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냉전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냉전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2년 8월 23일 목요일

'냉전'으로 치닫는 한ㆍ중ㆍ일, '국기'를 내려라


이글은 프레시안 2012-08-22일자 기사 ''냉전'으로 치닫는 한ㆍ중ㆍ일, '국기'를 내려라'를 퍼왔습니다.
[이수훈 칼럼] 정치인이 흔들고 언론이 춤춰도 국민은 냉정해야

2012년 여름 동아시아 지역에 또 한번 국기들이 휘날린다. 런던올림픽 경기장에서 휘날리는 국기야 피땀에 대한 보답이자 자긍심의 상징이라 탓할 일이 아니다. 국기를 들고 응원을 하고 선수들이 감격에 겨워 국기를 휘감고 이런 저런 '세리모니'를 한다. 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금메달을 딴 선수가 2등 혹은 3등을 한 선수에게 따뜻한 동료애와 위로를 표시해야 마땅하듯이, 자국의 국기가 게양대 한 복판에서 드높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마냥 감격해하고 애국심을 다지는 것은 1등 국민이 보일 마음자세가 못된다. 그런 마음자세는 금메달을 따지 못하는 수많은 다른 국가들에 대한 망각과 무시로 이어질 수 있다. 금방 다른 국가들의 시샘과 미움을 유발할 수도 있다.

동메달을 놓고 벌어진 축구 한일전은 하나의 스포츠 게임이기도 했지만 이 모든 요소들이 총결합된 일전이었다. 승리에 감격한 우리 선수가 '독도 세리머니'를 펼쳤다. 그 선수의 세리머니에도 국기가 등장한다. 이 경기에 앞서 이명박 대통령이 태극기가 선명하게 도색된 독도를 방문한다. "우리 땅"에 대통령이 가는 데 무슨 문제가 되냐는 투의 기세등등한 방문이었다.

일본이 왈칵 뒤집혔다. 얼마전까지 한일군사협력협정을 체결하고자 할 만큼 긴밀했던 한일관계가 일순 날아가버렸다. 일본은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로 가져가기로 했다. 정치인들은 이런 분위기를 틈타 자신의 입지를 높이기 위해 온갖 선동적인 언행을 남발하고 사회적 환경을 거칠게 만든다. 일본과 한국을 가리지 않고 국민들이 휩쓸려 들어가고 있다. 너무나 안타깝다.

그릇된 과거를 반성하고 동아시아 공동의 미래를 다짐해야할 2012년 '8.15' 전후에 폭발지경이 연출되는 지점은 한일관계만이 아니다. 동아시아 역내 바다들에 격랑이 인다. 홍콩 시위대가 센카쿠(尖閣, 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를 기습 점령하였다. 두말 할 것 없이 중국 국기를 꽂는다. 마치 사생결단의 전투 끝에 고지를 점령한 군인이 깃발을 꽂듯이. 중일관계가 악화되고 중국에서는 연일 중국 보통 국민들의 반일 시위가 열리고 있다.

 
▲ 19일 중국 하얼빈에서 열린 반일 시위 장면. ⓒAP=연합뉴스

중국이 관련된 해양영유권 분쟁은 동중국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중국해상에서도베트남,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 여러 동남아국가들과 분쟁이 전개되고 있다. 중국이 일본이나 동남아국가들과 벌이는 영토분쟁에는 미국이 은근하게 개입되어 있기도 하다. 갈등의 성격이 복잡한 것이다.

마침 한반도에서는 8월 20일부터 '을지프리덤가디언'이라는 명칭의 한미연합군사훈련이 실시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과 일본은 문제의 센카쿠 열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괌 인근 해역에서 섬 상륙 훈련을 하고 있다. '을지프리덤가디언' 훈련에 대해서는 19일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 1위원장이 서해상에서 반대 시위를 한 바가 있다. 미일 합동 훈련에 대해서는 중국이 관영 언론을 동원해 "댜오위다오를 겨낭한 것"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군사훈련이 주최측으로서는 안보나 방어의 논리로 정당화되지만, 명시적 대상이 있거나 암묵적 상대가 있기 마련이어서 필시 반작용을 야기한다. 특히 모두가 예민해져 있고 긴장의 수위가 잔뜩 올라가 있는 정세속에서 실시되는 군사훈련은 도발확률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전쟁으로 가보자는 귀결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면 역사적으로 무력주의로 문제가 해결된 사례가 없다. 분쟁이 있고 갈등이 있으면 외교가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 만고의 진리다.

여러 분석가들이 지적한 바대로 지금 한국은 주요국들과 최악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남북관계, 한중관계, 한일관계가 그렇고, 한미관계도 보기에 따라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동아시아 주변 환경마저 '신냉전'적이라고들 한다. 이런 정세와 안보환경이 한국의 안보나 국익에 위배된다는 것은 이미 고전적인 명제라서 중언부언이 필요없다. 우리는 남북관계를 비롯, 주변 강대국들과의 관계를 순탄하고도 협력적으로 가져갈 때 국민의 안위와 국익의 기반이 마련된다. 지금은 그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관계들과 포괄적 환경이 만들어져 있다.

'신냉전'을 넘어 작금의 동아시아 정세는 19세기말에 비견될 정도로 악질이다. 국가주의, 민족주의, 영토주의가 결부된 '국기주의'가 횡행한다. 동북아 주요 국가들이 맞이하고 있는 권력교체기와 맞물려 정치인들이 '국기주의'에 편승하여 한층 부추긴다. 이해관계가 같다고 판단하는 언론이 부추긴다. 냉정해야 할 국민들이 이 대열에 같이 선다. 나만 있고 상대방은 없어진다. 수많은 사람들과 시민사회가 나서 오랜 기간에 걸쳐 천신만고 끝에 쌓은 연대의 정신이나 공동체 같은 가치가 무너지고 있다. 이제 동아시아 연대나 공동체를 말하는 정치인도 없고 전문가도 찾기 힘들다.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주변국들, 그리고 동아시아 지역 전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 지도자들의 언행이 잘못되고 있다. 그 결과 협력의 기반이 야금야금 유실되고 있다. 협동보다는 경쟁, 통합보다는 분열, 평화보다는 대결, 외교보다는 무력주의, 공동번영보다는 각자도생, 이런 분위기가 급속히 조성되고 있다. 이 길은 결단코 막아야 할뿐더러 정반대로 되돌려야 한다. 19세기말이 아니라 21세기 고등한 동아시아 문명의 길을 찾아야 한다.

남 탓할 이유가 없다. 우리 국익이 크게 손상되기 때문에 우리가 나서야할 근거도 막대하다. 한국이 잘 하면 여러 양자관계를 개선할 수 있고, 그것들이 어울리면 동아시아 역내 질서를 바로 잡을 수 있다. 올림픽에서 5등을 할 정도의 국가와 국민이 아닌가?

제일 우선되어야 할 것은 남북관계의 변화다. MB정부로부터 이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내년까지 무작정 손을 놓고 기다리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집권여당 대통령 후보에게 사실상 상당한 권력이 몰리니까 박근혜 후보가 나서서 변화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MB정부에게 최소한의 청소를 하라고 요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게 없다면 박근혜후보가 제시한 바 있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에 '신뢰'를 보낼 근거가 약해진다.

적절한 환경이 조성되면 북한이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정황은 근래 들어 부쩍 풍부해지고 있다. 이는 남한의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무척 기대해왔던 점이기에 우리가 선제적으로 북한의 변화를 지원할 태세를 갖추어야 마땅하다. 금강산 관광 재개는 정부가 약간의 유연성을 발휘한다면 당장 가을부터라도 가능한 일이다. '천안함 사태'도 짚고 넘어가야 할 일종의 선결조건이라면 국회 차원에서 다루어봄직하다.

아무 전략도 없는 이웃 나라 때리기를 중단해야 한다. 일본이든 중국이든 마찬가지다. 한일관계와 한중관계가 악화되어서 우리에게 이익이 될 것은 털끝만큼도 없다. 한중일 3국은 일종의 운명공동체다. 동아시아 공동의 미래를 만듦에 있어서 3국이 협력하지 않으면 하나도 될 일이 없다. 2008년 이명박정부가 발 벗고 나서서 '한중일3국 정상회의'를 창설시키고, 급기야 서울에 사무국까지 존치한 것은 대단한 일이다. 지금 MB대통령이 보이고 있는 언행은 그런 성취를 상쇄시킬 정도로 모순적이다.

긴 호흡으로 보면 한국에서 5년 단임제 대통령은 금새 왔다가 금새 나간다. 이런 저런 사안을 두고 갈등을 빚을 수도 있고 대립각을 세울 수도 있다. 그 결과 국가간 관계가 좋아질 수도, 나빠질 수도 있다. 그런 정도는 다음 대통령이 와서 고치면 된다. 그런데 쉽게 고쳐지지 않는 것은 국민의 마음이다. 정부 대 정부간 관계보다 중요한 것이 국민 대 국민의 관계다. 이웃 국민의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자극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한일관계가 되었건 한중관계가 되었건 관계의 저변을 해치는 일이기 때문에 용납될 수 없다.

그런 각도에서 시민사회가 냉정을 유지하고 성숙해야 한다. 아무리 정치인들이 흔들고 언론이 덩달아 춤을 춰도 국민들은 냉정해야 한다. 냉정을 잃고 '국기주의'의 대열에 가담하는 순간 이런 저런 불편과 손해가 오기 십상이다. 한일관계가 원만하여 일반 국민에게 대단한 이익이 돌아올 게 별로 없다. 그러나 정반대로 관계가 악화되면 평범한 국민에게 손해가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올 수 있다. 과거 역사가 웅변하듯이 지도자들이 정책실패로 국권을 상실했을 때, 전쟁터에 총알받이로, 위안부로, 탄광의 광부로 파탄을 겪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힘없는 일반 백성이었다.

동아시아 도처에 휘날리는 깃발을 내려야 한다. '국기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무력대결주의에 안주해서도 안된다. 대신 공동체주의 깃발을 다시 올려야 한다. 동아시아가 되었건 동북아가 되었건 공동체 담론을 새롭게 가동해야 한다. 대결 노선을 폐기하고 평화와 대화 노선으로 교체해야 한다. 한국이 할 수 있고, 한국에게 그렇게 해야 할 가장 절박한 이유가 있다.

 /이수훈 경남대 교수

2012년 6월 27일 수요일

韓·美·日 군사전략 융합, 냉전 때보다 더 냉전적


이글은 프레시안 2012-06-27일자 기사 '韓·美·日 군사전략 융합, 냉전 때보다 더 냉전적'을 퍼왔습니다.
[평화에 투표하자] 탈냉전 이후 한반도, 어디로 가나

프레시안과 참여연대는 올해 총선과 대선 국면에서 벌어지는 긴장 고조 행위를 감시하고, 올바른 대외전략의 비전을 제시하고자 '평화에 투표하자' 시리즈를 공동 기획했습니다. 여러 전문가들이 필자로 나서는 이 연재에서는 현안에 대한 대응은 물론 평화를 바라는 이들이 외교ㆍ안보 쟁점에서 가져야 할 기준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탈냉전 이후 한반도, 동북아시아에서 면면히 발전되어 오던 공동안보와 다자협력의 정신은 붕괴되고 진영안보의 논리가 완전히 주도권을 잡았다. 지난 6월 14일에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외교ㆍ국방장관(2+2) 회담은 한미일 군사협력의 수준을 높이기로 함의함으로써 자본주의 해양세력이 중국 견제를 위한 군사 블록을 형성하기 위한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이러한 블록화는 세계화의 추세에도 위배될 뿐만 아니라 냉전적 질서로의 회귀라는 점에서 향후 동북아 안보에 부정적 영향이 예상된다. 더 나아가 전범국이며 패전국인 일본이 평화헌법의 굴레를 벗고 장차 한반도 유사시에 개입할 수 있는 경로가 열어졌다는 점에서 2차 대전 이후 70여년 가까이 유지되어 오던 동북아 국제질서를 허무는 역사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중국식 표현대로라면 왕도(王道)길을 버리고 패도(覇道)의 길을 답습하는 진영안보로 동아시아 질서가 회귀한다는 의미다.

이날 리언 패네타 미 국방장관은 한국군 탄도미사일 사거리 연장 협상에 대해 "상당한 진전을 이룬 상태"라며 "조만간 한미 양국이 동의할 수 있는 해법에 도달하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를 자세히 살펴보면 한국군의 미사일 주권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한국이 미국의 미사일방어(MD)에 적극 참여하기를 희망하는 뜻으로 읽힌다.

양국의 공동성명에서 "북한의 점증하는 미사일 위협에 대응해 포괄적인 연합 방어 태세를 강화하는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고 밝힌 점이나, 우리 정부 관계자의 "현재 추진되는 한국형 미사일방어(KAMD) 체제에 미국이 정보, 탐지, 식별, 타격을 위한 시스템을 지원해 한미공조를 강화한다는 의미"라는 발언,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MD 체제의 상호운용능력 개선과 MD 강화 문제를 논의했다"고 밝힌 점을 고려한다면 실질적 논의주제는 바로 MD라는 점이 드러난다.

한미일의 군사적 공조는 해양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공동성명은 일본과의 안보 협력의 중요성을 확인하고 한미일 3자 협력의 범위를 재난구호에서 해양안보, 항행의 자유, 대량살상무기(WMD) 비확산으로 확대한다고 밝혔다. 이 같은 맥락에서 6월 21일에 미항공모함이 동원된 한미일 해상훈련이 한반도 인근해역에서 실시된데 이어 서해에서 한미연합 해상 기동훈련이 6월 말까지 이어지고 있다. 바야흐로 서해에서 한미일이 중국과 결전을 치룰 수 있다는 군사적 긴장 분위기가 고조될 조짐이다.

▲ 한미해상합동훈련이 서해에서 열리고 있는 24일 미군의 조지워싱턴 항공모함에서 슈퍼호닛(F/A-18E/F)이 이착륙 훈련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0년 11월에 조지워싱턴호가 서해에 들어오기 전인 7월부터 중국은 "미국 항공모함이 서해에 들어오면 살아있는 표적이 될 것"이라는 외교부 대변인의 초강경 발언이 나온 바 있고, 실제로 미 항모에 대응하여 동중국해에서는 7월에 중국 해군이 실탄 사격훈련을 실시한 바 있다. 미국의 해양에서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중국과 러시아의 연합 해상훈련도 실시되는 등 한미일과 북중러의 해양에서의 긴장은 예사롭지 않다.

한미일이 근세 이래 이렇게 국가 정치-군사 전략을 완전히 융합시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과거 소련의 팽창주의 위협이 극심하던 냉전의 절정기에도 이러한 높은 수준의 삼각 동맹은 출현한 적이 없다. 냉전 시기보다 더 냉전적인 정치-군사 블록이다. 이를 기회로 일본은 최근 원자력규제위원회 설치법의 부칙에 "국가 안전보장에 이바지한다"는 문구를 삽입하여, 사실상 핵무장을 주변국에 암시하였다.

또한 한반도 유사시에 일본 이지스 구축함의 한반도 해역에 출동하는 방안을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있고, 한국과도 군사협정을 체결하여 한반도 유사시에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노골화하고 있다. 우주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금기도 깨고 대륙간 탄도탄을 개발하기 위한 로켓의 대기권 재진입 실험도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있다. 무기 수출을 금지하는 원칙도 벗어던지고 무기의 공동개발과 해외수출도 본격화할 조짐이다. 가히 아시아에서 군사적 맹주를 도모하려는 모양이다. 이러한 군사적 역할 확대를 추동하는 일본 내 보수우익은 최근 위안부 동상에 말뚝 박기를 비롯하여, 과거 군국주의 시절의 침략적 본성을 연상시키는 과격한 행동도 서슴지 않고 있다.

아시아에서 일본의 군사적 역할을 확대시킨다는 것은 다름 아닌 미국의 전략이다. 미국은 이명박 정부에게도 "팽창하는 중국은 반드시 민족주의로 회귀할 것이며, 한국은 미국과 중국 중 누구를 친구로 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고 강하게 압박하여 왔다. 여기에 이명박 정부가 적극 부응하면서 한미일의 군사적 융합에 무방비로 흡수되는 것이 작금의 현상이라면, 앞으로 한반도는 청일전쟁 전야와 같은 외세의 각축장이 될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뼈 속까지 친미이고 친일"이라는 이명박 정부가 아니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변화다. 적어도 냉전 이후 평화공존과 공동번영을 지향해 온 21세기의 시대정신과 정반대가 아닐 수 없다.

 /김종대 '디펜스21+' 편집장

2012년 1월 27일 금요일

조지 오웰의 경고, 핵을 가진 두세 개의 괴물과 냉전


이글은 프레시안 2012-01-27일자 기사 '조지 오웰의 경고, 핵을 가진 두세 개의 괴물과 냉전'을 퍼왔습니다.
[정욱식의 '핵과 인간'] 미국 핵 독점의 종말과 '슈퍼 폭탄'의 등장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두 달 후에 쓴 칼럼에서 소련이 수년 내에 핵무기 개발에 성공할 것이라며, "우리는 몇 초 만에 수백만의 사람들을 몰살시킬 수 있는 무기를 보유한 두세 개의 괴물과 같은 슈퍼파워 국가들이 세계를 분단시키는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대규모의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은 줄어들겠지만, 영원히 '평화가 없는 평화'의 상태, 즉 '냉전(cold war)'을 그 대가로 지불해야 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후 인류의 역사는 그의 경고대로 진행되고 만다.


▲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백악관 앞에서 열광하는 미국 시민들. ⓒ트루먼 도서관

앞선 글에서 자세히 살펴본 것처럼, 미국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는 소련을 상대로 한 무력시위의 성격이 강했다. 원폭 투하를 통해 미국이 노렸던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소련의 참전 이전에 미국의 힘에 의해 일본을 패망시키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미 싹트고 있던 냉전 질서에서 소련에 대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무력시위'의 성격도 내포되어 있었다. 그런데 애초에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요구한 당사자는 미국이었다. 1943년 11월 테헤란 회담에서 미영 연합군은 소련의 개입이 태평양전쟁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으로 보고, 소련에게 참전에 따른 '전리품'을 제시했었다. 소련에게 쿠릴 섬 및 사할린 섬 남단 이양 및 만주 해군기지 사용 허용 등 일본이 러일전쟁 승리로 획득한 것을 소련에게 돌려주는 것이 골자였다.

그러자 스탈린은 독일이 패망하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겠다고 약속했다. 스탈린은 1945년 2월에 열린 얄타 회담에서 이러한 약속을 거듭 확인하면서 "나치 독일의 패망 3개월 후에 대일전에 참전하겠다"라고 재확인했고, 포츠담 회담에서는 8월 15일이라는 구체적인 일정까지 제시했다. 그러나 미국은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면서 계산을 달리 했다. 당시 미국 내에서는 소련의 참전에 의한 일본의 항복은 아시아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키워줄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는데, 핵무기로 소련의 개입을 대신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원폭 투하는 소련의 지원 없이 일제를 패망시키고자 하는 동기와 함께 경쟁자로 부상한 소련에 대한 무력시위의 성격을 동시에 안고 있었다. 이는 반대의 해석도 가능케 한다. 트루먼이 밝힌 것처럼, 소련의 대일본 선전포고는 8월 15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예정보다 6일이 빠른 8월 9일 참전을 단행했다. 아마도 스탈린의 머릿속에도 '미국이 전쟁을 끝나기 전에 우리도 서둘러 참전해야 한다'는 계산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스탈린 "히로시마가 세계를 흔들었다"

그렇다면 스탈린은 미국의 핵무기 및 원폭 투하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스탈린은 1940년대 초반부터 핵무기 개발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미국이 포츠담 회담에서 '핵 외교'를 선보이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기 이전까지 심혈을 기울이진 않았다.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비한 작은 대비책"으로 간주하는 수준이었다. 또한 미국과 영국이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다는 것을 정탐 활동과 일부 과학자들의 '자진 보고'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스탈린이 포츠담 회담에서 미국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다는 트루먼의 통보를 듣고 그리 놀라지 않은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미국이 실제로 핵무기를 사용한 것에는 상당히 놀랐던 것으로 보인다. 히로시마 피폭 직후 스탈린은 "히로시마가 세계를 뒤흔들었다. 균형은 깨졌다. 핵폭탄을 만들어라. 그것은 우리로부터 거대한 위험을 제거해줄 것이다"라며, 소련 과학자들에게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미국의 핵 사용을 소련의 양보를 강제하기 위한 협박 외교로 규정하고, "우리가 협박에 굴복하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트루먼의 무력시위는 노련한 독재자 스탈린을 위축시키기보다 핵무기를 개발해 미국에 맞서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미국의 핵 독점은 2차 대전 말엽은 물론이고 종전 이후에도 "미국의 외교정책을 혁명화"시켰다. 대표적으로 "핵무기가 없었다면 미국 대통령이 결코 생각하기 힘든 정책, 즉 독일의 재건과 재무장을 선택하게 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독일의 재건 및 재무장에 따른 유럽 국가들의 두려움은 미국의 핵 억제로 차단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트루먼 대통령과 번스 국무장관은 1945년 8월 22일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독일의 위협이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며, "원자 폭탄은 도발을 일으키려는 나라들을 중지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미국의 양보가 불가피한 소련과의 협력도, 독일 재무장을 두려워하는 소련의 우려도 크게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핵의 위력을 믿은 미국의 대담한 행보가 시작된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독일 문제를 비롯한 소련과의 외교 협상에서 핵무기를 강압 외교의 수단으로 동원했다. 미국은 핵무기의 위력을 스탈린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원폭을 당한 히로시마에 소련 관료를 초청하기도 했고, 태평양에서 실시한 핵실험에 소련 관료를 참관시켰다. 또한 번스가 소련의 몰로토프 외무장관을 만나 독일 문제를 두고 담판을 벌이고 있었던 1946년 6월에는 태평양 비키니섬에서 대규모의 핵실험을 실시해 소련의 강한 반발을 야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련이 그토록 거부했던 독일 재건에도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미국의 두 가지 카드, 즉 핵 시위와 독일 재건은 소련으로 하여금 미국이 전쟁을준비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강하게 갖게 했다. 당시 소련의 위협 인식은 소련 해체 이후 해제된 비밀문서에서 잘 나타난다. 1946년 주미 소련대사인 노비코프(Nikolai Novikov)는 미국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그 근거로 해외 해공군 기지 건설, 원자폭탄 등 신형무기의 증강, 독일의 재건 및 재무장 추진 등을 제시했다. 특히 "미국은 독일에서의 연합국의 임무, 즉 무장해제와 민주화를 달성하기 이전에 임무를 종식시키는 것을 고려하고 있는데, 이는 독일 제국주의의 부활로 이어질 수 있고, 미국은 재무장한 독일을 자기편으로 만들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이에 따라 스탈린은 미국의 의도에 강한 의혹을 품으면서 "앵글로-색슨의 침공"을 막기 위해 강력한 대응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의 불만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구상을 밀어붙였다. 소련의 강력한 반발을 뒤로 하고 유럽경제부흥계획인 '마셜 플랜'을 단행했다. 또한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쿠데타와 이듬해 베를린 위기를 거치면서 미국은 핵무기 보유고를 크게 늘려 1949년에는 그 수를 200개로 늘렸다. 핵 능력 강화와 유럽경제부흥계획을 통해 유럽에서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막아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이러한 미국의 움직임을 침공 준비로 간주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유력한 대응책으로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주목할 점은 핵의 위력을 앞세운 미국의 강경 외교에 '핵 강압 외교'의 주역이었던 헨리 스팀슨 전쟁부 장관이 일찍이 강한 우려를 표명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그는 1945년 9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소련과의 신뢰구축을 위해서는 미국의 핵 계획을 소련과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그는 편지와 함께 동봉한 메모를 통해 그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미국의 원자 폭탄 보유는) 대륙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상쇄할 수 있는 중요한 무기로 간주되어왔습니다. 우리는 또한 소련 정부가 이러한 경향을 간파하고 있고, 가능한 최단시간 내에 이 무기를 획득하려는 소련의 정치ㆍ군사 지도자들의 유혹도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미국이 핵 독점을 통해 소련에 맞서는 앵글로-색슨 진영을 구축하면 "매우 절망적인 방식으로 비밀 군비경쟁이 야기"되고, "우리의 목적과 의도에 대한 소련의 의심과 불신은 증가될 것"으로 우려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추가적인 핵무기 개발과 생산을 중단하고, 소련 및 영국과 핵 기술 협력 및 통제를 놓고 협상에 나설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그의 충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련의 핵실험과 미국의 대응

결국 미국의 핵 독점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1949년 8월 29일 소련이 카자흐스탄 사막 '세미팔라틴스크-21'에서 핵실험에 성공한 것이다. 이는 미국이 나가사키에 투하한 플루토늄 핵폭탄 '뚱보(Fat man)'와 흡사한 것으로써, 소련이 1950년대 중반에 가서야 핵개발에 성공할 것이라는 미국의 판단보다 훨씬 앞선 것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1948년과 1949년 정보분석 보고서를 통해 소련의 핵무기 개발 성공 시점을 "1953년 중반기를 가장 가능성이 높은 때"라고 분석했다. 핵실험에 성공한 스탈린은 이 사실을 철저하게 비밀로 붙이고 싶어했다. 자극받은 미국이 대대적인 군비증강에 나설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첨단 장비는 소련의 핵실험 사실을 포착했고, 트루먼은 9월 23일 이를 공식 발표했다. 미국은 소련의 핵무기를 스탈린의 이름을 따 'JOE-1'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미국은 대대적인 군비증강 계획에 착수하고 되는데, 당시 '슈퍼 폭탄'으로 불렸던 수소 폭탄 개발과 NSC-68는 이를 대표한다. 스탈린이 피하고 싶었던 것이 현실로 나타나고 만 것이다.


▲ 소련의 최초 핵실험 장면. ⓒ미국 에너지부

예상보다 빨리 실시된 소련의 핵실험에 당황한 트루먼 행정부는 세 가지 조치를 단행했다. 첫째는 유럽에서 소련의 재래식 군사력에 대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영구적인 미군 주둔 및 재래식 군비증강이었다. 이는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폭등한 군사비를 줄이고 군부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고자 했던 트루먼의 의도와는 상반된 것이었다. 둘째는 소련에 대한 핵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원자폭탄의 양과 질을 크게 늘리는 것이었다. 이미 트루먼 행정부는 원자폭탄 증강을 통해 재래식 군사력 감축을 상쇄할 생각이었는데, 소련의 핵실험 성공 소식은 원자폭탄 증강 열기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 셋째는 당시 '슈퍼 폭탄'으로 불렸던 수소폭탄 개발 승인이었다. 트루먼은 1950년 1월 31일자 성명을 통해, "우리나라를 잠재적인 도발자로부터 방어하는 것은 최고 군통수권자의 의무"라며, "나는 원자력위원회에 수소 폭탄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핵무기를 만들라고 지시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수소 폭탄의 개발 방침은 핵의 역사에서 두 가지 심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는 수소 폭탄의 파괴력이 원자 폭탄의 수십배에 달해 단 한발의 폭탄으로도 대도시나 작은 나라를 완전히 날려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러한 가공할 파괴력에 놀란 많은 사람들이 반핵주의자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대소 봉쇄 정책의 설계자인 조지 캐넌과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로 불리는 로버트 오펜하이머였다. 이들을 비롯한 많은 맨해튼 프로젝트 참여 과학자들은 "수소 폭탄의 사용은 원자 폭탄을 훨씬 능가하는 대량 살상을 가져올 것"이라며, 설사 소련이 이 무기를 손에 쥔다고 하더라도 미국은 원자 폭탄으로 소련을 억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은 "현재와 같은 군사 기술 수준에서 (핵)무장을 통해 안보를 달성하겠다는 것은 파멸적인 환상"이라며, "미-소 간의 군비 경쟁은 이성의 상실을 의미한다"라고 개탄했다.

그러나 소련의 핵실험 성공에 충격을 받은 트루먼 행정부는 '슈퍼 폭탄'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소련보다 핵전력이 앞서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미국이 주저하는 사이에 소련이 먼저 수소 폭탄을 개발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팽배했던 것이다. 결국 미국은 1952년 11월 1일에 태평양에서 수소 폭탄 실험을 강행했다. 폭발 규모는 원자 폭탄 실험이었던 '트리니티'보다 500배 강력한 10메가톤을 넘어섰다. 소련 역시 그 이듬해인 1953년 8월 12일에 중앙아시아 사막에서 수소 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이처럼 미국과 소련은 조지 오웰인 말한 "두 개의 괴물"이 되어갔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1954년 3월 1일에 태평양 비키니 섬에서 실시된 미국의 수소 폭탄 실험은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를 낳았다. 폭발 규모가 무려 15메가톤에 달해,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탄보다 750배, 미국 정부가 예상했던 것보다 2.5배나 강력했던 것이다. 또한 직경 6,500피트, 깊이 250피트의 거대한 분화구가 생겨났으며, 버섯구름은 1분 후 직경 15킬로미터, 8분 후에는 100킬로미터까지 커졌고 높이도 무려 16.5킬로미터에 달했다. 더구나 방사능 낙진이 140여킬로미텉까지 날아가 조업 중이던 일본인 어부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며, 세계 곳곳에서 방사능 물질이 검출되고 이상 기후가 나타났다.


▲ 1954년 3월에 실시된 미국의 수소 폭탄 실험 브라보

가공한 폭발력 앞에 인류 사회는 전율했다. 이들 가운데에는 "핵무기를 다른 무기와 특별히 다르게 봐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던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전까지 핵무기 옹호자였던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역시 이 실험을 목도하고는 핵전쟁이 일어나면 영국은 더 이상 살 수 없는 땅에 될 것이라며 우려를 표명했다. 무엇보다도 수소 폭탄 실험 '브라보(Bravo)'는 반핵 운동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 미국의 저명한 반핵단체인 분별있는 핵정책을 위한 전국위원회(National Committee for a Sane Nuclear Policy)와 비폭력행동위원회(Committee for Non-Violent Action) 등과 영국의 핵폐기캠페인(Campaign for Nuclear Disarmament), 그리고 초국적 단체인 퍼그워시(Pugwash) 등 저명한 반핵단체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대규모 반핵 집회 개최, 신문광고, 시민 불복종 운동 및 핵무기 시설 침투와 핵실험 지역에서의 해상 시위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반핵 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반핵 운동은 언론을 통해 전세계에 타진되었다. 그러자 핵무기 사용에 대한 미국 여론도 바뀌기 시작했는데, 1950년대 중반에는 선제 핵사용에 대한 반대 여론이 과반수를 넘어서기도 했다.

이처럼 원자 폭탄보다 파괴력이 훨씬 큰 수소 폭탄은 '핵분열' 반응을 이용하는 원자 폭탄과 달리 '핵융합' 반응을 이용하는 무기다. 수소 폭탄의 핵융합 반응은 원자 폭탄의 핵분열 반응에 비해 단위당 방출 에너지 양이 10퍼센트 정도로 작지만,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는 물질의 질량이 핵분열 물질의 2퍼센트밖에 안 되기 때문에 핵물질당 방출 에너지의 양은 원자 폭탄보다 4배 이상 많다. 예를 들어 10킬로그램의 핵물질이 포함된 수소 폭탄은 같은 질량의 원자 폭탄보다 파괴력이 42배 강하다. 그래서 "핵분열 폭탄은 태양 표면에 해당하는 온도를 만들어내는 반면에, 핵융합 폭탄은 태양의 일부를 지구에 갖다 놓은 것과 같은 엄청난 온도를 발산한다."

한편 소련이 미국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핵실험에 성공하자, 미국 내에서는 '매카시즘'의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소련의 최초 핵무기는 미국의 예상보다 5년 정도 빨리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플루토늄 핵폭탄인 '가제트' 및 '뚱보'와도 흡사했다. 소련 핵실험 5개월 후에는 소련 스파이의 핵심인물인 클라우스 푹스(Klaus Fucks)가 미 정보기관에 체포되었다. 그는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한 물리학자였는데, 1944년부터 로스앨라모스 연구소에 파견 근무하면서 핵심 정보를 소련 측에 넘겼다. 이 사건 직후에도 국무부 고위관료인 앨저 히스 간첩 논란 및 로젠버그 부부 사건이 잇달아 터지면서, "미국 내 소련 스파이가 소련의 핵개발을 도왔다"는 심증은 확신을 갖게 됐다.

1949년 8월 29일 소련의 핵실험에 이어 10월 1일에는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미국 내 '적재 공포'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소련의 핵실험 성공이 미국 핵 독점체제를 무너뜨렸다면, 중국의 공산화 성공은 오랜 기간 미국의 동맹국으로 인식되었던 중국이 공산국가로 변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미국의 충격도 컸다. 특히 1950년 1월 들어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유엔 가입 문제로 미국과 소련이 날카로운 대립을 벌이기 시작했고, 그 해 2월에 중소 동맹조약이 체결됐다.

이를 틈타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인 매카시(Joseph McCarthy)는 1950년 2월 9일 "나에게 국무부에서 일하는 205명의 공산주의자 명단이 있다. 그런데 국무장관은 이들이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과 계속 일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무명에 가까웠던 매카시는 이 폭탄 발언 한방으로 일약 저명한 정치인으로 올라섰다. 그가 경고한 '적색 공포'를 실증하듯 4개월 후에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매카시즘은 미국 국내 정치뿐만 아니라 대외정책의 급격한 우경화를 야기했다. 국제정세가 급변하던 시기를 틈타 몰아치기 시작한 매카시즘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트루먼이 신속한 개입을 선택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반도에 신속한 개입을 선택함으로써 안보와 공산주의에 나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한 것이다.

* 주요 참고문헌

George Orwell, "You and the Atomic Bomb," Tribune, 19 October 1945.Joseph Cirincione, Bomb Scare: The History & Future of Nuclear Weapons, (ColumbiaUniversity Press, 2007)Nina Tannenwald, "Stigmatizing the Bomb: Origins of the Nuclear Taboo," International Security(Spring, 2005).William Burr, "U.S. Intelligence and the Detection of the First Soviet Nuclear Test, September 1949," September 22, 2009John Lewis Gaddis, The Cold War: A New History, (New York: The Penguin Press, 2005).정욱식, 글로벌 아마겟돈: 핵무기와 NPT, (책세상, 2010년).카이 버드ㆍ마틴 셔원 지음, 최형섭 옮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사이언스북스, 2010년).트루먼 도서관: http://www.trumanlibrary.org조지워싱턴대 국가안보문서 보관소: http://www.gwu.edu/~nsarchiv/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2012년 1월 16일 월요일

항일운동가 정율성을 빨갱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에게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01-16일자 기사 '항일운동가 정율성을 빨갱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에게'를 퍼왔습니다.
[미디어현장] 박건 KBS PD “친일·독재 정권의 냉전 이데올로기 이제는 벗어나자”

KBS스페셜 편은 결국방송이 나갔다. 방송 전에 제작후기를 부탁받고 사실 난감했다. 이념적인 논란에 휩싸이며 8.15 광복절 특집으로 나갔어야할 프로그램이 두 번의 방송 불발을 거치면서 5개월 만에 방송이 되니, 외부에서 보면 당연히 담당 제작자인 내가 할 말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도 내가 할 말이 많을 줄 알았다. 하지만 방송전날 더빙을 마치고 나니 나에게는 이상하게 할 말이 남아있지 않음을 알게 됐다. 경과야 어찌 됐건 내가 할 말은 1시간짜리 프로그램에 온전히 담겨있고, 그것이 방송나간다면 내가 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미진하고 아쉬웠던 부분이야 당연히 있겠지만, 내가 정율성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하고 싶었던 말은 온전히 그 프로그램에 다 담겨있다.
나머지 이야기도 사실 하고 싶진 않다. 이미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사내 게시판에 두 번에 걸쳐서, 또 개인적으로 여러 동료들에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방송이 나갈 수 있게 된 건 KBS의 양대 노조와 PD협회의 물러서지 않은 싸움 덕분이었다. 그리고 동료 PD들의 응원과 격려 덕분이었고, 보직을 걸고 방송을 촉구한 선배들의 저항 덕분이었다. 그러니 이분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보답하는 길은, 또한 미래의 후배들을 위해서 이런 일이 없도록 하는 길은 부끄러운 과거를 기록하는 것이다. 부끄럽지만, 그래서 쓴다.



KBS 스페셜 "13억 대륙을 흔들다, 음악가 정율성"

프로그램은 6월초에 기획됐다. 방송시점 2개월을 앞두고 있어서 제작자 입장에선 그리 여유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길지 않은 그 기간에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6월 하순에 중국출장을 이틀 앞두고 있을 때 이례적으로 당시 콘텐츠 본부장님이 요구해서 기획방향과 취재내용을 중간간부로부터 직접 보고받았고, 8월 초순에한창 마무리 촬영과 편집중일땐 또 이례적으로 사장님이 요구해서 기획방향과 취재내용을 본부장님으로부터 직접 보고받았다. 하지만 제작을 중단하라는 지시는 없었다. 다만 잘 마무리하라는 언급만 있었다. 그리고 방송 4일전이면서 프로그램 시사를 하루 앞둔 날, 전격적으로 방송 불발이 결정됐다. 내가 들은 이유는 이승만, 백선엽 등의 인물프로그램들의 방송여부를 두고 그 논란이 한창인 시점에서 정율성 편이 방송된다면 KBS는 극심한 혼란에 휩싸인다는 것이었다. 그 뒤에는 KBS 이사회의 이사장과 이사가 보직을 걸고 버티고 있었다.

KBS 스페셜 "13억 대륙을 흔들다, 음악가 정율성"

이례적으로 사장과 본부장까지 검토하고 승인한 개별 프로그램을, 이례적으로 이사회가 막아서서 방송이 되지 않았다. 나중엔 감사까지 이례적으로 막았다고 한다. 더더욱 공영방송인가하는 노조까지 때마다 앵무새처럼 떠벌이며 방송을 반대했다. 노조까지 막아선 이례적인 프로그램이었다. 두 번까지 방송이 불발되자, 사실 내가 15년 넘게 몸담고 있던 방송국이 낯설게 느껴졌고, 내가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방송제작의 원칙과 상식이 애초에 그 존재가 없었던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내가 PD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는 것도 참 낯설었고, 더더구나 15년 넘게 PD로 근무했다는 것도 우스웠다.
개인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을 때 그 위기에서 구해준건 동료 피디들이었다. 넘어져서 바닥에 주저앉은 심정이었을 때, 다가와 팔을 내밀진 않았지만, 동료들은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모양이다. 내가 스스로 일어나길 바랬고, 내가 계속 주저앉아있기 민망해서 엉거주춤 일어났을 때에야 그들은 내가 혼자가 아니라고, 조용히 다독여줬다. 어떻게든 싸우자고, 어떻게든 방송을 내보내자고 그들은 그렇게 말했다. 이건 내가 몸소 겪은 정말 귀한 경험이다.


KBS 스페셜 "13억 대륙을 흔들다, 음악가 정율성"

슬픈 사실 하나. 이 방송을 어떻게든 내보내겠다고 노력한 선배 한분은 지방으로 좌천 발령을 받았다. 사실 이분이 책임질 일이 아니었다. 기획과 제작단계에서 이분이 그 보직에 계셨던 것도 아니고, 운 나쁘게 방송 불발이 결정될 때 하필 그 보직에 계셨다. 하지만 이분은 어떻게든 방송을 내고자 노력했고, 자신의 말에 책임지려 했고, 보직을 걸고서라고 방송을 내고자 했다. 그 결과는 좌천성 지방발령이었다. 이분에게는 미안하고, 그래서 슬프다.
슬픈 사실 둘. 내가 불명예스러운 전라도 출신이라는 걸 또 한번 확인하게 됐다. 이 말은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지만, 해야 할 것 같다. 영리한 사람들이 정율성의 고향이 광주이고, 내 고향이 목포라서 ‘전라도 출신들은 다 그래’라고 매치시켜준 모양이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정율성 선생에겐 부끄러웠고, 내 아들에겐 얼굴보기가 참담했다. 하지만 이 말만은 해두자. 한때 내가 닮고 싶어 했던 PD선배들은 경상도 출신이 더 많다. 회사에 경상도 사람들이 많아서, 또 내가 대구에서 오랜 기간 근무해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PD란 이래야한다고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거나, 프로그램으로 알려준 선배들은 경상도 사람들이 타 지역에 비해 훨씬 많았다. 내가 그나마 다큐멘터리 모양새라도 갖춘 프로그램이라도 만든다면 경상도 선배들의 공헌이 절대적이었다. 정율성 다큐라고 왜 아니겠는가. 이 프로그램의 기획과 제작에 참여하고 도움을 준 분들을 생각해보니, 강원도, 경상도, 서울, 경기도, 충청도 분들이 다 섞여있다. 이분들에겐 정율성을 어떻게 매치시킬 것인가. 그러니 제발 그만하자.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한 두 마디 문장을 앵무새처럼 외워서 떠들며 이념공세를 펼치는 분들에게. 지금의 북한 사회를 보면 참 재미있다. 3대 세습을 해도 북한은 꿈쩍하지 않는다. 체제에 대한 불만이 없어서이겠는가? 절대 아니다. 대다수 민중의 불만과 분노는 있겠지만, 북한 체제를 옹호하며 남한을 절대악처럼 여기며 3대 세습을 떠받치는 앵무새 떠벌이들의 과잉충성과 그 충성으로 얻는 떡고물이 어떻게든 이 괴상한 북한체제를 이어가고 있다고 난 생각한다. 대다수 사람들이 친일을 밥 먹듯이 하고, 세상의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길 때, 그 험난한 항일운동의 길에 들어선 인물에게 이념공세를 앵무새처럼 떠벌이는 사람들을 보면 북한의 앵무새를 떠올리곤 한다. 묘하게 이들의 이미지는 내 머릿속에서 별 어려움 없이 오버랩 된다. 어떻게든 체제수호란 명분으로 떠들어 대며, 기존의 체제를 옹호하고, 자기에게 떨어질 떡고물을 목내밀고 기다리는 사람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도 체제수호에 앞장서고 싶다. 하지만 내가 수호하고 싶은 체제는 친일파의 후손들과 독재정권의 하수인들이 때마다 냉전이데올로기를 교묘히 이용해 여전히 잘 먹고 잘사는 그런 체제가 아니다. ‘과거 일제부역을청산하고, 박정희 독재 하에 비명조차 못 지른 민주화, 노동 운동가들의 희생을 제대로 역사적 사실로 알리고, 광주학살을 제대로 규명하고, 최근 MB의 부도덕한 집권행위까지 제대로 규명하는, 그래서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알리고 반성하는’ 그런 체제다. 케케묵은 냉전이데올로기를 지금까지 끌어와 때마다 앵무새처럼 떠들어 대며, 부도덕한 정권으로부터의 떡고물을 목 늘어뜨리며 기다리는 분들은 이상하게 내가 방금 말한 사실들엔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다. 모르는 걸까, 부끄럽지 않은 걸까. 진정으로 치욕적인 역사에 대한 자의식이 없는 걸 보면 새가 맞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