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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6일 월요일

당신이 아는 육영수는 없다


이글은 대자보 2013-05-03일자 기사 '당신이 아는 육영수는 없다'를 퍼왔습니다.
[정문순 칼럼] 육영수 신화는 독재를 은폐한 권력의 상징조작

오늘날 박정희 신화를 이루는 구성 요소 중 하나이자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 못지않게 그 이미지에 기대려고 하거나 톡톡히 덕을 본 존재는 어머니 육영수이다. 역대 선거에서 충청권이 캐스팅 보트를 쥐었음에도 박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충청도에 대해서만큼은 마음을 놓고 있었다. 충청의 자부심이 된 세종시를 만든 건 노무현이지만, 충청도 사람들에게는 자기 지역이 박근혜 어머니의 고향이란 점이 행정도시의 연원을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했다.

옥천의 육영수 생가 터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됐으며, 지금은 육영수 영화도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고, 대한노인회는 우람한 숭모비까지 세웠으니,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육영수는 국민적 위인의 반열에 올라 있다. 육영수가 탐탁찮은 사람은 없을까. 박정희한테는 학을 떼는 사람이라도 그의 아내에게만큼은 호의적인 경우도 적지 않다. 육영수에 대한 호불호는 이념이나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떠난 듯하다. 한 진보 언론은 박 대통령에게 강한 아버지 말고 부드러운 어머니를 닮으라고 조언했을 정도다.

그러나 육영수가 처음부터 현모양처의 화신으로 통했던 것은 아니다. 1967년 한 청와대 출입 기자가 박정희의 청와대 생활을 쓴 책에 육영수 인터뷰가 실려 있는데, 기자는 육영수를 잘 모르는 사람 대하듯이 하고 있다. 국민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존재라고 쓰여 있는 이 책의 ‘영부인’은, 수줍음 많고 평범한 가정부인의 모습이었지 지금 육영수의 이미지로 굳어진 범접하기 힘든 고상한 인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박정희가 권력을 틀어쥔 지 이미 6년이 지난 때였다. 육영수의 이미지가 그때부터 골격이 잡혔다고 해도 1974년 서거 때까지 7년을 넘지 않는다. 이 기간은 박정희 정권이 재선과 3선을 거치며 마침내 껍데기 민주주의마저 내던지고 세계사에 유례없는 철권 통치로 치닫던 시기와 일치했다. 육영수의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나쁜 권력이 의도적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육영수의 활동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퍼스트레이디 시절 장·차관, 재벌 등 고위층 부인네들을 모아 봉사 모임을 이끌었던 ‘양지회’이다. 육영수를 떠받드는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을 성심으로 어루만지고 봉사에 헌신하는 모습의 그녀를 기억하려고 하지만, 양지회는 어두운 시절 양지가 아닌 음지에서 권력층끼리 검은 돈이 오간 창구 구실을 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사후에, 시인 모윤숙이 “목련꽃 닮은 당신” 운운하며 찬사를 바쳤던 육영수의 실체는 과연 한복 입은 자태만큼이나 우아했을까.

인터넷을 뒤져보면 육영수 집안의 권력 지형도를 보여주는 가계도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박정희 시대에 이 집안은 매부를 잘 만난 덕에 평범한 교사에서 일약 5선의 국회의원으로 벼락출세한 육영수 오빠를 비롯하여 장관, 방송국 이사, 신문사 회장, 은행장 등 권력의 요직을 꿰찼음을 보여준다. 그 위세는 박정희의 친가 쪽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육영수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버지가 친일 대부호로서 막강한 위세를 누린 집안 배경도 작용했을 수 있다.

육영수 집안이 박정희 당대에만 영화를 누린 것도 아니었다. 조카사위 한승수는 6공 때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하여 이명박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냈다. 또 한승수와 사돈지간인 김진재는 부산에서 오랫동안 지역구 의원을 했고 옛 한나라당 부총재를 지냈으며, 그의 그늘이 자식에게도 이어져 그 아들은 현 새누리당 김세연 의원이다. 친정 피붙이와 친·인척들이 대대로 출세한 것이 육영수 탓은 아니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육영수가 청와대의 야당 노릇을 했고 남편에게 입바른 소리를 곧잘 했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 자신이 외척의 세도를 막는 일에 앞장서야 했다. 육영수가 청와대의 야당이라는 말은 다름 아닌 박정희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야당’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도 모를 것 같은 철권 통치자에게서 나온 말을 무턱대고 믿을 수는 없다. 되레 육영수 자신이 정치에 맘대로 개입한 흔적도 있는데, 은사의 남편을 서울시 교육감에 앉혔다는 기록도 찾을 수 있다.

육영수는 자식 교육에도 극성이었던 것 같다. 그녀의 팬들이 ‘현모’의 징표로 자랑스럽게 전하는 생전의 일화들을 보면, 아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늦게라도 오면 교실 밖에서 기다렸다거나 학교 커튼을 직접 빨래해 줬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대통령 부인으로서 체통을 잃거나 극성 엄마의 면모를 보인 ‘영부인’를 해당 교사는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하다.

권력자가 제 맘에 안들면 자기 당 의원도 잡아다 고문하고, 야당 총재의 직무를 정지시킬 수 도 있었으며, 언론의 입도 철저히 봉인됐던 시대에, 국민들이 대통령은 물론 청와대 안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 수 있는 정보 통로는 없었다. 박정희가 논두렁에서 농부들과 농주를 마시는 모습이나, 육영수가 장·차관 부인 중 외제 핸드백을 들고 다니는 사람에게는 면박을 주었지만 손수 빚은 막걸리를 대통령 선물로 바친 사람은 아주 좋아했다는 ‘막걸리 일화’는, 그것이 설령 사실일지라도 어디까지나 권력의 개입이 가능한 낮의 역사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권력자는 낮과 밤이 달랐으며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낮의 역사가 대부분이다. 정보정치로 지배했던 권력의 밤을 어떻게 제대로 알 수 있겠는가. 박정희가 안가에서 근신들과 여자 연예인의 시중을 받으며 막걸리 대신 최고급 양주를 즐겨 마신 밤의 역사는 그가 불명예스럽게 죽었기에 드러날 수 있었다.

박정희가 지배하던 때는 가부장적 독재 권력의 흉포함을 자애로운 여성의 이미지로 덧칠했던 권력의 일방적인 상징 조작만 가능했던 시대였다. 박정희 독재를 합리화해 주고 싶은 사람들은 박정희가 집권 후반 막다른 길로 치달은 것마저 남편을 뒷받침해 주던 그녀의 부재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이들에게 육영수는 철저하게 박정희 독재의 본색을 가리기 위해 동원된 존재에 불과하다. 실체 없어 보이고 부풀린 혐의가 짙은 육영수 신화가 아직 걷히지 않았다는 건 그녀 딸의 집권과 더불어 여전히 박정희 시대가 저물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징표이기도 하다.

* 4월 6일 칼럼을 손본 글입니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로 [한국문학의 거짓말- 2000년대 초기 문학 환경에 대한 집중 조명](작가와 비평, 2011)의 저자입니다.

2012년 10월 2일 화요일

영화 26년 개봉, 대선에 어떤 영향 미칠까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10-02일자 기사 '영화 26년 개봉, 대선에 어떤 영향 미칠까'를 퍼왔습니다.
육영수 여사 미화 영화도 동시 개봉… 국가권력 향수 vs 역사퇴행 저지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의미심장한 두 편의 영화가 관객 앞에 놓인다. 고(故) 육영수 여사의 일대기를 그린 와 1980년 광주민중항쟁 당시 학살의 책임자를 저격하는 (26년)이다. (그녀에게)는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의 어머니를, 은 군사독재세력의 만행을 다루며 정치적 메시지를 던질 것으로 보여 투표장에 나설 유권자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그녀에게)는 1974년 광복절 행사 도중 49세의 나이로 암살된 육영수 여사의 생을 다룬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영화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퍼스트레이디로서 극적인 삶을 살다간 그녀의 일생에 초점을 맞춘다. 극 중 박근혜는 육영수 여사 사망 이후 가족들이 우는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장년층에게 ‘국민의 어머니’로 인식돼있는 육 여사의 이미지는 영화를 통해 박 후보에게 투영될 가능성이 높다. 

강풀의 만화가 원작인(26년)은 광주학살의 피해자들이 직접 가해자를 사살한다는 내용이다. (26년) 제작을 맡은 ‘청어람’의 최용배 대표는 “영화를 통해 80년 광주의 가해자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현실을 보여주며 고통 받은 당사자들이 나서지 않으면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공감하게 만들 것”이라 밝혔다. 

▲ 영화 <26>년의 주인공 한혜진. ⓒ나무픽처스

이 영화는 사실 우여곡절이 많았다. 2008년 제작에 나섰다가 석연찮은 이유로 투자자들이 이탈해 제작을 중단한 경험이 있다. 그 뒤 몇 차례 제작이 무산되다 4년 뒤인 올해 3월에야 비로소 ‘크라우드 펀딩’(SNS를 활용해 프로젝트 후원을 받는 플랫폼)을 이용, 소셜 펀딩업체 ‘굿 펀딩’으로 시민들의 소액 후원을 받아 제작이 가능했다.

이질적인 역사관을 배경으로 한 두 영화가 대선 직전인 11월 말 사실상 동시 개봉하는 점은 상징적이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영미문학, 문화평론가)는 “(그녀에게)는 육영수를 찬양하고 군사독재시절의 복고적 향수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 뒤 “한국사회가 합의하고 있는 민주주의 가치와 과거 박정희 체제의 가치는 공존할 수 없다는 점이 두 영화를 통해 드러날 것”이라 짚었다. 

현재 한국사회 미디어 지형은 과거 국가권력의 향수를 자극하는 쪽과 역사의 퇴보를 막으려는 쪽으로 나뉘는 모양새다. KBS는 지난 달 고(故) 박태준 전 포스코 명예회장의 일대기를 담은 드라마 (강철왕)을 오는 12월 방송하려 했던 사실이 알려지며 논란이 일었다. (강철왕)은 1970년대 개발독재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연스럽게 부각될 수밖에 없는 서사를 갖고 있다. 김인규 KBS사장은 “(강철왕)은 올해 안에 제작이 불가능하다”고 해명할 수밖에 없었다. 

KBS는 지난해엔 독재자 이승만 전 대통령과 친일파 백선엽 장군을 미화하는 다큐멘터리 제작에 나섰다가 사회적인 지탄을 받기도 했다. 공영방송의 이 같은 모습은 용산참사의 이면과 진실을 언론의 보도방식으로 다루며 큰 호응을 얻었던 영화 (두 개의 문)과 대조적이다. 

올해 대선에서 혹 역사의 퇴행을 걱정하는 이가 있다면 10월 초 개봉하는 (남영동1985)를 지인에게 추천하는 게 좋다. 영화는 고(故)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이던 1985년,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22일 동안 고문당한 내용을 담았다. 영화는 우리에게 잊고 있던 역사적 자각과 함께 행동을 요구한다. 

정철운 기자 | pierce@mediatoday.co.kr

2012년 7월 31일 화요일

박근혜, 정수장학회에서 20억 넘게 받아


이글은 시사IN 2012-07-31일자 기사 '박근혜, 정수장학회에서 20억 넘게 받아'를 퍼왔습니다.
박정희가 빼앗은 부일장학회는 1982년 박정희와 육영수의 이름을 따 정수 장학회로 간판을 바꾸었다. 박근혜 의원은 장학회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20억원이 넘는 돈을 받았다. 장학회 관계자로부터 후원금도 받았다

1962년 4월의 어느 새벽. 서울 청운동 송혜영씨 집에 중앙정보부 직원들이 들이닥쳤다. 그 사내들은 송씨를 비행기에 태워 부산으로 끌고 갔다. 도착한 곳은 부산 중앙정보부(중정) 사무실. 중정은 송씨가 외국에서 산 다이아몬드 반지와 카메라를 밀수했다고 몰아세웠다. 세관에서 허락을 받은 물품이었다. 담당 세관원도 불려왔다. 밀수가 아니라고 말하자, 세관원은 며칠 후 해고됐다. 송씨는 일본에서 치료받는 남편을 불러오기 위한 인질이었다. 남편 김지태씨(당시 부산일보 사장 겸 부일장학회 이사장)가 바로 귀국했다. 귀국하자마자 중정에 끌려간 김씨는 군 검찰에 의해 구속됐다. 관세법 위반, 부정축재 혐의 등 9개 혐의가 덧씌워져 김씨는 1962년 5월24일 7년 징역형을 구형받는다. 

 
1970년 11월30일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김지태 전 부일장학회 이사장(오른쪽)이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고 김지태씨 평전은 그의 표정이 밝아 보이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박정희, 부일장학회 강탈 지시

1962년 6월20일 부산 군수기지사령부 내 법무관실. 김씨는 죄수복을 입고 수갑을 차고 있었다. 그 앞에는 법무부 장관을 지낸 고원증 변호사가 앉아 있었다. 고 변호사는 미리 작성해둔 서류를 꺼냈다. 부산일보·한국문화방송·부산문화방송의 주식 100%, 부산 서면 일대의 금싸라기 땅 10만 평, 그리고 부일장학회의 경영권을 국가에 무상 기부하겠다는 기부 승낙서였다. 김지태씨는 여기에 도장을 찍는다. 김씨의 아들 김영구씨는 “내가 인감도장을 들고 가자 부산 군수기지사령부 법무관실에서 아버지가 수갑을 찬 채로 운영권 포기각서에 서명하고 도장을 찍었다”라고 증언했다. 

고원증 변호사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부터 김씨가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기로 약속했으니 그 재산으로 장학재단을 설립하라는 지시를 받은 상태였다고 한다. 고 변호사는 와의 인터뷰(2004년 9월호)에서 김씨는 도장을 찍은 지 이틀 뒤에 박정희 의장 지시로 석방됐고, 김씨의 혐의사실 자체가 터무니없는 내용이었다고 증언했다. “내가 도장을 받으러 부산에 내려갔을 때 박 의장이 (수사)기록까지 다 보고 올라오라고 했다. 사실 김씨 잘못은 명의 신탁한 토지를 등기하는 과정에 몇 사람이 생사도 확인 안 되고 연락도 안 돼 도장을 파서 찍은 것과 부인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준 것뿐이었다. (김씨가 재단을 헌납하자) 박 의장이 김용순(군수기지사령관)에게 ‘너 곧바로 내려가서 풀어주라’고 지시했고, 김용순은 그날 전용 비행기로 부산으로 내려가 풀어줬다.” 

중정 부산지부장 박용기씨의 회고록을 보면 박 의장이 부일장학회 강탈을 기획한 대목이 나온다. 2000년 3월 발간된 에서 박씨는 1962년 1월2~3일경 박정희 의장과 독대한 자리에서 김지태씨에 대한 조사를 지시받았다고 밝혔다. 

부일장학회는 이렇게 사라지고 만다. 김씨는 재산을 국가에 강제로 헌납했는데, 헌납받은 곳이 5·16장학회로 되어 있었다. 5·16장학회는 아직 설립되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렇게 부일장학회와 언론사 세 곳은 5·16장학회 손에 넘어간다. 5·16장학회는 박 전 대통령 친인척과 측근, 특히 출신학교인 대구사범 동창들이 장악했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5·16장학회는 대구사범과 친인척들의 민원 처리 사무소 구실을 했다”라고 말했다. 

 
1996년 발간된 <부산일보 50년사>에 장학회 이사장으로 소개된 박근혜씨.

5·16장학회 초대 이사장은 이관구 전 재건국민운동본부장이 맡았다. 2대 이사장인 엄민영씨는 박정희와 하숙을 같이 한 인물. 5·16 쿠데타 뒤 만들어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박정희 의장의 고문을 지냈고 내무부 장관에 올랐다. 4대 이사장 최석채씨도 박 전 대통령 친구였다. 최씨는 문화방송· 회장을 지냈다. 5대 이사장을 지낸 조태호씨는 육영수 여사의 동생 육예수씨의 남편이다. 그는 1965~1968년 장학회 이사를 지냈고, 1968년에는 문화방송 이사를 지냈다. 1983~1988년에는 회장을 겸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1982년 1월14일 5·16장학회는 박정희의 정(正)자와 육영수의 수(修)자를 따서 정수장학회로 간판을 바꾸었다. 여전히 박정희·육영수 부부의 개인 재산은 1원도 내놓지 않은 상태였다.  노조는 “정수장학회는 유신세력 집합체였다”라고 설명한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나온 대구사범 출신들의 놀이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박 전 대통령의 동기인 조증출 전 부산문화방송 사장, 왕학수 전 사장이 정수장학회 이사를 지냈다. 


정수장학회에서 20억원 넘게 받아1995년 박근혜 의원은 정수장학회 8대 이사장에 올라 2005년 2월까지 이사장을 지냈다. 박 의원은 정수장학회 이사장으로 있던 1998년 1월부터 2005년 2월까지 연간 1억~2억3520만원을 보수로 받았다. 외환위기 이후 재정이 열악해지자 정수장학회는 2000년 1월 장학생 선발을 담당하는 장학국을 폐지한다. 하지만 같은 시기 비상근직이던 이사장 신분을 상근직으로 바꾸면서 1999년 1억3500만원이던 연봉을 2억5350만원(섭외비 포함)으로 올렸다. 박 의원은 10여 년간 총 20억원이 넘는 돈을 받았다. 당시 서울교육청은 “이사장의 연봉이 공익법 취지나 사회통념상 과다하다고 볼 수 있다”라며 개선하라고 권고했다. 는 2002년 3월 박근혜 의원이 1998년과 1999년에 각각 받은 1억원, 1억3500만원의 섭외비 대부분을 재단업무 이외 용도로 사용했고, 소득세를 내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보도가 나간 며칠 뒤 박근혜 의원은 소득세 1억2000만원을 자진 납부했다. 

2004년 김지태씨의 후손들이 정수장학회를 되찾겠다고 나섰다. 논란이 일었지만 박근혜 의원은 꿋꿋했다. 인터뷰에서 박 의원은 “정수장학회 이사장직을 사퇴할 생각은?”이라는 질문에 “잘못된 것이 있어야 사퇴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2005년 2월 박 의원에 이어 최필립 전 리비아 대사가 이사장에 선임됐다. 최 이사장은 1974년 박 전 대통령 의전·공보비서관을 지낸 인물로 박근혜 의원의 최측근으로 꼽힌다. 박 의원이 2002년 한국미래연합을 만들었을 때 운영위원으로 참여했고, 2007년 대선 경선에서도 핵심적인 일을 맡았다고 한다. 이호진 전국언론노동조합 부산일보지부장은 “2005년 3월 최 이사장이 취임 직후 노조와 가진 면담 자리에서 ‘박 대표가 최근 미국 방문에 앞서 잠시 조언을 해달라고 해서 만났다. 박 대표가 그 자리에서 장학회를 좀 맡아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설명했다”라고 밝혔다. 정수장학회 이사 5명 가운데 3명은 박 의원이 임명한 사람이다. 노조가 공개한 자료에 의하면 정수장학회 관계자들은 매년 박근혜 의원의 정치후원금으로 거액을 내놓고 있다. 최필립 이사장 가족은 2004~2010년 박 의원에게 정치 후원금 3000만원을 냈다. 정수장학회 장학생 모임인 ‘상청회’ 김삼천 회장도 2004~2010년 정치 후원금으로 2500만원을 냈다.

2003년 5월 부산일보 사장이 박근혜 정수장학회 이사장에게 장학기금을 전달하고 있다.

박근혜 “이미 사회에 환원된 공익재단”

하지만 정수장학회 이야기만 나오면 박근혜 의원은 자신과 관계없다고 선을 긋는다. 2007년 5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부일장학회 헌납사건은 국가 권력에 의해 강제로 빼앗긴 것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진실화해위는 “정수장학회는 헌납된 재산을 피해자들에게 반납하거나 반납이 안 되면 국가가 대신 배상을 하라”고 밝혔다. 그러자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강하게 반발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어거지가 많다. (정수장학회는) 공익법인이기 때문에 이미 사회에 환원된 것이다. 또 환원하란 것도 어폐가 있다. 그런데 자꾸 이런 식으로 틈만 나면 또 (거론)하고 또 (거론)하는 것은 (나를) 흠집 내기 위한 정치 공세일 뿐이다.”

박근혜 의원은 2007년 7월 대선후보 경선 청문회에서 “새 (정수장학회) 이사진이 구성돼 자율적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나와 관계가 없다”라고 말했다. 2011년 12월 인터뷰에서는 “이미 사회에 환원된 공익재단이다”라고 말했다. 2012년 3월 방송기자클럽 토론회에서는 “저와 장학회는 관련이 없다”라고 말했다. 대선 출마를 선언한 지난 7월10일 박근혜 의원은 기자회견에서 “(정수장학회는) 개인의 것이 아니고 공익법인인데 내가 이사장을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관계없는 이사장을 관두라고 하는 게 말이 되는가. 이건 법치국가에서 언어도단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박 의원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야권뿐만이 아니다. 새누리당 한 친박계 의원은 “정수장학회가 부모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는데 자꾸 자신과 관련 없다고만 한다. 꿩이 대가리를 눈 속에 처박고 숨었다고 하는 격이다”라고 말했다. 새누리당 김태호 의원은 “실제 많은 국민이 정수장학회는 박근혜 후보가 주인이란 인식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내 집에 문패 달아놓고 내 집 아니라 하면 누가 믿겠느냐”라고 말했다. 이재오 의원은 “박근혜 대표는 5·16 군사 쿠데타나 유신독재의 반민주·반인권성을 겸손히 사과해야 한다. 정수장학회는 내놓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주진우 기자 | ace@sisain.co.kr

2012년 7월 4일 수요일

박근혜, 유신의 한복판에서 젊음을 불태웠다


이글은 프레시안 2012-07-04일자 기사 '박근혜, 유신의 한복판에서 젊음을 불태웠다'를 퍼왔습니다.
[오홍근의 '그레샴 법칙의 나라']대통령 전용열차까지 타고 전국 누볐다

1976년 1월27일 내무부를 순시 중이던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손재식 지방국장(훗날 5공 정부의 국토통일원장관)을 불러 세워 물었다. "10월 유신의 기본이념이 무엇인가?" 손 국장은 내무부의 엘리트 국장답게 평소 외워 두었던 답을 막힘없이 술술 말했다. "능률의 극대화로 안정과 번영을 이뤄 조국 평화통일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은 지극히 만족스런표정을 지었다. 소문이 나자 정부 각 부처 공무원들은 이 답을 열심히들 외웠다.

1976년 1월이면 이른바 10월 유신을 감행(1972년 10월17일)한 지 3년 3개월여가 지난 시점인데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심한 '유신선포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바로말하자면, 유신은 그 때나 지금이나 누가 봐도, 대통령 박정희 씨 개인이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군대의 힘으로 눌러 헌법기능을 정지시키고, 반대파의 정치활동을 봉쇄하는 등의 초헌법적 비상조치를 한 것임에 틀림없다. 다름 아닌 그 뻔한 이야기를 박정희 씨는 '장기집권 획책'아닌 다른 말로 포장해 합리화시켜 보기 위해 항상 노심초사 했다.

그가 손재식 당시 지방국장의 답변에 만족감을 표시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허나 유신은 말대로, 능률부터 극대화 되지 않았다. 당장 학생과 재야인사들이 대통령 하고자 하는 대로 입 다물어 주고 제동을 걸지 않아야 했으나 그게 그렇게 되지 않았다. 따라서 '다른 사람 아닌 대통령 박정희 씨가 집권하고 있기 때문에 이뤄져야 할' 안정과 번영은 뒤 따르지 않았다. 조국 평화통일 기틀 마련과도 관계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 때문에 유신 훨씬 이전부터 걸핏하면 대학과 고등학교까지 문을 닫았고, 비상사태 선언이니, 긴급조치니, 유신헌법 재신임 투표니 해서 '처음에는 세게, 두 번째는 더 세게'로 이어지는 조치들이 꼬리를 물었다. 개괄적으로 보면 1961년 쿠데타 이후 박정희 씨가 대통령으로서 두 번째 4년 임기(1차 임기는 1963년부터였다)에 들어서는 1967년, 3선 개헌을 노리면서부터 그의 '힘으로 밀어 붙이는 통치'는 시작되었다. 대통령을 오래오래 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5ㆍ16쿠데타 이후 강행한 3번의 국민투표(3선 개헌ㆍ유신헌법ㆍ유신재신임) 모두가 그의 장기집권을 위한 것이었다. 유신과 유신 재신임을 묻는 국민투표에서는 국민들이 투표안건 내용에 대해 찬성과 반대토론을 할 수 없도록 하는가 하면, 개표 참관인의 자격을 제한하는 등, 요즘 세상 같으면 기절초풍할 수밖에 없는 작태도 벌어졌다.

택시를 타고가거나, 대포 집에서 소주를 마시다가도 유신과 대통령의 장기집권에 대해 말 한마디 삐끗 잘못하면 잡혀갔다.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했다고 징역 몇 년씩을 선고 받곤 했다. 유신과 장기집권 반대 투쟁을 벌였다 하여, 멀쩡한 젊은이들을 북한의 지령을 받아 지하조직을 구축하고, 국가변란을 획책했다고 몰아붙여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박근혜 의원은 증거 없는 모함이라 했으나 당시 대통령 박정희 씨가 모를 리 없는 사건이었다. 인혁당 사건 이야기다.

이미 숨진 그들은 최근에서야 정식재판을 통해 무죄가 선고 되었고, 유족들이 수백억 원의 배상판결을 받기도 했다. 박정희 씨 통치시대에 빚어진 소설 같은 이야기들 이다.

그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의원이 요즘 가장 막강한 대통령 후보로 떠오르고 있다. 여론조사 마다 국민들의 지지율 1등이다. 새누리당 내에서도 후보경쟁자가 사실상 없다. 사람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後光) 때문에 그렇다고들 말한다. 민주화와는 엄청나게 거꾸로 간 인생을 살다간 박정희 씨가 오히려 박근혜 의원의 후광이 되어 있다는 것은 아니러니 가운데서도 아니러니다.

행적과 평가가 이렇게 다른 것은 무슨 까닭일까. 박정희 씨가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수출 밀어주기 정책으로 혜택을 본 대기업과 부유층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주류로 떠올라 여론의 주도층이 되어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박정희 씨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평가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미 판은 대선국면이다. '박정희'에 대한 정확한 평가 없이 '박근혜'를 말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오해가 있으면 바로 잡아야 한다.

박근혜 의원은 근래 아버지의 '18년 통치'와 관련해 "산업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은(본) 분들께 사과를 드린다"고 말해 왔다. 박근혜 의원이 지칭한 '산업화 과정'은 정확히 전해지지 않았으나, 아마도 근대화와 장기집권을 위한 3선개헌ㆍ10월유신ㆍ줄 이은 긴급조치 그리고 인혁당 사건으로 대표되는 비민주적인 인명살상 행위 등을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러나 경제적 측면의 근대화를 뺀 나머지 부분까지 산업화라 말하는 건 무리로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정희 씨가 근대화의 기초를 마련하는데 기여한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곧 이어 숫자로 설명하겠지만, "박정희 씨 아니면 근대화의 기초가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그 근대화가 박정희 씨의 잘못을 덮을 수도, 희석 시킬 수도 없다고 본다.

게다가 그가 이뤘다는 근대화(산업화)도 재벌들의 수출을 밀어 주면서, 근로자들과 농민들에게 저임금과 저곡가(低穀價) 같은 희생을 강요하면서 이뤄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1970년 11월13일 전태일 씨의 분신자살도 바로 그런 참혹한 상황에서 비롯된 상징적 사건이었다. 근대화(산업화)라는 것의 성과도 따져 볼 필요가 있다.

해방 이후 6ㆍ25전쟁이 끝나고 휴전이 발효되던 1953년 이 나라의 일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한국은행 자료)였다. 그 소득은 1960년 79달러, 5ㆍ16쿠데타가 일어나던 1961년 82달러이던 것이 박정희 씨가 피격되던 1979년 1693달러에 이른다. (1969년 이전은 1975년 기준의 액수, 1970년 이후는 2005년 기준의 액수) 이게 말하자면 박정희 씨의 산업화 성적표다. 18년 동안 1614달러가 늘었다.

그러나 참고로 전두환 씨는 8년간 1709달러가 불어나 3402달러(87년 말)에 이르렀고, 노태우 씨는 5년간 4312달러가 늘어난 7714달러(92년 말)가 되었다. 김영삼 씨는 IMF 초래 정부이므로 논외로 하고, YS의 IMF경제를 물려받은 김대중 씨는 5년간 595달러가 불어 1만 2100달러(2002년 말), 노무현 씨는 5년간 9532달러가 늘어난 2만 1632달러에 이르렀다.

박정희 씨의 18년 동안, 79달러에서 1693달러가 된 것을 놓고 무려 21.4배나 불어나 '산업화'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좀 가혹한 이야기가 될지 모르나 강조해서 부각시켜야 할 만큼 좋은 성적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초기단계라 소득을 늘리기가 더 쉬었던 점도 있었을 것이라 말하는 사람까지 있다.

박근혜 의원의 사과 가운데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은(본) 분들께'란 대목도 맞는 소리가 아니다. 그 말은 "아버지가 고의성 없이, 피해가 생길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한 일"이라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러나 집권 18년 동안, 특히 집권 후반부에 고문 당하고 구속되고 죽기까지 한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해자 측이 고통을 예상하지 않은 피해자는 한 사람도 없으리라고 본다.

요약하자면, '산업화 과정에서의 피해'라는 말은 적절치 않다. '독재정치 과정에서의 피해'라고 고쳐 말하는 게 맞다. '피해를 입게(보게)' 한 것도 '본의 아니게'가 아니라 충분히 예상되는, 그런 피해를 보도록 의도되기 까지 한 '본의(本意)'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독재정치 과정에서' '본의에 의해' 피해를 본 분들에게"라며 사과하는 게 옳다.

박정희 씨가 72년 10월 유신을 감행하면서 그 사실을 두 차례나 북한에 사전 통보해 줬다는 보도가 있었다. 10월 유신 2개월 후인 72년 12월 북한도 헌법을 고쳐 주석제를 도입하고 김일성이 국가주석 자리에 앉는다. 그렇게 남과 북에서 유신체제와 주석체제가 들어섰다. 박정희 씨는 영구집권을 위해서 김일성과도 손발을 맞췄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박정희 씨는 이 무렵 기회 있을 때마다 '국민총화(國民總和)'를 말했다. 말 그대로 '총화'는 전체의 화합이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박정희 씨가 말한 총화는 내용이 좀 다르다. 판 전체의 화합을 위해 "시끄럽게 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고분고분 말 잘 들으며 맡은 일이나 열심히 하라"는 말이었다. "대통령이 장기집권 하고자 해도 입 다물고 제동 걸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 육영수 여사가 비명에 간 뒤 박근혜 의원은 새마음봉사단 총재 등 유신체제를 위해 맹렬히 활약했다. ⓒ새마음의 길

육영수 여사가 비명에 간 뒤 사실상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한 박근혜 당시 영애도 그 국민총화 이야기를 열심히 하고 다녔다. 총화와 충효(忠孝)의 정신이 흐려지고 있다고 거듭 개탄했다. '화합을 깨뜨리는' 데모하지 말고, 대통령의 유신과 장기집권을 반대하는 목소리 내지 말라는 호소였다. 그녀는 그때 새마음봉사단과 구국여성봉사단의 총재이기도 했다.

퍼스트레이디로서 였겠으나, 대통령 전용열차까지 타고 바람을 일으키며 전국을 맹렬히 누비는 모습이 곳곳에서 목격되었다. 아버지의 장기집권을 위해 유신의 한 복판에서 그녀는 그렇게 젊음을 불태웠다.

박근혜 의원은 아버지의 일을 사과하면서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힌(준)건 아버지이고 나는 좀 떨어진 곁에 있었을 뿐이지만, 아버지 대신 사과한다'라는 뉘앙스를 풍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를 아울러서 '사과문' 내용을 바꿔야 한다. "유신 이념에 따라 장기집권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본 분들께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아버지혼자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저도 유신의 한 복판에서 맹렬하게 뛰었습니다. 분명히 밝히면서 사과드립니다." 진심을 얹어 그렇게 말해야 한다.

 /오홍근 칼럼니스트

2012년 6월 11일 월요일

‘육영수 영화화’에 트위터엔 ‘박정희 행적 검증’ 후끈


이글은 뉴스페이스 2012-06-11일자 기사 '‘육영수 영화화’에 트위터엔 ‘박정희 행적 검증’ 후끈'을 퍼왔습니다.
“주색탐닉 톱스타 섭렵, 육영수에 폭력” (신동아)기사도 급확산

박근혜 새누리당 의원의 어머니인 고 육영수씨의 일대기와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러브스토리를 영화화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1일 트위터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행적에 대한 의견이 쏟아지고 있다. 

트위플들은 그간 보수언론의 미화로 가려졌던 박 전 대통령의 실체에 대한 의견과 관련 기사 등을 너도나도 올려 트위터에는 졸지에 ‘박정희 검증’이 불붙은 모습이다. 팟캐스트 방송 ‘나는 친박이다’와 ‘라디오 반민특위’는 그간 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의원의 실체에 대한 집중조명으로 큰 호응을 얻어왔다. 

노회찬 통합진보당 의원은 이날 CBS 라디오에서 “박근혜 의원의 부친인 박정희 전 장군이 남로당의 핵심당원으로 가입한 죄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사람 아니냐”며 “원조 종북은 박정희 장군”이라고 일갈했다. 

노 의원은 “과거에 어느 사건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종북이라고 얘기한다면 그런 뜻에서는 박정희 장군”이라며 “새누리당이 사실상 박근혜라는 한 사람의 유일체계로 가고 있는데, 사상마저도 일체의 다른 생각을 허용하지 않는 유일사상 체계로 가려는 것인지 되묻고 싶다”고 맹비난했다. 

언론인 고종석씨는 이날자 (한겨레)의 ‘박근혜가 대통령이 돼선 안 될 이유’란 제목의 칼럼에서 “왜 박근혜는 다른 새누리당 후보들과 다른가? 그가 박정희의 딸이기 때문이다”며 “그는 아버지의 정치적 과오를 손톱만큼도 인정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불법으로 빼앗아 지금 그가 움켜쥐고 있는 엄청난 재산을 본디 주인에게 되돌려줄 생각도, 나라에 헌납할 생각도 없다”고 평가했다. 

이어 고씨는 “박정희는 누구인가? 온 겨레가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적 식민통치에 신음하고 있던 시절,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일본 관동군 장교로 복무했던 사람이다”며 “그는 일본의 괴뢰국가 만주국의 ‘국군’에 들어가기 위해 “만주국과 조국(일본-인용자)을 위해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하겠다’”는 혈서를 쓴 사람이다”고 행적을 짚었다. 

고씨는 “그가 관동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조선인 항일투사들에게 총 한 발 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민족을 배신한 사람이다”며 “민족반역자라는 말도 걸맞지 않을지 모른다. 스스로 썼듯, 그의 조국은 일본이었으니까”라고 비판했다.

또 고씨는 “박정희는 누구인가? 해방 뒤 좌익 세상이 이내 올 듯하자, 군대 안의 남로당 세포들을 거느리고 대한민국의 전복을 꾀하던 사람이다”며 “그 일이 발각돼 군법회의에서 제게 사형이 구형되자, 군 수사당국에 동료들을 모조리 밀고하고 제 한 목숨 건진 사람이다”, “요즘 ‘종북’, ‘종북’ 하지만, 박정희야말로 원조 정통 종북이다”고 일침을 날렸다. 

아울러 고씨는 “학생과 시민들의 피로 이룩한 저 빛나는 제2공화국을 군사반란으로 무너뜨리고 18년간 이 나라를 철권으로 옥죄었던 사람이다”며 “그 시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애매하게 빨갱이로 몰려서 죽고 다치고 갇히고 망가졌다. 그 당사자들과 유족들은 지금도 따돌림과 가위눌림 속에서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이력을 짚었다. 

백찬홍 씨알재단 운영위원(mindgood)은 “박정희는 누구인가? 1) 독립군을 토벌하던 관동군의 장교 2) 해방후 남로당 세포들을 거느리고 대한민국의 전복을 꾀하던 원조종북 3) 4.19혁명을 군사반란으로 무너뜨리고 18년간 철권통치한 독재자. 그런 그를 뭐든 잘했다고 주장하는 박근혜”라고 크게 3가지 점에서 정리했다.

EBS 지식채널e 출신 김진혁 PD(madhyuk)는 “박정희나 전두환을 독재자보단 살기 좋은 시대를 만든 지도자로 일부 장노년층이 기억하는 건 당시 언론이 독재자가 아닌 영도자(?)로 끊임없이 미화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이에 비하면 모두 부차적일 뿐이다. 본질은 언론이다”고 언론에 의한 박정희 우상화를 주장했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unheim)는 “극우파와 주사파가 같은 부류임을 몸으로 보여주는 분이 박근혜 선친 박정희씨죠. 일제때는 독립군 때려잡던 관동군 소좌, 해방직후엔 남조선로동당 군책을 하다가, 쿠데타로 18년 동안 군사독재... 이 분이 극우파와 주사파의 공동원조이십니다”라고 독설을 날렸다. 

파워블로거 ‘아이엠피터’는(impeter701)는 “故 육영수 여사 영화가 왜 이 시기에 나올까요? 그 영화에는 육영수 여사와 박정희가 매번 여성편력 때문에 부부싸움했던 이야기도 나오나? 루머라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가 쓴 ‘대통령 박정희의 술과 여자’ 기사에 있었던 사건”이라고 꼬집었다.

이와 관련 현재 트위터와 다음토론방,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는 송문홍 (신동아)기자의 1998년 11월 기사가 널리 확산돼 있다(☞ 기사 보러가기 ). 

(박정희의 유산)(김재홍著·도서출판 푸른숲) 중 당시 중앙정보부원으로 10·26사건에 가담했던 박선호씨의 군법회의, 증언을 토대로 ‘박정희의 술과 여자’를 소개한 내용으로 박 전 대통령의 여성편력과 부인 육영수씨에 가한 폭력 등이 서술돼 있다.

기사는 “충격적인 것은 그 자리 ‘술시중 여인’으로 일류 탤런트와 가수를 비롯해서 연예인을 지망하는 나이 어린 여대생까지 불러들였다는 사실이다”며 “대통령전용 비밀요정의 호스티스를 시중에서 조달하는 책임자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였다”고 밝혔다. 

또 “대통령 술자리에 한번씩 왔다 간 여자들은 당시 이름만 대면 누구나 입을 벌릴만한 TV탤런트와 가수 등 연예계의 일류 스타들이었다고 대통령 박정희의 채홍사는 증언했다”고 설명했다.

기사는 또 “박정희의 술과 여자는 많은 비화를 남겼다. 70년대 초 어느날 대통령부인 육영수 여사를 면담한 어느 여성은 육여사의 얼굴에 멍이 든 것을 본다”며 “소문은 퍼지고 청와대출입기자들이 그 배경을 취재했다. 부부싸움을 하다가 박정희가 재떨이를 던졌다느니 손찌검을 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고 보도했다. 

이에 한 기자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영부인 얼굴에 멍이 들었던데, 부부싸움을 하신 겁니까?”라고 물었고 이 말에 대통령은 몹시 어색한 얼굴로 헛기침만 했다며 부부싸움은 대통령의 주색 때문이었다고 (신동아)는 육영수씨에 대한 폭행 사실도 전했다. 

(신동아)는 “술자리 마련과 여자 조달하는 일을 청와대에서 한다는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는 날이면 큰 낭패라는 생각에서 그 일을 비밀 공작수행기관인 중정으로 떠넘”겼다며 “어느 모로 보나 그 일을 맡기엔 중정이 안성맞춤이었다, 국가기밀이라는 허울좋은 베일 뒤에서 각하의 술과 여자가 난무하게 된 것이다”고 중정이 여자 조달을 도맡아 했음을 밝혔다. 

기사는 또 “박정희의 주색탐닉이 육여사가 죽은 후 홀아비 고독 때문에 생긴 일만은 아니었다. 육여사가 살아있을 때도 주색으로 충돌이 잦았다”며 “다만 홀아비가 된 후 그의 사생활이 더욱 절제없이 무너진 것은 사실이며 이것이 그의 운명을 재촉하는 결과가 됐다”고 전했다. “10·26사건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박정희의 사생활 문란과 판단력 마비가 직접 동기를 제공했다는 것이 박선호의 증언 내용이다”고 (신동아)는 덧붙였다.

기사는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은 일년 중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 고위층이 사생활을 즐기는 데 그의 모든 시간을 바쳐야 했고 그것이 공무였다”며 소행사, 대행사의 빈도가 하도 심해서 박선호씨가 이따금 궁정동 안가 비밀요정의 관리자였던 남효주 사무관하고 같이 앉아서 ‘대통령이지만 너무 심하다’는 불평을 주고 받았다고 보도했다. 

아울러 (신동아)는 “채홍사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의 술자리 여인으로는 이미 유명해진 기성 배우보다는 20대 초반의 연예계 지망생이 더 선호됐다. 그중엔 유수한 대학의 연예 관련학과 재학생도 있었다”고 전했다. 

또 (신동아)는 “대표적으로 그런 지원자들을 골라 보내주는 중간책이 장충동에 있던 모요정의 김 마담이었다. 김마담은 오랫동안 그 분야에서 잔뼈가 굵어 거물정치인과 접하려는 ‘화류계 매미(賣美)’들의 대모였다”며 “특히 연예계에서 스타가 되기 전 20대초의 나이 어린 신참들이 김마담으로부터 은밀히 제의를 받으면 대부분 응락했다”고 서술했다. 

“이들은 그런 자리에 갔다온 경력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그것으로 연예계의 정상에 다가가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했다”며 “그런가 하면 반강제 차출도 있었다. 박 대통령이 영화나 TV연예프로를 보다가 맘에 든 배우나 가수의 이름을 대며 ‘한번 보고 싶다’고 하면 큰 물의가 일어나지 않는 한 대개 불려왔다”고 전했다. 

기사는 “갑작스러운 궁정동 연회 차출지시로 영화나 TV프로 촬영 스케줄이 펑크나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납득할 만한 설명 없이 연예계에서 힘쓰는 ‘협회’에서 무조건 출두하라는 연락이 가는 것이다”며 “이런 일로 한두 차례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는 연예계의 제작진 사이에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네티즌들은 해당 기사에 “임상수 감독 (그때그사람들) 영화에 대~충 나오죠. 박정희 채홍사가 한석규역이었던 것 같습니다”, “박정희의 술과 여자 그리고 그의 아내 육영수에게 가해진 폭력 채홍사 박선호가 군법회의에서 증언한 이야기들을 트친님들께 공개합니다!”, “길지만 꼭 읽어볼 내용 다카키 마사오 진짜 추저버!”, “아직도 박정희를 적법한 대통령으로 기억하는 대한민국”, “총에 맞기를 다행이다. 안그랬다면 무기징역이다” 등의 반응을 보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진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