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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6일 월요일

정명훈 비판, 진중권-김상수 논쟁에 부쳐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02-06일자 기사 ' 정명훈 비판, 진중권-김상수 논쟁에 부쳐'를 퍼왔습니다.
진중권씨, 당신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당신의 저서 을 읽은 덕분에 르네 마그리트 그림을 보는 눈이 틔인 점, 감사하게 생각해 왔습니다. 최근 ‘진보 진영’의 언행에 대해 쓴소리를 연발하는 걸 보며 ‘왜 이러시나?’ 의아했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생각해 왔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민들의 ‘등에’ 노릇을 한 것처럼, 당신의 비판적 발언들 또한 ‘진보 진영’ 사람들의 도덕적, 문화적 각성을 위해 필요한 일이려니 긍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MBC가 이명박 정권에 침탈당할 때 MBC 사옥 정문에서 극우인사들에게 맞으며 저항하던 당신의 모습을 본 일이 있습니다. 그때, 당신만큼 강력하게 저항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불의와 독재에 맞서는 당신의 진심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당대의 논객 진중권에게 감히 반론을 제기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할 일이었습니다. 저는 프로그램 만들 줄 밖에 모르는 한 명의 방송 PD니까요. 그런데, 최근 ‘진중권의 아이콘 - 자유, 자유”라는 글에서 크게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대목들을 발견했습니다. 정명훈과 그의 음악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 글이려니 생각하지만 도저히 침묵할 수 없어서 몇 마디 드리고자 합니다. 말꼬리를 잡고 싶지 않지만, 얘기를 꺼내려니 말꼬리를 잡을 수밖에 없는 것,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그 글 중 한 대목이 매우 거슬렸음을 고백합니다. “이명박이 히틀러처럼 전쟁을 일으켰나, 유대인을 학살했나, 아니면 헌정을 파괴했나?” 

이명박과 히틀러가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명박을 위한 연주를 나치 부역에 비유하는 것을 반박하기 위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일단 정명훈은 논외로 하고, 이명박은 헌정을 파괴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그는 민주주의의 기본인 표현의 자유를 파괴했습니다. 미네르바를 잊진 않으셨겠죠? 유모차부대에 대한 탄압이 옛날 일인가요? 임기가 보장된 공영방송의 사장을 내쫓고 자기 아바타를 심어서 언론에 재갈을 물린 게 ‘헌정을 수호한 일’인가요? 에 대한 비상식적인 탄압은 검찰이 한 짓이니 이명박과 무관한가요? 삼척동자도 대답할 수 있는 이 질문에 지식인 진중권은 뭐라고 답하실지 궁금합니다.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툭 던졌다고 하기엔 너무 심각한 발언 아니었나요? 그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부정한 주가조작 사범이라는 점은 누구나 다 아는 얘기이므로 굳이 반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중국이라면 사형에 처하는 중대한 범죄입니다. 그가 전과 14범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덮으려 해도 ‘팩트’이고, ‘팩트’에 대해서는 토론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명박은 히틀러처럼 전쟁을 일으키진 않았습니다. 그는 유태인을 학살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다행입니다. 이명박은 제주 4·3과 한국전쟁 때의 이승만처럼 수십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지 않았고, 광주학살의 전두환처럼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총칼로 짓밟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벼랑 끝의 가난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아 버린 용산 참사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노동자가 죽어 나가는 한국타이어 사업장에서, 촛불집회 의료봉사단에게 잔인한 폭력을 휘두르는 경찰의 모습에서, 1년 가까이 지속된 김진숙의 고공 크레인 농성을 방치하는 그들의 태도에서 냉혹한 학살자의 냄새를 맡았다면 제가 과민한 걸까요? 이명박을 ‘학살’에 결부시킨 것은 순전히 내 ‘과대망상’이라고 해 둡시다. ‘과대망상’으로는 토론이 안 될 터이니 이 또한 그만 하죠.  

다시 정명훈 얘기로 돌아가지요. 이번 논란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지만, 따지고 보면 저야말로 정명훈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입니다. 94년 바스티유 음악감독 논란이 시작될 때부터 관심을 갖고 그를 여러 번 취재했습니다. 97년, 정명훈에 대한 최초의 다큐멘터리를 방송했고, 이어서 99년 ‘정명훈과 서울시향의 도전’이란 다큐를 만들었습니다. 김상수 식으로 표현하면, ‘정명훈을 영웅으로 만드는 데 앞장 선’ 주류언론의 ‘죄인’입니다. 

유럽 무대에서 정명훈의 음악적 성취는 주목할 만 했고, 당시 40대 초반의 젊은 지휘자에게 거는 국내 음악팬들의 기대도 컸습니다. 다큐 촬영 당시 정명훈은 살 플레이엘에서 파리 오케스트라를 지휘, 말러 교향곡 5번을 연주했습니다. 당시 르 몽드는 “라파엘 쿠벨릭과 베르나르드 하이팅크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같은 곡을 연주했지만, 그 누구도 정명훈만큼 청중을 압도하지는 못했다”고 썼습니다. 저 또한 공감했습니다. 정명훈의 말러는 탁월했습니다. 파리에서 만난 바스티유 단원들의 정명훈에 대한 사랑 또한 의심할 바가 없었습니다. 단원들은 그의 바톤 아래서 매우 고된 연습을 했지만 급속히 음악 수준이 향상되는 보람을 느꼈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프랑스의 대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이 정명훈을 가리켜 ‘천재’라고 극찬한 것이 그냥 빈말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이 국회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축하연주를 지휘한 정명훈 지휘자와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휘자의 실력에 성적을 매기고 석차를 따지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겠지요. 하지만, 당시 세계 음악계를 이끌던 게오르그 숄티, 클라우디오 아바도, 주빈 메타, 세이지 오자와 등 대지휘자의 뒤를 잇는 차세대 거장으로 그를 자리매김 했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그를 지나치게 미화했다고 비판해도 할 말이 없는 프로그램이었지요. 개인적으로 정명훈의 베토벤, 브람스, 차이코프스키, 드보르작, 말러는 그때나 지금이나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덧붙이자면, 그의 모차르트는 좀 아닙니다. 모차르트 이전의 고음악은 그의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런 얘기는 다큐에 담지 않았습니다. 재능있는 지휘자를 조명한 음악 다큐였을 뿐이니까요. 

에서는 그들의 새로운 시도를 긍정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엄격한 오디션에 따른 일정한 부작용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전체적으로는 음악의 질을 높이려는 의욕적인 시도로 간주했고, 객원 단원, 상임 작곡가, 공연기획 자문을 두고 를 발행하는 등 자생력 있는 오케스트라의 토대를 놓으려는 노력을 긍정적으로 조명했습니다. 최근 연출가 김상수가 제기한 재정적 문제들은 잘 몰랐고, 취재할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서울시향의 ‘베토벤 전곡 사이클’을 중심에 놓고 구성한 ‘음악 다큐멘터리’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보면 방송 저널리스트로서 다소 안일하게 만든 다큐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드는 게 사실입니다. 제 소개 겸해 다큐 얘기를 꺼낸 게 좀 길어졌네요. 

연출가 김상수의 문제제기는 다소 거칠게 보일 소지가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이명박 취임식 때 베토벤 9번을 발췌 연주하고 지휘봉을 이명박에게 바친 것, 이른바 ‘건국 60년 기념음악회’에서 드보르작의 ‘신세계에서’를 지휘한 것은 내가 봐도 결코 유쾌한 풍경이 아니었지만, 이를 곧바로 카라얀의 나치 부역에 비유한 것은 비약입니다. 나치에 반대한 파블로 카잘스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훌륭한 음악가고 나치에 부역한 카라얀이나 푸르트뱅글러는 저열한 음악가였다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김상수의 문제 제기 자체는 유효하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김상수는 자신이 연출한 연극의 음악을 직접 만든 사람이지만, 스스로 이야기하듯 서양 음악사에 대해서는 잘 모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로 그의 문제제기 자체를 희화화 하는 것은 적절한 처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엄밀히 보면, 그는 ‘음악론’을 펼친 게 아니라 음악이 정치에 사용(詐用)되는 것을 경계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논지는 “정명훈에게 지급되는 돈은 국민의 세금이고, 이는 투명해야 한다”는 게 핵심이었습니다. 액수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합리적인 방식으로 산정해서 누구나 납득할 수 있게 집행해야 할 돈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이러한 핵심 논지가 실종되고 감정적인 비난이 난무하게 된 것은 유감입니다. “한국 매스컴이 정명훈의 음악 수준을 과대포장했다, 알고 보면 정명훈은 한국을 우습게 아는 인간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없다, 따라서 그의 음악 또한 형편없다, 그런데도 정명훈은 한국이 낳은 스타라는 이유로 비판의 성역에 있다...” 김상수의 이러한 주장은 엄밀히 검증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논거를 무수히 제시할 수 있을 것이고, ‘팩트’와 ‘의견’이 거미줄처럼 꼬여서 미궁에 빠질 이슈들입니다. 굳이 검증하려 한다면 매우 정밀한 조사와 분석이 필요하고, 일정한 대목에서는 음악에 대한 전문적 식견이 요구될 것입니다. 김상수는 이 많은 주장들을 거칠게 쏟아냈기 때문에 엉뚱하게 역풍을 만났고, 논점이 흐려질 빌미를 스스로 제공한 것입니다. 김상수의 ‘잘못’이 있다면 딱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진중권씨 얘기로 넘어갑니다. 김상수의 오류를 빌미로 그를 바보 취급하고 그의 문제제기를 묵살하는 건 옳지 않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그의 핵심 논지를 슬쩍 외면한 채 비본질적인 얘기로 그를 희화화하는 것은 예의 있는 태도도 아니고 용기 있는 행동도 아닙니다. 진중권씨의 글에는 이른바 ‘진보 진영’의 문화적 조악성에 대한 안타까움이 배어 있습니다. 그 안타까운 마음은 경청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은 딱 그 지점까지입니다. 다음 구절은 선을 넘고 있습니다. 

“심지어 스탈린도, 히틀러도 클래식 음악을 이렇게 대접하지는 않았다. 현대음악은 탄압했을지 몰라도, 그들도 클래식만은 키워서 체제선전과 대중교양에 써먹으려 했다.”   

스탈린!! 그가 얼마나 저열하게 클래식 음악을 난도질하고 예술가들을 목 졸랐는지 진정 모르시는 건가요? 스탈린은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에서 거슬리는 대목이 나오자 “횡설수설하는 음표더미”라고 매도하면서 그를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었죠. 쇼스타코비치는 간신히 죽음을 면했는데, 그 이유는 쇼스타코비치를 추적하던 비밀경찰 요원이 하루 먼저 숙청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염세적인 정서로 가득한 교향곡 4번을 초연할 수 없었습니다. 5번 D단조에 대해서는 엉뚱하게도 “낙관적 비극의 전형을 그렸다, 더 밝은 미래의 비전을 들려주었다”고 격찬을 늘어놓더니 9번이 맘에 안 들자 아예 창작을 금지했고, 스탈린 본인을 우상화하는 저열한 영화음악을 만들도록 강요했습니다. 자, 이게 스탈린이 클래식 음악을 ‘대접’한 방식이었습니다. 

이 논리대로라면, 대통령 취임식과 ‘건국 60년 기념 음악회’에서 정명훈의 클래식 음악을 활용하려 한 이명박 정권이 클래식 음악에 대해 무지한 ‘좌파’보다 낫다는 결론이군요. 이게 진중권씨가 말하고자 한 바였습니까? 그런 ‘대접’이라면 안 받는 게 낫겠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제가 볼 때는 ‘좌파’든 ‘우파’든 추악한 본질을 클래식으로 포장하려는 위선자들보다는, “폴포츠 수준"의 단순무식한 사람들이 차라리 나아 보입니다. 

히틀러가 바그너와 베토벤을 앞세워 독일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하려 한 것도 퍽 교양 있는 일이었다는 결론이군요. ‘서양 클래식 음악을 잘 모르는’ 김상수조차 “베토벤 음악은 반유태주의 따위와는 상관없다”고 이미 지적했습니다. 베토벤이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에서 노래한 ‘형제애’를 ‘게르만 민족 공동체’로 해석한 게 베토벤을 잘 ‘대접’한 건 아니라는 점, 진중권씨도 동의할 거라고 믿습니다. 바그너는 본인이 반유태주의 성향을 갖고 있었으니 히틀러의 나치와 그런대로 잘 어울린다고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그너 음악은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에도 이미 존재했고, 히틀러가 지구상에서 사라진 뒤에도 변함없이 남아 있다는 점입니다. 히틀러 따위의 ‘대접’과 상관없이, 그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위대한 음악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유태인 음악가들이 히틀러 체제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지요. 그들 중 대지휘자 브루노 발터도 있었습니다. 그는 히틀러 독재에는 반대했지만, 체제와 이념의 차이를 너머 바그너 음악의 위대성을 인정했습니다. 종전 후 그가 녹음한 바그너 관현악곡집은 역사상 가장 훌륭한 연주로 꼽힙니다. 히틀러가 바그너를 ‘대접’한 방식과 브루노 발터가 바그너를 ‘대접’한 방식의 차이, 이해하실 수 있는지요?

발터의 넉넉한 태도는 카라얀과 비교하면 더욱 돋보입니다. 카라얀은 나치가 파리에 주둔할 때 침략의 최전선에서 바그너의 를 지휘했습니다. 그는 나치 군복을 입고 지휘한 일도 있습니다. 그렇게 바그너를 ‘사랑한’(?) 카라얀은 종전 후엔 바그너를 지휘한 일이 없습니다. 나치 부역의 기억을 되살릴 게 뻔하니 지휘할 수 없었던 거겠죠. 그는 오랜 세월 유럽 음악계의 ‘제왕’으로 군림했지만 이면을 보면 다소 옹색한 인생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카라얀 얘기가 나왔으니 다시 우리의 정명훈으로 돌아가 볼까요? 정명훈 다큐를 촬영할 때 다소 의아하다고 느낀 점이 있었어요. 그는 “저는 음악밖에 몰라요”를 되풀이했습니다. 음악가가 ‘음악밖에 모를’ 정도로 음악을 사랑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묻지도 않는데 “음악 이외엔 아무 것도 모른다”고 자꾸 고백하는 걸까, 좀 답답하다고 느꼈죠. “아무 것도 모른다”는 건 별로 자랑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그런데 몇 년 전, 카라얀의 나치 행적을 다룬 다큐멘터리 를 보니 똑같은 장면이 나오는 거였어요. 카라얀과 함께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전곡을 녹음한 피아니스트 알렉시스 바이젠베르크 인터뷰였습니다. 그는 “카라얀은 정치는 몰랐다. 그는 오직 음악밖에 몰랐다.”고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나치가 뭔지도 몰랐지만 음악가로 출세하기 위해 열심히 살다 보니 힘있는 자들 편에 서게 됐고, 그러다 보니 자기 뜻과 상관없이 부역을 하게 됐다” 정도로 요약되는 거죠. 같은 다큐에 출연한 역사가 올리버 로트콜프도 “카라얀은 자신이 나치 선전에 이용당한다는 정치 사회적 의미를 잘 몰랐던 것 같다”고 진단하더군요.

진중권씨는 누구보다도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의미를 잘 아시겠지요. 더 많은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이 더 양보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체제가 유지되고 그 안의 혈액 순환이 원활하게 이뤄지기 위해서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우리나라에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정신이 모자란 것이 큰 문제라는 점, 공감하시겠지요. 같은 맥락에서, 대중적 인기와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은 위험한 일일 수 있습니다. 저는 정명훈이 카라얀처럼 부도덕한 권력에게 부역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자기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모른다면 어떤 결과를 부를지 그 또한 예측할 수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번 논란을 계기로 정명훈이 스스로 되돌아보고 자신의 심각한 무지를 반성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으면 합니다. 정명훈이 뛰어난 예술가라는 이유로 모든 비판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진정 정명훈을 위하는 일인지 되돌아볼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병이 있는데 “괜찮다”고 외친다 해서 그 병이 없어질까요? 초기에 치료하는 게 좋습니다. 전화위복이 되기 바랍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얘기가 있습니다. 트위터에 올리신 글 중에 도가 지나친 게 있어서 지적해 드립니다. 김상수의 글을 실어주고 그를 인터뷰까지 했다는 이유로 을 ‘저질 매체’라고 단정하셨고, “이 분들의 보도 수법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라고 덧붙이셨네요. 아마 “‘정명훈=이명박’으로 깔아놓고 조지면 새로 당선된 서울시장이 뭔가 조치를 하겠지”, 이런 류의 계산 아래 기사를 썼다고 의심하시는 것 같네요. 이 실제로 그랬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자연스럽지 못한 추측을 바탕으로 불특정 다수를 향해 을 비난하시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점, 지적해 드립니다. 같은 식으로 말한다면, “서울시향이나 정명훈과 직접 관계도 없는 진중권이 이토록 김상수와 을 비방하는 것은 아마 자기 누나들이 서울시향 녹을 먹기 때문일 것”이라는 속물스런 의심 또한 정당화될 것입니다. 

진중권씨는 20만명의 팔로어를 가진 트위터리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20만명 개개인이 잘 판단하실 일이겠지만, 의 이미지는 이미 작지 않은 타격을 입었으리라 생각합니다. 20만명에서 적게 잡아 절반이면 10만명인데, 그 사람들이 진중권씨의 말에 공감해서 “은 저질매체”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권력자의 폭력과 비슷한 행태입니다. 은 영세신문입니다. 조선일보처럼 세련되게 편집도 못 하고, 좋지 않은 문장도 자주 눈에 띕니다. 하지만 조중동이 압도적인 여론 지배력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의 파행적 언론 지형에서 나름 진실보도를 위해 노력하는 기특한 매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과 골리앗 싸움 비슷한 걸 힘겹게 이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신문을 단 한 마디로 매도하는 것은 너무 생각 없는 행동 아닌가요? 

제가 볼 때 한국 주류 언론은 지나치게 국가주의적입니다. 황우석 사태 때 주류 언론이 보여준 파시스트 행태를 기억하시겠지요. 지금도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스타에 대해서는 거의 광신도처럼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 박지성이 후보 선수로 출장해도 뉴스입니다. 김연아와 결별한 외국인 코치는 죽일 놈이 됩니다. 정명훈도 한국 언론에서 비슷한 대접을 받습니다. 이런 국민적 스타를 비판하면 매국노가 됩니다. 이건 매우 촌스럽고 후진적인 행태입니다. 제가 늘 보아 온 진중권씨라면 주류 언론의 이러한 행태를 좀 더 강하게 비판하고, 에겐 애정 어린 채찍을 드셔야 합당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서 다소 의아합니다. 

이 글이 지면에 올라가면 ‘가재는 게편’이라고 오해하실 수 있겠네요. 은 언론노조 기관지로 시작해서 자립한 신문이라 저희 언론노동자들이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오랜 동지 관계 때문인지 저같은 무명의 필자가 쓴 글도 간혹 실어 줍니다. 저희 언론노동자들에겐 그래서 문턱이 낮은, 친근한 신문입니다. 부디 ‘과 이채훈의 관계’ 같은 사소한 대목은 괘념치 마시고, 제 글의 진심을 읽어 주시기 바랄 뿐입니다.  

진중권씨는 “필요하면 정명훈 관련해서는 나중에 정리해서 글을 올리겠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글에는 정명훈의 음악에 대한 평가도 들어갈 걸로 예상합니다. 그 대목에 대해서는 저도 할 말이 없지 않습니다. 음악을 아주 모르지 않는 사람들의 생산적인 토론, 나쁘지 않겠지요.  끝으로, “예술가들은 자유로운 영혼이어야 한다, 어설픈 이념으로 그들을 괴롭히지 말라”는 진중권씨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점을 밝힙니다. 시대와 호흡하고 그 시대에서 자양분을 얻어서 아름다움의 진수를 돌려줘야할 예술가들에게 최대한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는 점, 누구보다도 열렬히 지지합니다. 하지만 그 예술가 개인의 자유가 만인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데 이용되고, 민주주의를 질식시키는 파시즘에 이용될 자유까지 포함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명훈을 ‘이념’의 잣대로 괴롭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있지도 않은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과거 기득권자들이 흔히 써 오던 참주선동과 메카시즘을 연상시킵니다. 복잡한 논의가 필요치 않다고 봅니다. “정명훈에게 지급되는 돈은 국민의 세금이고, 이는 투명해야 한다”는 상식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상식에 바탕을 두면 더 이상의 불행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식은 정명훈에 대한 음악적 평가와는 별개입니다. 토스카니니든, 푸르트뱅글러든, 브루노 발터든 예외일 수 없습니다. 정명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유는 민주사회의 일원이 당연히 지켜야 할 규범 내에서의 자유일 뿐입니다.  

2012년 1월 27일 금요일

조지 오웰의 경고, 핵을 가진 두세 개의 괴물과 냉전


이글은 프레시안 2012-01-27일자 기사 '조지 오웰의 경고, 핵을 가진 두세 개의 괴물과 냉전'을 퍼왔습니다.
[정욱식의 '핵과 인간'] 미국 핵 독점의 종말과 '슈퍼 폭탄'의 등장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두 달 후에 쓴 칼럼에서 소련이 수년 내에 핵무기 개발에 성공할 것이라며, "우리는 몇 초 만에 수백만의 사람들을 몰살시킬 수 있는 무기를 보유한 두세 개의 괴물과 같은 슈퍼파워 국가들이 세계를 분단시키는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대규모의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은 줄어들겠지만, 영원히 '평화가 없는 평화'의 상태, 즉 '냉전(cold war)'을 그 대가로 지불해야 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후 인류의 역사는 그의 경고대로 진행되고 만다.


▲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백악관 앞에서 열광하는 미국 시민들. ⓒ트루먼 도서관

앞선 글에서 자세히 살펴본 것처럼, 미국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는 소련을 상대로 한 무력시위의 성격이 강했다. 원폭 투하를 통해 미국이 노렸던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소련의 참전 이전에 미국의 힘에 의해 일본을 패망시키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미 싹트고 있던 냉전 질서에서 소련에 대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무력시위'의 성격도 내포되어 있었다. 그런데 애초에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요구한 당사자는 미국이었다. 1943년 11월 테헤란 회담에서 미영 연합군은 소련의 개입이 태평양전쟁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으로 보고, 소련에게 참전에 따른 '전리품'을 제시했었다. 소련에게 쿠릴 섬 및 사할린 섬 남단 이양 및 만주 해군기지 사용 허용 등 일본이 러일전쟁 승리로 획득한 것을 소련에게 돌려주는 것이 골자였다.

그러자 스탈린은 독일이 패망하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겠다고 약속했다. 스탈린은 1945년 2월에 열린 얄타 회담에서 이러한 약속을 거듭 확인하면서 "나치 독일의 패망 3개월 후에 대일전에 참전하겠다"라고 재확인했고, 포츠담 회담에서는 8월 15일이라는 구체적인 일정까지 제시했다. 그러나 미국은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면서 계산을 달리 했다. 당시 미국 내에서는 소련의 참전에 의한 일본의 항복은 아시아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키워줄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는데, 핵무기로 소련의 개입을 대신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원폭 투하는 소련의 지원 없이 일제를 패망시키고자 하는 동기와 함께 경쟁자로 부상한 소련에 대한 무력시위의 성격을 동시에 안고 있었다. 이는 반대의 해석도 가능케 한다. 트루먼이 밝힌 것처럼, 소련의 대일본 선전포고는 8월 15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예정보다 6일이 빠른 8월 9일 참전을 단행했다. 아마도 스탈린의 머릿속에도 '미국이 전쟁을 끝나기 전에 우리도 서둘러 참전해야 한다'는 계산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스탈린 "히로시마가 세계를 흔들었다"

그렇다면 스탈린은 미국의 핵무기 및 원폭 투하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스탈린은 1940년대 초반부터 핵무기 개발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미국이 포츠담 회담에서 '핵 외교'를 선보이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기 이전까지 심혈을 기울이진 않았다.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비한 작은 대비책"으로 간주하는 수준이었다. 또한 미국과 영국이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다는 것을 정탐 활동과 일부 과학자들의 '자진 보고'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스탈린이 포츠담 회담에서 미국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다는 트루먼의 통보를 듣고 그리 놀라지 않은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미국이 실제로 핵무기를 사용한 것에는 상당히 놀랐던 것으로 보인다. 히로시마 피폭 직후 스탈린은 "히로시마가 세계를 뒤흔들었다. 균형은 깨졌다. 핵폭탄을 만들어라. 그것은 우리로부터 거대한 위험을 제거해줄 것이다"라며, 소련 과학자들에게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미국의 핵 사용을 소련의 양보를 강제하기 위한 협박 외교로 규정하고, "우리가 협박에 굴복하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트루먼의 무력시위는 노련한 독재자 스탈린을 위축시키기보다 핵무기를 개발해 미국에 맞서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미국의 핵 독점은 2차 대전 말엽은 물론이고 종전 이후에도 "미국의 외교정책을 혁명화"시켰다. 대표적으로 "핵무기가 없었다면 미국 대통령이 결코 생각하기 힘든 정책, 즉 독일의 재건과 재무장을 선택하게 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독일의 재건 및 재무장에 따른 유럽 국가들의 두려움은 미국의 핵 억제로 차단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트루먼 대통령과 번스 국무장관은 1945년 8월 22일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독일의 위협이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며, "원자 폭탄은 도발을 일으키려는 나라들을 중지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미국의 양보가 불가피한 소련과의 협력도, 독일 재무장을 두려워하는 소련의 우려도 크게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핵의 위력을 믿은 미국의 대담한 행보가 시작된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독일 문제를 비롯한 소련과의 외교 협상에서 핵무기를 강압 외교의 수단으로 동원했다. 미국은 핵무기의 위력을 스탈린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원폭을 당한 히로시마에 소련 관료를 초청하기도 했고, 태평양에서 실시한 핵실험에 소련 관료를 참관시켰다. 또한 번스가 소련의 몰로토프 외무장관을 만나 독일 문제를 두고 담판을 벌이고 있었던 1946년 6월에는 태평양 비키니섬에서 대규모의 핵실험을 실시해 소련의 강한 반발을 야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련이 그토록 거부했던 독일 재건에도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미국의 두 가지 카드, 즉 핵 시위와 독일 재건은 소련으로 하여금 미국이 전쟁을준비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강하게 갖게 했다. 당시 소련의 위협 인식은 소련 해체 이후 해제된 비밀문서에서 잘 나타난다. 1946년 주미 소련대사인 노비코프(Nikolai Novikov)는 미국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그 근거로 해외 해공군 기지 건설, 원자폭탄 등 신형무기의 증강, 독일의 재건 및 재무장 추진 등을 제시했다. 특히 "미국은 독일에서의 연합국의 임무, 즉 무장해제와 민주화를 달성하기 이전에 임무를 종식시키는 것을 고려하고 있는데, 이는 독일 제국주의의 부활로 이어질 수 있고, 미국은 재무장한 독일을 자기편으로 만들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이에 따라 스탈린은 미국의 의도에 강한 의혹을 품으면서 "앵글로-색슨의 침공"을 막기 위해 강력한 대응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의 불만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구상을 밀어붙였다. 소련의 강력한 반발을 뒤로 하고 유럽경제부흥계획인 '마셜 플랜'을 단행했다. 또한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쿠데타와 이듬해 베를린 위기를 거치면서 미국은 핵무기 보유고를 크게 늘려 1949년에는 그 수를 200개로 늘렸다. 핵 능력 강화와 유럽경제부흥계획을 통해 유럽에서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막아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이러한 미국의 움직임을 침공 준비로 간주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유력한 대응책으로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주목할 점은 핵의 위력을 앞세운 미국의 강경 외교에 '핵 강압 외교'의 주역이었던 헨리 스팀슨 전쟁부 장관이 일찍이 강한 우려를 표명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그는 1945년 9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소련과의 신뢰구축을 위해서는 미국의 핵 계획을 소련과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그는 편지와 함께 동봉한 메모를 통해 그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미국의 원자 폭탄 보유는) 대륙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상쇄할 수 있는 중요한 무기로 간주되어왔습니다. 우리는 또한 소련 정부가 이러한 경향을 간파하고 있고, 가능한 최단시간 내에 이 무기를 획득하려는 소련의 정치ㆍ군사 지도자들의 유혹도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미국이 핵 독점을 통해 소련에 맞서는 앵글로-색슨 진영을 구축하면 "매우 절망적인 방식으로 비밀 군비경쟁이 야기"되고, "우리의 목적과 의도에 대한 소련의 의심과 불신은 증가될 것"으로 우려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추가적인 핵무기 개발과 생산을 중단하고, 소련 및 영국과 핵 기술 협력 및 통제를 놓고 협상에 나설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그의 충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련의 핵실험과 미국의 대응

결국 미국의 핵 독점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1949년 8월 29일 소련이 카자흐스탄 사막 '세미팔라틴스크-21'에서 핵실험에 성공한 것이다. 이는 미국이 나가사키에 투하한 플루토늄 핵폭탄 '뚱보(Fat man)'와 흡사한 것으로써, 소련이 1950년대 중반에 가서야 핵개발에 성공할 것이라는 미국의 판단보다 훨씬 앞선 것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1948년과 1949년 정보분석 보고서를 통해 소련의 핵무기 개발 성공 시점을 "1953년 중반기를 가장 가능성이 높은 때"라고 분석했다. 핵실험에 성공한 스탈린은 이 사실을 철저하게 비밀로 붙이고 싶어했다. 자극받은 미국이 대대적인 군비증강에 나설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첨단 장비는 소련의 핵실험 사실을 포착했고, 트루먼은 9월 23일 이를 공식 발표했다. 미국은 소련의 핵무기를 스탈린의 이름을 따 'JOE-1'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미국은 대대적인 군비증강 계획에 착수하고 되는데, 당시 '슈퍼 폭탄'으로 불렸던 수소 폭탄 개발과 NSC-68는 이를 대표한다. 스탈린이 피하고 싶었던 것이 현실로 나타나고 만 것이다.


▲ 소련의 최초 핵실험 장면. ⓒ미국 에너지부

예상보다 빨리 실시된 소련의 핵실험에 당황한 트루먼 행정부는 세 가지 조치를 단행했다. 첫째는 유럽에서 소련의 재래식 군사력에 대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영구적인 미군 주둔 및 재래식 군비증강이었다. 이는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폭등한 군사비를 줄이고 군부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고자 했던 트루먼의 의도와는 상반된 것이었다. 둘째는 소련에 대한 핵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원자폭탄의 양과 질을 크게 늘리는 것이었다. 이미 트루먼 행정부는 원자폭탄 증강을 통해 재래식 군사력 감축을 상쇄할 생각이었는데, 소련의 핵실험 성공 소식은 원자폭탄 증강 열기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 셋째는 당시 '슈퍼 폭탄'으로 불렸던 수소폭탄 개발 승인이었다. 트루먼은 1950년 1월 31일자 성명을 통해, "우리나라를 잠재적인 도발자로부터 방어하는 것은 최고 군통수권자의 의무"라며, "나는 원자력위원회에 수소 폭탄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핵무기를 만들라고 지시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수소 폭탄의 개발 방침은 핵의 역사에서 두 가지 심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는 수소 폭탄의 파괴력이 원자 폭탄의 수십배에 달해 단 한발의 폭탄으로도 대도시나 작은 나라를 완전히 날려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러한 가공할 파괴력에 놀란 많은 사람들이 반핵주의자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대소 봉쇄 정책의 설계자인 조지 캐넌과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로 불리는 로버트 오펜하이머였다. 이들을 비롯한 많은 맨해튼 프로젝트 참여 과학자들은 "수소 폭탄의 사용은 원자 폭탄을 훨씬 능가하는 대량 살상을 가져올 것"이라며, 설사 소련이 이 무기를 손에 쥔다고 하더라도 미국은 원자 폭탄으로 소련을 억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은 "현재와 같은 군사 기술 수준에서 (핵)무장을 통해 안보를 달성하겠다는 것은 파멸적인 환상"이라며, "미-소 간의 군비 경쟁은 이성의 상실을 의미한다"라고 개탄했다.

그러나 소련의 핵실험 성공에 충격을 받은 트루먼 행정부는 '슈퍼 폭탄'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소련보다 핵전력이 앞서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미국이 주저하는 사이에 소련이 먼저 수소 폭탄을 개발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팽배했던 것이다. 결국 미국은 1952년 11월 1일에 태평양에서 수소 폭탄 실험을 강행했다. 폭발 규모는 원자 폭탄 실험이었던 '트리니티'보다 500배 강력한 10메가톤을 넘어섰다. 소련 역시 그 이듬해인 1953년 8월 12일에 중앙아시아 사막에서 수소 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이처럼 미국과 소련은 조지 오웰인 말한 "두 개의 괴물"이 되어갔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1954년 3월 1일에 태평양 비키니 섬에서 실시된 미국의 수소 폭탄 실험은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를 낳았다. 폭발 규모가 무려 15메가톤에 달해,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탄보다 750배, 미국 정부가 예상했던 것보다 2.5배나 강력했던 것이다. 또한 직경 6,500피트, 깊이 250피트의 거대한 분화구가 생겨났으며, 버섯구름은 1분 후 직경 15킬로미터, 8분 후에는 100킬로미터까지 커졌고 높이도 무려 16.5킬로미터에 달했다. 더구나 방사능 낙진이 140여킬로미텉까지 날아가 조업 중이던 일본인 어부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며, 세계 곳곳에서 방사능 물질이 검출되고 이상 기후가 나타났다.


▲ 1954년 3월에 실시된 미국의 수소 폭탄 실험 브라보

가공한 폭발력 앞에 인류 사회는 전율했다. 이들 가운데에는 "핵무기를 다른 무기와 특별히 다르게 봐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던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전까지 핵무기 옹호자였던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역시 이 실험을 목도하고는 핵전쟁이 일어나면 영국은 더 이상 살 수 없는 땅에 될 것이라며 우려를 표명했다. 무엇보다도 수소 폭탄 실험 '브라보(Bravo)'는 반핵 운동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 미국의 저명한 반핵단체인 분별있는 핵정책을 위한 전국위원회(National Committee for a Sane Nuclear Policy)와 비폭력행동위원회(Committee for Non-Violent Action) 등과 영국의 핵폐기캠페인(Campaign for Nuclear Disarmament), 그리고 초국적 단체인 퍼그워시(Pugwash) 등 저명한 반핵단체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대규모 반핵 집회 개최, 신문광고, 시민 불복종 운동 및 핵무기 시설 침투와 핵실험 지역에서의 해상 시위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반핵 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반핵 운동은 언론을 통해 전세계에 타진되었다. 그러자 핵무기 사용에 대한 미국 여론도 바뀌기 시작했는데, 1950년대 중반에는 선제 핵사용에 대한 반대 여론이 과반수를 넘어서기도 했다.

이처럼 원자 폭탄보다 파괴력이 훨씬 큰 수소 폭탄은 '핵분열' 반응을 이용하는 원자 폭탄과 달리 '핵융합' 반응을 이용하는 무기다. 수소 폭탄의 핵융합 반응은 원자 폭탄의 핵분열 반응에 비해 단위당 방출 에너지 양이 10퍼센트 정도로 작지만,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는 물질의 질량이 핵분열 물질의 2퍼센트밖에 안 되기 때문에 핵물질당 방출 에너지의 양은 원자 폭탄보다 4배 이상 많다. 예를 들어 10킬로그램의 핵물질이 포함된 수소 폭탄은 같은 질량의 원자 폭탄보다 파괴력이 42배 강하다. 그래서 "핵분열 폭탄은 태양 표면에 해당하는 온도를 만들어내는 반면에, 핵융합 폭탄은 태양의 일부를 지구에 갖다 놓은 것과 같은 엄청난 온도를 발산한다."

한편 소련이 미국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핵실험에 성공하자, 미국 내에서는 '매카시즘'의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소련의 최초 핵무기는 미국의 예상보다 5년 정도 빨리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플루토늄 핵폭탄인 '가제트' 및 '뚱보'와도 흡사했다. 소련 핵실험 5개월 후에는 소련 스파이의 핵심인물인 클라우스 푹스(Klaus Fucks)가 미 정보기관에 체포되었다. 그는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한 물리학자였는데, 1944년부터 로스앨라모스 연구소에 파견 근무하면서 핵심 정보를 소련 측에 넘겼다. 이 사건 직후에도 국무부 고위관료인 앨저 히스 간첩 논란 및 로젠버그 부부 사건이 잇달아 터지면서, "미국 내 소련 스파이가 소련의 핵개발을 도왔다"는 심증은 확신을 갖게 됐다.

1949년 8월 29일 소련의 핵실험에 이어 10월 1일에는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미국 내 '적재 공포'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소련의 핵실험 성공이 미국 핵 독점체제를 무너뜨렸다면, 중국의 공산화 성공은 오랜 기간 미국의 동맹국으로 인식되었던 중국이 공산국가로 변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미국의 충격도 컸다. 특히 1950년 1월 들어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유엔 가입 문제로 미국과 소련이 날카로운 대립을 벌이기 시작했고, 그 해 2월에 중소 동맹조약이 체결됐다.

이를 틈타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인 매카시(Joseph McCarthy)는 1950년 2월 9일 "나에게 국무부에서 일하는 205명의 공산주의자 명단이 있다. 그런데 국무장관은 이들이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과 계속 일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무명에 가까웠던 매카시는 이 폭탄 발언 한방으로 일약 저명한 정치인으로 올라섰다. 그가 경고한 '적색 공포'를 실증하듯 4개월 후에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매카시즘은 미국 국내 정치뿐만 아니라 대외정책의 급격한 우경화를 야기했다. 국제정세가 급변하던 시기를 틈타 몰아치기 시작한 매카시즘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트루먼이 신속한 개입을 선택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반도에 신속한 개입을 선택함으로써 안보와 공산주의에 나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한 것이다.

* 주요 참고문헌

George Orwell, "You and the Atomic Bomb," Tribune, 19 October 1945.Joseph Cirincione, Bomb Scare: The History & Future of Nuclear Weapons, (ColumbiaUniversity Press, 2007)Nina Tannenwald, "Stigmatizing the Bomb: Origins of the Nuclear Taboo," International Security(Spring, 2005).William Burr, "U.S. Intelligence and the Detection of the First Soviet Nuclear Test, September 1949," September 22, 2009John Lewis Gaddis, The Cold War: A New History, (New York: The Penguin Press, 2005).정욱식, 글로벌 아마겟돈: 핵무기와 NPT, (책세상, 2010년).카이 버드ㆍ마틴 셔원 지음, 최형섭 옮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사이언스북스, 2010년).트루먼 도서관: http://www.trumanlibrary.org조지워싱턴대 국가안보문서 보관소: http://www.gwu.edu/~nsarchiv/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