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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8일 일요일

강기훈 재심 결정, 대법원의 비겁한 타협


이글은 한겨레21 2012-10-29일자 제933호 기사 '강기훈 재심 결정, 대법원의 비겁한 타협'을 퍼왔습니다.
[초점] 사건 발생 21년, 유죄 확정 20년 만에 서울고법에서 재심… 대법원, 새로운 증거물 증거능력은 부정하고 국과수 문서감정인들의 허위 증언만 문제 삼아

» 강기훈은 아프다. 지난 5월 간암 수술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재심을 보지 못하고 2008년 간암으로 별세했다. 그의 어머니도 2010년 간암으로 별세했다. 지난 7월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강씨. 유리창에 비친 나뭇잎이 겹쳐 흔들린다. 한겨레 강재훈

일단 이 이름들을 적고 시작하자. 대법관 양창수, 대법관 고영한, 대법관 박병대, 대법관 김창석. 이들이 사건 접수 3년1개월여 만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내놓은 A4용지 28장짜리 결정문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최고 법관이라는 이들이 온전히 책임져야 할 내용이다.

1991년 27살, 지난 5월 간 수술

2012년 10월19일 금요일 오후 6시20분. 대법원1부(주심 양창수 대법관)는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의 재심을 결정한다고 ‘돌연’ 밝혔다. 앞서 2009년 9월 서울고법은 새로운 증거를 바탕으로 강씨의 무죄 가능성을 강하게 내비치는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검찰은 곧바로 146쪽에 이르는 즉시항고 이유서를 써서 대법원에 제출했다. 곧 결론이 나리라 예상된 대법원의 재심 개시 결정은, 그러나 해를 넘기고 넘겨 3년 넘게 끌었고 대법원 국정감사(10월23일)를 나흘 앞둔, 그것도 주말로 넘어가는 금요일 저녁에야 갑작스레 발표됐다. 서울고법이 인정한 재심 개시 사유 가운데 물적 증거는 부정하고, 일부 허위 증언만을 인정해 재심을 받아들인 타협적인 결정이었다. 간암에 걸린 강씨는 지난 5월 간의 절반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강씨에게 무죄를 다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대법원이 미적거리고 있다는 비판 여론이 거셌다.
유서 대필 사건을 복기해보자. 1991년 강기훈씨는 27살이었다. 그해 4월 명지대생 강경대씨가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졌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이던 김기설(당시 25)씨가 이에 항의하며 유서를 남기고 분신해 숨졌다. 전민련 총무부장이던 강씨는 김씨의 유서를 대필해줬다는 혐의(자살방조) 등으로 구속 기소됐다. 당시 노태우 정권은 ‘민주화운동을 하는 이들이 유서까지 대신 써주며 분신을 종용했다’고 몰아갔다. 대법원은 이듬해 강씨에게 징역 3년을 확정했다. 강씨는 1심 재판 때부터 줄곧 유서 대필을 부정했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던 이 사건은 2007년 11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국가에 재심을 권고하기로 결정해 다시 한번 뜨거운 진실 공방을 벌이게 됐다. 당시 진실화해위는 “분신 자살한 김기설씨의 필적이 담긴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노트’와 ‘낙서장’을 새로 발견해, 검찰과 경찰청에서 제출받은 사건 자료·증거물과 함께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및 7개 사설 감정기관에 필적 감정을 의뢰했다. 모든 기관에서 유서의 필적은 유서 대필 혐의를 받았던 강기훈씨의 필적과 상이하고 김기설씨 본인의 필적이라는 감정 결과를 통보받았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는 또 1991년 수사 당시 국과수가 필적 감정을 문서감정인 한 명에게만 맡기고도 여러 명이 공동으로 감정한 것처럼 법정에서 허위로 증언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2009년 서울고법은 이런 진실화해위의 조사 내용을 근거로 한 강씨의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다. 반면 1991년 강씨를 기소했던 검찰은 146쪽이나 되는 이례적인 항고이유서를 대법원에 제출하며 재심 결정이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새로 발견된 전대협 노트 등은 김씨 사후에 강기훈씨 등이 조작했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제는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습니다”

대법원은 이번 재심 개시 결정문의 상당 부분을 전대협 노트 등 새로운 증거물에 바탕한 필적 감정의 증거능력을 부정하는 데 할애했다. 무죄를 강하게 추정한 서울고법이 재심 개시 사유로 삼았던 주요 근거를 송두리째 부정한 셈이다. 대법원은 진실화해위·서울고법과 달리 △전대협 노트 등이 뒤늦게 발견되고 보관된 경위를 둘러싼 관계자의 진술 내용에 여러 의문점이 남아 있으며 △진실화해위가 한 필적 감정은 김기설의 필적이라는 예단을 가지고 진행된 것으로 의심된다고 설명했다. 대신 대법원은 “국과수 소속 문서감정인들이 허위 증언을 한 사실이 증명됐다”며, 증언 부분만을 문제 삼아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사건 발생 21년, 유죄 확정 20년 만에 서울고법에서 진행될 강기훈씨 재심의 핵심 쟁점 역시 ‘전대협 노트’와 ‘낙서장’의 진실 여부를 가리는 데 모아질 것으로 보인다.
1991년부터 20년 넘게 강씨를 변호해온 이석태 변호사는 “재심 개시 결정은 반갑지만 타협적인 부분은 유감스럽다”고 했다. 이 변호사는 “진실화해위의 필적 감정보다 1991년 수사 당시 위증을 해가면서 이뤄진 필적 감정이 우월하다는 대법원의 판단은 인정할 수 없다”며 “필적 감정에 대한 예단 역시 2007년 진실화해위 때보다 1991년이 더 심했을 것”이라고 했다.
강기훈씨는 대법원 재심 개시 결정 뒤 “그동안 검찰이 주장한 것처럼 자신들이 정말 그 당시 잘했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지금도 정말로 확신하는 것인지, 알면서도 필요에 따라 고집하는 것인지 몰라도, 이제는 (검찰이)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다”며 “재심 재판(의 결과)보다 내게는 검찰의 사과와 반성이 더 절실하다”고 말했다.
진실 여부는 재심에서 가려지더라도,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 자체는 검찰과 사법부를 수렁으로 끌어들이기에 충분한 폭발력을 가지고 있다. 1960~80년대 횡행한 고문조작 사건들은 주로 중앙정보부나 경찰이 주도한 경우가 많았다. 수사 자체가 부실했던 탓에 남아 있는 수사 기록이나 증거도 별로 없다. 오래되다 보니 수사나 재판을 맡았던 이들도 세상을 떠난 경우가 많다. 반면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은 1987년 민주화 이후, 노태우 정권 말기인 1991년에 터졌다. 검찰과 사법부로서는 서슬 퍼런 군사독재를 핑계로 자신들의 어두운 과거사를 덮어버릴 수 없는 시기다. 수사·공판 기록도 대부분 남아 있다. 수사를 했던 주임검사부터 유죄를 확정했던 대법관들까지 대부분 생존해 있다. 검찰과 사법부는 사실상 한배를 탄 셈이다. 재심에서 강기훈씨의 자살방조 혐의가 무죄로 나온다면 수사·기소를 맡았던 검찰과 1·2심, 대법원까지 줄곧 유죄를 선고했던 사법부는 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검찰 몫 대법관, 헌법재판소장…

여기에 그 이름들을 다시 적어둔다. 서울지검 강력부장 강신욱, 주임검사 신상규, 검사 안종택. 강기훈 구속 기소, 징역 7년 구형. 1991년 12월 서울형사지법 징역 3년 선고. 재판장 노원욱, 판사 정일성·이영대. 1992년 3월 서울고법 항소 기각. 재판장 임대화, 판사 윤석종·부구욱. 1992년 7월 대법원 유죄 확정. 대법관 김상원·박우동·윤영철·박만호. (부장검사 강신욱은 2000년 검찰 몫으로 대법관이 됐다. 주임검사 신상규는 2009년 고검장까지 올랐다. 대법관 윤영철은 2000년 헌법재판소장이 됐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2012년 10월 22일 월요일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진실, 이제 밝혀지나


이글은 프레시안 2012-10-21일자 기사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진실, 이제 밝혀지나'를 퍼왔습니다.
대법원, 사건 재심 개시 결정…'조작의심' 검사들 이력도 논란

대법원이 19일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린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의 재심 개시를 결정해 이 사건에 다시금 여론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로써 학생운동권 몰락에 결정타가 됐던 이 사건이, 실은 당시 공권력의 조작이었다는 주장이 더 힘을 받게 됐다. 아울러 당시 사건을 지휘해 강기훈 씨(48)를 범죄자로 내 몬 인물 중 상당수가 현재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 측 캠프 인사라는 점도 여론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먹칠 당한 청년들의 죽음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지난 1991년 5월 8일, 서강대 건물 옥상에서 자신의 몸에 시너를 끼얹고 뛰어내려 자살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씨의 유서를 당시 전민련 총무부장이었던 강기훈 씨가 대신 써줘 자살을 방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야 단체의 도움으로 명동성당에 피신해 있던 강 씨는 이 해 6월 24일 검찰에 자진출두해 구속됐다. 결국 검찰은 8월 12일 강 씨에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추가하기까지 했다.

오랜 시일이 걸린 싸움 끝에 법원은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여, 강 씨에게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 6개월을 선고했으며, 강 씨는 1994년 8월 17일 만기출소했다.

이 사건이 발생한 1991년은 노태우 정권 후반기로, 사회에 큰 변화의 바람이 불던 때였다. 국제노동기구(ILO)에 가입함으로써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자는 목소리가 가장 크게 울릴 때였고, 3당 합당으로 민주화 정신이 퇴색했다는 국민들의 비판이 빗발칠 때이기도 했다.

부동산 투기열풍이 과열돼 빈부격차가 커지기 시작했고, 수서지구 특혜분양과 잇따른 국회의원 내물 사건으로 사회 지도층에 대한 성토의 목소리가 높았다. 국가보안법과 경찰법 날치기 사건과 잇따른 노동운동, 통일운동 탄압은 정권 말기 '공안 정국'을 조성했다.

특히 학생들이 잇따른 죽음으로 인해 민주화 요구가 크게 힘을 받던 때였다. '5월 민주화 시위'로 불리는 당시 운동 사태를 촉발시킨 건 강경대 쇠파이프 치사사건이었다. 4월 26일 당시 명지대에 재학 중이던 강경대 씨가 총학생회장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 도중 경찰의 무차별 구타로 사망하면서 노태우 정권을 규탄하는 목소리는 극에 달했다.

4월 29일 전남대 학생 방승희 씨가 강경대 사건 규탄집회 도중 분신했고, 5월 1일 안동대 학생 김영균, 5월 3일 경원대 학생 천세용, 5월 10일 노동자 윤용하 등이 연달아 분신해 이른바 '분신정국'이 조성됐다. 약 두 달 간 13명이 사망했고 2300회가 넘는 집회가 열렸다. 김기설 씨의 죽음도 이 과정에서 일어났다.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는 김지하 시인의 글이 파문을 일으킬 때가 바로 이 당시다.

이 시기에 일어난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학생운동에 대한 지지를 무너뜨리는 결정적 계기였다. 학생들의 죽음이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일부 세력'의 선동에 따른 것이라는 의혹이 커지면서 정부에 대한 불만은 오히려 학생운동을 규탄하는 흐름으로 변했다. 반정부 시위로 인해 위기에 몰렸던 정부가 민주화 세력을 꺾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1991년 5월8일 서강대 건물 옥상에서 전민련 사회국 부장 김기설 씨가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분신하자 검찰이 김씨의 전민련 동료였던 강기훈(48)씨가 유서를 대신 써주며 자살을 방조했다고 기소한 사건이다. 사진은 필적 감정 분석자료. ⓒ연합뉴스

이번엔 진실 밝혀질까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 재조명되기 시작한 때는 사건 16년 뒤인 지난 2007년이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는 분신한 김 씨의 낙서장을 확보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사설 필체감정원 7곳에 필체 감정을 의뢰했고, 이 결과 두 사람의 필체가 다르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과거사위는 이를 근거로 국가에 사과와 함께 재심을 권고했다. 강 씨는 2008년 1월 재심을 청구했고, 서울고등법원은 2009년 9월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검찰이 즉시 항고해 지난 3년 간 대법원 심리가 진행됐으며, 이제야 재심 개시가 결정됐다.

대법원 재판부는 강씨의 유죄 근거가 된 필적 감정결과에 대해 "재심대상 판결 당시 국과수 소속 문서감정인들의 증언 중 일부가 허위임이 증명됐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형사소송법 438조 1항에 의해 서울고법에서 재심소송 절차가 진행돼, 유무죄 여부를 다시 판단하게 된다.

▲1991년 6월 22일, 당시 농성중이던 명동성당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검찰에 자진출두하겠다고 말하는 강기훈씨. ⓒ연합뉴스

가해자와 피해자, 엇갈린 인생 역정

주목할 만한 사실은 당시 사건 관계자들의 엇갈린 삶의 역정이다. 억울한 옥살이까지 치르고 폭압적 정부에 의해 가해자로 둔갑한 희생자 강기훈 씨는 현재 간암으로 투병 중이다. 강씨의 변호를 맡은 송상교 변호사는 (뉴스타파)와 인터뷰에서 "(강 씨의) 마지막 소원이 법정에서 단 한번이라도 자신이 얼마나 억울한지, 자신의 진실을 한 번쯤 호소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강 씨를 파렴치한으로 내 몬 당시 검사 중 상당수는 지금도 권력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다. 특히 상당수가 당시 학생운동 세력과 대척점에 섰던 3당 합당 정당의 후신인 새누리당 소속이며, 박근혜 후보의 측근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당시 9명의 검사 중 김기춘 검사는 현재 박근혜 후보의 측근인 '7인회' 멤버다. 강신욱 당시 강력부장은 대법관을 지낸 후 2007년 박근혜 대선캠프에서 법률지원특보단장을 지냈다.

광상도 검사는 박근혜 후보의 '싱크탱크'로 알려진 국가미래연구원 발기인에 참여했다. 윤석만 검사는 올해 대전지역에서 새누리당 예비후보로 출마했으며, 현재 박 후보를 지지하는 외곽 조직에 있다. 임철 검사는 2008년 총선 당시 한나라당 후보로 나섰다. 

남기춘 검사는 박근혜 캠프에서 클린검증 소위원장을 맡았고 현재는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남 검사는 지난 19일 (뉴스1)과의 통화에서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에 대해 "수사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대희 기자 

2012년 10월 20일 토요일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21년만에 재심 결정


이글은 뷰스앤뉴스(Views&News) 2012-10-19일자 기사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21년만에 재심 결정'을 퍼왔습니다.
"문서감정인 증언 중 일부가 허위로 드러나"

대법원 1부(주심 양창수 대법관)는 지난 1991년 당시의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에 대해 19일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대법원은 이날 서울고등법원의 재심 개시 결정에 대한 검찰의 즉시항고를 기각했다고 밝혔다.

이로써 강기훈(48)씨 사건은 형사소송법 438조 1항에 의해 서울고법에서 재심소송 절차가 진행돼 유무죄 여부를 다시 판단하게 된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1991년 5월8일 서강대 건물 옥상에서 전민련 사회국 부장 김기설씨가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분신자살하자 검찰이 김씨의 동료이던 강기훈 당시 전민련 총무부장이 유서를 대신 써줘 자살을 방조했다며 기소한 사건이다.

검찰은 당시 기소의 결정적 근거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 감정 결과를 제시했으며, 강씨는 징역 3년이 확정된 후 만기 출소했다.

대법원 재판부는 강씨의 유죄 근거가 된 필적 감정결과에 대해 "재심대상 판결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소속 문서감정인들의 증언 중 일부가 허위임이 증명됐다"고 밝혔다.

필적감정을 담당한 국과수 소속 감정인 김모씨와 양모씨는 재판에서 자신들을 포함해 4명이 돌아가면서 현미경 장비를 이용해 여러 차례 강씨의 필적자료와 유서를 세심히 비교 관찰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과정에서 김씨, 양씨 외에 다른 두 명의 감정인들은 "김씨가 대부분 감정을 진행했고 자신들은 공동심의란에 서명한 것이 전부"라고 진술, 결국 김씨와 양씨의 증언이 허위로 드러났다.

재판부는 따라서 강씨의 재심 청구에 대해 "유죄를 인정할 만한 다른 증거 유무에 관계없이 허위 증언이 증명된 이상 형사소송법 420조 2호에 따라 소정의 재심사유가 있다고 본 원심 판결은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강씨의 유서 대필 자체에 대해서는 국과수 감정결과와 진실화해위원회가 의뢰한 감정결과가 엇갈리는 만큼 판단을 보류했다.

재판부는 "`유서가 김기설씨의 필적과 동일하고 강씨의 필적으로 볼 수 없다'는 진실화해위원회의 감정의뢰 결과는 신빙성을 부여하거나 증거가치가 확실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면서 "이 감정의뢰 결과가 종전 국과수 감정결과보다 현저히 우월한 증거가치가 있다고 본 원심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앞서 강씨는 `유서를 대필하지 않았다'는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 규명 결정에 따라 2008년 1월 재심을 청구했다.

서울고법이 2009년 9월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지만 검찰이 즉시항고함에 따라 지난 3년1개월간 대법원 심리가 진행돼 왔다.

강씨의 변호인단은 재심 청구서에서 "법원이 자살방조와 국가보안법 위반 등 강씨 혐의를 모두 인정했으나 이 가운데 자살방조 혐의는 잘못된 증거와 증언에 기초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재심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연합뉴스

2012년 9월 21일 금요일

‘한국의 드레퓌스’, 유서대필 조작사건


이글은 대자보 2012-09-21일자 기사 '‘한국의 드레퓌스’, 유서대필 조작사건'을 퍼왔습니다. 
[우리의 주장] 대법원은 즉각적으로 ‘유서대필 조작사건’ 재심 개시하라

“수사 당시 검찰은 적어도 스스로 의도적으로 은폐한 각종 필적 자료와 세 사람이 작성한 업무일지가 한 사람이 쓴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사건을 종결하고 수사를 그만두었어야 했다. 지금은 대법관이 된 강신욱 검사와 실무 총책임자였던 신상규 검사는 적어도 이미 1991년 6월말 경 검찰청 11층 조사실에서 ‘좀 무리는 있지만 여하간 한번 해보자(재판을 하자)’고 말했을 정도로 내 무고함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재판에서 검찰의 주장이 이길 것이라는 확신도 동시에 갖고 있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만큼은 아니어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 감정서’가 있는 한 무고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쯤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국의 드레퓌스’로 불리는 강기훈씨가 ‘유서대필 조작사건’에 대해 자신의 불로그에 쓴 글 중의 일부이다. 

1991년 5월8일. 김기설씨의 분신사건 이후 함께 일하던 동료의 자살을 도와주었다는 ‘오명’을 뒤집어쓴 강기훈씨. 금세 밝혀질 것 같았던 유서대필 사건의 진상은 구속, 수사, 재판, 대법원의 유죄확정 판결로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는 김기설씨 분신전후의 정황과 각종 증거, 경찰과 검찰의 수사기록, 법원의 재판 관련 서류 등을 검토해 법원에 재심을 권고했다. 고등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2008년 무죄취지의 재심결정을 내렸다. 검찰은 이례적으로 항고해 대법원으로 넘겨졌다. 3년이 훨씬 지난 현재까지 대법원은 특별한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결정을 미루고 있다.

▲ 1991년 당시 고 김기설 씨가 남긴 유서와 강기훈 씨의 자술서 ©CBS노컷뉴스

21년 동안 고통과 분노를 감내하면서 한 순간도 용납하기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강기훈씨. 사실이 확연히 드러날 희망에 대한 기약도 없이 흘러온 세월의 무게에 지쳐갔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현재 간암으로 투병중이다. 지난해 간경화가 확인됐으나 올해 들어 간암으로 악화했다. 강 씨는 지난 4월 암세포 제거 수술을 받았으나 수술부작용으로 폐수종이 발병해 아직 항암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비상식적이고 비정상적인 상태가 지속되면서 얻은 마음의 병이 육체의 병으로 확대됐다. 국가폭력에 의해 마음의 병과 육체의 병을 얻은 강씨가 어려운 삶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추악하고 부끄러운 역사를 간직한 검찰과 사법부는 역사의 멍에를 집어던질 의지가 없다. 검찰의 조작과 증거 은폐,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엉터리 필적 감정, 사법부의 한심한 판결 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도 민주적 절차에 의해 사건이 마무리된 것처럼 주장한다. 정권의 안위를 위해 무고한 개인을 허위와 거짓의 덩어리로 덮어씌운 자들은 아직도 한 치의 반성도 없다. 게다가 당시 수사검사들은 대법관으로, 특수부장으로, 지청장 등으로 승승장구했다. 수사검사의 상당수가 새누리당(한나라당)에 이력을 남겼다.

▲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과 관련한 당시의 언론보도 ©<미디어오늘>
김기춘 검사는 박근혜 후보의 측근인 ‘7인회’ 멤버로 활동 중이다. 강신욱 당시 강력부장은 대법관을 지낸 뒤 2007년 박근혜 대선캠프에서 법률지원특보단장을 역임했다. 남기준 검사 도 박근혜 캠프에서 클린검증 소위원장을 맡았다. 광상도 검사는 박근혜 후보의 싱크탱크로 알려진 국가미래연구원 발기인에 참여했다. 윤석만 검사는 올해 대전 지역에서 새누리당 예비후보로 출마했으며, 박 후보를 지지하는 외곽 조직에 있다. 임철 검사는 2008년 총선 당시 한나라당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 

강기훈씨의 조속한 쾌유를 기원하며 이유없이 3년이상 진행되지 않는 재심개시를 촉구하는 범사회적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강기훈 모임’은 우선 지난 10일부터 매일 오전 8시30분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앞에서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희대의 조작극, 91년 유서대필사건, 억울한 누명 20년, 강기훈이 죽어간다!, 대법원은 즉각 재심개시를 결정하라!’는 내용이 쓰여진 피켓을 들고 나섰다. 이창복 전 민주당 의원을 필두로, 인재근 민주통합당 의원, 심상정 새진보정당추진회의 의원 등이 참석했다. 1인시위는 10월 8일까지 약 한달 간 진행된다. 

‘강기훈의 쾌유와 진실을 위한 후원콘서트’도 열린다. 10월 9일(화) 저녁 7시 30분 서울시립대 강당에서 안치환과 자유, 이은미, 조관우, 평화의 나무 합창단 등이 공연에 나선다. 이들 중 대부분은 무료로 출연한다. 콘서트에서는 박원순 서울시장과 문성근씨, 박래군씨, 정혜신씨 등이 토크에 나선다. 입장료는 후원금으로 3만원이다. 

사회 각계 원로인사들이 힘을 합쳐 대법원에 탄원서를 내는 운동도 진행중이다. 학계 언론계 문화계 종교계 등의 원로인사 50여명은 탄원서를 내기 위해 연명으로 서명을 받고 있다. 국회에서는 민주통합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대법원의 재심개시 촉구 결의안을 추진중이다. 

“검찰과 사법부는 부끄러운 과거의 일을 숨기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안은 심정으로 살아온 세월에 이젠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온전한 상식으로 세상을 보는 것, 그리고 그들 스스로 마음 깊은 곳에서 알고 있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 바로 지금이 그 때다.” 강기훈씨는 자신의 블로그에 쓴 글에서 “사건의 피해자가 주는 기회와 아량은 더 이상 없을지 모른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이다.”라고 밝혔다. 대법원의 즉각적인 재심개시 결정을 촉구한다. 강씨가 부르짖었듯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언론광장

2012년 8월 30일 목요일

한국판 드레퓌스 강기훈의 명예회복, 지식인들이 나서라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08-30일자 기사 '한국판 드레퓌스 강기훈의 명예회복, 지식인들이 나서라'를 퍼왔습니다.
[김주언 칼럼] 노태우 정권 희대의 조작사건, 재심 촉구 온라인 서명운동 진행 중

“기훈이가 절대로 하지 않는 얘기가 있습니다. ‘유서대필’이라는 누명을 썼던 때 얘기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훈이가 먼저 그 얘기를 꺼냈어요. 애들이 ‘아빠, 정말 그랬어?’라고 물어 보더라는 겁니다. 그때 기훈이가 난생 처음 ‘정말 죽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기훈이는 그렇게 상처를 앓은 채 21년을 살아왔습니다. 언제까지 그에게 이 짐을 짊어지게 해야 합니까. 자식들에게 떳떳한 아비가 될 수 있도록 해줘야 합니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유서대필 조작사건’의 주인공 강기훈씨(48)의 20년 지기 원일형씨의 말이다. 지난 28일 200여명의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열린 ‘강기훈의 쾌유와 재심개시 촉구를 위한 모임’(공동대표 함세웅 김상근 등) 발족식에서 원씨는 이렇게 말하며 울먹였다. 강씨는 현재 간암으로 투병 중이다. 주위의 도움으로 어렵게 삶을 이어가고 있다.
참석자들은 “‘유서대필 사건’은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위원회’에서 독재정권이 위기 탈출을 위해 만들어 낸 희대의 조작극임이 이미 밝혀졌다”며 “대법원은 하루 빨리 재심 개시를 결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모임은 강씨의 쾌유를 기원하고 재심을 촉구하는 온라인 서명운동과 치료비 모금 활동을 진행중이다. 내달 20일에는 서울시립대 강당에서 ‘강기훈을 위한 시와 노래의 밤’을 열 예정이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정혜신 박사 등은 재능기부를 통해 ‘강기훈 지킴이’로 활동한다. 

1991년 5월 강기훈 씨가 명동성당에서 필적을 실연해 보이고 있다.
강씨 변호인단도 3년째 재심개시 여부결정을 미루고 있는 대법원에 판단을 서둘러 달라고 호소하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서울고법은 2009년 9월 강씨가 유서를 대필한 것으로 볼 수 없다며 재심 결정을 내렸으나 검찰이 항고해 2년10개월째 대법원 심리가 진행중이다. 변호인단은 ‘강씨가 간암수술 후 합병증으로 건강상태가 나빠지고 있어 제대로 법정에 서기 어려운 상황이 올 수 있으니 재심개시 여부를 빨리 결정해달라‘는 취지의 의견을 냈다.
1991년 5월8일, 서강대 본관 5층 옥상에서 김기설 전민련 사회부장이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분신한 뒤 투신자살했다. 노태우정권 말기 당시 정권의 실정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에 대한 정권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도 끝간 데를 몰랐다. 현장에서 두 장의 유서가 발견됐다. 검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필적감정을 근거로 유서 글씨가 강기훈 전민련 총무부장의 것이라며 강씨를 자살방조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법원은 기소 내용을 인정해 3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강씨는 3년을 복역한 뒤 1994년 만기 출소했다. 13년이 지난 뒤에야 진실의 실마리가 풀렸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어렵게 확보한 김씨의 낙서장을 사설 필체감정원에 의뢰해 김씨와 강씨의 필체가 다르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진실화해위는 .2007년 11월 이를 토대로 국가에 사과와 재심을 권고했다. 강씨는 2008년 1월 재심을 청구했고 서울고등법원은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뒤이어 검찰의 항고가 이어졌고, 대법원은 3년째 ‘꿀먹은 벙어리’처럼 심리중이라며 미적거리고 있다.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이 ‘한국의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이유는 두 사건에 유사점이 많기 때문이다. 강기훈 사건이 일어나기 100년 전인 1894년 10월. 프랑스의 육군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독일 대사관에 군사정보를 팔았다는 혐의로 체포됐다. 파리의 독일 대사관에서 몰래 빼내온 편지봉투 안에 육군 기밀을 담고 있는 명세서의 필적이 드레퓌스의 필적과 일치한다는 이유였다. 드레퓌스는 유태인이었다. 드레퓌스는 유죄판결을 받아 종신유배형을 받았다.
강기훈과 드레퓌스는 종이 몇장이 사건의 발단이었다는 점에서 형식상 비슷하다. 강기훈은 친구인 김기설의 유서, 드레퓌스는 군사기밀이 적혀 있다는 명세서가 발단이었다. 강기훈과 드레퓌스는 똑같이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유서와 명세서를 자신이 작성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필적이 같다는 것 외에는 다른 물증은 없었다. 필적 감정 결과는 이후 거짓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강기훈은 자살방조 혐의로, 드레퓌스는 반역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강기훈은 여기에 이적표현물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혐의가 추가됐다.
강기훈과 드레퓌스가 당시 주류사회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았다는 점도 비슷하다. 강기훈은 젊은 청년으로 전민련 총무부장으로 일하면서 민주화운동에 매진했다. 당시 군사정권은 정권유지를 위해 민주화운동 세력을 ‘좌파’로 몰아 탄압했다. 재야인사와 청년학생들은 감옥을 제 집처럼 드나들어야 했다. 당시 민주화운동 진영은 집권세력과 보수언론에 의해 ‘사회주의 혁명 세력’으로, 북한의 사주를 받는 ‘주사파’로 매도됐다.
드레퓌스는 육군 대위로 성실하게 복무하고 있었으나 유태인이라는 점이 유죄 판결의 근본 이유였다. 프랑스는 유태인 차별 법률을 폐지했지만 오래된 편견은 프랑스인들 뇌리 속에 그대로 자리잡고 있었다. 군부는 노골적으로 유태인을 차별했고 사회전반의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참모본부에서 드레퓌스를 용의자로 지목한 인물들은 악명높은 반유태주의자였다. 반유태주의자들은 유태계 프랑스인을 진정한 프랑스인으로 간주하려 들지 않고 잠재적 반역자로 간주했다. 
강기훈 사건과 드레퓌스 사건을 다룬 한국 검찰과 프랑스 군의 태도는 크게 다를 바 없다. 강기훈 사건의 경우 재야단체와 변호인단이 검찰의 증거조작 의혹을 끊임없이 제기했으나 검찰은 철저하게 묵살했다. 드레퓌스 사건의 경우 프랑스 군은 진범이 확인됐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새로운 증거를 조작했다가 들통이 나기도 했다.
한국 검찰은 강기훈 사건에 대해 처음부터 배후가 있다는 단정 하에 수사를 시작했다. 검찰은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김기설의 집과 동사무소, 김기설이 근무했던 군 부대에 찾아가 필적을 입수했다. 김기설의 유서가 대필되었다는 예단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김기설이 작성한 전민련 수첩 등은 조작됐다는 판단을 내리고 대부분의 필적들은 은폐했다. 검찰은  강기훈 사건을 민주화운동 진영의 도덕성을 파멸시키려는 의도로 활용했다. 검찰은 논고에서 강기훈에게 "목적을 위해서는 동료의 생명까지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하는 좌경혁명 분자"로 규정했다.

강기훈 씨. ©서울신문

드레퓌스를 반역죄로 몰아갔던 프랑스 군부도 증거를 조작하거나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프랑스 육군 참모본부는 명세서를 만든 사람을 가까이 있는 인물로 단정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참모본부는 드레퓌스 대위의 필체가 명세서의 글씨와 유사했다는 이유로 반역죄로 군법회의에 고발했다. 드레퓌스를 스파이로 만들기 위해서 명세서의 글씨와 드레퓌스의 필체에 대해 실시한 여러 가지 필적감정 결과 중 유리한 감정결과만 취하고 나머지는 묵살했다.  드레퓌스와 전혀 상관없는 첩보문서들을 드레퓌스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조작했다. 재판과정에서는 드레퓌스에게 불리한 비밀자료를 판사들에게만 불법적으로 전달했다. 재판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강기훈 사건과 드레퓌스 사건의 재판부는 검찰의 기소 내용을 거의 그대로 인정했다. 한국의 1심, 2심, 대법원은 모두 강기훈의 자살방조 혐의를 인정해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 6월을 선고했다. 법원은 "확실한 심증을 형성하지 못했다"며 판결의 한계를 시인하면서도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판단하라는 증거재판주의의 기본원칙을 법원 스스로 파괴했다.


드레퓌스의 경우 비공개 재판은 물론이려니와 두 번째 재판에서도 유죄 판결을 받아야 했다. 프랑스 지식인들의 반발로 대통령이 특별사면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드레퓌스는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뒤에 재심 청구를 해서 마침내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1894년 12월. 비공개로 치러진 군법회의는 만장일치로 드레퓌스의 유죄를 선고하고 종신 유배형과 공개적인 군적 박탈형에 처했다. 재판장은 드레퓌스가 불법적 증거들에 대해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재판을 끝냈다.


드레퓌스는 1904년 3월 재심을 청구했고 1906년 7월 12일에 대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비로소 막을 내렸다. 드레퓌스는 후에 육군 소령 계급장과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에 전투에 두 번 참가한 뒤 1935년 7월 11일 병으로 고생하다 세상을 떠났다.


두 사건을 다룬 언론보도는 유사한 특성을 지녔다. 일부 언론이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사실보도를 통해 여론을 환기시켰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문은 추측보도를 남발했고 검찰과 군의 발표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했을 뿐이다.


드레퓌스 사건이 일어나자 프랑스 신문들은 온갖 추측보도를 남발했다. 신문들은 정확한 증거를 찾기는 커녕 드레퓌스를 헐뜯는 기사로 도배했다. 말도 안 되는 뜬 소문이 버젓이 신문지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유태인이 스파이 행위를 했다는 혐의를 받았으니 반유태주의자들의 항의는 거셌다. ‘유태인이니 당연하다’든지 ‘사형에 처해야 한다’ 는 등의 기사가 잇따라 신문에  게재되기도 했다.


강기훈 사건과 관련된 한국 언론의 보도태도도 비슷하다. 보수언론들은 “민주화운동 세력은 ‘유서까지 대신 써주며 죽음을 부추긴 세력’이라는 검찰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썼다. 언론은 한 술 더 떠서 "재야에 자살 특공대가 있다는 풍설이 오래 전부터 나돌았다", "분신에 협력자가 있었을까?", "분신자살조, 사실일까?" 등 선동적인 기사를 써댔다. 1994년 박홍 서강대 총장의 ‘주사파 배후에 김정일이 있다’ 발언 이후 일부 신문의 논조는 더욱 가관이었다. ‘조선일보’는 그를 ‘용기 있는 지식인’으로 칭송했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다. 드레퓌스 사건은 유럽 지성사를 뒤흔든 역사적 사건으로 프랑스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반면 강기훈 사건은 아직 한국 지식인 사회의 관심에서 비껴나 있다. 프랑스에는 드레퓌스의 동상이 서 있지만, 강기훈은 아직도 어려운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드레퓌스는 12년 만에 무죄가 확정된 뒤 예전의 직장으로 돌아가 진급도 하고 훈장도 받았다. 그러나 강기훈은 18년 만에야 비로소 법원으로부터 재심개시 결정을 받았다. 그러나 검찰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즉시 항고를 제기했다.


지식인 사회의 모습도 크게 달랐다.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지식인 사회가 성취한 양심의 승리이자, 진실의 승리였다. 당대 최고의 작가였던 에밀 졸라의 눈부신 활약과 정치인 조르주 클레망소 등의 헌신적인 활동은 온갖 위협 속에서도 끈질기게 이어졌다. 반면 강기훈 사건에 대한 한국 지식인들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졸라처럼 자신에게 닥쳐올 온갖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양심선언을 한 지식인을 찾아보기 어렵다. 독재권력의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자살이라는 극한적 투쟁을 택한 젊은 청년들을 매도하는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에밀 졸라는 1898년 1월 13일 언론사상 가장 유명한 양심선언인 ‘나는 고발한다’ 라는 논설을 ‘로로르’지에 게재했다. 졸라는 이 격문을 발표하기 전에 보수신문 ‘르 피가로’에 드레퓌스 관련 글을 발표했다. 그러나 독자들이 구독해지 운동을 펼치며 압력을 가해 신문사 편집진은 졸라의 글을 싣지 못했다. 졸라는 ‘청년들에게 보내는 편지’ ‘프랑스에 보내는 편지’ 등을 팸플릿으로 제작해 판매해야만 했다. 졸라는 드레퓌스를 죄인으로 만들어 참모본부의 잘못을 감추려 한 장군들과 엉터리 증언을 한 필적감정 전문가, 드레퓌스에게 유죄를 선고한 군사재판을 꾸짖었다.


"크나큰 고통을 겪어 이제는 행복해질 권리가 있는 인류의 이름으로 진실의 빛을 밝히는 것, 그것이 단 하나뿐인 나의 정열입니다. 불타오르는 나의 항변은 내 영혼의 외침일 뿐입니다. 나를 중죄 재판소에 고발한다 해도, 백일하에 나를 심판한다 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 논설은 유태인에 대한 반감이 퍼져 있던 프랑스 사회를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다. "졸라를 죽여라!" "유태인을 죽여라!" 따위의 구호를 외치면서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프랑스 의회는 졸라를 기소했고 베르사이유 중죄재판소는 1898년 7월 졸라에게 징역 1년에 벌금 3,000프랑을 선고했다. 선고 당일 졸라는 영국 런던으로 망명했다. 선고 며칠 후 프랑스 정부는 레지옹 도뇌르 수훈자 자격도 박탈했다. 졸라는 1899년 6월 돌아왔으나, 불과 3년 뒤인 1902년 9월 29일 가스중독 사고로 사망했다. 계획된 살인이라는 이야기도 떠돌았지만 분명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졸라는 드레퓌스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 ‘진실’을 쓰기 시작했지만 끝내지 못했다.


당시 한국의 서강대 총장이었던 박홍은 “김씨 등의 잇따른 분신을 보며 우리사회에는 젊은이들에게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는 음흉한 세력들이 분명히 있다”며 “이 모든 세력을 없애는 데 함께 일어나야 한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박홍은 구체적인 실례를 들지 않았다. 하지만 발언 앞뒤를 보면 조직적으로 분신을 추진하는 세력이 있으며, 이들의 정체를 밝혀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박홍의 근거 없는 선동에 맞춰 검찰은 "분신자살을 배후에서 조직적으로 부추기는 세력이 있을 것"이라며  수사에 착수했다.


노태우 정권은 당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민주화운동 세력의 도덕성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정권차원에서 마련한 기획이었다. 민주화운동을 요구하는 분신이 이어지자 보수세력들 사이에서는 ‘운동권에서 제비뽑기를 통해 분신자를 선택한다느니’, ‘배후가 있다느니’ 하는 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대학총장이자 성직자인 박홍이 정권의 의도에 동조함으로써 민주화운동 세력의 도덕성에 흠집을 가하려 한 것이다. 강기훈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재심여부 결정이 게속 미뤄지고 있는데도 한국 지식인 사회의 반응은 아직 크지 않다.


유서대필 사건은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분신의 배후를 찾으려던 노태우 정권의 유령 찾기가 빚어낸 마녀사냥이었다. 이로 인해 강기훈은 정신적 고통은 물론이려니와 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앞으로 강기훈이 재심이 결정돼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아 국가로부터 금전적 보상을 받더라도 20여년 동안 그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국가폭력은 정당화할 수 없다. 대법원이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 지, 재심이 시작되면 어떤 판결이 내려질 지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용기있는 양심적 지식인들이 어떤 활동을 벌일 지 기대해 본다. 드레퓌스 사건이 결국엔 진실과 정의가 승리하게 된 데에는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굴하지 않는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주언·언론인 | newmedia54@hanmail.net  

2012년 8월 29일 수요일

“암투병 중인 내 친구 강기훈, 대법원이 억울함 풀어달라”


이글은 민중의소리 2012-08-29일자 기사 '“암투병 중인 내 친구 강기훈, 대법원이 억울함 풀어달라”'를 퍼왔습니다.
91년 ‘유서대필 사건’ 피해자 강기훈의 쾌유와 재심 개시 촉구 모임 발족

ⓒ민중의소리 강기훈씨의 쾌유를 기도하는 지인들

“내 친구 기훈이를 만나 술잔을 기울일 때면 절대 하지 않는 얘기가 있습니다. 바로 지난 91년에 ‘유서대필’이라는 누명을 썼던 때 얘기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기훈이가 그 얘기를 먼저 꺼냈어요. 애들이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아빠, 정말 그랬어?’라고 물어 보더라고. 그 때 기훈이가 난생 처음 ‘정말 죽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기훈이는 그렇게 상처를 앓은 채 21년을 살아왔습니다”-강기훈씨 20년 지기인 원일형 씨 

노태우 정권 말기인 지난 91년 이른바 ‘유서대필’이라는 누명을 쓴 채 3년간 옥고까지 치른 강기훈(48) 씨를 위해 한 자리에 모인 그의 지인들은 숙연한 분위기 속에 ‘강기훈의 쾌유와 재심 개시 촉구를 위한 모임’ (강기훈재심모임) 발족식을 28일 열었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상임의장이었던 이창복 전 민주당 의원이 모임의 상임대표를 맡고 민주화운동 원로인 함세웅 신부, 김상근 목사, 정성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역시 전민련 상임의장을 역임한 이부영 민주당 전 의원 등이 공동대표를 맡았다. 민주당 인재근·신계륜·민병두 의원, 통합진보당 심상정 의원 등도 공동대표로 이름을 올렸고, 박원순 서울시장과 민주당 손학규 대선 경선 후보, 정봉주 전 의원, 정혜신 박사 등은 재능기부를 통해 ‘강기훈 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다. 

강 씨는 지난 4월 간암 판정을 받고 5월 간암세포 제거수술까지 받았지만, 수술 부작용으로 힘겹게 치료를 받는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재심 개시 여부, 3년째 결정 미루고 있는 대법원”
 

1980~90년대 전민련에서 활동하며 강씨와 인연을 맺은 이들이 주축을 이룬 이날 참가자들은 “‘김기설 유서대필 사건’은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위원회’(과거사위)를 통해 독재정권이 위기 탈출을 위해 만들어 낸 희대의 조작극임이 이미 밝혀졌다”며 “대법원은 하루 빨리 재심 개시를 결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지난 2007년 과거사위는 강 씨가 후배인 김기설 씨에게 분신을 사주하며 유서를 대필해줬다는 기존 판결을 뒤집는 자료를 제시하며 진실규명 결정과 함께 국가에 재심을 권고했다. 강씨의 재심 청구에 서울고등법원은 2009년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으나 검찰이 이에 불복해 대법원에 항고했고, 이후 3년 동안 대법원은 재심 결정을 미루고 있는 상황이다.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 송상교 변호사는 “과거사위에서 2007년 당시 김씨의 낙서장을 확보했고 이를 사설 필체 감정원에 의뢰한 결과 김씨의 필체와 강씨의 필체가 다르다는 결과가 나왔다”며 “1991년 사건 당시에도 국과수에서 일했던 감정인조차도 ‘당시 이러한 결과가 있었다면 유죄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스스로 인정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재심 개시 결정에 검찰이 항고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며 “대법원 역시 재심 개시 여부를 3년여 동안 끌고 있는 것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민중의소리 강기훈의 쾌유와 재심 개시 촉구를 위한 모임 발족식

“내 친구 강기훈, 법정에서 억울함 풀 수 있게 해달라”

이날 참가자들은 강 씨가 누명을 벗기 위해서는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며 쾌유를 기원했다.강 씨의 쾌유를 위한 기도시간에는 일부 참가자들이 두 손을 모은 채 흐느끼는 등 엄숙한 분위가 이어졌다. 

홍성교도소에 수감 중인 정봉주 전 의원은 그의 부인이 낭독한 편지를 통해 “기훈아 보란 듯이 털고 일어나 20대 젊은 시절에 함께 꿈꾸었던 민주주의가 꽃되는 세상, 통일된 조국 한반도를 향해 다시 달려보자”며 “진실이 무릎 꿇으면 거짓이 춤춘다. 진실과 정의의 상징인 강기훈은 쓰려져서는 안된다”고 응원했다.

사회를 맡은 김선택 강기훈재심모임 집행위원장 역시 “재심이 시작되더라도 강기훈 본인이 건강해야만 무죄를 주장할 수 있다”며 “더 이상 병세가 악화되지 않도록 여러분들의 많은 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참가자들은 호소문을 통해 “강기훈에게 씌워졌던 누명이 벗겨지는 것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지키기와 다름 없다”며 “20여년 전 혼자 짊어졌던 짐을 이제는 더 이상 혼자 짊어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호소했다.

한편 강 씨가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매달 1천만원에 가까운 치료비가 필요하다. 강기훈재심모임에서는 강씨의 쾌유를 기원하고 재심을 촉구하는 온라인 서명과 치료비 모금 활동을 진행 중이다. 다음달 20일에는 서울시립대 강당에서 ‘강기훈을 위한 시와 노래의 밤’이라는 공연도 열 예정이다. 

유서대필 사건의 전모

ⓒⓒ민중의소리 한승호 기자 유서대필사건 조작 피해자인 강기훈 전 전민련 총무부장

1991년 5월 8일, 전민련 사회부장이던 김기설 씨는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서강대 건물 옥상에서 분신하며 투신했다. 5월 들어서만 세 번째 분신 사망이었다.

그해 4월 28일 명지대 1학년생 강경대 군이 집회 도중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며 촉발된 이른바 분신정국은 대학생 뿐만 아니라 가정주부와 고등학생까지 분신을 하며 노태우 정권을 규탄했다. 잇따른 분신과 수십만 명씩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시위 대열에 노태우 정권은 최대 위기에 몰렸고 탈출구가 필요했다.

정권은 그해 5월 7일 고위당정회의, 8일 청와대 치안관계대책회의를 열고 “잇따른 분신에는 배후세력이 있다”며 이에 대해 철저히 수사를 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를 신호로 검찰은 김기설 씨 분신 직후, 증거가 채 확보되기도 전에 언론에 “분신에 배후세력이 있다”고 서둘러 발표했고 이어 각종 증거를 조작해 분신배후조종설을 퍼트렸다.

검찰의 수사는 결국 유서대필 사건으로 이어졌는데, 김기설 씨의 선배인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 씨가 김 씨의 유서를 대필해주고 자살을 방조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그러나 검찰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 감정 결과가 유일했다. 이마저도 강기훈 씨의 2심 재판을 앞두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문서분석실장 김형영 씨가 뇌물수수 및 허위감정 혐의로 구속돼, 감정의 신뢰성에 결정적으로 금이 가며 조작 의혹이 더욱 불거졌다. 

당시 강 씨는 “피고인으로서가 아니라 진실을 증언하는 증인으로서 법정에 서겠다. 법정에서 진실을 밝히겠다”라며 검찰에 자진출두했지만, 결국 대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실형을 살았다. 

김대현 기자 kdh@vop.co.kr

2012년 7월 5일 목요일

암 투병하며 누명 벗으려해도 대법원 때문에…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07-04일자 기사 '암 투병하며 누명 벗으려해도 대법원 때문에…'를 퍼왔습니다.

강기훈씨
‘유서대필 누명’ 강기훈
투병 중 탄원 “갈 길 먼데…
”21년전 유서대필 조작사건
억울한 옥살이 3년 치르고
18년만에 고법 “재심하라”
대법원, 3년째 결정 미뤄

1991년 유서대필 조작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강기훈(사진)씨의 변호인들이 4일 대법원에 의견서를 냈다. 간암 수술을 받은 강씨의 건강이 악화되고 있어 제대로 법정에 서기 어려운 상황이 올 수도 있으니, 재심 결정을 3년째 미루고 있는 대법원이 서둘러 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이다. 고통 속에 21년을 보내고 이제 육신의 건강마저 잃어버린 쉰살의 강씨에겐 마지막 탄원이 될 수 있다.변호인단은 의견서에서 서울고등법원 형사10부(재판장 이강원)가 2009년 9월15일 강씨에 대한 재심 개시를 결정한 뒤 검찰이 대법원에 즉시항고를 한 것도 이제 2년10개월이 되어간다며, “본안에 대한 실체판단을 하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대법원의 결정이 늦어지고 있는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밝혔다. 변호인단은 “대법원이 의도적으로 사건을 지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며 재판 진행을 협의하기 위한 재판부와의 면담을 신청했다.변호인단은 강씨의 건강 상태로는 더는 재심 결정을 미룰 일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강씨가 5월23일 간암 수술을 받은 뒤 심각한 합병증으로 다시 입원치료를 받았고, 간암이 재발하거나 더욱 악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변호인단은 “2007년 11월 진실화해위원회가 유서대필 사건이 조작일 가능성을 밝힌 뒤에도 강씨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재심을 통해 아들의 누명이 풀리는 것을 끝내 보지 못하고 간암으로 별세했다”며 “진실의 문이 열릴 듯 열리지 않은 채 대법원에서 3년 가까이 사건이 방치되는 동안 강씨의 정신적 고통과 스트레스가 지속됐고, 결국 이것이 고스란히 간암으로 이어졌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강기훈씨 유서대필 조작사건 일지

변호인단은 “무엇보다 강씨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법정에서 자신의 억울함에 대하여 진술할 기회조차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누구보다 힘들어하고 있다”며 “만에 하나 강씨의 건강이 더욱 악화돼 제대로 법정에서 변론하기 어려운 상황이 생긴다면 법원 역시 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강씨는 이날 와의 통화에서 대법원의 재심 결정이 미뤄지고 있는 데 대해 “갈 길이 먼데…”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잘못된 판결을 재심을 통해 바로잡는 일만으로도 시간이 만만찮게 걸릴 것인데, 제가 그 시간까지 갈 수 있을는지조차 모르겠다”고 말했다.강씨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총무부장이던 1991년 5월8일 노태우 정권에 반대해 서강대에서 분신자살한 김기설(당시 25살) 전민련 사회부장의 유서를 대필한 혐의로 옥고를 치렀으나, 이후 새로운 증거가 드러나 2009년 재심 개시 결정을 받았다. 그러나 검찰은 대법원에 즉시항고했으며, 대법원은 현재까지 재심 개시 여부를 결정하지 않고 있다.대법원 관계자는 “법률적 쟁점이 많아 여러 측면에서 검토중인 것으로 안다”며 “아직 결정 선고 기일은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법원은 2부(주심 양창수 대법관)에 배당된 이 사건을 대법관 전원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에서 심리하는 방안도 검토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이 사건의 재심 결정 선고는 일러도 7월 말이나 8월에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여현호 선임기자 yeopo@hani.co.kr

“시효때문에 처벌 못해도, 사건 조작자 역사앞에 밝혀야”
 간암 합병증 고통받는 강기훈씨

유서대필 혐의로 옥살이를 한 강기훈씨가 출소 이후인 지난 1998년 3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내 김기설씨의 묘소를 찾았다.(왼쪽) 1991년 6월, 강기훈씨가 검찰에 출석하기 위해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서 걸어 나오고 있다. 강씨는 그해 5월 분신자살한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씨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를 받자 결백을 주장하며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벌였다.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잘못된 판결 시정돼야 하는데
그때까지 내가 갈 수 있을지…

“갈 길이 먼데… 제가 그 시간까지 갈 수 있을는지 모르겠네요….” 스물아홉의 젊은이는 이제 걷는 것도 힘들어하는 쉰살의 환자가 됐다. 1991년 유서대필 조작사건의 강기훈씨는 간암 수술 뒤 요양 치료를 위해 지방의 한 치유센터에 머물고 있다. 4일 (한겨레)와 전화통화를 한 강씨는 내내 힘들어하면서도, 사법부가 더는 시간을 끌지 말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건강은 어떤가?

“별로 좋은 편은 아니다. 지난 5월23일 입원해 간 한쪽의 절반가량을 잘라내는 수술을 했다. 종양이 2개 나왔다. 6월11일 퇴원했는데 합병증이 도져서 6월27일 다시 입원해 어제 퇴원하고 여기로 내려왔다. 합병증은 간 정맥류인데, 처음엔 간 위쪽에서 터져서 피를 토했고 다음엔 간 아래쪽에서 터졌다. 이제 치료 시작이다.”

-언제 암에 걸린 것을 알았나?

“부모님이 모두 간암으로 돌아가신 뒤 3개월마다 시티(CT) 촬영을 하면서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아왔다. 1월엔 이상이 없었는데 4월 말에 이상이 나타났다. 정밀검사를 해보니 악성종양이었다. 즐겁게 지내야 암도 이겨낼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강씨의 아버지는 2007년 11월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 뒤 재심을 통해 아들의 누명이 풀리는 것을 보지 못한 채 2008년 12월 간암으로 별세했다. 어머니도 간암이 뼈로 전이되면서 2010년 4월 별세했다. 강씨는 이런 일로 더욱 괴로워했고,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와 우울증 치료를 받아야 했다. 간암 발병은 가족력과 함께 이런 스트레스 때문으로 보인다.

-대법원의 재심 결정이 늦어지고 있는데?

“사법부가 재심의 기회를 기약 없이 봉쇄하고 있다. 공직자라면 공직자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인데, 주어진 권한을 남용해 이렇게 시간을 끄는 것은 곤란하다. 어떻게 보면 내 몸 상태가 이 지경에 이르는 상황을 바라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사법부도 사건 조작에 책임이 있는 일종의 공범이기 때문이 아니냐는 생각도 든다. 사법부가 자기 잘못을 되돌릴 기회라고 적극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게 아닌가. 이미 고등법원에서 재심 사유에 해당한다고 결정했는데도 대법원이 아무런 이유 없이 시간을 끄는 것은 옳지 않다. 재심을 열라고 하는 것이니, 본안에 대한 판단은 재심에서 해도 되는 것 아니냐. 대법원이 쥐고 있을 이유가 없다. 나쁜 행동이다. 나중에 비판받지 말고 얼른 결정을 내려줬으면 한다. 시간이 없지 않은가.”

-재심 법정이 열리면 꼭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그건 정말 머나먼 얘기다. 갈 길이 먼데…. 이번 일은 나의 신원 문제뿐 아니라, 사건을 만들어내고 지휘한 사람들까지 조사해야 한다. 시효 때문에 처벌은 하지 못해도 누가 그렇게 사건을 조작했는지는 역사 앞에 밝혀내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갈 길이 멀다. 지금은 어떻게든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는 것까지만이라도 됐으면 좋겠다. 그것도 시간이 만만찮게 걸릴 텐데… 내가 그 시간까지 갈 수 있을는지조차 모르겠다.”강씨는 체력이 아직 살아나지 않아 걷는 것도 힘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혼잣말처럼 “갈 길이 먼데…”라는 말을 거듭했다.

여현호 선임기자 yeopo@hani.co.kr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6공 “유서 대신 써줘 분신종용” 민주화세력 매도
국과수 “김기설씨 유서 스스로 작성했다” 번복
진실화해위, 2007년에 “대필 아니다” 재심 물꼬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의 시작은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4월26일 명지대 1학년 강경대씨가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전국 곳곳에서 대학생과 재야단체 인사들이 이에 항의해 잇따라 분신하는 이른바 ‘분신정국’이 이어졌고, 5월8일에는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씨가 유서를 남기고 몸에 불을 붙인 뒤 투신해 숨졌다. 그러자 박홍 당시 서강대 총장은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려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주장했고, 열흘 뒤인 5월18일 검찰은 “김기설씨의 유서와 가족이 제출한 김씨의 필적이 다르다”고 발표했다.검찰은 김씨의 유서를 대신 쓴 인물로 강기훈 당시 전민련 총무부장을 지목했고, 6월24일 강씨를 자살방조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노태우 정권은 “유서까지 대신 써주며 분신을 종용했다”고 민주화운동 세력을 매도하고 나섰다.강씨는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유서를 대필하지 않았다고 일관되게 주장했지만, 이듬해 7월24일 대법원은 강씨에게 징역 3년과 자격정지 1년6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치열한 법정 공방이 벌어지는 동안 이 사건은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1994년 8월17일 형기를 모두 채우고 출소한 강씨에게 명예회복의 기회를 열어준 것은 노무현 정부의 과거사 정리 작업이었다. 2005년 12월 경찰청 과거사위원회는 “(김기설씨의) 유서는 김씨 친필로 보이나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고 발표했다. 1991년 사건 당시 김씨의 유서 필적감정을 했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도 ‘김씨의 유서는 김씨 본인이 작성한 것’이라는 필적 재감정 결과를 내놓았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당시 위원장 송기인)는 2007년 11월13일 “강씨가 김씨의 유서를 대신 쓰지 않았다”며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고, 국가에 재심을 권고했다. 강씨는 2008년 1월31일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고, 2009년 9월16일 서울고법 형사10부(재판장 이강원)는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재판부는 “분신한 김기설씨의 유서가 김씨의 필적과 일치한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감정기관의 감정 결과가 나왔다”며 “유죄의 확정판결을 더이상 유지할 수 없는 고도의 개연성이 인정된다”고 밝혔다.하지만 강씨의 명예회복 노력은 검찰과 보수세력의 반발에 발목이 잡혔다. 서울고검 공판부(부장 임권수)는 재심 개시 결정에 불복해 대법원에 즉시항고했다. 대법원은 검찰의 즉시항고 이후 2년10개월이 지나도록 결정을 미루고 있다.

유신재 기자 oh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