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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17일 목요일

"박근혜 정부 성패, 남북관계에 달렸다"


이글은 프레시안 2013-01-17일자 기사 '"박근혜 정부 성패, 남북관계에 달렸다"'를 퍼왔습니다.
[동아시아와의 인터뷰] 베이징대 진징이 교수

조선족 출신인 진징이(김경일, 金景一) 교수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중국의 대표적인 북한 전문가이다. 일각에서는 '친북적'이라고 평가하지만, 인터뷰 내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균형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한반도의 현실에 대한 우려와 대안적 미래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는 박근혜 후보의 당선에 너무 낙담할 필요가 없다고도 했다. 미국-중국 데탕트의 문을 연 당사자도, 소련과 총성 한 방 울리지 않고 냉전을 종식시킨 당사자도 모두 미국의 보수 정권이었던 것처럼, 박근혜 당선인이 확고한 철학과 신념을 바탕으로 대북정책을 설계하고 실천에 옮긴다면 한반도의 새로운 역사를 열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진징이 교수는 정전 60주년을 맞이해 한반도도 전쟁을 공식적으로 끝내고 평화체제로의 전환을 진지하게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터뷰는 2012년 12월 11일 서울에서 평화네트워크의 정욱식 대표와 이제영 간사가, 올해 1월 7일 베이징에서는 정 대표가 만나 두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아래는 그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 정욱식(왼쪽) 평화네트워크 대표와 진징이(오른쪽) 북경대 교수 ⓒ평화네트워크

김정은 체제가 등장한 지 1년이 지났다. 다양한 평가들이 나오고 있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김정은 체제가 선군정치에서 경제를 우선시하는 선경(經)정치로의 노선 전환을 꾀하고 있는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하고 있다.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진단이 정확하다고 보시는가?

북한 선군정치의 첫째 목적은 "미제의 침략책동에 주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것이고 둘째 목적은 사회주의강성대국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한다. 선군시대 때 '경제건설로선'도 내놓았다. 선군시대 경제건설 노선은 국방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고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김정은 체제 출범 후 경공업과 농업이 강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국방공업의 순위가 바뀐 것은 아니다. 이 순위가 바뀔 때에만 선군정치의 내용이 실질적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선군정치는 역시 체제수호를 우선으로 한다. 북한이 처한 대내외환경을 보면 북한은 선군정치를 버릴 수 없다. 김정은 체제 출범 후 내각중심제, 내각책임제를 강조하는 것을 두고 제2경제가 내각에 이전한다는 평가가 있는데 사실 내각중심제는 그전에도 강조해왔던 것이다. 개혁과는 별개다. 내각은 계획경제를 총괄·제정하고 집행하는 기구다. 내각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어찌 보면 계획경제를 강화하겠다는 의미로도 보인다.

김정일의 2011년과 김정은의 2012년 시찰을 비교해 보면 김정일은 공장, 기업소, 농촌 등 경제 제1선의 시찰이 80여 번이나 되었다. 만년에 강한 변화의 의지를 보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김정은의 공장, 기업소, 농촌시찰은 4-5차례 밖에 되지 않았다. 군부대시찰은 거의 30번이 넘는다. 역시 선군정치와 체제구축이 중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정은의 파격적인 행보에도 관심이 많은데 어떻게 보는가?

지난해 김정은의 행보를 세 측면에서 살펴보았는데, 첫째는 이른바 김정은의 노작이고, 둘째는 김정은의 시찰에서 보여준 시각이며, 셋째는 김정은 관련 북한의 풍문이다. 그중 김정은 관련 풍문이 개혁개방 쪽에 가장 가깝다. 시찰할 때 보여준 행보는 가히 파격적이다. 김정은의 노작을 보면 변화를 살펴보기 어렵다.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에 앞서 이념의 변화가 선행했다. 북한에는 그런 변화가 아직은 없다.

김정은의 파격적 행보가 변화의 의지를 보여준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의 개혁개방과 비교할 때 북한은 초기 조건이 너무 다르다. 흔히 중국 개혁개방의 일등공신은 덩샤오핑(鄧小平)이라고 하지만, 사실 일등공신은 문화대혁명이다. 문화대혁명이 없었으면 기득권 세력이 개혁개방에 강하게 저항했을 것이다. 지난 역사에 대한 일부 부정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김정은이 개혁개방의지가 강하다고 해도 이 두개의 산, 즉 기득권 세력의 저항과 기존 이념을 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 북한의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1일 오전 조선중앙TV와 조선중앙방송 등 방송을 통해 육성 신년사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렇지만 북한도 이제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왔다. 경제발전과 민생 챙기기를 강조하는데 그 자체가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북한은 북한식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계획경제를 근간으로 하면서 국가주도하에 중점 기업이나 첨단과학분야에 집중투자하면서 도약식발전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 기업과 농촌에서 어느 정도 자율화를 허용하면서 생산력을 향상하려 할 수도 있다. 농촌의 경우 1960년대 중반에 내놓은 분조관리제를 1996년, 2002년의 분조도급제로 하면서 분조의 단위를 최소한으로 줄여 사실상 중국의 가정도급제와 비슷하게 하는 것이다. 명목은 여전히 분조관리제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분배방식이다. 북한은 지난해부터 농촌에서의 분배방식을 시범적으로 바꾸고 있다. 거두어들이고 배급해 주던 방식에서 초과 부분까지 일차적으로 배분하고 자율적으로 처분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분배 방식의 변화들이 앞으로 전국적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시는가?

분배방식의 변화를 통해 농민들의 생산의욕을 높이려 할 것이다. 북한 내부통계에 따르면 2011년 곡물생산량목표를 650만 톤으로 잡았는데 자연재해 때문에 513만 톤을 생산했다고 한다. 지난해 내부통계는 잘 모르겠지만 유엔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490만 톤을 생산했다고 한다. 그런데 북한내부통계로는 2012년 생산량이 2011년의 513만 톤을 초과했을 가능성이 있다. 차이는 있지만 증산한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것을 바탕으로 분배방식이 변화하고 농민들에게 처분권이 주어진다면 시장을 통한 유통이 강화되면서 식량의 어려움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군부 실세 리영호 총참모장 숙청은 어떻게 해석하는가. 군부의 대표적 실세가 리영호였는데, 모든 지위에서 해임이 됐고, 최근에 나오는 얘기들에 의하면 사실상 북한도 숙청을 인정하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그런 것이 군 개혁의 신호탄으로 해석할 수 있는 건지, 선군정치 시대에서 경제는 내각이 맡고, 실질적으로 군보다 당을 우선시하는 북한체제의 정상화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는 건지, 일종의 권력투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인지, 어떻게 보시는가?

체제구축 단계에 걸림돌을 제거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전에도 그렇게 해왔다. 다른 신호는 아닐 것으로 본다. 북한체제 특성상 최고 권력을 둘러싼 권력투쟁은 있을 수 없다. 확대해석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리고 북한이 선군정치를 한다고 하여 군이 당을 지휘하는 것은 아니다. 군 안에 당이 있고 당이 총대를 지휘하는 데에는 변화가 있을 수 없다.

북한과 중국은 여러 가지 조건과 환경이 다르지만, 잘 아시다시피 중국같은 경우는 개혁개방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마오쩌둥(毛澤東)의 '양탄일성(兩彈一星)'을 많이 강조했다.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위성을 갖게 됨으로써 중국이 군사적으로 강대국의 반열에 올라서서 경제발전에 매진할 수 있게 됐다' 이런 식의 화법 들이 많이 동원됐다. 덩샤오핑도 그랬고, 장쩌민(江澤民)도 그랬던 걸로 기억한다. 북한의 김정은 체제도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북한식의 일종의 '양탄일성'을 통해서 핵 억제력은 유지하고 대신 병력감축을 포함해서 재래식 군사력은 좀 줄여가는 방향에 대한 전망이나 예상은 어떤가?

중국은 마오쩌둥 시대에 제국주의 침략전쟁이 불가피한 것으로 보았다. 국력의 많은 부분을 전쟁준비에 돌렸다. 원자탄이나 수소탄을 전쟁을 억제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보았다. 그렇다고 원자탄, 수소탄을 성공시키고 곧바로 경제발전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경제를 붕괴의 변두리에 빠뜨렸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할 수 있던 것은 핵 억제력의 요소보다도 미국 및 서방세계와 관계개선을 하면서 이룬 주변 환경의 요소와 평화와 발전이라는 시대적 환경이 더 중요한 것이다.

북한은 냉전이 종식되면서 한미일 대 북한이라는 새로운 냉전구도에 갇히게 되었다. 북핵 문제의 발단은 이 냉전구도를 탈피하려는 북한과 그것을 유지하려는 미국과의 충돌이었다. 핵 문제는 미국이 키운 면이 없지 않다. 북한은 '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안보문제를 해결했고 이제는 경제에 매진할 수 있다'는 논조를 펼치고 있다. 그렇지만 북핵문제가 철저히 해결되지 않으면 북한은 오히려 불안정 요소와 안보 문제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을 수 있다. 지난 역사가 그랬다. 북핵문제의 본질을 보면 병력감축이나 재래식 군사력 감축과는 큰 관련이 없을 것이다.

북한이 '핵 억제력'을 확보하게 되면 중국이 70, 80년대에 보여주었던 것처럼 재래식 군사비 부담을 좀 줄여나가는 선택을 할 가능성은 어떻게 보는가?

북한이 진정 경제를 발전시키겠다고 결심하면 그것이 계획경제든 시장경제든 관계없이 군수공업의 많은 부분을 민수공업으로 전환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국이 그랬다. 북한 경제에서 군수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기에 더 그러한 것이다. 단순히 핵 억제력이 있기 때문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북한이 핵 억제력은 당분간 유지, 강화하는 노선을 취하되 군수산업은 비중을 줄여가면서 민간용으로 전환한다면, 이것이 한국이나 중국에 대북정책의 딜레마를 가져올 수 있지 않은가. 한국의 경우, 북핵 문제 해결을 굉장히 중요한 원칙으로 삼고 있는데 핵은 당분간 유지하면서 중국이나 한국이 요구해 온 것처럼 경제발전에 좀 더 신경을 쓰게 될 경우에 한국은 어디에 우선순위를 둬야 될지 고민해야 할 텐데 어떻게 보시는가?

결국 우선순위는 경제에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한반도 문제에 대한 접근법은 굉장히 지정학적이었다. 한반도문제 연구에서 사용빈도가 가장 높은 단어가 아마 지정학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지정학의 뜻에는 지리적 위치, 시대적 상황, 강대국들의 전략이 있다. 지리적 위치는 상수이지만 시대적 상황과 강대국들의 전략은 변수이다. 시대적 상황이란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와 지금의 시대는 다른 것과 같은 것이다. 강대국들의 전략이란 어느 나라나 지역에 대국들의 전략이 머물면 그 지역과 나라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부각될 수밖에 없다. 한반도가 지금까지 그래 왔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국전쟁이 그 결과였다.

지금은 미국이 한반도를 기점으로 동아시아 전략을 펼치고 있다. 결국 지금도 지정학적 접근을 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전략적으로 접근하면 지난 시기의 패턴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제는 지경학적 접근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경제는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 중국의 모든 변화는 경제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북한문제도 결국 경제로 풀 수밖에 없다. 경제로 얻는 이익이 핵 개발로 얻는 이익보다 훨씬 크면 북핵 문제 해결도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목표는 지경학적 접근으로 한반도 경제블록화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북핵에만 집착해서는 문제 해결이 어려울 수 있다. 제재와 압력을 가하면 가할수록 북한은 핵 개발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한미일은 그렇게 해왔다. 세계 제1, 제2와 10위권의 세 나라가 가한 압력은 북한에는 엄청난 압력인 것이다.

문제는 미국이 실제로는 북한을 명분으로 삼아 중국을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과 미국의 관계가 아직 정립되지 않았고, 앞으로 정말 대결로 나가면, 북핵 문제, 한반도 문제 해결은 더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그런데 중·미 관계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사실 남북관계라고 할 수 있다. 남북관계가 잘 돌아가면 중국과 미국은 따라갈 수밖에 없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그랬다. 중국도 호응했고, 미국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중·미 관계 역시 한반도 문제에서 크게 마찰음을 내지 않았다. 결국 한반도 문제 해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남북관계라는 내적요소인 것이다. 남북관계가 풀리면 대국들이 개입할 틈새가 없어진다. 그렇게 되면 한국은 중·미 간에 균형자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은 지난 역사의 기억에서 피해의식이 강하다. 지금도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하는데 세계적으로 10위권의 새우가 어디 있는가. 한국은 이미 고래가 됐다. 고래 싸움을 말릴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명박 정부가 지혜롭지 못했던 것은 한쪽으로 치우쳐서 이러한 역할을 제대로 못했다는 점이다. 오히려 중국과 한국과의 관계가 매우 껄끄러워졌다.

중요한 말씀이다. 지금까지는 한반도 문제를 지나치게 지정학의 관점에서 접근을 해왔다고 한다면, 이제는 좀 지경학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고, 지나치게 외적 요소를 강조하는 바람에 한국이 가진 내적 역량을 무시, 간과해왔던 측면이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런데 최근의 몇 년 상황을 보더라도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한국의 노무현 정부 경우에도 햇볕정책 추진과 동시에 한미관계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시도들이 상당 부분 좌절되었다. 일본의 경우에도 하토야마(鳩山由紀夫) 정권에서는 대등한 미·일 관계와 동아시아 공동체 등을 이야기했다가 천안함 침몰 등으로 미·일 동맹 강화론이 일본 내에서 득세하면서 사실상 쫓겨나다시피 하지 않았나. 그래서 한국보다 훨씬 더 국력이 강한 일본만 보더라도 미국이 가진 지정학과 전략적인 틀을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노무현의 부분적인 실패와 하토야마의 큰 실패를 보면서 한국의 차기 정부에게 지정학보다는 지경학을 우선하면서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큰 마찰을 일으키지 않고 잘 풀어나갈 수 있는 전략적 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떤 부분을 좀 강조하고 싶은가?

▲ 베이징대 진징이 교수 ⓒ평화네트워크

일본도 한때 경제호황기에 미국에 맞서 다른 한 극을 이루려 했다. 그렇지만 경제가 20년간 침체되면서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다. 하토야마 정부도 취약해지는 경제를 기반으로 미국과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려고 했는데 기반이 약하니 금방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본경제가 잘 풀려나가고 역내 경제협력이 강화된다면 미국과의 관계에도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이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국난을 타개하려 한다면 경제발전에 앞서 국가적 자살로 나갈 수 있다.

한국경제도 이제는 어느 한계점에 도달했다고 본다. 세계경제가 내리막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더욱 그럴 것이다. 중국이 세계경제의 불황기에도 계속 성장세를 유지하는 데에는 중국이 가지고 있는 자원, 인구, 영토, 내수시장이 중요한 원인일 것이다. 한국도 크게 재도약하려면 그에 걸맞은 자원, 인구, 영토, 내수시장이 필수적일 것이다. 결국 한반도 경제블록화가 유일한 길이다. 그러자면 남북경제협력과 중국, 러시아, 일본과의 협력도 병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지경학적 요소가 강화되어야 지정학적 요소가 약화될 수 있을 것이다.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의도를 겉으로 드러내든 드러내지 않든, 남북 간의 힘의 차이 등을 볼 때, 통일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한국이 주도하게 될 텐데, 여전히 한국의 주류적인 성향을 보면 미국이 중요하고, 통일 이후에도 한미동맹을 유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굉장히 크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은 당연히 한반도의 통일을 반대하지 않겠느냐 이런 얘기들이 있다.

왜 통일된 이후에도 반드시 한미동맹을 유지해야 하는가. 중국을 위협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정말 중국이 한반도 통일 과정이나 통일 후에 패권주의, 대국주의로 나아간다면, 한국은 중국에서 가지 말라고 해도 한미동맹 쪽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고 중국이 책임감과 도덕성 있는 나라로 한반도와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거나 경제블록화를 이룬다면 한미동맹이 꼭 필요할지 묻고 싶다.

다른 한편으로 중·미 관계가 확실한 협력관계로 자리 잡는다면 미국이 꼭 중국을 겨냥한 한미동맹을 필요로 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강대국들의 부흥은 모두 패권을 목표로 했다. 그러기에 중국도 패권을 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데 그 패권이 지금 가능한가 질문하고 싶다. 1950년대 중반에 마오쩌둥이 외국 손님들을 만나면서 '이제 50년이 지나면 중국이 강대국이 될 것인데, 그때에 가서 중국이 대국주의를 하면 당신들은 중국이 대국주의를 못하게 반대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마오쩌둥은 문화혁명 때에도 늘 중국이 패권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했다. 전쟁준비도 방공터널을 파는 등 방어책을 강구하고, 쌀을 비축하는 것이었다. 덩샤오핑 역시 패권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늘 강조했다. 결코 빈말이 아닐 것이다. 물론 중국도 신흥대국인 만큼 패권에 대한 욕망이 있을 수는 있다. 패권을 하지 않는다는 자체가 그런 욕망을 억제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패권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다를 수 있다. 중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다른 나라에 대한 지배권, 간섭, 주권침해 등을 패권이라고 한다. 강압적으로 다른 나라를 자국의 의지대로 몰아가는 것을 패권이라고 한다. 중국문화의 특징상 중국은 중용을 강조하고 조화로움을 강조한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주변국과 국제사회와의 협력이 잘되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패권을 추구했다면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앞으로의 발전도 마찬가지이다. 윈-윈(win-win)할 수밖에 없다.

말씀하신 것처럼 19, 20세기 식의 패권주의는 아닐 것이고, 중국 역시 패권을 추구할 의사도 능력도 없다고 하지만, 단순히 '중국위협론'을 강조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중국에 우호적인 사람들조차도 중국이 갈수록 공격적으로 바뀌고 있는 것 같다고 우려한다. 최근 2~3년 동안 중국을 바라보는 외부의 인식과 중국이 주장하는 바의 간극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도 많이 받았다. 이러한 간극을 해소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노력이 필요하겠는가? 또한 중국으로서는 외부의 오해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낼 수 있는 반면, 주변국들은 중국이 그들을 위한 충고를 너무 적대시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얘기하기도 한다. 특별히 한국인들 사이에서 만연해 있는 중국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위협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인식론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최근 수년간 중국이 대외관계에서 공격적으로 나아간다고 하는데, 하나씩 따지고 보면 대부분이 주권 문제와 연결된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중국이 이 문제를 주권 문제로 간주할 때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권문제에 한해서는 어느 나라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주권문제에 한해서 중국은 문화혁명 때도 같은 태도였다. 그렇지만 지금의 중국에 더욱 신경을 쓰는 이유는 바로 중국이 강대국이 되어서일 것이다. 국력의 강약에 따라 보는 시선이 달라질 수 있다. 지난 시기 중국은 주변국과 영토분계선을 확정할 때 양보가 더 많았다. 양보로 안정을 찾았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양보는 없다. 중국이 강경하다고 보는 다른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결국 중국과 주변국들이 겪고 있는 일부 갈등은 과도기에 필연적으로 겪어나가야 할 갈등일 것이다. 돌이켜 보면 중국은 1840년의 아편전쟁 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금처럼 강대해진 적이 없었다. 주변국들 역시 이렇게 강대한 중국을 상대해 본 적이 없다. 위협을 느끼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새로운 관계정립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중국 역시 이 과정에서 자신을 부단히 갱신해야 할 것이다.

한국에는 중국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있지만 현실에서 중국을 가장 많이 찾는다. 중국인들의 한국방문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이제 양국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결국 앞으로의 양국관계도 양국이 함께 오늘의 현실에서 만들어가는 것이다.

중국의 문제는 역시 국내문제가 급선무이다. 최근 들어선 시진핑(習近平) 체제도 국내문제에 주력하고 있다.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전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제2의 개혁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런 개혁이 중국에 대한 주변국의 우려를 해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시진핑이 어떤 부분에서 중국 인민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가?

중국인들이 제일 증오하는 문제에 메스를 들이대고 있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관료도 시찰을 나갈 때면 길을 봉쇄하고 경찰차가 앞뒤를 동행하면서 백성들에게 불편을 주었다. 그런데 얼마 전 시진핑은 광저우(广州) 방문에서 길도 봉쇄하지 않았고 보통 차량과 같이 가면서 차창의 커튼도 치지 않았다. 중국의 어느 경우에도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중국인들에게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온 것이다. 총서기가 솔선수범하면 다른 관료들도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관료사회에는 큰 지각변동이다.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정치 쇄신을 위한 8개 조항을 채택했는데, 백성들이 가장 바랐던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물론 지켜봐야겠지만 현재로서는 매우 희망적이다.

그렇다면 시진핑 체제가 인민 위에 군림하려고 하지 않고, 권위를 지나치게 앞세우지 않는 부분들이 대외 관계에도 반영될 것이라고 보는가?

대외정책은 대내정책의 연장선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시진핑이 추진하는 개혁은 중국의 발전이 기회이지 위협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게 될 것이다.

대외적 정치는 좀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내부 통치에 있어서 스타일의 변화는 분명 존재하며, 중국 내에서 도덕, 정의, 안정, 조화 등의 요소들이 강화된다면 훨씬 더 평화로운 대외관계가 가능해진다는 말씀인 것 같다.

그렇다. 다른 한편으로 중국은 17대 당 대회부터 '문화강국'을 내세우며 문화를 강조하고 있다. 중국은 사실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강국이 되었지만 문화강국은 아직 거리가 있다. 중국은 문자 그대로 문화대혁명 때 문화를 혁명해 버렸다. 중국이 세계를 주도하며 대국의 역할을 하려면 무엇보다 문화강국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문화란 한마디로 한 나라의 국민이 어디를 가서도 존경받는 국민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문화건설은 경제건설과 달리 금방 효과를 보는 것이 아니다.

선생님께서 최근에 쓰신 글을 통해 '신형 대국관계'를 강조하셨다. 미국이 얘기하는 G2와 같은 개념으로 보면 되는가, 아니면 차이가 있는 것인가?

미국이 'G2' 개념을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데는, 세계를 지배하는 그들의 방식에 중국이 합류하라는 의도도 깔려있다. 중국이 '신형대국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앞으로 중·미 관계를 과거의 신흥대국과 기존 강대국 간의 경쟁과 전복 관계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양국이 공존하면서 세계를 주도해 나아가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니 미국이 계속 중국을 견제하려 해도 중국은 미국의 지위에 도전장을 내밀지 않을 것이다. 중국은 미국과 중국이 세계문제에서 상호 책임을 가지고 협력할 수 있는 관계를 이룰 것을 바란다. 중국은 이 신형대국관계가 중국과 미국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나라와의 관계에서도 적용되기를 바란다. 범세계적으로 새로운 대국관계가 이루어질 것을 바라는 것이다. 어찌됐든 중국은 미국과 소련이 벌였던 '대결'로는 가지 않을 것이다.

말씀하신 대로 미국이 말하는 G2와 중국이 강조하는 신형대국론이 앞으로 조화를 이루면서 나아가야 하지 않겠나?

미국도 신흥대국관계에 대해서는 동감을 표시하고 있다. 앞으로 그렇게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도 사실 중국과의 관계에서 견제와 협력의 딜레마를 안고 있다. 지금 이 두 가지가 반반이라고 한다면 점차 협력이 증가되고, 견제의 측면은 감소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상당한 기간 갈등과 충돌로 과도기의 진통은 겪을 것이다.

▲ 버락 오바마(왼쪽)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공산당 주석 내정자 ⓒAP=연합뉴스

미·중 관계의 앞날을 낙관하시는 편인가?

낙관이라기보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세계는 늘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화, 지역경제 블록화를 이야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류사회가 상당한 수준까지 발전한 것이다. 야만시대를 거치고 제국주의 시대를 벗어나 이 시대까지 왔다. 지금은 어떤 나라도 마음대로 세계를 요리할 수 없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왜 실패를 했는가. 시대에 역행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힘으로 이라크를 쉽게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주권의 문제를 많이 강조하셨다. 과거에는 중국이 영토 문제 등에 있어서 관대했다고 한다면, 시간이 지나고 국력이 성장하면서 주권 문제에서 사활적 이익을 지키기 위한 원칙을 고수하는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고 보는데, 어떤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주권과 자원 주권은 차이가 있다. 자원 문제는 이제 가장 중요한 세계적인 문제로 대두할 것이다. 모든 나라들이 자원 확보에 사활을 걸 것이다. 그러니 어느 나라나 자원을 확보할 수 있는 지역에서 물러서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난 시대처럼 전쟁으로 해결할 수도 없다. 가장 좋은 방안이 공동개발이다. 결국 남중국해나 댜오위다오(釣魚島, 일본명 센카쿠 열도) 등 문제도 그렇게 해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지역의 자원 분쟁, 도서 분쟁 등을 보면 항상 그 뒤에는 미국의 그림자가 있다. 문제 해결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미국이 아시아로 중심축을 이동(pivot to Asia)하고 영토 분쟁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과정에서 중국이 공격적인 모습을 보여 아시아의 많은 친구들을 잃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래서 중국의 이런 공격적 자세가 미국으로 하여금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아시아에서의 재균형(rebalance) 정책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는 지적들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그리고 중국 내에서 이와 관련해 자성론이 존재하는가?

중국 내에서는 오히려 '왜 영토 분쟁에서 더 강하게 나가지 못하는가' 라는 여론이 강하다. 여론대로 따르면 중국도 이런 민족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본은 여론이 국수주의화하면서 우경화 움직임을 강하게 보이고 있다. 중국은 다르다. 중국이 주변국과 겪고 있는 일부 갈등은 중국이 공격적으로 나와서가 아니다. 오히려 중국이 피동적으로 당하면서 나온 면도 없지 않다. 일본과의 도서분쟁이 그렇다. 중·일 수교 당시 양측이 묵인한 룰을 깬 것은 중국이 아니라 일본이다. 일본이 중국에 도발한 것이다. 물론 큰 틀에서 보면 중국과 주변국들이 겪는 진통은 중국의 부상에 따른 새로운 관계정립에서 겪어야 할 진통이다.

한국전쟁과 관련해서 여쭙고자 한다. 2010년 시진핑이 '항미원조전쟁(한국전쟁)은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었다'고 발언한 것이 한국에서 크게 보도된 바 있다. 그 발언을 하기 전에는 일반인들이 시진핑이 어떤 인물인지 잘 몰랐는데, 그때 한국에서 이를 크게 보도하고 비판하기도 하면서 그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그러한 발언이 나온 맥락과 선생님의 평가는 어떠한가?

중국의 지도자들 중 시진핑과 같은 말을 안 하는 사람은 없다. 일반적 인식이다. 그리고 한국전참전기념일이나 정전기념일과 같은 때에 중국의 입장을 밝히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이는 시진핑의 입장이 아니라 중국의 입장이고, 중국은 침략전쟁에 대항하기 위해 나갔다는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 6.25전쟁기념일이 되면, 한국도, 북한도, 미국도, 중국도 모두 자기들이 이겼다고 이야기한다. 한국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이다. 그 전쟁의 기원은 복잡하게 엮어진 것이다. 한 두 마디로 규명되지 않는다. 중국의 참전 역시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얼마 전 연세대 박명림 교수가 G2의 거시적인 맹아는 한국전쟁에 있었다는 흥미로운 말씀을 하셨다. 즉,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중국이 먼 훗날 강대국화를 예약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중국에 있어 한국전쟁은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는가?

일리가 있다. 한국전쟁을 겪고 중국이 대국으로 태어났다는 견해도 있다. 1840년 아편전쟁부터 한국전쟁 이전까지 사실 중국은 '동아병부(東亞病夫)'로까지 불리면서 위축돼 있었다. 한국전쟁에서 세계 제1의 미국에 대항했고 이겼다고 평가하며 세계에 중국의 자존심을 각인시켰다고 평가한다. 한국전쟁으로 중국은 반세기가 넘는 평화적 환경을 조성했고 국제적 지위도 부상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중국이 다원화로 나가는 현시점에서는 부정적인 견해도 많다. 한국전쟁으로 미국과의 관계개선이 수십 년 늦어졌다는 것 등이다.

안타깝게도 한국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멈춰진 상태에서 2013년은 정전협정 60주년이 되는 상황이다. 한국전쟁 연구의 권위자로서,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것이 한반도나 중국 등 동북아 차원에서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는가?

세계 역사에서 이렇게 오래된 정전은 없다. 정전체제가 평화체제로 전환하지 않으면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는 불안한 평화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평화체제란 단순히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만 전환시키는 것이 아니다. 복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핵심은 실질적인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평화체제가 구축되었다는 것은 거기에 걸맞은 국제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미, 북·일 간의 관계정상화도 필수적일 것이다. 결국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은 동북아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중국이 대국으로 부상하는 데 있어서 한반도 문제 해결에 중국이 적극적 역할을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부연 설명을 부탁드린다.

한반도 문제의 궁극적 해결은 평화통일이다. 한반도 통일이 중국에 미칠 영향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면 굉장히 고무적일 수 있다. 대륙과 해양이 한반도에서 접목되면서 이 지역이 세계경제의 중심으로 거듭날 수 있다.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동북진흥 목표의 성패가 남북경협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국과 중국 모두 재도약하는 기회를 맞이하게 될 수 있다. 중국은 자기 국가이익을 위해서라도 한반도 문제 해결에서 긍정적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 문제라는 것이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는 하나의 카드로 활용되는 측면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북한이 미국과 중국의 대결을 완충시키는 역할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예를 들면 미국이 미사일방어체제(MD)를 구축하려는 것도 북한 때문이라고 하는데, 만약 한반도의 평화체제가 구축되면 그 명분은 줄어들겠지만, 그렇다고 미국이란 나라가 MD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평화체제를 구축했다고 해서 주한미군을 쉽게 철수하거나, 미·일 동맹을 쉽게 조정하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어찌 됐든 미국의 패권전략에서 군사력은 굉장히 중요한 수단인데 지금은 북한이란 나라가 존재하므로 북한이 미국에 일종의 구실 역할을 하면서 미·중 간의 전면적 대결을 억제하는 효과도 있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한반도 문제의 해결 과정에 있어서 북한이라는 적이 없어지면 미·중 갈등이 자칫 전면화되는 우려도 있을 것 같은데, 이런 방향으로 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중·미 관계와 남북관계라고 생각한다. 중·미 관계나 남북관계가 적대적 관계이면 평화체제도 구축될 수 없을 것이다. 평화체제가 구축된다는 것은 중·미 관계, 남북관계가 새롭게 정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미 갈등이 북·미 갈등을 대신한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중·미 관계는 이제 전 세계를 무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관계이다. 협력할 분야가 너무 많다. 한반도 평화체제가 이루어지면 미국의 MD체제구축도 명분을 찾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한반도 평화체제가 구축되고 남북관계가 순조롭게 발전하면 한미동맹, 미·일 동맹, 주한미군, 주일미군 등도 점차 성격이 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평화체제를 이룬 한반도라면 중·미 간에 충분히 균형자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북한이 줄곧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했으나, 잘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앞으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과거만큼 목을 매달지는 않을 것이고, 오히려 대외관계의 우선순위를 미국보다는 중국으로 옮기고 있다는 진단도 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보시는가?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국제사회의 정상적 일원이 될 수 없다. 북한은 여전히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우선순위에 놓고 추진하려 할 것이다. 북한 외무성의 주요 책임자는 거의 다 미국통이다. 20년간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처절하게 노력했다.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흔히 북한과 중국이 만나면 우리는 혈맹이라고 했다가, 헤어지면 서로 욕한다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이전에 북한을 다녀온 중국인들은 거의 모두가 북한이 중국과 같은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하면 중국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발전할 것이라고 하였다. 교육수준과 문화자질, 예의범절, 위생습관, 질서의식 같은 것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중국의 네티즌들이 대부분 북한을 비웃는다고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네티즌들은 젊은이들 위주고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는 다르다. 물론 지금은 만나도 혈맹이라고 하지 않는다. 양국관계는 정상적 국가관계로 나아가고 있다.

▲ 베이징대 진징이 교수 ⓒ평화네트워크

중국 군부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또한 현재 중국의 군사비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고, 이런 속도로 늘어나면 필연적으로 중국 군부의 영향력 강화를 가져와 미국 군산복합체처럼 군부와 군수산업, 관료들이 특수한 관계를 형성하여 미국과 같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우려도 있다. 지금도 중국 사람들은 그래 봤자 중국의 군사비는 미국의 7분의 1 수준밖에 안 된다고 하지만, 80년대에는 미국의 수십 분의 1밖에 안 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중국의 군사비 증액이 너무 높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중국 군부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는데 어떻게 보시는가?

중국은 군부와 당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한국이나 미국과 다르다. 군부 안에도 당이 있고 당이 군을 절대적으로 통제한다. 군부가 당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군수산업과 관료들과 특수한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중국의 군사비 증가는 국력의 증강에 따른 것이다. 군사비가 증가한다고 군부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끝으로 박근혜 당선자에게 강조하시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말씀해달라.

한반도 문제를 푸는 열쇠는 한국이 쥐고 있다. 남북관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국의 새로운 도약은 남북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가는가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남북관계는 거시적 시각에서 풀어야 할 것이다. 철학과 신념을 강조하는 이유이다.

박근혜가 당선된 것을 너무 비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박 당선자가 확고한 철학과 신념을 바탕으로 대북정책을 설계하고 실천한다면 남북관계에 새로운 문을 열 수 있다고 본다. 미·중 데탕트의 문을 연 사람은 미국 공화당의 닉슨 행정부였다. 소련과의 냉전을 종식시킨 당사자도 공화당의 레이건과 아버지 부시였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보수 정권이기 때문에 국내외에 저항을 덜 받으면서 전향적인 대북정책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중국도 그랬던 것처럼 북한 역시 박정희식 개발 모델에 관심을 갖고 있다.

박 당선자가 거시적 시각에서 확고한 철학과 신념을 가지고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이루기 바란다. 흔들림 없기 바란다. 그 목표를 위해서는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유능한 사람들을 대담히 기용하기 바란다. 이는 대 탕평책을 실천하는 것이자 북한에도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성공을 기원한다. 그리고 그 성공의 열쇠는 남북관계에 있다는 점도 거듭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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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9일 화요일

탄도미사일 사거리 연장, 과연 좋아할 일인가?


이글은 프레시안 2012-10-08일자 기사 '탄도미사일 사거리 연장, 과연 좋아할 일인가?'를 퍼왔습니다.
[정욱식의 '오, 평화'] 미사일과 MD, 그리고 안보딜레마(上)

이명박 정부가 10월 7일 한미 미사일지침 개정 협상 결과를 공식 발표했다. 발표 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탄도미사일 사거리를 300㎞에서 800㎞로 확대하고 탄두 중량는 현재와 같은 500㎏을 유지키로 한 것이다. 둘째는 미사일의 사거리를 줄일 경우 탄두 중량을 증가시킬 수 있도록 '트레이드 오프'(trade off) 방식을 적용키로 한 것이다. 셋째는 무인항공기의 탑재 중량을 현재 500㎏에서 2.5t으로 5배 늘리기로 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이러한 합의를 최대 지적 가운데 하나로 이를 내세우고 있다. 대다수 언론도 찬양 일색이다. 그러나 한국의 탄도미사일 사거리 연장이 과연 국익에 부합하는지 냉정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또한 '외교에는 공짜가 없다'는 말이 있다. 미사일 사거리 연장의 대가로 미국에게 제공하고 있는 선물의 구체적인 내역도 확인해야 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미사일방어체제(MD)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 탄도미사일 사거리 연장의 문제점을 따져보자.

한반도 군비경쟁 격화 불가피

우선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에 미칠 부정적 영향이 우려된다. 북한이 선군정치의 핵심으로 내세우고 있는 '핵 억제력'은 그 대상이 되는 한미일 3자의 군사적 대응 수준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핵 억제력의 핵심은 상대방의 공격 및 MD로부터 생존율을 높여 2차, 3차 공격 능력을 확보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한미동맹이 한국의 탄도미사일 능력 배가에 합의하고 MD 협력을 강화할수록 북한 역시 핵과 미사일 전력을 강화하려고 할 것이다. 북한이 취할 수 있는 방법들로는 소형 핵탄두 개발 가속화,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UEP)의 핵무기 개발용 전환, 추가적인 핵실험 또는 미사일(로켓) 시험 발사, 이동식 미사일 개발·배치, 미사일 생산량 증대, 추가적인 로켓 발사 기지 건설 등이 있다.

미사일 사거리 연장과 MD를 고리로 한 한미동맹의 움직임이 한반도 군비경쟁을 새로운 국면에 올려놓을 공산이 크다는 우려는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다. 북한의 추가적인 핵과 미사일 전력 증강은 MD를 비롯한 한미동맹의 군비증강의 빌미가 되고 이는 또 다시 북한의 군비증강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게 될 것이 불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이는 남북한의 새로운 정권 모두에게 엄청난 부담을 야기하게 될 것이다. 북한의 김정은 체제는 선군(先軍)정치에서 선경(先經)정치로의 전환을 타진하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새로운 군비경쟁의 격화는 북한 내 강경파의 입지를 강화시켜 이러한 전환에 근본적인 장애를 조성하게 될 것이다.

내년에 등장할 남한의 새로운 정부의 대북정책도 큰 난관이 예상된다. 북한이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력 증강, 일본의 군사대국화 움직임, 한국의 미사일 사거리 연장 등 한미일의 군비증강에 군사적 맞대응을 선택할 경우 대북정책은 커다란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사일 사거리 연장이 차기 한국 정부에게 '전략적 자산'이 아니라 '전략적 부담'이 될 공산이 큰 이유다.

대한민국의 안보를 튼튼하게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의 외교적이고 평화적인 해결에 있다. 물론 이는 그 당위성에 비해 현실성에 의문이 제기될 수 있고, 또 많은 인내와 시간을 요한다. 이에 따라 대북 억제는 필요하다. 실제로 한국은 세계 최강 미국과 함께 강력한 대북 억제 태세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여기에 MD 강화와 한국의 탄도미사일 사거리 연장이 더해질 경우 북핵 문제 해결은 더욱 요원해지고, 그만큼 한국의 안보도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필자가 한국의 탄도미사일 사거리 연장을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보는 까닭이다.

▲ 율곡이이함이 6월 중순경 하와이 인근 해역에서 실시된 이지스함 전력화 평가에서 SM-2 대공유도탄 및 램(RAM) 미사일 실사격 훈련하는 모습. ⓒ연합뉴스

한중 관계 악화도 불가피

중국과 일본 등 주변국과의 전략적 불신 악화 및 군비경쟁 격화의 우려도 빼놓을 수 없다. 탄도미사일 사거리를 800km로 늘리면 중국과 일본 일부에도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심상치 않은 우경화와 군사대국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일본 내에서는 평화헌법의 족쇄에서 벗어나 로켓 기술을 탄도미사일로 전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특히 중국과의 관계 악화가 우려된다. 이명박 정부는 탄도미사일 사거리 연장이 중국과 무관하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중국의 시각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노무현-부시 때 착수되어 이명박-오바마 시기에 본격화된 한미 전략동맹이 겨냥하고 있는 대상은 북한뿐만 아니라 중국도 포함된다.

이에 따라 중국은 '한국'의 탄도미사일 사거리 연장을 '한미동맹' 차원의 전력 증강으로 바라볼 것이다. 더구나 중국이 한중관계의 마지노선으로 간주해온 한국의 MD 편입도 가속화되고 있어 중국의 한국에 대한 전략적 불신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한중관계의 악화가 외교안보는 물론이고 경제에 미칠 부정적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중국이 북한에게 핵과 미사일 문제에 있어서 긍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이 탄도미사일 전력 증강에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이 북한을 상대로 목소리를 높이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결국 미국이 의도한 것은 '북한위협론'을 근거로 MD를 고리로 한 한미일 3각동맹 구축이라는 중국의 의구심도 더욱 강해질 것이다.

비확산 모범국 이미지에 먹칠

또 한 가지 반드시 따져봐야 할 문제는 한국의 미사일 사거리 연장이 국제협약에 저촉되는지 여부다. 현재 한국이 가입한 탄도미사일 관련 국제 규범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이고, 다른 하나는 탄도미사일확산방지 헤이그 행동협약(Hague Code of Conduct against Ballistic Missile Proliferation, HCOC)이다.

MTCR는 탑재중량 500kg, 사거리 300km가 넘는 미사일과 위성발사체, 무인항공기(UAV) 등의 수출 및 기술이전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는 자발적 국제규범이다. 자국 기술로 개발하는 것을 제약하지 않지만, 타국에서 이전 받은 기술로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것은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미사일은 미국의 지대지 미사일인 나이키-허큘러스에 기반을 두고 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은 이 미사일을 개량해 사거리를 350km로 늘리는 '백곰'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를 포착한 미국은 박정희 정권에 압력을 가해 사거리를 180km로 낮췄다. 그리고 2001년에는 한국의 MTCR 가입을 조건으로 사거리를 300km로 늘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나온 것이 바로 현무-1, 현무-2다. 이에 따라 한국의 탄도미사일 사거리는 800km까지 늘리기로 한 협정은 MTCR에 저촉된다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 실제로 국제사회의 많은 전문가들은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또한 한국의 사거리 연장은 헤이그 협약과도 저촉된다. 한국과 미국은 물론이고 나로호에 참여하고 있는 러시아도 가입한 이 협약에서는 우주의 평화적 이용을 보장하면서도 "대량살상무기 운반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는 탄도미사일을 확산시켜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우주발사체 프로그램이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을 은폐하도록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라고도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군 관계자와 전문가들은 나로호 2단 추진체 개발로 축적된 로켓 기술을 탄도미사일 개발로 활용하면 수 년 안에 1000km급 미사일 개발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이는 우주발사체 기술을 탄도미사일로 전용하는 것을 금지한 헤이그 협약과 저촉된다.

주목할 점은 한국이 2012~2013년 헤이그 협약의 의장국을 맡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탄도미사일 비확산 모범국으로서의 이미지를 제고하는데 기여할 것이라는 평가를 낳았었다. 그런데 탄도미사일 사거리를 2배 이상 늘림으로써 비확산 모범국이라는 이미지의 손상은 불가피해졌다.

미사일 강대국들로 둘러싸여 있고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북한도 핵과 미사일 능력을 증강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도 탄도미사일 사거리 연장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이해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이러한 1차원적인 사고를 넘어설 것을 요구한다. 우리의 안보를 증대시키기 위한 조치가 상대방의 반작용을 야기해 오히려 우리의 안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안보딜레마'에 가장 민감한 지역이 바로 한반도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이어질 글: MD 이면합의 없다고? 이미 참여해왔다! 

* 필자 정욱식 블로그 '뚜벅뚜벅' 바로가기* 필자가 (프레시안)에 연재한 글을 엮어 만든 책 (핵의 세계사)가 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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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2012년 3월 25일 일요일

박근혜님, ‘제주의 공감대’는 만들어졌거든요


이글은 한겨레신문 hook 2012-03-13일자 기사 '박근혜님, ‘제주의 공감대’는 만들어졌거든요'를 퍼왔습니다.

시민단체인 평화네트워크(www.peacekorea.org) 대표로 일하면서 여러 매체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블로그 '정욱식의 뚜벅뚜벅'(blog.ohmynews.com/wooksik/)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 해군기지문제로 첨예한 갈등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도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하나의 공감대를 형성한 후 추진해야 합니다.”
야권 인사의 말이 아니다.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2007년 6월 1일 제주를 방문했을 때 했던 말이다. 그러면서 “도민 의견 수렴 방법에 대해서는 주민투표 등 제주도정이 지역실정에 가장 알맞은 방법을 찾아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로부터 5년 가까이 지난 요즘, 제주해군기지 문제는 ‘도민 의견 수렴’이 우선이라던 박 위원장은 민주통합당을 향해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당리당략에 이용하는 행태는 즉각 중단해야 한다”며 맹공을 퍼붓고 있다.
그는 12일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에서 “노무현 정부 당시에 국익과 안보를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라고 자신들이 앞장서서 주장했던, 그리고 추진했던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이제 와서 당리당략 때문에 반대한다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박근혜 위원장이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그가 5년 전에 주문한 “하나의 공감대”는 이미 나왔었다. 구럼비 발파가 임박했던 3월 5일 제주도지사, 제주도의회, 새누리당 제주도당, 민주통합당 제주도당은 한 목소리로 제주해군기지 공사 중단을 요청했다. 도정과 의회, 여와 야를 막론하고 한 목소리로 일단 공사를 중단하고 합리적인 해법을 찾아보자고 요구한 것 이상의 “하나의 공감대”란 있을 수 없다. 박 위원장이 정치인으로서 일관성과 책임감을 그토록 중시한다면, 이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그런데 민주통합당 지도부를 겨냥한 정치적 공세에 안달이 났다.
박 위원장은 3월 7일 야권의 대선주자 중 한 명인 민주통합당 문재인 상임고문을 겨냥해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익을 위해 추진했던 한미 FTA나 제주해군기지에 대해 반대하고 있는데 좀 이해하기가 어렵다”며, “도대체 정치 철학이 뭔가”라고 쏘아붙였다.
3월 12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주최로 열린 ‘제19대 총선 정책선거 실천협약식’에 참석해서는, “저와 새누리당은 이번 선거를 신뢰 회복의 출발점으로 만들고자 한다”며 “선거만 끝나면 약속을 잊어버리고 여당일 때와 야당일 때 입장이 바뀌는 불신의 정치를 이제 끝내야 한다”고 말했다. 한미 FTA와 제주해군기지에 대한 민주통합당의 입장을 ‘말 바꾸기’로 공격하면서 차별성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국민과의 약속, 반드시 지키겠습니다’라는 구호를 들고 나왔다.
박 위원장의 이 구호에 진정성이 담기려면, 본인 스스로 강조한 제주도의 “하나의 공감대”를 존중해야 한다. 강정마을을 한번이라도 찾아가 주민과 활동가들의 얘기도 경청해야 한다. 제주해군기지가 왜 국익인지 국민들에게 상세히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박 위원장은 ‘야권의 말 바꾸기’와 ‘안보 프레임’으로 총선과 대선을 치르려는 MB식 불도저에 올라타고 말았다.
참고로 작년 12월 한나라당이 2012년 예산을 날치기 통과하면서 제주해군기지 예산을 사실상 전액 삭감했을 때, 비상대책위원장은 박근혜였다.

2012년 3월 4일 일요일

강정마을을 야권 공세의 제물로 삼지 말라


이글은 한겨레신문 hook 2012-03-02일자 기사 '강정마을을 야권 공세의 제물로 삼지 말라'를 퍼왔습니다.

시민단체인 평화네트워크(www.peacekorea.org) 대표로 일하면서 여러 매체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블로그 '정욱식의 뚜벅뚜벅'(blog.ohmynews.com/wooksik/)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명박 정부의 제주해군기지 건설 강행 발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정부는 2월 29일 김황식 국무총리 주재로 국가정책조정회의를 개최하여 “제주 민군복합형 관광미항” 건설과 관련한 입장을 밝혔다. 핵심적인 내용은 “15만톤 규모의 크루즈 선박 입출항에 문제가 없”고, “국비 5787억원을 포함한 1조 771억원을 투입해 주변지역 발전 사업을 추진”하며, “불법적인 공사방해행위에 대해서는 민․형사상 책임을 묻는 등 엄정하게 대응해 나갈 것” 등이다. 그러면서 2015년까지 공사를 완료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숱한 문제들이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묻지마 공사’ 강행 의사를 밝힌 셈이다.
정부가 내세운 명분은 “우리나라 전체 교역 물동량의 99.8%가 통과하는 남방해역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필수적 시설이고, 제주지역의 새로운 관광자원이 되어 지역주민의 소득증대와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는 등 제주 경제발전에 중요한 국가사업”이라는 것이다. 또한 “현재 전체사업비 9,776억원 중 1,653억원(17%)이 집행”되었고, 공사가 지연될수록 “국가예산도 낭비되는 문제”가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남방해역 중요하다. 그래서 제주해군기진 안 된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무역 국가인 대한민국에게 바다의 중요성은 국민 모두가 공감하는 바일 게다. 그런데 건국 이래로 해상 교역에 차질이 빚어질 정도로 남방해역에 군사적 위협이 존재한 적은 없다. 한국이 중국이나 일본에게 군사적 적대 행위를 하지 않는 한, 이들 나라가 우리나라의 해상 교역을 군사적으로 위협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도 극히 비현실적이다.
오히려 제주해군기지 건설이 강행되어 한국 해군이 이어도 초계 활동에 나서거나, 미국이 제주해군기지를 사용할 경우 우리의 남방해역을 포함한 국가안보와 국민경제가 총체적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미래의 불확실한 위협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건설되고 있는 제주해군기지가 불확실한 위협을 확실한 위협으로 만들 우려가 크다는 것이다.
제주해군기지가 지역 경제에 큰 도움이 될 것처럼 말하는 것 역시 근거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건설비의 상당 부분은 삼성과 대림 등 거대 건설업체의 호주머니로 들어가고 있고, 제주 올레길 가운데 최고로 손꼽히던 제7코스도 거대한 펜스에 가로막혀 관광객도 크게 줄어들었다. 오히려 ‘강정마을을 돕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과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마을 경제를 살리고 있다’는 자조 섞인 말이 나올 정도다.
과연 MB 정부가 국민 혈세를 아까워하는 정권인지도 의문이지만, 지금까지 쓴 돈이 아까워서 공사를 강행하겠다는 말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공사 중단시 적지 않는 예산 손실이 발생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공사 강행시 초래하게 될 비용과 비교하면 10퍼센트 안팎에 불과하다. 또한 공사 자재의 재활용, 원하는 주민을 대상으로 한 보상금과 토지의 교환, 매입 부지에 평화공원 조성, 잔여 토지 매각 등 다양한 방식을 동원하면 이미 투입된 예산의 상당 부분을 회수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공사 강행시 강정마을 주민들의 흐릴 피눈물은 그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다.
MB 정부의 정치적 꼼수
MB 정부가 대통령부터 경찰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제주해군지 반대 진영과 야권을 압박하고 나선 데에는 총선과 대선을 앞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대통령은 2월 22일 기자회견에서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 이해찬 전 총리, 유시민 통합진보당 공동 대표의 입장 변화에 대해 “선거철이 돼 전략적으로 할 수 있지만 매우 안타깝다”며 맹공을 퍼부었다.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야당 인사들의 실명과 발언을 일일이 거론하면서 정치적 공세를 편 것 자체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수구․보수 언론들이 이를 견인하고 또 확대재생산 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필자가 해석하는 MB 정부와 보수 세력의 정치적 의도는 이렇다. 만약 야권이 강력한 맞대응을 선택해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 입장을 더욱 분명히 한다면, ‘말 바꾸기’, ‘국가안보 무시’로 몰아붙이면서 이를 선거 쟁점으로 만들려고 할 것이다. 거꾸로 야권이 이렇다 할 대응을 안 하면, 해군기지 반대 진영의 반발로 이어져 총선과 대선을 앞둔 야권에게는 적지 않은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MB 정부가 노무현 정부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민군복합 관광 미항”이 자신의 성과인 것처럼 홍보하는 모습에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총리실은 “2007년 지난 정부에서 지역주민 및 제주도의 건의를 받아들여 해군기지로 추진되어 오던 중, 현 정부 들어 2008년 9월 제주해군기지를 민과 군이 함께 공존하는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으로 건설하기로 최종 결정”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눈 가리고 아옹 하는 격’이다.
노무현 정부 재임 당시인 2007년에 국회는 관련 예산을 승인하면서 “민항 위주에 해군 기항지”라는 부대조건을 달았다. 그런데 MB 정부는 이 조건마저 무시하고 ‘민군복합 관광 미항’이라는 이름하에 사실상의 해군기지 건설로 사업을 변질시켰다. 설계 오류 문제가 제기되자 15만톤 규모의 크루즈 선박의 입출항에 별 문제가 없다고 하면서, 이렇게 큰 배가 올 리도 없다는 ‘이중 플레이’를 하고 있다.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의 유시민 대표의 대응도 답답하다. 이들은 MB 정부의 공사 공행을 강력히 비판하면서도 노무현 정부 때 결정되었던 제주해군기지 사업을 왜 지금은 반대하는지, 그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분명 이 정부 들어 제주해군기지 사업이 더더욱 변질되고 사회적 비용도 엄청나게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노무현 정부도 이러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도 분명하다. 사정이 이렇다면 민주통합당은 자신의 입장 변화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하는 것이 국민들에 대한 도리일 것이다.

2012년 1월 27일 금요일

조지 오웰의 경고, 핵을 가진 두세 개의 괴물과 냉전


이글은 프레시안 2012-01-27일자 기사 '조지 오웰의 경고, 핵을 가진 두세 개의 괴물과 냉전'을 퍼왔습니다.
[정욱식의 '핵과 인간'] 미국 핵 독점의 종말과 '슈퍼 폭탄'의 등장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두 달 후에 쓴 칼럼에서 소련이 수년 내에 핵무기 개발에 성공할 것이라며, "우리는 몇 초 만에 수백만의 사람들을 몰살시킬 수 있는 무기를 보유한 두세 개의 괴물과 같은 슈퍼파워 국가들이 세계를 분단시키는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대규모의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은 줄어들겠지만, 영원히 '평화가 없는 평화'의 상태, 즉 '냉전(cold war)'을 그 대가로 지불해야 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후 인류의 역사는 그의 경고대로 진행되고 만다.


▲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백악관 앞에서 열광하는 미국 시민들. ⓒ트루먼 도서관

앞선 글에서 자세히 살펴본 것처럼, 미국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는 소련을 상대로 한 무력시위의 성격이 강했다. 원폭 투하를 통해 미국이 노렸던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소련의 참전 이전에 미국의 힘에 의해 일본을 패망시키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미 싹트고 있던 냉전 질서에서 소련에 대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무력시위'의 성격도 내포되어 있었다. 그런데 애초에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요구한 당사자는 미국이었다. 1943년 11월 테헤란 회담에서 미영 연합군은 소련의 개입이 태평양전쟁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으로 보고, 소련에게 참전에 따른 '전리품'을 제시했었다. 소련에게 쿠릴 섬 및 사할린 섬 남단 이양 및 만주 해군기지 사용 허용 등 일본이 러일전쟁 승리로 획득한 것을 소련에게 돌려주는 것이 골자였다.

그러자 스탈린은 독일이 패망하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겠다고 약속했다. 스탈린은 1945년 2월에 열린 얄타 회담에서 이러한 약속을 거듭 확인하면서 "나치 독일의 패망 3개월 후에 대일전에 참전하겠다"라고 재확인했고, 포츠담 회담에서는 8월 15일이라는 구체적인 일정까지 제시했다. 그러나 미국은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면서 계산을 달리 했다. 당시 미국 내에서는 소련의 참전에 의한 일본의 항복은 아시아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키워줄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는데, 핵무기로 소련의 개입을 대신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원폭 투하는 소련의 지원 없이 일제를 패망시키고자 하는 동기와 함께 경쟁자로 부상한 소련에 대한 무력시위의 성격을 동시에 안고 있었다. 이는 반대의 해석도 가능케 한다. 트루먼이 밝힌 것처럼, 소련의 대일본 선전포고는 8월 15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예정보다 6일이 빠른 8월 9일 참전을 단행했다. 아마도 스탈린의 머릿속에도 '미국이 전쟁을 끝나기 전에 우리도 서둘러 참전해야 한다'는 계산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스탈린 "히로시마가 세계를 흔들었다"

그렇다면 스탈린은 미국의 핵무기 및 원폭 투하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스탈린은 1940년대 초반부터 핵무기 개발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미국이 포츠담 회담에서 '핵 외교'를 선보이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기 이전까지 심혈을 기울이진 않았다.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비한 작은 대비책"으로 간주하는 수준이었다. 또한 미국과 영국이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다는 것을 정탐 활동과 일부 과학자들의 '자진 보고'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스탈린이 포츠담 회담에서 미국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다는 트루먼의 통보를 듣고 그리 놀라지 않은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미국이 실제로 핵무기를 사용한 것에는 상당히 놀랐던 것으로 보인다. 히로시마 피폭 직후 스탈린은 "히로시마가 세계를 뒤흔들었다. 균형은 깨졌다. 핵폭탄을 만들어라. 그것은 우리로부터 거대한 위험을 제거해줄 것이다"라며, 소련 과학자들에게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미국의 핵 사용을 소련의 양보를 강제하기 위한 협박 외교로 규정하고, "우리가 협박에 굴복하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트루먼의 무력시위는 노련한 독재자 스탈린을 위축시키기보다 핵무기를 개발해 미국에 맞서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미국의 핵 독점은 2차 대전 말엽은 물론이고 종전 이후에도 "미국의 외교정책을 혁명화"시켰다. 대표적으로 "핵무기가 없었다면 미국 대통령이 결코 생각하기 힘든 정책, 즉 독일의 재건과 재무장을 선택하게 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독일의 재건 및 재무장에 따른 유럽 국가들의 두려움은 미국의 핵 억제로 차단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트루먼 대통령과 번스 국무장관은 1945년 8월 22일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독일의 위협이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며, "원자 폭탄은 도발을 일으키려는 나라들을 중지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미국의 양보가 불가피한 소련과의 협력도, 독일 재무장을 두려워하는 소련의 우려도 크게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핵의 위력을 믿은 미국의 대담한 행보가 시작된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독일 문제를 비롯한 소련과의 외교 협상에서 핵무기를 강압 외교의 수단으로 동원했다. 미국은 핵무기의 위력을 스탈린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원폭을 당한 히로시마에 소련 관료를 초청하기도 했고, 태평양에서 실시한 핵실험에 소련 관료를 참관시켰다. 또한 번스가 소련의 몰로토프 외무장관을 만나 독일 문제를 두고 담판을 벌이고 있었던 1946년 6월에는 태평양 비키니섬에서 대규모의 핵실험을 실시해 소련의 강한 반발을 야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련이 그토록 거부했던 독일 재건에도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미국의 두 가지 카드, 즉 핵 시위와 독일 재건은 소련으로 하여금 미국이 전쟁을준비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강하게 갖게 했다. 당시 소련의 위협 인식은 소련 해체 이후 해제된 비밀문서에서 잘 나타난다. 1946년 주미 소련대사인 노비코프(Nikolai Novikov)는 미국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그 근거로 해외 해공군 기지 건설, 원자폭탄 등 신형무기의 증강, 독일의 재건 및 재무장 추진 등을 제시했다. 특히 "미국은 독일에서의 연합국의 임무, 즉 무장해제와 민주화를 달성하기 이전에 임무를 종식시키는 것을 고려하고 있는데, 이는 독일 제국주의의 부활로 이어질 수 있고, 미국은 재무장한 독일을 자기편으로 만들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이에 따라 스탈린은 미국의 의도에 강한 의혹을 품으면서 "앵글로-색슨의 침공"을 막기 위해 강력한 대응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의 불만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구상을 밀어붙였다. 소련의 강력한 반발을 뒤로 하고 유럽경제부흥계획인 '마셜 플랜'을 단행했다. 또한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쿠데타와 이듬해 베를린 위기를 거치면서 미국은 핵무기 보유고를 크게 늘려 1949년에는 그 수를 200개로 늘렸다. 핵 능력 강화와 유럽경제부흥계획을 통해 유럽에서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막아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이러한 미국의 움직임을 침공 준비로 간주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유력한 대응책으로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주목할 점은 핵의 위력을 앞세운 미국의 강경 외교에 '핵 강압 외교'의 주역이었던 헨리 스팀슨 전쟁부 장관이 일찍이 강한 우려를 표명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그는 1945년 9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소련과의 신뢰구축을 위해서는 미국의 핵 계획을 소련과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그는 편지와 함께 동봉한 메모를 통해 그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미국의 원자 폭탄 보유는) 대륙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상쇄할 수 있는 중요한 무기로 간주되어왔습니다. 우리는 또한 소련 정부가 이러한 경향을 간파하고 있고, 가능한 최단시간 내에 이 무기를 획득하려는 소련의 정치ㆍ군사 지도자들의 유혹도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미국이 핵 독점을 통해 소련에 맞서는 앵글로-색슨 진영을 구축하면 "매우 절망적인 방식으로 비밀 군비경쟁이 야기"되고, "우리의 목적과 의도에 대한 소련의 의심과 불신은 증가될 것"으로 우려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추가적인 핵무기 개발과 생산을 중단하고, 소련 및 영국과 핵 기술 협력 및 통제를 놓고 협상에 나설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그의 충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련의 핵실험과 미국의 대응

결국 미국의 핵 독점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1949년 8월 29일 소련이 카자흐스탄 사막 '세미팔라틴스크-21'에서 핵실험에 성공한 것이다. 이는 미국이 나가사키에 투하한 플루토늄 핵폭탄 '뚱보(Fat man)'와 흡사한 것으로써, 소련이 1950년대 중반에 가서야 핵개발에 성공할 것이라는 미국의 판단보다 훨씬 앞선 것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1948년과 1949년 정보분석 보고서를 통해 소련의 핵무기 개발 성공 시점을 "1953년 중반기를 가장 가능성이 높은 때"라고 분석했다. 핵실험에 성공한 스탈린은 이 사실을 철저하게 비밀로 붙이고 싶어했다. 자극받은 미국이 대대적인 군비증강에 나설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첨단 장비는 소련의 핵실험 사실을 포착했고, 트루먼은 9월 23일 이를 공식 발표했다. 미국은 소련의 핵무기를 스탈린의 이름을 따 'JOE-1'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미국은 대대적인 군비증강 계획에 착수하고 되는데, 당시 '슈퍼 폭탄'으로 불렸던 수소 폭탄 개발과 NSC-68는 이를 대표한다. 스탈린이 피하고 싶었던 것이 현실로 나타나고 만 것이다.


▲ 소련의 최초 핵실험 장면. ⓒ미국 에너지부

예상보다 빨리 실시된 소련의 핵실험에 당황한 트루먼 행정부는 세 가지 조치를 단행했다. 첫째는 유럽에서 소련의 재래식 군사력에 대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영구적인 미군 주둔 및 재래식 군비증강이었다. 이는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폭등한 군사비를 줄이고 군부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고자 했던 트루먼의 의도와는 상반된 것이었다. 둘째는 소련에 대한 핵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원자폭탄의 양과 질을 크게 늘리는 것이었다. 이미 트루먼 행정부는 원자폭탄 증강을 통해 재래식 군사력 감축을 상쇄할 생각이었는데, 소련의 핵실험 성공 소식은 원자폭탄 증강 열기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 셋째는 당시 '슈퍼 폭탄'으로 불렸던 수소폭탄 개발 승인이었다. 트루먼은 1950년 1월 31일자 성명을 통해, "우리나라를 잠재적인 도발자로부터 방어하는 것은 최고 군통수권자의 의무"라며, "나는 원자력위원회에 수소 폭탄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핵무기를 만들라고 지시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수소 폭탄의 개발 방침은 핵의 역사에서 두 가지 심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는 수소 폭탄의 파괴력이 원자 폭탄의 수십배에 달해 단 한발의 폭탄으로도 대도시나 작은 나라를 완전히 날려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러한 가공할 파괴력에 놀란 많은 사람들이 반핵주의자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대소 봉쇄 정책의 설계자인 조지 캐넌과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로 불리는 로버트 오펜하이머였다. 이들을 비롯한 많은 맨해튼 프로젝트 참여 과학자들은 "수소 폭탄의 사용은 원자 폭탄을 훨씬 능가하는 대량 살상을 가져올 것"이라며, 설사 소련이 이 무기를 손에 쥔다고 하더라도 미국은 원자 폭탄으로 소련을 억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은 "현재와 같은 군사 기술 수준에서 (핵)무장을 통해 안보를 달성하겠다는 것은 파멸적인 환상"이라며, "미-소 간의 군비 경쟁은 이성의 상실을 의미한다"라고 개탄했다.

그러나 소련의 핵실험 성공에 충격을 받은 트루먼 행정부는 '슈퍼 폭탄'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소련보다 핵전력이 앞서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미국이 주저하는 사이에 소련이 먼저 수소 폭탄을 개발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팽배했던 것이다. 결국 미국은 1952년 11월 1일에 태평양에서 수소 폭탄 실험을 강행했다. 폭발 규모는 원자 폭탄 실험이었던 '트리니티'보다 500배 강력한 10메가톤을 넘어섰다. 소련 역시 그 이듬해인 1953년 8월 12일에 중앙아시아 사막에서 수소 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이처럼 미국과 소련은 조지 오웰인 말한 "두 개의 괴물"이 되어갔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1954년 3월 1일에 태평양 비키니 섬에서 실시된 미국의 수소 폭탄 실험은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를 낳았다. 폭발 규모가 무려 15메가톤에 달해,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탄보다 750배, 미국 정부가 예상했던 것보다 2.5배나 강력했던 것이다. 또한 직경 6,500피트, 깊이 250피트의 거대한 분화구가 생겨났으며, 버섯구름은 1분 후 직경 15킬로미터, 8분 후에는 100킬로미터까지 커졌고 높이도 무려 16.5킬로미터에 달했다. 더구나 방사능 낙진이 140여킬로미텉까지 날아가 조업 중이던 일본인 어부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며, 세계 곳곳에서 방사능 물질이 검출되고 이상 기후가 나타났다.


▲ 1954년 3월에 실시된 미국의 수소 폭탄 실험 브라보

가공한 폭발력 앞에 인류 사회는 전율했다. 이들 가운데에는 "핵무기를 다른 무기와 특별히 다르게 봐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던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전까지 핵무기 옹호자였던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역시 이 실험을 목도하고는 핵전쟁이 일어나면 영국은 더 이상 살 수 없는 땅에 될 것이라며 우려를 표명했다. 무엇보다도 수소 폭탄 실험 '브라보(Bravo)'는 반핵 운동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 미국의 저명한 반핵단체인 분별있는 핵정책을 위한 전국위원회(National Committee for a Sane Nuclear Policy)와 비폭력행동위원회(Committee for Non-Violent Action) 등과 영국의 핵폐기캠페인(Campaign for Nuclear Disarmament), 그리고 초국적 단체인 퍼그워시(Pugwash) 등 저명한 반핵단체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대규모 반핵 집회 개최, 신문광고, 시민 불복종 운동 및 핵무기 시설 침투와 핵실험 지역에서의 해상 시위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반핵 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반핵 운동은 언론을 통해 전세계에 타진되었다. 그러자 핵무기 사용에 대한 미국 여론도 바뀌기 시작했는데, 1950년대 중반에는 선제 핵사용에 대한 반대 여론이 과반수를 넘어서기도 했다.

이처럼 원자 폭탄보다 파괴력이 훨씬 큰 수소 폭탄은 '핵분열' 반응을 이용하는 원자 폭탄과 달리 '핵융합' 반응을 이용하는 무기다. 수소 폭탄의 핵융합 반응은 원자 폭탄의 핵분열 반응에 비해 단위당 방출 에너지 양이 10퍼센트 정도로 작지만,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는 물질의 질량이 핵분열 물질의 2퍼센트밖에 안 되기 때문에 핵물질당 방출 에너지의 양은 원자 폭탄보다 4배 이상 많다. 예를 들어 10킬로그램의 핵물질이 포함된 수소 폭탄은 같은 질량의 원자 폭탄보다 파괴력이 42배 강하다. 그래서 "핵분열 폭탄은 태양 표면에 해당하는 온도를 만들어내는 반면에, 핵융합 폭탄은 태양의 일부를 지구에 갖다 놓은 것과 같은 엄청난 온도를 발산한다."

한편 소련이 미국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핵실험에 성공하자, 미국 내에서는 '매카시즘'의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소련의 최초 핵무기는 미국의 예상보다 5년 정도 빨리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플루토늄 핵폭탄인 '가제트' 및 '뚱보'와도 흡사했다. 소련 핵실험 5개월 후에는 소련 스파이의 핵심인물인 클라우스 푹스(Klaus Fucks)가 미 정보기관에 체포되었다. 그는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한 물리학자였는데, 1944년부터 로스앨라모스 연구소에 파견 근무하면서 핵심 정보를 소련 측에 넘겼다. 이 사건 직후에도 국무부 고위관료인 앨저 히스 간첩 논란 및 로젠버그 부부 사건이 잇달아 터지면서, "미국 내 소련 스파이가 소련의 핵개발을 도왔다"는 심증은 확신을 갖게 됐다.

1949년 8월 29일 소련의 핵실험에 이어 10월 1일에는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미국 내 '적재 공포'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소련의 핵실험 성공이 미국 핵 독점체제를 무너뜨렸다면, 중국의 공산화 성공은 오랜 기간 미국의 동맹국으로 인식되었던 중국이 공산국가로 변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미국의 충격도 컸다. 특히 1950년 1월 들어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유엔 가입 문제로 미국과 소련이 날카로운 대립을 벌이기 시작했고, 그 해 2월에 중소 동맹조약이 체결됐다.

이를 틈타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인 매카시(Joseph McCarthy)는 1950년 2월 9일 "나에게 국무부에서 일하는 205명의 공산주의자 명단이 있다. 그런데 국무장관은 이들이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과 계속 일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무명에 가까웠던 매카시는 이 폭탄 발언 한방으로 일약 저명한 정치인으로 올라섰다. 그가 경고한 '적색 공포'를 실증하듯 4개월 후에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매카시즘은 미국 국내 정치뿐만 아니라 대외정책의 급격한 우경화를 야기했다. 국제정세가 급변하던 시기를 틈타 몰아치기 시작한 매카시즘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트루먼이 신속한 개입을 선택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반도에 신속한 개입을 선택함으로써 안보와 공산주의에 나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한 것이다.

* 주요 참고문헌

George Orwell, "You and the Atomic Bomb," Tribune, 19 October 1945.Joseph Cirincione, Bomb Scare: The History & Future of Nuclear Weapons, (ColumbiaUniversity Press, 2007)Nina Tannenwald, "Stigmatizing the Bomb: Origins of the Nuclear Taboo," International Security(Spring, 2005).William Burr, "U.S. Intelligence and the Detection of the First Soviet Nuclear Test, September 1949," September 22, 2009John Lewis Gaddis, The Cold War: A New History, (New York: The Penguin Press, 2005).정욱식, 글로벌 아마겟돈: 핵무기와 NPT, (책세상, 2010년).카이 버드ㆍ마틴 셔원 지음, 최형섭 옮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사이언스북스, 2010년).트루먼 도서관: http://www.trumanlibrary.org조지워싱턴대 국가안보문서 보관소: http://www.gwu.edu/~nsarchiv/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