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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16일 목요일

박근혜, 박정희·군사문화에서 벗어나라


이글은 프레시안 2013-05-16일자 기사 '박근혜, 박정희·군사문화에서 벗어나라'를 퍼왔습니다.
[오홍근의 '그레샴 법칙의 나라'](77) '윤창중'·'임을 위한 행진곡'의 교훈

윤창중 사태의 발생과 전개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박근혜 청와대'의 용량(容量)과 기능에 대한 탄식이 절로 나오게 된다.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그 모양 그 꼴인가 하는 안타까움에서 비롯되는 탄식이다. 특히 '일을 낸' 윤창중 씨를 놓고는 많은 사람들이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사람이냐"는 투로 한숨 섞인 이야기들을 쏟아 내고 있다.

그의 '시작'에서부터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그가 계속 저지른 사건들을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그를 몰라서 하는 이야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애당초부터 윤 씨는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그동안 써 온 글들을 보면 '글쟁이'의 필수 덕목인 균형 감각이 원초적으로 실종돼 있는 것에 우선 놀라게 된다.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극도의 초조감이 문장 곳곳에 배어 있고, 자신과 생각이 다른 쪽에 대해서는 멋대로 재단해 매질하거나 깔아뭉개는 우격다짐 식 군사문화까지 읽히는데 또 놀라게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런 그를 '극우 보수 논객'이라고 '예우'해 왔다. 그러나 그의 글을 관심 있게 읽은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철저한 박정희 신봉자이면서 군사문화 예찬론자라고 단언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평소 별 교류도 없던 그를 '대통령 당선인 제1호 인사(人事)'로 당선인 수석대변인에 임명한 것도 바로 그 점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지닌다. 그때 그 인사에 대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일 맡길 만한 사람이 못 된다"고 우려하고, '불통논란'까지 불거졌으나, 대통령은 고집스럽게 그를 청와대까지 데리고 가 초대 대변인으로 등용했다. 그 '등용'이 필경 이번 참사의 단초(端初)가 되었다.

결국 '박정희'와 '군사문화'에 대한 대통령의 향수가 바로 이번 사태의 원인이라는 소리다.


▲ 윤창중 전 대변인 ⓒ뉴시스

일부 보수논객들은 그 새를 못 참고, "젖가슴도 아닌 겨우 엉덩이를 만진 건데…"라거나, "종북세력들의 음모"라거나, "호남향우회가 의심스럽다"는 기막힌 이야기까지 쏟아내며 윤 씨를 감싸고자 했다. 양파껍질 벗겨지듯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는데도, 대응하는 청와대 요원들의 위기관리 능력도 한마디로 딱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대통령도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 수석비서관 회의의 '모두발언' 형식을 '차용'했다.

국민을 진심으로 떠받드는 느낌을 주는, 상황에 맞는 '적절함'과 '당당함'이 눈에 띄지 않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잔말 말고 주는 대로 받아먹어라"는 소리로 듣고 본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 대목을 놓고, 마지못해서 하는, "내가 지금 항복하는 건 아니다"는 인상의 군사문화를 연상한 건 필자만이 아니었을 듯싶다. 당선 이후 박근혜 대통령의 '궤적(軌跡)'을 따라 가보면 자주 '박정희'와 '군사문화'를 만나게 된다. 특히 '윤창중'으로 시작한 인사에서는 곳곳에서 '박정희 냄새'가 난다.

젊은 시절 청와대에서 박정희 씨를 보좌하던 인사, "5·16 쿠데타가 이 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악을 쓰던 교수와 예비역장성, 박정희 정권에서 육군참모총장과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인사의 아들, 박정희 씨가 총애하던 정치인의 아들, 유신헌법을 기초한 인사의 사위 등이 잇달아 모습을 드러낸다. 휴대폰 고리에 박정희 씨 내외의 사진을 매달고 다니던 예비역 4성 장군은 국방부장관에 내정됐다가 낙마하기도 했다.

'박정희'의 복권을 위해 그녀가 정치를 시작했다는 측근의 '증언'도 이미 나와 있다. 바야흐로 '박정희 문화 복원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소리는 그래서 나오는 듯싶다. 다 알다시피 박정희 씨는 이 나라 군사문화의 원조(元祖)다. 대통령은 지근거리에서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며 자랐을 것이다. 그래서 일까, 박근혜 대통령의 인사나 업무 추진 스타일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사도 한 번 내정하면 결정적 흠이 드러나도 결코 되돌리려 하지 않는다. 때문에 '일수불퇴(一手不退)'에 '불통인사'란 말이 따라 다닌다. 첫 번째 헌법재판소장 내정자, 김병관 국방부장관 내정자, 미래창조과학부장관 내정자, 해양수산부장관 인사 때 등 우리가 다 보아왔다.

절대 '지지 않으려는' 그 막무가내 식 면모가 바로 군사문화라고 사람들은 수군거린다. 대통령 본인도 때맞춰 "(내가 미는 것은) 결코 타협과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목청을 높였다. 전 국민이 보고 있는 TV화면을 통해 그랬다. 박정희 식 국론통일(國論統一)이 강요되던 군사문화 시대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충격적인 '명령형(命令型) 말씀'이었다.

해마다 5월이 오면 '광주'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가슴은 요동을 친다. 군사정권의 잔인한 학살 기억에 몸서리치면서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에 속으로 끝없이 운다. '광주'는 목숨 걸고 피 흘리며 불의(不義)에 저항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켜낸 상징이다.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아는' 함성과 역사가 눈 시퍼렇게 뜨고 굽어보고 있는 '사람 냄새나는 동네'다. 최근 그 '광주'를 멱살 움켜쥐고 뽈깡 들었다가 내려놓은 사람이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이다.

'광주' 5월의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기어이 못 부르게 함으로써 5·18을 패대기쳐 보고자 했던 것 같다고들 말한다. 그의 시도는 성사되지 못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생채기를 남기는 데는 일정부분 성공한 듯하다. '시도'는 이명박 정권 때인 2009년부터 시작되었다. 급기야 박승춘 보훈처장이 올해 작심을 하고 수천만 원의 예산까지 장만해 '별도의 노래'를 만들려 했다. 그러나 '광주'는 그리 쉽게 지워질 수 없게 되어있다.

박승춘 그는 누구인가. 육군 중장 출신으로 2011년 2월 국가보훈처장에 임명되었다. 그해 12월 광복회 워크숍 강연에서 공무원인 그가 "오늘날 우리가 이 정도로 살게 된 것은 다 박정희 대통령의 공입니다. 다가오는 대선에서 누구를 뽑아야 할지 다들 아시죠"라고 한 발언이 알려지면서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눈에 들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일 것이다. 그는 이명박 정권의 장차관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에 의해 새 정권에서도 그의 직책을 그대로 맡도록 유임 발령을 받은 사실상 유일한 인사다. (김관진 국방부장관은 김병관 내정자의 '버티기 끝 낙마'로 안보공백을 메우기 위해 불가피하게 서둘러 유임이 결정되었고, 헌법상 4년 임기가 보장된 감사원장과 임명 된지 3개월 밖에 안 된 국민권익위원장은 '특별한 사정'이 적용돼 유임된 경우다)

그의 '박근혜를 향한 충성'은 일찍부터 눈물겨운 데가 있다. 그는 육군중장 전역 직후 '국가발전미래교육협의회'란 반공교육기관을 설립해 퇴역장성들의 모임인 성우회와 함께 '박정희'와 '군사문화' 홍보에 온몸을 던진다. 그는 특히 '박정희의 유신' 옹호에 지극정성의 공을 들였다. 박근혜 후보의 흉중을 누구보다 잘 헤아려 밀어 붙였던 것 같다.

'유신반대는 종북이다' '(종북세력은)사회주의 건설 목표를 숨긴 채 반 유신·반 독제 민주화 투쟁을 빙자해 세력 확산을 기도했다' 이런 게 국가발전미래교육협의회(국발협)가 예비군·민방위 교육에서 강조한 주된 내용이었다. 보훈처장으로 임명되고 나서는 국발협이 교육범위를 더욱 넓혀갔다. 2011 ~ 2012년 국발협은 2600회의 동원예비군 안보교육을 실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훈처 지청들이 '적극협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총선을 4개월 앞둔 2011년 말 그의 국가보훈처는 박정희 씨를 미화하고 유신반대 민주화운동을 종북활동으로 깎아내리는 동영상 DVD 1000세트를 만들어 마구 뿌려대기도 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박승춘 처장에게 '광주'는 '눈엣가시'로 비쳐졌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군사문화가 빚어낸 불의'에 대한 처절한 저항이 비위에 거슬렸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박승춘 씨에게는 5·18때 공수여단장이었던 안현태 씨를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문제를 놓고, 보훈처장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한 전력까지 있다. 이와 관련, 감사원은 2012년 5월 박처장이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감사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두말 할 나위 없이 '광주'는 이 나라 현대사에 중대한 획을 그은 역사적 '사건'이다. 그 '광주'를 상징하다시피 하는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고, 그 '상징'을 '손 봄'으로써 '광주'를 다소라도 지워 보려한 게 박승춘 씨다. 우리는 박승춘 보훈처장이 박근혜 대통령의 심중을 누구보다 잘 헤아리는 사람이고, 때문에 이례적으로 새 정권에서 유일하게 연임 발령을 받은 '박근혜의 사람'이라는 대목에 주목한다.

때문에 우리는 그가 박근혜 대통령의 생각에 반하는 일을 추진했을 리 없고, 대통령의 동의나 묵인 없이 그처럼 '엄청난 일'을 밀어붙이지 않았으리라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확신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제라도 '박정희'와 '군사문화'를 뛰어 넘는 게 옳다.

아버지 대통령이 딸 대통령의 도달 목표가 될 수는 없다. 보리 고개 극복이나 중화학공업 육성이나 유신독재나 생사람 죽이기가 지금 시대적과제가 될 수 없음도 두 말할 나위없다. '창조경제'와도 너무나 동 떨어진 이야기다. '향수'를 지우기 힘들다면 '박정희'와 '군사문화'는 박물관에 보내는 게 방법이다. '박정희'와 '군사문화'를 극복해야 하는 것이야말로 윤창중 사태와 임을 위한 행진곡 파동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반드시 깨달아야 할 교훈이다.


/오홍근 칼럼니스트

2013년 4월 30일 화요일

이스라엘은 왜 북한에 '퍼주기'하려 했나


이글은 프레시안 2013-04-29일자 기사 '이스라엘은 왜 북한에 '퍼주기'하려 했나'를 퍼왔습니다.

[오홍근의 '그레샴 법칙의 나라'](76) 박근혜 정부, 브레이크 고장났나


박근혜 정부의 개성공단 근로자 철수조치는 한마디로 너무 나간 자충수의 성격이 짙어 보인다. 보기에 따라서는 후련하게 느낄 사람도 있겠으나, 결과적으로 남북관계 긴장을 고조시킨 조치라는데 이의가 없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정부 측 설명은 국민의 신변안전 보호차원에서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뜬금없는 이야기 같다.

개성공단에 남아있는 근로자들은 인질상태도 아니었다. 응급환자도 그때그때 남쪽으로 이송되고 있는 데다, 공단에 남아있던 근로자들도 넉넉한 형편은 아니나, 밥을 굶어야할 정도의 처지도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공단 입주기업들도 사태의 호전을 기다리면서 철수 반대의 입장을 고수하던 중이었다. "문제해결을 위한 당국 간 실무회담 제의에 대해 '내일(26일) 오전'까지 답변하지 않으면 중대조치를 취하겠다"는 갑작스런 사실상의 '최후통첩'은 이런 판국에서 나왔다.

말이 없던 북측은 그 '내일 오전'이 지나자 "공단 인원들의 생명이 걱정된다면 철수하면 될 것"이라며 "철수할 때 신변안전 보장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하는 담화를 내놓았다. '신변안전' 문제를 내세운 우리 측으로서는 머쓱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공단에 남아있던 근로자들은 모두 철수한다. 문제는 다음에 둘 수(手)가 없어진 점이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퇴로를 차단한 악수를 둔 게 뼈아픈 대목이다.

그렇게 박근혜 정부는 또 한 번 '너무 나가는' 우(愚)를 범했다. 안타까운 것은 '너무 나가는 게' 너무 잦다는 점이다. 브레이크가 고장 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깝다.

곧 죽어도 꿇리는 모습 보이지 않으려 하는 게 북한의 태생적 한계다. 적어도 자존심 덩어리로 보인다. 따라서 무릎 꿇리거나 타도하려해서는 다뤄지지 않는다. "자금줄 말려가면서 북한에게 변화를 촉구하고, 대들면 호되게 혼내고, 그 못된 버르장머리 고쳐놔야 한다"고 말들은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치 않다. 중국도 있고 러시아도 있다. 중동을 상대로 한 미사일 등의 무기장사도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개성공단 잔류 인원 전원 귀환이 시작된 27일, 개성 주재 기업들 및 관계 기관 차량들이 마치 전쟁 난민을 연상케 하듯 최대한 많은 짐을 차에 싣고 줄지어 파주시 남북출입사무소로 내려오고 있다. ⓒ뉴시스


이른바 친여 보수매체들은 연간 수입 1억 달러나 되는 달러박스이기 때문에도 북한이 개성공단은 절대로 폐쇄하지 못할 것이라고 거의 매일 노래 불렀다. 북한이 공단 폐쇄 가능성을 발표하자 국방부 장관은 국회에서 인질구출을 위한 군사작전이 가능하고 검토 중이라고 호언했다. 보수매체들은 한 술 더 떠 아파치 헬기니 공군 전투기니 특수부대를 동원하는 '작전'의 시나리오를 내놓기도 했다.

국가안보실장은 "급하거나 위기라고 해서 섣부른 대화를 시도하지 않을 것이며, 대화의 계기는 북한이 만들어야 한다"고 큰 소리쳤다. 그 닷새 뒤 대통령은 북한에 대화를 제의했다. 정부조직법을 놓고 여야가 맞서 있을 때도 대통령은 "내가 제시한 방안은 결코 타협과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고 목청을 높인 적이 있다. 조금씩 참았어야 했다. 고장 난 브레이크가 문제인 듯하다. 개성공단에서 고장사태는 피크를 이루는 듯하다.

다 알다시피 개성공단은 단순히 북측의 싼 임금으로 상품을 만들어와 파는 그런 공장지대가 아니다. 군사분계선에서 10㎞ 떨어져 있는 그 공단은 당초 서울을 겨냥한 장사포들이 즐비하게 자리 잡고 있던 북측의 병영(兵營)이었다. 100만 평의 부지에 120여 개의 공장이 들어서면서, 북한의 포대들은 그 만큼 북쪽으로 물러서서 자리 잡게 되었다. 개성공단의 당초 계획은 2012년까지 공단부지 800만 평과 1200만 평의 근린시설 용지가 완공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북측의 포진지들은 그만큼 더 북쪽으로 물러섰을 것이다. 우리 안보가 훨씬 더 탄탄해졌을 것이다. 한반도 평화체제가 더 굳어졌을 것이다. 남북경제 사정에도 큰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퍼주기 논쟁' 때문에 그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퍼주기 시비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던 DJ는 생전에 "지금은 '퍼주기' '퍼주기'하지만, 머지않아 '퍼오기'를 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미래의 '퍼오기'가 아니더라도, 이른바 퍼주기는 '평화의 비용'으로 보아도 이익이라는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른바 보수론자들은 퍼주기 한 돈으로 북한이 핵실험도 하고 미사일도 쏘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MB정권 들어서 전혀 퍼주기 안 했어도 북측은 핵실험도 하고 미사일도 더 개량해 쏘아댔다. 퍼주기 논쟁은 기득권층이 계속해 배타적이익을 누리기 위해, 상대 정치세력을 구석으로 몰아붙이는 방편으로 악용한 측면이 강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1990년대 초반 중동의 이란·시리아 등 적성 국가들에 둘러싸여 항상 생존방안을 모색해야하는 이스라엘이 동북아시아의 북한을 주목하기 시작한다. 인접 적성 국가들이 북한으로부터 미사일을 수입해다 배치함으로서 이스라엘 안보가 심각한 위협에 처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은 온갖 채널을 동원해 은밀히 북한과 협상을 시작한다.

드디어 1993년 1월 이스라엘 외무차관 에이탄 벤처가 극비리에 평양을 방문해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두 나라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고, 광산개발과 농업분야 기술지원을 위해 10억 달러를 제공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대신 북한은 이란 등 이스라엘 적성국가에 미사일을 수출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자국의 안전에 보탬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엔테베 작전하듯이 특공대를 북한에 파견해 미사일 제조시설을 파괴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로서는 그게 최선의 방안이라고 본 듯하다. 말하자면 '평화의 비용'으로 퍼주기를 하겠다는 게 이스라엘의 절박한 판단이었다. '한나라당'이나 '가스통 부대'같은 보수단체가 없어서였는지, 이스라엘 국내에서는 퍼주기 시비가 일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북한의 협상은 성사되지 못했다.

협상사실이 미국 측에 '발각'돼 제지됐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군비증강을 위해 '미사일 수출' 등 북한의 위협은 필요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고, 미국이 이스라엘에 무기를 판매하기위해, 이스라엘-북한의 협상이 성사돼서는 안 될 일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결국 이스라엘이나 미국이나 자국의 국익을 따져 움직였을 것이라는 소리다. 그게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는 국제사회의 냉엄한 생존법칙이다.

조선조 제14대 임금 선조는 후금(後金)에 이은 청(淸)나라가 '떠오르는 해'였는데도 '지는 해'인 명(明)나라만을 죽어라고 섬겼다. 그렇게 비롯된 괘씸죄 덕분에 두 차례의 호란(胡亂)이 빚어져 수십만 명의 백성이 살해되거나 청나라에 끌려갔다. 필경 제16대 임금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에게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 : 세 번 무릎 꿇되, 한번 꿇을 때마다 두 손을 땅에 대고, 세 번씩 머리가 땅에 닿게 하는 항복의식)의 치욕적인 예를 올렸다.

오늘날에도 복잡한 국제정세를 헤쳐 가며 국익을 지켜내려면, 어떤 한 나라와만 편향되게 가까이 하는 건 옳지 않다. 그런데도 MB는 그렇게 했다. 그는 미국 일변도의 외교에 열과 성을 다했다. 그의 형은 "MB가 뼈 속까지 친미(親美)이고 친일(親日)"이라 말했다. MB는 그러면서 중국과 러시아는 도외시했다. 균형 감각의 상실이었다.

미국이 명나라처럼 '지는 해'이고 중국이 청나라와 같은 '뜨는 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교역 규모도 미국보다 훨씬 크고 지정학적 측면을 감안하더라도 적어도 중국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특히 남북관계를 고려할 때, 중국과 러시아 쪽에 각별한 신경을 써야 옳았다. MB의 남북관계 파탄도 따지고 보면 거기에 적지 않은 원인이 있다고 보는 시각이 만만치 않다.

지금은 개성공단에서 허둥대는 이유를 원점에서부터 따져봐야 할 때다. 기분 같아서는 '호되게 혼내고, 못된 버르장머리 고쳐놓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북한은 굴복 시킬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필자가 누차 이야기했지만, 타도할 수 없다면 북한은 우리가 '관리'해야 할 대상이라는 게 정답이다. 이스라엘에서도 배워야 한다. 그게 국익이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2013년 4월 8일 월요일

'윤창중 취업'이 몰고온 사이비 전성시대


이글은 프레시안 2013-04-08일자 기사 ''윤창중 취업'이 몰고온 사이비 전성시대'를 퍼왔습니다.

[오홍근의 '그레샴 법칙의 나라'] 진짜·가짜 구별 안 되는 나라


나라가 온통 사이비(似而非) 천국이 되어 가는듯한느낌이다. 사회 전반의 현상이기도 하지만, 특히 정치판에서 그것은 정도(程度)를 지나치고 있는 듯하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대선을 전후한 정권교체기를 맞이하며 더욱 발호(跋扈)하는 양상이다.

다 알다시피 이 나라에서는 그 현상의 한 복판에 언론이 있다. 권력의 곁에 시립(侍立)한 채로, 그 권력의 기득권을 지켜주며 자기들의 배타적 이익을 챙기기 위해, 여론 조작이라는 사이비 행각을 일삼고 있는 게 언필칭 이 나라 주류 언론들의 본 모습이다. 멀리 살필 것도 없다. 쉬운 예로 대선 때 다른 곳도 아닌 중추 국가기관인 국가정보원의 선거 불법 개입 사실이 부분적으로 드러나고 있을 때, 이 나라 신문방송들이 보여준 사이비 행태를 우리는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사건 자체는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는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가 국가기관까지 정치공작에 끌어 들이고 있다"고 목청을 높였다. 언론들은 "국정원 여직원이 대통령 선거를 좌우할 정치공작을 한다는 게 믿기느냐"는 박 후보의 항변을 여과 없이 총력을 다 해 나팔 불어 주었다. 바로 그 사건에 대한 경찰의 수사는, 그게 언제적 이야기 인데 지금도 끝없이 미적거리고, 추적하거나 꾸짖는 보도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그런 게 바로 사이비 행태다.

"우리가 조사해서 다 알고 있다" "대선에 나오면 죽는다"고 안철수 캠프 쪽 금태섭 변호사를 '협박'하던 '새누리당 공보위원 정준길 씨 사건' 때도 주류 언론들은 그랬다. "협박은 없었고, 정치적인 이유로 금 변호사가 우정을 배신했다"는 투로 사건을 몰고 갔다. 박근혜 당시 후보도 "정 씨는 협박을 하고 말 위치에 있지 않은 사람"이라며 "구태(舊態)"라고 단정했다. 그러나 한 택시 운전사의 증언으로 '거짓말'과 '협박정황'은 쉽게 드러나 버렸다. 그 정준길 씨는 지금도 TV 시사프로에서 안철수 씨를 '흠집 내는' 방송을 하는 것이 목격되고 있다.

MB와 최시중 씨는 대선을 앞두고 종편 4개와 보도 전문채널 한 개를 허가해 주었다. 그 TV 방송들이 대선 과정에서 시사프로그램을 통해 눈부신 활약을 했다. 이른바 '정치평론가'라며, 적지 않은 낯선 얼굴들이 열심히 여당 후보를 도운 것 모르는 사람 별로 없다. 보편타당성과 공정함이 필수덕목이어야 했다. 국민의 재산인 전파 앞에서 겸허하게 바른 자세를 보여야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편들기' 경쟁을 밥 먹듯 했다. "사이비 경연대회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방송사에서는 기자들이 노조 성명을 통해, "편파방송을 일삼는다"며 특정 정치평론가의 출연금지를 요구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한 지상파 방송에서도 '선수급(級)' 특정 정치평론가에게 시사프로를 맡기려 했다가, 기자들이 편향성을 문제 삼아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무산되기도 했다.
ⓒ연합뉴스


대선 이후 인수위원회가 출범하면서, 상상을 초월한 '윤창중 씨 발탁'은 일부 '평론가'들과 '해설가'들을 적지 않게 고무시킨 듯하다. '간택 받음'을 통한 '취업'을 노렸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역(노원병)에서도 좋은 소리를 못 듣고 있는 것 같다>거나 미국에 간 건 잘못이다>라는 터무니없는 소리도 들렸다.

노원병 선거구에서 안철수 후보를 좋지 않게 말하는 사람도 물론 있을 것이다. 미국으로 출국(대선 투표일인 12월19일)하기 일주일 전 쯤 언론을 통해 발표된 '출국예정' 사실을 못 들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출국하던 날 안 씨가 투표 종료 후 발표를 전제로 국민들에게 남긴 메시지 내용을 알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것을 일반화 된 보편적 사실인 것처럼, 전국에 방송되는 TV 화면을 통해 말하고 매도하는 건 '정치평론가'나 '해설가'의 도리가 아니다. 사이비들이 하는 짓이다.

대선 때 새누리당 후보를 위해 만들어진 십알단(십자군 알바단)처럼, 고용된 것으로 보이는 알바 댓글 부대가 여론조작을 위해 뛰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직도 있다. 사전에 보면 '사이비'란 〈겉으로는 그것과 같아 보이나 실제로는 전혀 다르거나 아닌 것을 이르는 말〉이다. 그래서 지금은 바야흐로 사이비들의 전성시대다. 가짜와 짝퉁들의 전성시대다. 여야 가릴 것 없이 정치 일선에서의 사이비 논란도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는 형국이다.

도저히 질 수 없게 돼있는 선거에서 패배한 민주당의 책임도 사실 따지고 보면, 사이비들 때문이었다. 이념도 정책도 전략도 전술도 없이, 대권이 눈앞에 굴러들어오는 것으로 착각하고 사이비들은 덤볐다. 손에 잡히는 떡을 빼앗기지 않으면서 혹시라도 다른 계파가 공을 세우지 않나 견제하는, 패거리 문화가 지배한 해괴한 선거판이었다. 기득권을 내려놓는 겸허한 모습을 많은 국민들은 그토록 간절히 원했지만, 상왕(上王)들이나 이·박 체제나 친노 486들 모두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게도 구럭도 다 잃어 버렸으나, 요즘 보면 민주당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 같다. 국민들의 배신감이 어느 정도인 줄을 어림조차 못하고 있는 듯하다. 당내에서는 심지어 "안철수가 더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아서 선거에 졌다"는 어처구니없는 소리까지 나왔다. 이제 와서 야권의 살 길로, 문재인 전 후보와 안철수 씨가 만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모르시는 말씀이다.

최근의 한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전 후보가 노원병의 안철수 후보를 지원 할 경우, 안 후보의 지지율이 더 내려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게 바로 민심이다. 국민들의 눈에 민주당 쪽 사람들은 아무에게도 보탬이 안 되는 '사이비 정치세력'으로 비쳐지고 있다고극단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 같은 냉엄한 현실을 인정하는 것을 시발점으로 삼고 출발해야 살 길이 나온다는 점을 민주당은 깨달아야 한다. 정치쇄신을 외치는 '안철수 현상'이 왜 힘을 얻고 있는지 바로 볼 필요가 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야권 대선후보 단일화 과정에서도 사이비 논란은 있었다. 자칭 원로니 지성인이니 명사니 하면서, 중간지대에 서 있는 것처럼 거짓행세를 한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뒤로는 특정 후보 쪽과 미리 줄을 대고 그 쪽으로 여론을 몰고 가곤 했다. 누구누구인 줄 시중에는 다 소문이 나있다. 당당하고 떳떳함을 팽개치고 몰래 그럴 일이 아니었다.

새누리당 내부에도 오래된 사이비 논란이 심각한 화두가 되어 있다. 일찍이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 때부터 박정희 정권에 이어, 전두환ㆍ노태우ㆍ김영삼ㆍ이명박 정권을 거치면서 여당 국회의원의 주된 역할은 거의 거수기 노릇이었다. 청와대 쪽에서 버튼을 누르면 대부분 찍 소리도 못하고 그저 손을 들어 지시에 따르는 게 여당 국회의원들 이었다. 거수기는 꼭두각시고 꼭두각시는 바로 제 목소리 없는 사이비 국회의원 아니냐는 자조 섞인 탄식은 그래서 끊임없이 나왔다.

'태생적인 사이비 논란'이라는 소리도 들렸다. 박근혜 정권 들어서도 '소통부재' 불평과 함께 그런 이야기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150명이 넘는 거대 국회의원 집단에 바른 목소리도 별로 없다. 부동산 대책이나 추경이야기도 신문을 보고서야 알았다고 했다. "거수기 노릇이나 하란 말이냐"는 불평이 쏟아지고 있다. 특히 장관들 인사문제를 놓고는 할 말들이 많은 것 같다. "사이비들이 너무 많다"는 투덜거림이다.

아닌 게 아니라 쌀에 뉘가 너무 많이 섞인 것으로 보인다. 잇단 낙마에 이어 모든 장관인사가 매듭지어지지 않았는데도 '사이비' 시비가 그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항쟁'으로 인정하고 잘못을 사과한 제주 4ㆍ3사건을 "북의 지령으로 일어난 무장폭동내지는 반란"이라 매도하던 사람이 다른 국가기관도 아닌 국가정보원장이 되었다. 제주 4ㆍ3항쟁은 박근혜 대통령도 후보시절 추념일 지정을 약속한 사건이다.

박정희 씨를 '민주화의 일등공신'으로 추켜세운 그는 "역사상 사람을 죽이지 않은 독재자는 없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도 했다. 5ㆍ16쿠데타와 박정희 씨가 생사람들 죽인 인혁당 사건부터도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시절 사과한 사건이었다. 따라서 이는 박근혜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정부의 국가정보원장이 서로 견해를 달리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쯤 되면 단순 사이비가 아니라 뒤죽박죽 정권"이라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다.

박근혜 정부 내각의 핵심 구호인 '창조경제'란 말을 놓고 주무부처인 미래창조과학부의 장관 내정자가 무슨 뜻인지 설명을 못하는 모습도 보인다. 주무장관이 모르는 말이라면 '창조경제' 자체도 그냥 사이비일 수가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모래밭에서 찾은진주"라 한 해양수산부장관 내정자는 인사 청문회에서 어업의 국내 총 생산비율을 묻자 "모르겠습니다 하 하"했다. 국내 항만권역이 몇 개냐는 물음에는 "권역까지는 잘 … "이라 답했다. 개그 콘서트 이야기가 아니다.

오죽하면 새누리당 국회의원도 "준비되지 못하고 책임지지 못하는 모습"이라 했다. 어느 모래밭에서 '발굴'해 왔는지는 몰라도 해수부장관 내정자는 사이비 진주인 것으로 보인다. 바라건대 진짜와 가짜가 구별 안 되는 나라는 아니었으면 한다. '사이비'들의 득세를 예고하는 신호탄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이 그래서 크다.

국민행복과 국민통합 정권이라 했던가. 박근혜 정부가 진정성 팽개친 사이비 정권이 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하는 소리다.

2012년 9월 28일 금요일

박정희 '권력 욕심 잘못' 빠진 게 문제다


이글은 프레시안 2012-09-28일자 기사 '박정희 '권력 욕심 잘못' 빠진 게 문제다'를 퍼왔습니다.
[오홍근의 '그레샴 법칙의 나라'](72)박근혜 지지율 왜 계속 흔들리나?

'사과'한 후에도 지지율이 빠지고 있다. 그게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의 고민이요, 괴로움이다. 수년 동안 지지율 선두자리를 놓치지 않았고, '자랑스런' 아버지의 후광이 줄곧 그녀를 굳게 뒷받침 해주는 듯했다. 조중동과 거의 모든 TV등 언론의 절대적인 지원까지 받고 있었다. 그래서 "5·16은 구국의 혁명이요,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며, "유신도 국민과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는 입장을 고집스럽게 밀고 여기까지 왔다.

급기야 "하나의 사건을 놓고 재판결과가 두 개"라는 터무니없는 이야기까지 했다. 인혁당 사건에 대한 '견해'를 말하는 라디오 방송에서 그랬다. 괜찮을 줄 알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리고는 기울기 시작했다. 조선일보가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영웅 만든 박정희 씨도 그렇게 함께 기울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람들이 인혁당 사건에 대해 전모를 알아가면서 느끼는 분노는 생각보다 큰 것 같다.

양자 대결에서 그녀는 안철수·문재인 두 사람 모두에게 밀리는 조사결과가 나오기 시작했고, 다자 대결에서도 2위와의 차이가 좁혀졌다. 일찍이 불행한 사건으로 부모를 잃고 결혼도 안한 일생을 살아온 그녀였다. 일부에서 독재자라 말하는 아버지를 복권시키기 위해, 정치를 시작했다는(대변인으로 내정됐다 자진사퇴한 김재원 의원의 말) 그녀로서는, '사과'라는 내키지 않는 절차를 통해, 아버지를 '깎아 내리기'도 참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사과했는데도 지지율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게 문제다.

역시 문제는 사과가 자발성(自發性) 없는 타발적(他發的)이라는 데 있어 보인다. 사과라는 카드를 꺼내든 것부터가 본인이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진심이 담겼을 리 없다. 진정성이 없으니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리 없다. 사람들이 박 후보의 그런 속내를 모를 리 없다.

▲ 과거사 관련 사과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박근혜 후보 ⓒ연합뉴스

사람들은 대부분 엎드려 절 받는 것 좋아하지 않는다. 처삼촌 묘 벌초하듯 하는 거 좋은 모양새도 아니다. 전체 국민들에 대한 죄송스러움이나 송구스러움 표시도 없었다. 게다가 박근혜 후보의 기자회견문을 찬찬히 읽어보면 문제의 핵심을 일부러 회피해 간 듯한 느낌까지 주고 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는 경제발전과 국가안보라는 시급한 국가목표, 다시 말해서 국민을 잘 살게 하고야 말겠다는 간절한 목표가 있었다"고 강조했다. 그 경제발전 이면에 노동자들의 희생이 있었고, 안보를 지켜내느라고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가 있었다고 했다. 그 때문에 5·16, 유신, 인혁당 사건 같은 헌법가치 훼손과 정치발전 지연이라는 결과가 (불가피하게) 빚어졌고 그걸 사과한다고 했다.

그러나 사과 대상에서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될 대목이 있었다. 여러 사과 대상 가운데 그냥 포함될 수도 있고 포함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런 '하나'가 빠진 게 아니다. 고의인지 고의가 아닌지는 알 수 없어도, 가장 핵심이 되는 '잘못'이 빠져 있다. 그것이 국민들을 허전하게 하고 껄적지근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말이 분명한 표현으로 반드시 들어갔어야 했다. "게다가 아버지에게는 사리사욕이 있었고 특히 장기집권 욕심이 넘쳐 났습니다." 힘들었겠지만 그 말이 필요했다. 너무 심하다거나 사실이 아니라고 항변 할 수도 있겠으나, 그랬다면 박근혜 후보의 지지율은 지금과는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따져보면 답은 금방 나온다.

박정희 '정'과 육영수의 '수'자가 합쳐 이름 지어진 정수장학회는 왜 어떤 과정을 거쳐 생겨났는가. 부산일보는 어떤 역사 속에서 오늘에 이르렀고 왜 편집국장은 지금 쫓겨나 있는가. 독립 운동가들이 세웠다가 정부에 헌납당한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은 어떻게 해서 정부 아닌 대통령 개인의 소유가 되어 영남대학이라는 이름을 달았는가.

이것들의 소유권 이전과정이 '박정희 씨의 시급한 국가목표'였던 경제발전과 국가안보와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국민을 잘 살게 하고야 말겠다던 박정희 씨의 간절한 목표'와는 무슨 연관성이 있는가. 박정희 씨는 5·16 쿠데타 직후 "(반드시) 군 본연의 임무에 복귀하겠다"고 약속했다. 얼마 뒤 "3선개헌 않겠다"고 약속했다. 1971년 대통령 선거 때는 "다시는 나를 대통령으로 뽑아 달라고 이야기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다시는 나와 같은 불행한 군인이 없어야 한다"며 본연의 임무에 복귀하지 않았다. 1969년엔 일요일 새벽 2시 '환장(換場)해서' 국회별관으로 옮겨 3선개헌 안을 통과 시켰다. 1972년엔 유신헌법을 만들어 영구집권의 길을 텄다. 유신헌법에 의한 체육관 간접선거였으므로 국민에게 "나를 대통령으로 뽑아 달라"고 직접 말하지는 않은 셈이었다.

중앙정보부가 유신을 반대한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를 타살한 사건이 국민을 잘 살게 하기위한 것 아니었다. 고려대학교에 휴교령 내리며 탱크 밀어 넣은 긴급조치 7호나 9호에, 4호인 인혁당 사건조차도 경제발전이나 국가안보와는 관계없는 사건이었다. 국민을 하늘처럼 떠받들며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줘야 할 공인(公人) 가운데 공인이요, 머슴 가운데 상머슴인 대통령으로서의 할 일과 몸가짐을 이야기 하는 중이다.

박근혜 후보는 박정희 씨 개인의 '사리사욕'과 '장기집권 욕심' 때문에 빚어진 참혹한 사태였음을 분명하게, 알기 쉽게 큰 목소리로 사과 했어야 했다. 물론 박 후보의 이번 사과는 국민들의 지지율 하락에서 비롯됐으나, 사과 그 자체만으로도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잡았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5·16과 유신과 인혁당 사건에 대해, 이른바 보수정당인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가 분명하게 견해를 밝히며 성격을 규정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바로 "5·16과 유신과 인혁당 사건은 헌법가치를 훼손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대목이다. 그동안 5·16이나 유신 등에 대한 비판은 '좌빨들이나 하는 짓거리' 쯤으로 알고, 억지를 부리던 일부 인사들에게도 분명한 '교범(敎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일부 군부대에서 실시 중이던 '종북세력 실체 인식평가'같은 코미디 같은 짓도 사라질 것이다. 진급과 휴가에도 반영되는 그 시험문제는, 유신체제하에서의 유신반대 운동이 종북세력 확산을 기도한 것처럼 출제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 짓하면 안 된다.

박정희 씨 같은 남로당 전력이 전혀 없는데도, 5·16이나 유신을 비판했다하여 오히려 빨갱이로 낙인찍힌 인사들, 예컨대 김대중·노무현 씨도 '오해'가 풀리는 효과를 기대해 본다.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씨는 한국의 안전보장과 관련해, 미·일·중·소 4대국 보장론을 설파한다. 박정희 씨는 이때 언론 총 동원령을 내리는 등 거국적으로 김 씨를 빨갱이라 몰아붙인다. 그러나 그때의 4대국 보장론은 지금 남북한을 포함한 6자회담이 되어있다.

박근혜 후보는 1989년 한 TV와의 인터뷰에서, 5·16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북한의 밥'이 되었다고 강변했다. 박근혜 후보의 팬 카페인 '근혜동산'에는 유신이 우리국민 900만 명의 목숨을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구했다는 이야기가 적혀있다. 다 '반공장사'들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행태들이다. 그런 짓거리 하지 말아야 할 때가 되었다.

유신 전후해서 박정희 정권은 2차례나 '유신결행'을 김일성에게 통보해 준다. 그리고는 그해 1972년 12월 김일성도 주석제를 도입하고 그 자리에 앉는다. 적대적 의존관계요, 짜고 친 고스톱이었다. 물론 그때 900만 명이 죽을 수 있는 그런 상황도 아니었다. 참고로 6·25의 참화 속에서 우리국민 사상자가 300만 명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900만 명은 나가도 너무 나갔다.

이 나라에는 오래전부터 반공하는 권리를 신주 단지처럼 모시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빨갱이 제조공장'을 차리고 '빨갱이 생산권'도 쥐고 있다. '빨갱이 딱지 부착권'도 물론 그들에게 있다. 내용적으로 빨갱이 인지 여부는 중요치 않다. 그저 자기편 아니면 그냥 낙인 찍혀 빨갱이가 되는 수밖에 없다.

박근혜 후보가 대선결과와 상관없이 이번 사과를 계기로, 그런 행태 바로 잡는데 기여한다면, 그녀는 역사에 기록되는 인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그런 분야에서만이라도 모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다.

 /오홍근 칼럼니스트

2012년 9월 18일 화요일

그 무덤에 침을 뱉어라


이글은 프레시안 2012-09-18일자 기사 '그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퍼왔습니다.
[오홍근의 '그레샴 법칙의 나라'](71)박정희, 이젠 평가해야 할 때

법정은 일순 숨소리 하나 들을 수 없을 정도의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2006년 12월23일, 서울 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부 문용선 재판장은 그 침묵을 깨고, 31년8개월여 전 이른바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죄 없는데도 목숨을 빼앗긴 8명의 이름을 한 사람씩 부르기 시작했다. "피고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송상진, 우홍선, 여정남에 대해 판결을 선고합니다. 원심을 파기합니다. 피고 각 무죄!"

거의 동시에 이곳저곳에서, 참고 또 참아왔던 진하디 진한 흐느낌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흐느낌은 금세 통곡이 되어 법정을 휘감았다. 민주화된 세상이라 예상되던 재심 판결이었으나, 막상 판사의 육성으로 듣는 "무죄" 소리가 유족들은 기막히게 서러웠다. 31년 전에 그렇게 들었어야 할 선고였다. 그날 그 법정에서는 유족이 아니었어도 다들 울었다.

이 판결은 검찰이 법정항소 시한인 1개월을 넘기면서, 상급심 항소를 포기함으로써 2007년 1월23일 최종 판결로 확정되었다. 몹쓸 세월에 대통령 한 사람 잘못 만나 죄도 없이 목숨을 잃었으나, 세상이 정상적으로 굴러 가기만 했다면 당연히 벌써 와야 할 그런 날이었다.

그 1년 8개월 뒤인 2008년 9월26일 이용훈 대법원장은 사법 60주년 기념식에서 헌정사상 처음으로 사법부의 과거사에 대해 공식으로 사과했다. "사법부가 헌법상 책무를 충실히 완수하지 못함으로써 국민에게 실망과 고통을 드렸다"며 "민족일보 사건, 인혁당재건위 사건, 민청학련 사건,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사건 등에 대해 과오를 사과 한다"고 했다.

따지고 보면 이들 사건은 사법부의 잘못이라고 못 박을 수 없는 사건들이었다. '대통령의 뜻'에 따라 판결한 사건들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그런데도 이날 공식 사과문에서 "미래를 향해 새로 출발하려면 먼저 스스로 과거의 잘못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반성하는 도덕적 용기와 자기 쇄신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 가족들이 새누리당 앞에서 집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대한민국 대법원장이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구체적으로 거론해 사과하면서 그랬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아버지가 직접 관련된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놓고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는 '미래'를 말하면서도 선문답을 하고 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라를 이끌겠다면서도 사과 할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인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관련자들이 범했다는 죄목은 사형선고가 가능한 긴급조치 4호 위반과 내란 선동 등이다. 훗날 국가정보원(중앙정보부의 후신)의 과거사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는 이 사건이 "유신체제에 대한 학생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한 당시 박정희 정권이 학생시위의 배후에 공산주의자들이 있다는 인상을 심어 주고자 조작한 사건이었다"고 지적했다. 진실위는 특히 "당시 권력의 정당성이 없는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했다"고 진상 조사결과를 밝혔다.

뒷날 줄줄이 위헌판결을 받은 그 긴급조치들은 사실 박정희 씨 개인이, 방해 받지 않고 대통령 오래하려고 일방적으로 정해 놓은 '개인의, 개인에 의한, 개인을 위한' 기준이었다. 장기 집권을 위한 기준이었다. 그가 정한 기준과 요건에 적합하지 않으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유신의 기준'이었다. 그 기준 어겼다고 생사람 잡아다 죄 뒤집어 씌워 8명이나 죽인 게 인혁당재건위 사건이었다. 긴급조치 1·4·9호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만도 1000명이 넘었다.

대학졸업­교사­학원강사 경력의 임구호 씨는 1969년의 3선 개헌 반대운동을 한 전력 때문에 1974년 인혁당재건위 관련자로 엮여 들어갔다. 징역 15년을 선고 받고 7년10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임 씨는 당초 잡혀 들어갔을 때, 중앙정보부 조사에서도 인혁당이란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검찰에 가서야 처음 들었다.

그는 서울 남산의 정보부에서 매일 길이 90㎝되는 각목으로 얻어맞으면서 척추 꼬리뼈가 부러지면서, 시키는 대로 인혁당 관련 이야기를 자기 입으로 만들어 주었다. 동물농장에서 '인혁당 만들기'를 했다. 그는 현재 그 후유증으로 5급 장애자가 되어 병원을 들락거린다. 사형선고까지 받은 이철 씨도 인혁당이 뭔지도 몰랐다고 했다. 이 나라의 70년대는 그렇게 박정희 씨의 장기집권 목표 하나 때문에 피 맺히고 한과 눈물이 질펀하게 깔리던 시절이었다.

특히 인혁당재건위 희생자 유족들의 한과 눈물은 요즘에야 조금씩 알려지지만 처참하기가 비할 바 없었다. "목욕탕 간다고 나간 남편이 소식이 없다가 어느 날 간첩이 되어 TV에 나왔다"고도 했다. 남편에게 일생을 걸던 곱던 아낙이 남편을 빼앗긴 뒤 이제 한 세대가 지나 쭈글쭈글한 노파가 되었다.

한 희생자의 부인인 A 씨는 악에 받쳤던 때를 회상한다. "남편이 사형 당한 후 신문에 나는 박정희 사진을 이가 아프도록 꼭꼭 씹어서 뱉곤 했다"고 했다. 남편 산소에 매주꽃을 들고 찾아갔다가 발길을 돌릴 때마다 "살인마 박정희 천벌을 받으라"고 외쳤다고 했다. 박정희 씨가 피격된 1979년까지 계속 그랬다고 했다.

다른 희생자의 부인 B 씨는 남편에 대한 조사를 받던 중 기관원이 주는 물을 마셨다가 흥분되면서 온몸이 꼬이는 참혹한 경험을 했다. 그때 '남편은 간첩'이라는 진술서를 쓰고, 죄책감으로 아이들과 극약을 먹으려 했으나 친정어머니에게 들켰다. 본인과 아이들은 죽음을 면했지만 친정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한 달 만에 눈을 감았다. 이건 사람 사는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다.

또 다른 희생자의 부인 C 씨의 눈물겨운 이야기. 저녁때가 되어도 아들이 집에 오지 않았다. 동네 놀이터에 가봤더니 동네 아이들이 아들의 목에 새끼줄을 매고 '총살놀이'를 하고 있었다. "빨갱이 자식"이라 놀리고 있었으나 놀이터의 몇몇 어른들은 보고만 있었다. "저 아이와 함께 놀면 너희들도 잡혀 간다"는 소리도 들렸다. 경찰관 시험에 합격했으나 합격 취소 통지를 받은 친척도 있고, 친척들 여권도 내 주지 않았다.

진술 내용과는 정반대되게 조서가 조작돼 있기도 했고, 심지어 희생자들의 유언도 교수형 입회 교도관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만들어져 있었다. 진실을 보도해 달라고 그토록 발이 닳게 언론사에 쫓아 다녔으나, 진실 보도는커녕 억장 무너지는 기사도 나왔다. <대법원으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번 판결은 대법원이 심혈을 기울여 심리하고 선고한 것이므로 더 이상 불복할 여지가 없다.> (교수형 다음날 인) 1975년 4월10일자 어떤 신문의 사설이었다.

대법원 판사 D 씨의 기절할 이야기도 있다.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의 판결이 나온 것은 1975년 4월8일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D 씨는 자기도 서명한 것으로 되어있는 그 때의 판결문을 본적이 없다. 2002년 12월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발표가 있고 나서야 그 판결문을 보았다고 실토했다는 증언이 있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은 그런 사건이었다. 박정희 씨는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그렇게 이끌고 갔다.

독재자였다는 평판 때문에 잊혀져가던 박정희 씨가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조선일보때문이었다. <한겨레 21>의 보도에 따르면 10ㆍ26이후 13년간 박정희 씨의 이름을 올리지 않던 조선일보가 김영삼 씨의 대통령 취임 후부터 집중적으로 박정희 씨를 찬양하기 시작한다. 10ㆍ26이후 2009년 10월까지 실린 박정희 기사 3459건 중 93.6%인 3231건이 김영삼 씨 취임 이후 보도됐다고 했다. 인기가 바닥인 김영삼 씨의 '무능'과 대비되는 '강력한 리더십의 유능한 전직 대통령'에 대한 기억의 형태로 기사가 등장했다고 <한겨레 21>은 보도했다.

1995년 3월부터는 '가장 훌륭한 정치지도자는 누구입니까'를 묻는 여론조사를 시작했다. '1위 박정희'일 개연성이 많은 시점이었다. 집중적인 찬양보도가 줄기차게 계속되다가 1997년 10월부터 3년 동안 연재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가 '박정희 부활'의 결정판이 된다. 박정희 씨는 생전에 기자들을 만났을 때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내가 한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들을 하지만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한 것을 역사는 제대로 평가해 줄 것"이라는 강한 메시지가 느껴지는 말이다. 지난 10일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도 박근혜 후보는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는 말 속에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하던 아버지의 모든 것이 함축돼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의 연재기사는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박정희 씨는 부활됐을 뿐만 아니라 웬만한 과오도 덮어지는 양상을 보였고, 심지어 "어느 누가 '박통(박정희대통령)'의 허물을 말 할 수 있느냐" "누가 박통에게 침을 뱉을 수 있느냐"는 눈 부라림까지 느껴지는 상태가 되었다. 박정희 씨는 그렇게 영웅의 반열에 올랐다. 조선일보가 그렇게 만들었다. 더구나 역대 정권을 살펴볼 때 여건도 좋았다.

전두환 씨의 광주학살이 너무 잔인하고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박정희 씨의 혹독한 인권탄압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박정희 씨에 대해서는 정색을 하고 역사를 바로 잡는 평가가 시도되지 못한 측면까지 있다. 김영삼 정부는 박정희 씨의 조카사위인 김종필 씨와 3당 합당으로 손을 잡고 출발한 정권이었다.

김대중 씨는 김종필 씨와 연합한 소수정권이면서, 오히려 '용서'를 내세워 박정희 기념관까지 짓도록 지원해 주었다. 노무현 씨는 '그럴 생각'이 없었던 데다 '박근혜와의 대연정'까지 생각하던 정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해봐야 할 때다. 겸손한 마음으로 냉정한 눈으로 평가하고 정리해야 할 때다. 역사는 바로 세워져야 한다. 특히 이번에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른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계기로 그런 작업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많다.

보리고개를 없애고 경부고속도로와 중화학공업 등의 업적을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집권 18년 동안 늘어난 1인당 극민소득이 1600달러에 불과하고, 대기업 수출 밀어주기의 그늘에서 혹독한 저임금으로 고통 받던 근로자들의 희생을 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특히 역대 대통령 중 IMF 때를 빼고는, 소득에서 박정희 대통령 때보다 못한 대통령이 하나도 없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공(功)과 과(過)를 있는 대로 늘어놓고 각각 다른 서랍에 집어넣으면서, 과대 포장된 것도 포장 벗겨 내용을 확인 할 필요가 있다. 공정하고 준엄한 평가가 필요한 때다. 그는 과연 사심없이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만 일 했는가. 근대화와 산업화만을 위해 몸을 던졌는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호통 칠만한 삶을 살았는가.

부산일보와 정수장학회와 영남대학교를 개인 소유로 돌려놓은 것도 그런 것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유신반대 데모한다고 서울문리대 해체한 것도, 긴급조치 위반 구속자가 1000명 넘도록 인권을 탄압한 것도 그런 것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하는 일도, 근대화나 산업화의 과정도 아니었다.

허나 그런 것 다 양해한다 치더라도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통해 드러난 참혹한 사법 살인사건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숨이 막힌다. 참을 수가 없다. 절망한다. 그 무덤에는 침을 뱉어야 한다.

 /오홍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