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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2일 일요일

중생 아픔 무관심해야 훌륭한 스님?


이글은 한겨레신문 조현기자 블로그 휴심정의 벗님글방 2012-08-31일자 기사 '중생 아픔 무관심해야 훌륭한 스님?'을 퍼왔습니다.

검정고무신 두켤레 사진 <한겨레> 자료

때로는 이웃의 시선에서 자신도 몰랐던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평소에 자각하지 못했던 내 모습과 감추고 싶은 내 얼굴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의 시선과 이웃의 시선을 열린 마음으로 정직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내게는 이웃의 눈에서 우리 승가의 모습을 새삼스레 보게 된 두 가지의 기억이 있다. 한번은, 몇 년 전 내소사에서 주한 외국인 30여 명을 대상으로 2박3일 템플스테이를 진행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였다. 사중 대중스님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외국인들과 새벽예불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때론 유쾌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모두가 더없이 아름다운 산중의 정취에 취하였고 일상의 수행에서도 모두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행복해했다.

그런데 마지막날, 좋은 소감말 가운데 단 하나의 아쉬움을 밝혔다. “스님들이 너무 럭셔리해요.” 아니! 내소사의 스님들이 사치스럽다니, 대체 외국인의 눈에 스님들이 가진 그 무엇이 그토록 눈에 거슬렸을까?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절의 사무실과 모든 방에 있는 컴퓨터 그리고 휴대전화와 승용차를 가지고 있는 스님들의 모습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마침 그때 고맙게도 그 절에 고급차는 없었다) 그들의 말을 듣고 통역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대략 난감하여 서로의 얼굴을 바라만 보았다.

지난 2005년 동남아시아 지진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탁발에 나선 조계종 총무원 승려들 사진 <한겨레> 자료

그랬다. 그때까지 그들의 눈에 비친 불교의 수행자는 세상을 떠난 고행자였다. 철저하게 현대문명과 거리를 두고 은둔하는 명상가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우리들에게 극단적인 무소유와 청빈 속에서 ‘명상’하는 ‘은둔’의 ‘고행자’을 보고자했던 것이다.

그 이후, 나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외국인들과 같은 생각과 정서를 가진 이웃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과연 세속 사람들의 이런 생각은 옳은 것일까? 이런 수행자상은 누가 어떻게 만든 것인가? 그리고 이런 생각에 동의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의 정신에 맞는 것이고, 출가수행자의 본분의 전부이며, 이웃대중에게도 유익한 것인가?

또 하나의 기억은 1970년대 송광사 구산 방장 스님의 수행과 덕화에 감응하여 구도의 길을 걸었던 외국인 출가수행자들을 통해서이다. 그들 대부분은 서구의 문화권에서 매우 높은 교육을 받은 지성인이었으며, 자본과 성공의 세계를 추구하는 삶의 방식에 회의를 품어 진정한 인간의 길을 묻는 청년구도자였다.

얼마 전, 몇 년간 한국의 여러 절을 편력하면서 수행한 그들의 글을 우연히 접했다. 책장을 펼치기 전 많이 궁금했다. 그들의 눈에 비친 한국불교는 어떤 얼굴이었을까? “한국의 스님들은 무엇보다도 일상이 가난했고 소박하다. 한 톨의 밥도 함부로 버리는 일이 없다. 사소한 물건에도 공사의 구분이 엄격하다. 그리고 심성은 매우 착하고 부드럽다. 때로는 상식을 벗어나 기행을 하는 수행자도 보게 되는데, 그들 역시 알고 보면 순진하기 그지없다. 겸손하고 서로를 배려하며 맑고 단순하게 살아간다. 검정고무신에 누더기 옷을 입고 살아가지만 무엇보다도 여유롭고 당당하다. 마치 단아한 산과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지만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거의 관심이 없는 그들의 태도이다.(보살행의 구제대비심의 모습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국의 대부분의 절은 시골에 있고, 그 절 아래에는 많은 마을이 있다.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은 매우 가난하다. 먹고사는 일에 매우 힘들어 한다. 많은 가정이 빚에 시달리고 있고, 돈이 없어 아이들에게 높은 교육을 시키지 못한다. 그런데 내가 만난 한국스님들은 이들에게 거의 눈길을 주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화제로 삼지도 않았다. 참 많이 의아했다. 검소하고 맑은 심성을 가진 스님들이 힘겨운 마을사람들을 걱정하지 않는 것이 말이다.

지금 나는 외국인 수행자들의 정직한 시선에서 또 다른 우리들의 얼굴을 본다. 이웃에게 관심과 애정을 거두어버린 유아론적이고 소승적인 우리들의 얼굴을. 오늘 내 이웃에게 비친 ‘자족’과 ‘여유’에 갇혀 ‘방관자’로 남아 있는 한국불교의 오늘의 얼굴을.

다시, 청빈과 자족의 삶을 넘어 이웃을 향한 간절한 관심과 따뜻한 애정을 동시에 구족하고 실현해야 하는 지점에서, 문득 불교 너머 밖에 자꾸 시선이 간다. 보편의 진리가 불법이고 ‘나와 이웃’의 삶을 동시적으로 완성하는 사람이 보살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100년 전 이 땅에 온 엘리제 쉐핑(1880~1934)을 만났다.

개신교 선교사 서서평 사진 <한겨레> 자료

한국 이름이 서서평인 그녀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녀가 조선의 테레사라임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테레사 수녀(1910~97)보다 먼저 태어났고, 1930년 인도의 빈민가로 파견된 테레사보다 18년 앞선 1912년에 이 땅에 와서 사랑과 헌신으로 가난하고 고통받는 조선의 민중을 구원했으니 차라리 ‘조선의 엘리제 쉐핑’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겠다.

서서평은 독일에서 태어나 9살 때 미국으로 건너와 간호사로 지내던 중 개신교에 투신하게 된다. 그리고 조선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산실인 부인조력회와 조선여성절제회, 조선간호부회, 여전도연합회 등의 창설과 함께 이 땅에 헌신하였다.

무엇보다도 서서평은 마음과 몸을 조선의 사람으로 살았다. 당시의 많은 선교사들이 조선을 미개한 나라로 여기고 우월적이며 계몽적인 입장에서 철저하게 미국인으로 살아간 것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그들은 몇 개의 호화 별장을 소유하고, 지리산 아래서 조선인들에게 등짐을 지워 물품을 남시루봉 정상부근에 지은 별장까지 나르게 하고, 그곳에서 호화 파티을 즐겼다. 그러나 서서평은 검정 남자 고무신을 신고, 옥양목 치마를 입고, 보리밥과 된장국을 먹으며 나환우와 걸인들과 함께 살았다.

서서평은 광주·전남 지역에서 헌신했다. 1930년 그곳은 45만 가구 220명 인구 가운데 88만 명이 굶주림에 시달렸고, 걸인은 1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는 1년에 100일 정도 나귀를 타고 병자와 여성을 돌보고 교육시켰다. 서서평의 일기에는 당시 조선의 참담한 삶이 역력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 달간 500명의 여성을 만났는데, 성한 사람은 하나도 없고 굶주리거나 병들어 앓고 있거나 소박맞아 쫓겨나거나 다른 고통을 앓고 있었다.”

서서평은 당시 ‘큰년이’ ‘작은년이’ ‘개똥어멈’으로 불린 이름도 없는 여성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불러주며 인간의 자존감을 세워주었다. 그는 나환우의 아들을 비롯해 14명의 고아를 양아들·딸로 삼아 키웠으며, 소박맞고 쫓겨난 38명의 미망인을 데려와 함께 살았다.
평등과 박애의 정신으로 사랑스럽지 못한 자를 사랑스런 존재로 만든 그는 1934년 자신의 주검마저 송두리째 병원에 기증하고 떠났다. 그에게 남겨진 것은 반쪽짜리 담요 한 장과 잡곡 한 바가지가 전부였다.

서서평, 그는 스스로 가난을 선택했다. 가난하게 살았지만 결핍을 느끼지 않았다. 소유에서 자유로웠다. 나아가 그는 가난의 자족에도 매이지 않았다. 아픈 사람과 함께 살며 아픔을 어루만졌다. 『금강경』이 어디 장경각에만 있겠는가? “마땅히 그 무엇에 붙들리지 말고 자비심을 행하라”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의 가르침이 서서평의 일생에서 생생하게 보여지는 것을. 그는 성공이 아닌 섬김의 삶에서 스스로를 낮추고 비웠다. 비움 속에서 나누고 나눔 속에서 비웠다. 대승의 길이 어디 『대방광불화엄경』에만 있으랴. 세상이 환상인 줄 알지만 삶과 역사를 만들어가고, 나와 네가 본래 없는 줄 알지만 나와 이웃이 교감하고 감동하는 삶을 엮어가며, 고통이 본래 없는 줄 알지만 무지와 욕탐으로 생긴 고통을 소멸하고자 하는 보살행이 조선의 사람 서서평에게 있지 않는가?

동안거 들어가는 선승들 사진 <한겨레> 자료

『유마경』은 이렇게 말한다. “보살은, 모든 것이 덧없는 줄 알지만 선행을 쌓는 일에 싫증을 내지 않는다. 모든 것이 괴로움인 줄 알지만 기꺼이 생사 가운데 들어간다. 열반이 적정한 줄 알지만 짐짓 궁극의 적멸에 안주하지 않는다. 세상을 벗어난 한적함을 알지만 몸과 마음으로 늘 노력하고 실천한다. 사람들로 왁자지껄한 장소를 찾지만 정작 번뇌와 혼돈을 훌쩍 넘는다. 무아인 줄 잘 알지만 사람들에 대한 자비심을 잃지 않는다.”

‘우리들의 세계’에 안주하고 자족하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들을 ‘당신들만의 세계’로 밀어낸다. 그리고 서로가 낯설어진다. 서로에게 무관심해지고 자신의 속내를 감춘다. 단절과 고독과 고립의 세계가 만들어진다.

산중 수행자의 검정고무신과 서서평의 검정고무신, 이 두 개의 검정 고무신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법인 스님

법인 스님16세인 중학교 3학년 때 광주 향림사에서 천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대흥사 수련원장을 맡아 '새벽숲길'이라는 주말 수련회를 시작하면서 오늘날 템플스테이의 기반을 마련했다.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과 (불교신문) 주필을 지냈으며, 현재 조계종 교육부장으로 승가 교육 진흥에 힘을 보태고 있다.
이메일 : abcd3698@hanmail.net     

2012년 8월 26일 일요일

부처도 화낼 사기극


이글은 한겨레신문 조현기자 블로그 휴심정의 벗님글방 2012-08-24일자 기사 '부처도 화낼 사기극'를 퍼왔습니다.

윗 산 동굴에서 본 히말라야 설산 연봉 풍경

필자에게는 늘 괴로운 종교의 역사적인 문제가 있다. 다름 아닌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 되는 종교 집단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죽여 왔다는 사실에다가, 그 죽이는 방법 또한 비인간적인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다는 것이다. 그것도 수많은 군중 앞에서! 그 이면엔 통치권자와 타락한 성직자들의 뒷거래, 즉 가진 자와의 결탁 아래서 이뤄졌고 결과란 늘 우매한 민중, 선량한 민중의 피해로만 끝났다. 

여기서 하룻길 가까운 곳에 리왈싸로 불리는 산중 동네에 초뻬마란 종교적인 성지가 있다. 그곳은 인도 기존의 힌두교, 불교, 또 자인교나 시크교까지에 속하는 광범위한 성지로써 일 년 내내 순례자가 그치지 않는다. 아무것도 모르고 필자가 처음 그곳을 갈 때는 이쪽 티베트 스님들을 그냥 호기심으로 따라갔을 뿐이다. 25년 전이다. 높은 산 위에 어찌 그런 예쁜 호수가 있고, 호숫가에는 소박한 티베트 절 하나와 조그만 힌두 사원 하나가 서로 아담한 배경으로 주위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호수에서 약 2km 위쪽 바위산에 동굴이 있는데 여기가 실제적인 성소로 땀을 뻘뻘 흘리며 두세 시간은 족히 걸려 올라가야 했다. 여기가 바로 성지일 수가 있는 성자의 수행동굴인 것이다. 아래의 호수는 이 동굴 수행자의 신통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다 올라간 뒤에 눈에 들어오는 히말라야 설산 연봉의 장관은 그야말로 여태껏 올라오며 흘린 땀과 가쁘게 몰아쉰 숨을 보상이라도 해주는 듯 그 자체만도 보람과 기쁨이었다. 그러면서 야 내가 정말 성지에 왔음을 스스로 느끼고 신심을 북돋우며 환희의 보람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바위산 동굴 코앞까지 굽이굽이 아스팔트 찻길이 나 있고, 그 옛날 손으로 다져 만든 돌계단 하나하나에 정성이 베인 바윗돌 계단은 없어지고 호화로운 대리석 계단으로 바뀌었다.  호수 주위엔 경쟁이라도 하는 듯 새로 지은 티베트 절이 자그마치 다섯 개가 위용의 자태로 자리하고 있다. 그 다섯 개 중 가장 늦게 지은 절이 제일 규모가 크다는 게 눈에 두드러진다. 처음에 있는 조그만 절은 아예 다른 절에 가려져 있어 거기도 절이 있었던가 할 정도다.

거기에다 어느 날부터 시멘트 철근 공사로 거대한 축대를 쌓기 시작했다. 한 절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어떤 불상을 세운단다. 필자에겐 걱정스러웠다. 그 성지 자체로만 해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데 저리 큰 불상이라면 주위와의 조화나 분위기에서 문제가 될 건 데 하면서, 또 이미 주위엔 다른 종교의 신전이 있는데 그들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면서. 그 작업이 무려 십 년이나 넘게 걸리고 있었으니 그 규모가 얼마 만 한지 상상이 갈 것이다.

리왈싸 정부 호텔에서 본 광경. 문제가 된 대형 신상이 불상 너머 멀리 보인다.

그런 공사기간에 주위 인도 산골마을 힌두교 주민들이 이곳 히마찰 주 정부 지사에게 탄원을 하고 시위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즉 기존의 자기들 땅에 저렇게 큰 종교시설을 취소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막말로 굴러온 돌이 박힌 돌 쳐내는 격이리라. 다행히도 주지사의 종교적인 넓은 관용의 중재로 마무리되기도 했다. 인도 땅엔 어떤 종교의 자유가 있으니 함께 공존해야 된다는 설득으로 주민들을 달래게 되었다. 

드디어 그 공사가 완성되어 이곳 달라 라마의 축성식, 즉 불교 전통의 불상 점안 행사가 예고되었고 올 봄 삼일 간의 축제 행사로 사방에 공고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겠다. 그 행사를 치르지 못했다. 뉴스가 인도 매스컴에 다 도배를 했다. 이젠 종교적인 행사가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 되면서 큰 문제로, 아니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는 꼴로 전락했다. 막상 알고 보니 이 프로젝트를 인도 정부에 허가 낼 때의 조항과 다른 작업, 본래 서류상의 인도에선 난 역사적인 인물 불타 석가모니 불상이 아닌 자기들 종파불교 전통의 한 인물 불상을 조성한 것에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법적인 문제로써 끝내 달라이 라마도 행정적인 서류를 확인하고는 인도 정부의 처사에 어떤 발언을 못 한 것이다. 마지막 그곳을 떠나 올 때 한 말씀이란, “저렇게 크게 돈 들여 만든 불상이 법은 설하지 못해”하면서 너털웃음을 지었다.

결국 인도 망명 53년 동안 달라이 라마의 개인적인 종교행사를 치르지 못한 것은 첨으로 생긴 일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 거기엔 큰 돈 들여 만든 거대한 불상이 어떤 종교적인 신앙 행위를 할 수 없는 그냥 큰 시멘트 불상으로만 남아 있다. 물론 불상 얼굴엔 금빛 찬란한 도금과 몸에는 값나가는 여러 가지 보석으로 휘황찬란하게 장식되어 있다. 최근 어떤 라마가 와서 주민들 모르게 비공식적으로 점안을 했다고는 한다. 그러나 공식적인 개원식은 아직도 못하고 있다.

필자가 이 한자리에서 오랜 기간 살아오면서 많은 가르침 중에서 최고의 배움은 불교가 자비를 바탕으로 민중을 맘 편하게 살도록, 즉 사람을 위한 종교로 배워온 것이다.  처음 망명 초기엔 모두가 법에 대한 진실한 수행으로 누구에게나 존경 받고 인정을 받아왔다. 쉽게 말해서 배고프고 가난하게 살 때는 출가정신을 놓치지 않았다. 승려로서의 순수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절하게 간절히 공부했고 검소하게 살며 수행했다. 부처님 제자로서의 근본을 지켜가며 바른 수행집단으로 존재한 것이다. 그런데 이젠 큰 절과 함께 부유해져 먹고사는 것이 다 갖춰지니 편하게 살아가고 있다. 쉽게 세계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는 아직은 젊고 새파란, 소위 린포체라는 스님들, 생각해 보라. 일생 수행해도 어려운 수행 길은 내던지고 티베트 불교만이 하고 있는 예식을 한다고 그 얼마나 나도는지. 하필이면 그 단골 방문 소재지가 한국이라니. 물론 그 행사에는 참가비가 따른다. 종교가 예식에 언제부턴가 얼마짜리라는 가격이 정해져 온다. 한마디로 흥정되는 상품으로 전락 되어 버렸다. 얼마 전 전화에 “어느 OO린포체가 환속한 거 맞아요?”라는 좀 성급한 문의 전화다. “그렇게 들었다”라고 답하니, “에이, 작년 한국 왔을 때 동참금(참가비) 내고 그 린포체한테 관정도 받았는데” 운운 하면서 실망스런 말투다. 아직은 공부해야 될 나이에 많이 나돌더니 이국 여인과 인연 되어 승복을 벗게 되였다고 한다. 

사람 몸이란 묘한 것인가. 배부르면 졸리고 헛짓을 한다. 이게 소위 성직자로 이어질 때 사회문제 민중의 문제로 나타나는 것이다. 근본을 잃어버리게 되어가는 것이다. 신을 팔고 사후 극락이나 천국을 팔면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반복해 왔던 게 종교의 역사이기도 했다. 지금도 민중의 돈을 매개로 끝없는 큰 신전과 사원을 새로 더 크게 지어오고 있는 것이다. 명목이야 얼마나 그럴싸하고 좋은가, 성전을 신에게 봉헌한다면서 사후를 보장 받는 듯 하는 보장을 미끼로 착한 민중을 이끄는 일이라니. 사실 신이나 부처가 그따위 신전이나 사원의 불상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진리와는 먼 종교가 아닌 저속하기 짝이 없는 인간에 대한 모독이며 무례이기도 하다. 아니 사기극이다. 나아가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이끈다면 그 성직자는 저속하고 비열한 사기꾼에 불과하다. 

이곳 달라이 라마의 한탄스런 말씀이 이 글을 대변하리라. 법회에서 수없이 말해 온 것이기도 하다. “요즘 티베트 라마들이 하는 일이라니, 큰 절 짖고 큰 불상 만드는 게 불교인 양 헛짓만 한다. 수행이나 공덕은 토끼 꼬랑지처럼 짧은데, 이름과 명성만큼은 토끼 귀처럼 길다”라고. 

필자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위 불상 세우기와 비슷한 일이 생긴 것이다. 십 년도 넘게 추진해오던 일이 있었다. 어느 이름 있는 티베트 린포체가 성도지 부다가야에 황금 미륵불상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불상 자체 크기만 백 피트라니 좌대까지 합하면 기존의 정각 대탑보다 더 크게, 그것도 세계최대 운운의 타이틀을 걸고 전 세계 불자들을 상대로 모금을 해온 것이다. 한국 땅에서도 상당한 모금을 해간 것으로 안다. 필자는 이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어디서나 반대 의견을 해왔다. 이유는 너무 간단하다. 우리 부처님 정각 터인 성도지 자체에 의미가 있고, 그 옛날부터 숭앙해 온 정각 대탑 자체로 불교도 신앙의 의미가 있기에 그 어떤 큰 불상이나 사원 건축을 노골적으로 반대해 왔다. 그러나 필자는 어떤 명함이나 타이틀이 없어 막말로 씨가 먹히겠는가. 사실 부다가야 정각 대탑과 주변 전체가 우리나라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나 석굴암처럼 유네스코에서 정한 세계 역사 유적보존물이기도하다.

드디어 불사를 할 수 있는 금액이 다 마련되었는지 부다가야가 속해있는 인도 비하르주 정부에 허가서를 냈다. 그러나 일언지하에 퇴짜를 맞았다. 우리 주에는 어떤 새로운 그런 특정 종교의 큰 신상을 설립할 수 없다고 공언해 버리니 난민으로써 어찌해 볼 수가 없는 상황으로 되어 버렸다. 차일피일 미루면서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가 작년 가을에 그 프로젝트의 최고 실력자 린포체의 뜻하지 않은 죽음의 소식을 전달 받았다. 그런 죽음은 사망에 가까운 부끄러운 죽음이었으니까. 천수를 누리지 못한 채 안타깝게도 아쉬운 나이에, 또 그런 큰일을 하겠다고 세상 만방을 다니더니 어쩌지 하면서 속으로 안타까워했다. 사실 인도의 가난한 민중을 위하는 데에 그 큰 비용을 쓴다면 우선 사람을 위한 일이지 않겠는가. 그것은 법에 맞고 또 이 시대에 해야 할 실질적인 일이기도 하다. 돌아가신 마더 데레사 수녀가 하신 것처럼 순수한 사람을 위한 봉사의 일은 왜 못할까. 이런 일이 참으로 해야 할 숭고한 우리들 인간의 일이라고 확신한다. 

지금도 필자는 그 땅 성도지 부다가야에, 불교도 최고의 성지인 곳에 더 이상 오염시키지 말라며 그런 거대한 프로젝트를 분명하게 반대한다.
늘 말해오지만 불상은 부처가 아니다. 부처의 상징물일 뿐이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부처가 되는 가르침을 말했지 불상을 만들라는 말은 해본 적이 없다. 초기불교에서는 감히 부처의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이후 세월 감에 순 인간적인 정서로 부처님을 존경하는 순수한 의도로써 불상을 빚어 숭배의 대상이 된 것이었다.

이제 불자들도 불법의 요체를 바로 공부해서 깨어있는 의식을 갖추어야 한다. 무조건 되나캐나 의미 없는 큰 불사에 공덕인지 정법인지를 헤아려 바른 시주를 할 그런 열린 시대이다. 종교인의 본질이라고 할 인간의 영성은 큰 성전이나 사원, 또 커다란 신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정화에서 오는 외모가 아닌 내적인 마음의 정화, 즉 물 없이 목욕하는데서 오는 것임을 알아차려야만 한다. 

2012년 8월 천축의 우기 철에,  비구 청전 합장.

청전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