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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9일 수요일

"누구보다 기다린 대선, 끝나곤 TV뉴스도 안 봐요"


이글은 프레시안 2013-01-08일자 기사 '"누구보다 기다린 대선, 끝나곤 TV뉴스도 안 봐요"'를 퍼왔습니다.
[현장] 쌍용차 해고자 "국정조사, 먼저 간 23명 명예회복 위한 길"

일곱살 은서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었다. "문재인 할아버지가 진 거야?" 엄마도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응, 졌대"

은서 아빠는 2009년 쌍용자동차에서 해고된 2646명 중 한 사람이다. 은서네 엄마와 아빠, '쌍용차 식구'들은 모두 민주통합당 문재인 전 대선 후보의 승리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결과는 패배였다. "저희가 하도 선거 얘기를 많이 하니까 은서도 매일 물어봐요. '문재인 할아버지' 졌느냐고요."

'쌍용차 식구'들은 대선 결과를 보고 "멘붕이 왔다"고 했다. TV 뉴스도 보지 않는다고 했다. 어느 해고 노동자의 아내는 "기대가 커서 낙담이 더 깊었던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은서가 좋아하는 '수미 이모'는 계속 "죄송해요. 이겨서 왔어야 했는데 …"라고 했다. 7일 저녁, 경기도 평택시 쌍용차 해고 노동자 가족들의 쉼터 '와락'에 들른 민주통합당 의원들은 미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민주, 노동대책위 출범 "노동권 유린되는 현장으로 가겠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와 가족들이 민주통합당의 대선 승리를 그 누구보다 바랐던 이유는 하나, '국정조사'다. 정권이 바뀌고 국정조사를 통해 쌍용차 사태에 대한 진상규명이 이뤄지면, 세상을 등진 23명의 해고 노동자와 남은 가족들이 적어도 명예회복은 할 수 있으리란 것이다. 이러한 기대는 민주통합당의 패배로 무너졌다. 대선 이후 한진중, 현대차 해고 노동자들의 죽음의 행렬이 이어졌다. 그 속에서도 쌍용차 노동자들은 마음을 다잡았다. 대선 전 새누리당 내에서도 황우여 대표, 박근혜 캠프 김무성 전 총괄선대본부장 등이 국정조사를 공언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에게 남은 마지막 한 줄기 빛이었다.

그러나 또다시 '멘붕'이 찾아왔다. 지난 4일 평택 쌍용차 공장 인근 송전탑 밑 농성장을 찾은 새누리당 이한구 원내대표 때문이다. 이날 이 원내대표는 농성하는 해고 노동자들에게 "위험한데 송전탑에 왜 올라가 있느냐", "국정조사가 여러분을 위한 일인지 알 수 없다. 최종 목표는 복직 아니냐"고 물었다. 또 7일에는 방송에 출연해 "기업 경영 의욕을 떨어뜨리고 해고된 전 직원들의 복직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며 다시금 국정조사에 대해 반대 입장을 밝혔다.

이 원내대표가 다녀간 지 사흘 만, 이번엔 민주통합당 의원들이 '꼬이고 꼬인 쌍용차 문제의 실타래를 풀겠다'며 대거 농성장을 찾았다.

 
▲ 민주통합당 노동대책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7일 오후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쌍용자동차 국정조사 촉구 기자회견을 갖기 전 농성장을 방문해 민주노총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김정우 지부장 등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갖고 있다. ⓒ뉴시스

민주당은 이날 먼저 당 소속의원 23명으로 구성된 노동대책위원회를 발족했다. 위원장은 홍영표 의원이, 간사는 은수미 의원이 맡았다. 두 의원을 비롯, 우원식, 인재근, 전순옥, 진선미, 유은혜, 김성주, 신경민, 김광진 의원 등 대책위 소속 의원들은 대한문 쌍용차 분향소를 방문한 뒤 기자회견에서 "쌍용차 국정조사를 비롯해 철탑 위에서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현대차와 한진중공업 등 시급한 노동 현안 해결을 목표로 발족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쌍용차뿐만 아니라 현대차와 한진중공업, 유성기업, GM코리아, 골든브릿지증권, 한국3M 등 노동권이 유린되고 짓밟히고 있는 노동현장으로 노동자들을 만나러 가겠다"고 활동 계획을 밝혔다.

해고 노동자 "국정조사, 쉽지 않겠지만… 믿을 데가 또 있나요"

이어 평택 농성장을 찾은 대책위 소속 의원들은 '국정조사 실시' 의지를 거듭 밝혔다. 우원식 원내수석부대표는 "대선이 민주당만의 일이 아니라 많은 분들의 염원이 모여 있었는데 희망을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며 "1월 임시 국회가 열릴 텐데 민주통합당의 첫째 과제가 쌍용차 국정조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양보하지 않겠다. 혼신의 힘을 다해 관철하고 회계문제, 정리해고 문제 꼭 밝히겠다"고 의지를 피력했다.

농성 중인 해고 노동자들은 사흘 전 이 원내대표 '국정조사 반대' 발언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낙담한 분위기였다. 민주노총 쌍용차지부 김득중 수석부지부장은 "지금 상황에서 국정조사를 하기가 쉽지 않을 거란 걸 안다"며 "여러분들이 결연한 자세로 돌파하지 않으면 어려울 것 같다"며 국정조사 성사를 부탁했다.

그는 또 이한구 원내대표와 나눴던 이야기들을 전하며 "시각 차가 큰 것 같다. 국정조사를 요구하면 일자리를 어렵게 만드는 게 아니다. 당시 문제가 다 드러나야만 경영정상화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한구 원내대표는 반대를 위한 명분쌓기를 했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 7일 오후 경기도 평택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철탑 농성장을 찾은 민주통합당 우원식(오른쪽에서 3번째) 원내수석부대표 등 민주당 의원들이 고공 농성 중인 노동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양형근 조직 실장도 "돌아가신 23명에 대한 명예회복이 되어야 하고, 진실이 가려져야 한다"며 "이미 법적인 부분은 진행되고 있지만 갈 길이 멀기 때문에, 빠른 해결을 위해선 정치권에서 나서주시는 길밖에 없다"며 호소했다.

대책위 홍영표 위원장은 "저희 목표도 국정조사를 통해 제도적으로 잘못을 개선하는 것"이라며 국정조사 실시를 약속했다.

대책위 의원들은 이어 철탑 위 농성자들과도 마이크를 통해 이야기를 나눴다. 우 수석부대표는 "늦게 찾아와 죄송하다. 국정조사 하려고 잔뜩 마음을 먹고 있지만 새누리당이 협조를 잘 해주지 않는다. 열심히 해보겠다"고 하자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한상균 전 지부장은 무선마이크를 통해 "더 고통받는 노동자들이 없도록 민주당이 앞장서셔야 한다"고 당부했다. 진선미 의원은 "저희한테 부탁하실 거 없느냐"며 "의료진 검진 거부하지 마시고 꼭 응해달라"고 부탁했다. 바람 소리에 묻혀 고공농성자들의 대답은 더는 잘 들리지 않았다. 한 전 지부장과 문기주 정비지회장, 복기성 비정규지회 수석부지회장은 육성 대답 대신 양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고공대화'를 마친 민주통합당 대책위 의원들은 "우리도 저 위로 올라갈 순 없는 거냐"고 물었다. 철탑 위 농성자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새누리당 이 원내대표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마지막 방문지인 '와락'으로 떠나기 전, 양 실장에게 "이한구 원내대표가 왔을 때보다 오늘 분위기가 좋은 것 같다"고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양 실장은 한 번 빙긋 웃고는 말했다. "그럼 어쩌겠어요. 국정조사 해주겠다고 나서는데. 지금 저희가 기댈 데가 이 사람들밖에 더 있겠어요"


 /서어리 기자(=평택)

2012년 9월 17일 월요일

[단독]위헌판결난 ‘긴급조치’ 재심 1140명 ‘명예회복’ 기다린다


이글은 경향신문 2012-09-17일자 기사 '[단독]위헌판결난 ‘긴급조치’ 재심 1140명 ‘명예회복’ 기다린다'를 퍼왔습니다.

1970년대 유신정권 시절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사법처리된 1140명이 재심을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긴급조치 1~9호 위반 혐의로 공안당국이 사법처리한 사건만 500건을 훨씬 넘는다.

16일 경향신문 취재 결과 1974년 이후 긴급조치 1·3·4·9호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은 사람은 589개 사건에 1140명으로 집계됐다. 기소된 사건은 대부분 유죄와 함께 징역형이 선고됐다. 하지만 2010년 12월 대법원이 긴급조치 전반에 대해 위헌을 선고함에 따라 이 사건 관련자는 재심만 청구하면 모두 무죄가 선고된다. 

대법원은 “긴급조치 1호가 민주주의의 본질인 표현의 자유와 신체의 자유 등을 심각하게 제한해 유신헌법에서도 보장한 기본권을 침해했다”고 밝혔다. 

또 “당시 국가가 중대한 위기상황이거나 국가 안위에 직접 위협을 받을 때가 아니었는데도 (근거 없이) 긴급조치를 발동했다”고 밝혔다.

대법원의 위헌 선고에 따라 서울고등법원은 지난달 26일 1974년 긴급조치 4호 위반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은 최권행씨 등이 제기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징역 15년을 받은 박형규 목사의 재심도 지난 6일 무죄가 나왔다.

이 밖에도 긴급조치 위반으로 유죄가 선고됐던 사건에 대해 재심이 속속 진행 중이다. 대법원의 위헌 판결이 나오기 전에는 긴급조치로 유죄를 받은 당사자들의 재심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가능했다. 형사소송법에 따라 국가의 고문이나 증거조작 증거를 찾아내야만 재심 신청이 가능했다.

그동안 대법원이 불법 증거를 찾아온 사람에게만 재심을 허가해오다 2010년 갑자기 전체 법률에 위헌을 선고한 것은 헌법재판소를 의식했기 때문이다. 당시 헌재가 긴급조치에 위헌을 선고할 것이란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헌재가 긴급조치에 위헌을 선고하면 긴급조치 관련자 1140명을 재판한 대법원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현역 중 긴급조치 위반 혐의에 유죄를 선고한 사법부 출신 인사에는 양승태 대법원장과 이강국 헌재 소장, 김황식 국무총리,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범준·유정인·곽희양 기자 seirots@kyunghyang.com

2012년 9월 13일 목요일

아버지 명예회복에 집착 박 ‘일그러진 신념’ 굳어져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09-13일자 기사 '아버지 명예회복에 집착 박 ‘일그러진 신념’ 굳어져'를 퍼왔습니다.

바뀌지않은 역사인식 왜?
 ‘인혁당 사법살인’ 재평가 주장
당시 퍼스트레이디 ‘면피성’
당 핵심·참모 고언 안 먹혀
“누구도 박후보 생각 못바꿔”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는 인혁당 사건과 관련해 11일 “대법원 판결은 존중한다. 법적으로 그렇게 된 것은 저도 인정한다”고 말해, 재심 결과의 법적 효력은 수용할 뜻을 비쳤다. 박 후보의 발언이 사법체계의 부정 즉, 국가 운영체제의 혼선을 초래한 문제점은 어느 정도 바로잡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75년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에 대한 ‘사법살인’을 반성한다는 진정성은 전혀 없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실제로 박 대표는 이날 “(다른 증언 등) 그런 여러가지 얘기가 있고 하니까 그런 걸 다 종합할 적에 그것은 역사적으로 좀 판단할 부분이 아니냐”며 ‘역사 재평가’를 거듭 강조했다. 이는 결국 자신이 집권한 뒤 ‘또다른 해석’ 즉 ‘인혁당 재건위 사형 집행=합법’을 꾀하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지적이 나온다. 역사학자인 전우용 박사는 자신의 트위터에서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는 말의 본뜻은 “뉴라이트의 판단에 맡기자’일 것”이라며 “그러면 인혁당 사법살인은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5·16과 유신에 대한 인식과 태도도 동일하다. 박 후보는 지난 7월 5·16에 대해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토론회)이었다고 했다가 비판을 받자 며칠 뒤 “정상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한발 물러섰다. 그 뒤 5·16에 대해 “내가 만약 그때 지도자였다면 어떤 선택했을까 생각하면서 객관적으로 봐야 하지 않나”라며 거듭 ‘5·16 불가피론’을 주장했다. 박 후보의 역사 인식은 사실 바뀐 적이 한번도 없다. 5년 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는 5·16을 “구국의 혁명”이라고 했으며, 인혁당 재심에 대해서는 “지난번에도 법에 따라 한 것이고, 이번에도 법에 따라 한 것인데 그러면 법 중 하나가 잘못된 것 아니겠느냐. 나에 대한 정치공세다”라고 말했다.박 후보의 기본 생각이 안 바뀌는 것은 왜곡된 신념체계 때문이라는 의견이 많다. 박 후보를 잘 아는 여권의 한 인사는 12일 “과거사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5년 전에도 주변에서 많이 얘기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며 “5·16과 유신이 없었으면 공산화가 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너무 강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박 후보는 정치권에 나오기 전부터 “유신 없이는 아마도 공산당의 밥이 됐을지도 모른다. …시대 상황과 혼란 속에 나라를 빼앗기고 공산당 앞에 수백만이 죽어 갔다면 그 흐리멍텅한 소위 민주주의가 더 잔학한 것이었다고 말할지 누가 알 수 있으랴”(1981년 10월28일 일기)라고 썼다. 민주주의는 흐리멍텅했고, 유신이야말로 구국이라는 인식이다.이런 생각은 사후 독재자로 비판받은 아버지의 명예회복 시도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박 후보는 일찍부터 “비범하신 아버지를 모셨고, 생전이나 서거하신 후나 평범하지 않은 관심과 혹독한 비난에 시달리셨기 때문에 그걸 바로잡는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내 자신 또한 평탄하지 못한 길을 가고 있다”(1989년 11월5일 일기)며 ‘명예회복’을 별렀다. 박 후보가 1990년 아버지 박정희 찬양 영화인 ‘조국의 등불’을 만든 것도 이런 맥락이다.유신 통치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라는 지적도 있다. 새누리당의 한 의원은 “인혁당 판결은 박 후보가 퍼스트레이디를 한 이후인 1975년에 있었다”며 “그가 유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그 시절 자기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한 것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인혁당 사건을 ‘사법살인’으로 인정할 경우 자신에게 직접 책임이 돌아올 수 있다고 판단한다는 것이다.하지만 박 후보의 이런 인식에 대해서는 당 안팎에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김종인 국민행복특별위원장은 “정치지도자로서 아버지를 객관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여러차례 비판적인 견해를 밝혔다. 새누리당의 한 핵심관계자도 “위헌적인 권력 장악을 덮기 위해 내세웠던 공산화 방지라는 논리를 아직도 신봉하면서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것은 낡은 사고”라며 “문제는 아무도 박 후보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종철 성연철 기자 phillkim@hani.co.kr

2012년 8월 30일 목요일

한국판 드레퓌스 강기훈의 명예회복, 지식인들이 나서라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08-30일자 기사 '한국판 드레퓌스 강기훈의 명예회복, 지식인들이 나서라'를 퍼왔습니다.
[김주언 칼럼] 노태우 정권 희대의 조작사건, 재심 촉구 온라인 서명운동 진행 중

“기훈이가 절대로 하지 않는 얘기가 있습니다. ‘유서대필’이라는 누명을 썼던 때 얘기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훈이가 먼저 그 얘기를 꺼냈어요. 애들이 ‘아빠, 정말 그랬어?’라고 물어 보더라는 겁니다. 그때 기훈이가 난생 처음 ‘정말 죽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기훈이는 그렇게 상처를 앓은 채 21년을 살아왔습니다. 언제까지 그에게 이 짐을 짊어지게 해야 합니까. 자식들에게 떳떳한 아비가 될 수 있도록 해줘야 합니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유서대필 조작사건’의 주인공 강기훈씨(48)의 20년 지기 원일형씨의 말이다. 지난 28일 200여명의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열린 ‘강기훈의 쾌유와 재심개시 촉구를 위한 모임’(공동대표 함세웅 김상근 등) 발족식에서 원씨는 이렇게 말하며 울먹였다. 강씨는 현재 간암으로 투병 중이다. 주위의 도움으로 어렵게 삶을 이어가고 있다.
참석자들은 “‘유서대필 사건’은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위원회’에서 독재정권이 위기 탈출을 위해 만들어 낸 희대의 조작극임이 이미 밝혀졌다”며 “대법원은 하루 빨리 재심 개시를 결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모임은 강씨의 쾌유를 기원하고 재심을 촉구하는 온라인 서명운동과 치료비 모금 활동을 진행중이다. 내달 20일에는 서울시립대 강당에서 ‘강기훈을 위한 시와 노래의 밤’을 열 예정이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정혜신 박사 등은 재능기부를 통해 ‘강기훈 지킴이’로 활동한다. 

1991년 5월 강기훈 씨가 명동성당에서 필적을 실연해 보이고 있다.
강씨 변호인단도 3년째 재심개시 여부결정을 미루고 있는 대법원에 판단을 서둘러 달라고 호소하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서울고법은 2009년 9월 강씨가 유서를 대필한 것으로 볼 수 없다며 재심 결정을 내렸으나 검찰이 항고해 2년10개월째 대법원 심리가 진행중이다. 변호인단은 ‘강씨가 간암수술 후 합병증으로 건강상태가 나빠지고 있어 제대로 법정에 서기 어려운 상황이 올 수 있으니 재심개시 여부를 빨리 결정해달라‘는 취지의 의견을 냈다.
1991년 5월8일, 서강대 본관 5층 옥상에서 김기설 전민련 사회부장이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분신한 뒤 투신자살했다. 노태우정권 말기 당시 정권의 실정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에 대한 정권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도 끝간 데를 몰랐다. 현장에서 두 장의 유서가 발견됐다. 검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필적감정을 근거로 유서 글씨가 강기훈 전민련 총무부장의 것이라며 강씨를 자살방조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법원은 기소 내용을 인정해 3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강씨는 3년을 복역한 뒤 1994년 만기 출소했다. 13년이 지난 뒤에야 진실의 실마리가 풀렸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어렵게 확보한 김씨의 낙서장을 사설 필체감정원에 의뢰해 김씨와 강씨의 필체가 다르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진실화해위는 .2007년 11월 이를 토대로 국가에 사과와 재심을 권고했다. 강씨는 2008년 1월 재심을 청구했고 서울고등법원은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뒤이어 검찰의 항고가 이어졌고, 대법원은 3년째 ‘꿀먹은 벙어리’처럼 심리중이라며 미적거리고 있다.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이 ‘한국의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이유는 두 사건에 유사점이 많기 때문이다. 강기훈 사건이 일어나기 100년 전인 1894년 10월. 프랑스의 육군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독일 대사관에 군사정보를 팔았다는 혐의로 체포됐다. 파리의 독일 대사관에서 몰래 빼내온 편지봉투 안에 육군 기밀을 담고 있는 명세서의 필적이 드레퓌스의 필적과 일치한다는 이유였다. 드레퓌스는 유태인이었다. 드레퓌스는 유죄판결을 받아 종신유배형을 받았다.
강기훈과 드레퓌스는 종이 몇장이 사건의 발단이었다는 점에서 형식상 비슷하다. 강기훈은 친구인 김기설의 유서, 드레퓌스는 군사기밀이 적혀 있다는 명세서가 발단이었다. 강기훈과 드레퓌스는 똑같이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유서와 명세서를 자신이 작성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필적이 같다는 것 외에는 다른 물증은 없었다. 필적 감정 결과는 이후 거짓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강기훈은 자살방조 혐의로, 드레퓌스는 반역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강기훈은 여기에 이적표현물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혐의가 추가됐다.
강기훈과 드레퓌스가 당시 주류사회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았다는 점도 비슷하다. 강기훈은 젊은 청년으로 전민련 총무부장으로 일하면서 민주화운동에 매진했다. 당시 군사정권은 정권유지를 위해 민주화운동 세력을 ‘좌파’로 몰아 탄압했다. 재야인사와 청년학생들은 감옥을 제 집처럼 드나들어야 했다. 당시 민주화운동 진영은 집권세력과 보수언론에 의해 ‘사회주의 혁명 세력’으로, 북한의 사주를 받는 ‘주사파’로 매도됐다.
드레퓌스는 육군 대위로 성실하게 복무하고 있었으나 유태인이라는 점이 유죄 판결의 근본 이유였다. 프랑스는 유태인 차별 법률을 폐지했지만 오래된 편견은 프랑스인들 뇌리 속에 그대로 자리잡고 있었다. 군부는 노골적으로 유태인을 차별했고 사회전반의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참모본부에서 드레퓌스를 용의자로 지목한 인물들은 악명높은 반유태주의자였다. 반유태주의자들은 유태계 프랑스인을 진정한 프랑스인으로 간주하려 들지 않고 잠재적 반역자로 간주했다. 
강기훈 사건과 드레퓌스 사건을 다룬 한국 검찰과 프랑스 군의 태도는 크게 다를 바 없다. 강기훈 사건의 경우 재야단체와 변호인단이 검찰의 증거조작 의혹을 끊임없이 제기했으나 검찰은 철저하게 묵살했다. 드레퓌스 사건의 경우 프랑스 군은 진범이 확인됐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새로운 증거를 조작했다가 들통이 나기도 했다.
한국 검찰은 강기훈 사건에 대해 처음부터 배후가 있다는 단정 하에 수사를 시작했다. 검찰은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김기설의 집과 동사무소, 김기설이 근무했던 군 부대에 찾아가 필적을 입수했다. 김기설의 유서가 대필되었다는 예단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김기설이 작성한 전민련 수첩 등은 조작됐다는 판단을 내리고 대부분의 필적들은 은폐했다. 검찰은  강기훈 사건을 민주화운동 진영의 도덕성을 파멸시키려는 의도로 활용했다. 검찰은 논고에서 강기훈에게 "목적을 위해서는 동료의 생명까지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하는 좌경혁명 분자"로 규정했다.

강기훈 씨. ©서울신문

드레퓌스를 반역죄로 몰아갔던 프랑스 군부도 증거를 조작하거나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프랑스 육군 참모본부는 명세서를 만든 사람을 가까이 있는 인물로 단정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참모본부는 드레퓌스 대위의 필체가 명세서의 글씨와 유사했다는 이유로 반역죄로 군법회의에 고발했다. 드레퓌스를 스파이로 만들기 위해서 명세서의 글씨와 드레퓌스의 필체에 대해 실시한 여러 가지 필적감정 결과 중 유리한 감정결과만 취하고 나머지는 묵살했다.  드레퓌스와 전혀 상관없는 첩보문서들을 드레퓌스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조작했다. 재판과정에서는 드레퓌스에게 불리한 비밀자료를 판사들에게만 불법적으로 전달했다. 재판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강기훈 사건과 드레퓌스 사건의 재판부는 검찰의 기소 내용을 거의 그대로 인정했다. 한국의 1심, 2심, 대법원은 모두 강기훈의 자살방조 혐의를 인정해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 6월을 선고했다. 법원은 "확실한 심증을 형성하지 못했다"며 판결의 한계를 시인하면서도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판단하라는 증거재판주의의 기본원칙을 법원 스스로 파괴했다.


드레퓌스의 경우 비공개 재판은 물론이려니와 두 번째 재판에서도 유죄 판결을 받아야 했다. 프랑스 지식인들의 반발로 대통령이 특별사면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드레퓌스는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뒤에 재심 청구를 해서 마침내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1894년 12월. 비공개로 치러진 군법회의는 만장일치로 드레퓌스의 유죄를 선고하고 종신 유배형과 공개적인 군적 박탈형에 처했다. 재판장은 드레퓌스가 불법적 증거들에 대해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재판을 끝냈다.


드레퓌스는 1904년 3월 재심을 청구했고 1906년 7월 12일에 대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비로소 막을 내렸다. 드레퓌스는 후에 육군 소령 계급장과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에 전투에 두 번 참가한 뒤 1935년 7월 11일 병으로 고생하다 세상을 떠났다.


두 사건을 다룬 언론보도는 유사한 특성을 지녔다. 일부 언론이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사실보도를 통해 여론을 환기시켰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문은 추측보도를 남발했고 검찰과 군의 발표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했을 뿐이다.


드레퓌스 사건이 일어나자 프랑스 신문들은 온갖 추측보도를 남발했다. 신문들은 정확한 증거를 찾기는 커녕 드레퓌스를 헐뜯는 기사로 도배했다. 말도 안 되는 뜬 소문이 버젓이 신문지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유태인이 스파이 행위를 했다는 혐의를 받았으니 반유태주의자들의 항의는 거셌다. ‘유태인이니 당연하다’든지 ‘사형에 처해야 한다’ 는 등의 기사가 잇따라 신문에  게재되기도 했다.


강기훈 사건과 관련된 한국 언론의 보도태도도 비슷하다. 보수언론들은 “민주화운동 세력은 ‘유서까지 대신 써주며 죽음을 부추긴 세력’이라는 검찰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썼다. 언론은 한 술 더 떠서 "재야에 자살 특공대가 있다는 풍설이 오래 전부터 나돌았다", "분신에 협력자가 있었을까?", "분신자살조, 사실일까?" 등 선동적인 기사를 써댔다. 1994년 박홍 서강대 총장의 ‘주사파 배후에 김정일이 있다’ 발언 이후 일부 신문의 논조는 더욱 가관이었다. ‘조선일보’는 그를 ‘용기 있는 지식인’으로 칭송했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다. 드레퓌스 사건은 유럽 지성사를 뒤흔든 역사적 사건으로 프랑스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반면 강기훈 사건은 아직 한국 지식인 사회의 관심에서 비껴나 있다. 프랑스에는 드레퓌스의 동상이 서 있지만, 강기훈은 아직도 어려운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드레퓌스는 12년 만에 무죄가 확정된 뒤 예전의 직장으로 돌아가 진급도 하고 훈장도 받았다. 그러나 강기훈은 18년 만에야 비로소 법원으로부터 재심개시 결정을 받았다. 그러나 검찰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즉시 항고를 제기했다.


지식인 사회의 모습도 크게 달랐다.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지식인 사회가 성취한 양심의 승리이자, 진실의 승리였다. 당대 최고의 작가였던 에밀 졸라의 눈부신 활약과 정치인 조르주 클레망소 등의 헌신적인 활동은 온갖 위협 속에서도 끈질기게 이어졌다. 반면 강기훈 사건에 대한 한국 지식인들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졸라처럼 자신에게 닥쳐올 온갖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양심선언을 한 지식인을 찾아보기 어렵다. 독재권력의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자살이라는 극한적 투쟁을 택한 젊은 청년들을 매도하는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에밀 졸라는 1898년 1월 13일 언론사상 가장 유명한 양심선언인 ‘나는 고발한다’ 라는 논설을 ‘로로르’지에 게재했다. 졸라는 이 격문을 발표하기 전에 보수신문 ‘르 피가로’에 드레퓌스 관련 글을 발표했다. 그러나 독자들이 구독해지 운동을 펼치며 압력을 가해 신문사 편집진은 졸라의 글을 싣지 못했다. 졸라는 ‘청년들에게 보내는 편지’ ‘프랑스에 보내는 편지’ 등을 팸플릿으로 제작해 판매해야만 했다. 졸라는 드레퓌스를 죄인으로 만들어 참모본부의 잘못을 감추려 한 장군들과 엉터리 증언을 한 필적감정 전문가, 드레퓌스에게 유죄를 선고한 군사재판을 꾸짖었다.


"크나큰 고통을 겪어 이제는 행복해질 권리가 있는 인류의 이름으로 진실의 빛을 밝히는 것, 그것이 단 하나뿐인 나의 정열입니다. 불타오르는 나의 항변은 내 영혼의 외침일 뿐입니다. 나를 중죄 재판소에 고발한다 해도, 백일하에 나를 심판한다 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 논설은 유태인에 대한 반감이 퍼져 있던 프랑스 사회를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다. "졸라를 죽여라!" "유태인을 죽여라!" 따위의 구호를 외치면서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프랑스 의회는 졸라를 기소했고 베르사이유 중죄재판소는 1898년 7월 졸라에게 징역 1년에 벌금 3,000프랑을 선고했다. 선고 당일 졸라는 영국 런던으로 망명했다. 선고 며칠 후 프랑스 정부는 레지옹 도뇌르 수훈자 자격도 박탈했다. 졸라는 1899년 6월 돌아왔으나, 불과 3년 뒤인 1902년 9월 29일 가스중독 사고로 사망했다. 계획된 살인이라는 이야기도 떠돌았지만 분명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졸라는 드레퓌스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 ‘진실’을 쓰기 시작했지만 끝내지 못했다.


당시 한국의 서강대 총장이었던 박홍은 “김씨 등의 잇따른 분신을 보며 우리사회에는 젊은이들에게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는 음흉한 세력들이 분명히 있다”며 “이 모든 세력을 없애는 데 함께 일어나야 한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박홍은 구체적인 실례를 들지 않았다. 하지만 발언 앞뒤를 보면 조직적으로 분신을 추진하는 세력이 있으며, 이들의 정체를 밝혀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박홍의 근거 없는 선동에 맞춰 검찰은 "분신자살을 배후에서 조직적으로 부추기는 세력이 있을 것"이라며  수사에 착수했다.


노태우 정권은 당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민주화운동 세력의 도덕성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정권차원에서 마련한 기획이었다. 민주화운동을 요구하는 분신이 이어지자 보수세력들 사이에서는 ‘운동권에서 제비뽑기를 통해 분신자를 선택한다느니’, ‘배후가 있다느니’ 하는 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대학총장이자 성직자인 박홍이 정권의 의도에 동조함으로써 민주화운동 세력의 도덕성에 흠집을 가하려 한 것이다. 강기훈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재심여부 결정이 게속 미뤄지고 있는데도 한국 지식인 사회의 반응은 아직 크지 않다.


유서대필 사건은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분신의 배후를 찾으려던 노태우 정권의 유령 찾기가 빚어낸 마녀사냥이었다. 이로 인해 강기훈은 정신적 고통은 물론이려니와 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앞으로 강기훈이 재심이 결정돼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아 국가로부터 금전적 보상을 받더라도 20여년 동안 그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국가폭력은 정당화할 수 없다. 대법원이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 지, 재심이 시작되면 어떤 판결이 내려질 지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용기있는 양심적 지식인들이 어떤 활동을 벌일 지 기대해 본다. 드레퓌스 사건이 결국엔 진실과 정의가 승리하게 된 데에는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굴하지 않는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주언·언론인 | newmedia54@hanmail.net  

2012년 7월 18일 수요일

진실에 이르는 문은 하나가 아니다


이글은 대자보 2012-07-17일자 기사 '진실에 이르는 문은 하나가 아니다'를 퍼왔습니다.
용산참사를 이해하는 세 개의 문,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에 기여한 영화

영화 ‘두 개의 문’은 알려진 대로 그동안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거나 가해자 편으로 치부되었던 현장 경찰특공대의 시선으로 용산 참사를 재구성하려고 노력한다. 촛불시위에 데인 후 이명박 정부가 공언한 무관용 원칙에 장단을 맞추고 출세욕와 공명심에 눈이 멀어, 테러범 잡는 데나 쓰이는 경찰 특공대를 농성 철거민 ‘섬멸’을 위해 투입하면서 진압에 필요한 기초 정보도 안주고 사지로 몰아넣었던 경찰 수뇌부의 악행이 두드러질수록, 말단 경찰들의 처지는 연민과 공감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영화는 가해자 격인 국가권력의 말단 하수인으로 치부되었거나, 도심 테러리스트들을 진압하다 사망한 영웅들이라는 극단의 평가에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어느 누구의 관심도 미치지 못했던 현장의 경찰 특공대도 결국은 피해자라는 결론에 이른다. 하긴 그들은 명령을 충실히 따르도록 자동으로 입력된 기계가 되기를 강요받은 이들이다. 간첩이나 테러 진압 훈련만 받은 그들 눈앞의 존재들은 ‘진압’이 아닌 때려 부숴야 할 ‘섬멸’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특공대에서 사망자도 나왔으니 이들을 국가공권력과 같은 편으로 분류할 수도 없게 되었다.

특공대원들이, 농성자들이 특공대를 향해 부르짖었던 “다 죽어”라는 말이, 당시에는 살상도 마다지 않겠다는 적개심에 불타던 말로 들렸지만 지나고 보니 진압하지 말라는 요청이 아니었을까라고 의문을 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잔인한 국가 폭력의 말단에 머물러 있지 않다. 물론 여기까지는 많은 이들이 말한 내용들이다. 

영화가, 경찰 특공대원들이 현장 철거민들과 함께 국가폭력의 희생자에 속한다는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그것도 영화적 상상력이 아닌 수천 쪽에 이르는 수사나 재판 기록을 통해 진실에 육박하려는 노력은 리얼리즘으로 충만한 다큐멘터리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 내게는 영화가 주제를 풀어내는 방식이 다분히 설교적으로도 들리기도 했다. 영화 자체의 문법에 의지하지 않는 방식은 영화와의 틈을 벌어지게 만든다. 인터뷰 대상자들이 누누이 강조한, 말단 경찰들은 진실을 말했다거나, 특공대원들은 진압 현장에서 지옥을 보았다고 했으니 엄청난 후유증과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것이라는 말을 통해서 강조하는 식의 직설적이거나 관객을 가르치려는 주제 전달 방식은 마뜩하지 않다. 변호사나 대책위 관계자 등 굳이 ‘우리’ 편이 관객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 않아도 건조한 수사나 재판 기록으로도 진실에 닿는 것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말단 경찰도 피해자더라는 깨달음은 별스러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특공대의 증언대로 말단 경찰이 상부의 지시대로 따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진압 현장에서 농성자들과 함께 사망자도 나왔다.

오히려 내 마음을 끌어당긴 것은 영화가 의도하지 않거나 강조하지 않았던 것들에 있다. 용산참사의 진실에 접근하는 길은 유가족이나 대책위의 절규일 수도 있고, 생각 없는 기계로 길들여져 공권력의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경찰 특공대의 시각이나 진술일 수도 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편이 될 수 없는 자들의 목소리일 수도 있다. 이 세 번째 경우를 얻은 것이 영화에서 발견한 수확이었다. 

영화가 찾은 재판 기록 중, 재판 도중 검찰이 증인으로 출석한 특공대 제1제대장에게 질문하는 것이 있다. 경찰이 농성자 진압을 위해 컨테이너를 2대 동원했다면 특공대가 (사망자를 내지 않고) 더 안전했을 것이라는 증인의 진술에 대해, 검찰은 컨테이너가 1대가 아닌 2대였다면 특공대의 입장이 아닌 농성자들의 처지에서도 안전했겠냐고 묻는다. 특공대도 아닌 농성자의 시각에서 뜬금없이 질문하니, 증인이 질문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변호사가 질문을 이해하기 쉽게 거들어 준다. 망루에서 살아남은 농성자들에게 결국은 유죄를 때리고 마는, 농성자들의 편을 들어줄 리가 없는 검찰의 입에서 농성자의 안전을 생각하는 질문이 나온 것은 의아한 장면이었다. 

‘우리’ 편이 아닌 검찰 자신도 의도했을 것 같지 않은 태도가 영화를 비집고 나오면서, 영화는 결국 농성자들의 명예회복과 정당성에 힘을 두텁게 실어주는 결론으로 치달았다. 그 위치상 농성자들의 ‘적’으로 결코 치부할 수 없는 말단 경찰의 시선과 입을 통하기보다, 명백한 ‘적’을 통해서 농성자들의 도덕적 정당성을 훨씬 더 굳건하게 입증해 준 것이다. 

당사자 유가족이든, 말단경찰이든, 공권력의 협력자인 검찰이든, 진실에 이르는 과정이 꼭 하나의 문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영화 ‘두 개의 문’이 갖고 있는 문은 세 개 쯤 된다. ‘두 개의 문’은 피해자나 넓은 의미의 피해자가 아닌 움직일 수 없는 가해자의 입을 통해서 용산참사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기여하는 영화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로 [한국문학의 거짓말- 2000년대 초기 문학 환경에 대한 집중 조명](작가와 비평, 2011)의 저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