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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8일 토요일

다카키 마사오의 ‘생얼’...‘충성혈서’, ‘남로당’, ‘여성편력’


이글은 민중의소리 2012-12-07일자 기사 '다카키 마사오의 ‘생얼’...‘충성혈서’, ‘남로당’, ‘여성편력’'을 퍼왔습니다.
무소불위의 권력 휘두른 박정희의 또 다른 이름...남로당 가입했다 조직원 명단 제공하고 살아남아

"외교의 기본은 나라의 주권을 지키는 것이다. 충성혈서 써서 일본군 장교가 된 다카키 마사오, 누군지 알 것이다. 한국이름 박정희. 해방되자 쿠데타로 집권하고 사대매국 한일협정 밀어붙인 장본인이다."

지난 4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주최 대선 후보 TV토론회에서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는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앞에 두고 1970년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유신정권 박정희 전 대통령의 또 다른 이름 '다카키 마사오'를 언급했다.

외교정책 방향을 묻는 사회자의 공통질문에 대한 답변에서였다. 이 후보는 이어 "(박정희 전 대통령은) 좌경용공으로부터 나라를 지킨다며 유신독재 철권을 휘둘렀다. 뿌리는 속일 수 없다. 친일과 독재의 후예인 박 후보와 새누리당이 1년 전 한미FTA를 날치기 통과해서 경제주권을 팔아먹었다. 대대로 나라주권 팔아먹는 이들이야 말로 애국가를 부를 자격도 없다. 날치기 한 뒤에 애국가 부르면 용서되냐. 한미FTA 날치기 동참한 사람은 국정 책임지겠다고 하면 안 된다. 경제주권 포기하고 무슨 염치로 헌법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겠다는 취임 선서를 할 수 있냐"라고 일갈했다.

토론회가 끝나고 트위터 등 SNS에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박근혜 후보에게 '돌직구'를 던진 이정희 후보의 "다카키 마사오", "전두환 6억", "박근혜 후보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라는 등의 발언이 화제가 됐다. 특히,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중파에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었던 '다카키 마사오'는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를 정도로 네티즌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친일인명사전 육사 생도 시절.(앞줄 오른쪽 끝이 박정희)

일본군 장교 되기 위해 '충성혈서'까지 써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본군 장교가 되기 위해 혈서를 써 일본에 충성을 맹세했다는 '충성혈서'에 대한 조명도 다시 이뤄졌다. 1917년 경상북도 선산에서 태어난 박정희는 1937년 3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경북 문경면의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박정희는 교사로 재직 중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1932년~1945년 일본이 중국 동북 지방에 세운 국가)의 군관에 지원했으나 탈락했다. 조갑제가 쓴 '박정희' 1권 - 군인의 길'에는 박정희가 교사를 그만두고 군인의 길로 들어설 결심을 하는 과정이 서술돼 있다. 조갑제는 박정희와 함께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던 유증선과 인터뷰를 해 당시 상황을 파악했다. 

유증선은 박정희가 충성 혈서를 쓰게 된 과정을 아래와 같이 진술했다. 

"1938년 5월경이라고 생각된다. 숙직실에서 같이 기거하면서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였다. 박 선생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아무래도 군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제 성격이 군인 기질인데 문제는 일본 육사에 가려니 나이가 많다는 점입니다. 만주군관학교는 덜 엄격하다고 하지만 역시 나이가 걸립니다.'"

박정희는 유증선에게 고향에서 면장을 하고 있는 형 박상희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래서 유증선은 형의 도움을 받아서 호적을 고칠 수 있지 않냐고 조언했다. 유증선은 박정희가 며칠 고향을 다녀와서 호적을 고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도 고민은 남았다. 신원조회를 하면 학교 기록과 호적이 틀려 말썽이 일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유증선과 박정희는 어떻게 하면 만주군관학교 사람들이 환영할 수밖에 없는 행동을 취할 것인가 연구를 하고, 유증선이 손가락을 잘라서 혈서를 쓰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자 박정희는 즉석에서 행동에 옮겼다. 

박정희는 충성 혈서까지 작성해 만주 군관학교에 지원했으나 탈락하고 만다. 당시 정황이 만주지역에서 발행되던 일본어 신문인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자에 '혈서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로부터'라는 제목으로 상세히 보도됐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 박정희 편에 만주신문 기사 전문이 실려있다. 

ⓒ친일인명사전 다카키 마사오의 혈서 군관 지원을 소개한 1939년 3월31일 '만주신문'

혈서(血書)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訓導)로부터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고 피로 쓴 반지(半紙)가 봉입(封入)된 등기로 송부되어 관계자(係員)를 깊이 감격시켰다. 동봉된 편지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아무쪼록 국군(만주국군-편집자 주)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중략)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편집자 주)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후략) 

라고 펜으로 쓴 달필로 보이는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자격 연령 16세 이상 19세이기 때문에 23세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만주신문』 1939.3.31. 7면)

박정희는 1939년 10월 만주 무단장시에 소재한 제6관구 사령부에서 4년제 만주국초급장교 양성기관인 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 제2기생 선발 입학시험을 치르고 1940년 1월에 15등으로 합격했다. "긴 칼을 차고 싶은" 꿈을 이룬 박정희는 1940년 2월 문경공립보통학교를 그만두고 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박정희는 1942년 10월 성적 우수자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입학했다. 일본육사를 졸업한 뒤 1944년 7월 만주국군 제6관구 소속 보병 제8사단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같은 해 7월 하순경부터 8월 초순까지 제8단의 2개 대대가 일본군과 합동으로 팔로군(일본군과 싸운 중국공산당 주력부대)을 공격할 때 소대장으로 작전에 참가했다. 

ⓒ박정희(조갑제 저) 처자식을 두고 있던 박정희(앞줄 오른쪽 끝)는 1948년 이현란(앞줄 왼쪽 끝)을 만나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동거를 시작한다.

그러나 박정희는 1950년 실연의 아픔을 겪으면서 술로 보낸 나날이 많았다. 박정희는 김호남과 결혼해 딸 박재옥을 두고 있었는데, 처를 탐탁치 않게 여겨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홀로 살다시피 했다. 그러다가 박정희는 1947년 가을 동료 결혼식에서 우연히 만난 이화여대 학생 이현란에게 마음을 뺐긴다. 이현란은 몸매는 날씬하고 얼굴은 이국적으로 생긴 미인이었는데 1948년 두 사람은 연애를 시작하고, 약혼식까지 올리고 용산의 관사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박정희는 결혼을 했고 아이까지 있다는 사실을 숨겼고, 이현란 몰래 본처 김호남과 이혼을 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남편에게 설움을 많이 당한 김호남은 '당신도 당해 보라'는 심정으로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던 차에 남로당 사건으로 박정희가 구속되고, 이현란은 박정희가 이미 결혼을 했고 아이까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실망한 이현란은 1950년 2월 동거하던 용산 관사에서 짐을 싸들고 나가 박정희와 인연을 끊는다. 실의에 빠져 생활하던 박정희는 다른 여자를 소개받는데, 그가 바로 육영수다. 박정희는 김호남과는 이혼하고 1950년 12월 12일 육영수와 결혼했다. 모두 1950년 한 해에 벌어진 일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재임 중 화려한 여성 편력은 잘 알려진 얘기인데, 여성 편력은 이미 육군 초급 장교 시절부터 시작된 오래된 줄거리인 듯 하다. (*기사작성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친일인명사전'과 '박정희'(조갑제 저) 참고함.)

정웅재 기자 jmy94@vop.co.kr

2012년 10월 21일 일요일

박정희, 그 내면의 풍경 Corée


이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10-14일자 제40호 기사 '박정희, 그 내면의 풍경 Corée'를 파왔습니다.

군 사격장에서 표적을 겨냥하는 박정희. 한겨레 제공

도올 김용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근혜씨가 여당 후보로 출마한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펴낸 책 (사랑하지 말자)에서 박정희의 삶과 죽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개했다. 10월유신(1972)과 10·26 사건(1979)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저자의 동의를 얻어 요약해 싣는다.

배신과 이상의 두 얼굴

박정희(1917~79)에게는 형이 4명 있었는데, 셋째 형 박상희(朴相熙·1906~46)의 영향을 어려서부터 많이 받았다. 박정희가 구미보통학교에 다닐 때, 20대의 건실한 청년 박상희는 (경북) 구미 지역에서 민족운동에 선구적 역할을 한 큰 인물이었다. 그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뭉친 신간회(1927. 1~1931. 5) 활동을 했고, 구미면 동아일보 지국장을 지냈으며, 해방 후에는 구미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박상희는 소신 있는 사회주의 운동가였다. 박정희는 좌파 지도자인 형에 대한 존경심에서 자신의 인격과 삶의 비전을 키워나갔다. 그래서 박정희 삶의 뿌리에는 사회주의적 성향이 분명히 있다.
박상희는 친한 친구 황태성의 소개로 경북 김천의 한양 조씨 규수인 조귀분(趙貴粉)을 아내로 맞는데, 그 아내가 낳은 맏딸 박영옥이 바로 김종필의 부인이다. (즉 김종필의 장인이 박상희이다.) 박상희는 해방 후 민군정의 실정으로 일어난 1946년 10월의 이른바 '대구폭동'(식량난으로 민중이 일어선 정당한 항변이었기에 '대구민중항쟁'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외부에서 투입된 경찰들이 박상희를 총으로 쏴 죽인다. 그때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한 지 불과 일주일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평생을 존경해오던 형님의 쓸쓸한 3일장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비보에 대해 내색하지도 않았다. 그때 세태는 매우 혼란스러웠고, 자신의 인생행로도 복잡했다. 일제시대 때 "천황폐하에게 사쿠라 꽃잎처럼 깨끗하게 목숨을 바치겠다"고 서약한 황군 육군 소위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박정희가 창씨개명한 이름. 엄밀하게 말하면 그는 만주군이었다)이던 그가, 이제 조선경비대(남한에 정식 국군이 생기기 전 미군정 주도로 창설한 군대)에 입대해 제2의 군인생활을 시작하려는 시점인 터라 어떠한 생각도 분노도 표출할 수 없었다. 복잡한 세태의 추이를 관망하며 분노의 심정을 가슴 깊이 형의 주검과 함께 묻어버렸다.

조선경비대 남로당 새포책 박정희

그 후 두 달 뒤인 1946년 12월 14일 (29살의) 박정희는 소위로 임관했다. 1947년 9월 27일에는 중위도 거치지 않고 대위로 승진했고, 1948년 8월 1일에는 소령으로 진급했다. 당시로서는 그런 식의 (초고속) 승진이 별로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군인으로서 박정희는 인품이 있고 탁월하게 유능했다. 한편 박정희는 공산당 남로당원으로서 세포조직의 중책을 맡아 조선경비대의 조직 속에서 이른바 '빨갱이'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오늘날 우파 권세가들의 정신적 지주이며 직접적 뿌리인 대부 박정희 본인이 공산당원이었고, 좌파혁명의 꿈을 꾸던 사람이라는 사실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기에 우리가 현대사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우선 이런 문제부터 짚어보자! 일제시대 때 우리나라 사람들 스스로에 의한 군대는 있을 수 없었다. 군인이 있다면 일본 군대로 징병 나간 사람들이나, 중국 대륙에서 공산계 밑에서 활약한 홍군이거나 조선의용군, 동북항일연군, 그리고 장개석 계열의 지원을 받는 임정 광복군이 있었을 것이다.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때 우리에게 찾아온 최대 비극이란 해방의 주체가 없었다는 것이다. 히로시마의 '피카-톤'(원폭이 터진 그 순간을 일본 사람들이 묘사하는 말) 때문에 그냥 도둑같이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결국 북쪽은 친소 도둑이 처먹고, 남쪽은 친미 도둑이 처먹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1948년 8월 15일의 일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기쁜 사건이 아니라 슬픈 사건이다. 김구나 김규식, 여운형과 같은 위대한 지사들이 그토록 염원한 단일조국의 꿈을 깨고 남·북이 각자 세력의 아성을 구축한 사건일 뿐이다. 이승만이 정부 수립을 강행하자, 연이어 9월 9일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드디어 분단국가가 되고 만 것이다. 자, 박정희가 조선경비대의 소령으로 임관한 것이 바로 대한민국 수립이 선포되기 14일 전이었다. 생각해보라!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 해인 1947년 7월 19일에 3·1운동의 진정한 리더, 조선건국준비위원회·근로인민당의 수뇌이던 여운형이 피살된다. 그 배후는 뻔한 것이다. 그리고 정부 수립 다음해인 1949년 6월 26일 애국자 김구가 암살된다. 그리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동시에 존 하지 사령관은 민군정의 폐지를 발표한다. 김구는 일찍이 외군 철퇴를 주장했다. 김구가 피살되었을 때 미군 철퇴가 완료된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되었다는 것은 국가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통치체제가 갑자기 증발해버린 것이다. 국민은 식민통치가 끝났다고 좋아 날뛰며 길거리로 쏟아져나와 만세를 불렀지만, 그 해방의 사건이야말로 우리나라의 모든 비극을 불러올 수 있는 공백의 사태라는 것을 염려하는 사람은 건국동맹·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어온 여운형이나 소수 애국지사들밖에는 없었다.
하여튼 국가가 없으니 '국군'이 있을 수 없다. 국군이란 '국가의 군대'란 뜻이다. 따라서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은 조선 경비를 위해 1946년 1월 15일 '남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하고, 그해 6월 이름을 '조선경비대'로 바꾼다. 또 조선경비대 유지를 위해 '조선경비사관학교'라는 간부 양성 속성과정을 만들어 장교를 임관시켰다. 박정희를 '육사 2기생'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을 말하는 것이다.
조선경비대에는 만주군·일본군의 군경력이 있는 사람들이 대거 진출할 수밖에 없었고, 박정희는 그 부류에서 제대로 훈련받은 우수한 군인이었다. 더구나 그는 만주군관학교 2년의 본과 과정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육사 유학생대를 3등으로 졸업한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조선경비대로 몰려온 사람들 중에는 일본군·만주군뿐만 아니라 항일투쟁의 기나긴 역정 속에서 훈련받은 좌파 계열의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조선경비대에는 거칠게 말해서 '백계'(우익)와 '빨계'(좌익)가 반반씩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조선경비대는 일본 경찰 출신이 장악한 경찰 조직의 보조 병력 정도로 간주되었다. 이런 현실에 불만을 품은 많은 경비대 장교들이 조선인을 탄압한 친일 경찰 프락치(끄나풀)들이 날치는 세상에 대해 반체제적 사유를 한다는 것은 결코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미국을 상대로 싸운 일제(출신)의 군인들에게는 골수에 사무치는 반미 감정이 있었다. 미군정을 빙자해 놀아나는 모든 집권세력에 대한 저항 심리가 있었다. 백계 출신의 박정희가 빨계의 활동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태였다.

동지들을 넘겨주고 살아남은 박정희

박정희가 남로당원이 된 이유는 명약관화하다. 일제 막바지에 일본 장교의 꿈을 꾸었다가 일본이 패망하자 시무룩하게 빈둥빈둥 나날을 보내던 그는 1946년 9월 24일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해, 바로 존경하는 형 박상희의 죽음을 맞는다. 그해 12월 23일 남조선노동당이 정식으로 결성되고, 남한 적화공작을 하는 데 박상희의 친구들이 대거 참여한다. 그들 처지에서 박정희는 포섭 대상 제1호였다. 박상희가 피살된 후 그의 유족들을 보살펴주어 자연스럽게 박정희는 그들의 조직망에서 중책을 맡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1948년 4월 3일 4·3 제주 민중항쟁이 발발했다. 이 항쟁의 진압 명령을 받은 여수 주둔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여순 반란사건'이다. 이 사건은 '여수·순천 항명사건'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동족상잔이냐, 항명이냐 하는 택일의 기로에서 그들은 항명을 선택한 것이다. 차마 동포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었다. 이 항명의 주체는 빨계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대한민국 국군 내에 좌빨이 퍼져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진 것이다. 결국 여순 항명사건으로 국군 내 거대한 숙군의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박정희 소령이 검거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박정희는 당시 고문도 심하게 당했다. 그는 1948년 11월 11일 남로당 가입 등의 죄목으로 군 수사 당국에 체포되었고, 빨갱이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이와 같은 중형을 선고받은 군인 가운데 구명된 경우는 오직 박정희 한 사람뿐이다.
박정희가 살아남은 것은 변절의 대가이다. 그를 살린 사람은 당시 최고 요직에 있던 백선엽 육본 정보국장이었다. 박정희는 목숨을 구걸했다. 박정희보다 3살 어리지만 만주군의 선배였던 백선엽 중령은 그에게 정확한 목숨의 대가를 요구했다. 박정희는 살기 위해 그 요구에 순순히 응했다. 박정희는 군조직 내의 '좌빨세포들'(그들은 실제로 의식 있는 우국지사였으며 박정희의 동지였다)의 상세한 명단을 공개했다. 박정희의 자술서로 우리나라 군대 내의 유능한 인물들이 수도 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이슬의 대가로 박정희는 목숨을 건졌다.
박정희는 이상을 추구하는 인간이었고, 결의와 결단이 있는 인간이었으며, 성취를 향한 자기 디시플린이 있는 인간이었다. 미래를 향한 발돋움을 성취하기 위해 그는 항상 자신의 현재를 왜곡했다. 현재 삶의 상황이 미래적 이상과 불일치를 일으킬 때, 그는 항상 자기가 품었던 이상을 배반했다. 그리고 서바이벌의 본능을 발휘했다. 그의 인생은 변절과 굴절로 얼룩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말했다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말도 자신의 생애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는 그의 삶에 침을 뱉어줄 가치조차 느끼지 않는다.
한국전쟁은 박정희에게 구원의 사건이었다. 한국전쟁 발생으로 경험 있는 장교가 절실한 상황이 되자 박정희는 소령 계급장을 다시 달았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날 그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10월 25일 신설된 9사단 참모장이 되었고, 1951년 4월에는 대령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1953년 11월 25일 준장으로 진급했다. 1955년에는 제5사단장이 되었다. 그는 비로소 전투부대 지휘관이 되었고, 젊은 장교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로 자리를 잡았다. 박정희 삶의 하중이 비록 변절과 굴절을 거쳤을지라도 이승만 치하에서 부패한 군상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어떤 이상주의적 가치관의 무게를 (젊은 장교들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사회주의적 이상 남아 있던 박정희

이승만은 군 수뇌부를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충성하도록 교묘하게 조작하는 능력이 있었다. 자유당 시절, 군대는 정말 개판이었다. 군납 물자를 둘러싼 부정의 도수는 조선 후기 삼정의 문란을 뛰어넘는다. 이런 상황에서 군대 내의 소장파 장교들 사이에서 군대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그 정군운동의 중심에 박정희가 있었다. 그리고 5·16 쿠데타는 멋들어지게 성공했다.
박정희의 쿠데타가 사전에 미국과 협의가 없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당시 쿠데타에 대한 미국 대사관의 보고를 보면, 5·16 쿠데타를 '좌익정권의 등장'으로 규정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박정희는 주체 없는 우리나라 역사의 꼬락서니에 대해 극심한 불만이 있었다. 우선 그는 이승만과 같은 '예수쟁이'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미국을 로고스의 전당으로 칭송하는 이승만과 같은 멘털리티(사고방식)는 없었다. 그는 일제 사범학교 출신이다. 교사로서 도덕적 인격이 무엇인지에 대해 혹독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일본 군인이었다. 그 나름의 로직에 따라 어떤 인격의 철저성을 배워간 디시플린 과정을 우리는 인정할 수도 있다. 하여튼 혁명가 박정희의 가치관 속에는 사회주의적 국가 재편에 대한 어떤 갈망이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박정희는 군사혁명을 일으켰을 때도 분명 좌빨 성향이 있었다.
공화당의 박정희와 민주당의 윤보선이 맞붙은 민정이양 대통령 선거일을 불과 이틀 앞둔 1963년 10월 13일, 당시 야당 정통지로서 명성을 드날리던 호외 하나가 서울 시내 중심가에 뿌려졌다. 박정희가 빨갱이라는 것을 폭로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여순 반란사건 이후 군법회의에서 박정희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을 폭로한 내용이었다. 나도 내 손으로 그 호외를 받은 기억이 있다. 국민이 얼마나 경악했을까? 그런데 윤보선 같은 정통파 정치인이 박정희를 일제의 군인이며 새빨간 공산주의자라고 폭로했을 때 국민들은 윤보선을 지지했을까? 오히려 국민들은 '빨갱이' 박정희를 선택했다. 전라도·경상도 지역에서 박정희가 우세를 보인 지역은 예외 없이 좌익활동이 왕성했거나 좌익연좌제로 피해를 본 지역이었다. 민중은 윤보선의 폭로를 오히려 매카시즘류의 야비한 공세로 낙인찍은 것이다.
한국의 보수세력 속에도 뼛속 깊은 곳에 숨겨진 좌빨들이 많을 수도 있다. 당시 민중은 스펙 좋은 윤보선의 허울을 쓰기보다는 오히려 군사혁명 세력의 참신한 붉은 색깔을 좋아했던 것이다.
김일성은 박상희의 동생이 남조선을 뒤엎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그래서 박정희와 직접적인 커넥션이 닿을 수 있는 인물을 모색했는데, 그가 바로 박상희의 절친한 친구 황태성이었다.

황태성을 죽이고 과거와 단절한 박정희

황태성은 해방 전에 연희전문을 2년 다니다가 중퇴한 인텔리로서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 경북도당 조직부장으로서 대구 지방에서 활동했다. 그는 당시 대구 남로당 간부였던 박상희와는 둘도 없는 친구였으며, 박정희를 조선경비대 남로당 조직원으로 포섭한 이재복(李在福·평양신학전문 졸업)과 함께 셋이서 10월 대구 민중항쟁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 황태성은 박상희가 피살되고 대구 민중항쟁이 진압되자 도주하여 남로당 지도자 박헌영의 측근이 됐다. 월북한 뒤에는 북한 정권의 무역성 차관에까지 승진했다가, 박헌영 실각 후 해임되었다. 김일성은 황태성에게 박정희에게 평화통일을 제안하는 비밀협상 임무를 맡겼다. 황태성은 김일성에게 "박정희는 내가 어려서부터 세배도 받고 머리를 수없이 쓰다듬어주던 아이이므로 직접 가보겠다"고 나선다. 황태성은 최소한 자기만은 다치지 않고 다시 북환에 귀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1961년 9월 1일 임진강을 건너 서울에 잠입하는 데 성공한다.
황태성은 1963년 12월 14일 토요일 오전 11시 20분, 인천 근교의 한 육군 부대 안에서 총살형이 집행돼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 이것이 그 유명한 '황태성 간첩사건'의 시말이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는 그에게 내밀어진 사형집행 승인 서류에 사인하기를 주저하고 또 주저했다. 눈물을 흘리면서 "아까운 분인데! 아까운 분인데…" 했다. 자신이 인간적으로 숭배한 형님의 가장 절친한 친구, 그리고 이 민족의 지도자로서 결코 흠 없이 살았던 황태성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한다는 악연을 감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전역하며 눈물을 흘리는 박정희. 한겨레 제공

황태성은 남한 침투 후 제일 먼저 자신의 친구로서 대구 민중항쟁의 동지였던 김성곤(金成坤·1913~75·쌍용그룹 창업자)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가 유럽여행 중이라 만날 수 없게 되자 대구로 내려가 박상희의 아내 조귀분의 집으로 갔다. 황태성은 놀란 조귀분을 설득했고, 조귀분은 사위 김종필에게 황태성을 데려갔을 것이다. 박정희·김종필·황태성, 이 세 사람이 한자리에 앉아 담론을 즐겼을까? 내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김종필과 황태성이 함께 공화당을 사전 조직했으며, 황태성이 공화당 비밀요원의 밀봉교육을 담당했다. 그가 철저한 마오쩌둥류의 당 우선 대중노선을 가르쳤다는 등의 이야기는 학생들의 서클실 담론의 흔한 주제였다. 이런 얘기는 김형욱의 회고록 등에도 나타난다. 하여튼 황태성은 반도호텔에 상당 기간 유숙했으며, 박정희도 황태성을 예우했음이 틀림없다.
박정희가 황태성을 죽인 것은 곧 자신의 형 박상희를 죽인 것이다. 형 박상희를 죽인 것은 곧 자신의 과거를 죽인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죽였다는 것은, 이 경우 북한과의 모든 인연을 단절하겠다는 것을 표명했다. 이런 의지 표명만이 제3공화국 대통령으로서 인간 박정희가 생존해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결국 황태성은 미국이 죽인 것이다. 미 수사 당국이 황태성 간첩사건을 집요하게 추궁했고, 황태성의 신병을 2주 동안 넘겨받아 필요한 정보를 모두 빼갔다. 박정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박정희는 조선경비대 남로당 조직 친구들을 죽게 만듦으로써 자신의 활로를 개척했고, 또다시 황태성을 사형에 처함으로써 활로를 마련했다. 이것은 박정희 생애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동일한 패턴이지만, 박정희의 개인적 변절이라는 차원을 떠나 박정희가 비애롭게 굴종해야만 했던 우리 시대사의 굴절이기도 했다. 박정희는 분명 쿠데타를 일으킬 때는 참신한 사회주의적 사고까지 포섭했을지 모르지만, 황태성을 죽인 후부터는 철저히 친미·친일 우익의 매판자본 경제발전의 활로를 적극적으로 개척해나간다.
우선 내가 박정희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 이야기를 통해서 남북의 역사가 서로를 소외시킬 수 없는 하나 된 몸이며 그 역사의 진로가 서로에게 한정성을 예시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이 없으면 우리가 발해를 잃어버린 것처럼 북녘땅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제 우리는 남북의 역사를 근원적으로 초극하는 새로운 통합적 관점이 필요하다.
박근혜는 박정희를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박정희를 안다는 것은 박정희 삶의 사건들을 안다고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삶의 사건들에 얽힌 역사 전반을 통관할 줄 알아야 한다. 또 그 사건들의 내면에 흐르는 박정희 본인의 생각과 느낌과 신념과 원칙을 총체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그것은 박근혜나 우리에게 똑같이 객관화되어 있는 인식의 지평이다. 더구나 자식들은 어버지나 어머니의 생애를 잘 알지 못한다. 그것을 객관적 앎의 대상으로 소외시킬 수 있는 감정의 여유를 갖지 못한다. 자식은 부모를 무개념적 느낌 속에서 일차적으로 파지하며, 그 느낌은 역사의 일반 개념 속에서 보편화되지 않는다. 박정희는 신념의 사나이였고, 원칙의 사나이였고, 삶의 디시플린이 있었고, 또 이상주의가 있었다. 그런데 박근혜는 이런 아버지의 정신세계를 하나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러니 아버지를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최후의 시간, 최후의 안식

나는 박정희의 최후 순간을 같이한 여가수와 오랫동안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궁정동 안가에 심수봉(沈守峰)은 기타를 들고 박 대통령의 왼쪽에 앉아 있었다. 당시 상황에 관해서는 여러 진술이 있다. 나는 단지 심수봉에게 들은 것만 옮기겠다.
"대통령께서 저에게 (그때 그사람) 한번 불러보게 하시기에 그 노래를 다 부르고 나서 신재순이가 (사랑해 당신을)을 불렀는데, 너무 못 부르자 박 대통령께서 도와주시느라 함께 흥얼거리셨죠. 그리고 제가 기타 반주를 해드렸고요. 그때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빠앙~' 총소리가 난 거예요."
"총성은 그냥 갑자기 난 것이었어요.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에 구멍이 뻥 뚫렸어요. 난 손목에 그렇게 큰 구멍이 뚫린 건 처음 봤어요. 순간 차지철은 화장실로 도망갔어요. 총이 없어서도 그러했겠지만 아마도 다음 총알이 각하에게 날아가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겠죠. 하여튼 경호를 맡은 사람의 행동은 아니었어요. 저는 그 순간 '이런 장면을 각하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고 놀란 가슴을 누르며 바로 옆을 쳐다보았지요. 각하는 총소리에 조금의 동요도 없이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 계셨어요. '이 녀석들이 또 철없이 난동을 부리는구나' 하는 식의 태연한 모습이었어요. 이때 운명의 총알이 튀었지요. 오른쪽 가슴으로부터 왼쪽 아래 옆구리로 피가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아무런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로 그대로 위엄을 지키며 선승처럼 끝까지 앉아 계셨습니다."
"정적 속에서 심하게 가래 끓는 소리가 들렸어요. 나는 본능적으로 대통령을 부축하면서 '괜찮으세요' 하고 물었지요. 그때 '괜찮아'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때 김재규가 다시 들어와 확인 사살을 시도했다가 총알이 없자 다시 새 총을 들고 들어와 가혹하게 대통령 머리를 겨누었지요. 박 대통령은 제 품에서 그렇게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지금 디테일에 관한 검증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은 박정희가 죽음의 순간에 모든 것을 예감하고 받아들이는 듯한 초연한 자세를 취했다는 것과, 그의 마지막 말이 "괜찮아" 이 한마디였다는 사실이다.
박정희를 이해한다는 것은 3선 개헌으로 유신정국에 접어들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는지, 그 민중의 신음 소리를 동시에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그토록 많은 학생들이 길거리에서 피를 흘려야 했고, 인혁당 사람들이 아무 죄도 없이 사형집행을 당해야 했으며, 비상계엄의 부마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박정희라는 태양의 폭염([시경](詩經)에서 '폭정'을 상징하는)은 너무 강했다. 당시 박정희가 제거되기를 갈망하지 않은 상식적인 인간은 없었다!
박정희는 위대한 전범을 달성하기에는 그가 치달린 삶 자체가 너무 왜곡돼 있었다. 3선을 넘어 종신 대통령을 꿈꾸는 유신으로 치달은 그는 이미 목이 잘린 항룡이었다. 항룡유회(亢龍有悔)! 항룡에게 남은 것은 후회밖에 없다. 그러나 그가 탄 자전거는 계속 페달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안 밟으면 쓰러지니까! 그러나 박정희는 그 지겨운 페달밟기를 누군가 멈추게 해주기 바랐을지도 모른다. 여민동락(與民同樂)의 대의를 위해 자신의 권세를 포기하는 용단을 내리지 못하는, 개인적 독락(獨樂)의 욕망 때문에 계속 굴러가야만 하는 자전거에 올라탄 자신을 그는 가련하게 관조했을지도 모른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조선경비사관학교 동기생으로 키도 같고 교사생활한 경력도 비슷하다. 박정희는 그를 아꼈고, 그를 중용했다. 그는 1964년 6·3 사태 당시 계엄군을 지휘해 박정희의 신임을 얻었다.
김재규는 의리가 있었고, 의협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부마 민중항쟁 등 계속된 정국불안 사건들을 수습하면서 단 한 명의 권력자를 위해 더 이상 국민의 희생이 있어선 아니 되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의 상식은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상식적 판단이 박정희의 종언을 가져온 것이다. 그가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에 총부리를 겨누었을 때, 박정희는 그 총부리를 회피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발악의 여유는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친구 김재규가 유신의 심장을 쏜다면 기꺼이 그 총알을 받아들이겠다는 역설적 안도의 숨을 내쉬었을지도 모른다 ."친구여, 끝내주게! 나도 어쩔 수 없었네. 이제 그만 내 인생의 종막을 내리려 하네! 난 괜찮아!" 몇 초 안 되는 순간이지만 이런 대인의 교감이 오갔을지도 모른다.

박근혜는 아버지를 얼마나 아는가
박근혜가 어버지 박정희를 이해한다면 동시에 박정희의 심장을 쏜 김재규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친구의 총성을 기다리는 박정희의 모습에서 지친 해탈인의 모습과 역사 굴절의 톱니바퀴에서 희생당하고만 초라한 욕망의 화신, 그 두 면모를 동시에 본다. 도저히 우리 역사가 되돌아가야 할 지점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구국의 결단'을 운운하는 박근혜의 판단 능력은 인간학의 걸음마도 경험하지 못한 유치한 소녀의 푸념에 불과하다. 이제 아버지의 '구국의 결단'을 재현하기 위해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인가! 거대한 박정희 동상을 세우고 그 밑에 전 국민을 집결시키겠다는 것인가!

글•김용옥

2012년 9월 22일 토요일

미국 '남로당 프락치' 박정희를 모를리 없다


이글은 프레스바이플 2012-09-21일자 기사 '미국 '남로당 프락치' 박정희를 모를리 없다'를 퍼왔습니다.

▲ 언론인 김종철의 새책 <박근혜 바로 보기>
최근 언론인 김종철(68)이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실체를 사실에 근거해 검증한 책을 펴냈다.
(박근혜 바로보기)에서 저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그의 딸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에에 대해서도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그간의 삶의 행적들을 소상하게 밝혀놓았다.
이 책 2장에는 박정희의 기회주의적 행적이 잘 드러나 있다. 저자는"1960년 '장면 정권의 무능과 부패, 사회의 혼란, 안보 위기'를 구실로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세력이 '반공'을 가장 강조한 것은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지닌 미국을 안심시키기 위한 방책이었을 것"이라고 전제한 뒤, "쿠데타의 주동자인 박정희의 이력에 '남로당(남조선노동당) 프락치'라는 낙인이 찍혀 있음을 미국 정보기관이 모를 리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광복 이후 그의 둘째형인 박상희가 "친일의 죄를 씻으라"며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에 입교할 것을 권하자, 박정희는 1945년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해 단기과정을 마치고 12월 졸업했다.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군 중위로 복무하던 그가 신생 조국의 소위가 되었던 것이다.
1963년 제5대 대통령선거 유세 기간인 9월 23일 민주공화당 후보 박정희가 첫번째 라디오 연설에서 자신의 이념을 '민족적 민주주의'라고 부르자, 야당인 민정당 후보 윤보선은 같은 날 여수 유세에서 "여순반란 사건의 관계자가 지금 정부에 있다"며 박정희를 지목했다. 윤보선의 그 발언은 박정희가 여수·순천 반란사건에 깊숙히 관여했음을 세상에 고발한 것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저자는 언론인 정운현의 책 (실록 군인 박정희)를 인용했다.
"이런 민정당의 폭로로 공화당은 선거 코앞에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서인석 공화당 대변인은 즉각 반박 성명을 통해 '조작폭로 전술로 악랄한 인신공격'이라고 받아쳤다. 그는 이어 박정희 총재는 김창룡 장군에 의해 관제 공산당원으로 몰린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여순반란 사건과 관련된 것은 아니었다고 전했다. 결국 서 대변인의 해명은 여론을 잠재우기는커녕 도리어 박정희 후보가 한때 남로당원이었고, 또 그 때문에 재판을 받은 사실을 공개적으로 시인한 꼴이 되고 말았다."

▲ 일본군 장교 박정희와 남로당 간부 박상희 (자료: 최민희 의원실)

1948년 육군 소령으로 진급한 박정희는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다가 '여수·순천반란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았다. 그는 11월 11일 군 수사당국에 체포되었다. 결국, 박정희는 반란기도 혐의로 기소되어 1948년 12월 20일 군법회의에서 '파면, 급료 몰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심사장관의 조치'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하며, 감형한 징역을 집행정지함"이라고 통보받았다. 당시 확인장관은 육군 최고책임자인 참모총장 이응준이었다. 그는 일본군 대좌(대령) 출신이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큰 의문을 제기한다.
좌익이 주도한 일련의 사건들(4·3제주항쟁, 10·2대구항쟁, 여수순천 반란 등)에 대해 무자비한 유혈진압을 하던 살벌한 남한 사회에서 남로당 당원으로서 '반란을 기도'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현역 육군 소령 박정희가 어떻게 집행정지로 풀려날 수 있었을까?
저자는 이런 의문에 대한 답으로 김재홍 교수(경기대)가 쓴 (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라는 책의 내용을 소개한다.
"박정희는 자신이 알고 있던 군부 내 남로당원들의 이름을 군 특무대에 실토했다. 박정희는 '김창룡 특무대'에서 조사를 받던 중 동료를 밀고하는 진술서를 쓰고 그 대가로 풀려났다. 그 진술서에 기재된 리스트를 토대로 악명 높은 특무대의 고문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1천명 안팎의 장교가 숙정당하고 그중 상당수가 처형된 것으로 추산된다. 박정희는 일본군 장교에서 신생 독립국인 대한민국의 장교로 변신했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동료를 배신한 기회주의자로의 행각은 끝이 없었다."

이경직 기자  |  mp97@naver.com

2012년 7월 5일 목요일

“주사파 의원엔 몽둥이가 약” 쿠데타세력 모여 ‘종북몰이’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07-05일자 기사 '“주사파 의원엔 몽둥이가 약” 쿠데타세력 모여 ‘종북몰이’'를 퍼왔습니다.

 

[현장] 하나회 참석 ‘대령연합회 세미나
’5공실세 정호용 전장관이 축사
남로당 프락치사건 언급하기도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에요.”4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국방회관에서 ‘육해공군해병대(예)대령연합회’ 주최로 열린 ‘종북세력의 실체와 대응책’이라는 세미나 현장. 5공의 실세였던 정호용 전 내무부 장관은 축사를 통해 “국회에까지 종북세력이 진입해서 큰소리를 낸다”며 이렇게 말했다. 정 전 장관은 “내가 종북세력에 관심이 많다. 종북세력을 타도하려면 회유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자리를 메운 300여명 사이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12·12 쿠데타 주역 가운데 한 명인 정 전 장관은 80대의 나이지만 종북세력 얘기가 나오자 기세가 여전했다.행사장 입구엔 김관진 국방부 장관의 축하 화환이 놓여 있었다. 세미나가 열린 국방회관은 국방부의 근무지원단이 운영한다. 국방부만 힘을 보탠 게 아니다. 이 행사는 행정안전부가 후원을 맡았다. 세미나를 주최한 대령연합회 관계자는 “실무를 맡고 있는 행안부 공무원도 참석했다”고 전했다.축사를 마친 정 전 장관 옆으로 고명승 전 3군사령관, 정진태 전 연합사 부사령관, 민병돈 전 육사교장 등이 나란히 앉았다. 국회 국방위원장을 노리고 있는 황진하 새누리당 의원도 자리했다. 육사 출신인 이들은 전두환 전 대통령을 정점으로 군 내부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사조직 하나회의 일원이다. 이들은 전두환·노태우 대통령 시절 출세가도를 달렸다. 정호용 전 장관과 고명승 전 사령관 등은 지난달 육사 사열로 입방아에 오른 바 있다.이날 세미나는 사실상 야당을 종북세력으로 규정하는 ‘종북몰이’ 행사였다. 정 전 장관 등 하나회 멤버들이 대령연합회 행사에 참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3선인 황진하 의원은 “제가 이번에 국회 상임위원장도 맡게 될 것 같다”며 “주사파 활동가만 10만명이다. 국회에 들어온 여러 명의 주사파 종북세력이 정치권을 뒤흔들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황 의원은 “10년 이상 동안 좌파 경향 정부로부터 비호나 묵인 아래 성장해온 종북세력, 친북세력은 놀라울 정도로 세력을 확대했다”고 덧붙였다.2시간 남짓 진행된 세미나에서는 지난 4·11 총선 결과에 대해 “통합진보당을 비롯해 민주와 진보를 내세운 광범위한 종북좌파 세력이 국회에 진출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1940년대 국회 프락치 사건도 언급됐다. 정호용 전 장관이 축사에서 “오제도 검사가 남로당 프락치 국회의원 13명을 다 잡아냈다”고 운을 뗐다. 발표자로 참석한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현시점에서 프락치 사건 기준으로 국회의원을 잡아내면 40~50명은 잡혀 들어간다. 배로 비유하자면 어느 나라든지 반체제 세력이 감당할 수 있는 적재량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초과했다”고 했다.세미나 사회는 전두환·노태우·김영삼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서 비서관을 지낸 김충남 박사가 맡았다. 군에서는 윤규식 육군종합행정학교 교수가 참가했다. 이 자리에는 군 출신인 백군기 민주통합당 의원, 김종태 새누리당 의원도 초청받아 참석했다. 대령연합회의 한 간부는 “좌우를 떠나 정치적 중립을 지키면서 종북 세력의 실체를 들여다보자는 취지에서 열린 행사”라고 말했다.

글·사진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