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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2일 일요일

중생 아픔 무관심해야 훌륭한 스님?


이글은 한겨레신문 조현기자 블로그 휴심정의 벗님글방 2012-08-31일자 기사 '중생 아픔 무관심해야 훌륭한 스님?'을 퍼왔습니다.

검정고무신 두켤레 사진 <한겨레> 자료

때로는 이웃의 시선에서 자신도 몰랐던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평소에 자각하지 못했던 내 모습과 감추고 싶은 내 얼굴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의 시선과 이웃의 시선을 열린 마음으로 정직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내게는 이웃의 눈에서 우리 승가의 모습을 새삼스레 보게 된 두 가지의 기억이 있다. 한번은, 몇 년 전 내소사에서 주한 외국인 30여 명을 대상으로 2박3일 템플스테이를 진행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였다. 사중 대중스님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외국인들과 새벽예불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때론 유쾌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모두가 더없이 아름다운 산중의 정취에 취하였고 일상의 수행에서도 모두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행복해했다.

그런데 마지막날, 좋은 소감말 가운데 단 하나의 아쉬움을 밝혔다. “스님들이 너무 럭셔리해요.” 아니! 내소사의 스님들이 사치스럽다니, 대체 외국인의 눈에 스님들이 가진 그 무엇이 그토록 눈에 거슬렸을까?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절의 사무실과 모든 방에 있는 컴퓨터 그리고 휴대전화와 승용차를 가지고 있는 스님들의 모습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마침 그때 고맙게도 그 절에 고급차는 없었다) 그들의 말을 듣고 통역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대략 난감하여 서로의 얼굴을 바라만 보았다.

지난 2005년 동남아시아 지진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탁발에 나선 조계종 총무원 승려들 사진 <한겨레> 자료

그랬다. 그때까지 그들의 눈에 비친 불교의 수행자는 세상을 떠난 고행자였다. 철저하게 현대문명과 거리를 두고 은둔하는 명상가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우리들에게 극단적인 무소유와 청빈 속에서 ‘명상’하는 ‘은둔’의 ‘고행자’을 보고자했던 것이다.

그 이후, 나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외국인들과 같은 생각과 정서를 가진 이웃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과연 세속 사람들의 이런 생각은 옳은 것일까? 이런 수행자상은 누가 어떻게 만든 것인가? 그리고 이런 생각에 동의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의 정신에 맞는 것이고, 출가수행자의 본분의 전부이며, 이웃대중에게도 유익한 것인가?

또 하나의 기억은 1970년대 송광사 구산 방장 스님의 수행과 덕화에 감응하여 구도의 길을 걸었던 외국인 출가수행자들을 통해서이다. 그들 대부분은 서구의 문화권에서 매우 높은 교육을 받은 지성인이었으며, 자본과 성공의 세계를 추구하는 삶의 방식에 회의를 품어 진정한 인간의 길을 묻는 청년구도자였다.

얼마 전, 몇 년간 한국의 여러 절을 편력하면서 수행한 그들의 글을 우연히 접했다. 책장을 펼치기 전 많이 궁금했다. 그들의 눈에 비친 한국불교는 어떤 얼굴이었을까? “한국의 스님들은 무엇보다도 일상이 가난했고 소박하다. 한 톨의 밥도 함부로 버리는 일이 없다. 사소한 물건에도 공사의 구분이 엄격하다. 그리고 심성은 매우 착하고 부드럽다. 때로는 상식을 벗어나 기행을 하는 수행자도 보게 되는데, 그들 역시 알고 보면 순진하기 그지없다. 겸손하고 서로를 배려하며 맑고 단순하게 살아간다. 검정고무신에 누더기 옷을 입고 살아가지만 무엇보다도 여유롭고 당당하다. 마치 단아한 산과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지만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거의 관심이 없는 그들의 태도이다.(보살행의 구제대비심의 모습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국의 대부분의 절은 시골에 있고, 그 절 아래에는 많은 마을이 있다.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은 매우 가난하다. 먹고사는 일에 매우 힘들어 한다. 많은 가정이 빚에 시달리고 있고, 돈이 없어 아이들에게 높은 교육을 시키지 못한다. 그런데 내가 만난 한국스님들은 이들에게 거의 눈길을 주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화제로 삼지도 않았다. 참 많이 의아했다. 검소하고 맑은 심성을 가진 스님들이 힘겨운 마을사람들을 걱정하지 않는 것이 말이다.

지금 나는 외국인 수행자들의 정직한 시선에서 또 다른 우리들의 얼굴을 본다. 이웃에게 관심과 애정을 거두어버린 유아론적이고 소승적인 우리들의 얼굴을. 오늘 내 이웃에게 비친 ‘자족’과 ‘여유’에 갇혀 ‘방관자’로 남아 있는 한국불교의 오늘의 얼굴을.

다시, 청빈과 자족의 삶을 넘어 이웃을 향한 간절한 관심과 따뜻한 애정을 동시에 구족하고 실현해야 하는 지점에서, 문득 불교 너머 밖에 자꾸 시선이 간다. 보편의 진리가 불법이고 ‘나와 이웃’의 삶을 동시적으로 완성하는 사람이 보살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100년 전 이 땅에 온 엘리제 쉐핑(1880~1934)을 만났다.

개신교 선교사 서서평 사진 <한겨레> 자료

한국 이름이 서서평인 그녀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녀가 조선의 테레사라임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테레사 수녀(1910~97)보다 먼저 태어났고, 1930년 인도의 빈민가로 파견된 테레사보다 18년 앞선 1912년에 이 땅에 와서 사랑과 헌신으로 가난하고 고통받는 조선의 민중을 구원했으니 차라리 ‘조선의 엘리제 쉐핑’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겠다.

서서평은 독일에서 태어나 9살 때 미국으로 건너와 간호사로 지내던 중 개신교에 투신하게 된다. 그리고 조선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산실인 부인조력회와 조선여성절제회, 조선간호부회, 여전도연합회 등의 창설과 함께 이 땅에 헌신하였다.

무엇보다도 서서평은 마음과 몸을 조선의 사람으로 살았다. 당시의 많은 선교사들이 조선을 미개한 나라로 여기고 우월적이며 계몽적인 입장에서 철저하게 미국인으로 살아간 것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그들은 몇 개의 호화 별장을 소유하고, 지리산 아래서 조선인들에게 등짐을 지워 물품을 남시루봉 정상부근에 지은 별장까지 나르게 하고, 그곳에서 호화 파티을 즐겼다. 그러나 서서평은 검정 남자 고무신을 신고, 옥양목 치마를 입고, 보리밥과 된장국을 먹으며 나환우와 걸인들과 함께 살았다.

서서평은 광주·전남 지역에서 헌신했다. 1930년 그곳은 45만 가구 220명 인구 가운데 88만 명이 굶주림에 시달렸고, 걸인은 1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는 1년에 100일 정도 나귀를 타고 병자와 여성을 돌보고 교육시켰다. 서서평의 일기에는 당시 조선의 참담한 삶이 역력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 달간 500명의 여성을 만났는데, 성한 사람은 하나도 없고 굶주리거나 병들어 앓고 있거나 소박맞아 쫓겨나거나 다른 고통을 앓고 있었다.”

서서평은 당시 ‘큰년이’ ‘작은년이’ ‘개똥어멈’으로 불린 이름도 없는 여성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불러주며 인간의 자존감을 세워주었다. 그는 나환우의 아들을 비롯해 14명의 고아를 양아들·딸로 삼아 키웠으며, 소박맞고 쫓겨난 38명의 미망인을 데려와 함께 살았다.
평등과 박애의 정신으로 사랑스럽지 못한 자를 사랑스런 존재로 만든 그는 1934년 자신의 주검마저 송두리째 병원에 기증하고 떠났다. 그에게 남겨진 것은 반쪽짜리 담요 한 장과 잡곡 한 바가지가 전부였다.

서서평, 그는 스스로 가난을 선택했다. 가난하게 살았지만 결핍을 느끼지 않았다. 소유에서 자유로웠다. 나아가 그는 가난의 자족에도 매이지 않았다. 아픈 사람과 함께 살며 아픔을 어루만졌다. 『금강경』이 어디 장경각에만 있겠는가? “마땅히 그 무엇에 붙들리지 말고 자비심을 행하라”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의 가르침이 서서평의 일생에서 생생하게 보여지는 것을. 그는 성공이 아닌 섬김의 삶에서 스스로를 낮추고 비웠다. 비움 속에서 나누고 나눔 속에서 비웠다. 대승의 길이 어디 『대방광불화엄경』에만 있으랴. 세상이 환상인 줄 알지만 삶과 역사를 만들어가고, 나와 네가 본래 없는 줄 알지만 나와 이웃이 교감하고 감동하는 삶을 엮어가며, 고통이 본래 없는 줄 알지만 무지와 욕탐으로 생긴 고통을 소멸하고자 하는 보살행이 조선의 사람 서서평에게 있지 않는가?

동안거 들어가는 선승들 사진 <한겨레> 자료

『유마경』은 이렇게 말한다. “보살은, 모든 것이 덧없는 줄 알지만 선행을 쌓는 일에 싫증을 내지 않는다. 모든 것이 괴로움인 줄 알지만 기꺼이 생사 가운데 들어간다. 열반이 적정한 줄 알지만 짐짓 궁극의 적멸에 안주하지 않는다. 세상을 벗어난 한적함을 알지만 몸과 마음으로 늘 노력하고 실천한다. 사람들로 왁자지껄한 장소를 찾지만 정작 번뇌와 혼돈을 훌쩍 넘는다. 무아인 줄 잘 알지만 사람들에 대한 자비심을 잃지 않는다.”

‘우리들의 세계’에 안주하고 자족하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들을 ‘당신들만의 세계’로 밀어낸다. 그리고 서로가 낯설어진다. 서로에게 무관심해지고 자신의 속내를 감춘다. 단절과 고독과 고립의 세계가 만들어진다.

산중 수행자의 검정고무신과 서서평의 검정고무신, 이 두 개의 검정 고무신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법인 스님

법인 스님16세인 중학교 3학년 때 광주 향림사에서 천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대흥사 수련원장을 맡아 '새벽숲길'이라는 주말 수련회를 시작하면서 오늘날 템플스테이의 기반을 마련했다.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과 (불교신문) 주필을 지냈으며, 현재 조계종 교육부장으로 승가 교육 진흥에 힘을 보태고 있다.
이메일 : abcd3698@hanmail.net     

2012년 7월 18일 수요일

진실에 이르는 문은 하나가 아니다


이글은 대자보 2012-07-17일자 기사 '진실에 이르는 문은 하나가 아니다'를 퍼왔습니다.
용산참사를 이해하는 세 개의 문,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에 기여한 영화

영화 ‘두 개의 문’은 알려진 대로 그동안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거나 가해자 편으로 치부되었던 현장 경찰특공대의 시선으로 용산 참사를 재구성하려고 노력한다. 촛불시위에 데인 후 이명박 정부가 공언한 무관용 원칙에 장단을 맞추고 출세욕와 공명심에 눈이 멀어, 테러범 잡는 데나 쓰이는 경찰 특공대를 농성 철거민 ‘섬멸’을 위해 투입하면서 진압에 필요한 기초 정보도 안주고 사지로 몰아넣었던 경찰 수뇌부의 악행이 두드러질수록, 말단 경찰들의 처지는 연민과 공감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영화는 가해자 격인 국가권력의 말단 하수인으로 치부되었거나, 도심 테러리스트들을 진압하다 사망한 영웅들이라는 극단의 평가에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어느 누구의 관심도 미치지 못했던 현장의 경찰 특공대도 결국은 피해자라는 결론에 이른다. 하긴 그들은 명령을 충실히 따르도록 자동으로 입력된 기계가 되기를 강요받은 이들이다. 간첩이나 테러 진압 훈련만 받은 그들 눈앞의 존재들은 ‘진압’이 아닌 때려 부숴야 할 ‘섬멸’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특공대에서 사망자도 나왔으니 이들을 국가공권력과 같은 편으로 분류할 수도 없게 되었다.

특공대원들이, 농성자들이 특공대를 향해 부르짖었던 “다 죽어”라는 말이, 당시에는 살상도 마다지 않겠다는 적개심에 불타던 말로 들렸지만 지나고 보니 진압하지 말라는 요청이 아니었을까라고 의문을 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잔인한 국가 폭력의 말단에 머물러 있지 않다. 물론 여기까지는 많은 이들이 말한 내용들이다. 

영화가, 경찰 특공대원들이 현장 철거민들과 함께 국가폭력의 희생자에 속한다는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그것도 영화적 상상력이 아닌 수천 쪽에 이르는 수사나 재판 기록을 통해 진실에 육박하려는 노력은 리얼리즘으로 충만한 다큐멘터리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 내게는 영화가 주제를 풀어내는 방식이 다분히 설교적으로도 들리기도 했다. 영화 자체의 문법에 의지하지 않는 방식은 영화와의 틈을 벌어지게 만든다. 인터뷰 대상자들이 누누이 강조한, 말단 경찰들은 진실을 말했다거나, 특공대원들은 진압 현장에서 지옥을 보았다고 했으니 엄청난 후유증과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것이라는 말을 통해서 강조하는 식의 직설적이거나 관객을 가르치려는 주제 전달 방식은 마뜩하지 않다. 변호사나 대책위 관계자 등 굳이 ‘우리’ 편이 관객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 않아도 건조한 수사나 재판 기록으로도 진실에 닿는 것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말단 경찰도 피해자더라는 깨달음은 별스러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특공대의 증언대로 말단 경찰이 상부의 지시대로 따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진압 현장에서 농성자들과 함께 사망자도 나왔다.

오히려 내 마음을 끌어당긴 것은 영화가 의도하지 않거나 강조하지 않았던 것들에 있다. 용산참사의 진실에 접근하는 길은 유가족이나 대책위의 절규일 수도 있고, 생각 없는 기계로 길들여져 공권력의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경찰 특공대의 시각이나 진술일 수도 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편이 될 수 없는 자들의 목소리일 수도 있다. 이 세 번째 경우를 얻은 것이 영화에서 발견한 수확이었다. 

영화가 찾은 재판 기록 중, 재판 도중 검찰이 증인으로 출석한 특공대 제1제대장에게 질문하는 것이 있다. 경찰이 농성자 진압을 위해 컨테이너를 2대 동원했다면 특공대가 (사망자를 내지 않고) 더 안전했을 것이라는 증인의 진술에 대해, 검찰은 컨테이너가 1대가 아닌 2대였다면 특공대의 입장이 아닌 농성자들의 처지에서도 안전했겠냐고 묻는다. 특공대도 아닌 농성자의 시각에서 뜬금없이 질문하니, 증인이 질문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변호사가 질문을 이해하기 쉽게 거들어 준다. 망루에서 살아남은 농성자들에게 결국은 유죄를 때리고 마는, 농성자들의 편을 들어줄 리가 없는 검찰의 입에서 농성자의 안전을 생각하는 질문이 나온 것은 의아한 장면이었다. 

‘우리’ 편이 아닌 검찰 자신도 의도했을 것 같지 않은 태도가 영화를 비집고 나오면서, 영화는 결국 농성자들의 명예회복과 정당성에 힘을 두텁게 실어주는 결론으로 치달았다. 그 위치상 농성자들의 ‘적’으로 결코 치부할 수 없는 말단 경찰의 시선과 입을 통하기보다, 명백한 ‘적’을 통해서 농성자들의 도덕적 정당성을 훨씬 더 굳건하게 입증해 준 것이다. 

당사자 유가족이든, 말단경찰이든, 공권력의 협력자인 검찰이든, 진실에 이르는 과정이 꼭 하나의 문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영화 ‘두 개의 문’이 갖고 있는 문은 세 개 쯤 된다. ‘두 개의 문’은 피해자나 넓은 의미의 피해자가 아닌 움직일 수 없는 가해자의 입을 통해서 용산참사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기여하는 영화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로 [한국문학의 거짓말- 2000년대 초기 문학 환경에 대한 집중 조명](작가와 비평, 2011)의 저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