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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23일 토요일

유신 사실상 사형선고, 박정희 복권 외칠 텐가


이글은 진실의길 2013-03-22일자 기사 '유신 사실상 사형선고, 박정희 복권 외칠 텐가'를 퍼왔습니다.
5.16과 유신 정당화 시도는 명백한 위헌 행위


긴급조치는 5.16쿠데타와 유신독재의 결정판이나 다름없다. 21일 헌법재판소는 긴급조치의 핵심인 1,2호와 9호가 위헌이라는 결정을 만장일치로 내렸다. 아무리 보수편향의 헌재라 할지라도 ‘긴급조치는 합헌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을 게다.
긴급조치는 1인 종신독재를 위한 ‘도깨비 방망이’
유신헌법 제53조를 근거로 긴급조치가 발동됐다. 대통령 1인의 판단에 의해 국정 전반에 걸쳐 긴급조치를 취할 수 있고(53조1항), 필요한 경우 헌법에 규정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제한할 수 있도록(2항) 돼 있다. 게다가 “긴급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아니한다”(4항)라고 못박아 무소불위의 초헌법적 권한을 갖도록 했다.
‘박정희 1인 독재’가 가능하게 만든 ‘도깨비 방망이’였다. 긴급조치 1호에는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와 비방,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할 수 없으며 법원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수색이 가능하다고 규정돼 있다.


긴급조치 위반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만든 게 긴급조치 2호다. 수사는 중앙정보부가, 재판은 법원이 아닌 비상군법회의가 맡도록 했다. 사법기능까지 파괴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고 있었을 때(1975년) 발동된 긴급조치 9호는 긴급조치의 ‘총정리판’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 비판과 정치활동의 금지, 언론의 폐간과 대학의 폐교, 해임과 제적 등을 멋대로 할 수 있었다.
사형, 투옥, 고문...희생자 수천 명
긴급조치는 종신 독재를 이어나가기 위한 수단이었다. 유신헌법에 등장하는 대통령의 위상은 절대왕정의 황제 그 이상이다. 국회의원의 3분의 1과 모든 법관에 대한 임명권을 행사할 수 있고,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국회 해산이 가능했다. 대통령 선출은 거수기나 다름없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이뤄졌다. 임기는 6년으로 횟수의 제한 없이 연임이 가능했다.


긴급조치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희생을 당했다. 총 589건이 기소돼 974명이 재판을 받아 사형을 당하거나 옥살이를 했다. 무고하게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간 사람이 수천 명에 이른다. 가장 악명이 높았던 긴급조치 4호(민청학련)의 경우 1024명이 수사대상에 올라 180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사형 9명, 무기징역 21명 등 이들에게 내려진 형량을 모두 합하면 1650년에 달한다.


아버지가 종신 독재를 위해 흉측한 유신헌법을 만들고, 긴급조치를 발동해 죄 없는 사람들을 마구 잡아들일 때, 그의 딸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당시 20대 중반이었으니 인식력과 판단력이 충분할 수 있는 나이였다.
당시 퍼스트레이디였던 박근혜, 그가 본 유신은?
청와대 밖에서 입법, 사법 등 모든 권한을 오직 1인에게 복속시키기 위한 사법살인이 자행되고 있었다. 민주헌정질서가 파괴되는 것을 눈 뜨고 볼 수 없어 항거하던 이들을 고문하는 비명소리가 진동했다. 바로 그 때 박 대통령은 청와대의 안주인이었다. 종신 독재를 완성하기 위해 광적으로 몸부림을 쳤던 아버지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봤을까.
이와 관련해 방송에 나와 소회를 밝힌 적이 있다. 청와대를 나온 지 10년만인 1989년 5월, 박근혜 육영재단 이사장이 MBC의 시사토론(‘박근혜씨, 아버지를 말한다’)에 출연한 것이다. 그 당시 유신에 대해 본인의 생각을 이렇게 피력했다.
“5.16과 유신은 매도당해 왔다...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런 왜곡된 역사(5.16과 유신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바로잡는 일이다...아버지는 자주국방과 자립경제를 이루기 위해 유신을 하셨다.”


긴급조치 위헌 결정, 사실상 ‘유신 사망확인서’
이후에도 이런 시각은 변하지 않는다. 2007년 대선 당시에는 “유신이 없이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변했고, 최근 들어 과거사에 대해 포괄적 유감의 뜻을 표하면서도 5.16은 쿠데타이고 유신은 위헌이라는 말은 결코 하지 않았다. 단지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얼버무렸을 뿐이다.
헌재가 긴급조치를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40년만에 긴급조치가 최종 사망선고를 받은 셈이다. 지난 2010년에도 대법원이 긴급조치 1호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지만 이번의 경우와는 다르다. 대법원의 판결은 해당 사건에 한하여 효력이 발생하지만 헌재의 결정은 법원의 선고에 구속력이 있어 관련된 사건 모두에 효력이 미친다.
하지만 헌재는 긴급조치의 근거가 되는 유신헌법 53조에 대한 판단은 유보했다. 법률의 위헌 여부를 가리는 것이 헌재의 역할일 뿐, 헌법 조항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건 곤란하다는 게 그 이유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유신헌법을 부정한 거나 다름없다.


유신 정당화가 목적인 박근혜의 ‘역사 바로 세우기’
헌재가 긴급조치 위헌 여부를 1974년 당시 헌법인 ‘유신헌법’에 비춰 판단했더라면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긴급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아니한다(53조4항)”는 규정 때문이다. 그러니 헌재의 위헌 결정은 이 조항과 이 조항을 포함하는 유신헌법을 부정한 것이 된다. 유신헌법을 무시하고 현행 헌법을 기준으로 판단했다는 얘기다.
헌재가 ‘유신헌법 53조는 위헌’이라고 명시하지 않았어도 이번 결정만으로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은 셈이다. 긴급조치가 국민의 기본권과 국민주권주의를 크게 침해했다고 판단한 헌재에 의해 유신헌법이 사실상 사법적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박 대통령이 입을 열어야 한다. 유신이 매도당해 왔고, 유신 없이는 대한민국도 없었을 거라는 주장과 대척점을 형성하는 헌재 결정이 나왔다. 매도당한 게 아니란다. 국민의 기본권과 민주질서의 근간을 훼손한 ‘악법’이란다.

▲위헌 결정을 환영하고 있는 긴급조치 피해자 대책위 관계자들(출처: 경향신신문)

잘못된 역사, 범죄행위...정당화할 수 없다
헌재의 결정에 따르려면 박 대통령 자신이 주장해 온 '역사 바로 세우기’에 대한 미련을 접어야 할 것이다. 헌재의 긴급조치 위헌 결정에 담긴 의미가 무언가. 박정희가 만든 역사는 잘못된 것이며, 그가 한 통치행위 중 상당부분은 범죄에 해당한다는 것 아닌가. ‘유신이 매도당해 왔으니 역사를 바로 세워야한다’는 주장을 더 이상 해서는 안 된다. 잘못된 역사와 범죄행위를 정당화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의 개인 변호사였던 김재원 새누리당 의원이 한 말이 있다. “박근혜 후보가 정치를 시작한 이유는 바로 박정희 대통령의 복권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서 ‘복권’은 ‘5.16과 유신을 정당화하는 역사 세우기’를 의미한다.

유신헌법과 긴급조치가 헌재로부터 사실상 사형선고와 사망 확인을 받았다. 그래도 ‘박정희 복권’과 ‘뉴라이트식 역사 세우기’를 주장할 텐가?

육근성

2013년 3월 12일 화요일

“과다노출 범칙금, 유신 때 복장단속 연상”


이글은 경향신문 2013-03-11일자 기사 '“과다노출 범칙금, 유신 때 복장단속 연상”'을 퍼왔습니다.

ㆍ과도한 국민 통제 논란… “노출 기준 뭐냐” 논쟁도ㆍ경찰 “처벌 수위 낮춘 것”

정부는 11일 박근혜 대통령 주재로 처음 열린 국무회의에서 ‘과다노출’ 행위에 5만원의 범칙금을 부과하는 내용을 담은 경범죄 처벌법 시행령을 심의·의결했다. 경찰은 계도기간을 거쳐 내달부터 단속에 돌입할 계획이다. 

이 같은 결정이 알려지자 시민들 사이에 논란이 일고 있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과도한 국민통제인 ‘복장단속’이 연상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어느 정도 벗어야 ‘과다노출’에 해당하느냐를 두고 논쟁도 벌어지고 있다.

이날 포털사이트 다음 토론방 아고라에는 과다노출 범칙금 부과에 대한 토론방이 개설돼 순식간에 수백개의 댓글이 달렸다. 

한 누리꾼은 트위터에서 “어느 정도가 과다노출인가. 명확한 기준도 없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가”라며 의구심을 나타냈다. 

다른 누리꾼은 “1970년대 유신시대 때 거리에서 자를 대고 미니스커트를 단속하던 것이 떠오른다”며 “한여름에 긴팔, 긴바지만 입고 다녀야 되나”라고 말했다. “이러다 장발단속까지 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하는 누리꾼도 있었다.

경찰은 경범죄상 과다노출 처벌 조항은 이전에도 있었고, 지난해만도 167명이 단속됐다고 항변했다. 지금까지는 과다노출로 적발되면즉결심판에 부쳐져 법원에 직접 출석해 판결을 받아 10만원 이내의 벌금을 물도록 돼 있었다. 

경찰은 “이번 개정으로 과다노출에 적발된 사람은 법원에 직접 가 즉결심판을 받는 대신 금융기관에 범칙금만 내면 돼 오히려 처벌 절차가 간소화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누리꾼은 “과거에는 즉결심판이라는 절차가 있어 경찰이 과다노출 단속에 신중했을 측면이 있을 텐데, 앞으로는 간단히 범칙금 ‘딱지’만 떼면 돼 단속이 남발될 우려도 있다”고 말했다.

이번 개정안에는 과다노출로 처벌받는 사람을 ‘여러 사람의 눈에 뜨이는 곳에서 공공연하게 알몸을 지나치게 내놓거나, 가려야 할 곳을 내놓아 다른 사람에게 부끄러운 느낌이나 불쾌감을 준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른바 ‘바바리맨’(여성들 앞에서 바바리코트를 벗어 자신의 신체 일부를 보여주는 남성) 같은 사람은 경범죄가 아니라 주로 공연음란죄가 적용된다. 형법상 공연음란죄는 남녀의 성기 등을 노출시킨 경우로 1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게 돼 있다. 

경찰 관계자는 “1명을 상대로 성기 등을 노출하면 경범죄로 처벌되지만 여러 명 앞에서 그런 행위를 하면 공연음란죄가 적용된다”고 설명했다.

이번 경범죄 처벌법 시행령 개정안에는 과다노출 외에도 암표매매, 스토킹(지속적 괴롭힘), 지문채취 불응, 무임승차, 구걸 등 28개 경범죄에 대해 새로운 범칙금을 정했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는 트위터에서 “과다노출, 지문채취 불응, 무임승차 등 경범죄 처벌법 조항의 상당수는 형법과 겹치고, 나머지는 행정처분 등으로 충분히 규율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은 “국민에 대한 과도한 침해이자 통제”라며 “시대를 거꾸로 가는 듯한 발상”이라고 말했다.

논란이 일자 경찰은 “과거 복장단속을 했던 군사정권 시절처럼 짧은 치마나 야한 옷을 막무가내로 단속한다는 뜻이 아니다”라며 “기존 단속 대상인 ‘속이 들여다보이는 옷’도 삭제하는 등 처벌 요건을 완화했다”고 말했다.

(박홍두·이성희 기자 phd@kyunghyang.com)

2013년 3월 2일 토요일

박 대통령, 5·16과 유신 비판을 허하라


이글은 경향신문 2013-03-01일자 기사 '박 대통령, 5·16과 유신 비판을 허하라'를 퍼왔습니다.

“직답을 못하는 이유를 이해해 달라.”(서남수 교육부 장관 후보자) 

박근혜 정부 초대 장관 후보자들이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조차 분명히 말하지 못하는 ‘자기검열’에 빠져들고 있다. 국무위원이란 공적 신분으로 역사에 기록될 인사청문회 석상에서 헌법적 판단이 내려진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입장 표명을 줄줄이 유보하고 있다. 뚜렷한 소신이나 논리, 이유도 없다. 그저 “어렵다. 이해해 달라”는 무책임한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서남수 후보자의 입장 표명 유보는 다른 어떤 후보자보다 심각하다. 교과서 제·개정 책임을 가진 교육부 장관은 헌법정신을 바탕으로 역사를 지킬 가장 앞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벌어진 교과서 수정 파동 같은 ‘역사 후퇴’나 왜곡을 우려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5·16 군사정변의 법적 실체에 대한 답변을 수차례 회피한 황교안 법무부 장관 후보자도 마찬가지다.

장관 후보자들의 이런 모습들에선 5·16을 “구국의 혁명”이라고 했던 박 대통령의 영상이 어른거린다. 장관 후보자들이 박 대통령을 의식했기 때문에 벌어진 시대착오적인 ‘자기검열’이란 것이다. 이명박 정부 과오엔 소신 발언을 하던 후보자들이 박 대통령 관련 문제엔 입을 닫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박 대통령 눈치보기는 공무원 조직 전체에 파급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이는 박근혜 정부에서 우려되던 ‘역사의 후퇴’가 현실화하는 기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그런 조짐들도 보인다. 육군 수도방위사령부는 ‘1·21 무장공비 침투 사태’ 기념행사를 전례없이 대대적으로 했다. 박 대통령 스스로도 연일 ‘제2의 한강의 기적’을 강조하고 있다. 박정희 시대의 ‘공(功)’은 살리더라도, 그 ‘과(過)’를 역사의 장막 뒤로 가리려는 것은 불온한 도전이다.

역사의 궤도 이탈을 막는 출발점은 결국 결자해지, 박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9월 5·16 논란이 커지자 “5·16과 유신, 인혁당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사과했다. 그것이 대선 표를 의식해 마지못해 한 것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장관 후보자들, 아니 새 정부 인사 누구에게라도 5·16과 유신 비판을 ‘허(許)’해야 한다. ‘5·16 비판을 허하라.’

김진우 기자 jwkim@kyunghyang.com

2013년 2월 25일 월요일

정홍원 "유신은 헌법가치 파손시킨 반민주적 조치"


이글은 대자보 2013-02-20일자 기사 '정홍원 "유신은 헌법가치 파손시킨 반민주적 조치"'를 퍼왔습니다.

정홍원 국무총리 후보자는 유신헌법에 대해 "헌법 가치를 파손시킨 반민주적인 조치였다"고 밝혔다.

정 후보는 20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를 통해 '유신헌법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민주통합당 전병헌 의원의 물음에 이같이 답했다.

정 후보는 또 '5·16은 쿠데타냐 군사혁명이냐'는 민주당 민병두 의원의 질문에 대해서도 "군사정변으로 교과서에 기술돼 있고 저도 찬성한다"고 말했다.

정 후보는 또 미 중앙정보국 자문위원 경력을 가진 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에 대해 "전체적으로 큰 그림에서 이해해주고 봐달라"며 "지켜봐달라"고 당부했다.

정 후보는 "앞으로 창조경제 실현하기 위해 국제적 마인드를 가진 인재를 영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국익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지켜봐달라"고 주문했다.

정 후보는 이와 함께 '이명박정부 때 정연주 전 KBS 사장이 쫓겨났다. 박근혜정부에서는 일어나지 않겠느냐'는 민주당 최민희 의원의 질의에는 "상상이 안된다"고 밝혔다.

정 후보는 그러면서 이명박정부에서 발생한 해직언론인 문제에 대해서도 "정부가 과연 개입할 수 있는지, 있다면 어떤 것인지도 살펴보겠다"고 말했다.

조근호

2013년 2월 16일 토요일

강남은 박정희 덕분에, 박근혜는 강남 덕분에…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3-02-15일자기사 '강남은 박정희 덕분에, 박근혜는 강남 덕분에…'를 퍼왔습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건설과 분양은 강남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29)영동 구획정리사업
제3한강교, 남산1호터널, 8학군…
박정희의 강남 몰아주기는
돈 가진 자들을 죄다 이끌었다
정부는 막을 이유가 없었다
땅주인에게 공공용지를 받아
개발비용과 정치자금을 만들었다

“거기 땅 한평 안 사고 뭘했느냐
”자식들은 성실히 일만 하는
부모가 원망스러웠고
부모는 강남 부자가 부러웠다
투기공화국이 된 대한민국은
곧 박근혜정부 출범을 맞이한다

대한민국은 강남공화국이다. 어느샌가 그렇게 되어버렸다. 밤이고 낮이고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강남의 역사는 유신과 함께 본격화되었다. 박정희가 제멋대로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 기능을 정지시키며 유신이란 친위쿠데타를 단행하던 바로 그 무렵만 해도 강남은 한갓진 농촌 마을이었다. 1970년대에 사람들은 그곳을 강남보다는 ‘영동’이라고 더 많이 불렀지만, 이제 영동이라는 말은 차츰 사라져 가고 있다. 영동은 영등포의 동쪽이라 붙여진 이름인데 ‘부티’ 나는 강남사람들로서는 ‘싼티’ 나는 영등포에서 유래한 이름을 달고 살기 싫었던 모양이다. 예로부터 몇몇 임금들이나 실력자들은 왕조의 중흥을 위해 수도를 옮기는 ‘천도’ 정치를 시도했다. 백제가 웅진으로, 사비로 계속 천도한 것은 꼭 고구려의 남진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려시대 묘청이 서경 천도를 꾀하다가 좌절한 것은 수도 개경에 기반을 둔 기득권층의 반발 때문이었다. 이성계가 새 왕조를 세우고 한양 천도를 단행한 것도 고려의 권문세족의 영향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에서였다. 그로부터 600년, 서울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가벼이 여기고 ‘감히’ 신행정수도 건설을 추진한 노무현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성계의 한양 천도 같은 물리적 조치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박정희가 강남 개발을 시작한 지 불과 40년 만에 강남은 대한민국의 중심지가 되었고, 오리와 기러기가 노닐던 모래땅에 세워진 현대아파트는 대한민국 신분 상승의 종착역이 되었다.

오늘날의 강남불패는 ‘박정희 스타일’

행정수도 건설조차 받아들이지 않는 기득권층을 대변하여 헌법재판소는 관습헌법이라는 희한한 억지논리를 내세워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어야 한다는 엄청난 역사적 규범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안다. 거기서 서울은 강남이라는 것을! 껍데기는 가라! 600년 관습헌법을 들먹였지만 서울의 껍데기는 한양이다. 한양이라는 말 자체가 한강 이북을 뜻하는 것이니, 한양은 강남을 껴안을 수 없다. 박정희가 선택한 땅으로 유신과 함께 성장한 강남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듯했던 유신을 오늘에 되살려 놓았다. 박정희가 자행한 ‘공포의 정치’는 역사발전 속에 어쩔 수 없이 힘을 잃었지만, 박정희가 깔아놓은 ‘욕망의 정치’는 독재자의 딸을 대통령으로 끌어올렸다.1963년 1월1일을 기하여 서울은 인근 지역을 흡수하여 그 면적이 2배 이상 늘어났다. 오늘날의 강남 지역은 이때 서울로 편입되었는데, 1963년 말 상주인구조사에서 현재의 강남구에 해당하는 지역의 인구수는 1만4867명, 오늘날의 서초구에 해당하는 지역의 인구수는 1만2069명에 불과했다. 서울시는 1966년 초 제3한강교(한남대교)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강남 지역의 인구가 얼마 되지 않는데도 제3한강교 건설에 착수한 것은 도시개발이나 경제적 이유보다는 군사적 필요에서였다. 한국전쟁의 총성이 멈춘 지 아직 15년이 되지 않았던 시절, 전쟁 발발 3일 만에 이승만 정부는 한강다리를 끊고 도망했고, 서울시민들은 꼼짝없이 석 달간 인민군 통치 하에 남겨진 기억은 너무나 선명했다. 서울의 인구는 1950년에 비해 2.5배 늘었지만 한강의 다리라고는 한강인도교와 광진교 외에 1965년에 완공된 제2한강교(현재의 양화대교) 하나만 더 늘었을 뿐이었다. 그나마 제2한강교는 전쟁 발발 시 군 작전용으로만 쓰이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유사시 서울시민들이 어떻게 강을 건널 것이냐 하는 문제는 정부 당국의 큰 걱정거리였다.지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박정희는 당시 대한민국의 주요기능이 서울(그때는 당연히 강북이었다)에 집중되는 것을 크게 우려했다. 군 출신인 박정희는 강북에 국가의 주요기능이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만약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전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이후 남북의 긴장이 급속히 고조되더니, 1968년 1월21일 이북 특수부대의 청와대 습격 사건이 일어났고, 1월23일에는 미국의 최신예 첩보함 푸에블로호가 이북에 끌려가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강남 개발이 시작된 데는 교통난, 주택난 같은 현실적인 요인뿐 아니라 안보 불안감도 크게 작용했다. 특히 1975년 4월과 5월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 3국이 차례로 공산화된 것은 정부와 서울 시민의 안보 불안을 부추겼고, 서울 상류층의 강남 이주를 촉진했다. “아직도 강북에 사십니까”라는 인사말도 급속히 퍼져 나갔다.한국에서 부동산 투기가 본격화되기 직전인 1966년, 말죽거리 즉 지금의 양재동에서는 꽤 괜찮은 땅 한 평의 값이 300원에 불과했다. 그때의 짜장면 값은 30원. 지금까지 짜장면 값이 한 150배 정도 오르는 동안, 말죽거리 땅값은 평당 3000만원 이상으로 10만배가 넘게 올랐다. 자고 일어나면 수십배씩 땅값이 오르던 시절, 말죽거리에 땅을 사놓은 사람들에게 한국현대사는 그야말로 ‘말죽거리 신화’였다. 그러나 거기 땅 한 뼘 갖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무섭게 땅값이 치솟아 오르는 한국현대사는 ‘말죽거리 잔혹사’였다. 이 기막힌 일은 불과 한 세대 사이에 벌어졌다. 정부에 부동산 폭등을 막지 못한 책임만을 묻는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 순진한 일인지도 모른다. 1970년대의 중앙정부나 서울시는 때로는 부동산 투기의 주역이었고, 대부분의 경우 공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는 처지였다.

청와대와 서울시의 대선자금 마련 작전

정부가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이나 강남 개발과 같은 굵직굵직한 사업을 특별한 개발 비용을 들이지 않고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이른바 체비지 장사를 통해서였다. 예컨대 내가 강남에 땅이 1000평 있을 때 내 땅 500평을 도로용지로 내놓는다면 재산의 50퍼센트가 감소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도로가 난 뒤 땅값이 두 배 뛰었다면 땅값을 기준으로 볼 때 절반을 내놓고도 나는 손해 본 것이 없게 된다. 만약 땅값이 10배 올랐다면 나는 땅 절반을 내놓고도 큰 이익을 보게 된다. 정부나 시가 도로를 내는 데 내가 내놓은 땅 500평을 다 사용하지 않고 250평만 사용했다면 나머지 250평이 체비지인데, 개발사업의 시행자는 이 체비지를 팔아 개발비용을 충당한다. 강남 개발의 다른 이름인 ‘영동 구획정리사업’은 체비지 매각대금을 재원으로 하는 특별회계로 추진된 사업이었다. 이런 방식은 정부로 하여금 공공투자를 하지 않고도 도시기반시설을 만들 수 있게 해주지만, 체비지가 팔리지 않는다면 사업 자체가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되는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러니 체비지를 팔아 개발비용을 마련해야 했던 정부로서는 땅값 상승을 원할 수밖에 없었고, 서울시 간부들 중에서는 체비지를 잘 파는 사람이 유능한 간부로 평가받았다. 서울시가 발 벗고 땅장사를 하는 상황에서 부동산 투기는 규제의 대상이 아니라 사실상 조장의 대상이었다.1970년대에 서울시 도시계획국장, 내무국장 등 요직을 지낸 손정목 교수는 (서울도시계획이야기)(제3권)에서 1971년 4월의 대통령 선거에 대비하여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의 지시로 서울시 도시계획과장 윤진우가 1970년 강남의 토지를 사고팔아 수십억원의 정치자금을 조성하여 바친 사실을 매우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윤진우는 서울시장 김현옥과 함께 육군 헬리콥터로 과천에서 송파에 이르는 강남 일대를 돌아본 뒤, 박종규에게 불려가 “가장 장래성 있고 투자가치가 있는” 곳의 땅을 사 모으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탄천을 경계로 그 서부지역 일대” 즉 오늘의 강남구가 된 지역의 땅을 청와대가 제공한 자금으로 사 모아 땅값이 어느 정도 상승하면 되팔아서 자금을 조성했다. 손정목이 확실한 자료에 근거하여 실명까지 밝혀가며 기술한 사례 외에 청와대 수준에서 개입한 것이 얼마나 더 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 권력 주변에서 개별적인 차원에서 강남 일대의 땅을 사고팔아 큰돈을 번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정부는 덩치가 큰 강남의 체비지를 처리하기 위해 카바레 등 대규모 유흥업소를 강남으로 이주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서울의 유흥가의 중심이 제3한강교를 건너 신사동 일대로 옮겨가게 되었다. 서울 도심에서 강남을 연결하는 남산 1호터널은 강남으로 향하는 한량과 취객들에게 큰 편의를 제공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강남은 소비생활과 대중문화의 새로운 중심으로 등장했다. 1979년 발표된 혜은이의 ‘제3한강교’는 “어제 처음 만나서 사랑을 하고 우리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밤이 새면은 첫차를 타고 이름 모를 거리로 떠나갈 거예요”라고 노래했다. 이미 우리의 세태에는 ‘원 나이트 스탠드’가 퍼지기 시작한 것이지만 고지식한 당국은 어떻게 처음 만나 하나가 되냐며 이 노래를 금지시켰다. ‘제3한강교’는 “어제 ‘다시’ 만나서 사랑을 하고”로 가사를 바꾼 뒤에야 금지곡에서 풀렸다. 대중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의 공간도 ‘돌아가는 삼각지’나 ‘안개 낀 장충동 공원’에서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나 ‘신사동 그 사람’, 윤수일의 ‘아파트’같이 강남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곳으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 지하철 2호선이 원래의 노선을 변경하여 강남을 지나는 순환선으로 설계 변경된 것은 허허벌판 강남으로의 인구 유입을 크게 부추겼다. 1970년대에는 통행금지가 있었다. 북적북적하던 강남도 밤 11시가 넘으면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강남이 저녁시간만 반짝 화려한 공간으로 그치지 않으려면 사람들이 와서 살아야 했고, 사람들을 이주시키려면 무엇보다도 강남에 좋은 학교가 와야 했다. 한국 최고의 명문 경기고등학교는 강남의 동쪽인 삼성동으로 이사했고, 두번째로 좋은 서울고등학교는 강남의 서쪽 방배동에 자리잡았다. 이것이 바로 명문 8학군의 시작이다. 8학군이 왜 좋은가, 부자가 많이 살아서이다. 부자는 왜 8학군을 좋아하는가, 학군이 좋아서이다. 다시, 8학군은 왜 좋은가, 부자가 많이 살아서이다. 또다시 물어보자. 부자는 왜 강남으로 가는가, 학군이 좋아서이다. 이 짓을 30년 넘게 해오며 부동산과 사교육의 쌍끌이로 쌓아 올린 것이 그 누구도 허물 수 없는 강남공화국의 위엄이다.

명문 8학군, 그리고 고급 현대아파트

978년 현대아파트의 건설과 분양은 강남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지금이야 래미안이다, 푸르지오다, 자이다 하는 식으로 심하게 우아 떠는 아파트 이름이 많아졌지만, 1970년대만 해도 마포아파트, 한강맨션 하는 식으로 아파트에 동네 이름을 붙였다. 현대아파트는 처음으로 브랜드 이름을 붙인 최고급 아파트였다. 현대에서는 아파트를 지을 때 절반은 사원용으로 한다고 허가를 받고서, 이를 힘깨나 쓰는 자리에 있는 공무원이나 언론인들에게 특혜 분양한 것이다. 물론 공무원이나 언론인들은 분양가를 지불하고 아파트를 분양받았지만, 당시 현대아파트에는 평수에 따라 4천만~5천만원이라는 어마어마한 프리미엄이 붙었다. 당시에도 법원은 가진 자의 편이어서 프리미엄은 뇌물이 아니라는 기막힌 판결을 내렸다. 법원이 이렇게 특혜분양을 받은 자들의 명예를 지켜주었기에, 국민들의 속은 썩어 문드러져 갔다. 당시 특혜분양을 받은 사람들 중 공직자는 190명, 언론인은 37명이었는데, 13년이 지난 김영삼 정권 시절 흔히 수서 비리라 불리는 수서지구 특혜분양 사건이 터져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이 재조명되었을 때 (한겨레신문) 1991년 3월2일치 보도에 의하면 건설부장관 등 현직 장관만 다섯명이나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관련자였다고 한다. 현대가 유망한 관료를 족집게처럼 골라 특혜분양을 준 것일까, 아니면 한국 사회의 엘리트층에 이런 특혜 심리가 만연한 것이었을까.강남이 개발되어 아파트가 솟아오르며 우리네 삶도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기름보일러는 주부들을 연탄에서 해방시켜 주었고, 세탁기는 빨래에서 해방시켜 주었고, 간편한 현관 잠금장치는 시간이 많아진 주부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게 해주었다. 백화점에는 문화센터가 넘쳐났고 주부들은 서예도 배우고 운전도 배우기 시작했다. 아파트의 구조도 변화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부엌 옆에는 입주 식모가 자는 조그만 방이 따로 있었는데, 이제 농촌에서도 빠져나올 인구가 다 빠져나온데다가 입주 식모 대신 시간제 파출부를 선호하게 되면서 한국에만 있던 식모방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그러나 이런 변화는 강남 개발이 가져온 심각한 영향에 비하면 지극히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강남은 한국 사회에 빈부격차의 진원지였다. 유신 이전에 널리 불린 건전가요에 ‘잘살아 보세’가 있다. “잘살아 보세 잘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라는 노래를 부르며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면 잘살 수 있는 길이 열리리라 믿었다. 다들 열심히 일했지만, 차이는 땅을 샀느냐, 특히 강남에 땅을 샀느냐에서 갈렸다. 다 같이 잘살아 보세가 아닌 나 혼자 잘살아 보세로 세상은 급격히 바뀌어갔다. 강남불패의 신화, 또는 부동산 투기란 지난 수십년간 우리가 이룬 경제성장의 성과를 특정지역에 일정 규모 이상의 땅을 가진 자들이 빨대 꽂아 쪽 빨아먹어 버린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들은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강력한 수구세력을 형성했다. 더 큰 문제는 열심히 살아온 우리의 형제들이 그들을 너무도 부러워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하, 우리 사회에서 잘나가는 사람들은 저렇게 살고 저렇게 돈 벌었구나”를 깨달으며 우리는 정의고 나발이고 돈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워갔다. 많은 젊은이들은 성실하게 살아온 부모들을 그때 뭐했냐며 원망하기 시작했다. 오직 판결로만 말한다는 거룩한 사법부는 돈이 곧 정의라고 가르쳐 주었다. 십여년 전 마봉춘이 제정신이던 시절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투기의 뿌리 강남공화국’ 편을 연출한 유현 피디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 때 불법으로 사람 잡아다가 고문하고 때리고 한 거 용서할 수 없는 짓입니다. 그런데 이 프로를 만들고 보니까 그보다 더 나쁜 것은 모든 사람들이 투기를 꿈꾸게 만드는 사회구조, 도덕이나 근면 따위는 ‘웃기는 짜장’으로 만들어버리고 불로소득, 일확천금을 꿈꾸게 만드는 사회구조, 또 그 사람들이 더 높은 아파트를 쌓고, 타워팰리스를 쌓아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고 호의호식하는 사회구조를 만들어버린 것이 오히려 박정희, 전두환에게 더 준엄하게 따져 물어야 할 죄악이 아닐까요?” 유신은 이렇게 오늘을 지배하고 있다.

2013년 1월 22일 화요일

쌍차 다룬 ‘다큐3일’, 방송 전 과도한 심의 논란


이글은 미디어스 2013-01-21일자 기사 '쌍차 다룬 ‘다큐3일’, 방송 전 과도한 심의 논란'을 퍼왔습니다.
새노조 “황우섭 심의실장, 철탑 장면 빼라 요구…유신, 5공 시절 검열 행위”

쌍용차 노동자들의 철탑 농성과 심리치유센터 ‘와락’을 다뤄 화제가 된 (다큐멘터리 3일)이 방영 막판까지 철탑 농성, 자살에 관련된 내용을 빼라는 등 윗선의 압박을 받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 20일 방영된 KBS 다큐3일 ‘다시 와락! 벼랑 끝에서 희망 찾기’편

KBS 새노조는 21일 ‘사상초유의 검열 만행, 황우섭은 물러나라’는 성명을 내고 삭제를 요구한 황우섭 심의실장을 비판했다.
새노조는 “황우섭 심의실장이 철탑 농성이나 자살에 관한 내용을 빼라고 요구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다큐 3일)에서 왜 이 소재를 다루냐며 담당 간부들을 압박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이어, “방송 전날(19일)인 토요일 아침 심의위원들을 불러내 이례적으로 ‘다중심의’를 열게 했지만 문제없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설명했다.
새노조에 따르면 황우섭 실장은 심의 과정에서 징계를 위해 열리는 ‘심의지적평정위원회’ 소집까지 요구했다. 새노조는 “프로그램 관련자들이나 심의위원들은 아무도 문제 없다고 하는데 심의실장 혼자 생떼를 쓰며 프로그램을 비방한 것”이라며 “이쯤 되면 이건 심의가 아니라 유신이나 5공 시절의 사전 검열 행위나 마찬가지”라고 강력 비판했다.
‘다시 와락! 벼랑 끝에서 희망 찾기’를 만든 정찬필 PD는 21일 (미디어스)와 통화에서 “그 사안은 저한테 직접 얘기된 것이 아니다”라면서 “심의실 내부에서 그렇게 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의견을 냈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정찬필 PD는 “한 다리 거쳐 그런 일이 있었다고 들은 정도”라고 설명했다.
2011년 10월 ‘와락’ 센터를 설립해 ‘와락’과의 인연이 남다른 정혜신 박사가 (다큐 3일)에 등장하지 않는 것에 대해 묻자 정찬필 PD는 “(꼭 정혜신 박사가 들어가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정찬필 PD는 “우리 프로그램 특성 자체가 3일 동안 벌어지는 현장에서의 촬영이 중심이지, 인위적으로 사람을 넣고 빼고 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만약 촬영 기간에 (센터에) 있었다면 당연히 얘기가 됐을 것”이라고 전했다.
(다큐 3일)에 문제를 제기했다는 황우섭 심의실장과 몇 차례 통화를 시도했으나 황우섭 실장은 받지 않았다.
20일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 3일) ‘다시 와락! 벼랑 끝에서 희망 찾기(CP 이재혁, PD 정찬필, 글․구성 석영경)’에서는 2009년 벌어진 쌍용차의 대량 해고 사태를 다뤘다. (다큐 3일)은 쌍용차 노동자들과 가족들의 치유를 위해 2011년 10월 지어진 심리치유센터 ‘와락’을 중심으로 60일 넘게 철탑 농성을 하고 있는 해고자들, 스스로를 ‘정신병자’라고 일컫는 무급 휴직자들 등을 카메라에 담았다.
‘다시 와락’ 편은 방송 뉴스에서조차 잘 다뤄지지 않는 쌍용차 문제를 담담하게 풀어내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트위터리안들은 “KBS 다큐멘터리 3일 팀 고맙습니다. 당신들 덕분에 울고 웃습니다”, “쌍용자동차 모든 해직자 분들과 그 가족분들을 응원합니다 ㅠㅠ 힘내세요 ㅠㅠ 이 추운 겨울도, 아픈 시간도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네요ㅠㅠ” 등의 트윗으로 쌍용차 해고자 및 가족을 응원했다. 

▲ ‘다시 와락! 벼랑 끝에서 희망 찾기’에서는 철탑 농성 중인 노동자들을 다루기도 했다. 사진은 점심 배달하러 온 아내와 통화하는 노동자의 모습

김수정 기자  |  poorenbyul@mediaus.co.kr

2012년 12월 13일 목요일

유신’하면 ‘김유신’은 안다는 2030들에게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12-12일자 기사 '유신’하면 ‘김유신’은 안다는 2030들에게'를 퍼왔습니다.
[장행훈 칼럼] 19일 대선, 보수와 반동의 아마게돈

한국 현대사학자인 성공회 대학의 한홍구 교수가 8일자 한겨레에 게재한 글 “유신과 오늘”에서 19일 있을 대통령선거를 “박정희의 네 번째 선거”라고 이름 붙였다.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한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아버지가 악명 높은 유신체제로 한국의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유신독재에 항거해서 수많은 대학생들이 투신자살할 때, 유신의  퍼스트에이디였다. 정신적으로 유신을 계승한 박정희의 분신이다. 박근혜 후보는 정신적으로 박정희의 아바타다. 박근혜의 당선은 유신의 망령을 불러올 수 있다. 한 교수가 박근혜가 출마한 대선을 “박정희의 네 번째 선거”라고 이름 붙인 이유이다. 이번 대선은 과거의 대선과 비교해서 다른 점이 두 가지가 있다. 87년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선거가 양자대결 구도로 치러지고 있는 것이 그 하나이고 또 하나는 보수와 진보가 둘로 딱 갈라져 대결하고 있는 선거라는 것이다. 그래서 19일 대선은 한국의 민주세력 대 반동(reaction)보수의 아마게돈(대결전)의 성격을 띄고 있다. 박근혜는 종편을 허용하는 날치기 미디어법에 찬성했다. 그 가 당선되면 언론자유는 위축될 것이다. “복지”는 나아질지 모르나 인권과 민주주의는 후퇴할 것이다. 선거를 통한 보수 진보의 정권교체는 이번 대선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한국의 민주주의와 관련해서 이번 선거가 갖고 있는 중요한 의미다. 민주세력,  특히 2030 세대가 새겨야 할 위험이다.
유신을 체험해 보지 않은 2030 세대는 ‘유신’이라는 말도 들어보지 못하고 자랐다. 그래서 2030 세대는 유신을 아느냐고 불으면 김유신은 안다고 대답한다고 한다. 영화 ‘유신의 추억’에 나오는 일화다. 그러나 유신을 체험한 세대는 ‘유신’이 경제개발이라는 미명아래 영구집권을 노리는 박정희가 얼마나 반민주적이고 반인륜적인 범죄를 자행했는지를 직접 보고 몸으로 체험했다. 다시 한홍구 교수의 말을 빌리면 “유신세력이 이번 대통령선거를 과거세력과 미래세력의 대결이라면서 자신들을 지지해달라고 하는데 이르러서는 그냥 웃어넘길 수 없는 모멸감을 느낀다.“
역사는 진보와 반동이 밀고 밀리면서 전진한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민주혁명에 반대하는, 얼마나 많은 기득권 보수 세력의 반동이 있었는가? 그러나 역사의 큰 흐름은 대중이, 인민이 결정했다. 왜? 그들이 99%이니까. 하지만 역사를 통해 돈 많은 1%가 돈으로 언론을 장악하고 조종해서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일이 종종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세계의 미디어황제 루퍼트머독을 들 수 있다. 그는 영국에서 신문과 방송을 장악하고 언론을 통해 돈을 벌고 정치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언론의 선거지원을 무기로 정권과 거래하고 권언유착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챙기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는 임명장 없는 영국의 각료로 불린다. 폭스 뉴스 TV를 통해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선발에 개입해서 공화당 정권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지금 한국에서도 “머독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MB정권이 종편 허가를 통해 조중동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낙하산 사장 임명을 통해 공영방송을 조종하고 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이번 대선에서도 박근혜 후보 당선을 위해 방송보도에 개입해서 방송기자들이 항의하고 있다. MBC는 노골적으로 박근혜 후보를 지원한다. 언론윤리 같은 것은 그들 떠 보지도 않는다. 박근혜 후보는 흐뭇해한다. 170일의 파업을 끝내기 위해  MBC기자 노조와 한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박근혜는 말과 신뢰를 중시한다는 것도 다 헛말이다.

지금 KBS는 기자들이 박근혜 후보에 대한 검증을 ‘제대로’ 했다는 이유로 여당추천 이사들이 들고 일어나 검증을 정직하게 한 대선후보 검증단 책임자가 사의를 표하고 잠적했다. 이에 항의해서 기자들이 제작을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KBS사상 초유의 사건이다. 공영방송을 제대로 하겠다는 기자들의 기자정신을 모독하는 정권의 방송개입에 대한 항의다. 이명박 새누리당 정권은 너무나  뻔뻔하게 공영방송 KBS를 정권의 선거 선전도구로 이용하고 있다. 정권의 방송개입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국민들, 특히 2030 스마트폰 세대들이 미국 오바마 지지자들처럼 SNS를 통해 민주주의 후보를 지원하고 투표에 적극 참여하는 길을 개척해야 할 때다.
선거일이 가까워 오면서 진보 보수 양쪽 모두 세력 집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박근혜 후보 쪽은 이회창 이인제 박세일 등 보수 세력을 총집결한 데 이어 DJ측근인 한광옥 한화갑까지 끌어들였다. 새누리당은 공구리(콘크리트) 지지표를 자랑하지만 그 수가 45%를 넘지 못하여 초조한데 정권교체를 원하는 유권자는 50%를 훨씬 넘어 불안해하고 있다. 신문시장을 70% 이상 지배하고 있다는 조중동이 친MB 보도로 일관하고 낙하산 사장을 통해 KBS MBC YTN 등 텔레비전을 장악하고 있는데도 이명박 새누리 정권에 대한 여론은 ‘적대적’이다.

진보 쪽도 단합하고 있다. 6일 결성된 ‘국민연대’가 그 상징이다. 박근혜 후보 쪽은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전 후보의 이간을 꽤한다. 박근혜는 “이념이 다른 사람들이 정권을 잡으면 권력다툼으로 허송세월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처음부터 이명박의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는데 생각이 똑 같았다. 단일화 협상을 마치 정권 나눠먹기 거래처럼 이야기 하는 것은 설득력 없는 모략이다. 아무튼 한국의 보수와 진보가 완전히 둘로 갈라서서 아마게돈을 벌일 태세다.
이번 대통령선거의 열쇠를 쥐고 있는 안철수 전 후보가 6일 문재인 후보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선언하면서 “오늘이 대선의 중대한 분수령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안철수 후보가 단일화 작업을 “아름답게” 매듭짓지 못하고 사퇴한 후 여론조사에서 문 후보와 박근혜 후보와의 지지율 차이가 벌어졌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안철수 원장이 문 후보를 적극 지원함으로써 이 격차를 줄이고 대선을 문 후보의 승리로 바꿔놓겠다는 결의를 표현한 것이다. 안철수 전 후보는 바로 7일부터 부산과 서울에서 문재인 후보와 손을 잡고  정권교체를 위해 문 후보를 적극 유세지원을 하고 있다.
안철수 효과에 관해서는 그가  유세에 다시 참가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아 그 위력을 측정하기에는 아직 빠르다. 조선일보가 8일 실시한 여론조사는 안철수 효과가 별로 없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TNS 조사는 안철수 유세 참가 이후 문 후보가 박 후보와의 지지율 차이를 4% 정도로 줄였음을 보여주었다. 안철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앞으로도 안철수 효과는 계속되리라는 전망이다. 선거전은 점입가경이 될 것 같다. 이럴수록 선거를 결정지을 가장 중요한 요인은 투표율이다. 2030은 한국의 민주주의의 장래가 자신들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명심하고 투표에 꼭 참여해야 한다.

장행훈 언론광장 공동대표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 media@mediatoday.co.kr  

2012년 12월 9일 일요일

박근혜가 배운 건 가장 나쁜 모습의 박정희였다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12-08일자 기사 '박근혜가 배운 건 가장 나쁜 모습의 박정희였다'를 퍼왔습니다.

박정희의 1963년 대통령 선거 포스터. 생전에 세 번의 직선제 대통령 선거와 두번의 체육관선거를 치렀던 그는, 이제 딸을 통한 네 번째 직선제 선거를 통해 부활하려 하고 있다.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박정희의 네 번째 선거
세상이 바뀔까 두려워하는 수구세력이 “세상을 바꾸겠습니다”라는 구호를 들고 나온 것은 웃어넘길 수 있다. 그러나 유신세력이 이번 대통령 선거를 과거 세력과 미래 세력의 대결이라면서 자신들을 지지해달라고 하는 데 이르러서는 그냥 웃어넘길 수 없는 모멸감을 느낀다. 혹자는 이번 선거를 박정희 대 노무현의 대결이라고 하고, 또 1차 티비 토론 이후에는 다카키 마사오 세력 대 김대중 · 노무현 세력의 대결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유신과 오늘’에서는 이번 대통령 선거를 박정희의 네 번째 대통령 선거라는 관점에서 그 의미를 짚어보도록 하겠다.국가예산의 10%를 퍼부었던 1971년 대선박정희는 1963년 8월 30일 전역식에서 눈물을 흘리며 “본인과 같이 불운한 군인이 또 다시 없도록” 운운하며 군복을 벗는 소회를 밝혔다. 20세기 지구의 곳곳에서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수많은 군인아저씨들은 거의 다 군복을 입고 통치했지만, 박정희는 군복을 벗고 선거를 치러야 했다. 남북분단이 동서냉전의 대리전을 수행하던 현실에서 미국은 자신의 쇼윈도에 군복이 걸려있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군부 일각에서는 원래의 공약대로 군은 깨끗하게 원대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수도경비사령부 군인들은 군정을 연장하라고 데모하기도 하고, 박정희는 오락가락 갈팡질팡 번의에 번의를 거듭하다가 결국 군복을 벗고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박정희와 윤보선이 격돌한 제5대 대통령 선거는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15만 표로 가장 표차가 적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승부가 갈린 것은 윤보선이 박정희의 ‘여순반란 사건’에 관련된 좌익 전력을 거론하며 제기한 사상논쟁이었다. 사상논쟁은 윤보선의 기대와는 달리 역효과가 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국에 널리 퍼져있던 좌익관련자들이 적극적으로 박정희를 지지해 여기서 승부가 갈린 것이다.평생 권력을 움켜쥐고자 했던박정희는 두 번의 임기뒤삼선개헌안을 날치기 처리했고유신쿠데타 통해 국민들이대통령 뽑을 기회마저 빼앗았다퍼스트레이디 박근혜가 배운 건권력에 취해 비틀거리는가장 나쁜 모습의 박정희였다유신의 부활이냐 종말이냐우린 그 선택의 갈림길에 서있다1967년 5월 3일의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윤보선과 재격돌했다. 야당은 오랜 분열을 극복하고 신민당이라는 통일대오를 만들었지만, 후보로는 윤보선을 다시 내세웠다. 51세 박정희와 71세 윤보선의 대결, 가난한 농민의 아들임을 내세우는 박정희와 서울의 대부호 양반가의 후예 윤보선의 대결은 구도가 좋지 않았다. 이제 막 경제개발계획이 궤도에 오르고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돈이 풀리면서 국내의 경제상황도 나쁘지 않았다. 아직 박정희의 독재가 본격화되기 이전이었고, 박정희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자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박정희는 4년 전 15만 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이긴 윤보선에게 116만 표 차이의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제3공화국 헌법은 4년 중임의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었는데, 중임 임기가 끝나는 1971년에 55세가 되는 박정희는 권력을 내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삼선개헌을 염두에 두고 한 달 여 후인 6월8일에 치러진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개헌이 가능한 의석수를 확보하기 위해 초유의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박정희는 이렇게 확보한 개헌가능 의석을 이용하여 삼선개헌안을 국회에서 날치기로 ‘처리’했다. 다른 신문들은 ‘통과’라 썼지만, 동아일보만은 언론의 자존심상 ‘통과’라는 말을 쓸 수 없어 ‘처리’라고 했다고 한다.1971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는 비록 야당이 패배하긴 했지만,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박진감 넘치는 선거로 꼽힌다. 대통령 선거를 1년여 앞 둔 시점에서 신민당 유진오 총재가 갑자기 뇌일혈로 쓰러졌다. 야당으로서는 1956년과 1960년 대통령 선거 당시 신익희 후보와 조병옥 후보가 갑자기 세상을 뜬 데 이어 또 다시 불행한 사태를 맞은 것이다. 이때 신민당의 원내총무였던 42세의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왔다.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이 출마한 신민당 내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을 주창한 김영삼이 예상대로 1위를 차지했지만, 과반수 득표에 실패해 2차 투표에 돌입했다. 여기서 이변이 발생해 2위였던 김대중이 후보로 선출되어, 박정희와 맞붙게 되었다. 박정희는 1967년의 6·8총선에서 김대중을 낙선시키기 위해 김대중의 지역구인 목포에서 국무회의를 열 정도로 김대중을 싫어했다. 그런 김대중과 경쟁하는 것은 박정희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했다. 이렇다 할 쟁점을 만들어내지 못했던 윤보선과는 달리 김대중은 예비군 폐지, 4대국 보장론, 대중경제론 등 참신한 공약을 쏟아냈다.박정희는 사회의 구성이 고도화되면서 자연스럽게 분출되는 각계각층의 요구를 수용하고 조화시킬만한 능력도, 품성도 갖고 있지 않았다. 박정희가 본격적으로 지역감정을 이용한 것도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부터였다.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보로 박정희 측의 선거에 깊이 간여했던 강창성이 뒤에 고백한 것처럼, 이들은 “모든 부정을 저질러서 박 후보의 당선을 만든 것”이었다. 1971년 국가예산은 5242억이었는데, 박정희 정권이 이 선거에 국가예산의 10퍼센트가 넘는 700억을 퍼부었다. 박정희는 이런 엄청난 부정을 자행하고도 정치신인에 가까운 김대중과의 표차를 94만 표밖에 벌리지 못했다. 1956년의 조봉암 때와 마찬가지로 김대중이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이 떠돌았다.유신체제 의전서열 2위와 최태민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큰 쟁점이 된 것은 총통제 문제였다. 김대중은 이번에 박정희의 집권을 저지하지 못하면 박정희가 총통제를 실시하여 영구집권을 꾀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박정희는 김대중이 유언비어를 퍼뜨린다면서 이번이 국민여러분께 자신을 찍어달라고 부탁하는 마지막 선거라고 호소했다. 역설적인 일이지만 박정희는 이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유신쿠데타를 통해 국민들에게서 대통령을 선출할 권리를 빼앗아갔기 때문에 더 이상 국민에게 자신을 찍어달라고 부탁할 일을 원천적으로 없애버렸다. 당시 국민학교에서도 반장은 학생들이 직접 뽑았는데, 국민들은 제 나라의 대통령을 뽑을 수 없었다. 박정희는 1972년과 1978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두 번이나 더 대통령에 ‘선출’되었지만, 이것은 선거가 아니라 선거놀음일 뿐이었다. 1987년 6월항쟁에서 구호는 복잡하지 않았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민주쟁취” 16글자에 집약된 뜻은 한 마디로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자는 것이었다.박근혜 후보를 흔히 유신공주라 부른다. 그런데 공주라는 말은 가끔씩 오해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1974년 여름 이후 박근혜는 유신체제에서 어린 공주가 아니라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했다. 왕비가 없는 상태에서 공주는 유신체제의 의전서열 2위로 유신체제의 핵심적인 구성부분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권력의 정점에 섰다. 박근혜는 외모는 어머니 육영수의 온화한 모습을 많이 닮았지만, 속은 영락없는 박정희였다. 박근혜는 아버지로부터 권력의 생리와 운영방법을 배웠지만, 불행하게도 박근혜가 보고 배운 시기의 박정희는 권력에 취해 비틀거리는 가장 나쁜 모습의 박정희였다. 박정희도 처음부터 언로가 막혀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초기의 박정희는 부들부들 떨고 재떨이 집어 던질지언정 기자들하고 논쟁도 했고 대드는 기자들을 중용하기도 했다.박정희가 그래도 기자들과 막걸리를 앞에 두고 때로 고성이 오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시절이 있었던 반면, 박근혜는 처음부터 얼음공주였다. 선거의 핵심과제인 경제민주화의 상징으로 힘들게 모셔온 김종인 전 의원조차 가차 없이 잘라버리는 상황에서 박근혜의 눈이 발하는 레이저광선 앞에 모두들 침묵해버리고 만다. 최근 교통사고로 숨진 이춘상 보좌관의 죽음은 그가 박근혜 후보에게 그래도 불편한 진실을 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측근이었다는 점에서 박근혜 후보에게는 치명적인 손실이 아닐 수 없다.박근혜 후보와 관련된 여러 가지 부정적인 이야기의 90퍼센트 이상은 구국선교단 총재라는 최태민이라는 정체불명의 인물과 연관되어 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바에 따르면 주한미대사 버시바우는 “최태민이 박근혜의 인격형성기에 박근혜의 몸과 영혼을 완전히 통제”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2007년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그 소문의 대부분이 박근혜 후보의 동생인 박근령 등 최측근이나, 박정희를 가장 열심히 찬양한 조갑제나 요새 TV토론에 보수진영을 대표하여 가장 빈번히 얼굴을 내미는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진 같은 사람의 취재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는 점이다.박근혜는 박정희 사후 영남대 이사장에 취임했으나, 학생들의 반발로 곧 이사장 직을 사임하고 평이사로 내려앉았다. 영남대학은 영남학원 상임이사 김정욱, 곽완석 사무부처장, 손윤호 영남병원사무장, 조순제 영남투자전무 등 박근혜가 임명한 측근 4인과 이사진이 1인당 2천만 원이라는 거액(현재는 2~3억 가치)을 받고 30여명을 부정입학시킨 사실이 적발되었다. 이들과 이사진은 마땅히 감옥에 가야 하는 것이었으나, 박근혜와 측근들이 영남학원에서 영원히 손을 떼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이때 박근혜와 함께 사임한 이사진은 상임이사 김정욱, 이사 김창환, 손미자 등인데, 이들은 모두 정수장학회의 이사를 지냈다. 이들 중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지낸 김창환은 최태민의 사촌, 조순제는 최태민의 의붓 아들, 손윤호는 최태민의 처남으로 알려져 있다. 영남학원 이사진에서 부정행위로 쫓겨난 자들을 박근혜는 정수장학회에서 여전히 이사로 기용했다. 현재 박근혜를 보좌하고 있는 보좌진들의 골격은 최태민의 사위인 정윤회가 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버시바우가 한국의 라스푸틴이라고 평한 최태민의 그림자가 박근혜가 흉탄에 어머니를 잃은 황망했던 어린 시절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것이다.윤봉길 의사 80주기, 다카키 마사오를 생각한다볼셰비키혁명을 촉발했다고 일컬어지는 제정러시아 시대의 괴승 라스푸틴은 황제까지 혹하게 만들었으나, 박정희가 최태민에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의 비서실장이자 술 친구로 10 · 26 사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인 김계원이 적나라하게 폭로한 것처럼 박정희는 “그 X(최태민)가 그 X(박근혜)를 홀렸다”며 최태민과 박근혜에 관한 보고서가 올라오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고 김계원에게 호소했다고 한다. 최태민은 박정희보다도 5살이나 많았는데, 최태민의 존재는 박정희는 물론이고 비서실장 김계원, 민정수석 박승규, 정보부장 김재규 등의 골칫거리였다. 운명의 10월 26일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는 항소이유서 보충서에서 10·26사건의 먼, 그러나 중요한 이유의 하나로 최태민 문제를 꼽았다. 박정희를 친형처럼 따랐던 김재규로 하여금 박정희의 통치능력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만든 계기였던 것이다.

올해 대선일인 12월19일로부터 정확히 80년 전인 1932년 12월19일 일본의 처형장에서 벌어진 일. 일제는 윤봉길 의사의 눈과 이마를 헝겊으로 가린 뒤 10m 거리에서 딱 한 발의 총알로 이마 정중앙을 명중시켜 핏자국으로 일장기 모양을 만들었다.

박근혜는 “곳곳마다 새마을 사람마다 새마음”이라는 구호 아래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을 본 따 새마음 운동을 전개했다. 최태민이 부추긴 공주놀음에 푹 빠져 아버지 속을 지지리도 썩인 딸은 나이 지긋한 교장선생님이나 지역의 원로인사들을 모아 예행연습까지 시키며 몇 시간 씩 줄지어 세워놓고 효도에 대한 강연을 했다. 시골에 가면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영애님 오셨다고 큰 절을 했다. 육영수는 말할 것도 없고 박정희도 이런 절을 받지는 않았다며 김재규는 왜 어린 박근혜가 노인들 절 받느냐고 탄식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최태민 문제로 골치를 썩으며 검찰에 수사를 지시하고 봉건시대의 임금마냥 최태민을 불러 친국을 행하는 등 최태민을 떼어 놓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다 썼으나 울며불며 난리 치는 박근혜를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 “에미도 없는 게 시집도 안 가고 애쓰는 게 불쌍하다”는 박정희의 동정이 화를 키웠다면, 지금도 박근혜를 불쌍하다고 여기는 일부 대중들의 값싼 동정이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18대 대통령 선거에서 핵심 과제는 경제민주화이다. 1948년 제헌헌법은 한 발 오른 쪽으로 가긴 했지만, 독립운동가들이 꿈꾸었던 나라의 모습을 온전히 담고 있다. 불행하게도 친일파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제헌헌법은 국가보안법에 깔려 질식당하고 말았다. 대한민국 헌정사는 박정희라는 동일인물에 의해 1961년과 1972년 두 차례나 짓밟힘을 당했고,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했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죽으면서 민주주의가 소생의 기회를 맞이했으나 또 다시 박정희의 경호장교였던 전두환, 노태우 일당에 의해 피비린내 나는 광주의 학살을 겪어야 했다. 1987년의 6월항쟁은 간신히 정치적 민주주의만을 회복했다. 안타깝게도 정치적 민주화의 과실은 일반 시민들보다도 재벌과 관료와 수구언론이 따먹어 버렸고,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와 외환위기의 광풍 속에서 양극화의 나락에 빠지고 말았다. 6월항쟁으로부터 25년이 지난 2012년 한국사회는 다시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 이명박이 가져온 역사의 퇴행은 한 발 더 나아가 박정희의 부활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우리는 박정희의 부활이냐, 정치적 민주화에 이은 경제민주화를 성취하느냐의 갈림길에서 2012년의 선거를 치르게 된다.12월 19일은 윤봉길 의사의 80주기가 되는 날이다. 일제는 1932년 12월 19일, 일본 이시카와현 미고우시 육군공병작업장에서 가장 악질적이고 모욕적인 방법으로 윤봉길 의사를 처형했다. 일제는 25세의 청년 윤봉길의 무릎을 꿇려 낮은 십자가에 붙들어 매고는 눈과 이마를 헝겊으로 가렸다. 그리고 10미터 거리에서 딱 한 발의 총알로 윤봉길 의사의 이마 정중앙을 명중시켰다. 피가 흘러나와 헝겊을 붉게 물들였으니 저들은 윤봉길 의사의 죽음으로 일장기를 그린 것이다. 박정희가 하필이면 자신이 롤모델로 삼았던 명치유신의 지도자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날을 골라 자신의 제삿날로 삼은 것도 심상치 않은 우연이지만, 윤봉길 의사의 80주기 되는 날이 18대 대선일인 것도, 그 날이 다카키 마사오를 숭상하는 세력과 민주세력의 한판승부가 벌어지는 것도 범상치 않은 우연이다.

2012년 12월 3일 월요일

‘제압’도 모자라 ‘확 제압’이라니요


이글은 시사IN 2012-12-03일자 기사 '‘제압’도 모자라 ‘확 제압’이라니요'를 퍼왔습니다.

“촛불시위를 공권력으로 확 제압했어야 했다.” 새누리당 김무성 총괄선대본부장(사진)이 한 말이다. 두 가지 의미에서 기가 찬 말이다. 하나는 유신이나 5공 시절의 독재 본능을 드러낸 것이요, 하나는 처참하게 제압하고도 오리발을 내미는 것이어서다.

2010년 지방선거를 눈앞에 둔 시점에 사건이 하나 터졌다. 15만명이 가입한 대규모 인터넷 카페 운영진이 불법 모금을 하고 모금액을 술값으로 유용했다는 사건이었다. 

ⓒ뉴시스

문제의 카페는 ‘이명박 탄핵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 일명 ‘안티MB’로 유명한 ‘촛불’ 카페였다. 조·중·동을 비롯한 대부분 신문과 KBS·YTN 등 방송이 일제히 이 사건을 보도했다. 상당수 언론이 확인된 사실이라고 보도했고, 일부는 ‘좌파의 파렴치’([문화일보]), ‘적나라한 부도덕’([헤럴드경제])이라 질타했다. 촛불도 끄고, 촛불에 대한 테러도 덮고, 선거 표심도 흔드는 사건이었다.

2년을 훌쩍 넘긴 지난 9월, 법원은 기소된 안티MB 운영진 전원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조·중·동도, KBS도 무죄판결을 보도하지 않았다. YTN은 기자가 기사를 송고했지만 방송하지 않았다. (경향신문)과 (연합뉴스) 정도에만 기사가 실렸다.

다시 김무성. 오리발 내밀 수는 없게 되었다. 다만 그냥 제압은 성에 안 차서 ‘확 제압’이라고 한 것이리라. 선거를 앞두고 뒤지고 잡아가고 가두고 기소한 검·경, 그리고 무고한 이들을 파렴치범으로 만들고는 입 꾹 다물고 있는 언론. 게다가 이를 능가하는 ‘확 제압’까지, 그들이 꿈꾸는 정권에 소름이 돋는다. 

노종면 (YTN 해직기자, 트위터 @nodolbal)

2012년 11월 30일 금요일

유신공주는 양공주 문제엔 관심이 없었다


이글은 한겨레신문2012-11-30일자 기사 '유신공주는 양공주 문제엔 관심이 없었다'를 퍼왔습니다.


[토요판]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20) 기지촌 정화운동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가 선거의 핵심 표어로 ‘여성대통령’을 들고나왔다. 생물학적인 성(섹스)과 사회적인 성(젠더)을 엄격히 구분하는 입장에서는 박근혜의 여성대통령론을 마뜩지 않게 여기고 있다. 박근혜 후보가 동시대 여성 전체는 물론이고 자신의 동년배 여성들과도 달라도 너~무 다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유신과 오늘’에서는 여성대통령을 표방하고 나선 박근혜가 영애로서, 퍼스트레이디로서 생활했던 유신시대에 동년배 여성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돌아보고자 한다. 유신시대 여성들의 삶은 이미 살펴본 여공들보다 더 내려가 기생관광과 기지촌을 들여다보아야 바닥이 보인다.박근혜가 구국의 결단이었다고 찬양해온 유신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일본군 위안부 제도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는 기지촌 정화운동이 나온다. 인혁당이나 정수장학회 문제와 같은 낯익은 국가폭력 사건의 경우 직접적인 피해자도, 직접적인 가해자나 수혜자도 국민 전체에서 보면 소수라 할 것이다. 그러나 기지촌 문제는 그 피해자가 수십만이고, 수혜자도 특정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데다 너무나 뚜렷하게 현재진행형이다. 기지촌 정화운동을 통해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사실상의 공창제를 운영하면서 힘없는 여성들의 몸뚱이를 담보로 국가안보와 외화벌이를 동시에 해결하고자 했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미군철수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

해방 후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일본군 주둔지역에 주둔했다. 용산 미군기지는 일본의 조선군사령부 자리였고, 미국 공군이 자리잡은 평택도 일본군이 비행장을 닦던 곳이었다. 당연히 일제 때에 형성된 유곽은 미군을 상대로 한 기지촌으로 바뀌어갔다. 사회안전망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던 시절, 갑작스런 전쟁으로 남편을 잃거나 공동체로부터 유리된 여성이 먹고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아무도 그들을 지켜줄 수 없었던 전란 속에서도 순결은 여전히 목숨보다 귀한 가치였다. 한번 ‘몸을 버린’ 여성들, 특히 가진 것이라곤 ‘이왕 버린 몸뚱아리’ 밖에 없는 수많은 여성들은 극도의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갈 곳이 없었다. 수많은 순이들은 지친 몸을 뉘일 곳이라곤 기지촌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에레나가 되어갔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순이가 에레나가 되었을까? 한국전쟁 때부터 지금까지 기지촌을 거쳐 간 여성의 숫자를 관련 연구논문에서는 대개 30만 가량으로 추산하는데, 30만이라면 파월장병 숫자와 비슷한 규모이다.미국은 닉슨독트린에 따라 1971년 3월 7사단과 3개 공군 전투부대 등 주한미군 6만2천 명 중 2만여 명의 철군을 단행했다. 미군철수로 공황상태에 빠진 박정희는 미군의 추가철수를 막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갑’인 미국은 ‘을’인 한국에게 다양한 경로로 기지촌 정비에 대한 요구를 해왔다. 미 대사관은 주로 한국의 기지촌에서 한국인들이 흑인 병사들을 인종차별 하는 것에 대한 닉슨 대통령의 우려를, 미8군 측은 기지촌의 불결한 환경과 성병 문제를 제기했다. 1971년 12월 박정희가 한미 1군단사령부를 순시했을 때 부사령관 이재전은 박정희를 수행하면서 미군 측이 요구하는 기지촌 정화에 대하여 건의했다. 미군은 지원병 제도를 택하고 있는데 자식을 군대에 보낸 부모들이 한국이 성병 발병률도 높고 인종차별도 심하다며 자식의 한국 배치에 극력 반대한다는 것이다. 주한미군측은 독일이나 오키나와 등지의 쾌적한 기지촌의 예를 들며 한국측에 대대적인 기지촌 정비를 요구했다.청와대로 돌아온 박정희는 수년에 걸쳐 내각에 지시했는데 왜 정화가 안됐느냐고 크게 화를 내면서 청와대가 직접 사안을 챙기라고 지시했다. 담당자는 정무비서관 정종택이었는데, 그는 새마을운동 담당관을 겸임하고 있어 기지촌 정화운동은 기지촌의 새마을운동으로 불리기도 한다. 1971년 12월 31일 청와대에서는 10여개 부처의 차관들을 위원으로 하는 청와대 직속의 기지촌 정화위원회가 발족하여 미국의 요구를 적극 수용하여 기지촌의 환경개선과 성병의 예방과 치료 등의 과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논의했다.미군 철수의 절박한 상황에서 바짓가랑이라도 붙드는 심정으로 기지촌 정화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기지촌 정화운동이 미국의 요구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추진도 한미합작으로 이뤄졌지만, 한국 정부는 사실 기지촌 정화 운동이 공식적으로 시작되기 전부터 기지촌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박정희의 지시로 5·16군사반란의 적극 가담자이자 중앙정보부 서울분실장으로 막강한 위세를 떨친 백태하가 주도한 군산의 아메리카 타운은 미군들의 쾌락을 위해 건설된 계획도시였다. 1969년 9월 문을 연 아메리카 타운은 미군을 위한 클럽, 식당, 미용실, 각종 상점, 환전소에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500여개의 방까지 갖춘 매매춘을 위한 자급자족형 신도시였다. 여성학자들은 군산의 아메리카 타운을 정부 주도하에 설립된 ‘군대 창녀 주식회사’라 부른다.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전투력의 극대화를 위해서는 전장의 병사들이 섹스를 즐길 수 있어야하되, 성병으로 인한 전투력 손실을 막기 위해 깨끗한 성을 공급한다는 국가관리 매매춘 시스템이었다. 이 점에서 기지촌 정화운동은 일본군 위안부제도를 무섭게 빼닮았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야만적인 제도지만, 이 제도를 만든 자들은 야만인이 아니라 대일본제국의 가장 우수한 아들들이었다. 기지촌 정화운동을 입안한 자들도 한국과 미국의 엘리트 관료들이었다. 대일본제국의 가장 우수한 아들들도, 자유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일본과 싸웠다는 위대한 미국의 빼어난 아들들도, 일본에서 미국으로 주인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승승장구한 식민지 조선의 수재들도 위안부들의 인권같이 사소한, 어쩌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을 무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박정희에게 기지촌 정화운동을 건의한 이재전이 솔직하게 고백한 것처럼 기지촌 정화운동은 기지촌 주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한미군을 위한 것이었다.

‘주한미군 전투력 극대화 위해 
섹스를 즐기도록 하되 
성병으로 인한 전투력 손실을 
막기 위해 깨끗한 성을 공급한다’ 
그것은 일본군 위안부제와 흡사한 
좋게 말하면 국가포주제였다 

영애 박근혜는 그 시절
원로급 인사들을 모아놓고 
충효사상을 강연했지만
밑바닥에서 사회를 떠받치는 
기지촌 여성들 손을 잡은 적 없다

“안보와 달러를 위해 몸을 씻으시오”

기지촌 여성들은 청결한 몸과 깨끗한 성을 판매하기 위해 최소 일주일에 두 번 검진을 받아야했다. 아무리 몸을 파는 여성이라 해도 검진대에 올라 남자 의사에게 치부를 보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이렇게 검진을 받아야만 검진증에 도장을 받을 수 있었다. 기지촌 여성들에게 검진증은 신분증이자 ‘영업허가증’이었다. 검진증을 갖고 있지 않다가 미군헌병의 검문(기지촌에서는 이를 ‘토벌’이라 불렀다)에 걸리면 즉심에 회부되었다. 당시 미군의 성병은 놀라울 정도로 증가하고 있었다. 기지촌 정화운동에 대한 탁월한 연구인 캐서린 문의 (동맹 속의 섹스)에 따르면, 1천명 당 성병발생 건수는 1970년 389건, 1971년에 553건, 1972년 692건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미군부대 정문 보초의 주된 임무는 외출 나가는 병사들에게 콘돔을 나눠주는 일이었다고 한다. 검진에서 성병에 걸린 것으로 적발당한 여성은 가차없이 ‘몽키하우스’라 불린 성병진료소에 감금되었다. 반면 성병에 걸린 미군이 완치될 때까지 외출이 금지되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었다. 미군의 7할이 성병에 걸려있건만 성병의 책임은 오로지 한국 여성의 몫이었다. 성병진료소에서는 처음에는 페니실린을 투약했지만 부작용이 자꾸 생기고 잦은 투약으로 내성이 생겨 약효가 떨어지니 투약 용량을 자꾸 늘렸다. 의사들은 부작용이 거의 없었다고 했지만, 여성들은 주사를 맞으면 다리가 끊어지게 아팠고, 많은 사람들이 자다가 죽고, 화장실에서 죽고, 밥 먹다 죽었다고 증언하고 있다.아직 한국경제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던 시절 기지촌 경제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나영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964년 한국의 외화수입이 1억 달러에 불과하던 시절, 미군 전용 홀에서 벌어들인 돈은 근 10퍼센트인 970만 달러에 달했다. 한국정부는 주말외출 나온 미군들이 오키나와나 일본으로 가 성매매 하는 것을 기지촌 여성들을 업그레이드하여 국내에서 흡수하기 위해 그들에게 영어와 에티켓을 교육하려했다. 기지촌 ‘양공주’에서 활동가로 우뚝 선 아메리카 타운 왕언니 김연자의 회고록에 보면 당시 강사들은 이런 식으로 얘기했다고 한다. “흠흠, 에 여러분은 애국자입니다. 용기와 긍지를 갖고 달러 획득에 기여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에, 저는 여러분과 같은 숨은 애국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미국 군인들이 우리나라를 도우려고 왔으니 그 앞에서 옷도 단정히 입고, 그 저속하고 쌍스러운 말은 좀 쓰지 마세요.” 원자재 없이 외화를 벌어들이는 산업 전사들이자 미군을 붙들어 두는 안보전사로 그대들이야말로 참된 애국자이니 긍지를 갖고 일하라는 말에 그렇게 좋은 일이면 제 딸부터 시키지 하고 코웃음 치는 사람도 있었고, 그래 우리는 “열심히 씹을 팔고 좆을 빨자”고 자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영어강사들은 “메이 아이 씻 다운?”하는 식의 교양 영어를 가르쳤지만, 여성들은 바쁜 세상에 ‘메이’는 무슨 놈의 얼어 죽을 메이냐며 자신들에게 필요한 영어란 렛스 고 숏 타임, 렛스 고 롱 타임, 하우 마취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찰서나 ‘자매회’가 주최하는 이런 교양강좌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지만, 모두들 검진증 뺏기지 않으려면 자리를 채워야 했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조선여성들은 학교 문전에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일본어를 몰랐다. 그들은 “닛뽄징 조센징 덴노헤이까 오나지네(일보인과 조선인은 천황폐하가 같지요)” 따위의 서비스 언어를 날림으로 배워 급히 외워야 했다.안보 전사답게 기지촌 여성들도 팀스피리트 훈련을 뛰었다. 기지촌과는 달리 훈련 나와서는 부르는 게 값이었다. 미군들도 훈련 사이사이의 짧은 시간에 욕구를 풀려니 앞 사람이 조금만 오래 끌면 문을 두드리고 난리를 쳤다. 이렇게 밖에는 길게 줄을 서 있고, 안에서는 5분도 안 걸리게 일을 치르면서 여성들은 옛날 정신대 끌려간 사람들이 이랬겠구나 생각했다. 그 와중에 한국정부는 야전에 임시보건소를 지어 여성들을 검진했다. 여성들이 아니라 미군을 위해서였다. 왕언니 김연자는 그런 데까지 돈 벌러 간 여자들도 참 대단한 사람들이지만 거기에 천막 치고 보건소 세워 준 정부도 참 대단한 정부였다고 혀를 찼다.


한미동맹은 가치동맹 이전에 ‘섹스동맹’

미군기지에서 얼마나 떨어진 곳까지가 기지촌일까? 보산리, 안정리, 용주골만 기지촌이 아니었다. 미군기지는 어디에나 있었다. 대한민국이 캠프 코리아였고, 대한민국 전체가 거대한 기지촌이었다. 미군이 떠나면 우리는 다 죽는다며 미군의 바짓가랑이 잡고 늘어지는 자들이 한국의 ‘지도층’ 인 한, 정신적으로 대한민국 전체가 기지촌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모두 그 거대한 기지촌 캠프 코리아의 주민이었다. 우리가 몸을 팔지 않았고, 우리가 포주질 하지 않았고, 우리가 뚜쟁이질 하지 않았어도 우리는 우리 부모와 우리 형제자매가 그렇게 번 돈으로 밥 먹고 학교 다닌 것이다. 기지촌 정화운동은 아무리 좋게 얘기해도 일본군 위안부 제도와의 관련성을 부인할 수 없는 국가포주제도였다. 이나영 교수의 지적처럼 대한민국 전체가 ‘양공주’가 담보하는 국가안보에 기대어, ‘양색시’가 번 돈에 혹은 그들의 일터와 관계된 경제구조에 기생하며, 일정 부분 미국의 ‘위안부’가 되어 살아왔던 것이다.군대가 있는 곳에 매매춘이 있기 십상이지만, 군대와 매매춘 사이에 필연적인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사우디처럼 이슬람 율법이 엄한 나라의 미군기지 앞에는 매매춘으로 흥청대는 기지촌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지촌 정화운동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여성들이나 업주들과 매매춘을 원하는 미군병사 사이의 사적인 거래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기지촌 정화운동은 미국과 한국 두 국가가 긴밀히 협력하여 추진한 국가적인 산업이자 정책이었다. 한미동맹을 얘기할 때 가치동맹을 얘기하지만, 가치동맹 이전에 섹스동맹이 있었다. 미국은 자국 병사들의 안전한 섹스와 스트레스 해소를 원했고, 한국은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과 미국 병사들이 뿌리는 달러를 원했다. 두 나라는 굳게 손잡고 기지촌 정화운동을 펼쳤다.1960년대까지만 해도 미군범죄에 관한 기사는 신문에 자주 실렸다. 그러나 기지촌 정화운동과 거의 동시에 시작된 유신시대의 신문지상에서 미군범죄에 관한 기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정부는 기지촌 여성들을 안보전사이자 산업역군이라고 떠받들었지만, 정작 그들의 인권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혼혈’ 자식들은 미국으로 입양보내고 홀로 남은 이들은 이제 늙고 병든 몸으로 고독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지난 8월 31일 기지촌여성인권연대가 발족했다. 그동안 기지촌 여성들을 위해 활동해온 이들이 먼저 깃발을 들었지만, 어찌 이 문제가 기지촌여성인권연대만의 과제이겠는가? 거대한 기지촌 캠프 코리아의 주민 모두는 이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기지촌 여성 문제는 모든 국민이 책임져야 할 문제이지만, 국가포주제를 건설하고 운영한 수장의 따님인 박근혜 후보는 각별한 책임을 느끼고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 한다. 그들은 사회가 조금만 문 열어 주었어도 우리가 이렇게 살지는 않았다고 지금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들이 정녕 안보전사였다면 마땅히 국립묘지에 모셔야 하는 것 아닌가? 국립묘지 문 열어달라는 말은 안 하겠다. 다만 그들을 향해 굳게 닫혀 있는 우리 사회의 문, 우리의 마음의 문은 열어야 할 것이다. 그 문을 가장 먼저, 가장 활짝 열어야 할 책임은 다른 누구보다도 박근혜 후보에게 있다. 공주와 양공주는 딱 한 글자 차이지만, 이 사이에 우리나라의 모든 여성이 다 들어간다. 영애 박근혜는 그 시절 자신보다 두세배 나이를 잡수신 교장선생님이나 원로급 사회인사들을 모아놓고 새마음정신 고취란 이름으로 충효사상을 강연했지만, 정말 이 사회를 밑바닥에서 떠받치는 기지촌 여성들의 손을 잡은 적은 없다. 박근혜 후보여, 여성 대통령을 표방하려면 동시대를 산 동년배 여성들의 희생에 먼저 경의를 표하시라!


2012년 11월 18일 일요일

‘개’가 된 기자들은 부끄러웠다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11-17일자 기사 '‘개’가 된 기자들은 부끄러웠다'를 퍼왔습니다.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전하는 다음날 <기자협회보>. 기자다운 기자이고 싶었던 이들의 부끄러움이 젊은 그들을 행동하게 했다. 75 보도사진연감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18) 언론자유실천선언

1974년 10월24일 동아일보사 기자들은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지금의 (한겨레)의 출생은 바로 이 선언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장으로 이 선언을 주도했던 장윤환 전 한겨레신문 편집위원장은 민권일지 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때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밀고 나간 힘은 ‘부끄러움’이었다고 고백했다. 무엇이 젊은 엘리트 기자들을 그토록 부끄럽게 만들었을까?

데모 현장에서 ‘기자와 개는 접근금지’

지식인 사회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철없는 후배다. 후배가 하는 비판은 틀린 법이 없어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당할 뿐이다. 그저 ‘네놈은 나중에 어떻게 하나 보자’ 하고 중얼거리는 게 위안이라면 유일한 위안일 뿐이다. 비판은 아프지만 견딜 만한데, 야유와 조롱은 정말 죽을 맛이다. 4월27일의 대통령 선거를 꼭 한 달 앞둔 1971년 3월26일 오후 3시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에는 서울대 각 단과대학 학생회장 등 10여명이 모여 ‘민중의 소리 외면한 죄 무엇으로 갚을 텐가’란 플래카드를 내세우고 연좌농성을 시작했다. 학생들은 2~3일 전부터 단과대학별로 교내에서 언론 화형식이나 성토대회를 열더니, 이제 신문사에 직접 들이닥친 것이다. 학생들은 ‘언론인에게 보내는 경고장’이란 글에서 동아일보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후벼 팠다. “안타깝다. 그 자리 그 건물이건만, 민주투사는 간 곳 없고 잡귀들만 들끓는가. 사자의 위용은 어디 가고 도적 앞에 꼬리 흔드는 강아지 꼴이 되었는가?”라고 언론인들을 야유한 학생들은 “정치 문제는 폭력이 무서워 못 쓰고, 사회 문제는 돈 먹었으니 눈감아주고, 문화 기사는 판매 부수 때문에 저질로 치닫는다”고 언론 현실을 규탄했다. 동아일보사 앞에서 건물은 그 건물이라고 한 것은 길 건너 조선일보가 정부의 알선으로 거액의 차관을 들여와 ‘기생관광’의 성지가 된 코리아나호텔을 짓고 있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은 동아일보마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올라만 가는 조선의 저 추접한 껍데기”를 닮아가려 하는가라고 꾸짖었다. 학생들은 “이제 권력의 주구, 금력의 시녀가 되어버린 너 언론을 슬퍼하며, 조국에 반역하고 민족의 부름에 거역한 너 언론을 민족에 대한 반역자, 조국에 대한 반역자로 규정하여 민중의 이름으로 화형에 처하려 한다”는 내용의 ‘언론화형 선언문’을 읽다가 출동한 경찰 20여명에게 주동자 4명이 연행당하면서 해산되었다고 한다.후배들에 의해 화형까지 당하는 처지가 되자, 젊은 기자들의 충격은 컸다. 그러지 않아도 학생 시위 현장에 취재를 나가면 신문에 싣지도 못할 것 뭐 하러 왔느냐는 야유를 듣기 일쑤였다.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된 기자들 중 막내인 정연주는 성명서 한 쪼가리 얻으려고 학생들이 바리케이드 쳐놓고 농성중인 곳에 갔다가 “기자와 개는 접근 금지”라고 쓴 것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밖에 나가서 구박받는 기자들은 안에 들어와서도 기를 펼 수 없었다. 중앙정보부나 치안국 등 여러 정보기관에서 나온 기관원들이 신문사에 ‘상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1967년에 신민당이 언론사에 기관원이 상주한다고 비판하자 각 언론기관은 신문사에 기관원을 내보내는 정보기관이 아니라 신민당을 마구 규탄했다. 이때 동아일보는 “정보기관원이 ‘상주’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나 빈번히 출입한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 아닌 인정을 했다. 1971년 4월15일 동아일보사를 시작으로 조선, 한국, 중앙 등 주요 신문과 방송사에 언론자유수호선언이 이어진 것은 바로 이 화형식으로 젊은 기자들이 뜨거운 맛을 본 덕분이었다. 이때의 언론자유수호선언에 공통적으로 포함된 것은 정보 요원의 언론사 출입 금지였다. 1971년 4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2002년의 노무현보다도 젊고 국회의원 경력이 짧았던 김대중이 선전할 수 있었던 것은 화형식 이후 언론이 비교적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다.신동아 필화사건으로 동아일보 주필에서 밀려난 천관우는 권력의 위세 앞에 맥을 못 추는 당시의 언론이 연탄가스에 중독된 것에 비유했다. “잠든 사이에 스며든 가스에 취하여 비명 한 번 못 질러보고 어리둥절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천관우는 “돌이켜보면 가스가 스며들기도 하루 이틀 저녁의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며 “자기의 포지션을 감당하지 않으면서” “기자는 편집인을 탓하고, 편집인은 발행인을 탓하고, 발행인은 기자를 탓하는 그런 악순환”만 계속된다면 “연탄중독에서조차 깨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언론자유수호선언문’은 연탄가스에 중독된 한국 언론한테는 찬 동치미 한 사발처럼 시원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 언론은 온몸 세포 하나하나까지 연탄가스를 들이마신 탓에 동치미 한 사발로 정신을 차리지는 못했다. 대통령 선거 기간 정보기관원들은 잠시 언론사 출입을 자제하였지만, 박정희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자 다시 당당하게 언론사 출입을 시작했다. 1971년 10월 교련 반대와 학원 자유를 외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거세게 일어나자 박정희 정권은 서울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여 주요 대학에 무장군인을 투입하고 학생시위 주동자들을 연행했다. 박정희는 12월6일에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정부는 일체의 사회불안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혹세무민의 일부 지식인들은 언론자유를 빙자하여 무책임한 안보론을 분별없이 들고나와 민심을 더욱 혼란케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박정희는 “언론은 무책임한 안보 논의를 삼가야 한다”며 “최악의 경우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자유의 일부도 유보할 결의를 가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우표딱지만한 1단 기사의 몸부림

박정희는 1972년 10월17일 유신이라는 이름의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또다시 헌법을 짓밟았다. 전시상황도 아닌데 느닷없이 선포된 계엄령에 따라 실시된 사전검열과 취재활동 제한은 이미 극도로 위축된 언론을 공포 분위기에 빠뜨렸다. 1년 전의 국가비상사태 선언 때는 그래도 일부 언론에서 조심스럽게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유신이 발표되자 “10·17특별선언은 국가의 진운을 가속적으로 개척하고 자유민주주의 토양을 굳건하게 닦는 일대 혁신조치임을 확신하고 이를 적극 지지”한다는 신문협회의 성명을 1면에 게재하는 등 앞다투어 유신을 찬양했다. 계엄령하의 언론이 겪어야 했던 고충은 보도해야 마땅한 사건을 보도하지 못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계엄사의 공고문이나 정부의 발표문 또는 정부 당국이 돌리는 해설기사 등은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크게 써주어야 했다. 당시의 언론은 보도할 자유뿐만 아니라 보도하지 않을 자유마저 박탈당한 것이다. 신문은 아예 정부의 광고판이 되었다. 10월27일 박정희가 유신헌법안을 내놓고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하면서 각 신문은 정치면(1면)과 사회면(7면)에 ‘한국적 민주주의 우리 땅에 뿌리박자’ ‘구국의 유신이다 새역사를 창조하자’ ‘통일 위한 구국영단 너도나도 지지하자’ ‘뭉쳐서 헌정유신 힘모아 평화통일’ ‘잘살려 하는 일에 너도나도 앞장서자’ ‘몸에는 맞는 옷을 나라에는 맞는 법을’ ‘지지하자 10월유신 참여하자 국민투표’ ‘10월유신 성공시켜 나라번영 이룩하자’ ‘내 한표로 10월유신 내 힘으로 남북통일’ 같은 낯뜨거운 구호를 6단 크기로 매일매일 내보내야 했다. 유신정권은 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1973년 2월1일 동아일보 방송뉴스부 고준환 기자를 허위사실 유포로 구속했다. 그는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석 달 남짓 옥살이를 한 뒤에야 풀려났다.국회의원까지 잡아다가 사정없이 고문해대던 유신 직후의 살기등등하던 분위기 속에서 지식인 사회와 학원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을 거치면서 학생들부터 깨어나기 시작했다. 1973년 10월2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벌어진 시위는 유신 이후 최초로 유신철폐를 부르짖는 데모였다. 한국의 어느 언론도 이 역사적인 시위에 대해 단 한 줄 보도하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다음날인 10월3일치 신문에 문교부가 서울시내 각 대학 학생처 과장들을 소집하여 최근 대학생들의 움직임과 관련한 지도대책을 논의했다는 짤막한 기사를 실었다. 눈치 빠른 사람들만 그저 무슨 일이 있었구나 짐작할 수 있는 그런 기사였다. 동아일보는 주간지가 아니라 일간지였지만 이 데모를 근 일주일이 지난 10월8일에야, 그것도 경찰이 학생 시위와 관련하여 서울대생 21명을 구속했다는 사실을 보도하면서 덧붙였을 뿐이다.

대학생들의 언론 화형식
정보요원의 언론사 상주 등
기자는 야유와 감시 대상이었고
신문은 ‘정부 광고판’이었다
시위 기사를 게재했다가
편집국장이 연행된 것을 계기로
동아일보 1974년 10월24일치에
기자들은 1면 3단 크기로
“뼈아픈 부끄러움”을 고백했다
세번의 언론자유수호선언

1971년 4월 대통령선거 직후 한국기자협회가 발표한 ‘언론자유수호 행동강령’. 화형식 이후 <동아일보>를 시작으로 주요 신문과 방송사의 언론자유수호선언이 이어졌다.

세상은 절대로 거저 좋아지지 않는다. 10월2일의 데모 기사가 뒤늦게나마 나갈 수 있었던 것도 젊은 기자들의 몸부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자들은 2일의 서울대 문리대 데모에 이어 4일 서울법대에서, 5일 서울상대에서 연달아 시위가 벌어지자 이를 우표딱지만한 1단 기사로라도 보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애써 밀어 넣은 기사는 인쇄 과정에서 중앙정보부의 요구로 삭제되고 말았다. 그러자 이들은 편집국에서 밤샘농성을 벌이며 앞으로 보도해야 할 기사가 누락되면 언제나 밤샘농성을 벌이기로 결의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데모나 집회-기사누락-철야농성이 몇 차례 되풀이된 뒤 동아일보 기자들은 11월20일 ‘언론자유수호 제2선언문’을 채택했다. 이 선언문 역시 언론자유가 ‘언론인 스스로의 무능과 무기력으로 인해 수호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고백했다. 사정은 다른 신문사들도 비슷하여 앞서거니 뒤서거니 언론자유 수호를 위한 결의문을 채택했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12월3일 ‘언론자유수호 제3선언문’을 채택했다.젊은 기자들의 작은 몸부림으로 유신정권도 학생 시위가 발생한 사실 자체를 1단으로 짧게 보도한 것은 눈감아주었다. 그러다 보니 사회면은 종종 1단짜리 작은 기사가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띠곤 했다. 그런 가운데 장준하, 백기완 등이 주도한 개헌청원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박정희는 1974년 1월8일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동했다. 유신헌법을 고치자고만 해도 영장 없이 체포해서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에 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긴급조치는 친절하게도 유신헌법을 비판하거나 고치자는 일체의 행위를 방송, 보도, 출판 기타의 방법으로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행위도 똑같이 처벌한다고 했다. 이제 기자들은 허시먼 식으로 표현하자면 떠날 것인가, 남아서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남아서 싸울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당시 기자협회장이던 김인수(신아일보)가 새로 생기는 내무부 대변인 자리로 간다는 소문이 돌자 기자들의 비판을 받고 사임한 일을 들 수 있다.

13년차 기자 월급, 1년차 은행원보다 낮았다

기자들이 찾은 출로는 노동조합이었다. 1970년대의 여성 노동자들과는 너무나 다른 이유에서 당대 최고의 지식인임을 자부하던 주요 언론사의 젊은 기자들이 노조를 조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당시 중앙지의 경우는 조금 사정이 나았지만, 지방지나 주간지를 포함할 경우, 기자들의 월급은 형편없이 낮았다. 기자협회가 1973년 8월 전국의 언론인 3000여명을 대상으로 행한 조사에 따르면 경력 13년의 차장 대우 기자의 월급은 경력 1년의 은행원보다 낮았고, 20년 경력의 국장 월급도 6~7년 경력의 은행 대리보다 못했다고 한다. 기자로서의 자존심은 땅에 떨어진 상태에서 생활상의 기본적인 수요도 충족시켜줄 수 없는 저임금에 시달리던 기자들은 사실 그동안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로서 노동자라는 의식을 별로 갖고 있지 못했지만, 헌법상의 노동3권에 의해 법적인 지위를 확보할 수 있는 노동조합을 통해 언론의 자유를 보장받으려 했다. 기자들은 세 차례의 언론자유수호선언에도 불구하고 신문 지면이 별로 개선되지 못한 것은 자신들이 조직적인 힘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신동아 필화사건 당시 조선일보 주필이자 편집인협회장이던 최석채가 일찍이 말한 것처럼 이제 언론사가 기업화된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언론자유를 위협하고 있었던 것은 정치권력보다도 언론사 사주였고 그 위협에 대처할 가장 좋은 방법은 노조의 결성이었다.1974년 3월7일 동아일보 노동조합이 정식으로 설립되자, 동아일보 사장 김상만은 다음날 회사의 명예를 실추했다는 이유로 조합 내 지부장 등 노조 임원 11명 등 모두 13명을 전격 해고했다. 노조 쪽이 이에 ‘해고효력 정지 가처분신청’으로 맞서자, 사측은 새로이 22명의 기자를 추가로 징계했다. 사측은 법률적 검토에서 해고가 무효화될 것이 확실해지자 4월13일자로 징계자 전원을 ‘사면’했다.1974년 4월의 민청학련 사건과 8월의 육영수 여사 피격사망사건을 거쳐 다시 10월이 왔다. 때마침 동아일보 문화부 김병익 기자와 장윤환 기자가 각각 기자협회장과 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장으로 선임되면서 새바람이 불었다. 언론자유는 말로 수호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었다. 10월에 들어와 학생 시위가 재연되고 기자들이 들썩이자 중앙정보부는 경영진과 편집진을 겁주어 언론을 통제하기 위해 10월23일에는 한국일보 장강재 사장과 김경환 편집국장을 월남사태 해설기사를 문제 삼아 연행했고, 동아일보에서도 송건호 편집국장이 서울 농대생들의 시위 기사를 중앙정보부 조정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게재했다는 이유로 연행했다. 기자들은 자연스럽게 송건호 편집국장 등이 귀가할 때까지 농성에 돌입했다. 밤샘농성을 마치고 10월24일 아침 동아일보 기자들은 역사적인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채택했다. 기자들은 “우리는 교회와 대학 등 언론계 밖에서 언론의 자유 회복이 주장되고 언론의 각성이 촉구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뼈아픈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이 선언을 동아일보가 게재하려 하지 않자 기자들은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10월24일치 신문은 날이 바뀌어 25일 새벽 1시에야 ‘자유언론실천선언’ 전문과 기자총회 관련기사가 1면 3단으로 보도된 채 제작되었다. 25일 아침 동아일보사 정문에는 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가 작성한 ‘기관원 출입금지’라는 경고문이 나붙었다. 화형식을 당하고 ‘개와 기자는 출입금지’라는 야유의 대상이 되지 않더라도 기자다운 기자이고 싶었던 한 사람의 인간이 가진 부끄러움이 젊은 그들을 여기까지 밀고 왔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자와 모르는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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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31일 수요일

한홍구 교수에게 듣는 박근혜와 유신“민중을 물어뜯은 사냥개를 거느리고 무슨 사과입니까?”


이글은 레프트21 2012-10-22일자 기사 '한홍구 교수에게 듣는 박근혜와 유신“민중을 물어뜯은 사냥개를 거느리고 무슨 사과입니까?”'를 퍼왔습니다.

다양한 저서를 통해 우리가 한국 현대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교훈을 배우는 데 큰 도움을 줘 온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사진)를 유신 40주년 당일에 만났다. 한홍구 교수에게서 박정희 독재와 그 계승자인 박근혜의 실체를 들었다. 
한홍구 교수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민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정수장학회 사건의 실체 등을 직접 조사하기도 했다. 
이런 조사와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쓴 《장물바구니: 정수장학회와 한국사회》(돌아온산)도 곧 출간될 예정이다. 

△‘걸어다니는 한국 현대사’ 한홍구 교수는 “박근혜는 겉은 육영수, 속은 박정희”라고 정리했다. 배경은 평화박물관 전시실. ⓒ사진 고은이

Q. 흔히 우파들은 경제 성장을 위해서 5ㆍ16 쿠데타나 유신이 불가피했다는 식으로 평가합니다. 
전혀 불가피하지 않았습니다.
5ㆍ16이 불가피했다면 육군 소장 박정희가 집권하려고 불가피했고, 유신은 3선까지 해 먹은 박정희가 더 집권하려고 불가피했던 거죠. 군인들이 총을 들고 나온다는 것은 민주국가에서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사안입니다. 
경제 발전이 필요했다 하더라도, 유신 체제는 박정희가 민주 사회의 지도자로서 그렇게 할 능력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죠. 박정희 본인이 민주 사회 부적응자예요.  
반대하는 놈들은 반체제 반국가로 몰아서 배제하거나 감옥으로 보내거나 한 게 박정희 체제였고. 그런 동원을 하려고, 국민을 감시하려고 고유번호를 부여했고요, 그 번호에 모든 정보를 집적시켜서 개인을 파악하고 통제하는 게 주민등록증 제도죠.
유신 시대가 어떤 시대냐 하면, 중앙정보부, 보안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같은 공안기관이 말 안 듣는 자식을 잡아다가 두둘겨 패니까 유지되는 체제란 말이죠. 두들겨 패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체제. 
그런데 우리 사회 민주화가 밀고 올라가는 그 힘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옛날보다 함부로 잡아다가 간첩 사건을 못 만드는 거지. 고문도 거의 없어졌죠. 그전에는 안심하고 고문을 했는데, 이제 고문을 하면 자기가 옷을 벗게 되니까. 개과천선을 해서 없어진 게 아닌 거야. 고문하는 자식들을 이제 국가가 더는 비호를 못 해주게 된 거예요. 
Q. 박정희 체제의 폐해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비유하면 될 거예요. ‘우리가 유신 시대에 지어진 집 속에 살고 있다.’ 그 집을 다시 지은 것도, 리모델링 한 것도 아니고. 도배 정도만. 도배도 그나마 하다 말았죠. 
결과를 갖고 모든 출발과 과정을 정당화하는 것, ‘하면 된다’라고 밀어붙이는 것, ‘총화단결’이라는 이름 하에 조금의 비판도 허락하지 않는 것, 민주 사회에서 다양한 이해 갈등을 조정하고 그것을 하나로 모아가는 과정을 비효율이라고 몰아붙이는 것 등. 
이런 사고방식 자체가 일본 군국주의의 사고방식이에요. 새끼 천황이라고 할까요? 박정희는 천황을 꿈꿨고, 그러다 보니 새끼 천황을 무지 많이 낳았어요. 사람들이 유신 체제가 1979년에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유신 이후에 13년간 군사독재가 지속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들이 누구냐면 유신 시대 박정희 경호원들이에요. 전두환이나 노태우 둘 다 경호실 작전차장보 지낸 자들 아닙니까. 그러니까 바로 박정희가 죽고 난 다음에도 박정희의 근위병들이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를 이어간 것이죠. 
지금도 박근혜가 국회의원 사상 검증 하자는 얘기를 거침없이 하잖아요. 사실 유신 체제가 그러다 망했거든요. 부마항쟁이 일어난 한 계기가 김영삼 국회 제명 아닙니까. 그때 김영삼 제명하는 과정이 사상 검증이었거든요. 
Q. 박근혜는 과거는 털어 버리고 미래로 가자고 합니다.
박근혜의 경우에 박정희 딸에다가 유신 시대 공주마마죠. ‘유신공주’라는 별명이 그냥 어린 공주가 아니고 왕비 없는 공주였단 말이에요. 유신 시대의 가장 상징적인 기둥이었단 말이에요.
[문제는] 본인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그 시대엔 그랬지만 돌이켜 보면 국민에게 많은 고통을 준 시대였다’ 이렇게 정리를 하면 되는데 그걸 옹호하고 정당화하잖아요. 이건 [딸이니까 박정희 잘못에 책임져라 하는 것과] 다른 문제입니다. 
우릴 과거로 끌고 가겠다는 것 아닙니까.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이고 본인이 유신 시대에 중요한 구실을 했기 때문에 뼛속까지 그런 것 아니냐 하고 우리가 다시금 상기하게 되는 것이죠.
대한민국 헌정사는 동일인에 의해서 헌법이 두 번이나 유린당하는 역사를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그 딸이 나와서 그 당시에 있었던 일들을 옹호한다면, 박근혜 후보가 집권하고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시기에, 정치적 위기 상황에 빠졌을 때, 혹은 본인이 집권해 보니까 좋더란 말야, 더 하고 싶어졌을 때, 동일한 방식으로 헌법을 유린하는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민주시민으로서 당연히 의구심을 갖게 되는 거죠.  
Q. 최근 정수장학회와 박근혜의 관계 문제가 다시 불거졌습니다.
사람을 석 달 동안 가둬 놓고 하는 게 강압이고 강탈이라는 것이고, 강탈된 재산이라면 당연히 돌려줘야 하는 게 맞는데, 그걸로 부모 이름으로 장학금을 주고 있다는 건 창피한 일입니다.
국가 기구가 개입해서 정수장학회가 처음 만들어질 때는요, 국가 차원의 장학회 사업이라고 해명을 했습니다. 박정희, 육영수 돈은 한 닢도 들어가지 않았죠.
그런데 지금은 아주 그냥 개인적인, 박정희 우상 사업이나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본인 자신이 정치인으로서 책임져야 할 문제,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죠.
예컨대 5ㆍ16 장학회를 만든 게 김지태의 개인적 재산을 탐낸 게 아니잖아요. 언론사를 뺏고, 그게 박정희의 언론 장악인 겁니다.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서 MBC 파업, 부산일보 파업 같은 게 일어나는 게 정수장학회 문제 아닙니까.
강탈 재산에 기대서 집권을 하겠다, 그걸 또 팔아서 선거에다 써 먹겠다 하는 거죠. 1971년도 선거를 보면, MBC 팔아서 박정희가 선거 치렀다고요. 그래서 지금 지분이 30퍼센트만 남은 거죠. 국회에서 그 의혹이 강력하게 제기됐습니다. 그 의혹을 제기한 이종남 의원은 유신 선포하고 난 다음에 헌병대에 끌려가서는 죽도록 고문 당했습니다.
이번에도 MBC 팔아서 선거를 치르겠다고 하는 것이 ‘부전여전’으로 느끼게 되는 거죠.
정수장학회 인맥 문제도 있어요. 김기춘 같은 사람은 장학회 1기 출신이에요. 나중에 검사 돼서 유신헌법 만든 실무자예요. 강기훈 유서 대필 때 법무부장관이었고, 지금 7인회에 있고.
국가적인 장학사업이라면 가난한 학생들이 능력을 발휘하도록 해야 하는데 결국은 유신의 앞잡이들을 키워낸. 그걸 지금도 박정회 우상화하는 일들을 하는 것으로 나오고요.
그런데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때 나쁜 짓 했던 놈들이 다 박근혜 캠프에 가 있다니까. 그러니까 클린검증 소위원장이니 뭐니 떠드는, 남기춘이니 이런 것들, 그때 다 지휘 선상에 있던 놈들이에요.
그런데 그게 민중을 물어뜯은 사냥개 아닙니까. 박근혜가 과거사 사과를 했는데, 그때 물어뜯은 사냥개들을 옆에 애완견처럼 거느리고 하는 사과가 무슨 놈의 사과야. 그러면서 그 놈이 ‘정수장학회 옛날 같으면 총칼로 빼앗아 오는데’ 그따위 소리 지껄이고 있는 게 무슨 과거사 사과냐고요.
Q. 박근혜가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말하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이명박이 우리 역사에서 정말 처음이었던 건 뭐냐면, 공동체에 대한 책임 의식이 이만큼도 없는 자가 집권을 한 거예요. 그게 박근혜를 낳게 하는 또 다른 거예요.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를 낳았던 겁니다. 이명박에서 박근혜로 가면 정권교체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난 박근혜가 잡으면 복지 할 거라고 생각해요. 나름대로 경제민주화도. 재벌개혁도.
대신 박근혜는 박근혜대로 할 겁니다. 방향이 틀리죠. 뭐냐면 박정희 시대를 기준으로 돌아가겠죠. 그때는 서열이 확실했잖아요. 대통령 밑에 한참 아래 재벌이 있는 거였는데 지금은 하는 얘기가 ‘권력은 시장이 있다’ 이런 거잖아요.
복지도 시혜로서의 복지죠. 권리로서의 복지가 아니라. 가령 1970년대 버스 차장들 있었잖아요. 굉장히 힘들었죠. 열여섯, 열일곱부터. 애들 등하교 시간을 보면 사람이 많으니까 차장이 문도 못 닫고 사람들 손으로 틀어 막고 출발해요. 그게 겨울이라고 해 봐요. 버스 사장 놈들이 저임금에 파카도 안 입혔다고.
그런데 ‘가카’는 그걸 그냥 가만 보고 계실 분이 아니거든(웃음). 그래서 방한복을 하나씩 사 줬어요. 그리고는 ‘박정희 각하께서 친히 고른 디자인이다’ 이러면서 나눠 주는 거예요. 신문에도 그렇게 내고.
[그러니] 시혜적 복지라는 것도 과거 회귀죠. 우리가 생각하는 건 권리로서의 복지. 박근혜 대통령께서 골라 주신 파카 입고 싶냐 아니면 [충분히 월급 받고] 백화점 가서 내 맘에 드는 파카 사 입고 싶으냐. 그 차이죠.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게.
복지 문제에서 노동이 빠진 복지가 어디 있어요. 우리가 경제민주화를 얘기하는 거는 노동 민주화를 얘기하는 거고 노동자가 권리를 갖고 임금 제대로 받고 [하는 거죠.] 동일임금 동일노동 원칙이 법적으로 강제가 되면 비정규직을 할 필요가 없잖아요.
노동 문제가 빠진 경제민주화는 사기라고 하는 거죠.
과거사 문제는 골치 아프죠. 피해 갈 수 없고. 그렇지만 박근혜의 발목을 잡는 문제지 박근혜를 쓰러뜨릴 문제는 아니에요. 진짜로 결정타를 날리려면, 미래에 대한, 민생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를 내놔야 돼요.
그러니까 대중에게 직접 와닿는 문제들을 갖고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얘기죠.
이번 대통령 선거는 한국 사회의 나아갈 바를 정하는 겁니다. 방향을 정하는 선거예요. 우리 세대한테는 노후가 달린 거고, 지금 20대들한테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가 달리는 문제예요.
그러니까 젊은이들이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짓는다고 생각하고 나서야 해요.

‘유체이탈(維體離脫)’(유신 40년 공동 주제 기획)

△유체이탈(維體離脫) 중 2부 ‘구국의 영단’ 전시전 공동 기획: 한홍구/최원준/김익현, 서울 종로 평화박물관의 미술 전시공간 스페이스 99 (10.17~11.7). 유체이탈 기획전은 전문예술사단법인 아트 스페이스 풀(구 대안공간 풀)과 사단법인 평화박물관의 미술전시공간 스페이스99이 공동 기획했다. ⓒ고은이

“유신체제에서 탈출하자, 유신체제를 벗고 떠나자”라는 뜻을 가진 이 전시회는 한홍구 교수와 뜻있는 예술가들이 모여 기획한 ‘유신 40년 공동 주제기획 6부작’ 전시 기획 프로그램이다. 
유신 선포 40년을 맞아 ‘10월 유신’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 파악하고, 몸과 마음에 남은 유신의 영향을 풍자ㆍ성찰하려고 공동기획한 프로젝트다.
10월 17일부터 11월 7일까지 평화박물관에서 6부작 중 2부 “구국의 영단” 전시전이 열리고 있다. ‘구국의 영단’은 당시 문화공보부가 유신을 홍보하려고 시리즈로 제작했던 작은 홍보책자의 제목에서 따왔다고 한다. 여러 전시물 중 하나인 위 사진 속 작품은 유신 정권이 유신의 정당성과 정권 홍보를 위해 사용한 이미지들을 모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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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문성 / 정리 김지윤ㆍ이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