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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9일 일요일

박근혜가 배운 건 가장 나쁜 모습의 박정희였다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12-08일자 기사 '박근혜가 배운 건 가장 나쁜 모습의 박정희였다'를 퍼왔습니다.

박정희의 1963년 대통령 선거 포스터. 생전에 세 번의 직선제 대통령 선거와 두번의 체육관선거를 치렀던 그는, 이제 딸을 통한 네 번째 직선제 선거를 통해 부활하려 하고 있다.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박정희의 네 번째 선거
세상이 바뀔까 두려워하는 수구세력이 “세상을 바꾸겠습니다”라는 구호를 들고 나온 것은 웃어넘길 수 있다. 그러나 유신세력이 이번 대통령 선거를 과거 세력과 미래 세력의 대결이라면서 자신들을 지지해달라고 하는 데 이르러서는 그냥 웃어넘길 수 없는 모멸감을 느낀다. 혹자는 이번 선거를 박정희 대 노무현의 대결이라고 하고, 또 1차 티비 토론 이후에는 다카키 마사오 세력 대 김대중 · 노무현 세력의 대결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유신과 오늘’에서는 이번 대통령 선거를 박정희의 네 번째 대통령 선거라는 관점에서 그 의미를 짚어보도록 하겠다.국가예산의 10%를 퍼부었던 1971년 대선박정희는 1963년 8월 30일 전역식에서 눈물을 흘리며 “본인과 같이 불운한 군인이 또 다시 없도록” 운운하며 군복을 벗는 소회를 밝혔다. 20세기 지구의 곳곳에서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수많은 군인아저씨들은 거의 다 군복을 입고 통치했지만, 박정희는 군복을 벗고 선거를 치러야 했다. 남북분단이 동서냉전의 대리전을 수행하던 현실에서 미국은 자신의 쇼윈도에 군복이 걸려있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군부 일각에서는 원래의 공약대로 군은 깨끗하게 원대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수도경비사령부 군인들은 군정을 연장하라고 데모하기도 하고, 박정희는 오락가락 갈팡질팡 번의에 번의를 거듭하다가 결국 군복을 벗고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박정희와 윤보선이 격돌한 제5대 대통령 선거는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15만 표로 가장 표차가 적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승부가 갈린 것은 윤보선이 박정희의 ‘여순반란 사건’에 관련된 좌익 전력을 거론하며 제기한 사상논쟁이었다. 사상논쟁은 윤보선의 기대와는 달리 역효과가 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국에 널리 퍼져있던 좌익관련자들이 적극적으로 박정희를 지지해 여기서 승부가 갈린 것이다.평생 권력을 움켜쥐고자 했던박정희는 두 번의 임기뒤삼선개헌안을 날치기 처리했고유신쿠데타 통해 국민들이대통령 뽑을 기회마저 빼앗았다퍼스트레이디 박근혜가 배운 건권력에 취해 비틀거리는가장 나쁜 모습의 박정희였다유신의 부활이냐 종말이냐우린 그 선택의 갈림길에 서있다1967년 5월 3일의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윤보선과 재격돌했다. 야당은 오랜 분열을 극복하고 신민당이라는 통일대오를 만들었지만, 후보로는 윤보선을 다시 내세웠다. 51세 박정희와 71세 윤보선의 대결, 가난한 농민의 아들임을 내세우는 박정희와 서울의 대부호 양반가의 후예 윤보선의 대결은 구도가 좋지 않았다. 이제 막 경제개발계획이 궤도에 오르고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돈이 풀리면서 국내의 경제상황도 나쁘지 않았다. 아직 박정희의 독재가 본격화되기 이전이었고, 박정희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자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박정희는 4년 전 15만 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이긴 윤보선에게 116만 표 차이의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제3공화국 헌법은 4년 중임의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었는데, 중임 임기가 끝나는 1971년에 55세가 되는 박정희는 권력을 내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삼선개헌을 염두에 두고 한 달 여 후인 6월8일에 치러진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개헌이 가능한 의석수를 확보하기 위해 초유의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박정희는 이렇게 확보한 개헌가능 의석을 이용하여 삼선개헌안을 국회에서 날치기로 ‘처리’했다. 다른 신문들은 ‘통과’라 썼지만, 동아일보만은 언론의 자존심상 ‘통과’라는 말을 쓸 수 없어 ‘처리’라고 했다고 한다.1971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는 비록 야당이 패배하긴 했지만,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박진감 넘치는 선거로 꼽힌다. 대통령 선거를 1년여 앞 둔 시점에서 신민당 유진오 총재가 갑자기 뇌일혈로 쓰러졌다. 야당으로서는 1956년과 1960년 대통령 선거 당시 신익희 후보와 조병옥 후보가 갑자기 세상을 뜬 데 이어 또 다시 불행한 사태를 맞은 것이다. 이때 신민당의 원내총무였던 42세의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왔다.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이 출마한 신민당 내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을 주창한 김영삼이 예상대로 1위를 차지했지만, 과반수 득표에 실패해 2차 투표에 돌입했다. 여기서 이변이 발생해 2위였던 김대중이 후보로 선출되어, 박정희와 맞붙게 되었다. 박정희는 1967년의 6·8총선에서 김대중을 낙선시키기 위해 김대중의 지역구인 목포에서 국무회의를 열 정도로 김대중을 싫어했다. 그런 김대중과 경쟁하는 것은 박정희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했다. 이렇다 할 쟁점을 만들어내지 못했던 윤보선과는 달리 김대중은 예비군 폐지, 4대국 보장론, 대중경제론 등 참신한 공약을 쏟아냈다.박정희는 사회의 구성이 고도화되면서 자연스럽게 분출되는 각계각층의 요구를 수용하고 조화시킬만한 능력도, 품성도 갖고 있지 않았다. 박정희가 본격적으로 지역감정을 이용한 것도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부터였다.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보로 박정희 측의 선거에 깊이 간여했던 강창성이 뒤에 고백한 것처럼, 이들은 “모든 부정을 저질러서 박 후보의 당선을 만든 것”이었다. 1971년 국가예산은 5242억이었는데, 박정희 정권이 이 선거에 국가예산의 10퍼센트가 넘는 700억을 퍼부었다. 박정희는 이런 엄청난 부정을 자행하고도 정치신인에 가까운 김대중과의 표차를 94만 표밖에 벌리지 못했다. 1956년의 조봉암 때와 마찬가지로 김대중이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이 떠돌았다.유신체제 의전서열 2위와 최태민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큰 쟁점이 된 것은 총통제 문제였다. 김대중은 이번에 박정희의 집권을 저지하지 못하면 박정희가 총통제를 실시하여 영구집권을 꾀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박정희는 김대중이 유언비어를 퍼뜨린다면서 이번이 국민여러분께 자신을 찍어달라고 부탁하는 마지막 선거라고 호소했다. 역설적인 일이지만 박정희는 이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유신쿠데타를 통해 국민들에게서 대통령을 선출할 권리를 빼앗아갔기 때문에 더 이상 국민에게 자신을 찍어달라고 부탁할 일을 원천적으로 없애버렸다. 당시 국민학교에서도 반장은 학생들이 직접 뽑았는데, 국민들은 제 나라의 대통령을 뽑을 수 없었다. 박정희는 1972년과 1978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두 번이나 더 대통령에 ‘선출’되었지만, 이것은 선거가 아니라 선거놀음일 뿐이었다. 1987년 6월항쟁에서 구호는 복잡하지 않았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민주쟁취” 16글자에 집약된 뜻은 한 마디로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자는 것이었다.박근혜 후보를 흔히 유신공주라 부른다. 그런데 공주라는 말은 가끔씩 오해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1974년 여름 이후 박근혜는 유신체제에서 어린 공주가 아니라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했다. 왕비가 없는 상태에서 공주는 유신체제의 의전서열 2위로 유신체제의 핵심적인 구성부분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권력의 정점에 섰다. 박근혜는 외모는 어머니 육영수의 온화한 모습을 많이 닮았지만, 속은 영락없는 박정희였다. 박근혜는 아버지로부터 권력의 생리와 운영방법을 배웠지만, 불행하게도 박근혜가 보고 배운 시기의 박정희는 권력에 취해 비틀거리는 가장 나쁜 모습의 박정희였다. 박정희도 처음부터 언로가 막혀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초기의 박정희는 부들부들 떨고 재떨이 집어 던질지언정 기자들하고 논쟁도 했고 대드는 기자들을 중용하기도 했다.박정희가 그래도 기자들과 막걸리를 앞에 두고 때로 고성이 오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시절이 있었던 반면, 박근혜는 처음부터 얼음공주였다. 선거의 핵심과제인 경제민주화의 상징으로 힘들게 모셔온 김종인 전 의원조차 가차 없이 잘라버리는 상황에서 박근혜의 눈이 발하는 레이저광선 앞에 모두들 침묵해버리고 만다. 최근 교통사고로 숨진 이춘상 보좌관의 죽음은 그가 박근혜 후보에게 그래도 불편한 진실을 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측근이었다는 점에서 박근혜 후보에게는 치명적인 손실이 아닐 수 없다.박근혜 후보와 관련된 여러 가지 부정적인 이야기의 90퍼센트 이상은 구국선교단 총재라는 최태민이라는 정체불명의 인물과 연관되어 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바에 따르면 주한미대사 버시바우는 “최태민이 박근혜의 인격형성기에 박근혜의 몸과 영혼을 완전히 통제”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2007년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그 소문의 대부분이 박근혜 후보의 동생인 박근령 등 최측근이나, 박정희를 가장 열심히 찬양한 조갑제나 요새 TV토론에 보수진영을 대표하여 가장 빈번히 얼굴을 내미는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진 같은 사람의 취재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는 점이다.박근혜는 박정희 사후 영남대 이사장에 취임했으나, 학생들의 반발로 곧 이사장 직을 사임하고 평이사로 내려앉았다. 영남대학은 영남학원 상임이사 김정욱, 곽완석 사무부처장, 손윤호 영남병원사무장, 조순제 영남투자전무 등 박근혜가 임명한 측근 4인과 이사진이 1인당 2천만 원이라는 거액(현재는 2~3억 가치)을 받고 30여명을 부정입학시킨 사실이 적발되었다. 이들과 이사진은 마땅히 감옥에 가야 하는 것이었으나, 박근혜와 측근들이 영남학원에서 영원히 손을 떼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이때 박근혜와 함께 사임한 이사진은 상임이사 김정욱, 이사 김창환, 손미자 등인데, 이들은 모두 정수장학회의 이사를 지냈다. 이들 중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지낸 김창환은 최태민의 사촌, 조순제는 최태민의 의붓 아들, 손윤호는 최태민의 처남으로 알려져 있다. 영남학원 이사진에서 부정행위로 쫓겨난 자들을 박근혜는 정수장학회에서 여전히 이사로 기용했다. 현재 박근혜를 보좌하고 있는 보좌진들의 골격은 최태민의 사위인 정윤회가 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버시바우가 한국의 라스푸틴이라고 평한 최태민의 그림자가 박근혜가 흉탄에 어머니를 잃은 황망했던 어린 시절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것이다.윤봉길 의사 80주기, 다카키 마사오를 생각한다볼셰비키혁명을 촉발했다고 일컬어지는 제정러시아 시대의 괴승 라스푸틴은 황제까지 혹하게 만들었으나, 박정희가 최태민에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의 비서실장이자 술 친구로 10 · 26 사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인 김계원이 적나라하게 폭로한 것처럼 박정희는 “그 X(최태민)가 그 X(박근혜)를 홀렸다”며 최태민과 박근혜에 관한 보고서가 올라오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고 김계원에게 호소했다고 한다. 최태민은 박정희보다도 5살이나 많았는데, 최태민의 존재는 박정희는 물론이고 비서실장 김계원, 민정수석 박승규, 정보부장 김재규 등의 골칫거리였다. 운명의 10월 26일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는 항소이유서 보충서에서 10·26사건의 먼, 그러나 중요한 이유의 하나로 최태민 문제를 꼽았다. 박정희를 친형처럼 따랐던 김재규로 하여금 박정희의 통치능력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만든 계기였던 것이다.

올해 대선일인 12월19일로부터 정확히 80년 전인 1932년 12월19일 일본의 처형장에서 벌어진 일. 일제는 윤봉길 의사의 눈과 이마를 헝겊으로 가린 뒤 10m 거리에서 딱 한 발의 총알로 이마 정중앙을 명중시켜 핏자국으로 일장기 모양을 만들었다.

박근혜는 “곳곳마다 새마을 사람마다 새마음”이라는 구호 아래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을 본 따 새마음 운동을 전개했다. 최태민이 부추긴 공주놀음에 푹 빠져 아버지 속을 지지리도 썩인 딸은 나이 지긋한 교장선생님이나 지역의 원로인사들을 모아 예행연습까지 시키며 몇 시간 씩 줄지어 세워놓고 효도에 대한 강연을 했다. 시골에 가면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영애님 오셨다고 큰 절을 했다. 육영수는 말할 것도 없고 박정희도 이런 절을 받지는 않았다며 김재규는 왜 어린 박근혜가 노인들 절 받느냐고 탄식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최태민 문제로 골치를 썩으며 검찰에 수사를 지시하고 봉건시대의 임금마냥 최태민을 불러 친국을 행하는 등 최태민을 떼어 놓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다 썼으나 울며불며 난리 치는 박근혜를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 “에미도 없는 게 시집도 안 가고 애쓰는 게 불쌍하다”는 박정희의 동정이 화를 키웠다면, 지금도 박근혜를 불쌍하다고 여기는 일부 대중들의 값싼 동정이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18대 대통령 선거에서 핵심 과제는 경제민주화이다. 1948년 제헌헌법은 한 발 오른 쪽으로 가긴 했지만, 독립운동가들이 꿈꾸었던 나라의 모습을 온전히 담고 있다. 불행하게도 친일파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제헌헌법은 국가보안법에 깔려 질식당하고 말았다. 대한민국 헌정사는 박정희라는 동일인물에 의해 1961년과 1972년 두 차례나 짓밟힘을 당했고,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했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죽으면서 민주주의가 소생의 기회를 맞이했으나 또 다시 박정희의 경호장교였던 전두환, 노태우 일당에 의해 피비린내 나는 광주의 학살을 겪어야 했다. 1987년의 6월항쟁은 간신히 정치적 민주주의만을 회복했다. 안타깝게도 정치적 민주화의 과실은 일반 시민들보다도 재벌과 관료와 수구언론이 따먹어 버렸고,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와 외환위기의 광풍 속에서 양극화의 나락에 빠지고 말았다. 6월항쟁으로부터 25년이 지난 2012년 한국사회는 다시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 이명박이 가져온 역사의 퇴행은 한 발 더 나아가 박정희의 부활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우리는 박정희의 부활이냐, 정치적 민주화에 이은 경제민주화를 성취하느냐의 갈림길에서 2012년의 선거를 치르게 된다.12월 19일은 윤봉길 의사의 80주기가 되는 날이다. 일제는 1932년 12월 19일, 일본 이시카와현 미고우시 육군공병작업장에서 가장 악질적이고 모욕적인 방법으로 윤봉길 의사를 처형했다. 일제는 25세의 청년 윤봉길의 무릎을 꿇려 낮은 십자가에 붙들어 매고는 눈과 이마를 헝겊으로 가렸다. 그리고 10미터 거리에서 딱 한 발의 총알로 윤봉길 의사의 이마 정중앙을 명중시켰다. 피가 흘러나와 헝겊을 붉게 물들였으니 저들은 윤봉길 의사의 죽음으로 일장기를 그린 것이다. 박정희가 하필이면 자신이 롤모델로 삼았던 명치유신의 지도자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날을 골라 자신의 제삿날로 삼은 것도 심상치 않은 우연이지만, 윤봉길 의사의 80주기 되는 날이 18대 대선일인 것도, 그 날이 다카키 마사오를 숭상하는 세력과 민주세력의 한판승부가 벌어지는 것도 범상치 않은 우연이다.

2012년 12월 8일 토요일

다카키 마사오의 ‘생얼’...‘충성혈서’, ‘남로당’, ‘여성편력’


이글은 민중의소리 2012-12-07일자 기사 '다카키 마사오의 ‘생얼’...‘충성혈서’, ‘남로당’, ‘여성편력’'을 퍼왔습니다.
무소불위의 권력 휘두른 박정희의 또 다른 이름...남로당 가입했다 조직원 명단 제공하고 살아남아

"외교의 기본은 나라의 주권을 지키는 것이다. 충성혈서 써서 일본군 장교가 된 다카키 마사오, 누군지 알 것이다. 한국이름 박정희. 해방되자 쿠데타로 집권하고 사대매국 한일협정 밀어붙인 장본인이다."

지난 4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주최 대선 후보 TV토론회에서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는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앞에 두고 1970년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유신정권 박정희 전 대통령의 또 다른 이름 '다카키 마사오'를 언급했다.

외교정책 방향을 묻는 사회자의 공통질문에 대한 답변에서였다. 이 후보는 이어 "(박정희 전 대통령은) 좌경용공으로부터 나라를 지킨다며 유신독재 철권을 휘둘렀다. 뿌리는 속일 수 없다. 친일과 독재의 후예인 박 후보와 새누리당이 1년 전 한미FTA를 날치기 통과해서 경제주권을 팔아먹었다. 대대로 나라주권 팔아먹는 이들이야 말로 애국가를 부를 자격도 없다. 날치기 한 뒤에 애국가 부르면 용서되냐. 한미FTA 날치기 동참한 사람은 국정 책임지겠다고 하면 안 된다. 경제주권 포기하고 무슨 염치로 헌법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겠다는 취임 선서를 할 수 있냐"라고 일갈했다.

토론회가 끝나고 트위터 등 SNS에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박근혜 후보에게 '돌직구'를 던진 이정희 후보의 "다카키 마사오", "전두환 6억", "박근혜 후보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라는 등의 발언이 화제가 됐다. 특히,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중파에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었던 '다카키 마사오'는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를 정도로 네티즌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친일인명사전 육사 생도 시절.(앞줄 오른쪽 끝이 박정희)

일본군 장교 되기 위해 '충성혈서'까지 써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본군 장교가 되기 위해 혈서를 써 일본에 충성을 맹세했다는 '충성혈서'에 대한 조명도 다시 이뤄졌다. 1917년 경상북도 선산에서 태어난 박정희는 1937년 3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경북 문경면의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박정희는 교사로 재직 중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1932년~1945년 일본이 중국 동북 지방에 세운 국가)의 군관에 지원했으나 탈락했다. 조갑제가 쓴 '박정희' 1권 - 군인의 길'에는 박정희가 교사를 그만두고 군인의 길로 들어설 결심을 하는 과정이 서술돼 있다. 조갑제는 박정희와 함께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던 유증선과 인터뷰를 해 당시 상황을 파악했다. 

유증선은 박정희가 충성 혈서를 쓰게 된 과정을 아래와 같이 진술했다. 

"1938년 5월경이라고 생각된다. 숙직실에서 같이 기거하면서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였다. 박 선생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아무래도 군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제 성격이 군인 기질인데 문제는 일본 육사에 가려니 나이가 많다는 점입니다. 만주군관학교는 덜 엄격하다고 하지만 역시 나이가 걸립니다.'"

박정희는 유증선에게 고향에서 면장을 하고 있는 형 박상희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래서 유증선은 형의 도움을 받아서 호적을 고칠 수 있지 않냐고 조언했다. 유증선은 박정희가 며칠 고향을 다녀와서 호적을 고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도 고민은 남았다. 신원조회를 하면 학교 기록과 호적이 틀려 말썽이 일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유증선과 박정희는 어떻게 하면 만주군관학교 사람들이 환영할 수밖에 없는 행동을 취할 것인가 연구를 하고, 유증선이 손가락을 잘라서 혈서를 쓰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자 박정희는 즉석에서 행동에 옮겼다. 

박정희는 충성 혈서까지 작성해 만주 군관학교에 지원했으나 탈락하고 만다. 당시 정황이 만주지역에서 발행되던 일본어 신문인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자에 '혈서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로부터'라는 제목으로 상세히 보도됐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 박정희 편에 만주신문 기사 전문이 실려있다. 

ⓒ친일인명사전 다카키 마사오의 혈서 군관 지원을 소개한 1939년 3월31일 '만주신문'

혈서(血書)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訓導)로부터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고 피로 쓴 반지(半紙)가 봉입(封入)된 등기로 송부되어 관계자(係員)를 깊이 감격시켰다. 동봉된 편지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아무쪼록 국군(만주국군-편집자 주)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중략)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편집자 주)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후략) 

라고 펜으로 쓴 달필로 보이는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자격 연령 16세 이상 19세이기 때문에 23세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만주신문』 1939.3.31. 7면)

박정희는 1939년 10월 만주 무단장시에 소재한 제6관구 사령부에서 4년제 만주국초급장교 양성기관인 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 제2기생 선발 입학시험을 치르고 1940년 1월에 15등으로 합격했다. "긴 칼을 차고 싶은" 꿈을 이룬 박정희는 1940년 2월 문경공립보통학교를 그만두고 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박정희는 1942년 10월 성적 우수자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입학했다. 일본육사를 졸업한 뒤 1944년 7월 만주국군 제6관구 소속 보병 제8사단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같은 해 7월 하순경부터 8월 초순까지 제8단의 2개 대대가 일본군과 합동으로 팔로군(일본군과 싸운 중국공산당 주력부대)을 공격할 때 소대장으로 작전에 참가했다. 

ⓒ박정희(조갑제 저) 처자식을 두고 있던 박정희(앞줄 오른쪽 끝)는 1948년 이현란(앞줄 왼쪽 끝)을 만나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동거를 시작한다.

그러나 박정희는 1950년 실연의 아픔을 겪으면서 술로 보낸 나날이 많았다. 박정희는 김호남과 결혼해 딸 박재옥을 두고 있었는데, 처를 탐탁치 않게 여겨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홀로 살다시피 했다. 그러다가 박정희는 1947년 가을 동료 결혼식에서 우연히 만난 이화여대 학생 이현란에게 마음을 뺐긴다. 이현란은 몸매는 날씬하고 얼굴은 이국적으로 생긴 미인이었는데 1948년 두 사람은 연애를 시작하고, 약혼식까지 올리고 용산의 관사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박정희는 결혼을 했고 아이까지 있다는 사실을 숨겼고, 이현란 몰래 본처 김호남과 이혼을 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남편에게 설움을 많이 당한 김호남은 '당신도 당해 보라'는 심정으로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던 차에 남로당 사건으로 박정희가 구속되고, 이현란은 박정희가 이미 결혼을 했고 아이까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실망한 이현란은 1950년 2월 동거하던 용산 관사에서 짐을 싸들고 나가 박정희와 인연을 끊는다. 실의에 빠져 생활하던 박정희는 다른 여자를 소개받는데, 그가 바로 육영수다. 박정희는 김호남과는 이혼하고 1950년 12월 12일 육영수와 결혼했다. 모두 1950년 한 해에 벌어진 일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재임 중 화려한 여성 편력은 잘 알려진 얘기인데, 여성 편력은 이미 육군 초급 장교 시절부터 시작된 오래된 줄거리인 듯 하다. (*기사작성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친일인명사전'과 '박정희'(조갑제 저) 참고함.)

정웅재 기자 jmy94@vop.co.kr

2012년 12월 7일 금요일

미주 조선일보 “대선후보 TV토론, 박근혜 압승”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12-06일자 기사 '미주 조선일보 “대선후보 TV토론, 박근혜 압승”'을 퍼왔습니다.

 
미주 조선일보 1면.

박 후보에 유리하게 토론 결과 왜곡해 보도
이정희 후보 ‘다카키 마사오’ 발언 언급없어

미국에서 발행되는 (미주 조선일보)가 “한국 대선 첫 텔레비전 토론, 박근혜 압승”이라고 보도(4일치 1면)해 논란이 일고 있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에게 날선 공격을 당했던 토론회 내용은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토론회를 생방송으로 볼 수 없는 미국 동포들에게 토론 결과를 박근혜 후보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왜곡해서 전달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미주 조선일보)는 해당 기사에서 “첫 텔레비전 토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를 굳힐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풀이된다”며 “워싱턴 동포사회는 대체적으로 박근혜 후보가 압도한 무대였다는 평가가 잇따랐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실제 이날 토론회에서 가장 화제가 됐던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본이름 ‘다카키 마사오’ 등을 거론한 이정희 후보의 박근혜 후보에 대한 공격이었고, 누구에게도 압도적인 토론회는 아니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이 신문은 또 “동포들은 박근혜 후보의 승리를 독려하는 한편 문재인 후보나 이정희 후보에 관한 보수 성향 동포들의 비판적인 발언도 쏟아냈다”고 전했다. 이어 기사 말미에 “문재인 후보와 이정희 후보는 너무 네거티브(부정적인)한 모습으로 나와 이상적인 정책 제시가 부족한 것 같다”고 말한 한 재미동포 유권자의 견해를 실었다.이 동포의 인용문 역시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정희 후보가 박근혜 후보에 대한 네거티브 공격을 한 것은 맞지만, 문재인 후보는 네거티브 공격을 거의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박 후보가 문 후보에게 네거티브 공격을 하자 문 후보가 “캠프에서만 그러는 줄 알았는데 박 후보조차 네거티브를 할 줄은 몰랐다”고 실망하는 표현을 하기도 했다.이 보도의 내용이 트위터 이용자들에 의해 국내에 알려지자 균형을 상실한 보도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트위터 아이디 @seojuho는 “조선일보가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여론조작 발악중이다”고 말했고, @DrMyung는 “창의적인 헤드라인”이라며 비꼬았다. @Wind***는 “압승하면 뭐하겠노? 기분조타꼬 미친 소고기나 사묵겠지요”라고 조롱했다. 재미동포로 보이는 한 누리꾼(@hyekim1)은 “이 기사보고 미주 한인들 뒷목잡았답니다”라고 분위기를 전했다.그러나 (미주 조선일보)는 “문제없는 보도”라는 입장을 밝혔다. (미주 조선일보) 관계자는 6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박근혜 후보가 토론에서 우세했던 것을 압승이라고 표현한 것이 논란이 되고 있는 것 같은데, 특별히 문제 있는 보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박 후보를 두둔하려고 쓴 기사가 아니다”고 해명했다.논란이 커지자 (조선일보)는 6일 오전 자사 누리집을 통해 “미주 조선일보의 보도는 조선일보와 관련이 없다. 현지 동포가 조선일보와 계약을 맺고 조선일보에 게재된 일부 기사를 전재하고, 현지 뉴스를 합쳐서 발행하고 있다”며 “현지 신문 종사자들도 조선일보의 직원이 아니다”고 밝혔다.(미주 조선일보)는 미국 워싱턴 등 한인 가정에 배달되는 신문으로 매일 3만부를 발행하는 한글 일간지다.한편, 재외국민 대통령 선거가 6일부터 시작됐다. 미국의 투표소는 로스엔젤레스 등 12곳에 설치됐고 투표함은 국내로 보내져 대선일인 19일 오후 6시에 개봉한다.

허재현 기자catalunia@hani.co.kr

2012년 12월 5일 수요일

첫번째 대선 TV토론 '정희에게 완전히 당한 정희의 딸'


이글은 미디어스 2012-12-04일자 기사 '첫번째 대선 TV토론 '정희에게 완전히 당한 정희의 딸''을 퍼왔습니다.
예상 밖의 '이정희 쇼', 특별 게스트는 '다카키 마사오'

‘이정희의, 이정희에 의한, 이정희를 위한’ TV토론이었다. 대선후보 TV토론이 ‘메가톤급’ 이정희 변수로 인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전개됐다. 토론 개시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혀 주목받지 않던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는 TV토론 내내 박근혜-문재인 후보를 압도하며 토론을 지배했다.

▲ 첫번째 대선 TV토론의 승자는 예상 밖으로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였다.

이정희 후보는 특히, “박근혜를 떨어뜨리려고 나왔다”, ”충성혈서를 써서 일본군 장교가 된 다카기마사오, 한국이름 박정희“ 등의 발언을 통해 최강의 ‘저격수’ 역할을 자임하며  박근혜 후보를 벼랑 끝까지 몰았다. 이 후보의 집중적인 공세에 박 후보는 시종일관 당황한 모습을 보였고, 경제 분야 질문에서는 ”대선에 왜 나왔느냐“는 ‘멘붕’적 질문을 하는 등 토론 내내 홀린 사람처럼 기세에 눌려있는 인상이 역력했다. 이에 대해 한 네티즌은 ”정희의 딸이 정희에게 완전 당했다“는 촌철의 평을 남기기도 했다.
이 후보가 첫 번째 TV토론의 지배자였단 점은 생방송 시작과 함께 검색어 순위 1위에 오른 이후 토론이 끝난 이후까지도 계속 검색어 순위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지난 통진당 부정경선 사태로 대중의 관심에서 완전히 멀어졌던 이 후보가 박근혜 후보에 대한 최강의 공세를 통해 다시 대중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형국이다. 토론회가 끝난 직후 검색어 순위 2위는 이 후보가 토론 중간 언급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본이름인 ‘다카기 마사오’가 차지했다는 점 역시 박 후보가 이번 토론을 통해 무엇을 잃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후보의 활약이 워낙 압도적인 것이어서 다른 쟁점과 논점들은 잘 부각되지도, 전달되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TV토론을 통해 반격의 계기를 마련하겠다던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는 안정된 모습을 보이며, 선방했지만 이 후보의 기세에 눌리며 뚜렷한 이미지를 남기진 못했다.
하지만 TV토론의 성패가 당장의 ‘공격성’과 ‘후련함’보다는 ‘누가 대통령답게 보이는가’의 이미지에서 결국 갈린다는 점을 감안할 때, 문 후보의 ‘안정감’은 향후 대선 레이스 전체에 상당한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아직 TV토론이 2번 더 남은 상태에서 이 후보가 박 후보에 대한 ‘저격수’를 자처해 이에 대한 부담에서 자유로워진 문 후보가 정책과 수권능력 중심의 토론으로 역할 분담을 할 수 있다면 박 후보 입장에선 ‘재앙’과 같은 상황이 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토론 중계가 끝난 직후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순위.

이런 상황은 박 후보가 지속적이고 완고하게 ‘양자토론’을 거부해왔단 점을 감안하면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다. 박 후보 입장에선 여간해선 공론의 장에 등장하지 않던 치부가 여과 없이 공중파 생중계를 통해 노출되는 상황에서, 보수 후보로서의 안정적인 모습까지 보여줘야 하는 이중고를 안게 됐다. 더욱이 문재인-이정희 후보가 모두 변호사 출신의 달변으로 개성은 다르지만 비교적 전달력 있게 주장을 설파하는 반면, 박 후보는 이에 비해 상대적 눌변으로 토론 자체에 약점이 있단 점을 감안하면 향후 이러한 구도의 토론은 큰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이미지 정치’의 특성을 근거로 ‘피해자’ 이미지를 얻게 된 박 후보 역시 지지층 결집 효과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박 후보의 지지층이 이미 완전히 결집해있는 상황이란 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박 후보의 횡설수설과 대처력 미흡은 지도자로서의 자질에 회의감을 확산해 어떻게 보더라도 박 후보에게 득보단 실이 훨씬 커 보인다. 만약, 이정희 후보가 당선을 목적으로 하는 후보라면 이러한 방식의 공세가 이 후보 본인의 이미지에는 타격이 될 수 있겠지만, 이 후보는 그런 목적이 아니라는 점을 이미 분명히 한 상황이라 박 후보가 뾰족한 대처법을 찾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래서 벌써부터 일각에서는 ‘새누리당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예 TV토론 자체를 거부할 것’이라는 이른 전망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번 토론의 경우 선관위가 만들어낸 ‘독특한’ 룰 때문에 번번이 토론의 흐름이 끊겨 향후 반드시 보완해야 함을 드러냈다. 상호 간의 반론과 재반론이 허용되지 않는 토론 형식과 사회자가 미리 준비한 질문에 대해서 준비해온 답변을 늘어놓는 전개로는 제대로 된 비교와 검증은 한계가 분명했다. 토론이 끝난 직후 노종면은 “전체 112분 간의 토론 시간 가운데 기대를 모았던 ‘박근혜-문재인 후보의 양자 토론’은 단 21분에 불과했고 사회자 멘트가 무려 16분에 달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는데, 이는 이번 TV토론이 지닌 문제점을 그대로 보여주는 수치라고 할 수 있다.

김완 기자  |  ssamwan@gmail.com

2012년 10월 24일 수요일

유신의 추억-다카키 마사오의 전성시대


이글은 대자보 2012-10-24일자 기사 '유신의 추억-다카키 마사오의 전성시대'를 퍼왔습니다.
초등생 때 시월유신 찬양 노래 부르게 한 그들의 후예가 돌아온다

▲ 시청광장 '유신의 추억' 영화 시사회 © 김철관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2년 10월 17일 선포한 '유신시대'의 폭력적이고 비민주적인 정치형태를 고발한 다큐멘터리 영화 (유신의 추억-다카키 마사오의 전성시대)가 민주통합당 유승희 국회의원과 M2픽처스 주최로 23일 오후 2시 국회시사회가 국회도서관 지하 강당에서 열렸다. 부제로 붙은 '다카키 마사오의 전성시대'의 다카키 마사오는 일본 제국주의 군인으로 지원해 부역한 박정희 전대통령의 일본식 이름이다. 

국회 상영이 끝나고, 저녁 7시 시청 서울광장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우리시대의 유신' 행사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시사회가 열렸다. 이 다큐 영화는 10월 유신선포 40년을 맞아 유신독재의 폭압성의 본질을 조명했다. 

이날 저녁 서울광장 잔디밭에 모인 시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컵라면, 막걸리, 과자 등을 먹으며, 편안한 상태에서 영화를 관람했다.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져 주최 측 예상 인원과 빗나갔지만, 나름대로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관람한 듯했다. 

▲ 23일 오후 열린 국회시사회에 입장하는 관객들 © 김철관

영화가 상영된 잔디밭 주변에는 가방, 스카프, 신발, 액세서리 등을 파는 중고 벼룩시장이 열렸고, 유신관련 그림(회화, 즉석에서 회화를 그리는 퍼포먼스 등), 사진 전시회 등도 선보였다. 벼룩시장 부스 하나에 1만원의 후원금을 내고 왔다는 한 상인의 말이 솔깃하게 들리기도 했다. 영화제작 후원금을 의미한 것이었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첫 스크린에 나타난 요즘 청소년들의 '유신'에 대한 상식이 전무하다는 사실이었다. 한 젊은이는 유신에 대해 묻자 '김유신 장군의 시대'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느낀 점은 현 시대를 살아가면서 40년 전의 역사인 박정희 '유신 독재' 정치에 대해 전무한 요즘 젊은이들이 꼭 봐야할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해도 했다. 지금 현재 40살인 사람들도 당시 한살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한마디로 50살이 넘지 않고서는 역사시간 등을 이용해 배우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50대인 나에게도 40년이 지난 유신의 추억이 생생히 자리잡고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쯤으로 기억된다. 어쩌면 인간의 뇌가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40년 전의 기억을 생생히 되살릴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교실 옆 자리에 앉은 친구는 생각나지 않는다. 뇌는 작위적으로 기억해야할 부분들만 메모리에 저장해 놓는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새삼 느꼈다. 

초등학교 4학년때 쯤의 일이다. 겨울 방학을 마치고 3월 봄개학을 했다. 새로운 담임 선생님을 맞았고, 그 선생님은 풍금을 잘 치는 여선생님이었다. 당시 3월 중순 정도 됐을까 선생님은 아침 조회를 끝내고 노래를 가르쳐야 한다며, 풍금 앞에 앉아 한 대목 한 대목을 크게 복창하라고 했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무조건 따라 했다. 

▲ 시청광장 '유신의 추억' 영화 시사회...인혁당 사형수 8명의 영정에 무죄라는 글씨가 나온다. © 김철관

바로 영화 '유신의 추억'을 보면서 40년전 시골 초등학교에서 경험했던 '유신의 추억'이 생각난 이유였다. 뭘 모르고 철없이 불렀던 노래가 성인이 돼 유신 찬양 노래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부터 10까지 가사를 붙여 부르는 노래였다. 노래를 잊을 수 없어 지금까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노래 가사를 적어 본다. 

1, 일하시는 대통령 2, 이 나라에 지도자 3, 삼일정신 받들어 4, 사랑하는 겨레위해 5, 오일육(5.16) 이룩하니 6, 육대주에 빛나고 7, 70년대 번영은 8, 팔도강산 뻗쳤네(8.15 못지않네) 9, 구국의 새 역사를 10, 시월유신 정신으로 유신 하면 생각 나는 어릴 적 추억의 노래이다. 

이날 서울광장에서 영화가 시작되기 전 무대로 나와 발언을 한 제작자 이정황 감독은 "유신이 갖는 폭압성과 야만성에 대해 유신을 모르는 젊은 이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이 영화를 기획했다"면서 "오늘 2시에 국회에서 여러 국회의원을 상대로 시사회를 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국회의원들의 특권 때문에 먼저 보여준 것이 아니라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들이 유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도록 하기위해서이다"면서 "국민들의 대표이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보고한다는 의미에서 시사회를 했다"고 전했다. 그는 "시사회에서 여러 의견들을 모아 영화를 보완할 생각"이라면서 "많은 조언과 의견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 만민공동회 시청광장 시사회에서 이정황 감독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김철관

(유신의 추억)은 말 그대로 박정희 정권이 72년 10월 유신을 선포하면서 폭력적이고 비민주적인 정치형태에 대해 꼬집은 영화다. 유신시대 국가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과 신민당사 YH 여공 농성사건, YH농성 해산과정에서 김경숙 열사 사건, 이 사건으로 인한 김영삼 의원 제명 사건, 고 장준하 선생 사망사건 등의 유신시대의 야만적인 행태들이 하나하나 조명해 간다. 특히 유신정권에서 조작된 인혁당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이 처형을 당하면서 '가족이 보고 싶다' '억울하다' 등의 마지막 유언(자막으로 보여줌)이 가슴을 울컥하게 했다. 

이철 전 코레일사장, 이부영 전 국회의원, 박형규 원로목사, 서중교 성균관대 교수,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김지하 시인, 백기완 선생, 인혁당 사건 관련자 미망인 등의 당시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증언은 충격 그 자체였다. 유신시대 국가권력이 인위적으로 조작한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이 감옥에서의 폭력과 고문 그리고 처형될 때까지의 소름끼친 과정들이 증언을 통해 보여준다. 

심한 고문으로 창자가 삐져나왔고 항문이 빠졌다는 생생한 증언은 충격 그 자체였다. 고문을 받은 것도 부족해 조작에 의한 사건을 사형 언도 18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다. 박정희 정권의 폭압적이고 광기 어린 독재정치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영화 제목 '유신의 추억'은 영화 '살인의 추억'을 기억 나게 한다. 배우 송광호가 형사로 나온 '살인의 추억'을 패러디해 영화 제목을 붙였는지 모르지만, 두 영화의 공통점은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끔직한 사건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앞으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꼭 알아야할 과거라는 사실이다. 바로 영화가 끝나고 울적한 마음이 든 이유이다. 다시 '유신'같은 독재시대로 회귀하지 않으려면 현대를 살아가는 국민들에게(특히 젊은이들에게) '역사 바로 알기' '역사 바로 세우기'를 해야 하고, 이 영화를 보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신 권력 조작에 의한 고문과 처형은 끔직했다. 

▲ 만민공동회에서 열린 서울광장 벼룩시장 © 김철관

"40년 전 고인이 된 인혁당 관련 8명의 열사들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가족들에게도 그동안의 고통을 헤아리면서 심심한 위로의 뜻을 전합니다." 

김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