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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6일 월요일

당신이 아는 육영수는 없다


이글은 대자보 2013-05-03일자 기사 '당신이 아는 육영수는 없다'를 퍼왔습니다.
[정문순 칼럼] 육영수 신화는 독재를 은폐한 권력의 상징조작

오늘날 박정희 신화를 이루는 구성 요소 중 하나이자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 못지않게 그 이미지에 기대려고 하거나 톡톡히 덕을 본 존재는 어머니 육영수이다. 역대 선거에서 충청권이 캐스팅 보트를 쥐었음에도 박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충청도에 대해서만큼은 마음을 놓고 있었다. 충청의 자부심이 된 세종시를 만든 건 노무현이지만, 충청도 사람들에게는 자기 지역이 박근혜 어머니의 고향이란 점이 행정도시의 연원을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했다.

옥천의 육영수 생가 터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됐으며, 지금은 육영수 영화도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고, 대한노인회는 우람한 숭모비까지 세웠으니,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육영수는 국민적 위인의 반열에 올라 있다. 육영수가 탐탁찮은 사람은 없을까. 박정희한테는 학을 떼는 사람이라도 그의 아내에게만큼은 호의적인 경우도 적지 않다. 육영수에 대한 호불호는 이념이나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떠난 듯하다. 한 진보 언론은 박 대통령에게 강한 아버지 말고 부드러운 어머니를 닮으라고 조언했을 정도다.

그러나 육영수가 처음부터 현모양처의 화신으로 통했던 것은 아니다. 1967년 한 청와대 출입 기자가 박정희의 청와대 생활을 쓴 책에 육영수 인터뷰가 실려 있는데, 기자는 육영수를 잘 모르는 사람 대하듯이 하고 있다. 국민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존재라고 쓰여 있는 이 책의 ‘영부인’은, 수줍음 많고 평범한 가정부인의 모습이었지 지금 육영수의 이미지로 굳어진 범접하기 힘든 고상한 인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박정희가 권력을 틀어쥔 지 이미 6년이 지난 때였다. 육영수의 이미지가 그때부터 골격이 잡혔다고 해도 1974년 서거 때까지 7년을 넘지 않는다. 이 기간은 박정희 정권이 재선과 3선을 거치며 마침내 껍데기 민주주의마저 내던지고 세계사에 유례없는 철권 통치로 치닫던 시기와 일치했다. 육영수의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나쁜 권력이 의도적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육영수의 활동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퍼스트레이디 시절 장·차관, 재벌 등 고위층 부인네들을 모아 봉사 모임을 이끌었던 ‘양지회’이다. 육영수를 떠받드는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을 성심으로 어루만지고 봉사에 헌신하는 모습의 그녀를 기억하려고 하지만, 양지회는 어두운 시절 양지가 아닌 음지에서 권력층끼리 검은 돈이 오간 창구 구실을 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사후에, 시인 모윤숙이 “목련꽃 닮은 당신” 운운하며 찬사를 바쳤던 육영수의 실체는 과연 한복 입은 자태만큼이나 우아했을까.

인터넷을 뒤져보면 육영수 집안의 권력 지형도를 보여주는 가계도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박정희 시대에 이 집안은 매부를 잘 만난 덕에 평범한 교사에서 일약 5선의 국회의원으로 벼락출세한 육영수 오빠를 비롯하여 장관, 방송국 이사, 신문사 회장, 은행장 등 권력의 요직을 꿰찼음을 보여준다. 그 위세는 박정희의 친가 쪽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육영수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버지가 친일 대부호로서 막강한 위세를 누린 집안 배경도 작용했을 수 있다.

육영수 집안이 박정희 당대에만 영화를 누린 것도 아니었다. 조카사위 한승수는 6공 때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하여 이명박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냈다. 또 한승수와 사돈지간인 김진재는 부산에서 오랫동안 지역구 의원을 했고 옛 한나라당 부총재를 지냈으며, 그의 그늘이 자식에게도 이어져 그 아들은 현 새누리당 김세연 의원이다. 친정 피붙이와 친·인척들이 대대로 출세한 것이 육영수 탓은 아니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육영수가 청와대의 야당 노릇을 했고 남편에게 입바른 소리를 곧잘 했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 자신이 외척의 세도를 막는 일에 앞장서야 했다. 육영수가 청와대의 야당이라는 말은 다름 아닌 박정희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야당’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도 모를 것 같은 철권 통치자에게서 나온 말을 무턱대고 믿을 수는 없다. 되레 육영수 자신이 정치에 맘대로 개입한 흔적도 있는데, 은사의 남편을 서울시 교육감에 앉혔다는 기록도 찾을 수 있다.

육영수는 자식 교육에도 극성이었던 것 같다. 그녀의 팬들이 ‘현모’의 징표로 자랑스럽게 전하는 생전의 일화들을 보면, 아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늦게라도 오면 교실 밖에서 기다렸다거나 학교 커튼을 직접 빨래해 줬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대통령 부인으로서 체통을 잃거나 극성 엄마의 면모를 보인 ‘영부인’를 해당 교사는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하다.

권력자가 제 맘에 안들면 자기 당 의원도 잡아다 고문하고, 야당 총재의 직무를 정지시킬 수 도 있었으며, 언론의 입도 철저히 봉인됐던 시대에, 국민들이 대통령은 물론 청와대 안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 수 있는 정보 통로는 없었다. 박정희가 논두렁에서 농부들과 농주를 마시는 모습이나, 육영수가 장·차관 부인 중 외제 핸드백을 들고 다니는 사람에게는 면박을 주었지만 손수 빚은 막걸리를 대통령 선물로 바친 사람은 아주 좋아했다는 ‘막걸리 일화’는, 그것이 설령 사실일지라도 어디까지나 권력의 개입이 가능한 낮의 역사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권력자는 낮과 밤이 달랐으며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낮의 역사가 대부분이다. 정보정치로 지배했던 권력의 밤을 어떻게 제대로 알 수 있겠는가. 박정희가 안가에서 근신들과 여자 연예인의 시중을 받으며 막걸리 대신 최고급 양주를 즐겨 마신 밤의 역사는 그가 불명예스럽게 죽었기에 드러날 수 있었다.

박정희가 지배하던 때는 가부장적 독재 권력의 흉포함을 자애로운 여성의 이미지로 덧칠했던 권력의 일방적인 상징 조작만 가능했던 시대였다. 박정희 독재를 합리화해 주고 싶은 사람들은 박정희가 집권 후반 막다른 길로 치달은 것마저 남편을 뒷받침해 주던 그녀의 부재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이들에게 육영수는 철저하게 박정희 독재의 본색을 가리기 위해 동원된 존재에 불과하다. 실체 없어 보이고 부풀린 혐의가 짙은 육영수 신화가 아직 걷히지 않았다는 건 그녀 딸의 집권과 더불어 여전히 박정희 시대가 저물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징표이기도 하다.

* 4월 6일 칼럼을 손본 글입니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로 [한국문학의 거짓말- 2000년대 초기 문학 환경에 대한 집중 조명](작가와 비평, 2011)의 저자입니다.

2012년 10월 21일 일요일

“누구 때문에 내가 이모양 이꼴로… 그 딸이 대통령 되면 울화병 나지”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10-20일자 기사 '“누구 때문에 내가 이모양 이꼴로… 그 딸이 대통령 되면 울화병 나지”'를 퍼왔습니다.

1972년 12월27일 정부중앙청사에서 열린 유신헌법 공포식. 그래 10월17일 비상계엄을 선포한 박정희는 11월21일 91.5%의 찬성률로 국민투표를 통과한 유신헌법을 이날 공포함으로써 종신독재의 시대를 열었다. 보도사진연감

되살아오는 유신, 독재의 추억유신
40년, 긴급조치 피해자부터 새마을운동 유공자까지
‘유신세대’ 4인의 삶을 추적하다… 
치욕과 불안의 시대로부터 우린 얼마나 멀리 와 있나 

“물려줄 것은 부끄러움뿐”(양성우 ‘겨울공화국’)이란 탄식마저 횡행했지만, 그 시절 공화국에도 삶은 흘렀다. 학교를 가고, 가장의 책임감을 실어 출근부를 찍고, 사랑을 하고, 감기는 눈 비벼가며 미싱을 탔다. 드러난 일상은 여느 시절과 매한가지였으나, 거리와 학교와 공장과 쉼터 도처에 치욕과 불안, 의심과 강박이 복병처럼 도사린 납빛의 나날이었다. 금지와 검열, 감시와 처벌의 공포가 욕망과 상승의 신기루와 동거하던 이 시절을 견디며, 20대 여자 시인은 썼다. “그래서 볼 수 있습니다// 꽃의 웃음이 한없이 무너지는 것을/ 밤의 달빛이 무섭게 식은땀 흘리는 것을/ 굴뚝과 벽, 사람의 그림자 속에도/ 몰래몰래 내리는 누우런 황폐의 비”(최승자 ‘편지’)

유신체제를 경험했던 사람들에게도 그것의 전체상은 뚜렷하지 않다. 어떤 위치에서 그것을 경험했는지에 따라 다른 모습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왼쪽부터 오종상·신순애·송성헌·전영훈씨. 사진 한겨레21 탁기형, 오승훈, 이세영, 탁기형.

1972년 10월 비상계엄 선포에서 1979년 10월 대통령 박정희의 죽음에 이르는 이 시기를 일러 우리는 ‘유신시대’라고 한다. 이 8년은 계엄령·위수령·비상사태·긴급조치 등 실정법을 정지시키는 각종 예외 상태가 통치권자 자의대로 조성되고 해제되길 반복하던 ‘일상화된 예외 상태’였고, 이 사회를 짓누르는 성장 강박, 속도주의, 군사주의, 토건주의가 일상의 구석구석에 잔뿌리를 내리는 습속의 착근기이기도 했다. 10월17일로 돌아오는 유신 선포 40년을 맞아 은 유신과 함께 20~30대를 보낸 4인의 삶을 추적했다. 유신이 이들 삶에 어떤 자취를 남겼는지, 그 시절의 체험은 현재의 일상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나아가 오늘의 한국 사회는 40년 전 예외 상태에서 얼마나 멀리 와 있는지 판단하는 것은 글을 읽는 독자들 각자의 몫이다. _편집자그는 양토업자였다. 토끼 팔아 아들 둘과 아내를 건사했다. 1974년 6월7일 오후, 경기도 평택의 오종상(당시 33살)씨 집에 점퍼 입은 남자 2명이 들이닥쳤다. ‘본부’에서 나왔다는 그들은 경기도 수원으로 가자며 오씨를 차에 태웠다. 오씨는 겉옷도 못 걸친 러닝셔츠 바람이었다. 중앙정보부 수원지부를 거쳐 그날 저녁 오씨가 도착한 곳은 서울 남산의 중앙정보부였다.

정부 비판 말 몇 마디에 징역살이

취조가 시작됐다. 수사관들은 다짜고짜 “지난 5월17일과 22일 정부 시책을 비판하고 북한을 찬양하지 않았느냐”며 오씨를 ‘빨갱이’ ‘자생적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였다. 빨갱이라는 말에 숨통이 조여왔다. 기억을 더듬었다. 읍내 가던 버스에서 여고생들에게 건넨 얘기가 떠올랐다. 반공·근면·수출증대가 주제인 웅변대회에 나간다는 학생들에게 오씨가 한 말은 이랬다. “수출증대가 뭔지 아나. 선량한 노동자의 피를 빨아먹는 일이다. 정부가 분식을 장려하는데 정부 고관과 부유층은 분식이랍시고 국수 약간에다 달걀과 고기를 듬뿍 넣어 먹는다. 민주주의 못하는 유신체제 아래서 가난하게 사느니, 이북하고 통일을 해서라도 잘사는 게 낫다.”

긴급조치 위반 유형별 사건 수와 긴급조치 위반자 직업별 분포. 자료: 진실화해위원회, ‘긴급조치 위반사건 판결분석 보고서‘(2007)

오씨에게 적용된 혐의는 긴급조치 1호(유언비어 날조 및 유포 금지) 및 반공법 위반(북한 찬양)이었다. 밤낮없는 구타와 고문이 이어졌다. 혐의를 인정해야 끝날 기세였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말을 학생들에게 했는지 집중적으로 물었다. 부인할 때마다 여지없이 각목이 날아들었다. 매질은 팔과 등, 머리를 가리지 않았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됐다.“기절을 했는데, 여의사인지 간호사인지 들어와 주사를 놓았다. 정신을 차리면 조사가 다시 시작됐다. 혐의를 부인할 때면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이틀 동안 몇 시간도 못 잤을 것이다.”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오씨에겐 당시 상황을 복기하는 게 여전히 버거워 보였다. 일주일 뒤 오씨는 구치소로 이감됐다. 1974년 7월 기소돼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은 오씨는 비상고등군법회의를 거쳐 1975년 2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의 형을 확정받았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오씨의 절규에 어느 판사도 귀기울이지 않았다. 사법부는 유신체제를 지탱하는 기둥이었다.오씨의 사례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었다. 긴급조치 피해자들은 오씨 같은 ‘필부’가 대부분이었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가 펴낸 ‘긴급조치 위반사건 판결분석 보고서’를 보면, 1140명이 연루된 긴급조치 위반 사건 가운데 일반 시민이나 교사, 학생, 종교인 등이 술집이나 거리, 학교, 교회 등에서 정권과 유신체제를 비판하다 처벌받은 경우가 전체의 절반에 해당하는 282건(48%)이었다. 1974년 1월 이웃에게 “현 정부가 부정부패해서 공화당과 박 정권이 망한다”고 말한 무직자 정아무개씨는 징역 12년을 선고받은 뒤 대법원에서 7년이 확정됐고, 같은 해 5월 이웃에게 “박정희가 여순반란 때 부두목으로 가담했는데 운이 좋아 대통령까지 됐다”고 말한 농민 박아무개씨는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1977년 7월 오종상씨가 전주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했을 때, 단란했던 가정은 풍비박산 나 있었다. 경찰에 시달려온 아내는 이혼을 요구했다. 도리 없이 도장을 찍었다. 아들 둘은 여동생이 거둬 길렀다. 이런 탓에 오씨는 지금도 아들들과 눈을 맞추지 못한다. 고문의 후유증도 오래갔다. 지금도 허리디스크와 위장병을 달고 산다. 오씨는 요즘 뉴스를 볼 때면 숨이 막힌다. “누구 때문에 나와 내 가족이 이 신세가 됐는지를 생각하면, 그 딸이 대통령이 되면 울화병이 나서 죽을 것 같다. 젊거나 돈이라도 있다면 이민이라도 가지. 하지만 그게 내게 가당키나 한가.”

딸이 간첩이라는 말 듣고 충격에 죽은 엄마

유신시대의 주요 사건들1

범부의 삶에도 깊은 상처를 남긴 유신체제가, 굴종을 거부하는 이들에겐 오죽 사나웠을까. 청계피복노조 부지부장으로 유신의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던 신순애(59)씨에게도 그 시절은 모질도록 잔인한 세월이었다. 1977년 9월 신씨는 노조원들과 함께 당시 노동교실이 입주해 있던 서울 을지로의 건물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된서리를 맞았다. 경찰의 압력을 받은 건물주가 노동교실의 퇴거를 요구하며 공권력을 요청하자 홧김에 실랑이를 벌이다 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로 경찰에 구속된 것이다.서울 중부경찰서에 연행돼 조사를 받는데, 경찰이 들이민 혐의 내용이 기가 막혔다. “건물주가 요구한 퇴거 시한이 9월10일이라 하루 전에 시위를 한 것인데, 경찰은 북한의 건국일인 ‘9·9절’에 맞춘 것이라며 빨갱이로 몰아세웠다.” 장씨 성을 가진 정보과 계장이 얼마나 거칠게 손찌검을 했는지, 지금도 그때 맞은 왼쪽 귀가 잘 안 들린다고 신씨는 호소했다.당시 신씨가 믿을 것이라곤 판사들뿐이었다. 그래도 법관들은 배우고 양심적인 사람이니 경찰과 달리 자신의 말에 귀기울여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기대는 여지없이 배반당했다. 법대 위의 판사가 물었다. “왜 9월9일이오? 북한의 지령을 받은 것 아니오?” 맥이 풀렸다. 원통했다. 남은 힘을 모아 절규를 쏟아냈다. “우리가 가장 무서운 게 빨갱이요. 판사님까지 우릴 빨갱이로 모는 거요?” 1심에서 징역 5년, 2심에서 집행유예 5년을 받고 11개월 만에 출소했다. 하지만 직장에는 돌아갈 그의 자리가 없었다. 다른 공장에도 블랙리스트가 돌아 취업 자체가 불가능했다.노조에 나가면 중부서 형사들이, 이문동 집에 가면 동대문서 형사들이 따라붙었다. 견딜 수 없어 이사를 가면 형사들이 먼저 와서 기다리기 일쑤였다. 오빠가 말했다. “동네 사람들 보기 그렇다. 노조일 접어라.”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제 몸을 불사른 전태일도 있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결국 어머니만 모시고 집을 나왔다.1978년 겨울, 하루는 집에 갔더니 어머니가 쓰러져 있었다. 경찰에게서 신씨가 간첩이란 얘기를 들은 집주인이 방을 빼라며 모진 말을 한 것이었다. 정신을 차린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통곡했다. “네가 왜 간첩이냐. 우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사달을 겪은 뒤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는 이듬해 봄 세상을 떠났다.1980년 청계피복노조가 강제 해산된 뒤 지인들의 도움으로 청소년 상담사 일을 시작했다. 생활도 차츰 안정이 됐다. 2006년엔 꿈에 그리던 대학에 입학해 만학의 열정을 불태웠다. 지난 6월 성공회대에서 ‘13살 여공의 삶’이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신씨는 “돌이켜보면 과도한 진학열과 학력주의, 노동 천시 풍조 같은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들이 박정희 시대의 속도전식 산업화에서 비롯된 것 아니겠느냐”며 “이제는 너무 확고히 뿌리내려 어디서부터 손써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 같다”고 했다.

통속소설 속 군 비판 내용으로 고초

유신시대에 고초를 겪은 모든 이가 박정희의 비판자가 된 것은 아니다. 출판인 송성헌(67·도서출판 청조사 대표)씨가 그런 경우다. 송씨는 37년이 지난 지금도 쇠창살 너머로 바라보았던 그날의 하늘빛을 잊지 못한다. 서울 을지로의 출판사로 찾아온 기관원들에 이끌려 어딘가로 연행된 직후였다. “서울에 살면서 그렇게 푸르고 투명한 하늘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바깥 세계였으니, 그 느낌이 어땠겠나.”

유신시대의 주요 사건들2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고 5개월이 지난 1975년 10월의 일이었다. 편집자로 일하다 막 독립한 초보 출판인 송씨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 가질 만큼 여유가 없었다. 한시바삐 회사를 본궤도에 올려놓는 게 급선무였던 까닭이다. 지인들과 만나 술잔을 기울일 때에야 필화에 연루돼 고초를 겪는 업계 사람들의 처지를 동정하는 정도였다.“불안했다. 연행되는 차 안에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문제될 책은 낸 게 없었으니까.” 궁금증은 조사실에 들어가서야 풀렸다. 그해 펴낸 소설책 한 대목에서 군에 간 주인공이 군대의 실상을 비판적으로 언급한 게 기관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었다. “쓴웃음이 나왔다. 이념소설도 아니고 연애담을 다룬 통속소설이었으니까. 게다가 그 책은 내가 기획한 것도 아니고, 다른 데서 낸 것을 중개업자한테 인쇄 원판만 사들여 찍어낸 것이었다.”사정을 잘 설명하면 곧 풀려날 것이라고 마음을 진정시켰지만, 파출소 한번 가본 적 없는 그가 밀실 수사의 공포를 이겨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방에서 조사받던 중개업자는 겁에 질린 탓인지 평소보다 말을 심하게 더듬었고, 그때마다 수사관들은 거칠게 귓방망이를 올려붙였다. 옆방에선 수시로 고함과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정신 차려, 송성헌’을 수십 번씩 되뇌며 정황을 조리 있게 설명하려 애썼다. ‘껀수’가 안 된다고 판단했을까. 조서를 꾸미던 수사관 얼굴에 ‘김샜다’는 실망감이 역력했다. 얼마 뒤 상급자로 보이는 사람이 나와 조서를 훑더니 서류 뭉치를 들어 머리를 내리쳤다. “임마, 앞으로 조심해.” 긴장이 풀리며 안도감이 찾아왔다.풀려나와 집에 가니 통금 직전이었다. 연행 13시간 만이었다. 끌려간 곳이 보안사 서빙고 분실이란 사실은 한참 뒤에야 알았다. 트라우마는 오래갔다. “원고를 볼 때마다 단어 하나, 토씨 하나에 신경이 곤두섰다.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4년 뒤 박정희가 죽었다. 그사이 출판사는 자리를 잡았다. (뿌리) (오싱) 같은 번역소설이 히트를 쳐 1980년대 중반엔 번듯한 사옥도 지어올렸다. 박정희에 대한 증오도 누그러들었다.“그 뒤로 정권 잡은 사람들을 보니, 그래도 박정희는 괜찮은 사람이었더라. 애국심 하나는 투철했고, 무엇보다 청렴하지 않았나.” 그는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찍었다. 경제살리기가 우선이란 생각에서였다. 지금은 물론 실망이 크다. 그럼에도 송씨는 이번 대선에서 야당 후보를 지지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했다.“경제가 어렵잖나. 다시 도약해야지. 유신을 선포하고 민주인사를 탄압한 건 잘못했지만, 박정희 시대가 우리한테 심어준 게 ‘잘살아보자’ ‘하면 된다’는 마인드 아닌가. 지금 필요한 게 그런 근면성과 자신감이다.”

‘새마을회’란 이름 탓에 사찰받기도

실향민 출신의 새마을지도자 전영훈(78)씨도 ‘하면 된다’ 정신을 강조했다. 그는 경기도 안산시 선감동(당시 부천군 대부면 선감도)에 학교를 세우고 농토를 개간하는 등 지역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74년 7월 박정희로부터 새마을훈장 근면장을 받았다. “수출은 안 되는데, 공장엔 일할 사람이 없다고 한다. 박정희가 강조한 근면·자조·협동 정신으로 뭉쳐 지금의 어려움을 이겨내야 한다. 지도자들 책임이 막중하다.”

유신시대의 주요 사건들3

그가 마을에 학교를 연 것은 군에서 전역한 직후인 1958년이다. 마을 사람들이 해변에 떠밀려온 깡통 속 윤활유를 된장국에 풀어 먹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뒤였다. 마을 고아원 한켠에 교실을 꾸민 뒤 글 모르는 주민을 모아 한글과 산수를 가르쳤다. 새마을운동이 본격화하기도 전인 1968년부터 수산·건설·문교·후생·총무 등 5개 반으로 편성된 ‘새마을회’를 조직해 선착장과 호안시설, 마을회관, 경로당 등을 짓기도 했다.새마을회란 이름 때문에 정보과 형사들의 미행을 받는 등 곡절도 겪었다. “당시는 강원도 속초의 실향민촌 아바이마을에서 좌익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새마을회란 이름의 지하조직을 만들었다가 적발된 직후였다. 그것도 모르고 ‘새마을’이란 이름을 가져다 썼으니 기관의 의심을 살 만도 했다.”도시에선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낙후된 농촌에선 여전히 많은 주민이 끼니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했다.1973년 전씨는 우선 마을 소득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주민들을 설득해 ‘산돌 10만 덩이 줍기 운동’을 펼쳤다. 돌덩이를 갯벌에 투하해 굴 서식지를 만들 요량이었다.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굴 양식으로 마을의 벌이가 훌쩍 뛰었다. 이 공로 덕에 전씨는 5번의 장관 표창과 4번의 총리 표창에 이어 대통령 훈장까지 받았다. 전씨 집 거실에는 아직도 훈장을 달고 박정희와 찍은 사진과 함께 ‘국토통일’이란 박정희 친필 휘호가 걸려 있다.그 시절의 기억을 필생의 자랑거리로 간직해온 전씨지만 유신에 대한 평가만은 비판적이었다. “박정희는 대단한 애국자였다. 하지만 애국도 과하면 해가 되는 법이다. 아무리 안보가 흔들리고 경제가 불안해도 그런 식의 극약 처방은 하는 게 아니었다. 유신은 박정희의 최대 약점이다.”

“역사 속의 박정희 체제와 기억 속의 박정희 체제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권력의 중심에 있던 박정희라는 이름은 때로는 치유되지 않은 외상을 입힌 근원으로, 때로는 엄청난 치유 능력을 가진 샤먼 같은 존재감으로 우리 삶을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근식 서울대 교수(사회학)

공교롭게도 전씨가 청와대에 불려가 훈장을 받던 시각,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선 알몸의 오종상씨가 피투성이 신세로 죽음의 공포와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같은 유신의 비판자임에도, 두 사람의 비판이 동등한 무게를 가지기 힘든 이유다. 소개한 4명의 유신 체험 역시 그 시대의 전모를 보여줄 순 없다. 진실은 그 모두이거나, 그 사연들로 포괄하지 못한 빈 공간 어딘가에 숨어 있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사회학자 정근식(서울대 교수)의 지적은 새겨들을 만하다.

외상 입힌 근원, 샤먼 같은 존재감

“박정희 체제를 경험했던 사람들에게도 그것의 전체상은 뚜렷하지 않다. 어떤 위치에서 그것을 경험했는가에 따라 다른 상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 속의 박정희 체제와 기억 속의 박정희 체제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한국에서 군부독재 정권은 더 이상 재생될 가능성은 낮지만, 그 권력의 중심에 있던 박정희라는 이름은 때로는 치유되지 않은 외상을 입힌 근원으로, 때로는 엄청난 치유 능력을 가진 샤먼 같은 존재감으로 우리 삶을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박정희 통치기 주요 사건

-1961년 5월16일 5·16 쿠데타 발발, 7월3일 반공법 공포, 7월22일 경제기획원 신설
-1963년 12월22일 서독 광부·간호원 파견
-1964년 6월3일 6·3 사태 발발, 8월14일 1차 인민혁명당 사건 조작 발표
-1965년 2월 베트남 파병, 6월22일 한-일 협정 체결
-1966년 7월9일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체결, 9월15일 한국비료 밀수 사건
-1967년 6월8일 7대 국회의원 선거, 7월8일 동백림 사건 발표
-1968년 1월21일 김신조 등 침투 사건, 2월3일 푸에블로호 납북, 8월24일 통혁당 사건 발표, 12월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
-1969년 9월14일 삼선개헌안 날치기 통과, 10월17일 국민투표
-1970년 3월17일 정인숙 피살, 4월22일 새마을운동 제창, 6월2일 김지하 오적 필화, 7월7일 경부고속도로 전면 개통, 11월13일 전태일 분신
-1971년 8월10일 광주대단지 사건
-1972년 7월4일 7·4 남북공동성명, 10월17일 유신 체제 선포
-1973년 7월3일 포항종합제철 준공, 8월8일 김대중 납치
-1974년 1월8일 긴급조치 1·2호 발호, 4월3일 긴급조치 4호 발호, 7월13일 민청학련 사건 선고, 10월24일 (동아일보) 자유언론 실천 선언
-1975년 4월9일 2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 사형 집행, 4월30일 베트남전 종전, 5월13일 긴급조치 9호 선포, 5월20일 학도호국단 창설, 7월16일 사회안전법 제정,
            8월7일 장준하 의문사
-1976년 10월15일 박동선 코리아게이트 사건
-1978년 6월30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원
-1979년 8월11일 YH무역 여공 신민당사 농성, 10월16일 부마항쟁, 10월18일 계엄령 발포, 10월26일 박정희 사망, 12월12일 신군부 쿠데타

2012년 10월 10일 수요일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의 "독재도 필요"에 국감장 발칵


이글은 뷰스앤뉴스(Views&News) 2012-10-09일자 기사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의 "독재도 필요"에 국감장 발칵'을 퍼왔습니다.
여야 강력 질타에 "눌변이어서...죄송하다"

뉴라이트 계열인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이 9일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해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독재도 좀 필요한 거라는 인식도 있었다"고 말해 국감장이 발칵 뒤집혔다. 

이 위원장은 이날 오후 국사편찬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박혜자 민주당 의원이 "작년 11월 기자간담회에서 국사편찬위원장이 '박정희 정권도 처음부터 독재정권은 아니었다'고 한 발언을 확인해달라"고 묻자 이같이 답했다.

발언을 들은 이상민 민주당 의원은 "기가 막히다"며 "천하의 2012년 국감장에서 독재도 때에 따라서 필요했다는 증언을 국사편찬위원장 증인으로부터 들어야 하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그런 견해를 가진 분이 국민 혈세로 국사편찬위원장직을 수행하나"라며 "독재가 때에 따라 필요했다는 건 반헌법적 태도다. 당시 국사편찬위원장이 군인이라면 쿠데타를 벌이겠다는 것인가. 대한민국 헌법이 독재를 허용하나? 철회하든 사과하든 하라"고 질타했다.

같은 당의 우원식 의원도 "박근혜 후보가 사과해서 논쟁이 끝난 줄 알았는데 국사편찬위원장이 이깉이 말해 충격적"이라며 "12.12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서 '우리나라의 헌법질서 아래에서는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폭력에 의해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 따라서 그 군사반란과 내란행위는 처벌의 대상이 된다'고 했다. 이것과 5.16하고 글자 하나라도 다른 것이 있나"라고 따져물었다. 

김세연 새누리당 의원도 "박정희 대통령, 독재했다"며 "많은 피해자가 있었고 지금까지 고통이 이어진다"고 가세하는 등 여야 비난이 빗발치면서 교과서 국정감사는 정회에 들어갔다. 

이 위원장은 결국 정회후 속개된 국정감사에서 "제가 60년대 초반의 시대분위기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저의 눌변으로 독재를 옹호하는 표현이 된 것 같다. 결코 그런 뜻은 아니었다"며 "그런 표현이었다면 취소하겠다. 의사진행에 물의를 일으킨 점에 대해서도 사과한다. 죄송하다"고 파문 진화에 식은 땀을 흘렸다.

박정엽 기자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의 "독재도 필요"에 국감장 발칵


이글은 뷰스앤뉴스(Views&News) 2012-10-09일자 기사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의 "독재도 필요"에 국감장 발칵'을 퍼왔습니다.
여야 강력 질타에 "눌변이어서...죄송하다"

뉴라이트 계열인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이 9일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해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독재도 좀 필요한 거라는 인식도 있었다"고 말해 국감장이 발칵 뒤집혔다. 

이 위원장은 이날 오후 국사편찬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박혜자 민주당 의원이 "작년 11월 기자간담회에서 국사편찬위원장이 '박정희 정권도 처음부터 독재정권은 아니었다'고 한 발언을 확인해달라"고 묻자 이같이 답했다.

발언을 들은 이상민 민주당 의원은 "기가 막히다"며 "천하의 2012년 국감장에서 독재도 때에 따라서 필요했다는 증언을 국사편찬위원장 증인으로부터 들어야 하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그런 견해를 가진 분이 국민 혈세로 국사편찬위원장직을 수행하나"라며 "독재가 때에 따라 필요했다는 건 반헌법적 태도다. 당시 국사편찬위원장이 군인이라면 쿠데타를 벌이겠다는 것인가. 대한민국 헌법이 독재를 허용하나? 철회하든 사과하든 하라"고 질타했다.

같은 당의 우원식 의원도 "박근혜 후보가 사과해서 논쟁이 끝난 줄 알았는데 국사편찬위원장이 이깉이 말해 충격적"이라며 "12.12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서 '우리나라의 헌법질서 아래에서는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폭력에 의해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 따라서 그 군사반란과 내란행위는 처벌의 대상이 된다'고 했다. 이것과 5.16하고 글자 하나라도 다른 것이 있나"라고 따져물었다. 

김세연 새누리당 의원도 "박정희 대통령, 독재했다"며 "많은 피해자가 있었고 지금까지 고통이 이어진다"고 가세하는 등 여야 비난이 빗발치면서 교과서 국정감사는 정회에 들어갔다. 

이 위원장은 결국 정회후 속개된 국정감사에서 "제가 60년대 초반의 시대분위기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저의 눌변으로 독재를 옹호하는 표현이 된 것 같다. 결코 그런 뜻은 아니었다"며 "그런 표현이었다면 취소하겠다. 의사진행에 물의를 일으킨 점에 대해서도 사과한다. 죄송하다"고 파문 진화에 식은 땀을 흘렸다.

박정엽 기자

2012년 9월 23일 일요일

이용훈 “유신, 헌법의 이름으로 독재 길 열어줘”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09-22일자 기사 '이용훈 “유신, 헌법의 이름으로 독재 길 열어줘”'를 퍼왔습니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

고려대 강연서 비판…“긴급조치 위헌판결은 사법부 원죄 씻은것”
“건전한 비판 배척하고 국민을 하나로 통합한다는건 위험한 생각”

이용훈(70) 전 대법원장(현 고려대 석좌교수)이 유신헌법에 대해 “헌법의 이름으로 일당독재의 길을 열어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2010년 12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긴급조치 1호’에 대해 만장일치로 위헌 판결을 한 것에 대해선 “사법부의 원죄를 씻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 전 대법원장은 2005년 9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14대 대법원장을 지냈다.이 전 대법원장은 21일 고려대학교 법학관 신관에서 로스쿨생들을 대상으로 한 ‘헌법과 법치주의’ 강연에서 “5·16 쿠데타 세력이 만든 제3공화국 헌법은 3선 조항만 빼면 굉장히 선진적이었는데 (유신헌법으로) 10년 만에 휴지 조각이 됐다”며 “이런 악한 헌법에 기초해서 긴급조치가 발령됐고 10·26 때까지 긴급조치가 통치 수단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그는 “폭압적인 정치권력 앞에서는 헌법도 법치주의도 소용없다는 걸 (나는) 눈으로 본 바 있다”고 덧붙였다.그는 “강의를 위해 유신헌법을 다시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랐다”며 국가 주권 조항을 상세히 비판했다. 그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1조 2항을 유신헌법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그 대표자나 국민투표에 의하여 주권을 행사한다’로 고쳐놨다”며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는지 너무 놀라웠다”고 말했다.이 전 대법원장은 “헌법이란 이름을 가지고 일당독재가 가능한 길을 열어준 사람이 당시 유명한 헌법학자들”이라며 “법치주의라고 해서 헌법을 대단하게 보는데 헌법에 기초해서 6년에 걸친 일당독재가 시작됐다. 그게 유신시대라는 걸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유신헌법 제정에 참여한 분들은 나중에 승승장구해서 요직을 다 거쳤다. 그게 대한민국 현실이다. 출세와 재물에 눈이 어두우면 사람이 짐승의 수준으로 행세할 수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그는 “긴급조치 4호는 민청학련 사건에 관한 것인데 양형 규정이 가공할 만하다”며 “유신헌법조차 법률에 의하지 않고는 처벌할 수 없다고 했으나 긴급조치 4호는 민청학련 관련자들을 (법률에 의하지 않고)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 징역에 처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긴급조치 1호부터 4호 사건까지는)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하다가 긴급조치 7호부터는 일반법원에서 재판하도록 했다. 법원이 저항하지 않으니 순치됐다고 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긴급조치 재판 내내 피고인들이 긴급조치는 위헌이라고 주장했는데도 법원은 긴급조치가 적법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우리 사법 역사의 큰 오점”이라며 “국민들에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긴급조치 위헌) 판결은 원죄를 씻는 재판이었다”고 말했다.이 전 대법원장은 유신헌법 제정 당시의 분위기에 대해 개인적인 경험을 곁들여 자세히 소개했다. 그는 “투표하러 갔는데 요즘말로 폐회로텔레비전(CCTV)으로 보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소문이 돌았다”며 “감시당하면 어쩌나 싶어서 위를 보면서 ‘부’에 찍었는데 91.5%로 통과됐다. 백성이라는 게 너무 한심하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학생들에게는 법률가로서 비판적인 시각을 가져달라고 주문했다. 그는 “건전한 비판 세력을 배척하고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겠다는 건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라며 “법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법률가들이 건전한 사회비판 세력으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악법도 법이니 준수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한 학생의 질문에 이 전 대법원장은 “외국은 악법에 저항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고 있는데 우리는 인정하지 않는다”며 “저항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권력자들이) 국민을 나락에 몰아넣을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악법에) 저항하는 깨어 있는 국민이 있어야 진정한 민주국가”라고 말했다.

김원철 기자 wonchul@hani.co.kr

2012년 9월 13일 목요일

KBS 보도본부장 “박정희 ‘독재’는 객관적이지 않은 단어”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09-12일자 기사 'KBS 보도본부장 “박정희 ‘독재’는 객관적이지 않은 단어”'를 퍼왔습니다.
“장준하 뉴스 ‘독재’ ‘유신’ 용어 뺀 건 잘한 일”… 새노조 “민주주의 대한 반역”

KBS의 보도 전반을 책임지고 있는 이화섭 보도본부장이 최근 뉴스에서 박정희 정권을 ‘독재’라 표현한 대목이 빠진 데 대해 “독재처럼…객관적이지 않은 단어 사용을 지양해야 된다”고 말했다고 KBS 새노조가 밝혀 충격을 주고 있다. KBS 새노조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해야 할 KBS가 독재를 독재라 말하지 못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반역”이라고 성토했다.

문제의 발언은 지난달 31일과 지난 5일 열린 21차 KBS 공정방송위원회에서 장준하 선생의 37년 만의 유골 발견 뉴스에 대해 새노조가 추궁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12일 발행된 KBS 공추위 보고서에 따르면, KBS는 지난달 17일 장 선생의 유골이 37년 만에 이장되고 추모공원이 문을 연 소식에 대해 기자가 작성한 리포트에서 ‘독재’와 ‘유신’이라는 용어를 뺀 채 방송했다.

기자가 작성한 초고엔 “박정희 독재정권시절 대표적 재야 인사로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다 지난 1975년 숨진채 발견된 고 장준하 선생”으로 돼 있으나 데스크를 본 뒤 방송된 리포트는 “박정희 정권 시절 3선 개헌에 반대하며 민주화 운동을 벌이다 1975년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숨진채 발견된 고 장준하 선생”으로 바뀌었다.

지난달 17일 방송된 KBS '뉴스9' 화면 캡쳐.

이를 두고 KBS 새노조는 공방위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5·16 군사 쿠데타나 유신체제에 명확한 입장 표명이 없고 독재 역사를 인정하지 않으려해 눈치를 보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고 전했다. 그랬더니 이화섭 KBS 보도본부장은 “저널리즘적 측면에서 말하자면…독재처럼 평가가 마무리 되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 객관적이지 않은 단어를 사용하는데 대해서 우리가 지양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며 “특정 정부와 관련해 독재정권이냐 아니냐 하는 것에 대해 (그렇게 리포트 한 것이) 데스킹을 잘 한 것”이라고 밝혔다고 새노조는 전했다.

KBS 새노조는 보고서에서 “박정희 정권을 독재 정권이라고 말하는 것은 객관적인 저널리즘이 아니라는 것이 공영방송 KBS보도 책임자의 역사 인식”이라며 “정치적 상황에 따라 역사적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은 왜곡”이라고 비판했다.

KBS 새노조는 “교과서에도 나와 있고 외신, 학술 논문 등에서 독재라고 규정한 시기를 집권여당과 유력한 대통령 후보의 눈치를 보면서 독재를 독재라 말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에 대한 반역”이라며 “전두환 독재권력 밑에서 전두환을 찬양하던 사람이 사장과 이사장으로 들어앉아 있는 현실이 일선 기자들의 리포트에까지 이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라고 개탄했다.

새노조는 “장준하 선생 타살 의혹 관련 보도를 시작으로 정치,사회적 이슈에서 박근혜 후보에게 유리한 사실은 침소봉대하고 불리한 사실은 말하지 않거나 물타기 하는 현재의 편집 작태를 더 이상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배재성 KBS 홍보실장은 12일 “보도본부장이 기사 데스크를 본 당사자의 의사를 반영해 사측을 대표해 한 말일 것”이라며 “정권을 어떻게 보느냐는 건 생각이 다를 수 있으며, 독립적 데스크의 기능이 작동하고 있는데 그것을 박근혜 눈치보기라 몰아가는 건 무리”라고 말했다.

조현호 기자 | chh@mediatoday.co.kr  

2012년 6월 6일 수요일

박근혜 '국가관', 독재엔 '묵묵부답'


이글은 위키프레스 2012-06-05일자 기사 '박근혜 '국가관', 독재엔 '묵묵부답' '을 퍼왔습니다.

새누리당 박근혜 의원이 지난 1일 "국가관을 의심받고, 국민들도 불안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되서는 안된다"며 통합진보당 이석기·김재연 의원의 사퇴를 요구한 것과 관련해, 박 의원 본인의 '국가관'이 논란에 휩싸였다.

4일 경향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박 의원은 4일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열린 새누리당 비례대표 의원 25명이 총선 공약 이행을 위해 결성한 '약지 25'모임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기자들이 질문을 하려 하자 말을 끊으며 "오늘은 아무 이야기 안 하겠다"며 답변을 피했다.

또한 그는 민주통합당 임수경 의원과 관련해 질문하자, 대답하지 않고 곧장 모임 장소로 들어갔다.

오찬 간담회를 마치고 나오는 박 의원에게 기자들이 재차 임수경 의원과 관련한 질문을 하려 하자 이 때에도 "오늘은 아무 말 안 하겠다"며 답변을 회피한 채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박 의원의 국가관 논쟁은 항산 논란이 되어 왔다. 그녀 자신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기 때문이기도 한 이 논란은 스스로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더 커진 측면도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2007년 7월 19일 당 대선후보 검증 토론회에서 "5·16은 구국 혁명이었다. 유신체제는 역사에 판단을 맡겨야 한다"고 발언하고, 같은해 8월 6일 경남 창원 대선후보 합동연설회에서 "저는 어릴때부터 대통령이 어떻게 해야 경제를 살릴 수 있는지 직접 보며 자랐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아버지 못지않게 제2의 한강의 기적을 만들겠다"고 말하면서 '국가관' 논란이 항상 등장하는 계기를 자초하기도 했다.

이후 매번 국가관 논란에 휩싸이자 지난 3월 부산 방문 때 “산업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은 분들께 사과를 드린다”고 했지만 쿠데타·유신은 언급하지 않았으며, 결국 민주주의를 훼손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입장표명을 하지 않은 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유지만 (redpill@wikipress.co.kr) 기자 

2012년 6월 1일 금요일

'북한' 비판하는 새누리당이 '독재'란 단어를 피하는 이유


이글은 미디어스 2012-05-31일자 기사 ''북한' 비판하는 새누리당이 '독재'란 단어를 피하는 이유'를 퍼왔습니다.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 연상시켜 금기어가 된 '독재'

▲ 선친동상앞의 박근혜 @ 연합뉴스

민주통합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의 박근혜 새누리당 전 비대위원장에 대한 공세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 이미지와  연결시켜 박근혜 위원장에게 쏠리고 있는 새누리당의 권력지형을 비판해 박 위원장측을 잔뜩 긴장시키고 있는 양상이다.
박지원 비대위원장은  30일 ‘독재자의 딸‘이란 표현에 이어, 31일에는 새누리당내 인사 문제를 거론하며,  “과연 박근혜 前비대위원장은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무엇을 보고 배웠는가, 우리는 한번 생각할 때가 됐다고 본다. 박근혜식 독식 인사는 아무리 다른 당 문제이지만 지명직 최고위원을 또 독식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고 있다. 국회 의장과 부의장도 그런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우리는 우려한다. 주변정리를 시작했다고 하면 아버지로부터 배운 생각과 이념도 정리를 할 때가 됐다고 충고를 보낸다”고 재차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임을 강조했다.
새누리당에서 거의 금기시하다시피하는 단어인 ‘독재’란 말까지 동원해 비판한 것이다.  박정희의 딸이란 사실이 다가올 대선에서  박 위원장에게 어떻게 발휘될지 그 시험을 시작한 것이다.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한나라당을 두 번이나 살린 능력을 가진 정치인이다. 2000년 천막당사를 통한 회생이 그렇고, 2012년 반MB여론으로 죽어가던 한나라당을 새누리당으로 변신시켜, 총선을 승리로 이끌어낸 능력도 그렇다. 그의 이같은 능력의 절반 정도는 아직도 보수세력의 지지와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라는 사실에서 비롯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반면, 같은 이유 때문에 박근혜 전 위원장은 새누리당의 앞길을 막고 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한나라당의 18대 쇄신모임에 참석했던 인사는 “박근혜가 한나라당을 살린 것은 맞다. 하지만, 당내에서 미래지향적인 이야기를 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미래를 이야기할려면, 과거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 핵심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정확한 평가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진보진영이 주사파문제로 양분되어있는 상황처럼, 보수와 수구가 동거하는 우파진영도 한번은 그런 일을 겪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것을 막는 마지막 과거의 아이콘이 박근혜 전 위원장이란 설명이다.
새누리당은 29일 민주당의 '도로민정당' 등의 박근혜 비판에 대해서는 “민주통합당의 공박증(박근혜 공포증)이 극에 달한 것 같다. 연일 근거 없는 흑색선전으로 상대당 유력 대선주자 흠집내기에 몰두하고 있다.”고 대응했으나, '독재자의 딸'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아직 공식 논평이 없다. 하기도 안하기도 난감한 상황처럼 보인다. 이미 박지원 위원장은 “이제 자기도 검증받아야 한다. 우리는 기억한다. (2007년 한나라당 내부경선에서) BBK, 얼마나 혹독한 검증을 했던가. 모두가 이해를 해 주기 바란다”며 일방적인 양해를 구한 상태다.
북한비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단어 ‘독재’
보수세력이 북한을 비난할 때, '독재'라는 단어는 찾아보기 힘들다. 단지, '3대 세습이 말이 되나'거나, '인민을 굶어죽이는 능력없는 김씨'거나,  '탈북자를 중심으로 한 인권문제'에 대한 비판이 대부분이다. 독재자 김씨 집단을 용납할 수 없다는 비판은 거의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한국사회 보수세력의 상당수가 '독재자' 박정희에 대한 지지와 향수를 전제로 하고 있기에  '독재자'라는 말 자체를 박정희에 대한 불경스러운 비난으로 연결지을 수 있다고 사고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대선을 앞두고  '독재'란 단어가 정치권 안팎에서 회자되면, 회자될수록 독재자 '박정희'의 딸  박근혜 비대위원장에게 마이너스로 작용하게 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는 것이다.

신동근 기자  |  qkdkqh1@gmaill.com

2012년 3월 15일 목요일

이영조 공천과 '산업화' 발언, 박근혜는 뉴라이트로 통하고 있다


이글은 민중의소리 2012-03-14일자 기사 '이영조 공천과 '산업화' 발언, 박근혜는 뉴라이트로 통하고 있다'를 퍼왔습니다.
[기고] 박근혜의 '뉴라이트' 품기, "독재 미화할 생각일랑 마라"

 ⓒ뉴시스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연합회'와 한국진보연대 등은 지난 2010년 12월27일 오후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영조 진실화해위원장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지난 12일 11시 참여연대 사무실에서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이영조 전 진실화해를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위) 전 위원장의 전략공천을 강력히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4일 오후, 새누리당은 비난 여론에 못 이겨 이영조 전 위원장 공천을 취소했다. 이 두 사건의 중간에는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의 '산업화' 발언이 있었다. 일련의 과정은 박근혜의 그릇된 역사인식과 뉴라이트와의 관계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박근혜의 잘못된 역사인식, '유족 두 번 죽였다'

역사의 진실을 밝혀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화해를 통한 국민통합에 기여한다는 목적으로 신설된 진실위에서 이영조 전 위원장은 재직시 갖은 파행과 편향된 역사인식으로 진실규명을 명목으로 오십여년을 한결같이 살아온 유족은 두 번 죽이는 결정을 내린바 있다. 이영조 전 위원장을 새누리당이 전략공천했던 행위는 새누리당과 박근혜 위원장의 잘못된 역사인식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간 일부 진보언론에서는 이영조 전 위원장의 5.18 폭동 및 제주 4.3 민중반란이라는 표현과 시각에 대해 보도했다. 그는 그동안 이승만의 치적을 찬양하는 극우적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이영조 전 위원장은 2011년 6월30일, 5년여 동안 끌고 오던 한국전쟁시기 민간인 학살문제에 대해 "'학살'은 인정하지만 유족이 그동안 이 사실을 알면서도 사법부에 소송을 제기하지 않아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어이없는 발언으로 유족의 가슴에 또 한번의 절망을 안겼다. 그러나 사법부는 이영조 전 위원장의 입장을 뒤집고 국가공권력이 자행한 학살은 불가항력이었으므로 소멸시효가 없음을 인정했다. 

대법원 판결 이후 이영조는 보수언론을 통해 '본인의 결정문이 잘못됐다'라고 보도함으로서 그나마 현재는 울산보도연맹사건은 서울고등법원에 심리 중에 있다. 이런 역사인식이 없는 이영조의 발언들은 한국전쟁시기 민간인피학살 유족을 두 번 죽이는 행위였다.

이영조 전 위원장을 공천하려는 세력은 비무장. 비폭력상황에서 민간인을 무려 백만명 이상 학살한 이승만 정권을 신원하기 위해 유족회활동을 한 유족회간부를 5.16 군사 쿠데타 후 특별법으로 구속하고 간부 전원을 사형 및 10년형 이상을 선고했고, 유족들이 혼신으로 지켜온 유해를 불도저로 파괴했던 박정희의 만행을 유야무야 넘기려는 역사인식의 저급함을 보여주고 있다. 

ⓒ김철수 기자 새누리당 박근혜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은 13일 부산에서 열린 9개 지역민방 공동 초청토론회에서 "산업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은 분들께 저는 항상 죄송한 마음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박근혜의 '뉴라이트' 품기..."'독재정치' 미화할 생각일랑 마라"

이영조 전 위원장을 강남을에 전략공천하려고 했던 박근혜 위원장 및 유신잔당들에게서는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를 합리화하려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박근혜 위원장은 지난 13일 부산 사상구에서 산업화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피해본 분들에 사죄한다며 어설픈 사과를 했다. 박정희 독재시대를 '산업화'라고 미화하는 데 앞장선 세력이 바로 '뉴라이트'다. 박근혜 위원장은 뉴라이트의 주장을 빌어 독재시대를 미화하려는 셈이다.

나는 그런 박근혜 위원장에게 박정희 독재정치하에서 희생된 분들, 그리고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과 인혁당, 아람회, 민족일보, 납북어부 간첩사건 등의 모든 과거사 문제와 정수장학회, 영남대학교 문제 등을 해결하고 사죄하는 진정성을 보여야 한다고 제안한다. 

역사인식이 바르지 못한 후보를 차기정권의 심부름꾼으로 공천한다면 새누리당은 100만 유족들은 철저한 응징을 기다려야할 것이다. 또한 잘못된 역사인식을 가진 뉴라이트 집단과 박근혜 위원장이 진정성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않을 경우 총선 및 대선 과정을 통해 끝까지 싸울 것임을 100만 유족의 이름으로 천명한다. 끝으로 박근혜 위원장은 여론에 떠밀려 공천을 취소하긴 했으나 진정성이 담긴 사과와 대책을 공약으로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 대변인 이성번

2012년 2월 21일 화요일

보수우익이라면 궐기하라!


이글은 미디어스 2012-02-21일자 기사 '보수우익이라면 궐기하라!'를 퍼왔습니다.
[최경영의 서동요] 제2화

개인적으로 난 내 스스로의 이념적 정체성을 ‘보수우익’이라고 판단한다. 난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원리에 반대하지 않으며 김일성이나 김정일을 박정희, 전두환과 비슷한 독재자로 본다.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는 자유고 민주이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핵심적 가치가 언론의 자유니 내가 언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악다구니를 쓰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
언론의 자유는 인간의 자유를 뜻한다. 한 개인의 자유가 담보되지 않은 조직의 자유, 또는 조직 간부들만의 자유는 독재나 권위주의다. KBS의 사장이나 간부들이 일선 기자나 PD들에게 자신들의 편향적 정치 이념을 강요하는 것은 그래서 반민주적 작태일 뿐이다. 결국 자본주의 원리를 지지하고 북한과 같은 체제를 혐오하며 개인주의를 선호하는 난 정통 자유민주주의자다. 자유민주주의자는 이른바 ‘글로벌 스탠다드’로 보자고 해도 기껏해야 ‘보수우익’이다. 여기에 ‘좌’나 ‘빨’을 갖다 붙이기는 힘들다. 


▲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성을 보도해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불구속 기소된 MBC PD수첩 조능희 책임PD 등 제작진들이 2010년 1월 20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선고공판에서 5명 전원 무죄 선고를 받은 뒤 심경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나는 ‘좌빨’로 취급된다. 한 달여전부터 시작한 트위터에서도 나를 진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KBS 새노조의 노동조합 집행부라서 그런가? 15년을 근무한 KBS의 상당수 동료들도 나를 ‘좌익’으로 본다. 우습지도 않다. 친일극우꼴통들이 정부와 시장의 권력을 독점하고 수 십여년이 흐르다보니 근대적 보수 우익 개념마저도 전복되어 버린건가? 내가 좌파면 파리가 새고 이명박은 세종대왕이다.
우리의 문제는 이렇듯 잘못된 ‘규정’에서부터 시작한다. 잘못된 ‘규정’은 왜곡된 역사로부터 연유했다. 자본주의에 대한 규정 역시 마찬가지다. 이명박 류의 사람들은 아마 자본주의가 ‘약육강식의 정글적 체제’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먹고 먹히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그래서 힘세고 돈 많은 자가 모든 것을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세상이 자본주의라 여기고, 여기에 조금이라도 규제를 가하거나 변화를 주려하면 ‘좌’나 ‘빨’이라고 몰아붙이니 하는 말이다. 이 지구상에 그런 약육강식의 정글적 자본주의, 순수한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너희들 머릿속에만 있는 환상이다.        자본주의의 바탕에는 자유롭게 경쟁하는 개인에 대한 믿음이 있다. 모두 자유롭게 경쟁하다보면 시장에 가장 잘 적응하는 개인들이 살아남고 이들에 의해 생산성이 높아져서 사회가 발전할 것이라고 믿는다. 문제는 이 자본주의의 전제(자유롭게 경쟁하는 개인)에 중대한 오류가 있다는 사실이다. 3백여년의 자본주의 역사에서, 아니 수 만년의 인류사에서 단 한번이라도 ‘모두 자유롭게 경쟁했던’ 시대가 있었던가?
자유롭게 경쟁하기 위해서는 ‘경쟁의 조건’이 비슷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거대한 부와 권력을 물려받았고 어떤 사람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태어났다. 효도르와 내가 사각링 위에 올라 아무리 피 튀기게 싸운다 한들 나로선 죽지만 않으면 다행인 것이다. 물질적으로 불평등한 권력의 현재는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면서 현실화된다. 하나의 대기업이 수많은 중소기업을 갖고 놀 수 있다.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죽지 않으려면 꿇어야 한다. 경쟁이 아니라 복종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독과점을 규제하지 않는 나라를 찾기 힘들다. 금융과 산업 자본을 분리하려는 노력, 중소기업을 지원하고 대기업의 담합을 처벌하는 정책들, 복지를 확대해 시민 각자가 최대한 비슷한 경쟁력을 갖춰주게 하려는 노력들이 모두 같은 이치에서 나온다. 자본주의 원리에 충실하기 위해 자유롭게 경쟁할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자본주의만이 민주주의를 지탱시킬 수 있는 유일한 체제인지는 입증되지 않았으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여러모로 비슷한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하긴 힘들다. 특히 둘은 ‘인간’에 대한 전제가 닮았다. 민주주의도 자본주의와 비슷하게 ‘인간’을 상정한다. ‘자율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인간’이 각자 한 표씩의 투표권을 가지고 대표를 선출한다면 최선의 결정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민주주의 체제를 뒷받침하는 핵심 논리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시 근본적 오류가 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모든 인간이 항상 자율적으로 판단해서 최선의 결정을 할 수 있는가? 여러분은 시장에 가서 정확히 내가 원하는 물건을 내가 원하는 가격에 살 수 있는가? 결코 충동구매를 하거나 바가지를 쓰지 않을 만큼 충분한 정보와 정확한 판단력을 모든 사람이 갖추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몇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국민 투표라는 그 알량한 민주주의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도 막대한 정보와 정확한 판단력이 필요함을 이미 알고 있다. 미국에서는 조지 W. 부시가 두 번이나 대통령으로 당선됐고 4년전에 우리는 이명박을 뽑았다. 최선의 결정이었을까? 
그래서 미국의 언론학자들은 민주주의에서 언론의 가장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를 ‘자유로운 사상의 시장’(Market place of ideas)라고 표현한다. 자유 시장 경제처럼 사상도 자유로운 시장을 형성할 수 있어야 언론이 제 역할을 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민주주의가 담보되는 것이라는 믿음이다. 언론이 한 나라 또는 한 지역의 대표를 선출하는데 필요한 다양한 정보와 생각을 전달해줘야 시민이 ‘자율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여기에는 다양한 정보와 생각을 전달하지 않고 한 정파의 일방적인 생각만을 전달한다면 사회는 ‘사상의 독과점'에 빠지게 된다는 우려가 배어있다.
자, 이 모든 생각에 무슨 ‘좌’나 ‘빨’의 요소가 있단 말인가? 지극히 시장경제 중심적이며 철저히 자유적이고 순수히 민주적인 사고다. 그래서 나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이명박, 이동관, 최시중, 이병순, 김인규, 그리고 한나라당류의 무리에게 묻는다. 당신들이 보수 우익인가?
당신들이 보수 우익이었다면 당신들은 정부가 불법적으로 정연주를 KBS 사장직에서 쫓아냈을 때 궐기했어야 했다. PD수첩의 광우병 보도를 국가 기관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몰 때 격분했어야 했다. 촛불집회에서 죄 없는 시민들이 얻어터질 때 함께 거리로 나섰어야 했다. 그게 보수다. 그게 우익이다. 그게 당신들이 지켜야 할 시장의 가치며 사상의 자유다. 보수우익이라면 궐기하라!

2012년 1월 16일 월요일

항일운동가 정율성을 빨갱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에게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01-16일자 기사 '항일운동가 정율성을 빨갱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에게'를 퍼왔습니다.
[미디어현장] 박건 KBS PD “친일·독재 정권의 냉전 이데올로기 이제는 벗어나자”

KBS스페셜 편은 결국방송이 나갔다. 방송 전에 제작후기를 부탁받고 사실 난감했다. 이념적인 논란에 휩싸이며 8.15 광복절 특집으로 나갔어야할 프로그램이 두 번의 방송 불발을 거치면서 5개월 만에 방송이 되니, 외부에서 보면 당연히 담당 제작자인 내가 할 말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도 내가 할 말이 많을 줄 알았다. 하지만 방송전날 더빙을 마치고 나니 나에게는 이상하게 할 말이 남아있지 않음을 알게 됐다. 경과야 어찌 됐건 내가 할 말은 1시간짜리 프로그램에 온전히 담겨있고, 그것이 방송나간다면 내가 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미진하고 아쉬웠던 부분이야 당연히 있겠지만, 내가 정율성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하고 싶었던 말은 온전히 그 프로그램에 다 담겨있다.
나머지 이야기도 사실 하고 싶진 않다. 이미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사내 게시판에 두 번에 걸쳐서, 또 개인적으로 여러 동료들에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방송이 나갈 수 있게 된 건 KBS의 양대 노조와 PD협회의 물러서지 않은 싸움 덕분이었다. 그리고 동료 PD들의 응원과 격려 덕분이었고, 보직을 걸고 방송을 촉구한 선배들의 저항 덕분이었다. 그러니 이분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보답하는 길은, 또한 미래의 후배들을 위해서 이런 일이 없도록 하는 길은 부끄러운 과거를 기록하는 것이다. 부끄럽지만, 그래서 쓴다.



KBS 스페셜 "13억 대륙을 흔들다, 음악가 정율성"

프로그램은 6월초에 기획됐다. 방송시점 2개월을 앞두고 있어서 제작자 입장에선 그리 여유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길지 않은 그 기간에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6월 하순에 중국출장을 이틀 앞두고 있을 때 이례적으로 당시 콘텐츠 본부장님이 요구해서 기획방향과 취재내용을 중간간부로부터 직접 보고받았고, 8월 초순에한창 마무리 촬영과 편집중일땐 또 이례적으로 사장님이 요구해서 기획방향과 취재내용을 본부장님으로부터 직접 보고받았다. 하지만 제작을 중단하라는 지시는 없었다. 다만 잘 마무리하라는 언급만 있었다. 그리고 방송 4일전이면서 프로그램 시사를 하루 앞둔 날, 전격적으로 방송 불발이 결정됐다. 내가 들은 이유는 이승만, 백선엽 등의 인물프로그램들의 방송여부를 두고 그 논란이 한창인 시점에서 정율성 편이 방송된다면 KBS는 극심한 혼란에 휩싸인다는 것이었다. 그 뒤에는 KBS 이사회의 이사장과 이사가 보직을 걸고 버티고 있었다.

KBS 스페셜 "13억 대륙을 흔들다, 음악가 정율성"

이례적으로 사장과 본부장까지 검토하고 승인한 개별 프로그램을, 이례적으로 이사회가 막아서서 방송이 되지 않았다. 나중엔 감사까지 이례적으로 막았다고 한다. 더더욱 공영방송인가하는 노조까지 때마다 앵무새처럼 떠벌이며 방송을 반대했다. 노조까지 막아선 이례적인 프로그램이었다. 두 번까지 방송이 불발되자, 사실 내가 15년 넘게 몸담고 있던 방송국이 낯설게 느껴졌고, 내가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방송제작의 원칙과 상식이 애초에 그 존재가 없었던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내가 PD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는 것도 참 낯설었고, 더더구나 15년 넘게 PD로 근무했다는 것도 우스웠다.
개인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을 때 그 위기에서 구해준건 동료 피디들이었다. 넘어져서 바닥에 주저앉은 심정이었을 때, 다가와 팔을 내밀진 않았지만, 동료들은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모양이다. 내가 스스로 일어나길 바랬고, 내가 계속 주저앉아있기 민망해서 엉거주춤 일어났을 때에야 그들은 내가 혼자가 아니라고, 조용히 다독여줬다. 어떻게든 싸우자고, 어떻게든 방송을 내보내자고 그들은 그렇게 말했다. 이건 내가 몸소 겪은 정말 귀한 경험이다.


KBS 스페셜 "13억 대륙을 흔들다, 음악가 정율성"

슬픈 사실 하나. 이 방송을 어떻게든 내보내겠다고 노력한 선배 한분은 지방으로 좌천 발령을 받았다. 사실 이분이 책임질 일이 아니었다. 기획과 제작단계에서 이분이 그 보직에 계셨던 것도 아니고, 운 나쁘게 방송 불발이 결정될 때 하필 그 보직에 계셨다. 하지만 이분은 어떻게든 방송을 내고자 노력했고, 자신의 말에 책임지려 했고, 보직을 걸고서라고 방송을 내고자 했다. 그 결과는 좌천성 지방발령이었다. 이분에게는 미안하고, 그래서 슬프다.
슬픈 사실 둘. 내가 불명예스러운 전라도 출신이라는 걸 또 한번 확인하게 됐다. 이 말은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지만, 해야 할 것 같다. 영리한 사람들이 정율성의 고향이 광주이고, 내 고향이 목포라서 ‘전라도 출신들은 다 그래’라고 매치시켜준 모양이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정율성 선생에겐 부끄러웠고, 내 아들에겐 얼굴보기가 참담했다. 하지만 이 말만은 해두자. 한때 내가 닮고 싶어 했던 PD선배들은 경상도 출신이 더 많다. 회사에 경상도 사람들이 많아서, 또 내가 대구에서 오랜 기간 근무해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PD란 이래야한다고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거나, 프로그램으로 알려준 선배들은 경상도 사람들이 타 지역에 비해 훨씬 많았다. 내가 그나마 다큐멘터리 모양새라도 갖춘 프로그램이라도 만든다면 경상도 선배들의 공헌이 절대적이었다. 정율성 다큐라고 왜 아니겠는가. 이 프로그램의 기획과 제작에 참여하고 도움을 준 분들을 생각해보니, 강원도, 경상도, 서울, 경기도, 충청도 분들이 다 섞여있다. 이분들에겐 정율성을 어떻게 매치시킬 것인가. 그러니 제발 그만하자.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한 두 마디 문장을 앵무새처럼 외워서 떠들며 이념공세를 펼치는 분들에게. 지금의 북한 사회를 보면 참 재미있다. 3대 세습을 해도 북한은 꿈쩍하지 않는다. 체제에 대한 불만이 없어서이겠는가? 절대 아니다. 대다수 민중의 불만과 분노는 있겠지만, 북한 체제를 옹호하며 남한을 절대악처럼 여기며 3대 세습을 떠받치는 앵무새 떠벌이들의 과잉충성과 그 충성으로 얻는 떡고물이 어떻게든 이 괴상한 북한체제를 이어가고 있다고 난 생각한다. 대다수 사람들이 친일을 밥 먹듯이 하고, 세상의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길 때, 그 험난한 항일운동의 길에 들어선 인물에게 이념공세를 앵무새처럼 떠벌이는 사람들을 보면 북한의 앵무새를 떠올리곤 한다. 묘하게 이들의 이미지는 내 머릿속에서 별 어려움 없이 오버랩 된다. 어떻게든 체제수호란 명분으로 떠들어 대며, 기존의 체제를 옹호하고, 자기에게 떨어질 떡고물을 목내밀고 기다리는 사람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도 체제수호에 앞장서고 싶다. 하지만 내가 수호하고 싶은 체제는 친일파의 후손들과 독재정권의 하수인들이 때마다 냉전이데올로기를 교묘히 이용해 여전히 잘 먹고 잘사는 그런 체제가 아니다. ‘과거 일제부역을청산하고, 박정희 독재 하에 비명조차 못 지른 민주화, 노동 운동가들의 희생을 제대로 역사적 사실로 알리고, 광주학살을 제대로 규명하고, 최근 MB의 부도덕한 집권행위까지 제대로 규명하는, 그래서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알리고 반성하는’ 그런 체제다. 케케묵은 냉전이데올로기를 지금까지 끌어와 때마다 앵무새처럼 떠들어 대며, 부도덕한 정권으로부터의 떡고물을 목 늘어뜨리며 기다리는 분들은 이상하게 내가 방금 말한 사실들엔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다. 모르는 걸까, 부끄럽지 않은 걸까. 진정으로 치욕적인 역사에 대한 자의식이 없는 걸 보면 새가 맞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