 주주총회에 와서 이건희 회장을 몰아낼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며 "이건희 회장이 대주주 행세를 하면서 주가를 올리고 주주들의 배당금을 높여줬기 때문"이라고 운을 뗐다. 그는 "1주 10표제가 법률로 허용되면 이건희 회장은 주주들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배당을 많이 하지 않아도, 자가 주식을 매입하지 않아도 된다"며 "이런 식으로 금융자본주의를 제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종태 기자가 언급한 '메트로 9호선' 사례에 대해서도 정 연구위원은 "오스트리아나영국에서처럼 민영화하더라도 황금주 제도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금주란 단 1주를 갖고도 적대적 인수합병 등 주요 경영사항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주식으로, 주로 정부가 보유한다. 그는 "황금주 제도를 도입하면 서울시가 주식을 많이 안 가져도 메트로 9호선에 대한 의결권을 50% 넘게 만들 수 있다"며 "한국에도 이런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국제 기준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이종태 기자는 "대기업 계열사 해체와 약화에 반대하는 의 입장을 재벌 옹호로 오인해서는 안 된다"며 "(선택)의 문제의식은 주주자본주의와 재벌 중에서 양자택일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주자본주의와 복지국가 중에서 양자택일하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대기업 계열사들을 해체해서 국내 대기업에 대한 주주자본주의의 영향력을 높인다면, 친노동·친중소기업·복지 정책들은 실행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한국경제와 복지국가' 강연 시리즈

① "최악의 공황이 온다…우린 정말 재수 없는 세대"  

 /김윤나영 기자

2012년 3월 26일 월요일

"'삼성생명 국유화' 요구하는 정치적 상상력 필요하다"


이글은 프레시안 2012-03-25일자 기사 '"'삼성생명 국유화' 요구하는 정치적 상상력 필요하다"'를 퍼왔습니다.
[인터뷰] 저자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개념 정의를 분명히 하는 일, 합리적인 대화의 출발점이다. 그런데 그게 안 되고 있다. 정치권에 밀물처럼 몰려들었던 '경제 민주화'라는 말이 그렇다. 최근 여, 야 정당의 공천 내역을 보면, 벌써 한물 간 개념이 된 모양이다. '경제 민주화'를 적극적으로 주장해 왔던 이들에겐 몹시 인색한 공천이었다. 어느 정도는 예견된 일이었다. 너도나도 '경제 민주화'를 이야기했지만, 뜻은 온통 제각각이었다. 같은 말을 하면서도 저마다 생각이 달랐던 게다. 이래서는 말에 힘이 붙을 리 없다. '경제 민주화'라는 말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정치권 풍경은 그 결과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를 만났다. 라는 책을 새로 들고 나타난 그의 첫 마디가 '경제 민주화'였다. '경제 민주화'라는 개념으로 담을 수 있는 게 워낙 다양하다는 게다. 옛 유고슬라비아 방식의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부터 덴마크에서 발달한 농민 협동조합까지. 이처럼 폭넓은 개념을 놓고 나누는 대화가 겉돌지 않으려면, 서로 공유하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 장 교수는 그걸 '1인 1표(1人 1票)'의 원리라고 봤다. 많이 가진 사람이나 못 가진 사람이나 똑같이 권리를 행사하는 '일인일표'의 원리, 그게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런 원리를 경제 영역에 적용하자는 게 '경제 민주화'다. 이렇게 보면 '1주 1표(1株 1票)'의 원리, 즉 주식을 가진 비율에 따라 권리를 행사하는 방식은 '경제 민주화' 개념의 정반대편에 서 있다. 한마디로 주주자본주의 논리와 '경제 민주화'는 상극이라는 말이다.

장 교수가 안타까워하는 것도 이 지점이다. '경제 민주화'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주주자본주의 논리가 한국에선 '경제 민주화' 구호 안에 담겨 있다는 게다. 여기엔 한국 경제사의 독특한 맥락이 있다. 재벌들은 정부의 규제를 피하는 명분으로 주주자본주의 논리를 동원하곤 했다. 회사는 주주의 것이니, 주식이 없는 정부는 간섭하지 말라는 게다. 하지만 여기엔 모순이 있었다. 재벌 스스로도 주주자본주의 논리에 충실하지 못했던 게다. 1퍼센트대의 지분으로 삼성그룹을 지배하는 이건희 회장이 대표적인 예다. 개념 그대로의 주주자본주의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주주자본주의 역시 그저 말뿐이었다는 이야기다. 재벌 개혁 운동은 이 지점을 파고들었다. 주주자본주의 논리에 비춰 봐도 지금과 같은 재벌 지배 구조는 잘못이라는 것.

여기서 장 교수의 생각과 갈라진다. 그는 진짜 주주자본주의가 자리 잡아서 지금과 같은 재벌 구조가 해체된다한들 '경제 민주화'는 아니라고 본다. 변칙적인 순환출자구조가 깨지면, 해외 투기 자본만 이익을 보리라는 설명이다. 장 교수는 "이건희보다 돈 많은 사람이 와서 한국을 지배해달라는 게 재벌 개혁인가"라고 되물었다. 그는 이번 책에서 "재벌 해체는 투기 자본을 위한 잔칫상이다"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그의 대안은? '경제 민주화'라는 말의 본래 뜻에 충실하자는 게다. '1인 1표'의 원리가 작동하는 영역, 바로 정부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게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기업을 키우기보다 단기적인 이익만 쫓는 투기자본을 정부가 강력히 규제해야 한다는 것. 그간 개혁 진영이 줄곧 주장해 왔던 '중앙은행의 독립성 강화'에 대해 그가 의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중앙은행이 담당하는 통화정책이 왜 소수 전문가의 몫이 돼야 하느냐는 게다. 통화정책은 대중의 삶에 밀접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다수 국민을 '1인 1표'의 원리에 따라 대표하는 정부가 개입하는 게 옳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른바 관치금융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장 교수는 '그게 왜 나쁜가'라고 되묻는다. 오히려 정부가 책임을 방기하고, 모든 게 시장에만 맡겨진 상황이 진짜 문제라는 게다.

요컨대 그가 정조준한 표적은 박정희식 개발독재라기보다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지배질서가 된 시장만능주의다. '박정희의 유산'과 싸우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는 이들과는갈등이 필연적이다. 실제로 장 교수는 '좌파와 우파에게 모두 욕을 먹는 경제학자'로 종종 소개된다.

'경제 민주화' 구호가 허망하게 날아간 지금, 장 교수의 새 책이 나온 건 그래서 다행스럽다.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이종태 기자와 함께 나눈 대화를 묶어 낸 이번 책은 '경제 민주화'라는 개념을 차근차근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7년 전, 같은 방식으로 낸 에 담긴 문제의식이 보다 정교하고 깊어졌다. 그가 새로 낸 책이 널리 읽힌 뒤, 다시 등장할 '경제 민주화' 구호는 지금보다 견고한 뜻을 담고 있을 게다. 지난 20일, 서울 삼성동에서 장 교수와 만나 나눈 이야기를 정리했다. 이날 인터뷰는 박인규 발행인이 진행했다.



▲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적의 적'은 우리 편?…투기자본은 재벌보다 더 나쁘다!"

프레시안 : 이번 책에서 국제투기자본의 폐해에 대해 강력히 경고했다. 야당을 중심으로 나오는 '경제 민주화' 담론에선 빠진 대목이다.

장하준 : 시장 논리를 강화해서 '경제 민주화'를 이룬다는 주장은 개념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1주 1표(1株 1票)', 또는 '1원 1표(1元 1票)'의 원리가 작동하는 시장과 '1인 1표(1人 1票)'를 원칙으로 삼는 민주주의는 원래 양립하기 어렵다. 개혁 진영에 있는 이들 가운데서 '적의 적은 우리 편'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이들을 종종 본다. 재벌은 우리의 적인데, 국제투기자본이 재벌에겐 경영권을 위협하는 적이므로 국제투기자본이 우리 편이라는 식이다. 몹시 위험한 발상이다.

감상적인 애국주의를 주장하는 건 아니다. 요컨대 해외투기자본만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금융자본주의, 주주자본주의 자체가 문제다. 이른바 '토종 금융자본'를 키우자는 주장에 대해서도 나는 반대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금융자본을 규제해야 한다는 게 내 주장이다.

국경을 넘나들며 이익을 챙기는 금융자본을 빼고는 경제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이들 금융자본의 움직임은 합리성과 거리가 멀다. 원래 시장 자체가 그렇다. 합리적인 시장 원리는 환상일 뿐이다.

1970년대 말부터 각종 규제에서 풀려나기 시작한 국제금융자본은 1990년대 이후 고수익을 찾아 동아시아, 남미 등 이른바 신흥경제지역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다 수익률이 떨어지기 시작한 1997년 일제히 이 지역을 떠나면서 동아시아 외환위기를 불러일으켰다. 이후 금융자본은 미국의 IT버블을, 그 뒤엔 주택부동산버블을 일으켰다. 결과는 2008년 8월 세계 금융위기였다. 이즈음 거품 해소에 따른 달러화 가치 하락을 우려한 금융계 큰손들이 석유, 곡물, 광물 등 현물자산으로 대거 투자처를 옮기면서 세계 원자재 가격이 두 배 이상 폭등했다. 그리고 이 같은 곡물가격의 급등이 중동 자스민 혁명의 원인이 됐다. 한국도 영향을 받았다.

"IMF조차 자본 규제를 권한다"


▲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투기자본이 대중의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잘 알겠다. 그런데 정부가 그걸 규제할 방법이 있을까.

장하준 : 단기 이익만 노리고 들어오는 자본은 규제해야 한다. 이미 많은 나라가 그렇게 하고 있다. 예치금 제도라는게 있다. 외국인이 투자를 하러 들어올 때 갖고 오는 돈의 일정한 비용을 중앙은행에 예치를 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돈을 정해진 기한 이내에 갖고 나가면 예치금을 못 받는다. 너무 단기적인 투자는 못 들어오게 막자는 거다. 또 외국인 자본거래 이득에 대해, 특히 국채거래를 통한 이득에 세금을 걷는 나라가 많이 새겼다. 외국 금융기관 역시 외환 관계 파생상품거래 규제를 강화하는 추세다.

과거엔 이런 정책을 주장하면 IMF가 핏대를 올리며 반대했다. 그런데 요즘은 IMF마저 달라졌다. 후진국에는 이런 규제 정책을 권한다. 그만큼 국제유동자본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이야기다.

세계적인 추세, 이른바 '대세'를 핑계 삼는 이들이 많다. 과거엔 금융자유화가 세계적인 추세라며 반대 주장을 억눌렀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규제를 강화하는 쪽으로 '대세'가 바뀌었다. 그러자 '대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편리한 때만 '대세'를 이야기하는 셈이다. 이들은 리먼브러더스가 망하기 직전까지도 산업은행이 리먼브러더스를 인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게 '대세'를 따르는 길이라는 게다. 만약 당시 그들의 주장을 따랏다면 어떻게 됐을까. 후유증이 막심했을 게다. 자본통제, 파생금융상품에 대한 규제는 우리도 해야 한다.

"주주 이익만 생각하는 은행, 부동산 거품 키웠다"

프레시안 :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부동산 시장이 급등한 현상도 금융자본주의 질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장하준 : 1998년 이후 들어선 민주정부가 영미식 시장 개혁을 추진하면서 은행과 제2금융권이 주택 대출과 프로젝트 파이낸싱을 대폭 늘렸다. 저성장·저투자 기조 속에서 생긴 집값 상승과 부동산 투기는 금융시장의 유동성 공급 과잉 때문으로 봐야 한다. 고도성장기의 집값 상승과는 다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국유화됐다가 다시 민영화된 은행들은 주주 중시 경영의 대명사가 됐다. 그 결과, 은행들은 단기 수익에 골몰하게 됐고 손쉬운 돈벌이인 주택 대출을 늘리게 됐다. 이렇게 늘어난 유동성이 부동산 거품을 키웠다. 개별 은행들로 보면 합리적인 선택이다. 주택이라는 확실한 담보가 있으니, 위험도 적다. 하지만 경제 전체로는 해롭다. 케인스가 말한 '구성의 오류'가 바로 이런 경우다.

프레시안 : 주주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신랄하다. 같은 맥락에서 재벌 해체 주장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예컨대 삼성그룹의 순환출자구조가 깨지면, 삼성 계열사가 국제투기자본의 사냥감이 될 거라는 주장이다. 재벌의 변칙적인 지배구조를 비판해 왔던 개혁 진영의 주장과 충돌하는 대목인데….

장하준 : 재벌, 특히 삼성은 참 나쁘다. 자식들에게 편법 상속을 했고, 우리 사회 엘리트들을 매수했다. 여기에 대해선 법에 따라 단호하게 처벌을 해야 한다. 하지만 삼성그룹을 해체하자는 주장은 동의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삼성 계열사의 주인이 누가 되나. 국가가 주인이 된다면, 그건 차라리 낫다. 하지만 실제론 해외 투기자본이 주인이 될 게다. 이건희 회장은 우리가 정체를 아니까 그나마 낫다. 집 앞에서 데모라도 할 수 있지 않나. 얼굴도 모르고, 어떻게 돈을 마련했는지도 모르는 투기자본에 대해선 저항하고 통제할 길이 없다. 삼성이 과거 사카린 밀수했다고 비난을 한다. 하지만 삼성그룹이 해체 됐을 때 새로운 주인이 될 자본이 꼭 깨끗하리라는 법은 없다. 마약 거래를 했는지, 무기를 팔았는지 어떻게 알 건가.

과거 재벌과의 대타협을 주장했던 것은 그래서였다. 재벌의 최대 관심사는 경영권 보장이다. 그걸 해주고, 대신 다른 부분에서 양보를 받자는 거다.

스웨덴의 거대 기업집단을 거느린 발렌베리 가문을 칭찬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그건 이들 가문 구성원이 남달리 착하기 때문이 아니다. 차등의결권 제도를 통해 오너 일가에게 경영권을 확실히 보장해주는 대신, 거대 기업집단이 국민경제에 순기능을 하게끔 강제한 타협의 결과물이다.

주주들의 천국인 미국에도 차등의결권이 도입된 경우가 많다. 포드자동차가 대표적인 사례다. 총수 일가가 보유한 A주와 그렇지 않은 B주가 있는데, M&A 등 중요한 결정에선 B주 보유자들이 압도적으로 지지해도 소용이 없다. A주 보유자들 과반수가 동의해야만 한다. 나라마다 방식은 다르지만, 기업 경영권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는 대부분 있다. 독일의 경우, 노동자 이사가 비슷한 역할을 한다. 공장 매각, M&A 등의 결정은 노조의 동의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다.

하지만 한국에선 아무런 경영권 보호 장치가 없다. 주식만 사들이면 누구든 경영권을 장악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순환출자 같은 방식으로 경영권을 보호한 것이다. 유독 우리나라 재벌만 사악해서 선진국은 상상도 못한 경영권 보호 방법을 고안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이다.

"기업지배구조의 모범, GM은 왜 망했을까?"

▲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경영권을 뺏길 수 있다는 위험이 경영자를 긴장하게 하는 면도 있지 않나. 또 주주자본주의가 강화되면 경영 투명성이 강화되리라는 기대도 있다.

장하준 : 구체적인 현실을 봐야 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국내 대기업의 주주 배당률이 대폭 뛰어올랐다. 그래야만 주가를 높게 유지할 수 있고, 기업 사냥꾼들로부터 기업을 보호할 수 있다. 배당률이 높다는 건, 기업에 투자할 몫은 줄어든다는 뜻이다.

심지어 이익보다 더 많이 배당한 경우도 있다. 기업 사냥꾼인 칼 아이칸과 경영권 분쟁을 벌였던 KT&G의 경우, 2005년 주주 이익 환원율이 156퍼센트다. 이익을 다 퍼주고도 모자라서 내부 유보금까지 꺼내야 했다. 주주들에겐 신나는 일이다.

하지만 이게 전체 경제로서도 좋은 일일까. 아니라고 본다. 기업이 장기적으로 생존하려면, 미래를 대비한 투자를 해야 한다. 연구개발에 꾸준히 투자해야 하고, 직원 교육에도 돈을 써야 한다. 연구개발은 당장은 돈이 안 된다. 실패 위험도 있다. 하지만 기업이 오래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주주자본주의에선 이게 쉽지 않다.

좋은 예가 있다. 미국 자동차 산업을 대표했던 GM이다. 1955년 미국 자동차 생산량이 700만대였는데, 그 중 350만대를 GM이 생산했다. 지금 자동차 강국으로 꼽히는 일본에선 모두 합쳐서 연 7만대를 만들었다. 그때, 누군가가 일본의 도요타가 1등이 되고 GM은 계속 쪼그라들다 파산할 것이라고 했다면 아마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을 게다. 하지만 자체 기술 개발에 소홀하고, 필요한 기술은 사들이는 방식으로 유지하던 GM은 결국 몰락했다. 이런 GM이 기업지배구조라는 면에선 최고 모범생이었다. 대주주가 없고 사외이사는 많다. 주주이익도 듬뿍 챙겨줬다. 반면, 포드는 지배구조가 정말 나쁜 회사다. 창업주 가족이 이사회에서 엄청난 권력을 행사한다. 그런데 지난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GM은 망하고 포드는 살아남았다. 지금 잘나가는 삼성전자라고 해서 GM처럼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주주 이익만 생각하면, 연구개발 투자할 이유 없다"

핵심은 대다수 주주들은 기업의 미래에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평균적으로 주식을 보유하는 기간은 계속 짧아지고 있다. 미래를 위한 투자보다 눈앞의 비용 절감을 환영한다. 그러다보니 기업은 연구개발 투자에 소홀해지고, 당장 수익이 안 나는 사업은 포기하게 된다. 또 끊임없이 정규직을 줄이려 들고, 협력업체를 쥐어짠다. 당연한 일이다. 그래야 주주들이 좋아하니까. 비정규직 확대, 협력업체의 몰락 등 최근 주목받는 쟁점들도 주주자본주의라는 맥락에서 살펴야 한다.

국내에선 KT가 좋은 사례다. KT는 기업 지배구조의 모범 사례로 종종 꼽힌다. 다른 재벌 기업처럼 전횡을 부리는 대주주가 있는 것도 아니다. 경영 투명성도 높다. 하지만 국민경제에 실제로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들여다보면, 칭찬하기 어렵다. 민영화 이후, 정규직이 대대적으로 잘려나갔다. 그들이 불필요한 인력이었던 걸까. 그렇지는 않다. 잘려나간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비정규직으로 다시 고용됐다는 점을 보면 말이다. 반면, 주주들에 대한 배당률은 매우 높다. 이사들 보수 역시 크게 뛰었다. 결국 다수 노동자는 울고, 주주와 경영진만 웃었다는 말이다. 또 주주 배당률이 높아지면서 연구개발 투자 역시 위축됐다. 이걸 왜 모범사례로 봐야하나.

내가 인터뷰할 때마다 드는 사례인데, 외환위기 이후 이공계가 주저앉고 의대 인기가 폭등한 것은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 예전에는 대기업에서 핵심 업무를 담당한 이들은 미래를 크게 불안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주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경영방식이 자리 잡은 지금은 달라졌다. 당장 수익을 내지 못하면, 누구든 고용이 불안해졌다. 회사 생활이 과거보다 훨씬 팍팍해졌다. 회사원보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직업으로 젊은이들이 몰리는 게 당연하다.

▲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복지는 '공동구매'다"

프레시안 : 최근 복지 담론이 떠오른 것도 그래서다. 보통사람들이 느끼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임계치에 달했다.

장하준 : 복지가 바로 경제 민주화의 핵심이다. 사회적 약자에게만 복지를 제공하는, 미국식 잔여적 복지에는 미래가 없다. 잔여적 복지는 비용을 부담하는 측과 혜택을 입는 측이 서로 다른 방식이다. 부자들에게서 거둔 돈으로 가난한 이들이 굶어죽지는 않게끔 하자는 것이다. 부자들 입장에선 자신들과 전혀 무관한 일에 돈을 써야 하는 셈인데, 당연히 돈을 덜 쓰게끔 하는 방향으로 압력을 넣게 된다. 이런 압력이 쌓일수록 복지 규모는 줄어들게 된다. 결국 보편적 복지가 답이다. 모든 사람이 복지 혜택을 누리고, 동시에 모든 사람이 비용을 대야 한다. 이처럼 수혜자와 돈 내는 사람이 일치해야만 지속 가능하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들 비용 문제를 들고 나온다. 하지만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복지 예산은 내버리는 돈이 아니다. 일종의 공동구매 개념으로 봐야 한다. 수요가 많은 상품을 구매할 때 공동구매를 하면 싸게 살 수 있다. 예컨대 무상의료가 이뤄지는 나라에선 약값이 싸다. 정부가 공동구매를 하기 때문이다. 이걸 시민 각자가 따로 산다면, 결국 낭비다. 의료, 교육, 보육, 노후 대비 등 누구에게나 필요한 서비스를 공동구매하는 것. 그게 복지다. 그리고 그걸 위해 돈을 갹출하자는 게 복지 강화 주장이다.

복지는 경제성장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사회안전망이 튼튼하면, 산업간 인력이동도 쉽다. 부실산업에서 퇴출된 인력이 생계 걱정 없이 새로운 산업이 요구하는 기술과 지식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복지가 잘 돼 있는 나라들이 경제 위기 속에서도 안정적인 성장을 한다.

복지 강화가 필요한 이유는 또 있다. 바로 한·미 FTA, 한·EU FTA 때문이다. 선진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으면, 취약한 분야에선 탈락자가 속출하게 된다. 이들이 재기할 수 있게끔 하는 사회 안전망이 필수적이다.

"60년대에 FTA 맺었다면, 삼성은 지금도 설탕회사"


▲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FTA에 대해 줄곧 비판적이었다. 한·미 FTA가 발효됐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이라도 폐기해야 할까.

장하준 : 당장 폐기하는 게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국제 정치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야 할 것 같다. 다만, 한·미 FTA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한·EU FTA 역시 문제다.

선진국과 자유무역협정을 한다는 건 제조업 육성을 지금 수준에서 동결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한국이 1960년대에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었다고 가정해보자.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가 지금처럼 세계시장을 주름잡을 수 있을까. 아마 삼성은 지금까지도 설탕 사업을 주력으로 삼고 있을 게다. 국가가 전략적으로 산업을 지원하는, 적극적인 산업정책이 있었기에 한국의 제조업이 성장할 수 있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산업 강국은 모두 정부의 산업정책이 낳은 결과물이다. 시장경제 논리의 본산인 미국이라고 다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세계 최고 수준인 제약 산업은 미국 보건성이 지원한 연구자금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정보통신 산업, 항공 산업 등도 마찬가지다. 미국 국방성이 지원한 연구자금이 밑거름이다. 또 국가가 전략적으로 지원한 과학기술 연구 역시 빠뜨릴 수 없다. 이런 점은 간과한 채, 정부의 산업정책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건 잘못이다.

"한국은 제조업 선진국 아니다…부품 소재·정밀기계 키우는 산업정책 필요"

프레시안 : 과거 한국도 강력한 산업정책을 활용했다. 박정희 정권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지금은 환경이 바뀌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엔 한국이 과학기술과 산업의 후진국이었다. 따라서 엘리트 관료들이 선진국으로부터 '매뉴얼'을 가져와서 재벌에게 이식하는 방식이 통했다. 국내 재벌들 역시 선진국 기업을 따라가는 입장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다. 휴대폰, 자동차, 조선 등 다른 산업 분야에서도 한국 대기업들이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입장이 바뀌었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선 과거의 산업정책, 즉 선진국 '매뉴얼'을 따라하는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재벌 입장에선 새로 모험을 걸만한 투자처 역시 막막하다. 재벌이 빵집을 차리는 식으로 손쉬운 돈벌이에 골몰하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고 본다. 과연 박정희 정권 시절에 통하던 산업정책이 지금도 효과가 있을까.

장하준 : 한국이 제조업 선진국이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몇몇 분야만 뛰어날 뿐이다. 한국의 제조업 생산성은 미국의 절반 수준이다. 기술 수준 역시 뒤쳐진 분야가 많다. 예컨대 정밀기계, 부품소재, 제약 등은 선진국 수준에 한참 못 미친다. 이런 분야에선 적극적인 산업정책이 필요하다. 또 충분히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분야다.

하지만 FTA 체결로 인해, 우리가 키워야 할 첨단 제조업 분야는 영원히 발전시키지 못할 가능성이 커졌다. 또 한·미 FTA 체결 이후, 미국식 제도가 이식되면서 주주자본주의가 강화된다면 설령 막대한 자금을 가진 재벌이라고 해도 장기 투자를 하기 어려워진다. 당장은 손해지만 길게 보면 이익이 될 분야에 연구개발 투자를 한다면, 당장 주주들이 반발하고 나설 게다.

"삼성생명 국유화하고 삼성전자 경영권 보장해주는 빅딜, 지지한다"

프레시안 : 앞서 경제 민주화의 핵심이 보편적 복지라고 말했다. 또 재벌과의 대타협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했다. 복지 강화 주장은 개혁진영으로부터 지지를 받지만, 재벌 총수에게 경영권을 보장해주자는 주장은 반대다.

그런데 복지 강화와 재벌 개혁이 만나는 지점도 있다. 예컨대 보험회사 문제다. 보험산업은 부실한 사회안전망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보편적 복지가 확대되면 일반인을 상대로 한 보험업은 아무래도 위축된다. 예컨대 건강보험 보장성이 대폭 강화되면, 민간 의료보험 상품을 구매할 이유가 사라진다. 실제로 비용 대비 혜택으로 보면, 국민건강보험이 민간 의료보험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하다. 당연히 재벌 계열 보험사들은 복지 확대 주장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복지 확대 주장은 이 대목에서 재벌과 정면충돌한다. 그렇다면, 주요 보험회사를 국유화하는 게 옳지 않을까. 예컨대 삼성그룹이라면, 이건희 회장 일가에게 삼성전자 경영권은 보장해주되 삼성생명은 국유화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특히 국내 생명보험사는 보험 계약자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성장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장하준 : 유럽 복지국가에서 대기업과의 사회적 대타협이 거저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대기업 국유화'를 포기하고 총수에게 경영권을 보장해주는 대신, 복지국가 건설에 동참하라고 압박한 결과다. 국유화 자체도 꼭 나쁘게만 볼 게 아니다. 투기자본에게 기업을 넘기는 방식의 재벌개혁보다는 차라리 재벌 기업 국유화가 낫다고 본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다수 국민을 대표해서 재벌을 통제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삼성생명 국유화와 삼성전자 경영권을 맞바꾸는 빅딜, 나도 지지한다. 이런 식의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총수 일가를 몰아내는데 그치는 개혁은, 설령 성공한다고 해도 뉴스를 보는 잠깐 동안만 즐겁게 해줄 뿐이다. 그 뒤엔 더 고통스러운 시간이 기다린다. 이젠 발상을 바꿀 때다. 시장 논리, 주주자본주의 논리를 강화해서 재벌을 개혁한다는 주장은 틀렸다.



/성현석 기자(=정리)

2012년 3월 18일 일요일

기업, 주주에게만 맡기지 말라


이글은 Economy Insight 2012-03-01일자 기사 '기업, 주주에게만 맡기지 말라'를 퍼왔습니다.
[Special Report Ⅰ] 변화 필요한 주주자본주의 - ① 이해관계자 기업 모델 대안으로 거론


“기업지배구조 이론은 실패했다!”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프랑스의 가 최신호에서 도발적인 선언을 했다. 주주의 권한과 이익을 우선시하는 기업지배구조 이론이 소개된 지 40년이 지난 지금, 세계는 “끔찍한 위기에 봉착해 있다”는 것이다. 주주 이익 극대화를 위해 금융계가 위험천만한 투자에 나서는가 하면, 기업들은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생산공장 해외 이전에 ‘올인’하다시피 했다. 결국 기업의 단기적인 성장주의를 부추겨 오히려 성장하지 못하고 쇠락의 길을 걷는 ‘불임 기업’을 양산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업지배구조 이론의 참담한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주주뿐 아니라 종업원과 소비자, 지역사회 등 이해관계자 모두의 이익을 위한 새로운 자본주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의 주장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무리다. 재벌에 의한 전횡이 시장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인 상황에서 재벌을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업지배구조 이론이기 때문이다. 재벌의 전횡을 막으면서 소외된 이해관계자도 나오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없을까. _편집자
환경비용 등 고려 대상 늘어… 주주들만의 자본주의 벗어나야 ‘미래 비전’ 가능
기업지배구조 이론은 참담한 결과를 초래했다. 모든 이해관계자가 참여하고, 기업 활동이 사회나 환경에 미치는 영향까지 고려한 새로운 종류의 기업 모델을 모색해야 한다.
이미 수십 년째 기업지배구조(Corporate Governance) 이론이 대기업의 경영 원칙으로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요컨대 경영자는 기업의 법적 주인인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논리대로라면 기업지배구조 이론에 따라 경영자를 압박하면 만인이 그 혜택을 입을 수 있다. 경영자가 기업을 더 효율적으로 운영하거나, 새로운 수요 변화에 맞춰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하도록 자극하기 때문이다.
40년이 지난 지금, 기업지배구조 이론이 가져온 결과는 참담하다. 특히 금융계가 기업지배구조 이론을 따른 결과, 오늘날 우리는 끔찍한 위기에 봉착해 있다. 기업지배구조 이론은 단순히 금융계가 위험천만한 투자에 나서도록 부채질만 한 것이 아니었다.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생산공장 해외 이전 광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불행히도 구조조정과 그에 따른 생산지 이전은 산업국을 더욱 빈곤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기업지배구조 이론은 기업의 단기주의 경영전략도 부추겼다. 기업의 근시안적 경영은 해당 기업의 성장에 걸림돌이 되었지만, 그런 경영원칙을 따르지 않는 다른 나라, 특히 아시아의 기업이 성공하는 데 유리한 토양을 제공했다.

주주 이익 극대화의 함정
1970년대 모퉁이를 돌기 전까지 수십 년 동안, 대기업 경영자는 협력적 방식으로 부를 생산하는 관료조직의 수장이자 일원으로 자리했다. 무엇보다 업무능력과 통솔력이 있는 자가 경영자로 선출됐다. 경영자는 장기적 비전에 따라 기업을 운영했다.
미국의 정치·경제평론가 제임스 버넘이 1941년 저서 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기업 경영에서 무엇보다 재생산이 우선시될 정도였다. 버넘의 이론은 20년 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와, 프랑스의 사회학자 레몽 아롱의 에 의해 계승됐다.
이미 1932년부터 미국의 아돌프 벌과 가디너 민즈는 에서 거대 산업체를 지휘하는 경영자가 실질적 경제권을 쥐기 시작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주주가 여러 명으로 분산되고, 특히 경영자의 전문적 역할이 중시되면서 그런 변화가 일어났다.
하지만 이는 얼마 못 가 ‘경영자가 주주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는 말로 이해됐다. 특히 기업지배구조 이론을 지지하는 이들은 이 책을 근거로, 경영자가 그저 주주의 완전한 재산권을 행사하기 위한 수임자나 대리인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주주의 권한이 강화됨과 동시에, 연기금이나 기타 기관투자자들의 세력도 함께 확대됐다. 가계 자산에서 금융 자산의 비중이 늘어난 덕분이었다. ‘영광의 30년’(제2차 세계대전 이후 30년 동안의 경제호황기)이라 불리는 호황기 동안 산업국에서는 임금노동이 급속도로 성장했다. 노동자는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노동자 역시 저축금을 기반으로 수익을 챙겼다. 노동자가 맡긴 종잣돈은 점차 유가증권 등의 형태로 투자됐다. 일반 법인이 직접 관리하던 노동자의 예금은 점차 전문기관의 손에 운용되기 시작했다. 이 전문기관들은 무엇보다 주주의 수익 증대에 역점을 두라고 경영자를 압박했다.
이렇게 기업 환경이 변화하면서, 경영자는 밥그릇을 잃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좀더 생산성 있는 일에 몰두하기보다는 상당한 시간을 투자자를 설득하는 데 보내야 했다. 동시에 이런 변화 덕분에 경영자 자신도 배를 불릴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다. 경영자는 ‘주주의 이익 증대’라는 미명 아래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자신 역시 그에 비례하는 천문학적 액수의 연봉을 챙겼다.
그렇다고 기업지배구조 이론이 지닌 최악의 모순이 비단 경제침체기에도 경영자의 보수가 인상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리라. 어쨌든 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주 이익을 수호하는 것이 자산관리자뿐 아니라 경영자에게도 자신의 어마어마한 소득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은 아닌지 의문이 들기까지 한다.


주주 이익 수호에 대한 압력이 거세지면서 1980년대부터 기업은 바야흐로 ‘핵심사업 집중화’ 전략에 나서기 시작했다. 경영 컨설턴트들은 복합기업(Conglomerate·서로 별 연관이 없는 다양한 부문에서 활동하는 기업들의 그룹)과 수직통합형 기업(Vertical Integration·한 기업이 생산에서 유통까지 전 단계에 진출하는 것)에 다양한 사업부문을 인수해 발전시키기보다 불필요한 사업부문을 정리하라고 조언했다. 시장점유율 확대를 바라는 다른 경쟁사에 이문을 남기고 팔 수 있는 부문을 매각하도록 권했다.
이처럼 사업영역을 전문화하면서 기업은 핵심부문의 몸집을 불리거나,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기업이 취약해지는 역효과도 일어났다. 자산 증식에만 목매는 근시안적 경영은 총체적 경제성장이나 혁신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많은 기업이 자사가 가장 잘하는 부문에 역량을 집중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올렸지만, 그로 인해 일부 자회사나 사업부문을 접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일정 시기에는 다소 수익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자회사나 사업부문도 한 기업의 노하우나 역량의 폭을 넓혀 결국 미래 성장 잠재력 확대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랬다면 기술 변화가 급격한 시기에도 기업은 좀더 다양한 경영전략을 펼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기업지배구조’가 인기 없는 까닭
기업지배구조 이론이 맬서스주의적인 축소 지향 경향을 띠는 탓인지, 고도성장을 구가하는 신흥국에서 이 이론은 좀처럼 인기가 없다. 다른 나라와 정반대로 신흥국의 기업들은 ‘경영자 중심 자본주의’(Managerial Capitalism)에 입각한 경영전략을 펼치고 있다. 내적 성장에 역점을 두고 사업 다각화나 수직 통합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한국의 ‘재벌’이다. 비단 신흥국 기업만이 아니다. 전통적인 유럽 산업국을 비롯해 다른 나라 기업 중에도 여전히 주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장기적 시각의 경영전략을 펼치거나 다양한 상품군을 유지하면서 주주의 요구까지 충족한 기업들이 더러 있다. 대표적인 예가 생고뱅과 제너럴일렉트릭(GE)이다. 더욱이 GE는 금융부문 악화로 고전을 면치 못했던 기업이어서 더욱 놀랍다.
어쨌든 기업지배구조 이론은 적어도 주주의 수익을 늘리는 데는 기여하지 않았을까? 사실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먼저 기업지배구조 이론이 임금노동자에게 이롭지 않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주주를 위한 가치 창출’이라는 미명 아래 구조조정과 생산공장 해외 이전의 붐이 일어나면서 노동자는 고용불안의 제물로 전락했다.
여기에 저성장과 그로 인해 발생한 대량실업은 자본에 대한 노동의 지위를 더욱 약화시켰다. 경제호황기 동안 노동자에게 더 많은 안전망을 제공하는 사회적 협약이 반드시 주주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주주는 배당금 형태의 수익 배분 비중이 줄어들었고, 생산성 향상에 따라 노동자에게 더 많은 임금을 지급하며 성장의 파이를 함께 나눠먹어야 했다. 동시에 수익 가운데 일부가 주주에게 배분되지 않고 기업에 재투자된 덕분에 장기적으로 주주의 수익이 더욱 배가됐다. 반면 오늘날 기업은 매번 막대한 규모의 배당금 배분에 나서야 하는 까닭에 정작 투자나 발전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과거에는 비교적 대출금리가 낮고 물가상승률이 높은 탓에 은행의 자본이 대개 금융 외 기업으로 흘러들어갔다. 반면 오늘날에는 모든 자본이 금융권으로 쏠리고 있다. 심지어 일부 기업은 단기 수익을 올릴 별다른 투자처를 찾지 못한 채 자사주를 매입하는 데 막대한 현금을 쏟아붓고 있다.
한 예로 2010년 프랑스 CAC40 상장기업이 자사주 매입에 지출한 금액은 무려 59억유로(약 8조7252억원)에 달했다. 이처럼 기업은 어떻게 부를 창출할지 몰라 그저 파이를 나눌 입이라도 줄여보겠다며 자기자본을 잠식하고 있다. 훨씬 더 맬서스주의적 행태를 보이는 셈이다. 그럼에도 그토록 생각이 짧은 경영진에게 어쩌자고 후한 보수를 챙겨주는 것일까?
하루빨리 ‘게임의 법칙’을 바꾸어야 한다. 과거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영광의 30년’ 시대의 기업 경영은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 적합한 방식이었다. 당시 유럽은 오늘날 신흥국과 같이 전쟁으로 무너진 경제를 재건하고 낙후된 경제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고도의 경제성장기를 구가했다. 

미국 뉴욕의 주식시장에서 미국 기업 메릴린치 직원들이 상황판을 들여다보고 있다. 주주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세계경제가 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뉴시스 AP.

이해관계자 기업 모델로 가야
앞으로는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부를 측정하고 환경비용까지 고려해야 하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런 새로운 세상에 적합한 좀더 장기적인 비전에 입각한 시장경제를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이 스스로 사회와 환경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 외에 새로운 규범과 규칙을 부과해야 한다.
주주의 이윤 증대를 강요하는 독재적인 경영과 단절한 새로운 형태의 기업 모델을 창안해야 한다. 모든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기업을 만들어야 한다. 다시 말해 (노동자뿐 아니라 납품업체, 고객, 토지 소유자까지) 위험부담을 나눠가져서, 장기적으로 기업이 잘 운영되는 게 이로운 모든 이들이 동참할 수 있는 기업 모델을 모색해야 한다. 

글 / 필리프 프레모 Philippe Fremaux 기자 ⓒ Alternatives Economiques·번역 허보미 위원

2011년 11월 27일 일요일

한-미 FTA 앞, 국가와 헌법을 묻다


이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11-11일자 기사 '한-미 FTA 앞, 국가와 헌법을 묻다'를 퍼왔습니다.

1. “차종에 대한 비메탄유기가스의 배출량은 캘리포니아 규정집 제13편제1961(b)(1)(A)조에 규정된 것보다 더 엄격하지 아니할 것이다.”(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부속서 9-나 자동차 작업반 부속서한) 시민이 물었다. “환경 기준조차 우리 마음대로 정할 수 없는 것 아니냐.” 정부가 답했다. “우리는 세계적으로 가장 엄격한 기준을 채택하는 미국 캘리포니아 기준을 도입하며, 우리 배출가스 기준을 캘리포니아주가 정하는 것은 아니다.”(지난 11월 2일 외교통상부 대변인) 미국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규정을 바꾸면 어떻게 될까? 한-미 FTA의 맨얼굴이다.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자유무역협정’은 조약이다. 헌법상 조약은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헌법 제6조). 미국은 다른 나라와 조약이 아닌 행정협정(Executive Agreement)을 체결하기도 한다. 한-미 FTA가 그것이다. 그런데 미 의회는 행정협정 중에서 통상협정(Trade Agreement)에 대해서는 별도의 이행법을 만들어 내용을 규정함과 동시에 효력을 제한한다. 과연 한-미 FTA는 미국의 법과 제도, 행정 조치와 실무 관행을 어느 정도 변화시키는 협정일까? 또박또박 읽어야 한다.
미국의 한-미 FTA 이행법의 핵심은 이렇다. “한-미 FTA 제1장(최초 규정 및 정의), 제11장(투자), 제21장(투명성), 제23장(예외) 및 제24장(최종규정)을 이행하는 데에 행정 조치의 변경은 필요 없다”, “제5장(의약품 및 의료기기)을 이행하는 데에 법, 행정부 규정 및 실무 변경은 필요 없다”, “제7장(관세행정 및 무역 원활화), 제9장(무역에 대한 기술장벽), 제19장(노동), 제20장(환경)을 이행하는 데에 법의 변경은 필요 없다”, “제10장(무역구제)을 이행하는 데에 미국의 반덤핑 또는 상계 관세 법률과 규정을 바꿀 필요가 없다”, “제3장(농업), 제8장(위생 및 식물검역 조치), 제12장(국경 간 서비스 무역), 제13장(금융서비스), 제14장(통신), 제15장(전자상거래), 제16장(경쟁), 제18장(지적재산권)을 이행하는 데에 법이나 행정 조치의 변경은 필요 없다”….
미국은 바뀔 거라곤 없다. 바꿀 필요도 없고 바꿀 생각조차 없었다. 가장 고전적 의미의 순수한 ‘자유무역협정’ 그대로다. 그래서 바뀌는 거라곤 ‘무역관세’와 ‘수수료’다. 관세와 수수료를 인하하면 그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역관세와 수수료를 인하해야 한다. 실무 관행을 바꿔야 한다. 행정 조치를 바꿔야 한다. 경제질서를 우회전해야 한다. 이미 10개 이상의 법을 바꿨고, 대기 중인 법만도 20여 개다. 세제도 개편해야 한다. 종국엔 국민투표에 의하지 않고 헌법을 바꿔야 한다. 해석 개헌이 아니라, 헌법 아래 있는 조약이 헌법을 치받아, 헌법을 바꿔버리는 꼴이다.
미국은 그대로, 한국만 뒤집어진다
2. 목표가 달랐다. 미 의회와 행정부는 한-미 FTA의 목표를 ‘관세협상이 아니라 규제완화, 민영화를 되돌릴 수 없도록 하는 것’과 ‘비관세장벽 제거’에 두었다. 당연히 미 이행법 제102조는 “미국의 어떠한 법령에 불합치하는 협정의 규정 또는 어떠한 자나 상황에 대한 동 규정의 적용은 효력을 가지지 아니한다”고 정했다. 한국은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통상 목표에 호응했다.
참여정부 시절에 협상 책임자였고 지금은 삼성전자 사장으로 가 있는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의 말을 되새겨보자. “한-미 FTA는 낡은 일본식 법과 제도를 버리고 미국의 글로벌 스탠더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한-미 FTA 청와대 브리핑 제1호·2006). ‘감세, 규제완화, 작은 정부’를 내용으로 삼는 신자유주의 정부, 주주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 시장만능주의에 기반한 미국식 국가 모델을 우리 국가 모델로 채택하자는 것이었다. 어떤 시민주권의 동의조차 없이 통상 관료와 행정부 책임자의 정치적 결단으로 국가 모델을 직수입하는 역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 시민주권에 대한 심각한 모반이었다.


<절망의 무게>, 2011-정용일

삼정전자 사장님의 헌법학
그로부터 2년 뒤 미국에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물론 우리도 1997년 외환위기를 겪었다. 당시 미국이 주도하던 국제통화기금(IMF)의 처방전은 철저히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것이었다. 초고금리 정책이었다. 재정적으론 긴축을 요구했다. 강력한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했다. 금융기관은 통폐합되고, 당연히 정리해고가 실시됐다. 그럼에도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는 이는 드물었다. 그러나 2008년 미국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처방전을 내놓았다. 초고금리가 아니라 ‘초저금리’였다. 재정 적자의 나라 미국에서 강력한 재정 투입이 있었다. 대규모 인위적 경기부양에 나섰다. ‘대마불사’(大馬不死)는 정치적 현실이 되었다. 금융기관을 살렸고, 자동차 회사를 국가가 먹여살렸다. 미국식 금융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최소 개입 원칙은 온데간데없었다.
돌이켜보면 한-미 FTA 협상을 시작한 2006년이나 협상을 강압적으로 비준하려는 2011년이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이해는 거의 무지에 가깝다. 같은 점이라면, 미국식 경제 모델과 국가 모델을 역사의 완성태로 이해하려는 점이다.
3. 한국과 미국, 두 나라 간 헌법의 차이가 국가 모델의 차이다. 미국은 계약의 자유를 근본적 권리로서 보호하며 사적 소유권 보호가 철저하다. 지적재산권 보호가 강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협정에서 지적재산권은 미국의 주된 관심사다. 지적재산권을 규정한 제18.10조 27항의 일부다. “(지적재산권) 침해자의 금전적인 동기를 제거하려는 정책에 합치되게, 장래의 침해를 억지하기에 충분한 벌금형뿐만 아니라 징역형 선고를 포함하는 처벌. 각 당사국은 나아가 사법 당국이 형사적 침해가 상업적 이익, 사적인 금전적 이득을 목적으로 발생하는 때에, 실제 형기의 부과를 포함하여 장래의 침해를 억지하기에 충분한 수준에서 처벌하도록 권장한다.”
책도둑은 글로벌 파렴치범
지적재산권은 보호해야 마땅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전통적으로(물론 현실과 합치된다고 강변하고 싶지는 않지만) ‘책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존재한다. 미국은 이런 사회 문화조차 바꾸고 싶어 한다. 수단 하나로 형사 절차에 깊숙이 개입하고 싶어 했다. 형의 종류를 형법도 아닌 조약에 규정했다. 입법 재량에 대한 중대한 침해다. 사법 당국에는 강력한 처벌을 주문했다. 우리 대법원은 조약에 이런 내용까지 담긴다는 사실을 과연 알고 동의했을까? 통상교섭본부가 이런 부분까지 약속하도록 시민주권은 미리 위임했던 걸까? 사법부의 양형 재량까지 한-미 FTA가 정해주었다. 미국식 법과 제도와 관행을 받아들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방편이었다.
4. 물론 우리도 계약과 시장에 기반한 사회다. ‘소유권 중심 사회’라는 것 또한 인정한다. 다만 우리 사회는 재산권은 보장하되, “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하여야 한다”(제23조 2항)고 정해두었다. 시민의 기본권은 인정하되,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다”(제37조 2항 전단)고 유보해두었다.
한국과 미국의 헌법 모델에서 결정적 차이는 바로 이 시대의 우상, ‘경제’에 있다. 미국 헌법에는 경제 조항이 없다. ‘정부 편’과 ‘기본권 편’만으로 구성된 것이 미국 헌법이다. 한국에 있는 ‘경제질서 편’이 없다. 계약 조항과 적정 절차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헌법 의식이다. 우리나라는 다르다. 경제질서 편을 두었고, 그곳에 9개 조문을 두었다. 그중에서 결정적 의미는 헌법 제119조 2항에 있다.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한국의 헌법재판소는 경제질서를 이렇게 정의한다. “사유재산제를 바탕으로 하고 자유경쟁을 존중하는 자유시장경제 질서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이에 수반되는 갖가지 규제와 조정을 용인하는 사회적 시장경제 질서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헌재 1996.4.25 92헌바47) 그래서 우리나라 헌법이 정한 경제질서, 즉 이런 헌법의 지배를 받는 국가 모델은 ‘자유시장경제 질서’와 ‘사회적 시장경제 질서’의 조화에 있다. ‘공익’과 ‘사익’의 조화에 있다. ‘개인’과 ‘나라’의 균형에 있다. 특히 경제 영역에서만큼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조화, 제조업과 농·어업의 조화 등 공익적 가치를 추구한다.
어쩌면 한-미 FTA 최고의 수혜자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대변하는 재벌이 될 것이다. ‘시장만능주의’를 추구해온 전경련에 헌법 제119조에서 127조에 이르는 경제 편은 최악의 ‘전봇대’였기 때문이다. 한-미 FTA에 더 이상 농·어민 보호는 없다. 중소기업 보호도 없다. 시민주권에 대한 책임성과 반응성의 원리도 없다. 오로지 투자자의, 투자자에 의한, 투자자를 위한 국가만이 존재한다.
그 중심에 ‘투자자-국가 소송제’(ISD)가 있다. 미국 뉴욕 월가의 초국적 자본이 한국에 투자하는 경우를 예상해보자(미국 자본을 미국인들만의 자본으로 이해하는 것은 지극히 협소한 이해다). 이들은 △우리 중앙정부나 시도 정부가 투자 인가나 투자 계약을 위반한 경우 △직접 혹은 간접 수용으로 인해 자신들의 투자에 손해가 발생했을 경우 국제중재청구를 제기할 수 있다. 투자 계약은 미국이 맺은 FTA 중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설명이 필요하다. 투자 계약은 한마디로 공공서비스 민영화 계약이다. 사회적 인프라 개발에 참여할 수 있는 계약이다.
통째로 삭제되는 헌법 ‘경제편’
이를 ‘투자 계약’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화장했다. “발전 또는 배전, 용수 처리 또는 분배 또는 통신과 같이 당사국을 대신하여 공중에 서비스를 공급하는 권리 또는 정부의 배타적 또는 현저한 이용과 혜택을 위한 것이 아닌 도로, 교량, 운하, 댐 또는 배관의 건설과 같은 기반시설 사업을 수행할 권리”(제11.28조). 즉 상하수도 민영화, 전력 민영화 계약이고 대중이 이용하는 도로나 댐 등에 대한 건설 계약이다. 미국 투자자의 광범위한 참여를 보장했고, 지방정부나 중앙정부가 계약을 위반할 경우 곧바로 소송을 제기하도록 규정했다.
현 정부가 인천공항 민영화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는데, 바뀐 새 정부가 이를 취소했다고 하자. 곧바로 소송감이다. 얻은 건 투자자의 민영화 참여권이요, 잃은 건 공공정책의 재량성이다. 후진할 수 없다. 시민을 위해, 공공복리를 위해 규제를 강화하는 것은 전진이 아니라 후진으로 인정된다. 개방과 자유화를 향해, 투자자를 위한 기업국가만을 목표로 앞으로 내달려야 한다. 브레이크 없는 미국산 자동차에 동승한 형국이다.
대한민국 주권은 투자자에게 있다
5. 간접 수용에 대한 우리 사회의 논란이 거세다. 미국 판례법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법리다. 세상 어느 곳도 헌법에 간접 수용을 명문화한 나라는 없다. 오로지 재산권의 절대적 보장과 계약에 기초한 미국 사회라서 가능한 법리다. 문제는 공공정책의 재량성이다. 공공정책의 무기력화다. 물론 정부는 재량을 충분히 확보해두었다고 방어한다. 일부는 옳고, 대부분 틀렸다. “극히 심하거나 불균형적인 때와 같은 드문 상황을 제외하고는 공중보건, 안전, 환경 및 부동산 가격 안정화(예컨대 저소득층 가계의 주거 여건을 개선하기 위한 조치를 통한)와 같은 정당한 공공복지 목적을 보호하기 위하여 고안되고 적용되는 당사국의 비차별적인 규제 행위는 간접 수용을 구성하지 아니한다.”(부속서 11-나 수용) 담배에 대해 가격규제 정책이 강화될 수 있다. 한국 정부에는 공중보건이지만 미국 투자자에게는 간접 수용이다.
조약에 대한 해석은 각자 유리하게 하는 법이다. 모든 공공정책은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 정부 정책이 공중보건 등 4가지 정책에 한정될 수도 없다. 달리 해석될 여지가 충분한 만큼 정부 정책이 소송 대상이 될 여지도 충분하다. 정책의 시민영향성을 고려하기보단 외국 투자자에 대한 영향을 고려해야 할 판이다.
정부는 왜 시장에 대한 조정 권한과 공공정책에 대한 결정 역량을 스스로 축소하길 바랄까. 왜 “경제가 사회적 관계에 포함되는 대신 사회적 관계가 경제 체계 안에 포함돼버리는”(칼 폴라니) 상황을 희망하는 것일까. 왜 시민주권보다 투자자 재산권을 더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인간의 존엄보단 계약의 자유를 최고 가치로 여기는 초시장사회, 초시장국가 모델을 왜 구태여 탐하는 걸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흐릿한 먼 곳을 무턱대고 쳐다보지 말고 우리가 서 있는 주변의 복잡한 상황을 잠시 동안 조용히 응시하자.”(토머스 칼라일)

글. 최재천 (변호사) 헌법학 박사, 전 국회의원(17대). 저서로 (2006), (2009)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