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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1일 금요일

"'재벌과 투기자본, 뭐가 더 나쁜가?"


이글은 프레시안 2012-06-01일자 기사 '"'재벌과 투기자본, 뭐가 더 나쁜가?"'를 퍼왔습니다.
['한국경제와 복지국가' 강연] 이종태 "복지국가냐, 주주자본주의냐"

"민영화는 나쁘다. 그 중에서 공공부문이 외국 투기자본에 넘어가는 경우는 최악이다. 그나마 국내 재벌기업에 넘어가는 것은 차악이다. 그런데 일부 진보진영에서는 '재벌기업 민영화'는 극렬히 반대하면서 '투기자본 민영화'에는 침묵한다."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위원이 한 말이다. 국내 재벌들이 적어도 '지속가능한 기업경영'을 고려하는 것과는 달리, 기업의 존폐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주주의 이익에만 봉사하는 투기자본은 국내 사회·경제에 최악의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이다. 정 연구위원이 재벌개혁보다는 주주자본주의 규제를 강조하는 이유다.

'금융자본주의와 주주자본주의'라는 주제로 30일 서울 마포구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교육실에서 강연한 이종태 (시사IN) 기자는 정 연구위원의 문제의식에 살을 덧붙였다. 정 연구위원과 함께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이하 (선택))의 공저자이기도 한 이종태 기자는 최악의 민영화의 예로 최근 요금 인상 논란을 불러일으킨 서울시 메트로 9호선을 꼽았다.


"메트로 9호선이 수익 낼 수 없는 이유? 주주 탓!"

이 기자는 "아무리 지하철 요금을 올려줘도 메트로 9호선의 경영 상황은 절대 개선될 수 없다"면서 "메트로 9호선의 부실기업화는 주주자본주의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주장했다. 메트로 9호선의 수익이 주주의 이익에 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메트로 9호선은 자본금인 1671억 원보다 3배가량 많은 5000억 원을 대출받았고, 적게는 6%에서 많게는 15%에 달하는 고금리 이자를 물면서 '부실기업화'의 수순을 밟았다. 2009년 개통 이후 메트로 9호선이 기록한 순손실 1634억 원 가운데 대출 이자비용은 무려 1000억 원에 이른다.

메트로 9호선이 '울며 겨자 먹기'로 고금리 이자를 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메트로 9호선의 금융계 주주가 곧 채권자들이기 때문이다. 메트로 9호선의 주주인 맥쿼리한국인프라투융자사, 신한은행 등은 메트로 9호선 운영에 필요한 자본금 5000억 원을 '투자'하는 대신 고금리로 '빌려주기'로 결정했다.

주주들이 메트로 9호선의 순이익을 늘리는 데 관심이 없는 이유에 대해 이 기자는 "메트로 9호선에서 순수익이 발생하면 주주들은 법인세를 제하고 줄어든 배당을 받아야 한다"며 "반면에 적자라면 수익이 없는 만큼 메트로 9호선은 법인세를 낼 필요가 없고, 주주들은 고금리 대출이자를 통해 메트로 9호선이 내지 않은 법인세를 포함한 더 많은 수익을 챙길 수 있다"고 분석했다.


ⓒ뉴시스

이 기자는 "문제는 이처럼 기업의 지속가능성에는 관심이 없는 주주자본주의가 전 세계가 돌아가는 법칙으로 받아들여진다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기업 입장에서 투자자들은 그저 외부인이었지만 1970년대 후반 이후부터 기업의 주인은 주주라는 분위기가 광범위하게 확산됐다"고 말했다.

이전까지 고용창출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중시했던 분위기도 1970년대를 전후로 오로지 주주에 대한 봉사만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한국에서도 비정규직 확산, 기업 인수합병 시장의 활성화, 외주화 증대 등 신자유주의적인 변화가 이뤄졌다고 이 기자는 지적했다.

"신자유주의가 태양계라면, 금융자본주의는 태양"

주주자본주의 규제보다는 재벌개혁을 강조한 김상조 한성대 교수,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과 이병천 강원대 교수는 의 저자들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진단을 어떻게 달리할까.

이 기자는 "정태인 원장, 이병천 교수는 금융자본주의를 신자유주의 현상의 단지 일부로만 간주하는 것 같다"며 "하지만 나를 비롯한 (선택)의 저자들은 신자유주의의 핵심을 주주자본주의, 혹은 (금융자본이 경제를 지배하는 현상인) 금융자본주의라고 본다"고 말했다.

"신자유주의가 태양계라면 금융자본주의는 태양계의 핵심인 태양이다. 노동시장 유연화, 공기업 민영화, 시장 개방 등의 현상은 태양을 둘러싼 행성들이다. 그런데 정태인 원장은 (금융자본주의가 아니라) 노동시장 유연화, 공기업 민영화, 시장 개방 등의 현상을 묶어 신자유주의라고 본다. 그러면서 '재벌 규제 방안'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조 설립, 최저임금 인상, 하청기업의 집단교섭권 부여, 공정거래위원회 강화, 소비자권리 강화 등을 제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 원장이 제시한 '재벌 규제 방안'조차 금융자본주의를 규제하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

다시 말해 금융자본주의를 규제하지 않고는 다른 사회·경제적인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는 (선택)의 저자들이 주주가치에 기반을 둔 운동인 '소액주주 운동'에 비판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소액주주 운동이 금융자본주의 체제에 기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쟁과 관련해 정태인 원장은 (프레시안) 기고에서 "금융세계화와 주주자본주의가 양극화의 근원이라는 점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 원장은 "(선택)이 재벌의 경영권 보호를 제시하고 있을 뿐"이라며 "과연 경영권을 보호해주면 재벌들이 배당금을 줄여서 투자를 늘리고 하청단가도 올려주며 노동자 임금도 끌어올릴까"라고 반문했었다.

정 원장은 또 "한 국가에서 (주주자본주의를 규제하는) 효과를 낼 뾰족한 정책은 별로 없다. (다만) 동아시아 국가들의 공조와 세계적인 금융규제 강화의 진행에 맞춰 주주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시정해야 한다"며 "동아시아가 공동의 환율정책, 외환보유고 관리 정책을 사용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이러한 발언을 소개하며 이 기자는 "동아시아가 공동의 환율정책을 쓰는 것은 자본통제보다 어렵고 시간도 더 걸린다"며 "동아시아 공동 환율정책이 이뤄질 때 주주자본주의를 규제하자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말자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정 원장을 비판했다.

"1주10표제 도입해 '창업자 프리미엄' 주자"

강연이 끝나자 청중의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주주자본주의 규제' 방안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오자 답변에 나선 정승일 연구위원은 기업을 안정적으로 꾸릴 만한 경영자나 창업자에게 이를테면 '1주10표'를 주자고 제안했다.

"우리나라는 1주 1표밖에 허용이 안 된다. 반면에 미국에서는 1주 1000표인 주식도 발행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페이스북이 상장하기 전 주식을 발행할 때, 창업자인 마크 주커버그가 20% 지분을 갖더라도 의결권을 60% 넘게 행사할 수 있게 하는 제도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러면 주커버그는 60%의 의결권에 대한 주식을 시중에 매각하지 않고 1주 1표짜리만 매각하면 된다. 창업자 프리미엄이 발동하는 것이다."

정 연구위원은 삼성그룹을 예로 들며 "삼성의 주주 중 80%가 마음만 먹으면 주주총회에 와서 이건희 회장을 몰아낼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며 "이건희 회장이 대주주 행세를 하면서 주가를 올리고 주주들의 배당금을 높여줬기 때문"이라고 운을 뗐다. 그는 "1주 10표제가 법률로 허용되면 이건희 회장은 주주들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배당을 많이 하지 않아도, 자가 주식을 매입하지 않아도 된다"며 "이런 식으로 금융자본주의를 제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종태 기자가 언급한 '메트로 9호선' 사례에 대해서도 정 연구위원은 "오스트리아나영국에서처럼 민영화하더라도 황금주 제도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금주란 단 1주를 갖고도 적대적 인수합병 등 주요 경영사항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주식으로, 주로 정부가 보유한다. 그는 "황금주 제도를 도입하면 서울시가 주식을 많이 안 가져도 메트로 9호선에 대한 의결권을 50% 넘게 만들 수 있다"며 "한국에도 이런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국제 기준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이종태 기자는 "대기업 계열사 해체와 약화에 반대하는 의 입장을 재벌 옹호로 오인해서는 안 된다"며 "(선택)의 문제의식은 주주자본주의와 재벌 중에서 양자택일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주자본주의와 복지국가 중에서 양자택일하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대기업 계열사들을 해체해서 국내 대기업에 대한 주주자본주의의 영향력을 높인다면, 친노동·친중소기업·복지 정책들은 실행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한국경제와 복지국가' 강연 시리즈

① "최악의 공황이 온다…우린 정말 재수 없는 세대"  

 /김윤나영 기자

2011년 12월 18일 일요일

은행 영향력 줄어야 ‘안전 경제’ 가능


이글은 한겨레신문 Economy Insight 2011-12-01일자 기사 '은행 영향력 줄어야 ‘안전 경제’ 가능'을 퍼왔습니다.
[Cover Story] 새로운 금융 규칙을 위한 질문 6가지

페터 다우젠트 Peter Dausend 정치부 기자
마르크 시어리츠 Mark Schieritz 경제부 기자, 금융시장 전문

1. 은행은 왜 규제돼야 하나? 
은행을 규제할 새로운 법규정을 모두가 요구하고 있다. 은행을 규제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난 11월17일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위치한 한 은행 건물 앞에서 학생들이 은행 개혁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국가경제에서 은행은 핵심적 역할을 한다. 은행은 대출을 통해 새로운 돈을 시중에 유통시키고, 금융거래를 통해 돈을 곳곳으로 퍼뜨리면서 기업·가계·국가에 자금을 제공한다. 이상적인 경우는 가장 큰 혜택을 창출하는 곳에 자금이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은행이 시중에 자금을 많이 유통시킬수록 국가경제가 성장하고 더 많은 부가 창출될 것이다. 이런 이론에 대해서는 학술적으로 증명된 바 있다. 연구자료에 따르면, 개발도상국들의 경우 금융부문이 선진화될수록 성장동력을 얻는다. 
1970년대 이후 은행부문의 대대적인 규제 완화는 단순히 조직적 로비활동의 결과만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정치인들의 확신과 주류 경제학 이론을 토대로 해 은행 규제가 완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미국의 빌 클린턴, 영국의 토니 블레어, 그리고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등의 사회민주주의 정부가 집권한 1990년대에 은행 규제가 대폭 완화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사회민주주의 정부는 은행 규제 완화를 통한 경제성장이 결과적으로 국가 전체 구성원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리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전세계는 금융산업의 힘이 막강해지면 국가경제에 위험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지난 금융위기에서 지켜봤다. 영국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영국 은행의 자산총액이 1964년 영국 국내총생산(GDP)의 34%인 데 비해, 2007년에는 무려 500배에 달했다. 현재 영국이 심각한 경제위기에 처하게 된 이유는 영국 은행의 대출이 국가경제에 도움이 되는 사업이 아닌, 엄청난 파열음을 내며 터지기 일보 직전의 거품이 잔뜩 낀 부동산사업으로 흘러 들어갔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재화의 재분배 과정에서 재분배 당사자, 즉 은행가들만 배를 불렸다. 은행가들은 은행 거래를 통해 돈을 번다. 은행은 고객의 거래로 상당한 수수료를 챙기고, 또한 수백만달러의 연봉까지 받는다.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새로운 은행 규제 법규가 제정된다면 이런 관행은 뿌리 뽑힐 것이다. 

2. 실행되고 있는 은행 규제 제도들은?
정계 역시 은행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도입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은행 규제와 관련해 실제로 실행에 옮긴 것은 무엇이 있는가?
은행 규제를 위해 시작된 것이 몇 가지 있다. 주요 20개국(G20) 정상들은 2008년 11월 정상회담에서 금융부문 재편을 위한 47개 조항 계획을 결의했다. 비공식 국제위원회에서 결의된 사항이 각국의 법규정으로 제정되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소요되겠지만, 그래도 47개 조항 중에 적잖은 조항이 처리됐다.
은행은 과거보다 더 많은 자기자본을 보유해야 한다. 즉, 은행은 과거보다 동일한 자본금으로 좀더 적은 신규 대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은행이 과거보다 자기자본을 넉넉히 가지고 있으므로 손실을 입더라도 그럭저럭 메울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은행이 손실을 입어도 국민의 혈세에서 나온 구제금융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게 됐다. 또한 감독기관은 금융기관 감독을 강화했으며, 전세계적으로 조율과 협력을 통해 금융기관 감독이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진다. 이외에 독일을 비롯한 수많은 국가들이 파산 은행과 관련해 좀더 간소한 청산 절차 법규정을 마련했다.
신규 법규정으로 은행 거래의 판도가 달라졌다. 직접 손실을 부담해야 하는 금융상품 거래를 줄이는 은행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도이체방크의 투자 부문에서 가장 큰 수입원은 기업, 일반고객 및 투자회사 등 고객의 위탁으로 이루어지는 거래와 고객용 금융솔루션 개발이 되었다. 고객용 금융솔루션에는 환율 변동에 대비한 금융상품이나 기업에 지속적으로 현금 수입을 보장하는 채권 발행 등이 있다.
그런데 이런 거래들조차 최근 도입된 규제책으로 인해 과거처럼 높은 수익률을 내지 못하고 있다. 영국 런던과 미국 뉴욕에서 은행 직원 수천 명이 해고됐다. 2011년 2분기에는 골드만삭스의 투자의 귀재들조차 손실을 내고 말았다. 
하지만 금융 분야에서는 끊임없이 부실 스캔들이 일어나고 있으며, 다른 분야에 비해 여전히 훨씬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금융 분야가 그만큼 높은 가치 창출을 하는지는 의문이다. 금융 분야를 진정으로 규제할 법적 조치를 제정하기까지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방증한다.

지난 11월12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은행 건물 앞에서 시위대가 “은행을 해체하라, 부를 재분배하라”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든 채 행진하고 있다.

3. 감독기관의 역할은 무엇인가?
감독기관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감독기관의 향후 조치가 가져올 결과는 무엇인가?
금융기관의 자기자본 비율을 크게 상향 조정해야 한다. 그러면 은행도 금융위기 전처럼 더 이상 무분별하게 대출해줄 수 없다. 특히 감독기관이 호경기에는 대출을 제한하고, 불경기에는 대출을 늘리는 유연성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존 법규에 의거해 대출량의 제한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다.
화폐 재분배에 대한 은행의 영향력을 줄이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은행의 유가증권 거래에 세금을 부과하는 금융거래세를 도입하거나 투명성과 경쟁을 강화해 특정 금융상품의 거래 금지, 혹은 과도한 은행 서비스 비용 부과를 금지할 수 있다. 하지만 새로이 도입하는 법규정은 은행뿐만 아니라 헤지펀드와 주택저축은행, 보험회사 혹은 투자펀드 등 금융기관 전반에 적용돼야 한다.
이 법규정이 도입되면 경제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적잖은 은행가들이 주장한다. 이는 근거 없는 주장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금융부문은 서슬 퍼런 감독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사회의 부는 늘어났다. 국가가 금융부문의 영토를 확장할수록 국가는 더 많은 책임을 졌다. 환율을 예로 들어보자. 제2차 세계대전 뒤처럼 국가 간 화폐가 연동된다면, 금융산업의 놀이터나 마찬가지인 외환거래의 숨통이 끊길 것이다. 유럽화폐동맹의 위기가 보여주는 것처럼, 참여국들이 조율된 경제정책을 운용할 때 고정환율 시스템은 가동될 수 있다.

4. 업무에 따른 은행 분리는 가능한가?
독일의 사회민주당 당수 지그마어 가브리엘이 요구하는 것처럼 은행을 분리할 필요가 있는가?
은행을 분리하자는 주장에는 분명 장점이 있다. 사민당의 지그마어 가브리엘  당수가 말하는 은행 분리는, 일반고객 업무와 투자 업무를 분리하자는 것이다. 일반예금은 국가의 보호를 받는 반면, 자본시장에서 투자는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하에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 고객 예금과 투자는 완전히 분리된 영역이므로, 국가는 투자은행이 파산하도록 내버려둘 여유가 있다. 영국에서 이 모델이 완화된 형태로 실행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대공항 이후 도입된 이른바 ‘글래스-스티걸법’(Glass-Steagall Act·1933년 미국에서 은행 개혁과 투기 규제를 목적으로 제정된 법으로서, 핵심 내용은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업무를 엄격하게 분리하는 것이다)을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결국 폐지했다.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업무를 분리하는 것이 실제 도움이 되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일반은행도 투자를 잘못해 큰 손실을 입을 수 있다. 수많은 독일 은행이 독일 통일 이후 옛 동독의 부동산에 투자한 뒤 실제로 큰 손실을 입기도 했다. 상업은행과 거래하는 투자은행이라면 비교적 소규모라도 파산할 경우 전세계 금융 시스템에 치명적 타격을 입힐 수 있다.
파산과 동시에 전세계의 금융위기를 불러일으킨 리먼브러더스는 규모가 크지 않았고 고객 예금도 없었다. 즉, 앞으로도 국가가 어쩔 수 없이 순수 투자은행에 구제금융을 투입해야 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동시에 전세계 다양한 시장 간의 변동에 좀더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겸하는 은행만의 고유한 장점이 사라질 것이다.


지난 11월16일 한 시위자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뱅크오브아메리카 지사를 점거한 뒤 자신의 요구사항이 담긴 플래카드를 들고 서 있다.

5. 은행가들이 세계를 지배하는가?
은행 비판론자들은 ‘은행가들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지적한다. 은행가들은 실제로 그렇게 막강한가?
은행들은 조직을 잘 갖추고 있다. 도이체방크의 요제프 아커만 최고경영자(CEO)가 협회장으로 있는 국제금융협회(IIF)는 국제적으로 금융산업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 이외에 유럽금융협회를 비롯해 국가별 금융협회도 별도로 있다. 채권 발행, 기업 민영화, 혹은 지금처럼 구제금융을 할 때마다 정부는 은행의 전문적 지식이 필요하다. 자본시장이 운용하는 연금기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다양한 통로가 있는 금융산업은 이런 영향력을 도입하려는 법규정 완화에도 예외 없이 끼고 있다. 하지만 은행조차 규제 강화는 막을 수 없다. 로비스트의 힘도 로비 상대인 정치인이 허용하는 정도에서 발휘될 뿐이다. 현 시점에서는 ‘친(親)금융 정치인’으로 낙인찍히는 것은 정치인의 이미지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여하튼 현재로서는 정치가 은행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은행이 정치에 끌려다닌다는 데 대다수 은행가들이 공감할 것이다.
2008년과는 달리 2011년의 재정위기는 은행의 무분별한 거래 관행이 직접적 원인은 아니기 때문에, 정계는 2008년만큼 금융산업에 분노하지 않는다. 현재 은행은 투기성 투자 때문이 아니라, 국채를 과도하게 보유하기 때문에 지금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전세계적으로 금융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시위에 편승해 정치는 최대한 반사이익을 노리고 있다. 정계가 금융자본주의 반대 진영에 서 있는 것이 설정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정계가 틀린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은행의 규제 법안 논의는 정계뿐 아니라 시민 사이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소기의 목적 이상을 달성할 수 있다. 뉴욕·프랑크푸르트 등 전세계 각지의 점령시위는 그동안 달라진 사회적 의식을 여실히 표출하고 있다. 시민들은 금융자본주의 반대시위를 통해 은행의 저항 따위는 무시하라고 정계를 압박하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2008년만 해도 금융상품이 세금을 피해 다른 국가로 옮겨갈 위험이 있으므로 금융거래세를 전세계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3년 뒤인 현재 메르켈 총리는 유럽과 유로존에서의 금융거래세 도입을 위해 힘쓰고 있다. 지그마어 가브리엘 당수의 은행 분리 계획이 기독교사회당에서도 두루 지지를 받는다는 사실은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독일 국민의 분노가 커져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독일 정계는 금융산업 규제를 철저히 정치적으로 이슈화할 생각이다. 하지만 메르켈 총리는 은행 분리를 차근차근 단계별로 추진할 계획이다. 

6. 각국 정치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은행 규제는 각국의 법률과 국제적 공조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를 실행하는 이들이 바로 각국 정치인들이다. 그들이 은행의 안정화를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유럽의 정치권은 현재 여유가 없다. 국제적으로 압박이 거세지는 가운데 유럽 내부에서는 화폐동맹 핵심 국가들의 안정성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 은행은 해결책의 일부분이다. 은행들이 피치 못하게 보유하고 있는 남유럽 국가 국채의 지속적인 감가상각을 감내하려면, 은행들은 더 많은 자기자본을 보유해야 한다. 반면 금융기관은 그리스 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다. 지금까지 합의된 그리스 부채의 21%를 포기하는 대신 30~50%를 포기하는 것을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독일인들은 그리스 부채 상환 포기 비율을 높이라고 요구하는 반면, 프랑스인들은 이에 격렬하게 반대한다. 그리스 부채의 상환을 더 많이 포기할 경우, 재정위기가 악화되는 것은 물론 남유럽에 대거 투자한 프랑스 은행들에 불똥이 튈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정부가 은행에 구제금융을 수혈해야 할 경우, 이미 경고를 받은 것처럼 프랑스의 최고 신용등급이 강등될 수 있다. 프랑스 정부에 국가 신용등급 강등은 정치적 대재앙이 될 것이다. 신용등급이 높고 자금 지원 여력이 있는 국가들을 버팀목으로 하는 유럽의 구제금융 지원이 뿌리부터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 Die Zeit·번역 김태영 위원

2011년 11월 27일 일요일

한-미 FTA 앞, 국가와 헌법을 묻다


이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11-11일자 기사 '한-미 FTA 앞, 국가와 헌법을 묻다'를 퍼왔습니다.

1. “차종에 대한 비메탄유기가스의 배출량은 캘리포니아 규정집 제13편제1961(b)(1)(A)조에 규정된 것보다 더 엄격하지 아니할 것이다.”(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부속서 9-나 자동차 작업반 부속서한) 시민이 물었다. “환경 기준조차 우리 마음대로 정할 수 없는 것 아니냐.” 정부가 답했다. “우리는 세계적으로 가장 엄격한 기준을 채택하는 미국 캘리포니아 기준을 도입하며, 우리 배출가스 기준을 캘리포니아주가 정하는 것은 아니다.”(지난 11월 2일 외교통상부 대변인) 미국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규정을 바꾸면 어떻게 될까? 한-미 FTA의 맨얼굴이다.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자유무역협정’은 조약이다. 헌법상 조약은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헌법 제6조). 미국은 다른 나라와 조약이 아닌 행정협정(Executive Agreement)을 체결하기도 한다. 한-미 FTA가 그것이다. 그런데 미 의회는 행정협정 중에서 통상협정(Trade Agreement)에 대해서는 별도의 이행법을 만들어 내용을 규정함과 동시에 효력을 제한한다. 과연 한-미 FTA는 미국의 법과 제도, 행정 조치와 실무 관행을 어느 정도 변화시키는 협정일까? 또박또박 읽어야 한다.
미국의 한-미 FTA 이행법의 핵심은 이렇다. “한-미 FTA 제1장(최초 규정 및 정의), 제11장(투자), 제21장(투명성), 제23장(예외) 및 제24장(최종규정)을 이행하는 데에 행정 조치의 변경은 필요 없다”, “제5장(의약품 및 의료기기)을 이행하는 데에 법, 행정부 규정 및 실무 변경은 필요 없다”, “제7장(관세행정 및 무역 원활화), 제9장(무역에 대한 기술장벽), 제19장(노동), 제20장(환경)을 이행하는 데에 법의 변경은 필요 없다”, “제10장(무역구제)을 이행하는 데에 미국의 반덤핑 또는 상계 관세 법률과 규정을 바꿀 필요가 없다”, “제3장(농업), 제8장(위생 및 식물검역 조치), 제12장(국경 간 서비스 무역), 제13장(금융서비스), 제14장(통신), 제15장(전자상거래), 제16장(경쟁), 제18장(지적재산권)을 이행하는 데에 법이나 행정 조치의 변경은 필요 없다”….
미국은 바뀔 거라곤 없다. 바꿀 필요도 없고 바꿀 생각조차 없었다. 가장 고전적 의미의 순수한 ‘자유무역협정’ 그대로다. 그래서 바뀌는 거라곤 ‘무역관세’와 ‘수수료’다. 관세와 수수료를 인하하면 그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역관세와 수수료를 인하해야 한다. 실무 관행을 바꿔야 한다. 행정 조치를 바꿔야 한다. 경제질서를 우회전해야 한다. 이미 10개 이상의 법을 바꿨고, 대기 중인 법만도 20여 개다. 세제도 개편해야 한다. 종국엔 국민투표에 의하지 않고 헌법을 바꿔야 한다. 해석 개헌이 아니라, 헌법 아래 있는 조약이 헌법을 치받아, 헌법을 바꿔버리는 꼴이다.
미국은 그대로, 한국만 뒤집어진다
2. 목표가 달랐다. 미 의회와 행정부는 한-미 FTA의 목표를 ‘관세협상이 아니라 규제완화, 민영화를 되돌릴 수 없도록 하는 것’과 ‘비관세장벽 제거’에 두었다. 당연히 미 이행법 제102조는 “미국의 어떠한 법령에 불합치하는 협정의 규정 또는 어떠한 자나 상황에 대한 동 규정의 적용은 효력을 가지지 아니한다”고 정했다. 한국은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통상 목표에 호응했다.
참여정부 시절에 협상 책임자였고 지금은 삼성전자 사장으로 가 있는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의 말을 되새겨보자. “한-미 FTA는 낡은 일본식 법과 제도를 버리고 미국의 글로벌 스탠더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한-미 FTA 청와대 브리핑 제1호·2006). ‘감세, 규제완화, 작은 정부’를 내용으로 삼는 신자유주의 정부, 주주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 시장만능주의에 기반한 미국식 국가 모델을 우리 국가 모델로 채택하자는 것이었다. 어떤 시민주권의 동의조차 없이 통상 관료와 행정부 책임자의 정치적 결단으로 국가 모델을 직수입하는 역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 시민주권에 대한 심각한 모반이었다.


<절망의 무게>, 2011-정용일

삼정전자 사장님의 헌법학
그로부터 2년 뒤 미국에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물론 우리도 1997년 외환위기를 겪었다. 당시 미국이 주도하던 국제통화기금(IMF)의 처방전은 철저히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것이었다. 초고금리 정책이었다. 재정적으론 긴축을 요구했다. 강력한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했다. 금융기관은 통폐합되고, 당연히 정리해고가 실시됐다. 그럼에도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는 이는 드물었다. 그러나 2008년 미국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처방전을 내놓았다. 초고금리가 아니라 ‘초저금리’였다. 재정 적자의 나라 미국에서 강력한 재정 투입이 있었다. 대규모 인위적 경기부양에 나섰다. ‘대마불사’(大馬不死)는 정치적 현실이 되었다. 금융기관을 살렸고, 자동차 회사를 국가가 먹여살렸다. 미국식 금융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최소 개입 원칙은 온데간데없었다.
돌이켜보면 한-미 FTA 협상을 시작한 2006년이나 협상을 강압적으로 비준하려는 2011년이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이해는 거의 무지에 가깝다. 같은 점이라면, 미국식 경제 모델과 국가 모델을 역사의 완성태로 이해하려는 점이다.
3. 한국과 미국, 두 나라 간 헌법의 차이가 국가 모델의 차이다. 미국은 계약의 자유를 근본적 권리로서 보호하며 사적 소유권 보호가 철저하다. 지적재산권 보호가 강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협정에서 지적재산권은 미국의 주된 관심사다. 지적재산권을 규정한 제18.10조 27항의 일부다. “(지적재산권) 침해자의 금전적인 동기를 제거하려는 정책에 합치되게, 장래의 침해를 억지하기에 충분한 벌금형뿐만 아니라 징역형 선고를 포함하는 처벌. 각 당사국은 나아가 사법 당국이 형사적 침해가 상업적 이익, 사적인 금전적 이득을 목적으로 발생하는 때에, 실제 형기의 부과를 포함하여 장래의 침해를 억지하기에 충분한 수준에서 처벌하도록 권장한다.”
책도둑은 글로벌 파렴치범
지적재산권은 보호해야 마땅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전통적으로(물론 현실과 합치된다고 강변하고 싶지는 않지만) ‘책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존재한다. 미국은 이런 사회 문화조차 바꾸고 싶어 한다. 수단 하나로 형사 절차에 깊숙이 개입하고 싶어 했다. 형의 종류를 형법도 아닌 조약에 규정했다. 입법 재량에 대한 중대한 침해다. 사법 당국에는 강력한 처벌을 주문했다. 우리 대법원은 조약에 이런 내용까지 담긴다는 사실을 과연 알고 동의했을까? 통상교섭본부가 이런 부분까지 약속하도록 시민주권은 미리 위임했던 걸까? 사법부의 양형 재량까지 한-미 FTA가 정해주었다. 미국식 법과 제도와 관행을 받아들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방편이었다.
4. 물론 우리도 계약과 시장에 기반한 사회다. ‘소유권 중심 사회’라는 것 또한 인정한다. 다만 우리 사회는 재산권은 보장하되, “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하여야 한다”(제23조 2항)고 정해두었다. 시민의 기본권은 인정하되,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다”(제37조 2항 전단)고 유보해두었다.
한국과 미국의 헌법 모델에서 결정적 차이는 바로 이 시대의 우상, ‘경제’에 있다. 미국 헌법에는 경제 조항이 없다. ‘정부 편’과 ‘기본권 편’만으로 구성된 것이 미국 헌법이다. 한국에 있는 ‘경제질서 편’이 없다. 계약 조항과 적정 절차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헌법 의식이다. 우리나라는 다르다. 경제질서 편을 두었고, 그곳에 9개 조문을 두었다. 그중에서 결정적 의미는 헌법 제119조 2항에 있다.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한국의 헌법재판소는 경제질서를 이렇게 정의한다. “사유재산제를 바탕으로 하고 자유경쟁을 존중하는 자유시장경제 질서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이에 수반되는 갖가지 규제와 조정을 용인하는 사회적 시장경제 질서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헌재 1996.4.25 92헌바47) 그래서 우리나라 헌법이 정한 경제질서, 즉 이런 헌법의 지배를 받는 국가 모델은 ‘자유시장경제 질서’와 ‘사회적 시장경제 질서’의 조화에 있다. ‘공익’과 ‘사익’의 조화에 있다. ‘개인’과 ‘나라’의 균형에 있다. 특히 경제 영역에서만큼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조화, 제조업과 농·어업의 조화 등 공익적 가치를 추구한다.
어쩌면 한-미 FTA 최고의 수혜자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대변하는 재벌이 될 것이다. ‘시장만능주의’를 추구해온 전경련에 헌법 제119조에서 127조에 이르는 경제 편은 최악의 ‘전봇대’였기 때문이다. 한-미 FTA에 더 이상 농·어민 보호는 없다. 중소기업 보호도 없다. 시민주권에 대한 책임성과 반응성의 원리도 없다. 오로지 투자자의, 투자자에 의한, 투자자를 위한 국가만이 존재한다.
그 중심에 ‘투자자-국가 소송제’(ISD)가 있다. 미국 뉴욕 월가의 초국적 자본이 한국에 투자하는 경우를 예상해보자(미국 자본을 미국인들만의 자본으로 이해하는 것은 지극히 협소한 이해다). 이들은 △우리 중앙정부나 시도 정부가 투자 인가나 투자 계약을 위반한 경우 △직접 혹은 간접 수용으로 인해 자신들의 투자에 손해가 발생했을 경우 국제중재청구를 제기할 수 있다. 투자 계약은 미국이 맺은 FTA 중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설명이 필요하다. 투자 계약은 한마디로 공공서비스 민영화 계약이다. 사회적 인프라 개발에 참여할 수 있는 계약이다.
통째로 삭제되는 헌법 ‘경제편’
이를 ‘투자 계약’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화장했다. “발전 또는 배전, 용수 처리 또는 분배 또는 통신과 같이 당사국을 대신하여 공중에 서비스를 공급하는 권리 또는 정부의 배타적 또는 현저한 이용과 혜택을 위한 것이 아닌 도로, 교량, 운하, 댐 또는 배관의 건설과 같은 기반시설 사업을 수행할 권리”(제11.28조). 즉 상하수도 민영화, 전력 민영화 계약이고 대중이 이용하는 도로나 댐 등에 대한 건설 계약이다. 미국 투자자의 광범위한 참여를 보장했고, 지방정부나 중앙정부가 계약을 위반할 경우 곧바로 소송을 제기하도록 규정했다.
현 정부가 인천공항 민영화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는데, 바뀐 새 정부가 이를 취소했다고 하자. 곧바로 소송감이다. 얻은 건 투자자의 민영화 참여권이요, 잃은 건 공공정책의 재량성이다. 후진할 수 없다. 시민을 위해, 공공복리를 위해 규제를 강화하는 것은 전진이 아니라 후진으로 인정된다. 개방과 자유화를 향해, 투자자를 위한 기업국가만을 목표로 앞으로 내달려야 한다. 브레이크 없는 미국산 자동차에 동승한 형국이다.
대한민국 주권은 투자자에게 있다
5. 간접 수용에 대한 우리 사회의 논란이 거세다. 미국 판례법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법리다. 세상 어느 곳도 헌법에 간접 수용을 명문화한 나라는 없다. 오로지 재산권의 절대적 보장과 계약에 기초한 미국 사회라서 가능한 법리다. 문제는 공공정책의 재량성이다. 공공정책의 무기력화다. 물론 정부는 재량을 충분히 확보해두었다고 방어한다. 일부는 옳고, 대부분 틀렸다. “극히 심하거나 불균형적인 때와 같은 드문 상황을 제외하고는 공중보건, 안전, 환경 및 부동산 가격 안정화(예컨대 저소득층 가계의 주거 여건을 개선하기 위한 조치를 통한)와 같은 정당한 공공복지 목적을 보호하기 위하여 고안되고 적용되는 당사국의 비차별적인 규제 행위는 간접 수용을 구성하지 아니한다.”(부속서 11-나 수용) 담배에 대해 가격규제 정책이 강화될 수 있다. 한국 정부에는 공중보건이지만 미국 투자자에게는 간접 수용이다.
조약에 대한 해석은 각자 유리하게 하는 법이다. 모든 공공정책은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 정부 정책이 공중보건 등 4가지 정책에 한정될 수도 없다. 달리 해석될 여지가 충분한 만큼 정부 정책이 소송 대상이 될 여지도 충분하다. 정책의 시민영향성을 고려하기보단 외국 투자자에 대한 영향을 고려해야 할 판이다.
정부는 왜 시장에 대한 조정 권한과 공공정책에 대한 결정 역량을 스스로 축소하길 바랄까. 왜 “경제가 사회적 관계에 포함되는 대신 사회적 관계가 경제 체계 안에 포함돼버리는”(칼 폴라니) 상황을 희망하는 것일까. 왜 시민주권보다 투자자 재산권을 더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인간의 존엄보단 계약의 자유를 최고 가치로 여기는 초시장사회, 초시장국가 모델을 왜 구태여 탐하는 걸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흐릿한 먼 곳을 무턱대고 쳐다보지 말고 우리가 서 있는 주변의 복잡한 상황을 잠시 동안 조용히 응시하자.”(토머스 칼라일)

글. 최재천 (변호사) 헌법학 박사, 전 국회의원(17대). 저서로 (2006), (2009)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