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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22일 금요일

고 장준하 선생 ‘긴조 1호’ 첫 피해자 ‘4호’ 민청학련 겨누고 인혁당 ‘사법살인’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3-03-21일자 기사 '고 장준하 선생 ‘긴조 1호’ 첫 피해자  ‘4호’ 민청학련 겨누고 인혁당 ‘사법살인’'을 퍼왔습니다.

긴급조치 희생양들

유신체제의 시작과 함께 대한민국 현대사를 ‘민주주의의 암흑기’로 몰아넣은 박정희 정권이 ‘긴급조치 1호’를 발령한 뒤 가장 먼저 이를 적용해 구속했던 사람은 고 장준하 선생이다. 1953년 월간 (사상계)를 창간한 장 선생은 박정희 정권이 1972년 유신체제를 선포하자 유신헌법 개정 100만인 청원운동을 벌였다. 박정희 정권은 이를 진압하려고 1974년 1월8일 긴급조치 1·2호를 발동했다. 당시 장 선생과 백기완(81) 통일문제연구소장 등이 구속됐다. 장 선생은 재판 6개월 만에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1975년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사해, 정권에 의한 타살 의혹이 제기됐다. 지난 1월 39년 만에 열린 재심에서 장 선생에게 무죄가 선고됐다.긴급조치 1호는 이에 맞서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낳았다. 박정희 정권은 그때마다 긴급조치를 발동해 시위자들을 줄줄이 체포·구속했다. 74년 4월3일 발동한 긴급조치 4호는 유신 반대 운동을 벌이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 표적이었다. 민청학련을 반정부 조직으로 몰아 김지하 시인 등 235명을 비상군법회의에 송치한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이다. 이 사건 수사 과정에서 ‘민청학련 배후에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가 있다’며 관련자들을 비상군법회의에 넘겼고, 이 가운데 8명이 이듬해 대법원에서 유죄 선고를 받고 하루도 안 돼 사형당했다. 현대사의 대표적 ‘사법 살인’으로 꼽히는 이 사건도 긴급조치 4호에서 출발한 것이다.1975년 4월 서울대생 김상진씨가 유신체제와 긴급조치에 항거해 할복 자살하고 저항이 거세질 조짐을 보이자, 박정희 정권은 5월13일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다. 정권 반대 운동을 벌이던 수많은 대학생·시민들이 잡혀 들어갔다.1974년 1월8일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된 때부터 1979년 12월8일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될 때까지 2159일은 ‘전 국토의 감옥화’ ‘전 국민의 죄수화’라는 유행어를 낳은 암흑의 시기였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2012년 11월 2일 금요일


이글은 오마이뉴스 2012-11-01일자 기사 'MBC (2580) 간부 "인혁당은 친북활동" 주장 파문'을 퍼왔습니다.
심원택 부장 "친북활동한 것 또한 사실" 주장... 유족들 분통

▲ 28일 방송된 MBC <시사매거진 2580>의 한 장면 ⓒ MBC

"인혁당 사건에 대해 두 가지 팩트가 존재합니다. 첫째, 고문에 의해 진술된 내용은 증거의 효력이 없어서 무죄라는 것입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혁당 관련자들이 당시의 법을 무시하고 친북 활동을 한 것 또한 사실이라는 주장입니다."

MBC의 대표적인 시사 프로그램인 (시사매거진 2580)(이하 [2580])을 총괄하고 있는 부장급 인사가 프로그램에서 영화 (유신의 추억) 관련 사건 피해자의 인터뷰를 삭제한 것을 두고 사내게시판에 직접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역사 인식의 부족을 고스란히 드러내 파문이 일 것으로 보인다.

(2580)을 담당하고 있는 심원택 시사제작 2부장은 31일 MBC 사내게시판에 '민실위(민주방송실천위원회의 줄임말-기자 주) 보고서에 대한 제 견해'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했다. 같은 날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이하 MBC 노조)에서 '(2580)의 아이템 선정과 기사 작성 과정에서 탄압이 있다'는 내용의 민실위 보고서를 발간한 데 따른 것이다.

해당 글에서 심 부장은 보고서 내용을 인용하며 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거나 갖고 있는 것으로 의심받을 수 있는 기사를 작성하는 후배 기자들을 나무라는 것은 선배로서 그리고 데스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주장도 함께다. 

(유신의 추억) 이야기하며 "인혁당 관련자, 친북활동한 것도 사실"?

▲ 2차 인혁당 사건,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희생자 8명(여정남, 하재완, 이수병, 송상진, 김용원, 우홍선, 서도원, 도예종)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 권우성

그런데 이 글에서 사실과 다른 부분이 발견됐다. 이정황 감독의 영화 (유신의 추억)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정권을 선포한 뒤 달라졌던 사회상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이 영화는 지난 23일 서울시청 앞 광장과 국회에서 각각 시사회를 열기도 했다. 

이를 두고 사내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심 부장은 "인혁당 사건에 대해 두 가지 팩트가 존재한다"며 "첫째는 고문에 의해 진술된 내용은 증거의 효력이 없어서 무죄라는 것이고,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혁당 관련자들이 당시의 법을 무시하고 친북활동을 한 것 또한 사실이라는 주장이다"라고 밝혔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일단 영화 (유신의 추억)에서 언급된 '인혁당 사건'이 무엇인지부터 알 필요가 있다. 1974년 '긴급조치 4호' 하에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 불법단체로 규정되고, 이어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조직이 민청학련의 배후에서 학생시위를 조종하고 체제전복을 기도했다"는 중앙정보부의 수사결과가 발표됐다. 이 결과 1975년 인혁당 관련자 7명과 민청학련 관련자 1명이 대법원 판결이 떨어진 지 채 하루도 안 돼 사형을 당했다. 이를 '2차 인혁당 사건', 또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사건은 유신정권에서 조작된 것이라는 논란에 휩싸였다. 결국, 사건 발생 27년 만인 2002년 대통령 소속 의문사 진상 규명위원회가 조사에 나섰고, 2005년에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재조사했다. 그 결과 '민주화운동 탄압을 위해 당시 중앙정보부가 고문과 증거 조작을 통해 만들어낸 사건'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2007년 피해자 유가족 등이 제기한 재심에서 서울중앙지법이 무죄 판결을 내리고 국가에 피해보상을 명령한 것도 이 결과에 근거한 것이다. 국제법학자협회 역시 관련자들의 사형이 집행된 4월 9일을 '사법 암흑의 날'로 선포하기도 했다. 때문에, 이 사건이 단순히 '고문에 의한 진술이 효력이 없'기 때문에 무죄라는 것은 일부 용인할 수 있으나 완전한 사실은 아니다. 더욱이 '관련자들이 친북활동을 했다'는 심 부장의 주장은 "팩트"라고 보기에는 힘들다. 

"MBC 간판 시사프로그램 책임자가 이렇게 현대사에 무지할 수 있나"

▲ 지난 9월 12일 여의도 새누리당사앞에서 열린 '인혁당재건위사건 '사법살인' 부정하는 박근혜 규탄 기자회견'에서 고 송상진씨 부인 김진생씨, 고 김용원씨 부인 유승옥씨, 고 우홍선씨 부인 강순희씨가 남편의 영정사진을 들고 회견장으로 향하고 있다.(<오마이뉴스> 자료사진) ⓒ 권우성

그렇다면 심원택 부장의 이 같은 발언은 어떤 배경에서 나온 것인가? 지난 9월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 역시 2차 인혁당 사건을 두고 "두 개의 판결이 있다"며 "그 조직에 몸담았던 분들이 최근 여러 증언을 하고 있다"고 말해 논란을 빚은 바 있다. 이후 이 발언에 대한 공식적으로 사과한 박근혜 후보가 1차 인혁당 사건과 2차 인혁당 사건을 혼동해 일어난 일이라는 해석이 있었다.

박근혜 후보가 발언해 사과까지 한 '인혁당 사건'에 대해 (2580) 심 부장은 '친북활동 단체'라고 규정하고 있는 셈이다. 1차 인혁당 사건은 2차 인혁당 사건보다 10년 앞서 일어난 것으로, 당시 중앙정보부가 대학생 40여 명을 구속하고 10여명을 지명 수배한 사건이다. 그런데 이를 두고 현재 몇몇 관련자들이 "이 사건은 조작이 아니었다"는 증언을 내놓고 있어, 당시 '친북활동'이 있었는지의 여부를 명확히 가릴 수 없다는 의견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영방송사의 부장급 인사, 특히 시사 프로그램을 만드는 인물이 스스로 현대사에 대한 이해 부족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한 MBC 관계자는 "MBC의 간판 시사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는 의 책임자가 이렇게 현대사에 무지할 수 있나"라며 "더욱이 이런 상태에서 이런 글을 사내게시판에 올렸다는 점도 개탄스럽다"고 말했다. 이어 "그런 이들이 보직을 차지하고 있는 게 현재 MBC의 현실"이라고 말한 이 관계자는 "그러니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도 나오는 것이 아니겠느냐"며 씁쓸해 했다. 

영화 (유신의 추억) 제작사인 M2픽쳐스의 김학민 대표도 "소식을 전해 들었다"며 "역사적으로도 평가됐고, 사법부에서도 오랜 시간 재심을 통해 무죄라는 판단을 내린 건데, 사법부의 판결을 완전히 무시한 처사"라고 비판했다. 이어 김 대표는 2차 인혁당 사건을 두고 "그 사건 이야기를 (피해자 유족들에게) 다시 꺼내기도 송구할 정도"이라며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이야기를 그렇게 무책임하게 이야기할 수 있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또 김 대표는 "술자리에서 장삼이사가 잘 알지도 못하는 걸 이야기하는 것과, 공영방송의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말한 게 같을 수 있나"라며 "단순히 1차 인혁당 사건과 2차 인혁당 사건을 오인한 것이 아니라, 정말 2차 인혁당 사건을 두고도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라고 덧붙였다. 

한편 본지는 이에 대한 심원택 부장 본인의 설명을 듣기 위해 연락을 시도했으나, 심 부장은 "(오마이뉴스) 기자가 어떻게 내 번호를 알았는지 모르겠다"며 "앞으로 나에게 전화하지 말아라"는 말만 남기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미나(neptune0222)
오마이스타에서 취재하는 이미나입니다. 방송(MBC/케이블) 담당.

2012년 9월 25일 화요일

한홍구 “박근혜, 왜 ‘정수장학회’ 사과는 안 하나”


이글은 미디어스 2012-09-24일자 기사 '한홍구 “박근혜, 왜 ‘정수장학회’ 사과는 안 하나”'를 퍼왔습니다.
[인터뷰] “인혁당은 아버지 일이지만 정수장학회는 박근혜 문제”

▲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오마이뉴스
역사 인식 논란을 빚고 있는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향해 “그 입 다물라!”며 매섭게 비판했던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24일 박근혜 후보의 ‘과거사 사과’에 대해 “국민의 힘에 떠밀려 (사과) 발언을 한 것일 뿐, (기자회견 내용 자체는) 오만불손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한홍구 교수는 22일자 한겨레 토요판 ‘유신과 오늘’ 연재에서 유신을 역사적 평가에 맡기자는 박 후보에 대해 “그 입 다물라!”고 강도높게 비판한 바 있다.
한홍구 교수는 24일 오후 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박근혜 후보의 사과가 보다 더 구체적이었어야 했다”며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장준하 의문사 등 진상이 규명되지 않은 사건들을 어떻게 하겠다는 이야기는 없었다”고 지적했다. “‘앞으로 이와 같은 조사에 대해 새누리당은 반대하지 않겠다’와 같은 구체적인 다짐이 필요하다”는 것. 
2005년 국정원 과거사위에서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부일장학회 헌납사건’ 조사를 담당했던 전문가로서 ‘정수장학회 저격수’로 꼽히는 한홍구 교수는 박근혜 후보의 ‘과거사 사과’ 기자회견에서 ‘정수장학회’문제가 일절 언급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한홍구 교수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등은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문제이지만, 정수장학회는 아버지가 아닌 본인의 문제”라면서 박근혜 후보가 정수장학회 사태에 대해 사과했어야 했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박근혜 후보가 오전에 ‘과거사 사과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사과 자체는 긍정적이다’는 평가와 ‘진정성이 없다’는 비판이 동시에 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보나? 
“박근혜 후보의 사과가 보다 더 구체적이었어야 했다. 향후에 자신이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겠다는 식으로 사과했어야 했다. 잘못된 것을 풀어간다는 의미에서 ‘진정성’이 더 필요했다는 말이다.
일례로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장준하 의문사 등 아직도 진상규명이 되지 않은 사건들을 어떻게 하겠다는 이야기가 없지 않았나. ‘앞으로 이와 같은 조사에 대해 새누리당은 반대하지 않겠다’와 같은 (구체적) 사과와 다짐이 필요하다. 국민의 힘 때문에 (사과) 발언을 한 것일 뿐, (기자회견 내용 자체는)오만불손했다.”
- 박근혜 후보는 오늘 기자회견에서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면서도 ‘정수장학회’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렇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은 아버지의 문제이다. 하지만 정수장학회는 본인의 문제이다. 사실 이 문제는 나에게 물어보기보다 기자들이 박근혜 후보에게 질문했어야 하지 않나? 나도 궁금하다.”
-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는 ‘아버지와 조국에 침을 뱉은 반 역사적 사과’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극우의 의견일 뿐이다.”
- 사과도 했으니, 이제 ‘박근혜의 과거사 인식 논쟁’은 여기서 끝내는 게 맞지 않느냐는 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이제부터 시작이다. 사과가 말 뿐이 아니라 진정성을 바탕으로 한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 박근혜 후보 측에서는 최필립 이사장 자진 사퇴로 정수장학회 사태를 마무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그건 본질이 아니다. 현재의 이사회를 해체하고 유가족에게 정수장학회를 돌려주는 것이 맞다.”
- 정수장학회의 전모를 알리는 책을 낸다고 했었는데, 언제쯤 완성되는 것인가?
“10월 초 예정이다. 늦어도 중순까지는 나온다.”

김도연 수습기자  |  riverskim@mediaus.co.kr

2012년 9월 22일 토요일

“증거 없이 기소하란 말씀이냐” 인혁당 담당검사들 항명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09-13일자 기사 '“증거 없이 기소하란 말씀이냐” 인혁당 담당검사들 항명'를 퍼왔습니다.

1964년 8월14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북한의 지령을 받아 국가를 변란하려는 ‘인민혁명당’ 41명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964년 9월10일 <동아일보>는 인혁당 사건 담당검사인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 전원이 기소를 거부하고 사표를 제출했다고 보도했다.

박정희 법무참모 출신 신직수 검찰총장
서울지검 공안부 집단사표 반발도 무시
중앙정보부 송치의견 그대로 베껴 기소
검찰 수뇌부 ‘정치 권력의 시녀’ 시대로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47. 인혁당 사건과 공안검사들의 항명파동(상)

꼿꼿했던 검찰이…

최근 정치검찰 논란이 뜨겁다. 이 연재는 중정-안기부가 사법부에 가한 압력을 주로 다루었지만, 검찰에 대한 압력 역시 중요한 사례 몇 건은 꼭 다뤄야 할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어느 나라에서도 한국처럼 검찰이 신뢰를 잃고 조롱과 야유의 대상이 된 나라는 없다.대한민국 검찰이 처음부터 저 지경은 아니었다. 초대 서울지검장 최대교는 이승만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현직 상공장관 임영신을 독직 혐의로 기소했다. 2대 검찰총장 김익진은 이승만의 부당한 압력에 고분고분 응하지 않다가 서울고검장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당했다. 당시 서울지검장 이태희는 이승만을 상대로 이 말도 안 되는 인사에 대해 인사처분 무효확인소송을 냈다가 부산지검장으로 좌천되었다. 1960년 4월혁명 뒤 이태희가 검찰총장으로, 최대교가 서울고검장으로 복귀해 검찰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군정에서 민정으로 넘어가던 1963년 12월, 박정희는 사단장 시절 법무참모인 36살의 중앙정보부 차장 신직수를 검찰총장에 임명했다. 신직수의 동기들은 잘해야 부장검사에 올랐을 때였다. 신직수는 무려 7년간 검찰총장으로 자리에 있었는데, 그의 재임 기간은 검찰이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시기였다. 그 결정적인 계기는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이었다.

공안검사들의 양심적 기소 거부

1964년 9월10일 각 신문은 서울지검 공안부 이용훈 부장과 김병리, 장원찬 등 인혁당 사건 담당검사 3명이 상부의 기소 강행 방침에 반발해 사표를 제출했다는 사실을 ‘항명파동’이라고 크게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우리의 공안부 네 검사는 보안법 관계 사실에 대하여는 추호의 용서도 하지 않기로 유명한 분들”이라고 소개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반공의식이 넘치는 공안검사들이 중정이 야심만만하게 발표한 대규모 조직사건의 기소를 집단적으로 거부하고 나섰을까?1964년 8월14일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북의 지령을 받아 국가를 변란하려는 지하조직인 인민혁명당을 적발했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중정은 구속 22명, 불구속 12명, 미체포 13명 등 모두 47명의 피의자를 서울지검으로 송치했다. 피의사실의 핵심은 이들이 남파간첩 김모(최초발표문에는 김영춘, 송치의견서에는 김모)의 지령에 의해 반국가단체 인민혁명당을 창당해, 한일회담 반대 학생데모를 배후조종했다는 것이다. 인혁당 사건을 통해 ‘학생운동과 배후의 빨갱이’라는 도식을 처음 선보인 군사정권은 위기상황이면 이 카드를 늘 빼들었다.방대한 기록을 넘겨받은 공안검사들은 수사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수사는 난관에 봉착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중정에서의 진술 외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던 것이다. 증거가 없으니 공소제기를 할 수 없지만, 중정이 떠들썩하게 발표한 사건을 기소하지 않는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용훈 부장검사는 “이토록 중대한 사건을 증거도 없이, 또 검찰에 송치도 하기 전에 전 국민을 상대로 대대적으로 발표부터 해버린 중앙정보부가 원망스러웠다”고 회고했다.

공정한 수사, 부당한 압력

이용훈은 서울지검장 서주연에게 기소하기 어렵다는 것이 공안부 의견이라고 수사 결과를 보고했다. 서주연은 기소도 못하면 대대적으로 발표한 정부의 위신이 뭐가 되느냐며 “어떻게든지 해보아야 할 것 아니오?”라고 언성을 높였다. 이용훈도 공안부 검사 네 명이 “국가안보적 견지에서 사건 수사에 한 치의 소홀함도 없도록 전심전력을 다하여 수사”했는데, “어떻게든지 해보라는 말씀은 증거가 없어도 기소하라는 말씀”이냐고 따졌다. 이용훈이 지검장이 검찰총장에게 보고할 수 없다면 자신이 직접 보고하겠다고 하자, 서주연은 애원조로 다시 어떻게든 해보라고 당부했다. 구속 만기일이 다가오는 가운데 8월31일 이용훈은 검찰총장 신직수에게 “공소제기를 하여도 유죄를 받을 수 있는 증거가 전혀 없다”고 수사 결과를 보고했으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직수는 몇 달 전까지 중앙정보부에 차장으로 있던 몸이었다.다음날 그는 법무부에서 장관 민복기, 차관 권오병, 담당 국장, 대검 차장, 서울지검장 등 고위 간부들이 모인 가운데 다시 한 번 수사 결과를 보고했다. 이때, 권오병이 “빨갱이 사건에 일일이 증거 운운할 수 있겠소? 정보부에서 받아낸 피의자들의 자백을 검사들은 왜 못 받아내는 거요? 정보부에서 자백한 것이 있으니 그대로 공소제기를 해도 되지 않겠소?”라고 강하게 말했다. 이용훈도 흥분해 “차관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차관님께서는 대학에서 형사소송법을 강의하시면서 학생들에게도 그런 식으로 가르치십니까?”라고 받아쳤다.

기소하든지 사표 쓰든지

법무부에서 돌아온 서울지검장 서주연은 다시 여운상 차장과 이용훈과 공안부 최대현, 김병리, 장원찬 등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 이용훈에 따르면 서주연은 “빨갱이 사건은 일반 사건과는 다르게 취급해야 하는 것이오. 이 사건에 대한 공소제기는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절대적인 명령이므로 당신들은 기소를 하든지, 아니면 옷을 벗고 물러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시오. 기소를 해서 무죄가 되더라도 검사들에겐 책임을 안 지운다는데 왜들 그러는 거요? 여러분들이 기소를 안 한다면 나는 검사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어요. 당신들도 사표를 써가지고 있어요!”라고 발언했다. 이용훈이 “이런 심한 말은 내 평생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 어안이 벙벙해 있을 때, 공안부의 막내인 장원찬 검사가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용훈과 김병리도 흥분해서 모두 사표를 쓰겠다고 큰 목소리로 말하고 검사장실을 나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고 한다.다음날 검찰총장과 검사장이 이들을 개별적으로 불러 설득했고, 수사팀 내에서는 최대현이 중정에서 제시한 국가보안법 위반이 아니라 반공법 위반으로 혐의를 바꿔 기소하자고 제안했지만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검사장은 상부의 명령이라며 구속 만기일 이틀 전인 9월3일까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무조건 기소하라는 최후통보 명령을 내렸다. 공안검사들이 이를 거부하자, 검사장은 “당신네들이 정 기소를 안 하겠다면 검사장이나 차장 이름으로 기소하겠으니 기소장이라도 작성해 달라”고 사정했으나, 이용훈, 김병리, 장원찬 등은 끝내 사표를 제출했다. 원래 공안부 전원이 사표를 내기로 했지만, 김형욱이 “나의 심복처럼 움직이던” 검사라고 회고록에 쓴 최대현은 마지막 순간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최대현은 김형욱으로부터 “서울지검 검사장에게 내 말을 전하시오. 재판 결과야 어떻게 나든 간에 단 한 명이라도 기소는 해야 할 것 아니오! 중앙정보부를 어떻게 보는 거요?”라는 압박을 받고 있었다.대검은 서울지검 차장검사 여운상의 명의로 기소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여운상 역시 기소장 작성과 서명을 거부했다. 여운상은 인혁당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중앙정보부에서 보안차장보로 근무했었기에, 그마저 서명을 거부한 것은 정보부로서는 뼈아픈 일이었다. 검찰 고위층은 당황해 서울지검의 다른 검사들에게 기소장을 작성하라고 부탁했으나, “그렇게 중요한 사건이면 검사장님이나 차장검사님이 직접 기소하시죠”라며 빈정거릴 뿐이었다. 서주연은 그날 밤 당직인 정명래를 시켜 급히 공소장을 작성하게 했다. 피의자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정명래는 중정의 송치의견서를 그대로 베껴 공소장을 완성했으니, 검사동일체의 원칙을 참 편하게 적용한 것이다. 김형욱은 어려운 상황에서 인혁당 관계자를 기소한 정명래를 중앙정보부 5국 부국장으로 기용하는 것으로 보답했다. 김형욱은 “혼란한 상황일수록 부하를 채용하는 기준이 능력 위주에서 충성심 위주로 바꿔진다”고 덧붙였다.

항명파동으로 번져

검찰은 인혁당 관련자들을 천신만고 끝에 구속 만기일 저녁에 간신히 기소했다. 그러나 이용훈, 장원찬, 김병리 검사가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으며 공소를 유지할 자신이 없다”며 기소를 거부하고 사표를 제출했다는 사실이 각 신문의 사회면 머리기사로 보도되면서 국회에서 논란이 됐다. 1964년 9월9일 국회는 법무부 장관 민복기를 불러 “인혁당 사건은 6·3계엄사태를 합리화하기 위한 조작이 아니냐”, “항간에서는 이번 인민혁명당 사건을 정치적인 쇼라 부른다”, “애국적인 학생데모의 주동자들을 솔직히 말해서 때려잡기 위해서 이 악랄한 사건이 인위적으로 조작되었다는 여론이 구구”하다면서 기소 경위를 추궁했다. 민복기는 “사건이 중대하고 여러 가지 의심할 만한 점이 있기 때문에 법원의 판단을 받아보라고 해서 기소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렇게 파장이 커지고 국회에서 중앙정보부 폐지론까지 제기되자 정보부장 김형욱은 사건의 재수사를 지시했다. 재수사는 과거 중앙정보부에 파견근무를 하는 동안 김형욱 밑에서 일하기도 했던 한옥신 서울고등검찰청 검사가 맡았다. 한옥신은 중정, 검찰 관계자들과 함께 수차례에 걸쳐 합동회의를 하기도 했지만, 중앙정보부가 요구하는 대로 기소하기는 어렵다고 난색을 보였다. 결국 사건이 기소된 지 1개월 11일 만인 1964년 10월16일, 검찰은 26명 중 14명에 대해서는 공소를 취하해 석방하고 12명은 애초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구성죄를 적용한 공소장을 변경해, 반공법 제4조 1항(찬양·고무) 위반 혐의로 재기소하기에 이른다. 검찰 스스로 처음 기소가 무리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자인한 것이다. 법무장관 민복기는 사표를 내고 근 한 달간 출근도 하지 않던 이용훈을 불러 이제 모든 문제가 풀렸으니 그대로 그 자리에서 전과 같이 일해달라고 위로했다. 이용훈도 장관의 따뜻한 말에 그동안 쌓이고 쌓인 울분과 억울함이 풀리며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고 한다. 이용훈은 그길로 서울지검으로 출근했지만, 새로운 인사파동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2012년 9월 20일 목요일

인혁당 사건의 진실 “살인마 박정희”와 그 정치적 후계자


이글은 레프트21 2012-09-17일자 기사 '인혁당 사건의 진실 “살인마 박정희”와 그 정치적 후계자'를 퍼왔습니다.

“당시 진술은 고문, 구타, 협박으로 허위 자백을 한 것으로 인정되므로 증거능력이 없다.”
2007년 1월 2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는 32년 만에 열린 이른바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자백이 유일한 증거였던 재판에서 자백이 허위라는 재심 판결은 인혁당 사건이 수사 단계에서부터 재판과 사형 집행까지 죄다 거짓에 근거한 악랄한 살인극이었다는 뜻이다. 
야수적인 고문과 협박, 혐의를 조작하고도 모자라 판결 하루 만에 사형 집행, 고문 흔적을 감추려고 시신마저 빼앗아 강제 화장. 이것이 국제적으로도 악명 높은 인혁당 사건이다. 결국 인혁당 사건 유족들에게 국가가 6백37억여 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까지 내려졌다.

△사법살인 부정하는 박근혜 ‘인혁당사건’ 희생자 유가족들이 12일 오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 고은이

인혁당 사건은 1964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5ㆍ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1964년 당시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 투쟁이 정권 퇴진으로까지 번지려 하자, 용공 조작 사건을 기획한다. 이것이 제1차 인혁당 사건이다. 그러나 검사들마저 증거가 없다며 기소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지며 사건은 축소됐다.
8년 뒤,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선포하며 언론과 표현의 자유, 자유 선거 등 민주적 기본권을 말살하고 군사 독재를 영구화하려 했다. 이런 야만적 독재조차 민주주의를 위한 저항이 커지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박정희는 민주화 운동 탄압을 위해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을 조작하고는 그 배후에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가 있다고 주장했다.
고문
이것이 제2차 인혁당 사건이다. 바로 이 사건으로 여정남,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등 8인이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관련 구속자들에게는, 인간이라면, 인간에겐,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온갖 고문들이 가해졌다. 심지어 그 부인들까지 중앙정보부로 데려와 감금하고 “내 남편은 간첩”이라는 자술서를 쓰게 했다. 이때의 자책감 때문에 고 김용원 씨의 부인 유승옥 씨는 일가족 자살 시도를 하기도 했다.

△오열하는 인혁당 유족들 ‘인혁당사건’ 희생자 유가족들이 12일 오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 고은이
변호사가 피의자를 ‘변호’했다고 재판을 하다 말고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끌려 나가 구속되는 일도 벌어졌다. 이 사건을 취재하던 일본 언론인마저 긴급조치 위반과 내란선동죄 등으로 구속할 정도였다.
오직 고문과 협박으로 만든 허위 자백에 근거해서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사형을 확정했다. 다음 날 새벽에 8명 모두 사형 집행이 이뤄졌다. 판결 18시간 만이었다.
고문 흔적을 감추려고 시신마저 크레인을 동원해 가며 빼앗아 화장을 해 버렸다. 시신 탈취 차량을 막던 문정현 신부는 그때 당한 부상으로 지금도 다리를 전다. 
이 사건은 한국 자본주의의 고도 성장 속에 담겨진 핏빛 진실 중 하나다. 최근 “수출 1백억 달러를 넘기려고” 유신이 필요했다는 홍사덕의 발언은 지배자들이 차마 입밖에 내지 않던 본심일 것이다. 
고 우홍선 씨의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남편이 사형당한 이후 신문에 나온 박정희 사진을 그가 죽을 때까지 이가 아프도록 꼭꼭 씹어서 뱉곤 했습니다. 남편 산소에 매주 꽃을 들고 찾아가서 하늘을 향해 ‘살인마 박정희 천벌 받아라’ 하고 외쳤습니다. 한 번 외치면 효과가 없을 것 같아 꼭 세 번씩 외쳤습니다.”
이런 사건의 진상이 처음 인정된 것은 2005년 당시 국가정보원의 과거사 진상 조사 때였다. 당시 한나라당 대표이던 박근혜는 이 조사 결과를 두고 “한마디로 가치가 없고 모함 … 코드 맞는 사람들끼리 우리 역사를 왜곡해 함부로 발표하는 것 자체가 과거사가 될 것”이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결국 박근혜가 인혁당 사건에 관해 “두 가지 판결” 운운한 것은 그녀가 독재자ㆍ살인마의 계승자라는 것을 재확인한 것이다. 

김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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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18일 화요일

박정희가 천상에서 사죄했을 거라고? 김진 위원을 존경할 수밖에 없는 이유


이글은 오마이뉴스 201-09-18일자 기사 '박정희가 천상에서 사죄했을 거라고? 김진 위원을 존경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퍼왓습니다.
[민주공화국 대통령 후보의 자격을 묻는다①] 5·16 쿠데타와 10월 유신

순항하는 듯했던 박근혜호(號). 출범하자마자 역주행을 하더니 결국 유신항(港)에 닻을 내렸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일부 선원이 '기항지가 잘못됐다'고 항의하나, 선장과 항법사 등 조타실 간부들은 요지부동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유신항에 정박한 배는 닻을 올리기를 거부하고 있다. 닻은 거기에 내려둔 채 미래로 나아가겠다는 이야기. 선원들이 '그게 불가능하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 소리가 조타실까지 들릴 리 만무하다. 선장은 '이게 다 어묵 사먹으며 포장마차 매상이나 올려주면 풀릴 문제'라고 믿는 모양이다.

나는야 유신의 딸

▲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지난 11일 오후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제65회 전국농촌지도자대회에 참석한 뒤 승용차를 타고 막 떠나려는 가운데 한 참석자가 악수를 하자며 손을 불쑥 내밀자 박 후보가 깜짝 놀라고 있다. ⓒ 권우성

솔직히 박근혜 후보가 스스로 유신에 발을 묶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과거를 돌이켜보면,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인터넷으로 기사검색을 해 보라. 박근혜 후보는 이미 2002년, 2007년에도 지금과 동일한 물음에, 지금과 동일하게 대답했다. 지금이 2012년이니, 정확히 5년마다, 즉 대선이 있는 해마다 과거사 문제에 봉착했던 것이다. 물론 그때마다 그녀의 입장은 확고했다. '유신체제는 정당했고, 아버지는 억울하다'는 것. 사실 그녀의 인식은 뿌리 깊은 것이다. 

"4·19 때 목숨까지 버렸는데 그 혼란의 와중에서 공산당의 밥이 됐다면 그 희생이 무슨 가치가 있겠어요. 더 나아가 3·1운동 6·25사변(한국전쟁)도 그때 많은 우리 선조가, 앞서간 분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희생을,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내놓으셨는데 그것도 5·16 때 공산당한테 나라가 먹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희생이 값진 것이고 헛되지 않은 것이지, 만약에 나라가 (먹혔다면) 그 희생은 다 헛된 것 아니겠느냐. 그런 의미에서 5·16을 생각하고 싶고요. 

마지막으로 제가 유신에 대한 얘기가 끊어져서 말씀을 못했는데, 특히 유신과 자주국방은 떼려야 뗄 수가 없어요. 왜나면 자주국방과 자립경제를 그 기한 안에 이루기 위해 아버지가 유신을 하신 것이기 때문에..." (1989년 박경재의 [시사토론]인터뷰 당시) 

한마디로, 5·16은 단순한 군사쿠데타가 아니라, 헌법전문에 명기된 3·1운동이나 4·19에 맞먹는 '혁명'이며, 유신체제는 단순한 군사독재가 아니라 자주국방과 자립경제를 위한 '구국의 조치'였다는 이야기다. 이번 사태는 박근혜 후보가 23년 전의 이 생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상식적으로 30여 년 전의 과거사에 발이 묶여 표를 잃는 것은 후보에게 결코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이 부조리를 고집하는 것일까. 이 사안이 적어도 그녀에게는 계산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5·16 쿠데타와 유신헌법은 박근혜의 정치철학의 요체, 말하자면 그녀가 정치를 하는 이유, 그녀가 삶을 사는 동기 그 자체다. 따라서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곧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리라. 박근혜가 쏟아지는 비난 속에서도 유신에 대한 신념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통합진보당 구당권파가 쏟아지는 비난 속에서도 북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과 흡사하다. 

박정희 따님의 사당, 새누리당 

5·16 쿠데타와 유신체제에 관한 박근혜 대표의 인식은 정확히 3공·4공 시절 정권에서 강제로 유포하던 정치 프로퍼갠더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청와대에서 자라나 그 안에서 '퍼스트레이디' 역할까지 하다 보니, 정권의 프로퍼갠더에 완전히 세뇌돼 버린 것이다. 이런 문제적(?)인 후보를 모신 당으로서는 당연히 근심이 깊을 수밖에. 그리하여 김종인·이준석·이상돈 교수는 물론이고, 남경필 의원을 비롯한 당내의 몇몇 인사들도 박근혜 대표에게 과거사에 관해 입장을 전환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후보는 요지부동이다. 

정상적인 경우, 후보의 사적 소신(?)과 정당의 공적 입장이 충돌하면, 조정이 이뤄진다. 이 당연한 일이 왜 안되는 것일까. 그것은 새누리당이 정상적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박근혜 후보는 한나라당이 오합지졸이 될 때마다 나타나 당을 위기에서 구하곤 했다. 하지만 선거 때마다 발휘되던 그 리더십의 요체가 무엇인가. 결국 '박정희 향수'로 핵심 지도층을 추슬러 그것을 구심으로 선거전을 이끄는 것이었다. 이렇게 위기의 극복이 아버지의 후광을 업은 개인의 인기에 의존하다 보니, 당 자체가 특정인의 사당이 돼 버린 것이다.

어느 당이나 선거를 앞두면 후보 중심으로 편제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그 수준을 넘었다. 박근혜가 '정당의 후보'가 아니라, 새누리당이 '후보의 정당'인 상황. 홍일표 대변인의 사임은 이를 잘 보여준다. '두 개의 인혁당 판결' 발언이 파문을 일으키자, 홍 대변인은 "박 후보의 표현에 일부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과한다"고 밝혔다. 그러자 박 후보 본인이 "전혀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고 이를 부인하고 나섰다. 설사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고 해도, 당의 혼란상을 드러내며 굳이 부인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파문이 더 커지자, 박 후보는 마지못해 "피해를 당한 분들의 아픔을 깊이 이해하고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는 입장을 내놓는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박근혜의 언급이 '쿠데타와 유신체제'에 대한 반성과 사과라고 봐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녀는 여전히 쿠데타를 혁명이라 여기고, 유신독재의 정당성을 확신한다. 다만 그 도도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희생자는 발생할 수 있고, 그런 희생에 대해 유감스럽다는 것이다. 물론 가해의 주체는 역사며, 판단의 주체 역시 역사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역사'가 죽일 놈이다. 

유신 공주님의 환관들 

▲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지난 5일 오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대통령선거대책기구 임명장 수여식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유성호

어차피 박근혜가 청와대에서 쌓은 국정경험을 통해 얻은 리더십 자체가 결코 민주적인 성격의 것은 아니다. 며칠 전 영남의 어느 도시에 강연을 갔다가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 박근혜 후보가 시장을 방문했더니, 그곳에서 장사하던 어느 할머니가 "공주마마 오셨다"며, 넙죽 엎드려 큰 절을 올리더란다. 박근혜 후보가 5·16 쿠데타와 10월 유신에 대해 그토록 당당한 태도를 보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것이 자기만의 생각이 아니라, 자기 측근과 지지자들 사이에 널리 공유된 생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령 친박 좌장이자 박근혜 경선캠프 공동선대위장인 홍사덕 전 의원은 "유신은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한 게 아니라 수출 100억 달러를 넘기기 위한 조치였다"고 말했다. 박근혜 후보는 곧바로 "그건 그 분 개인의 견해"라며 선을 그었다. 하지만 홍사덕 전 의원의 발언은 유신이 '자립경제'를 위한 조치였다는 후보의 소신과 일치한다. "인혁당? 모두 배가 부른가 보지?"라는 친박 이한구 의원의 발언도 마찬가지. 오죽 황당하면, 이를 보다 못한 정몽준 의원이 "국민을 배부른 돼지로 아느냐?"며 반박하고 나섰겠는가. 

새누리당 김병호 공보단장은 아예 염장을 지른다. "사과라는 것은 누구한테 하는 사과냐, 피해자가 누구냐"라며 "사과를 피해자 당사자들이 아닌 그들의 가족이나 후손까지로 확대하기 시작하면, 전 국민 중에 사과를 안 받을 사람이 있겠느냐"라고 말했다([한겨레] 김병호 박 후보 공보단장 '인혁당 사과는 당사자들에게만' 2012년 9월 16일 치). 결국 인혁당 사건은 희생자의 가족과 후손들에게까지 할 사안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박근혜 공주께서 승하하셔야겠다. 저승에 계신 '당사자들'에게 사과하는 길은 그 길밖에 없잖은가. 

이 모든 망언 퍼레이드에 화룡점정을 찍은 것은 친박계로 3성 장군 출신인 한기호 의원이다. 

"역사를 쓰는 일에만 몰두해서 과거로 발목잡기를 하는 세작들이 있지만, 역사를 만들어온 사람들은 새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 오늘을 허비하지 않는다." 

이렇게 그는 애먼 사람들을 싸잡아 졸지에 '세작'(간첩)으로 만들어 버린다. 여기서 우리는 유신시절 무고한 이들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던 바로 그 논리를 다시 마주하게 된다. 친박계의 의식 속에 유신은 '과거'가 아니다. 그들에게 유신은 생생한 현재요, 우리에게는 닥칠지 모르는 '미래'다. 

유신의 잔당들 

이 망언의 대열에 일군의 극우 인사들이 합류한다. 이들의 견해는 상당히 독창적이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시대의 판사들은 양심이 없는 판사들이기 때문에 당시의 판결은 일고의 가치가 없고, 민주화시대의 판사들의 양심만 옳다는 현 여론의 추세는 참으로 당혹스럽고 불길하다. 필자는 민주화 시대의 판사들을 매우 불신한다. 그들 중에는 김일성 교시에 따라 빨갱이로 제조된 판사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필자는 22개 사건을 재심으로 일거에 뒤집은 이용훈을 빨갱이라고 생각한다."(지만원·인혁당 사건 "法이 法을 파괴하는 法" (프론티어타임즈) 2012년 9월 15일 치)

(뉴데일리)나 (조갑제닷컴)에서는 아예 인혁당 사건이 조작임을 부정하는 기사를 끊임없이 내보낸다. 물론 '인혁당 사건에 관해서는 다른 증언이 있으며, 대법원에도 두 개의 판결이 있다'는 박근혜의 발언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다. SNS에도 움직임이 존재한다. (저격수다)라는 (나꼼수) '짝퉁' 팟캐스트에 출연하고 있는 축구해설가 장원재 교수의 발언이다. "인민혁명당이 조작된 사건이라면, 인민혁명당 이야기가 나오는 북한 교과서와 김일성회고록도 조작된 책이겠네! ㅋㅋ"(@yark991) 이들이 이토록 북한교과서와 김일성 회고록을 신봉하는지 몰랐다. 

그나마 온건한 박근혜 옹호 입장은 안병직 교수의 것. 한마디로 '1차 인혁당 사건은 단순한 조작이 아니라, 혁명조직으로서 나름 실체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는 조직에 들어오라는 권유를 받았다는 안병직 교수 개인의 경험을 근거로 한다. 박근혜 후보가 인터뷰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증언;은 이를 가리킨다. 물론 1차 인혁당도 북한의 대남공작과 연계된 것은 아니며, 실체가 불분명해 당시의 담당검사들이 무리한 기소라고 항명한 적이 있다. 안병직 교수는 1, 2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이나 처형이 정당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정작 검증해야 할 것은? 

▲ 1975년 4월 8일 새벽 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사법살인' 당한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도예종(삼화토건 회장), 서도원(전 대구매일신문 논설위원), 하재완(무직), 이수병(일어학원 강사), 김용원(경기여고 교사), 송상진(양봉업), 우홍선(무직), 여정남(전 경북대 총학생회장) 8명의 사형이 집행된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 권우성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보수진영의 입장을 거칠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견해의 스펙트럼이 나온다.

①인혁당 사건이 조작임을 부정하며, 처형의 정당성을 시사한다.(극우매체. 지만원·장원재)②인혁당 사건이 조작임을 부정하나, 처형의 정당성은 부정한다.(뉴라이트. 안병직)③인혁당 사건이 조작이고 처형은 부당하나, 사과할 사안은 아니다.(새누리당 친박계. 이한구·김병호)④인혁당 사건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는 자들은 간첩이다.(새누리당 친박계. 한기호) ⑤인혁당 사건은 조작이고 처형은 부당하니, 박근혜가 사과하라.(새누리당 비박계와 보수언론)

이게 바로 한국 보수의 스산한 풍경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마도 ①에서 ④까지의 입장이리리라. 그것들은 명백한 역사 수정주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견해들은 망언에 가까워, 논쟁보다는 스캔들의 대상이 될 뿐, 정작 문제 삼아야 할 것은 ⑤이다. 왜? 이 입장은 '사과'라는 쿨한 말 속에 가장 핵심적인 검증의 항목을 슬쩍 은폐하기 때문이다. 바로 유신체제 자체에 대한 박근혜 후보의 공식적 입장이다. 아래 문장을 보라.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고 처형은 부당하니, 박근혜가 사과하라 

최근 보수언론들도 경쟁적으로 박근혜를 향해 이렇게 주문한다. 하지만 이 말로써 그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애매하다. 그 주문은 

(1)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만 사과하라'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2) '유신독재 자체에 대해서 사과하라'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핵심은 역시 '유신체제' 자체에 대한 박근혜 후보의 입장이다. 왜? 인혁당의 피해자들은 바로 유신독재에 항거하다가, 유신헌법으로 처형당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단순한 실수나 오류로 인한 사법의 피해자가 아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문제에 관한 박근혜 후보의 입장은 이런 것으로 보인다. 

유신은 '자주국방'과 '자립경제'를 위한 구국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발생한 피해에 대해서만은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자신의 언급을 "사과로 받아 들여 달라"거나 "유가족이 허락하면 만날 수 있다"는 박근혜 후보의 말은, 인혁당 사건을 '유신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그와는 관계없는 고립된 개별사건으로 처리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설사 유가족을 만나 사과를 하더라도, 박근혜는 여전히 아무 모순 없이 '유신체제가 정당하다'고 말할 게다. 그런 의미에서 홍사덕 전 의원은 박근혜의 입장을 제대로 요약했다. "유신은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게 아니라 수출 100억 달러를 넘기 위한 조치였다." 여기에 '박사모'가 화답한다. 

"독재 정권을 용인한 북한에서 (중략) 정치범 수용소에서 떼로 죽어 나가며 아예 야당이라는 존재 자체가 없지만 우리는 김영삼·김대중 등 야권 지도자는 건재했다. 그들이 유신 당시에도 항거할 수 있었기에 독재라도 상당히 느슨한 독재였다." 

헌정을 수호할 대통령의 책무 

박근혜 후보에게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은 5·16 쿠데타와 10월 유신에 대한 공식적 입장이다. 왜냐하면 이 두 사건은 대한민국의 헌정을 유린한 범죄였기 때문이다. 박근혜 후보는 대통령이 되려 한다. 그런데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책무 중의 하나는 헌법을 수호하는 데에 있다. 이 두 사건에 대한 입장을 묻는 것은, 자신의 집권 시에 행여나 

(1) 나라가 혼란하여 쿠데타가 일어날 경우 그것을 '혁명'이라 환영할 것인지, (2) 자신에게 국민이 저항할 경우 유신과 같은 초헌법적 조치를 취할 것인지,

여부를 묻는 것이다. 이 두 물음의 어느 것에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하는 후보는 절대로 대통령이 돼서는 안된다. 쿠데타를 용인하고, 파쇼헌법을 옹호하는 것은 헌정을 수호할 책무를 진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는 심각한 결격사유다. 

일각에서는 이것이 '연좌제'라고 비난한다.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다. 박근혜 후보가 내세우는 국정운영의 경험은 유신시절에 습득된 것이다. 게다가 우리 국민은 박근혜 후보를 유신의 어두운 기억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의향이 있다. 하지만 박근혜 후보를 그 어두운 시절과 연결시키는 끈은 박 후보 자신이 맨 것이다. 끈을 풀어버리라는 제 당의 조언도 거부하고, 국민의 요청도 거절하고, 제 스스로 옭아맨 것이다. 결자해지. 그 끈을 푸는 것은 박근혜 후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다. 

'아버지에 대한 딸의 개인적 생각까지 바꾸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것은 박정희-박근혜 부녀의 사적 관계의 문제가 아니다. 그 점은 박근혜 자신이 (나의 삶, 나의 아버지)라는 책에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승을 잘 만나는 것인데 그런 점에서 나의 부모님은 내 삶의 모델이다. 특히 정치인이 된 지금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가 아니라 선배이자 스승이며 나침반과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한 마디로 공적 검증의 대상인 정치철학을 아버지 박정희가 아니라 독재자 박정희에게서 고스란히 물려받았다는 이야기다.

"유신체제와 같은 독재가 되돌아 올 가능성은 없다"고 말하지 말라. 우리가 어디 일본의 식민지배가 되돌아올 것이 두려워 일본에게 과거사에 대한 사과와 반성을 요구했던가. 게다가 우리는 이명박 정권을 경험해 봤다. 아무리 민주화가 됐어도, 대통령 중심제 하에서 질 낮은 대통령 한 명이 민주주의를 순식간에 망가뜨리는 것을 지난 5년간 똑똑히 목도한 바 있다. 그런 국민이 헌정을 파괴한 독재자에게 정치를 배운 인물이 대통령이 되는 데에 두려움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설사 '상당히 느슨한 독재'가 된다 하더라도.

언젠가 통합진보당과 관련해 '종북' 논란이 일어났을 때, 새누리당 한기호 의원은 종북의원을 가려내는 기발한 방법을 제시한 바 있다. 

"옛날 천주교가 들어와 (신도를 가려내려고) 십자가를 밟고 가게 한 적이 있지 않느냐." 

이런 잣대를 새누리당 자신에 들이댄다면, 박정희 사진을 깔아놓고 박근혜 보고 밟고 지나가라고 요구해야 할 것이다. 물론 누구도 그런 봉건적 잔악함을 원하지 않는다. 다만, 이번 기회에 새누리당 의원들이 그 발언이 얼마나 잔악한 것이었는지 깨닫고, 자신들의 공직후보에 대해서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기를 원할 뿐이다. 

내가 김진 위원을 존경하는 이유

▲ 지난 17일 <중앙일보>에 실린 김진 위원의 칼럼. ⓒ 중앙일보

이 문제에 관해 얼마 전 (중앙일보)의 김진 논설위원이 칼럼을 쓴 모양이다. 읽어 보니, 내가 바로 위에서 지적한 꼼수의 전형이다. 한 마디로, '유신독재는 정당했다. 대만의 장개석, 싱가폴의 리콴유를 보라.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독재자가 필요했다'는 논리다. 그는 이렇게 독재와 경제 사이에 필연적 인과관계를 설정한다. 해괴한 논법이다. 물론 인권에 대한 의식도 낮았으니, 그 시절 가정에서 남편에 의한 아내의 구타율도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남편이 아내를 패서 경제가 발전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얼굴에 철판 깔고 유신독재를 정당화하고, 그것의 추악상을 상대화하는 이 칼럼 역시 마지막으로 박근혜 후보를 향해 사과를 주문한다. "이제 유족을 껴안는 일은 이승의 딸에게 남겨져 있다." 한마디로 유신독재는 경제발전을 위한 구국의 조치였으나, 인혁당 사건만은 잘못됐다고 인정하라는 이야기다. 이 인식은 차라리 (조선일보)보다 수구적이다. 조선일보의 입장은 5·16은 긍정하되 유신은 부정하자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김진 위원이 아직도 이런 인식을 갖고 있다면,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자격이 없다. 

우리 모두는 대한민국 헌법에 합의했다. 그리하여 극좌와 극우의 공격으로부터 헌법을 지킬 의무를 진다. 헌법을 바꾸려면 헌법에 규정된 절차를 따라야 한다. 좌익 혁명으로 헌정을 전복하는 것이 용납돼서는 안 되듯이, 5·16과 12·12와 같은 우익 쿠데타나 10월 유신과 같은 초법적 조치로 헌정을 전복시켜서는 안 된다. 그것이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우리가 명시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지키기로 합의한 약속이다. 일간신문의 논설위원에게 이런 상식이 결여돼 있다는 것은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다.

이 칼럼 덕분에 방송에서 괜히 "김진 위원을 존경한다"고 했던 나까지도 욕을 먹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겠다. 그게 다 몰라서 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그에 대한 존경을 포기하지 않겠다. 다음 구절 때문이다. 

"박정희는 천상에서 인혁당 8인에게 사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막걸리를 마시며 조국을 얘기하고 있을 것이다." (김진·"박정희 독재 어떻게 볼 것인가?" [중앙일보] 2012년 9월 17일 치)

이 구절을 통해서 내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김진 위원은 자신이 간첩으로 체포돼 갖은 고문을 받고 교수대에 달려 죽은 뒤 강제로 화장을 당하더라도, 저승에서 '쿨'하게 박정희의 사과를 받고 함께 막걸리를 마시며 조국을 논할 분이라는 점이다. 이 대인배적 면모를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김진 위원은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다. 찬미하라.

진중권(angelus)

그 무덤에 침을 뱉어라


이글은 프레시안 2012-09-18일자 기사 '그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퍼왔습니다.
[오홍근의 '그레샴 법칙의 나라'](71)박정희, 이젠 평가해야 할 때

법정은 일순 숨소리 하나 들을 수 없을 정도의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2006년 12월23일, 서울 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부 문용선 재판장은 그 침묵을 깨고, 31년8개월여 전 이른바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죄 없는데도 목숨을 빼앗긴 8명의 이름을 한 사람씩 부르기 시작했다. "피고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송상진, 우홍선, 여정남에 대해 판결을 선고합니다. 원심을 파기합니다. 피고 각 무죄!"

거의 동시에 이곳저곳에서, 참고 또 참아왔던 진하디 진한 흐느낌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흐느낌은 금세 통곡이 되어 법정을 휘감았다. 민주화된 세상이라 예상되던 재심 판결이었으나, 막상 판사의 육성으로 듣는 "무죄" 소리가 유족들은 기막히게 서러웠다. 31년 전에 그렇게 들었어야 할 선고였다. 그날 그 법정에서는 유족이 아니었어도 다들 울었다.

이 판결은 검찰이 법정항소 시한인 1개월을 넘기면서, 상급심 항소를 포기함으로써 2007년 1월23일 최종 판결로 확정되었다. 몹쓸 세월에 대통령 한 사람 잘못 만나 죄도 없이 목숨을 잃었으나, 세상이 정상적으로 굴러 가기만 했다면 당연히 벌써 와야 할 그런 날이었다.

그 1년 8개월 뒤인 2008년 9월26일 이용훈 대법원장은 사법 60주년 기념식에서 헌정사상 처음으로 사법부의 과거사에 대해 공식으로 사과했다. "사법부가 헌법상 책무를 충실히 완수하지 못함으로써 국민에게 실망과 고통을 드렸다"며 "민족일보 사건, 인혁당재건위 사건, 민청학련 사건,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사건 등에 대해 과오를 사과 한다"고 했다.

따지고 보면 이들 사건은 사법부의 잘못이라고 못 박을 수 없는 사건들이었다. '대통령의 뜻'에 따라 판결한 사건들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그런데도 이날 공식 사과문에서 "미래를 향해 새로 출발하려면 먼저 스스로 과거의 잘못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반성하는 도덕적 용기와 자기 쇄신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 가족들이 새누리당 앞에서 집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대한민국 대법원장이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구체적으로 거론해 사과하면서 그랬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아버지가 직접 관련된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놓고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는 '미래'를 말하면서도 선문답을 하고 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라를 이끌겠다면서도 사과 할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인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관련자들이 범했다는 죄목은 사형선고가 가능한 긴급조치 4호 위반과 내란 선동 등이다. 훗날 국가정보원(중앙정보부의 후신)의 과거사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는 이 사건이 "유신체제에 대한 학생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한 당시 박정희 정권이 학생시위의 배후에 공산주의자들이 있다는 인상을 심어 주고자 조작한 사건이었다"고 지적했다. 진실위는 특히 "당시 권력의 정당성이 없는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했다"고 진상 조사결과를 밝혔다.

뒷날 줄줄이 위헌판결을 받은 그 긴급조치들은 사실 박정희 씨 개인이, 방해 받지 않고 대통령 오래하려고 일방적으로 정해 놓은 '개인의, 개인에 의한, 개인을 위한' 기준이었다. 장기 집권을 위한 기준이었다. 그가 정한 기준과 요건에 적합하지 않으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유신의 기준'이었다. 그 기준 어겼다고 생사람 잡아다 죄 뒤집어 씌워 8명이나 죽인 게 인혁당재건위 사건이었다. 긴급조치 1·4·9호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만도 1000명이 넘었다.

대학졸업­교사­학원강사 경력의 임구호 씨는 1969년의 3선 개헌 반대운동을 한 전력 때문에 1974년 인혁당재건위 관련자로 엮여 들어갔다. 징역 15년을 선고 받고 7년10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임 씨는 당초 잡혀 들어갔을 때, 중앙정보부 조사에서도 인혁당이란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검찰에 가서야 처음 들었다.

그는 서울 남산의 정보부에서 매일 길이 90㎝되는 각목으로 얻어맞으면서 척추 꼬리뼈가 부러지면서, 시키는 대로 인혁당 관련 이야기를 자기 입으로 만들어 주었다. 동물농장에서 '인혁당 만들기'를 했다. 그는 현재 그 후유증으로 5급 장애자가 되어 병원을 들락거린다. 사형선고까지 받은 이철 씨도 인혁당이 뭔지도 몰랐다고 했다. 이 나라의 70년대는 그렇게 박정희 씨의 장기집권 목표 하나 때문에 피 맺히고 한과 눈물이 질펀하게 깔리던 시절이었다.

특히 인혁당재건위 희생자 유족들의 한과 눈물은 요즘에야 조금씩 알려지지만 처참하기가 비할 바 없었다. "목욕탕 간다고 나간 남편이 소식이 없다가 어느 날 간첩이 되어 TV에 나왔다"고도 했다. 남편에게 일생을 걸던 곱던 아낙이 남편을 빼앗긴 뒤 이제 한 세대가 지나 쭈글쭈글한 노파가 되었다.

한 희생자의 부인인 A 씨는 악에 받쳤던 때를 회상한다. "남편이 사형 당한 후 신문에 나는 박정희 사진을 이가 아프도록 꼭꼭 씹어서 뱉곤 했다"고 했다. 남편 산소에 매주꽃을 들고 찾아갔다가 발길을 돌릴 때마다 "살인마 박정희 천벌을 받으라"고 외쳤다고 했다. 박정희 씨가 피격된 1979년까지 계속 그랬다고 했다.

다른 희생자의 부인 B 씨는 남편에 대한 조사를 받던 중 기관원이 주는 물을 마셨다가 흥분되면서 온몸이 꼬이는 참혹한 경험을 했다. 그때 '남편은 간첩'이라는 진술서를 쓰고, 죄책감으로 아이들과 극약을 먹으려 했으나 친정어머니에게 들켰다. 본인과 아이들은 죽음을 면했지만 친정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한 달 만에 눈을 감았다. 이건 사람 사는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다.

또 다른 희생자의 부인 C 씨의 눈물겨운 이야기. 저녁때가 되어도 아들이 집에 오지 않았다. 동네 놀이터에 가봤더니 동네 아이들이 아들의 목에 새끼줄을 매고 '총살놀이'를 하고 있었다. "빨갱이 자식"이라 놀리고 있었으나 놀이터의 몇몇 어른들은 보고만 있었다. "저 아이와 함께 놀면 너희들도 잡혀 간다"는 소리도 들렸다. 경찰관 시험에 합격했으나 합격 취소 통지를 받은 친척도 있고, 친척들 여권도 내 주지 않았다.

진술 내용과는 정반대되게 조서가 조작돼 있기도 했고, 심지어 희생자들의 유언도 교수형 입회 교도관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만들어져 있었다. 진실을 보도해 달라고 그토록 발이 닳게 언론사에 쫓아 다녔으나, 진실 보도는커녕 억장 무너지는 기사도 나왔다. <대법원으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번 판결은 대법원이 심혈을 기울여 심리하고 선고한 것이므로 더 이상 불복할 여지가 없다.> (교수형 다음날 인) 1975년 4월10일자 어떤 신문의 사설이었다.

대법원 판사 D 씨의 기절할 이야기도 있다.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의 판결이 나온 것은 1975년 4월8일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D 씨는 자기도 서명한 것으로 되어있는 그 때의 판결문을 본적이 없다. 2002년 12월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발표가 있고 나서야 그 판결문을 보았다고 실토했다는 증언이 있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은 그런 사건이었다. 박정희 씨는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그렇게 이끌고 갔다.

독재자였다는 평판 때문에 잊혀져가던 박정희 씨가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조선일보때문이었다. <한겨레 21>의 보도에 따르면 10ㆍ26이후 13년간 박정희 씨의 이름을 올리지 않던 조선일보가 김영삼 씨의 대통령 취임 후부터 집중적으로 박정희 씨를 찬양하기 시작한다. 10ㆍ26이후 2009년 10월까지 실린 박정희 기사 3459건 중 93.6%인 3231건이 김영삼 씨 취임 이후 보도됐다고 했다. 인기가 바닥인 김영삼 씨의 '무능'과 대비되는 '강력한 리더십의 유능한 전직 대통령'에 대한 기억의 형태로 기사가 등장했다고 <한겨레 21>은 보도했다.

1995년 3월부터는 '가장 훌륭한 정치지도자는 누구입니까'를 묻는 여론조사를 시작했다. '1위 박정희'일 개연성이 많은 시점이었다. 집중적인 찬양보도가 줄기차게 계속되다가 1997년 10월부터 3년 동안 연재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가 '박정희 부활'의 결정판이 된다. 박정희 씨는 생전에 기자들을 만났을 때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내가 한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들을 하지만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한 것을 역사는 제대로 평가해 줄 것"이라는 강한 메시지가 느껴지는 말이다. 지난 10일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도 박근혜 후보는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는 말 속에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하던 아버지의 모든 것이 함축돼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의 연재기사는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박정희 씨는 부활됐을 뿐만 아니라 웬만한 과오도 덮어지는 양상을 보였고, 심지어 "어느 누가 '박통(박정희대통령)'의 허물을 말 할 수 있느냐" "누가 박통에게 침을 뱉을 수 있느냐"는 눈 부라림까지 느껴지는 상태가 되었다. 박정희 씨는 그렇게 영웅의 반열에 올랐다. 조선일보가 그렇게 만들었다. 더구나 역대 정권을 살펴볼 때 여건도 좋았다.

전두환 씨의 광주학살이 너무 잔인하고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박정희 씨의 혹독한 인권탄압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박정희 씨에 대해서는 정색을 하고 역사를 바로 잡는 평가가 시도되지 못한 측면까지 있다. 김영삼 정부는 박정희 씨의 조카사위인 김종필 씨와 3당 합당으로 손을 잡고 출발한 정권이었다.

김대중 씨는 김종필 씨와 연합한 소수정권이면서, 오히려 '용서'를 내세워 박정희 기념관까지 짓도록 지원해 주었다. 노무현 씨는 '그럴 생각'이 없었던 데다 '박근혜와의 대연정'까지 생각하던 정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해봐야 할 때다. 겸손한 마음으로 냉정한 눈으로 평가하고 정리해야 할 때다. 역사는 바로 세워져야 한다. 특히 이번에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른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계기로 그런 작업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많다.

보리고개를 없애고 경부고속도로와 중화학공업 등의 업적을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집권 18년 동안 늘어난 1인당 극민소득이 1600달러에 불과하고, 대기업 수출 밀어주기의 그늘에서 혹독한 저임금으로 고통 받던 근로자들의 희생을 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특히 역대 대통령 중 IMF 때를 빼고는, 소득에서 박정희 대통령 때보다 못한 대통령이 하나도 없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공(功)과 과(過)를 있는 대로 늘어놓고 각각 다른 서랍에 집어넣으면서, 과대 포장된 것도 포장 벗겨 내용을 확인 할 필요가 있다. 공정하고 준엄한 평가가 필요한 때다. 그는 과연 사심없이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만 일 했는가. 근대화와 산업화만을 위해 몸을 던졌는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호통 칠만한 삶을 살았는가.

부산일보와 정수장학회와 영남대학교를 개인 소유로 돌려놓은 것도 그런 것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유신반대 데모한다고 서울문리대 해체한 것도, 긴급조치 위반 구속자가 1000명 넘도록 인권을 탄압한 것도 그런 것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하는 일도, 근대화나 산업화의 과정도 아니었다.

허나 그런 것 다 양해한다 치더라도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통해 드러난 참혹한 사법 살인사건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숨이 막힌다. 참을 수가 없다. 절망한다. 그 무덤에는 침을 뱉어야 한다.

 /오홍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