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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9일 일요일

박근혜가 배운 건 가장 나쁜 모습의 박정희였다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12-08일자 기사 '박근혜가 배운 건 가장 나쁜 모습의 박정희였다'를 퍼왔습니다.

박정희의 1963년 대통령 선거 포스터. 생전에 세 번의 직선제 대통령 선거와 두번의 체육관선거를 치렀던 그는, 이제 딸을 통한 네 번째 직선제 선거를 통해 부활하려 하고 있다.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박정희의 네 번째 선거
세상이 바뀔까 두려워하는 수구세력이 “세상을 바꾸겠습니다”라는 구호를 들고 나온 것은 웃어넘길 수 있다. 그러나 유신세력이 이번 대통령 선거를 과거 세력과 미래 세력의 대결이라면서 자신들을 지지해달라고 하는 데 이르러서는 그냥 웃어넘길 수 없는 모멸감을 느낀다. 혹자는 이번 선거를 박정희 대 노무현의 대결이라고 하고, 또 1차 티비 토론 이후에는 다카키 마사오 세력 대 김대중 · 노무현 세력의 대결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유신과 오늘’에서는 이번 대통령 선거를 박정희의 네 번째 대통령 선거라는 관점에서 그 의미를 짚어보도록 하겠다.국가예산의 10%를 퍼부었던 1971년 대선박정희는 1963년 8월 30일 전역식에서 눈물을 흘리며 “본인과 같이 불운한 군인이 또 다시 없도록” 운운하며 군복을 벗는 소회를 밝혔다. 20세기 지구의 곳곳에서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수많은 군인아저씨들은 거의 다 군복을 입고 통치했지만, 박정희는 군복을 벗고 선거를 치러야 했다. 남북분단이 동서냉전의 대리전을 수행하던 현실에서 미국은 자신의 쇼윈도에 군복이 걸려있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군부 일각에서는 원래의 공약대로 군은 깨끗하게 원대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수도경비사령부 군인들은 군정을 연장하라고 데모하기도 하고, 박정희는 오락가락 갈팡질팡 번의에 번의를 거듭하다가 결국 군복을 벗고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박정희와 윤보선이 격돌한 제5대 대통령 선거는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15만 표로 가장 표차가 적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승부가 갈린 것은 윤보선이 박정희의 ‘여순반란 사건’에 관련된 좌익 전력을 거론하며 제기한 사상논쟁이었다. 사상논쟁은 윤보선의 기대와는 달리 역효과가 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국에 널리 퍼져있던 좌익관련자들이 적극적으로 박정희를 지지해 여기서 승부가 갈린 것이다.평생 권력을 움켜쥐고자 했던박정희는 두 번의 임기뒤삼선개헌안을 날치기 처리했고유신쿠데타 통해 국민들이대통령 뽑을 기회마저 빼앗았다퍼스트레이디 박근혜가 배운 건권력에 취해 비틀거리는가장 나쁜 모습의 박정희였다유신의 부활이냐 종말이냐우린 그 선택의 갈림길에 서있다1967년 5월 3일의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윤보선과 재격돌했다. 야당은 오랜 분열을 극복하고 신민당이라는 통일대오를 만들었지만, 후보로는 윤보선을 다시 내세웠다. 51세 박정희와 71세 윤보선의 대결, 가난한 농민의 아들임을 내세우는 박정희와 서울의 대부호 양반가의 후예 윤보선의 대결은 구도가 좋지 않았다. 이제 막 경제개발계획이 궤도에 오르고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돈이 풀리면서 국내의 경제상황도 나쁘지 않았다. 아직 박정희의 독재가 본격화되기 이전이었고, 박정희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자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박정희는 4년 전 15만 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이긴 윤보선에게 116만 표 차이의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제3공화국 헌법은 4년 중임의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었는데, 중임 임기가 끝나는 1971년에 55세가 되는 박정희는 권력을 내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삼선개헌을 염두에 두고 한 달 여 후인 6월8일에 치러진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개헌이 가능한 의석수를 확보하기 위해 초유의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박정희는 이렇게 확보한 개헌가능 의석을 이용하여 삼선개헌안을 국회에서 날치기로 ‘처리’했다. 다른 신문들은 ‘통과’라 썼지만, 동아일보만은 언론의 자존심상 ‘통과’라는 말을 쓸 수 없어 ‘처리’라고 했다고 한다.1971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는 비록 야당이 패배하긴 했지만,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박진감 넘치는 선거로 꼽힌다. 대통령 선거를 1년여 앞 둔 시점에서 신민당 유진오 총재가 갑자기 뇌일혈로 쓰러졌다. 야당으로서는 1956년과 1960년 대통령 선거 당시 신익희 후보와 조병옥 후보가 갑자기 세상을 뜬 데 이어 또 다시 불행한 사태를 맞은 것이다. 이때 신민당의 원내총무였던 42세의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왔다.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이 출마한 신민당 내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을 주창한 김영삼이 예상대로 1위를 차지했지만, 과반수 득표에 실패해 2차 투표에 돌입했다. 여기서 이변이 발생해 2위였던 김대중이 후보로 선출되어, 박정희와 맞붙게 되었다. 박정희는 1967년의 6·8총선에서 김대중을 낙선시키기 위해 김대중의 지역구인 목포에서 국무회의를 열 정도로 김대중을 싫어했다. 그런 김대중과 경쟁하는 것은 박정희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했다. 이렇다 할 쟁점을 만들어내지 못했던 윤보선과는 달리 김대중은 예비군 폐지, 4대국 보장론, 대중경제론 등 참신한 공약을 쏟아냈다.박정희는 사회의 구성이 고도화되면서 자연스럽게 분출되는 각계각층의 요구를 수용하고 조화시킬만한 능력도, 품성도 갖고 있지 않았다. 박정희가 본격적으로 지역감정을 이용한 것도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부터였다.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보로 박정희 측의 선거에 깊이 간여했던 강창성이 뒤에 고백한 것처럼, 이들은 “모든 부정을 저질러서 박 후보의 당선을 만든 것”이었다. 1971년 국가예산은 5242억이었는데, 박정희 정권이 이 선거에 국가예산의 10퍼센트가 넘는 700억을 퍼부었다. 박정희는 이런 엄청난 부정을 자행하고도 정치신인에 가까운 김대중과의 표차를 94만 표밖에 벌리지 못했다. 1956년의 조봉암 때와 마찬가지로 김대중이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이 떠돌았다.유신체제 의전서열 2위와 최태민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큰 쟁점이 된 것은 총통제 문제였다. 김대중은 이번에 박정희의 집권을 저지하지 못하면 박정희가 총통제를 실시하여 영구집권을 꾀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박정희는 김대중이 유언비어를 퍼뜨린다면서 이번이 국민여러분께 자신을 찍어달라고 부탁하는 마지막 선거라고 호소했다. 역설적인 일이지만 박정희는 이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유신쿠데타를 통해 국민들에게서 대통령을 선출할 권리를 빼앗아갔기 때문에 더 이상 국민에게 자신을 찍어달라고 부탁할 일을 원천적으로 없애버렸다. 당시 국민학교에서도 반장은 학생들이 직접 뽑았는데, 국민들은 제 나라의 대통령을 뽑을 수 없었다. 박정희는 1972년과 1978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두 번이나 더 대통령에 ‘선출’되었지만, 이것은 선거가 아니라 선거놀음일 뿐이었다. 1987년 6월항쟁에서 구호는 복잡하지 않았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민주쟁취” 16글자에 집약된 뜻은 한 마디로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자는 것이었다.박근혜 후보를 흔히 유신공주라 부른다. 그런데 공주라는 말은 가끔씩 오해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1974년 여름 이후 박근혜는 유신체제에서 어린 공주가 아니라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했다. 왕비가 없는 상태에서 공주는 유신체제의 의전서열 2위로 유신체제의 핵심적인 구성부분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권력의 정점에 섰다. 박근혜는 외모는 어머니 육영수의 온화한 모습을 많이 닮았지만, 속은 영락없는 박정희였다. 박근혜는 아버지로부터 권력의 생리와 운영방법을 배웠지만, 불행하게도 박근혜가 보고 배운 시기의 박정희는 권력에 취해 비틀거리는 가장 나쁜 모습의 박정희였다. 박정희도 처음부터 언로가 막혀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초기의 박정희는 부들부들 떨고 재떨이 집어 던질지언정 기자들하고 논쟁도 했고 대드는 기자들을 중용하기도 했다.박정희가 그래도 기자들과 막걸리를 앞에 두고 때로 고성이 오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시절이 있었던 반면, 박근혜는 처음부터 얼음공주였다. 선거의 핵심과제인 경제민주화의 상징으로 힘들게 모셔온 김종인 전 의원조차 가차 없이 잘라버리는 상황에서 박근혜의 눈이 발하는 레이저광선 앞에 모두들 침묵해버리고 만다. 최근 교통사고로 숨진 이춘상 보좌관의 죽음은 그가 박근혜 후보에게 그래도 불편한 진실을 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측근이었다는 점에서 박근혜 후보에게는 치명적인 손실이 아닐 수 없다.박근혜 후보와 관련된 여러 가지 부정적인 이야기의 90퍼센트 이상은 구국선교단 총재라는 최태민이라는 정체불명의 인물과 연관되어 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바에 따르면 주한미대사 버시바우는 “최태민이 박근혜의 인격형성기에 박근혜의 몸과 영혼을 완전히 통제”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2007년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그 소문의 대부분이 박근혜 후보의 동생인 박근령 등 최측근이나, 박정희를 가장 열심히 찬양한 조갑제나 요새 TV토론에 보수진영을 대표하여 가장 빈번히 얼굴을 내미는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진 같은 사람의 취재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는 점이다.박근혜는 박정희 사후 영남대 이사장에 취임했으나, 학생들의 반발로 곧 이사장 직을 사임하고 평이사로 내려앉았다. 영남대학은 영남학원 상임이사 김정욱, 곽완석 사무부처장, 손윤호 영남병원사무장, 조순제 영남투자전무 등 박근혜가 임명한 측근 4인과 이사진이 1인당 2천만 원이라는 거액(현재는 2~3억 가치)을 받고 30여명을 부정입학시킨 사실이 적발되었다. 이들과 이사진은 마땅히 감옥에 가야 하는 것이었으나, 박근혜와 측근들이 영남학원에서 영원히 손을 떼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이때 박근혜와 함께 사임한 이사진은 상임이사 김정욱, 이사 김창환, 손미자 등인데, 이들은 모두 정수장학회의 이사를 지냈다. 이들 중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지낸 김창환은 최태민의 사촌, 조순제는 최태민의 의붓 아들, 손윤호는 최태민의 처남으로 알려져 있다. 영남학원 이사진에서 부정행위로 쫓겨난 자들을 박근혜는 정수장학회에서 여전히 이사로 기용했다. 현재 박근혜를 보좌하고 있는 보좌진들의 골격은 최태민의 사위인 정윤회가 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버시바우가 한국의 라스푸틴이라고 평한 최태민의 그림자가 박근혜가 흉탄에 어머니를 잃은 황망했던 어린 시절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것이다.윤봉길 의사 80주기, 다카키 마사오를 생각한다볼셰비키혁명을 촉발했다고 일컬어지는 제정러시아 시대의 괴승 라스푸틴은 황제까지 혹하게 만들었으나, 박정희가 최태민에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의 비서실장이자 술 친구로 10 · 26 사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인 김계원이 적나라하게 폭로한 것처럼 박정희는 “그 X(최태민)가 그 X(박근혜)를 홀렸다”며 최태민과 박근혜에 관한 보고서가 올라오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고 김계원에게 호소했다고 한다. 최태민은 박정희보다도 5살이나 많았는데, 최태민의 존재는 박정희는 물론이고 비서실장 김계원, 민정수석 박승규, 정보부장 김재규 등의 골칫거리였다. 운명의 10월 26일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는 항소이유서 보충서에서 10·26사건의 먼, 그러나 중요한 이유의 하나로 최태민 문제를 꼽았다. 박정희를 친형처럼 따랐던 김재규로 하여금 박정희의 통치능력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만든 계기였던 것이다.

올해 대선일인 12월19일로부터 정확히 80년 전인 1932년 12월19일 일본의 처형장에서 벌어진 일. 일제는 윤봉길 의사의 눈과 이마를 헝겊으로 가린 뒤 10m 거리에서 딱 한 발의 총알로 이마 정중앙을 명중시켜 핏자국으로 일장기 모양을 만들었다.

박근혜는 “곳곳마다 새마을 사람마다 새마음”이라는 구호 아래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을 본 따 새마음 운동을 전개했다. 최태민이 부추긴 공주놀음에 푹 빠져 아버지 속을 지지리도 썩인 딸은 나이 지긋한 교장선생님이나 지역의 원로인사들을 모아 예행연습까지 시키며 몇 시간 씩 줄지어 세워놓고 효도에 대한 강연을 했다. 시골에 가면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영애님 오셨다고 큰 절을 했다. 육영수는 말할 것도 없고 박정희도 이런 절을 받지는 않았다며 김재규는 왜 어린 박근혜가 노인들 절 받느냐고 탄식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최태민 문제로 골치를 썩으며 검찰에 수사를 지시하고 봉건시대의 임금마냥 최태민을 불러 친국을 행하는 등 최태민을 떼어 놓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다 썼으나 울며불며 난리 치는 박근혜를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 “에미도 없는 게 시집도 안 가고 애쓰는 게 불쌍하다”는 박정희의 동정이 화를 키웠다면, 지금도 박근혜를 불쌍하다고 여기는 일부 대중들의 값싼 동정이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18대 대통령 선거에서 핵심 과제는 경제민주화이다. 1948년 제헌헌법은 한 발 오른 쪽으로 가긴 했지만, 독립운동가들이 꿈꾸었던 나라의 모습을 온전히 담고 있다. 불행하게도 친일파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제헌헌법은 국가보안법에 깔려 질식당하고 말았다. 대한민국 헌정사는 박정희라는 동일인물에 의해 1961년과 1972년 두 차례나 짓밟힘을 당했고,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했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죽으면서 민주주의가 소생의 기회를 맞이했으나 또 다시 박정희의 경호장교였던 전두환, 노태우 일당에 의해 피비린내 나는 광주의 학살을 겪어야 했다. 1987년의 6월항쟁은 간신히 정치적 민주주의만을 회복했다. 안타깝게도 정치적 민주화의 과실은 일반 시민들보다도 재벌과 관료와 수구언론이 따먹어 버렸고,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와 외환위기의 광풍 속에서 양극화의 나락에 빠지고 말았다. 6월항쟁으로부터 25년이 지난 2012년 한국사회는 다시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 이명박이 가져온 역사의 퇴행은 한 발 더 나아가 박정희의 부활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우리는 박정희의 부활이냐, 정치적 민주화에 이은 경제민주화를 성취하느냐의 갈림길에서 2012년의 선거를 치르게 된다.12월 19일은 윤봉길 의사의 80주기가 되는 날이다. 일제는 1932년 12월 19일, 일본 이시카와현 미고우시 육군공병작업장에서 가장 악질적이고 모욕적인 방법으로 윤봉길 의사를 처형했다. 일제는 25세의 청년 윤봉길의 무릎을 꿇려 낮은 십자가에 붙들어 매고는 눈과 이마를 헝겊으로 가렸다. 그리고 10미터 거리에서 딱 한 발의 총알로 윤봉길 의사의 이마 정중앙을 명중시켰다. 피가 흘러나와 헝겊을 붉게 물들였으니 저들은 윤봉길 의사의 죽음으로 일장기를 그린 것이다. 박정희가 하필이면 자신이 롤모델로 삼았던 명치유신의 지도자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날을 골라 자신의 제삿날로 삼은 것도 심상치 않은 우연이지만, 윤봉길 의사의 80주기 되는 날이 18대 대선일인 것도, 그 날이 다카키 마사오를 숭상하는 세력과 민주세력의 한판승부가 벌어지는 것도 범상치 않은 우연이다.

2012년 9월 13일 목요일

아버지 명예회복에 집착 박 ‘일그러진 신념’ 굳어져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09-13일자 기사 '아버지 명예회복에 집착 박 ‘일그러진 신념’ 굳어져'를 퍼왔습니다.

바뀌지않은 역사인식 왜?
 ‘인혁당 사법살인’ 재평가 주장
당시 퍼스트레이디 ‘면피성’
당 핵심·참모 고언 안 먹혀
“누구도 박후보 생각 못바꿔”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는 인혁당 사건과 관련해 11일 “대법원 판결은 존중한다. 법적으로 그렇게 된 것은 저도 인정한다”고 말해, 재심 결과의 법적 효력은 수용할 뜻을 비쳤다. 박 후보의 발언이 사법체계의 부정 즉, 국가 운영체제의 혼선을 초래한 문제점은 어느 정도 바로잡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75년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에 대한 ‘사법살인’을 반성한다는 진정성은 전혀 없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실제로 박 대표는 이날 “(다른 증언 등) 그런 여러가지 얘기가 있고 하니까 그런 걸 다 종합할 적에 그것은 역사적으로 좀 판단할 부분이 아니냐”며 ‘역사 재평가’를 거듭 강조했다. 이는 결국 자신이 집권한 뒤 ‘또다른 해석’ 즉 ‘인혁당 재건위 사형 집행=합법’을 꾀하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지적이 나온다. 역사학자인 전우용 박사는 자신의 트위터에서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는 말의 본뜻은 “뉴라이트의 판단에 맡기자’일 것”이라며 “그러면 인혁당 사법살인은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5·16과 유신에 대한 인식과 태도도 동일하다. 박 후보는 지난 7월 5·16에 대해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토론회)이었다고 했다가 비판을 받자 며칠 뒤 “정상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한발 물러섰다. 그 뒤 5·16에 대해 “내가 만약 그때 지도자였다면 어떤 선택했을까 생각하면서 객관적으로 봐야 하지 않나”라며 거듭 ‘5·16 불가피론’을 주장했다. 박 후보의 역사 인식은 사실 바뀐 적이 한번도 없다. 5년 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는 5·16을 “구국의 혁명”이라고 했으며, 인혁당 재심에 대해서는 “지난번에도 법에 따라 한 것이고, 이번에도 법에 따라 한 것인데 그러면 법 중 하나가 잘못된 것 아니겠느냐. 나에 대한 정치공세다”라고 말했다.박 후보의 기본 생각이 안 바뀌는 것은 왜곡된 신념체계 때문이라는 의견이 많다. 박 후보를 잘 아는 여권의 한 인사는 12일 “과거사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5년 전에도 주변에서 많이 얘기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며 “5·16과 유신이 없었으면 공산화가 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너무 강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박 후보는 정치권에 나오기 전부터 “유신 없이는 아마도 공산당의 밥이 됐을지도 모른다. …시대 상황과 혼란 속에 나라를 빼앗기고 공산당 앞에 수백만이 죽어 갔다면 그 흐리멍텅한 소위 민주주의가 더 잔학한 것이었다고 말할지 누가 알 수 있으랴”(1981년 10월28일 일기)라고 썼다. 민주주의는 흐리멍텅했고, 유신이야말로 구국이라는 인식이다.이런 생각은 사후 독재자로 비판받은 아버지의 명예회복 시도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박 후보는 일찍부터 “비범하신 아버지를 모셨고, 생전이나 서거하신 후나 평범하지 않은 관심과 혹독한 비난에 시달리셨기 때문에 그걸 바로잡는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내 자신 또한 평탄하지 못한 길을 가고 있다”(1989년 11월5일 일기)며 ‘명예회복’을 별렀다. 박 후보가 1990년 아버지 박정희 찬양 영화인 ‘조국의 등불’을 만든 것도 이런 맥락이다.유신 통치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라는 지적도 있다. 새누리당의 한 의원은 “인혁당 판결은 박 후보가 퍼스트레이디를 한 이후인 1975년에 있었다”며 “그가 유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그 시절 자기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한 것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인혁당 사건을 ‘사법살인’으로 인정할 경우 자신에게 직접 책임이 돌아올 수 있다고 판단한다는 것이다.하지만 박 후보의 이런 인식에 대해서는 당 안팎에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김종인 국민행복특별위원장은 “정치지도자로서 아버지를 객관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여러차례 비판적인 견해를 밝혔다. 새누리당의 한 핵심관계자도 “위헌적인 권력 장악을 덮기 위해 내세웠던 공산화 방지라는 논리를 아직도 신봉하면서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것은 낡은 사고”라며 “문제는 아무도 박 후보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종철 성연철 기자 phillkim@hani.co.kr

2012년 7월 19일 목요일

박근혜, 아직도 '유신의 퍼스트레이디' 행세인가


이글은 프레시안 2012-07-18일자 기사 '박근혜, 아직도 '유신의 퍼스트레이디' 행세인가'를 퍼왔습니다.
[김주언의 '언터처블'] 박근혜 임무는 '아부지' 복권?

새누리당의 국가관은 무엇인가. 지난 16일 유력 대선주자인 박근혜 의원이 5.16쿠데타를 '최선의 선택'이라고 미화해 국가관을 의심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같은 날 이한구 원내대표는 국회대표 연설에서 '신 매카시즘'을 되살리려는 듯 '종북 척결론'을 주장하며 일부 야당 의원의 국가관을 문제 삼았다. 새누리당은 민주헌정질서를 파괴한 군사쿠데타를 옹호하고 '반공'을 앞세워 국민을 윽박지르는 것이다. 철권통치로 국민을 억압하던 유신독재체제의 부활을 꿈꾸는 것만 같다. 대통령을 꿈꾸는 박 의원의 꿈이 이뤄져 새누리당이 정권을 유지한다면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두렵다.

▲ 박근혜 새누리당 의원 ⓒ프레시안(최형락)
박근혜 의원은 5.16군사쿠데타에 대해 "돌아가신 아버지로서는 불가피하게 최선의 선택을 한 게 아닌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5.16이 오늘의 한국이 있기까지 초석을 만들었다고 본다"는 주장도 곁들였다. 5.16쿠데타와 유신독재에 대해서는 "국민과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라고 되풀이했다. 5.16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으로 찬양했던 과거의 인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아부지' 박정희에 대한 존경심이 곳곳에 배어 있다. "피해를 보고 고통 받은 분들에게 사과한다"고 했지만, 진정성이 가슴에 와 닿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의원에게 반성과 성찰이란 단어는 찾아볼 수 없다"는 민주통합당의 논평은 정곡을 찔렀다. 4.19혁명으로 수립된 민주정부를 전복시킨 5.16쿠데타가 '최선의 선택'이었다면, 전두환의 12.12쿠데타도 '최선의 선택'이었고, 일제의 식민지지배도 근대화 혁명이 될 수밖에 없다. 박 의원은 아직도 '아부지' 박정희가 1인 영구집권을 획책하던 유신독재 체제의 퍼스트레이디(first lady, '대통령의 부인'을 일컫는 말.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 사망 후, 당시 22살이었던 박근혜 의원이 사실상 박정희 전 대통령의 퍼스트레이디 역을 수행했다)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만 같다. '유신 공주'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박 의원의 역사인식은 그 당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박 의원의 비틀린 역사인식에 대해 '헌법 모독'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더 나아가 대한민국에 대한 모욕이며 국민으로서는 치욕일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를 갈망하며 자신을 희생했던 민주열사들이 무덤에서 통곡할 일이다. 트위터에 올라온 "5.16을 국민이 판단하는 것이지 딸의 판단이 옳다고 보는가!", "군인이 총칼로 정권탈취해서 독재한 것이 최선이었다니", "이 나라의 초석은 민주주의를 갈망하며 총칼 앞에서도 가슴속에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민주화를 이루어낸 국민"과 같은 촌평들이 가슴에 와 닿는다.

박 의원이 '퍼스트레이디'였던 시절의 유신헌법 전문에는 '5.16혁명'이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1987년 6.10시민항쟁으로 개정된 헌법에는 삭제됐다. 유신헌법에는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과 4.19의거 및 5.16혁명의 이념을 계승하고'로 되어 있었다. 현행 헌법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로 개정됐다. 헌법 전문은 건국이념과 역사, 정통성, 국가존립 이유와 목적을 명시한 '국가의 바이블'이다. 전문에서 '5.16혁명'이 삭제된 것을 박 의원이 모르는 것은 아닐까.

박 의원의 역사인식은 5.16쿠데타와 유신독재에 대한 찬양과 옹호로 일관돼왔다. 박 위원은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조작·과장됐다는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의 발표에 대해 "한마디로 가치가 없는 것이며 모함"이라고 일축했다. 인혁당 사건으로 '사법살인' 당한 8명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데 대해서도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박 의원은 "법원에서 정반대의 두 가지 판결을 내렸다. 그렇다면 뭐가 진실인가. 역사적 진실은 한 가지밖에 없다"고 말했다. 만약 박 의원이 대통령이 되면 인혁당 사건은 또다시 '진실'로 뒤바뀔지 모르는 상황이다. '아부지'를 복권하는 것이 박 의원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 박근혜 의원이 1979년 쓴 <새마음의 길>. 좌측 상단, 여학생들로 부터 군대식 사열을 받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새마음의 길

박 의원의 5·16쿠데타와 유신독재에 대한 인식은 "과연 5.16과 유신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겠나"라는 질문으로 압축된다.

"그때 상황이 너무나 나라가 혼란스러웠고, 남북 간 대치 상황에서 잘못하면 북한에 우리가 흡수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또 혁명규약에 보면 '기아선상에 헤매는 국민을 구제하고'. 이런 얘기가 나올 정도로 기아선상에 헤맸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구국을 위한 혁명이었다고 생각한다."

1989년 MBC 인터뷰에서 주장한 "5.16은 구국의 혁명이었다"는 명제는 박 의원의 머릿속에 깊숙이 박혀 있다고 할 수 있다.

유신독재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이다. 가 공개한 그의 일기 몇 구절을 보자.

'유신 없이는 아마도 공산당의 밥이 되었을지 모른다.' (1981년 10월 28일)

이한구 원내대표의 '종북척결론'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다.

'화염병을 던지며 반항하고, 선배 알기를 개떡만도 못하게 생각하고 온통 도덕, 질서, 가치관 등을 뒤죽박죽으로 뒤집어 놓은 오늘의 이 현실은 그동안의 역사 왜곡으로 인한 기성세대의 자업자득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가를 이 사회는 지금 단단히 치르고 있는 것.' (1990년 5월 15일)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온 학생들에 대한 얄팍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박 의원의 왜곡된 역사인식은 박 의원을 둘러싼 인사들의 면모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5.16쿠데타를 '혁명'이라고 표현한 교과서를 편찬한 박효종 서울대 교수는 경선 캠프 일원으로 참여했다. 홍사덕 공동선대위원장은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포은에게 물으면 역성혁명이라고 하겠지만 세종대왕에게 물으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라며 "박 전 위원장도 세종대왕과 같은 입장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역사 교과서에 갇힌 세종대왕의 꾸짖음이 들리는 것 같다. 이 밖에도 박근혜 캠프 주변에는 비슷한 인물들이 많다. 만약 이들이 권력 주변에 포진한다면 헌법 전문에 '5.16혁명'이 다시 포함될지도 모르겠다.

미래는 과거의 거울이다. 박 의원의 역사관을 보면 그의 미래 구상에 의구심이 나올 수밖에 없다. 총칼로 헌정질서를 무너뜨린 행위를 옹호하는 역사인식은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사고방식이다. 국민 탄압과 철권 폭압 정치도 결과만 좋으면 정당화할 수 있다는 믿음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박 의원은 '5·16옹호'를 넘어 '5.16 계승·발전'을 소명으로 여긴다. 그는 대선공약을 발표하면서 "아버지의 궁극적 꿈은 복지국가였다"고 말했다. 5.16쿠데타는 이제 단순히 '구국의 혁명'에서 '국민복지를 위한 위대한 혁명'으로 격상된 셈이다. 박 의원은 '아부지의 유업'을 완성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이한구 원내대표는 충실한 '친박계열'로 알려져 있다. '종북주의자'가 아닌 '종박(從朴)주의자'인 셈이다. 이 원내대표는 "지난 총선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애국가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국회에 진출해 헌정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며 "왜곡된 국가관, 시대착오적인 역사관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국회에까지 진출하고 있다는 사실에 개탄을 금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국민은 이 말을 박 의원에게 고스란히 돌려주고 싶어 한다.

"대선을 앞두고 5.16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으로 미화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모독하고 인혁당사건 조작에 대해 '한마디로 가치가 없는 것이며 모함'이라고 부인하는 사람이 국회에 진출해 헌정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 왜곡된 국가관, 시대착오적인 역사관에 빠져 있는 사람이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경선에 나서고 있다는 사실에 개탄을 금할 수 없다."

 /김주언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