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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7일 목요일

"박근혜의 새마을운동이냐, 박원순의 사회적경제냐"

이글은 프레시안 2013-03-07일자 기사 '"박근혜의 새마을운동이냐, 박원순의 사회적경제냐"'를 퍼왔습니다.
[열린인터뷰] 정태인 "박근혜식 '융합', 군대에서 창조 바라는 격"

하마터면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정책통이 될 뻔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경제정책통 '후보'에 오를 뻔 했다.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정태인 원장.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제가정교사이기도 했던 그는 지난 대선 당시엔 박근혜 후보 캠프 영입설이 돌 만큼 보수 진영도 주목하는 진보 경제학자다. 그가 지난 4일 (프레시안)이 주최한 '열린인터뷰'에 나와, 출범 일주일을 맞은 '박근혜 정부' 경제정책의 앞날을 점쳐보았다. 정 원장은 '박근혜 노믹스'에 대해 한마디로 '기대를 접으라'고 했다. 경제민주화, 복지공약을 펼치기에 대내외 경제 여건이 좋지 않고, 박 대통령도 의지가 부족하다는 것. 박근혜 정부가 복지 정책을 할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다고 했다. 바로 민영화다. 그는 복지 재원 마련을 명목으로 민영화를 한다면 국민의 저항도 높지 않을 거라며 '천기누설'도 했다. '반(反) FTA 전도사'답게 그는 "공공서비스가 민영화 될 경우 한미FTA 체제에서는 다시 되돌릴 수 없게 된다"며 "박근혜 정부에서 민영화만은 꼭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정 원장은 참여정부 시절에는 노 전 대통령의 FTA 정책에 반기를 들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고, MB정부 시절 촛불정국에선 거리를 활보하며 '반 FTA 전도사'로 이름을 날렸다. 기 세고 모진 별명만 있는 건 아니다. 정 원장에게는 언젠가부터 또 다른 별명이 붙었다. '착한 경제학자'다. 정 원장은 수년 전부터 협동과 연대를 원리로 하는 '사회적 경제'를 화두로 던지며 이제는 '협동조합 전도사'로 다시금 알려지고 있다. 그는 이날도 "시장에서는 실업자가 양산되고, 정부는 돈이 없는 상태에서 개인들 스스로가 살 길을 찾는 게 사회적 경제"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가 앞으로 30년간 사회적 경제를 10%로 늘리면 GDP가 1%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하는 한편, '월드컵정신'으로 협동조합을 꾸려 경제를 일으킬 것을 주장했다.서울 마포구 서교동 프레시안 강의실에서 열린 이날 인터뷰는 박인규 대표가 진행했다. 편집자주


▲ 정태인 새사연 원장 ⓒ프레시안(최형락)

"박정희의 '생물학적 2세' 박근혜, 아버지 업적 따라할 것"

프레시안 :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일주일 됐다. 박정희 대통령을 승계하는 생물학적 2세가 대통령이 됐다. 육군 참모총장을 많이 기용한다든지 스타일들이 아버지를 닮은 부분이 꽤 있는 것 같다. 대학 시절에 박정희 정권과 싸워온 사람으로서 박 대통령에 대한 느낌은 어떤가?

정태인 :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숨진 게 1979년이었다. 제가 78학번인데, 대학교 1,2학년 때는 박정희, 말기는 전두환 대통령 시절이었다.

저는 글 쓰고 공부할 때, 박현채 선생 영향을 많이 받았다. 누구든 자기가 존경한 분을 따라가게 돼 있는데, 아마 박근혜 대통령이 존경하는 건 자신의 아버지일 것 같다. 아마 박 대통령이 앞으로 할 일은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으로 알려진 것들을 찾아내서 수행하는 일일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5.16 쿠데타 이후 처음 한 일이 '깡패 잡기'였다. 그런데 지금은 조폭이 없다. 그래서 (유사한 박 대통령의 공약을) 찾아봤더니 '4대 사회악'이라고 만들어서 부르더라. 성폭력, 학교폭력, 불량식품, 가정폭력. 3개월 이내 본때를 보일 것이다.

두 번째가 새마을운동이다. 새마을운동은 "잘 살아보세"를 부르며 희망도 없고 술만 마시던 사람들을 희망 갖게 하고, 국민 동원하는 데 성공한 운동이다. 성공한 건 틀림없다. 제가 '사회적 경제' 개념을 공부하기 전에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서) 가장 평가할 건 새마을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알고 보니, 새마을운동이 없앤 게 사회적 경제였다. 사회적 경제는 인류 탄생과 함께 늘 존재했다. 서로 돕는 게 사회적 경제다. 예전엔 식량을 공유하고 품앗이, 두레같은 조직이 마을마다 있었다. 해방기 이후는 조합의 천국이었다. 정부를 믿을 수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근데 새마을운동이 이걸 다 없애버렸다.

박 대통령이 '제2의 새마을운동'을 하겠다고 한다. (지난해 협동조합기본법이 통과하면서) 요즘 협동조합이 붐이다. 그런데 새마을운동을 하겠다는 건 위험한 발상이다. (조합에 대한) 자주적인 움직임을 중앙이 조직하면 이 붐은 사라질 것이다.

반면에 박원순 서울시장은 절대 직접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 사회적 경제를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다. 박원순은 오랫동안 시민사회활동한 감이 있다. 조합은 직접 손을 대면 문제가 생긴다.

세 번째는 경부고속도로. 처음에는 이것과 비슷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 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가 사퇴를 하고, 박 대통령이 국민담화문 발표하면서 정치권에 대한 혐오를 불러일으키고 야당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 알았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부고속도로는 바로 미래창조과학부구나' 하고.

미래창조과학부가 내세운 게 '융합'이다. 이건 뭔가 연결되는 것이다. 도로간 연결이 아니라 이제는 산업간 연결이다. 근데 시작부터 걸리적거리게 하니 화를 내고 이런 게 아닌가. 새누리당 대표도 '통섭'을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통섭이라든지 융합이라든지 이런 개념들이 그 사람들 머릿속에서 이해가 됐을까 의문이다. 인수위 보고서를 보면, 표제는 좋다. 사회적 자본, 융합 얘기도 나오더라. 근데 내용은 관료들이 하던 것을 그대로 나열한 것이더라. 그래서 개념과 정책이 따로 노는 상태다. 국가가 개입할 부분과 놔둬야할 것을 구분해야 하는데 이걸 구분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

결론적으로, 첫 번째(깡패 잡기)는 잘 잡아들일 거고, 두 번째(새마을운동)도 잘 할 거고, 세 번째(미래창조과학부)는 성공할지 좀 의심스럽다.

"결국 수출에 목 매… 경제민주화 물 건너갈 것"

프레시안 : 보수 세력이 슬로건 만드는 데 실력이 있다. 생애맞춤형 복지, 경제민주화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가져서 그래서 대통령까지 됐다. 근데 지금 보니, (국정 과제에서) 복지 핵심도 경제민주화도 다 빠졌다. 어떻게 보나.

▲ 정태인 새사연 원장 ⓒ프레시안(최형락)

정태인 : 선거에서 이기려고 보편복지, 경제민주화 개념을 넣었을 거다. 저는 여기에 사회적경제도 넣는데, 이 세 가지가 없으면 경제가 살아날 수 없다. 수출은 아마 마이너스가 될 거다. 우리나라는 중국에 25%, 홍콩까지 치면 30%. 미국은 10.5%. 유럽, 일본 순으로 수출을 많이 한다. 또 우리가 중국을 통해서 수출하는 게 있다. 그러면 중국도 수출이 잘돼야 우리나라도 수출을 잘 할 수 있다. 그런데 미국·유럽·일본의 경제성장률이 다 0%~1%대에서 헤매니까 우리도 마이너스 될 수 있다.

만든 물건을 팔아야하는데, 사는 사람들은 돈이 없다. 임금 적게 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노동생산성하고 임금이 거의 같은 속도로 늘어났는데, IMF 전후로 격차가 나기 시작했다. 일은 열심히 하고 생산성도 높아지는데 임금은 그 반만 늘어난다. 그래서 소비를 못 하니, 빚을 내서 사게 했다. 우리 가계 지출이 많은 이유가 이 때문이다. 신용카드 나눠주고 소비시키면서 생산성과 임금 격차분을 그렇게 메웠다. 그런데 지금은 가계부채가 워낙 심하니 빚을 내서 하는 사람 없다. 임금이 오르거나 소득재분배를 시켜야 한다. 그래서 보편복지, 경제민주화가 중요한 것이다.

중소기업이 지금처럼 하청 단가를 인하하면 생산성 올릴 수 없다. 중소기업이 생산성 못 높이면 임금도 낮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서 중소기업 종사자 비율이 88%를 차지한다. 중소기업 생산성을 높이려면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함부로 하게 하면 안 된다. 이걸 후퇴시킨다는 건 중소기업이 생산성 높여서 임금 올릴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는 것이다.

결국 남는 건 수출이다. 결국은 수출에 목을 매게 돼있다. 그래서 경제민주화는 물 건너 갈 것이다.

보편복지도 당연히 어렵다. 경제성장률이 2% 이하면 증세가 아닌 이상 보편복지를 하기가 힘들다.

"박근혜가 재벌 통제? 총수들 잡아 넣기만 하면…"

프레시안 :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재벌에 휘둘리지 않았다고 하는 평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도 강력한 통치력으로 재벌들 잘 이끌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는 것 같다.

정태인 : 박정희 대통령이 재벌을 통제한 건 정부가 돈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외국에서 차관을 배분하는 걸 정부가 했다. 그러니 재벌들이 잘 보일 수밖에 없었다. 또 금융산업이 국가 통제에 의해 움직였다. 당시 재벌들이 자본배분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재벌에 대한 군홧발로 눌렀다. 사실 이건 전두환 대통령이 제일 잘했다. 1979년 경제위기 위기 이후에 재벌들을 서빙고 대공분실로 불렀다. 그래서 딱 여섯 글자 물었다. '찍을래, 죽을래'. 굉장히 신속한 구조조정이었다. 당연히 지금은 그렇게 안 된다.

딱 하나 방법이 있다. 총수들을 법대로 집어 넣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출에 목매야 하는 대통령인데, 과연 이것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또 경제에 관한 참모들이 다 정부관료 출신들인데, 경제관료들은 이런 일을 상상하지 못한다. 사실 노무현이나 김대중이나 마찬가지이긴 한데, 새누리당이 과연 정치 자금을 안 받았을까?

프레시안 : 노동자 임금이 높아야 한다고 했는데, 임금을 높이거나 중소기업을 살리기 위해 박 대통령에게 제안하고 싶은 경제정책이 있다면?

정태인 : 작년에 이와 관련해서 <리셋 코리아>라는 책을 냈다. 최저임금 올리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다. 또 하나는 참여정부 때 도입한 EITC(근로장려세제; 일정소득 이하의 근로 소득자를 대상으로 소득에 비례한 세액공제액이 소득세액보다 많은 경우 그 차액을 환급해 주는 제도. 편집자주) 확대다. 노동자가 기초생활보장 대상에서 벗어나면 손해라고 생각하고 일을 안 할 수도 있다. 일한만큼 급료에 더 붙여주는 것이다. 한도가 800만 원까지인데 이걸 확대해서 부부합산해서 1200만 원 정도로 되게 하고, 최장 2년인데 3년까지로 하는 식으로 확대해야 한다. 가장 낮은 수준의 정치다.

그런데 정부가 모든 걸 할 수 없다. 노조가 커야 한다. 노동조합이 스스로 목소리 커지면 협상이든 투쟁이든 할 수 있다. 근데 우리나라는 노조 조직률이 너무 낮다. 스웨덴은 노조 조직률이 70%다. 그래서 선거에서 이기기도 한다. 우리는 민주노총 5%, 한국노총 5% 합쳐서 10%밖에 안 되니 노동 대표성도 약하고 힘이 약하다. 노조를 키우고 협상력을 강화해서 임금이 올라가면 내수도 늘어난다. 우리나라에 생경해서 안 된다고 하는데, 이런 생경한 것을 도입하는 게 바로 정치다. 국민들에게 '이거 안하면 전망 없다'는 걸 설득하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박근혜식 '융합', 군대에서 창조하라고 시키는 격"

프레시안 : 원로 경제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진보개혁세력이 분배개혁 얘기하는데 성장은 관심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에서 성장하려면 수출이 답이 아니냐고 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FTA가 중요하다고 하는데 어찌 생각하나.

정태인 : 그러니까 원로라는 거다. 옛날 생각하는 거다. 2008년 금융위기가 얼마나 큰 위기인지에 대해 감각이 없는 것 같다. 2008년은 1929년 대공황처럼 패닉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이번에는 1929년 경험이 있어 각국이 일제히 돈을 풀었기 때문에 패닉으로 들어가는 건 막았다. 대신 정부 부채가 늘어나고 일본형 장기침체에 돌입했다. 수출 늘리는 건 불가능하다.

전 세계에서 돈 갖고 있는 나라가 중동 다음이 동아시아다. 세계경제를 크게 나눠보면, 소비 늘려서 경제성장을 시킨 나라가 있다. 남유럽·미국·영국인데, 이들 국가들이 빈부격차가 다 심했다. 가계에 빚 줘서 소비를 늘렸다. 한마디로 '부채소비주도형'이다. 그리고 이들 국가에 수출을 하는 게 '수출주도형' 동아시아다. 그런데 부채소비주도형이 망했다. 그럼 수출주도형도 망하는 것이다. 현재 중국·한국·일본·대만이 쌓아두는 외환보유고가 4조 달러가 넘는다. 근데 갖고 있어봐야 아무소용 없다. 동아시아에 개발 안 된 데가 많다. 이런데 인프라 놓는 데 써야 한다. 이곳 내수 늘어나면 선진국들이 수출할 것 아닌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빈부격차 심한데, 가난한 사람들이 돈 없어서 소비 못하게 하는 걸 해결해야 한다. 다들 형편이 안 좋아지면 큰 소비는 줄이기 어려우니 동네 소비부터 줄이게 된다. 그럼 바로 자영업이 타격받는다. 작년에 고용률이 늘어났다고 하는데 대부분이 자영업이다. 그 다음이 20대 비정규직. 우리나라 실업률이 4%로 세계적으로 보면 낮은데 알보고면 위장 실업률이다. 실업률이 낮은 만큼 자영업자가 많다. 직장에서 실업급여를 제대로 못 받으니 생계형 자영업자가 많아진다. 이게 가계부채의 뇌관 건드릴 수 있다.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자영업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집값 떨어지고, 자영업 망하면 터질 가능성이 있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는 운이 좋아서 폭탄이 안 터졌다. 천운이다. 세계금융위기가 안 터졌으면 하려던 대로 경제성장률 높이는 데만 치중해서 폭탄을 맞았을텐데, 세계경제 때문에 확장정책을 못쓴 게 경제 폭탄 막는 역할을 했다. 그렇게해서 이명박 대통령은 5년은 버텼는데, 다음 5년은 아마 버티기 힘들 것이다. 지금 박 대통령 정책을 봤을 때는 갑자기 수출이 늘어나지 않는 한 가계부채 폭탄은 터진다.

프레시안 : 박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절망자살'한 분이 많다. 노동자들의 자살, 노동자들이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살 수 있을까, 박근혜 정부에서 뭔가 기대할 수 있을까.

정태인 : 인수위 안에 '노사정위원회'라는 게 있는데 내용이 없다. 노사정위가 국민의 정부 때 위기 극복할 때 효과를 발휘했다. 다음 참여정부 때도 노사정위를 활성화하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박 대통령 보니, 오히려 줄푸세의 '세', 법과 질서를 세우는 쪽으로 갈 것 같다.
사실 5년이면 긴 시간 아니다. 저는 지금까지 정책만 만들면서 살아왔다고 자부하는데, 이번에 <리셋코리아> 책 쓰면서도 많이 허술하다고 느꼈다. 그럼 다음 선거에 이긴다 하더라도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정책 만들 수 있느냐 하면 아니다. 우리에게는 5년이 남은 게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시민운동, 노동운동 조직이 5년간 총력을 다해도 어려운 일이 많이 기다리고 있다. 세계가 다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베낄 모델이 없다. 박정희 시절에는 일본이 고도성장하고 미국이 도와주니 일본을 베끼면 될 일이었다. '융합'이라고 하는 건 근데 그야말로 창조적으로 잘해야 하는데, 기본적인 시민민주주의 가치 없이는 안 된다. 군대에서 창조하라고 해봐라. 잘 되나. 자기의 사고방식과 어울리지 않고 관료들이 얽어매놓은 상태에서, 기강 잡는다고 다 잘 될까.


▲ 정태인 새사연 원장 ⓒ프레시안(최형락)

"디테일 강한 박원순, '협동조합의 기적' 만들 것"

프레시안 : 협동조합 같은 사회적 경제에 관심 많다고 알고 있다. 사회적 경제가 우리나라 경제에 얼마나 도움된다고 보나

정태인 : 경제민주화는 사실 별 거 아니다. 경제에도 민주주의가 들어가는 게 경제민주주의다. 민주주의 요점은 1인 1표제다. 이건희도 나도 1표. 근데 왜 기업은 1인 1표가 안 되나. 기업은 1주 1표다. 주식을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은 의사결정권 갖는다. 근데 우리나라 재벌 총수 일가가 대체로 1% 갖고 있다. 소액주주다. 근데 순환출자 통해 1주 50표를 행사한다. 1인 1표에 가깝게 하는 게 경제민주화다. 근데 협동조합은 자체가 1인 1표다. 얼마 냈건 간에 얼마나 일하건 간에 조합원은 다 1인 1표다. 이건 민주주의다. 만일 협동조합 비중이 커지면 그만큼 우리 경제 전체 민주주의는 커진다. 에밀리아 로마냐(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주. 편집자주)는 협동조합이 굉장히 많다. 대기업은 없다. 중소기업, 협동조합 구분 안 된다. 경제에서도 민주주의 관철된 상태다. 몬드라곤 협동조합(스페인 북부에 위치)은 재벌과 비슷하지만 1인 1표를 행사한다. 민주주의 재벌인 것이다.

앞서 얘기했듯 사회적 경제라고 하는 건 인류 역사와 함께했고, 위기를 맞이할 때마다 늘어난다. 협동조합은 경제민주주의뿐 아니라 정치적 민주주의 효과도 있다. 풀뿌리는 새누리가 갖고 있다. 동네 복덕방이나 요식업자들. 그런데 만일 생협이나 마을기업 있으면, 꼭 정치색이 왼쪽이 아니라 하더라도 민주주의 훈련이 돼있는 풀뿌리가 경제조직으로 있으면 굉장히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이 2% 이하라고 했는데, 사회적 경제의 비중은 제로에 가깝다. 1%나 될까 싶다. 근데 사회적 경제가 많은 곳은 그 비중이 10% 정도다. 우리나라가 앞으로 30년간 사회적 경제를 10%로 늘리면 GDP가 1% 늘어난다. 지금 2% 늘어나기도 힘든데 어마어마한 것이다. 월드컵할 때 놀라운 협동정신 끓어오르는데 그런 기질이 매우 중요하다. 제가 보기엔 박원순 시장의 실험이 중요하다. 사회적 경제 역사에서 이렇게 대규모로 1000만 명을 대상으로 실험한 게 없다. 게다가 디테일에 굉장히 뛰어나서 하면 안 되는 일을 안 한다. 어쩌면 서울에서 상당히 많은 기업이 생존하고 모범을 보이고 그래서 네트워크를 이뤄서 한국에 협동조합이 자리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자마니(이탈리아 볼로냐 대학 교수)가 한국이 한강의 기적 이룬 것처럼 협동조합의 기적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중국도 관심이 많다고 한다. 상하이 시장이 자마니한테 협동조합 어떻게 할 수 있냐고 했더니, 박원순을 수입하라고 하더라.

프레시안 : 원주가 우리나라에서는 협동조합이 굉장히 잘 된 도시인데, 비중이 0.36%라고 한다. 약간 비관적인 게, 협동조합이 신뢰나 민주주의적 협조가 필요한데 과연 될까하는 회의가 있다. 사회적 경제 활성화시키기 위해 뭐가 필요한가.

정태인 : 첫째도 마지막도 신뢰다. 조합원 사이의 신뢰,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소비자의 믿음 중요하다. 그게 깨지는 순간 협동조합 깨진다. 몬드라곤이나 에밀리아 로만도 그래서 힘들다고 생각했었다. 오랫동안 조그만 조직들이 신뢰에 입각해 정보 공유하는 시스템. 에밀리안은 수천 개 그룹이 모여 자동차를 만든다. 페라리, 람보르기니도 만든다. 이건 굉장히 오래간 쌓인 신뢰 없이는 안 된다.

우리나라도 사실 협동이 굉장히 잘 되는 나라다. 월드컵 때도 국가라는 정체성 하나로 뭉치고, 광장에서 구경하다가 휴지까지 싹 줍지 않나. 그런데 지난 30년, 특히 1995, 1996년 이후 경쟁 강조하고 아무도 2등 기억 않는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도 나돌고, '부자 되세요' 카피가 나도는 분위기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래서 제가 찾은 모델이 캐나다 '퀘벡모델'이다. 퀘벡 주 정부와 퀘벡시민운동 단체가 만나 경제 나쁘니 서로 경제정책 세웠다. 경제정책 수행을 사회적 경제, 사회적 기업이 만들어서 육아나 주택 등 사회적 서비스를 국가와 시민단체가 해결했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 센 게 시민사회다. 중국은 시민사회 없다. 일본은 튼튼한데 굉장히 낮은 수준의 지역공동체에만 틀어박혔다. 국가는 나몰라라 한다. 그래서 서울시 2,3년 사이가 중요하다고 본다. 상당히 성공할 것 같다. 우리나라가 '카피'도 잘 하니 퍼져나가면 10%까지 되지 않을까. '월드컵 정신'으로 말이다. 아마 그 과정에서 신뢰도 쌓일 거다.

프레시안 :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에서 원장직을 올해로 3년째 하고 있다고 들었다. 올해 새사연에서 하고자 하는 연구가 어떤 게 있나?

정태인 : 세 가지가 있다. 우선 한국의 불평등에 관한 것이다. 현재 불평등 관련 지표가 매끈하지 않다. 이걸 다듬고, 불평등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찾아보려 한다. 또 하나는 아직 말씀 안 드렸는데, 서울시 종합계획을 세워보려고 한다. 국가정책만 만들 게 아니라, 서울도 장기 비전이 필요하다. 서울시도 (보수 진영에) 뺏기면 끝이다. 희망이 없다. 국가는 보수적으로 가니, 1/4인 서울이라도 올바른 정책 써서 바뀔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지자체가 할 수 있는 수단 갖고 어떻게 정책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려 한다.

세 번째는 에버트 재단이라고, 독일 사민당파의 큰 재단이 전 세계에서 하는 프로젝트인 미래경제프로젝트가 있다. 아시아, 미국, 중남미, 유럽 내에서 각각 한 국가가 같이 하는데, 그 중 우리도 대상이 됐다. 에버트 재단하고 생태경제 관련 연구를 하려 한다. 이렇게 세 가지에 집중할 건데 문제는 돈이 없다.(웃음) 우리가 연구원이 10명인데 재야에서 제일 큰 연구원이다. 


/서어리 기자(정리)

2012년 10월 21일 일요일

“누구 때문에 내가 이모양 이꼴로… 그 딸이 대통령 되면 울화병 나지”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10-20일자 기사 '“누구 때문에 내가 이모양 이꼴로… 그 딸이 대통령 되면 울화병 나지”'를 퍼왔습니다.

1972년 12월27일 정부중앙청사에서 열린 유신헌법 공포식. 그래 10월17일 비상계엄을 선포한 박정희는 11월21일 91.5%의 찬성률로 국민투표를 통과한 유신헌법을 이날 공포함으로써 종신독재의 시대를 열었다. 보도사진연감

되살아오는 유신, 독재의 추억유신
40년, 긴급조치 피해자부터 새마을운동 유공자까지
‘유신세대’ 4인의 삶을 추적하다… 
치욕과 불안의 시대로부터 우린 얼마나 멀리 와 있나 

“물려줄 것은 부끄러움뿐”(양성우 ‘겨울공화국’)이란 탄식마저 횡행했지만, 그 시절 공화국에도 삶은 흘렀다. 학교를 가고, 가장의 책임감을 실어 출근부를 찍고, 사랑을 하고, 감기는 눈 비벼가며 미싱을 탔다. 드러난 일상은 여느 시절과 매한가지였으나, 거리와 학교와 공장과 쉼터 도처에 치욕과 불안, 의심과 강박이 복병처럼 도사린 납빛의 나날이었다. 금지와 검열, 감시와 처벌의 공포가 욕망과 상승의 신기루와 동거하던 이 시절을 견디며, 20대 여자 시인은 썼다. “그래서 볼 수 있습니다// 꽃의 웃음이 한없이 무너지는 것을/ 밤의 달빛이 무섭게 식은땀 흘리는 것을/ 굴뚝과 벽, 사람의 그림자 속에도/ 몰래몰래 내리는 누우런 황폐의 비”(최승자 ‘편지’)

유신체제를 경험했던 사람들에게도 그것의 전체상은 뚜렷하지 않다. 어떤 위치에서 그것을 경험했는지에 따라 다른 모습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왼쪽부터 오종상·신순애·송성헌·전영훈씨. 사진 한겨레21 탁기형, 오승훈, 이세영, 탁기형.

1972년 10월 비상계엄 선포에서 1979년 10월 대통령 박정희의 죽음에 이르는 이 시기를 일러 우리는 ‘유신시대’라고 한다. 이 8년은 계엄령·위수령·비상사태·긴급조치 등 실정법을 정지시키는 각종 예외 상태가 통치권자 자의대로 조성되고 해제되길 반복하던 ‘일상화된 예외 상태’였고, 이 사회를 짓누르는 성장 강박, 속도주의, 군사주의, 토건주의가 일상의 구석구석에 잔뿌리를 내리는 습속의 착근기이기도 했다. 10월17일로 돌아오는 유신 선포 40년을 맞아 은 유신과 함께 20~30대를 보낸 4인의 삶을 추적했다. 유신이 이들 삶에 어떤 자취를 남겼는지, 그 시절의 체험은 현재의 일상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나아가 오늘의 한국 사회는 40년 전 예외 상태에서 얼마나 멀리 와 있는지 판단하는 것은 글을 읽는 독자들 각자의 몫이다. _편집자그는 양토업자였다. 토끼 팔아 아들 둘과 아내를 건사했다. 1974년 6월7일 오후, 경기도 평택의 오종상(당시 33살)씨 집에 점퍼 입은 남자 2명이 들이닥쳤다. ‘본부’에서 나왔다는 그들은 경기도 수원으로 가자며 오씨를 차에 태웠다. 오씨는 겉옷도 못 걸친 러닝셔츠 바람이었다. 중앙정보부 수원지부를 거쳐 그날 저녁 오씨가 도착한 곳은 서울 남산의 중앙정보부였다.

정부 비판 말 몇 마디에 징역살이

취조가 시작됐다. 수사관들은 다짜고짜 “지난 5월17일과 22일 정부 시책을 비판하고 북한을 찬양하지 않았느냐”며 오씨를 ‘빨갱이’ ‘자생적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였다. 빨갱이라는 말에 숨통이 조여왔다. 기억을 더듬었다. 읍내 가던 버스에서 여고생들에게 건넨 얘기가 떠올랐다. 반공·근면·수출증대가 주제인 웅변대회에 나간다는 학생들에게 오씨가 한 말은 이랬다. “수출증대가 뭔지 아나. 선량한 노동자의 피를 빨아먹는 일이다. 정부가 분식을 장려하는데 정부 고관과 부유층은 분식이랍시고 국수 약간에다 달걀과 고기를 듬뿍 넣어 먹는다. 민주주의 못하는 유신체제 아래서 가난하게 사느니, 이북하고 통일을 해서라도 잘사는 게 낫다.”

긴급조치 위반 유형별 사건 수와 긴급조치 위반자 직업별 분포. 자료: 진실화해위원회, ‘긴급조치 위반사건 판결분석 보고서‘(2007)

오씨에게 적용된 혐의는 긴급조치 1호(유언비어 날조 및 유포 금지) 및 반공법 위반(북한 찬양)이었다. 밤낮없는 구타와 고문이 이어졌다. 혐의를 인정해야 끝날 기세였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말을 학생들에게 했는지 집중적으로 물었다. 부인할 때마다 여지없이 각목이 날아들었다. 매질은 팔과 등, 머리를 가리지 않았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됐다.“기절을 했는데, 여의사인지 간호사인지 들어와 주사를 놓았다. 정신을 차리면 조사가 다시 시작됐다. 혐의를 부인할 때면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이틀 동안 몇 시간도 못 잤을 것이다.”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오씨에겐 당시 상황을 복기하는 게 여전히 버거워 보였다. 일주일 뒤 오씨는 구치소로 이감됐다. 1974년 7월 기소돼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은 오씨는 비상고등군법회의를 거쳐 1975년 2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의 형을 확정받았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오씨의 절규에 어느 판사도 귀기울이지 않았다. 사법부는 유신체제를 지탱하는 기둥이었다.오씨의 사례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었다. 긴급조치 피해자들은 오씨 같은 ‘필부’가 대부분이었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가 펴낸 ‘긴급조치 위반사건 판결분석 보고서’를 보면, 1140명이 연루된 긴급조치 위반 사건 가운데 일반 시민이나 교사, 학생, 종교인 등이 술집이나 거리, 학교, 교회 등에서 정권과 유신체제를 비판하다 처벌받은 경우가 전체의 절반에 해당하는 282건(48%)이었다. 1974년 1월 이웃에게 “현 정부가 부정부패해서 공화당과 박 정권이 망한다”고 말한 무직자 정아무개씨는 징역 12년을 선고받은 뒤 대법원에서 7년이 확정됐고, 같은 해 5월 이웃에게 “박정희가 여순반란 때 부두목으로 가담했는데 운이 좋아 대통령까지 됐다”고 말한 농민 박아무개씨는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1977년 7월 오종상씨가 전주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했을 때, 단란했던 가정은 풍비박산 나 있었다. 경찰에 시달려온 아내는 이혼을 요구했다. 도리 없이 도장을 찍었다. 아들 둘은 여동생이 거둬 길렀다. 이런 탓에 오씨는 지금도 아들들과 눈을 맞추지 못한다. 고문의 후유증도 오래갔다. 지금도 허리디스크와 위장병을 달고 산다. 오씨는 요즘 뉴스를 볼 때면 숨이 막힌다. “누구 때문에 나와 내 가족이 이 신세가 됐는지를 생각하면, 그 딸이 대통령이 되면 울화병이 나서 죽을 것 같다. 젊거나 돈이라도 있다면 이민이라도 가지. 하지만 그게 내게 가당키나 한가.”

딸이 간첩이라는 말 듣고 충격에 죽은 엄마

유신시대의 주요 사건들1

범부의 삶에도 깊은 상처를 남긴 유신체제가, 굴종을 거부하는 이들에겐 오죽 사나웠을까. 청계피복노조 부지부장으로 유신의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던 신순애(59)씨에게도 그 시절은 모질도록 잔인한 세월이었다. 1977년 9월 신씨는 노조원들과 함께 당시 노동교실이 입주해 있던 서울 을지로의 건물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된서리를 맞았다. 경찰의 압력을 받은 건물주가 노동교실의 퇴거를 요구하며 공권력을 요청하자 홧김에 실랑이를 벌이다 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로 경찰에 구속된 것이다.서울 중부경찰서에 연행돼 조사를 받는데, 경찰이 들이민 혐의 내용이 기가 막혔다. “건물주가 요구한 퇴거 시한이 9월10일이라 하루 전에 시위를 한 것인데, 경찰은 북한의 건국일인 ‘9·9절’에 맞춘 것이라며 빨갱이로 몰아세웠다.” 장씨 성을 가진 정보과 계장이 얼마나 거칠게 손찌검을 했는지, 지금도 그때 맞은 왼쪽 귀가 잘 안 들린다고 신씨는 호소했다.당시 신씨가 믿을 것이라곤 판사들뿐이었다. 그래도 법관들은 배우고 양심적인 사람이니 경찰과 달리 자신의 말에 귀기울여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기대는 여지없이 배반당했다. 법대 위의 판사가 물었다. “왜 9월9일이오? 북한의 지령을 받은 것 아니오?” 맥이 풀렸다. 원통했다. 남은 힘을 모아 절규를 쏟아냈다. “우리가 가장 무서운 게 빨갱이요. 판사님까지 우릴 빨갱이로 모는 거요?” 1심에서 징역 5년, 2심에서 집행유예 5년을 받고 11개월 만에 출소했다. 하지만 직장에는 돌아갈 그의 자리가 없었다. 다른 공장에도 블랙리스트가 돌아 취업 자체가 불가능했다.노조에 나가면 중부서 형사들이, 이문동 집에 가면 동대문서 형사들이 따라붙었다. 견딜 수 없어 이사를 가면 형사들이 먼저 와서 기다리기 일쑤였다. 오빠가 말했다. “동네 사람들 보기 그렇다. 노조일 접어라.”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제 몸을 불사른 전태일도 있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결국 어머니만 모시고 집을 나왔다.1978년 겨울, 하루는 집에 갔더니 어머니가 쓰러져 있었다. 경찰에게서 신씨가 간첩이란 얘기를 들은 집주인이 방을 빼라며 모진 말을 한 것이었다. 정신을 차린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통곡했다. “네가 왜 간첩이냐. 우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사달을 겪은 뒤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는 이듬해 봄 세상을 떠났다.1980년 청계피복노조가 강제 해산된 뒤 지인들의 도움으로 청소년 상담사 일을 시작했다. 생활도 차츰 안정이 됐다. 2006년엔 꿈에 그리던 대학에 입학해 만학의 열정을 불태웠다. 지난 6월 성공회대에서 ‘13살 여공의 삶’이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신씨는 “돌이켜보면 과도한 진학열과 학력주의, 노동 천시 풍조 같은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들이 박정희 시대의 속도전식 산업화에서 비롯된 것 아니겠느냐”며 “이제는 너무 확고히 뿌리내려 어디서부터 손써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 같다”고 했다.

통속소설 속 군 비판 내용으로 고초

유신시대에 고초를 겪은 모든 이가 박정희의 비판자가 된 것은 아니다. 출판인 송성헌(67·도서출판 청조사 대표)씨가 그런 경우다. 송씨는 37년이 지난 지금도 쇠창살 너머로 바라보았던 그날의 하늘빛을 잊지 못한다. 서울 을지로의 출판사로 찾아온 기관원들에 이끌려 어딘가로 연행된 직후였다. “서울에 살면서 그렇게 푸르고 투명한 하늘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바깥 세계였으니, 그 느낌이 어땠겠나.”

유신시대의 주요 사건들2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고 5개월이 지난 1975년 10월의 일이었다. 편집자로 일하다 막 독립한 초보 출판인 송씨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 가질 만큼 여유가 없었다. 한시바삐 회사를 본궤도에 올려놓는 게 급선무였던 까닭이다. 지인들과 만나 술잔을 기울일 때에야 필화에 연루돼 고초를 겪는 업계 사람들의 처지를 동정하는 정도였다.“불안했다. 연행되는 차 안에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문제될 책은 낸 게 없었으니까.” 궁금증은 조사실에 들어가서야 풀렸다. 그해 펴낸 소설책 한 대목에서 군에 간 주인공이 군대의 실상을 비판적으로 언급한 게 기관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었다. “쓴웃음이 나왔다. 이념소설도 아니고 연애담을 다룬 통속소설이었으니까. 게다가 그 책은 내가 기획한 것도 아니고, 다른 데서 낸 것을 중개업자한테 인쇄 원판만 사들여 찍어낸 것이었다.”사정을 잘 설명하면 곧 풀려날 것이라고 마음을 진정시켰지만, 파출소 한번 가본 적 없는 그가 밀실 수사의 공포를 이겨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방에서 조사받던 중개업자는 겁에 질린 탓인지 평소보다 말을 심하게 더듬었고, 그때마다 수사관들은 거칠게 귓방망이를 올려붙였다. 옆방에선 수시로 고함과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정신 차려, 송성헌’을 수십 번씩 되뇌며 정황을 조리 있게 설명하려 애썼다. ‘껀수’가 안 된다고 판단했을까. 조서를 꾸미던 수사관 얼굴에 ‘김샜다’는 실망감이 역력했다. 얼마 뒤 상급자로 보이는 사람이 나와 조서를 훑더니 서류 뭉치를 들어 머리를 내리쳤다. “임마, 앞으로 조심해.” 긴장이 풀리며 안도감이 찾아왔다.풀려나와 집에 가니 통금 직전이었다. 연행 13시간 만이었다. 끌려간 곳이 보안사 서빙고 분실이란 사실은 한참 뒤에야 알았다. 트라우마는 오래갔다. “원고를 볼 때마다 단어 하나, 토씨 하나에 신경이 곤두섰다.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4년 뒤 박정희가 죽었다. 그사이 출판사는 자리를 잡았다. (뿌리) (오싱) 같은 번역소설이 히트를 쳐 1980년대 중반엔 번듯한 사옥도 지어올렸다. 박정희에 대한 증오도 누그러들었다.“그 뒤로 정권 잡은 사람들을 보니, 그래도 박정희는 괜찮은 사람이었더라. 애국심 하나는 투철했고, 무엇보다 청렴하지 않았나.” 그는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찍었다. 경제살리기가 우선이란 생각에서였다. 지금은 물론 실망이 크다. 그럼에도 송씨는 이번 대선에서 야당 후보를 지지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했다.“경제가 어렵잖나. 다시 도약해야지. 유신을 선포하고 민주인사를 탄압한 건 잘못했지만, 박정희 시대가 우리한테 심어준 게 ‘잘살아보자’ ‘하면 된다’는 마인드 아닌가. 지금 필요한 게 그런 근면성과 자신감이다.”

‘새마을회’란 이름 탓에 사찰받기도

실향민 출신의 새마을지도자 전영훈(78)씨도 ‘하면 된다’ 정신을 강조했다. 그는 경기도 안산시 선감동(당시 부천군 대부면 선감도)에 학교를 세우고 농토를 개간하는 등 지역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74년 7월 박정희로부터 새마을훈장 근면장을 받았다. “수출은 안 되는데, 공장엔 일할 사람이 없다고 한다. 박정희가 강조한 근면·자조·협동 정신으로 뭉쳐 지금의 어려움을 이겨내야 한다. 지도자들 책임이 막중하다.”

유신시대의 주요 사건들3

그가 마을에 학교를 연 것은 군에서 전역한 직후인 1958년이다. 마을 사람들이 해변에 떠밀려온 깡통 속 윤활유를 된장국에 풀어 먹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뒤였다. 마을 고아원 한켠에 교실을 꾸민 뒤 글 모르는 주민을 모아 한글과 산수를 가르쳤다. 새마을운동이 본격화하기도 전인 1968년부터 수산·건설·문교·후생·총무 등 5개 반으로 편성된 ‘새마을회’를 조직해 선착장과 호안시설, 마을회관, 경로당 등을 짓기도 했다.새마을회란 이름 때문에 정보과 형사들의 미행을 받는 등 곡절도 겪었다. “당시는 강원도 속초의 실향민촌 아바이마을에서 좌익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새마을회란 이름의 지하조직을 만들었다가 적발된 직후였다. 그것도 모르고 ‘새마을’이란 이름을 가져다 썼으니 기관의 의심을 살 만도 했다.”도시에선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낙후된 농촌에선 여전히 많은 주민이 끼니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했다.1973년 전씨는 우선 마을 소득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주민들을 설득해 ‘산돌 10만 덩이 줍기 운동’을 펼쳤다. 돌덩이를 갯벌에 투하해 굴 서식지를 만들 요량이었다.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굴 양식으로 마을의 벌이가 훌쩍 뛰었다. 이 공로 덕에 전씨는 5번의 장관 표창과 4번의 총리 표창에 이어 대통령 훈장까지 받았다. 전씨 집 거실에는 아직도 훈장을 달고 박정희와 찍은 사진과 함께 ‘국토통일’이란 박정희 친필 휘호가 걸려 있다.그 시절의 기억을 필생의 자랑거리로 간직해온 전씨지만 유신에 대한 평가만은 비판적이었다. “박정희는 대단한 애국자였다. 하지만 애국도 과하면 해가 되는 법이다. 아무리 안보가 흔들리고 경제가 불안해도 그런 식의 극약 처방은 하는 게 아니었다. 유신은 박정희의 최대 약점이다.”

“역사 속의 박정희 체제와 기억 속의 박정희 체제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권력의 중심에 있던 박정희라는 이름은 때로는 치유되지 않은 외상을 입힌 근원으로, 때로는 엄청난 치유 능력을 가진 샤먼 같은 존재감으로 우리 삶을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근식 서울대 교수(사회학)

공교롭게도 전씨가 청와대에 불려가 훈장을 받던 시각,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선 알몸의 오종상씨가 피투성이 신세로 죽음의 공포와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같은 유신의 비판자임에도, 두 사람의 비판이 동등한 무게를 가지기 힘든 이유다. 소개한 4명의 유신 체험 역시 그 시대의 전모를 보여줄 순 없다. 진실은 그 모두이거나, 그 사연들로 포괄하지 못한 빈 공간 어딘가에 숨어 있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사회학자 정근식(서울대 교수)의 지적은 새겨들을 만하다.

외상 입힌 근원, 샤먼 같은 존재감

“박정희 체제를 경험했던 사람들에게도 그것의 전체상은 뚜렷하지 않다. 어떤 위치에서 그것을 경험했는가에 따라 다른 상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 속의 박정희 체제와 기억 속의 박정희 체제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한국에서 군부독재 정권은 더 이상 재생될 가능성은 낮지만, 그 권력의 중심에 있던 박정희라는 이름은 때로는 치유되지 않은 외상을 입힌 근원으로, 때로는 엄청난 치유 능력을 가진 샤먼 같은 존재감으로 우리 삶을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박정희 통치기 주요 사건

-1961년 5월16일 5·16 쿠데타 발발, 7월3일 반공법 공포, 7월22일 경제기획원 신설
-1963년 12월22일 서독 광부·간호원 파견
-1964년 6월3일 6·3 사태 발발, 8월14일 1차 인민혁명당 사건 조작 발표
-1965년 2월 베트남 파병, 6월22일 한-일 협정 체결
-1966년 7월9일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체결, 9월15일 한국비료 밀수 사건
-1967년 6월8일 7대 국회의원 선거, 7월8일 동백림 사건 발표
-1968년 1월21일 김신조 등 침투 사건, 2월3일 푸에블로호 납북, 8월24일 통혁당 사건 발표, 12월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
-1969년 9월14일 삼선개헌안 날치기 통과, 10월17일 국민투표
-1970년 3월17일 정인숙 피살, 4월22일 새마을운동 제창, 6월2일 김지하 오적 필화, 7월7일 경부고속도로 전면 개통, 11월13일 전태일 분신
-1971년 8월10일 광주대단지 사건
-1972년 7월4일 7·4 남북공동성명, 10월17일 유신 체제 선포
-1973년 7월3일 포항종합제철 준공, 8월8일 김대중 납치
-1974년 1월8일 긴급조치 1·2호 발호, 4월3일 긴급조치 4호 발호, 7월13일 민청학련 사건 선고, 10월24일 (동아일보) 자유언론 실천 선언
-1975년 4월9일 2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 사형 집행, 4월30일 베트남전 종전, 5월13일 긴급조치 9호 선포, 5월20일 학도호국단 창설, 7월16일 사회안전법 제정,
            8월7일 장준하 의문사
-1976년 10월15일 박동선 코리아게이트 사건
-1978년 6월30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원
-1979년 8월11일 YH무역 여공 신민당사 농성, 10월16일 부마항쟁, 10월18일 계엄령 발포, 10월26일 박정희 사망, 12월12일 신군부 쿠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