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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31일 금요일

뉴라이트가 만든 역사교과서 검정 통과

이글은 경향신문 2013-05-31일자 기사 '뉴라이트가 만든 역사교과서 검정 통과'를 퍼왔습니다.

ㆍ‘자유민주주의’ 논란 부른 현대사학회가 집필
 ㆍ타 교과서 좌편향 공격… ‘역사 흔들기’ 논란

뉴라이트 인사들이 이끄는 한국현대사학회가 집필한 고등학교 한국사교과서(교학사)가 검정심의 본심사를 통과했다. 

뉴라이트 저자들이 2008년 ‘한국 근·현대사’라는 대안교과서를 내놓은 적은 있지만 이들이 쓴 교과서가 일선 학교에서 사용하는 검정과정에 합격한 것은 처음이다. 현대사학회가 31일 중·고교 한국사교과서 학술대회를 열면서 다른 출판사들의 역사교과서에 ‘좌편향’ 문제가 있다고 공격하고 나서 ‘역사교과서 흔들기’ 논쟁이 본격화하고 있다.

교육부 위탁을 받아 역사교과서 검정 작업을 하고 있는 국사편찬위원회는 지난 10일 고교 한국사교과서 검정심의에서 한국현대사학회 권희영 회장이 주집필자로 참여한 교학사 교과서를 비롯한 8종이 본심사를 통과했다고 공지했다. 본심사를 통과한 교과서들은 현재 검정심의위가 권고한 수정·보완 작업을 진행 중이며 8월30일 최종 합격 여부가 발표된다. 역사교과서가 국정에서 검정으로 바뀐 ‘2007년 교육과정 개정 체제’ 이후 수정·보완 단계에서 탈락한 역사교과서는 없다. 최종 합격된 교과서는 9월 중 각 학교에 전시돼 학교별 채택과정을 거친 뒤 내년 3월부터 사용된다.

한국현대사학회는 ‘2009 역사교육과정 개정’ 논의가 막바지에 이르렀던 2011년에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꾸자고 건의했던 뉴라이트 계열 단체다. 당시 국사편찬위원회와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이를 공개논의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논란이 커졌다.

한국현대사학회의 교과서위원장인 이명희 공주대 교수는 당시 교과부에 강제병합 후 일제에 의한 근대제도의 이식과 우리 민족의 수용을 역사교육과정에 명시할 것을 요구하는제안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일제가 한국 근대화가 끼친 긍정적 역할도 인정하자고 주장해 파문이 일었다.

한국현대사학회와 아산정책연구원이 주관하는 ‘교과서 문제를 생각한다: 중·고등 한국사교과서 분석과 제언’ 학술회의가 31일 조선일보 후원으로 열린다. 조선일보는 30일자 지면에서 “지난해 검정을 통과해 올해 중학교 1학년부터 교육현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역사교과서에서 여전히 좌편향 문제가 있다”며 학술회의 내용을 소개했다. 조선일보는 학회에 참석하는 학자들의 글을 인용해 “중학교 교과서들이 친일·반일, 민주·파쇼의 대립을 강조하고 보편적·헌법적인 가치 대신 이분법적 사관으로 기술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송현숙 기자 song@kyunghyang.com

2013년 4월 19일 금요일

이경재 ‘텔레파시’ 발신지는 박근혜와 뉴라이트뿐인가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3-04-18일자 기사 '이경재 ‘텔레파시’ 발신지는 박근혜와 뉴라이트뿐인가'를 퍼왔습니다.
[기자수첩] YS시절 공보처 출신 이경재의 방통위 귀환, 언론자유는 자유민주주의 수호용인가

‘박근혜 대통령의 측근은 아니지만 박 대통령과 텔레파시가 통하는 사이’인 이경재 신임 방송통신위원장이 지난 17일 취임했다. 이 위원장은 취임사에서 자신을 “방통위 전신인 공보처 출신”이라고 소개하면서 “고향에 돌아온 듯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그는 방통위의 기본 임무가 “자유 민주주의를 지키는 언론의 자유, 방송의 공정성, 그리고 국민의 품위를 높이는 공익성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친박 정치인 이경재 위원장은 YS시절 청와대 대변인, 공보수석, 공보처 차관을 지냈다. 그는 A4 용지 8쪽짜리 취임사를 직접 준비했다고 한다. 공공성이란 잣대로 규제를 담당해야 할 방통위가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뉴라이트를 위한 이념투쟁의 최전선이 될지, 언론사에 떡고물을 던져주며 교묘하게 언론을 통제하던 YS시절 공보처로 되돌아갈지 우려된다.

이경재 위원장은 왜 공보처 출신을 언급했을까. 그는 관련 부처 경험을 강조하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공보처는 정권 홍보를 위주로 하는 기구였고, 언론사에 떡고물을 던져주며 비판 보도를 막았던 곳이다. 이 위원장이 민주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에도 의문이 간다. 뉴라이트 진영이 촉발한 자유민주주의 논란에 대해 그가 모를 리 없다. 전국언론노동조합 장지호 정책위원은 “(이 같은 발언은) 방통위가 미래부와 관계에서 공공성을 잣대로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공성을 위축할 것을 알리는 시그널일 수 있다”고 말했다.

▲ 이경재 신임 방통위원장


이경재 위원장의 발언을 한국사회의 뉴라이트적 재구성의 조짐으로 볼 수 있다는 언론개혁시민연대 전규찬 대표의 분석 또한 흥미롭다. 전규찬 대표는 “자유민주주의 개념을 의도적으로 사용했거나 무의식적으로 썼더라도 이경재 위원장은 한국사회의 뉴라이트적 재구성의 조짐이나 내용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든다”면서 “48%를 적으로 규정하는 분위기로 볼 때 (이 위원장 발언은) 반쪽짜리 의식, 철학, 정치”라고 말했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언론자유의 개념을 추적하면서 그리스어 ‘파레시아(parrhesia)’를 찾아냈다. 이 단어는 다섯 개의 요소로 이루어지는데, 솔직함(frankness), 진실(truth), 위험(danger), 비판(criticism), 의무(duty)다. 전규찬 대표는 “푸코에 따르면, 언론자유·자유언론이란 권력에 대해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솔직하게, 위험을 무릅쓰고 말 할 수 있는 의무에 해당한다”면서 “언론자유는 ‘두려움 없는 발언’”이라고 정리한 바 있다.

언론의 주된 기능은 국가와 자본에 대한 감시 기능이다. 공보처에서 애완견(Lapdog)을 키워온 이경재 위원장이 감시견(Watchdog)을 키워낼 수 있을까. 보수언론 특혜에 앞장 선 이 위원장이 이념과 주장이 자유롭게 충돌하는 공론장을 만들 인사인가. 두려움 없는 발언을 들을 인내력이 있는가. 

아니면 진흥 기능 대부분을 미래창조과학부에 넘긴 방통위가 김영삼 정권 시절 공보처로 돌아가는 것일까. 뉴라이트 방통위가 탄생하는 것일까. 취임부터 출신부처를 거론하고 민주주의를 절반으로 잘라낸 이 위원장의 발언에 한숨이 나온다.

이 같은 의견에 대해 방통위 관계자는 “(해당 발언은) 민주주의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강조하는 취지”라면서 “한정적인 의미로 언론 자유를 언급한 것이 아니라 언론 자유가 갖는 가치와 의미를 강조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취임사는 (이 위원장) 본인이 구술을 해서 작성한 것”이라며 “그런 것에 대한 의지가 강한 분”이라고 전했다.

이경재 위원장 청문회 당시 각종 과태료와 지방세 체납, 자녀들의 증여세 늑장 납부 및 국민연금 미납, 건설회사 전세 스폰서 논란 등 도덕성 문제와 관련 많은 의혹이 제기됐다. 그는 조선·중앙·동아일보, 매일경제 종합편성채널을 탄생시킨 미디어법 날치기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런 까닭에 민주통합당 등 야당 의원들은 청문보고서 채택에 반대했고, 결국 국회는 이경재 위원장에 대한 보고서를 채택하지 않았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임명을 강행했다. 이에 대해 이 위원장은 취임사에서 “저도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하게 되지만 늘 ‘나중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자문하면서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했다”라고 말했다.

이경재 위원장이 남겨야 할 것은 무엇일까. 이 위원장은 현안으로 △국회의 방송공정성 특별위원회 △방송통신 융합 시대 산업화 △케이블-지상파 재송신 갈등 △휴대전화 단말기 보조금 등을 들었다. 그는 방통위와 미래창조과학부가 부처의 벽을 허무는 협력 체계를 마련해 관련 논의를 진행시킬 것을 당부했다.

답은 이미 나와 있다. 공영방송 사장 선임 제도를 근본적으로 손질해 ‘낙하산’ 논란을 없애고, 유료방송 권역 완화 등 규제 완화 움직임을 공공성 잣대로 판단하고, 통신요금 원가 자료를 공개해 통신비 인하를 유도하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에 비판적인 언론의 자유를 확대해 공론장을 넓히는 것도 과제 중 하나다.
박장준 기자 | weshe@mediatoday.co.kr  

2013년 4월 1일 월요일

이이제이 “역사전쟁 시작, 뉴라이트와 맞붙겠다”


이글은 GO발뉴스 2013-04-01일자 기사 '이이제이 “역사전쟁 시작, 뉴라이트와 맞붙겠다”'를 퍼왔습니다.
공개방송…“협동조합으로 양질의 현대사 컨텐츠 선보일 것”

600여명의 애청자가 모인 가운데 열린 팟캐스트 ‘이이제이’ 첫 공개방송에서, 제작진은 “협동조합을 통해 양질의 컨텐츠를 선보일 예정”이라면서 “향후 보혁 간 역사전쟁에서 뉴라이트와 지속적으로 싸워 나갈 것”이라며 향후 진로를 공개했다.
이이제이 진행자 ‘세작’ 윤종훈씨는 지난달 31일, 서울시 논현동 ‘플래툰 쿤스트할레’에서 열린 공개방송 직후 ‘go고발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협동조합을 구성해 영상자료를 포함한 양질의 현대사 컨텐츠를 선보일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지금까지의 뜬금없는 구독연합이 아니라, 소비자들이 주주가 돼 조합을 만들게 되면, 방송환경도 안정적이고 부수적인 수입도 조합원에게 돌릴 수 있을 것”이라며 구성 취지를 설명했다.

▲ 팟캐스트 ‘이이제이’가 지난달 31일 오후 4시 서울 논현동 ‘플래툰 쿤스트할레’에서 첫 공개방송을 열었다. ⓒ ‘go발뉴스’

공동 진행자 이동형 작가는 영상화 작업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의 ‘백년전쟁’에 대해 박근혜 대표에게 건의가 올라가는 등, 앞으로 보이지 않는 역사전쟁이 진행될 거라고 본다”면서 “역사 팟캐스트 1위 방송이, 그 싸움에서 뉴라이트와 한 번 맞서 봐야하지 않겠나. 영상과 음성은 느낌이 확실히 다르다”고 덧붙였다.
패널이 협동조합 구성을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선 이후 영상화 작업을 시작한 이이제이 진행자들은 이이제이 번외 편에서 “팀이 15명씩 움직이니까, 편당 제작비가 2000만원 정도 들어간다. 지금은 (제작진이) 재능 기부하는 형식으로 이뤄지고 있는데, 답보상태다”라고 밝힌 바 있다.
‘나는 꼼수다’, ‘리셋 KBS’ 제작자이자 본 방송의 영상제작을 담당한 김성수씨는 “나꼼수로 인해 ‘팟캐스트의 무료화’가 고착화됐는데, 그래야만 하는 하등의 이유가 없다”면서 “소비자가 혜택을 가지는 대신에 컨텐츠에 대한 정당한 비용을 지불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고 말했다.
그는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가는, 협동조합을 오랫동안 생각했었다. 조합을 만들어서 수익을 내고, 그걸로 계속 방송을 제작하자는 것”이라면서 “인프라 구축, 인력 수급을 위한 자본 확충 문제 등 어려움이 많지만, 차분하게 풀어갈 수 있다. 아이디어를 냈으니, 오늘 난상토론을 벌여볼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남진-나훈아’ 특집으로 꾸며진 이날 공개방송에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 정치개입의혹을 제기한 진선미 민주통합당 의원이 깜짝 출연해 관심을 모았다. 원 전 국정원장의 근황을 묻는 질문에 대해 “집에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국정조사로 넘어가면 시간이 지체될 우려가 있다. 그보다는 조속한 사법 집행을 위해 압박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혀 큰 호응을 얻었다.

배동일 기자  |  forever2886@hanmail.net

2013년 2월 17일 일요일

대법원, 정부의 교과서 '뉴라이트화' 시도에 제동


이글은 프레시안 2013-02-15일자 기사 '대법원, 정부의 교과서 '뉴라이트화' 시도에 제동'을 퍼왔습니다.
"수정하려면 제대로 심의 절차 밟아야"…갈등 지속될 듯

이른바 '좌편향 교과서'를 뉴라이트 계열과 재벌 경제단체 입맛에 맞게 바꾸려 한 이명박 정부의 교과서 수정안에 대해 대법원이 제동을 걸었다.


정부의 교과서 수정 시도가 암초를 만난 셈이다. 그러나 정부는 여전히 관련법 개정을 시도하고 있어, 교과서를 둘러싼 정부와 교육자들의 갈등은 새 정부 들어서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대법 "교과서 바꾸려면 제대로 심의해야"


15일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김한종 한국교원대 교수 등 금성출판사의 근현대사 교과서 공동 저자 3명이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을 상대로 낸 교과서 수정명령 취소소송에서 원고 패소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적법한 심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 교과서 내용을 바꾸도록 한 교과부 수정명령이 법에 위배된다고 판결한 것.


재판부는 "수정명령이 표현상 잘못이나 기술적 사항 또는 객관적 오류를 잡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검정을 거친 교과서 내용을 실질적으로 변경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는 새로운 검정절차를 취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검정절차상 교과용도서심의회의 심의에 준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어 정부의 수정명령에 문제가 없다고 판결한 원심에 대해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아 판결 결과에 영향을 미친 위법이 있다"고 판시했다.


이에 따라 지난 2008년 벌어진 금성출판사의 근현대사 교과서를 둘러싼 '좌편향 교과서 논란'은 다시금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당시 뉴라이트 성향 학자들의 모임인 교과서포럼의 수정건의안에 발맞춰 교과부가 교과서 내용 중 상당 부분을 수정할 것을 출판사에 지시했고, 출판사 측이 이를 수용해 정치적 논란의 대상이 됐다. 논란이 된 후 고교 300여 곳이 금성출판사 교과서에서 다른 교과서로 바꿨다.


당시 교과부는 이른바 '좌편향'의 사례로 "연합군이 승리한 결과로 광복이 이루어진 것은 우리 민족 스스로 원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광복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역사적 순간은 자주 독립을 위한 시련의 출발점이기도 하였다"는 부분을 꼽았다. '분단의 원인을 왜곡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게 이유였다.


"남한에서 정부가 세워진다면 이는 북한 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질 것이 확실하였다. 이제 남과 북은 분단의 길로 치닫게 되었다", "통일정부의 건설을 바라는 국민적 열망과 여러 정치세력들의 반대 속에 1948년 5월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는 부분도 '정부 수립의 정통성을 저해할 수 있다'며 수정을 명령했다.


1심은 "수정은 실질적으로 검정과 같으므로 교과용도서심의회의 심의를 거쳐야 하는데 그러지 않아 위법하다"며 원고 승소 판결했으나, 2심은 절차상 하자를 인정하지 않고 결과를 뒤집었다. 이번 대법원 판결로 다시금 정부의 교과서 수정 명령이 적법하지 않았음이 확인됐다.

▲역사교과서를 뉴라이트 입맛에 바꾸기 위한 정부의 시도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08년 11월 19일 오후 서울 공덕동 금성출판사 앞에서 한 우익 시민사회단체가 주최한 금성출판사 역사교과서 출판 중단 촉구 기자회견의 한 장면. ⓒ뉴시스

교사 "일단 환영"…정부와 갈등 지속될 듯


대법원 판결 직후 전국역사교사모임(이하 역사교사모임)은 즉시 논평을 내 환영의 뜻을 밝혔다.


역사교사모임은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강제 수정 조치는 단순히 교과서 내용 몇 군데를 고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국민의 역사인식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고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며 "이번 판결이 권력의 힘으로 교육을 좌우하려는 행위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여전히 정부가 교과서 관련 법안 개정을 강행하고 있어, 앞으로도 교과서를 둘러싼 갈등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22일 교과부는 작년 8월 입법 예고했다가 역사 왜곡 논란으로 무산된 초·중등교육법 일부개정 법률안을 수정 보완해 다시 입법 예고했다.


이 법안은 장관의 교과서 수정권을 기존 대통령령이 아니라, 법률에 직접 명시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국정 교과서는 교과부 장관이 직접 수정하게 되고, 검·인정 교과서는 저작자나 발행자에게 수정을 요청할 수 있다.


교과부 장관이 교과서 편찬·검정·인정 단계에서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감수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했다. 출판사가 장관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 검·인정 합격이 취소되거나 1년 범위에서 효력이 정지된다. 합격이 취소된 출판사는 앞으로 3년간 교과서 심사에 참여할 수 없다.


출판사에 대한 교과부 장관의 통제 권한을 대폭 강화한 것으로, 철저히 이번 교과서 파동에 맞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법률 개정을 통해, 교과서를 정부 입맛대로 바꾸려는 데 대한 시비 여지 자체를 사전 봉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 : '朴통 시대' 발맞춰 '교과서 전쟁 시즌 2' 시작되나?)


역사교사모임은 "정부가 입법예고한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을 스스로 철회할 것을 촉구"한다며 "우리는 앞으로도 교육계와 학계, 시민단체들과 힘을 합해 교육과 교과서가 권력의 부당한 압력과 간섭을 받지 않도록 하는 데 힘을 쓸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대희 기자 

2013년 1월 15일 화요일

MBC, 뉴라이트 요구에 '김현희특별대담'으로 '화답'


이글은 미디어스 2013-01-15일자 기사 'MBC, 뉴라이트 요구에 '김현희특별대담'으로 '화답''을 퍼왔습니다.
100분토론 취소…노조 "정치적 배경 의심할 수밖에"

MBC가 오늘(15일) 정규 편성된 (100분 토론)을 취소하고 (특집대담-마유미의 삶, 김현희의 고백)을 긴급 편성해 논란이 일고 있다.
15일 MBC노조에 따르면, MBC는 15일 저녁 11시 15분에 방송되는 (100분 토론)을 취소하고 (특집대담-마유미의 삶, 김현희의 고백)을 긴급 편성하기로 결정해 14일 오후 편성 실무진에게 통보했다.

▲ 지난해 6월 TV조선의 김현희 관련 보도 캡처

김철진 MBC 시사제작국장은 긴급편성에 대해 "방송문화진흥회의 결의에 따른 후속조치"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의 뉴라이트 단체 출신인 김광동 이사 등이 지난해 9월, 2003년 11월에 방송된 '16년간의 의혹, KAL 폭파범 김현희의 진실>에 대해 집중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방송 경위 조사를 요구한 이후 MBC가 김현희 특별대담 프로를 긴급 편성하게 됐다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편성으로 인해, (특집대담-마유미의 삶, 김현희의 고백) 방송공지는 방송 당일인 15일 오전에야 이뤄질 예정이며, 녹화 역시 15일 오후 4시경에 진행될 것으로 전해졌다.
MBC노조는 "최근 몇 년 사이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이 KAL기 사건과 관련한 당시 방송(PD수첩)에 조작이 있다는 식의 주장을 퍼뜨렸고, 지난해 6월 'TV조선'에 김현희씨가 출연한 이후 그 공격은 더 거세지기 시작했다. 사회 특정세력의 요구를 방문진이 수용해, 방송된 지 10년이나 지난 프로에 대해 갑자기 진상조사를 요구해 온 것"이라며 "만약 객관성을 잃고 마치 10년 전 방송에 대한 반성문처럼 공중파 프로를 낭비하게 될 경우 엄청난 후유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MBC노조는 "(긴급편성 요구가) 방문진의 공식 결정이 맞다면 이는 명백한 월권행위이며 불법행위"라며 "왜 하필 지금, 이렇게 맥락없는 편성을 도둑질하듯 급하게 해치우는 것인지, 그 이유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면 정치적인 배경을 의심해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미 무너질대로 무너진 MBC이지만, 김현희 특별대담 긴급편성은 자칫 방송장악이 2013년 들어 더 끔찍한 단계로 발전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길한 징조를 떨칠 수 없게 만든다"며 "(정부여당의 입김이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방문진이 방송내용, 방송편성까지 직접 개입한다면 이는 군사독재시대 방송장악과 다를 게 없어진다"고 비판했다. 

곽상아 기자  |  nell@mediaus.co.kr

2012년 12월 1일 토요일

윤봉길 의사가 테러리스트인가?


이글은 프레시안 2012-11-30일자 기사 '윤봉길 의사가 테러리스트인가?'를 퍼왔습니다.
[뉴라이트는 어떻게 역사를 왜곡했나] 항일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서술

1. 기본 입장


뉴라이트 교과서의 '항일 민족독립운동의 전개'(112~133쪽) 서술은 간략하며 단조롭다. 기존의 교과서보다 그 비중이 크게 줄었는데, 이는 일제시기 역사서술이 지나치게 항일운동사 중심이며, 독립운동사는 이미 많이 언급되었다고 보고 상대적으로 소략하게 다루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교과서가 견지하는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기본입장은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 민족의 독립운동이 개인의 자유나 인권보다 하위개념이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현행 검인정 교과서가 민족주의적 입장에 지나치게 경도된 나머지 민족독립운동 서술을 사실보다 부풀렸다고 본다. 민족독립운동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민족감정에 치우쳐 사실을 왜곡 또는 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민족적 편견'을 바로잡기 위해 교과서는 "민족중심의 역사관을 누그러뜨리려고 애썼으며", "'우리 민족' 대신에 '한국인'을 역사적 행위의 주체로 설정하였다."(5쪽). 개항 이후 130년간의 역사를 "자유와 인권을 갈망하고,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처지를 개선하고자 노력하는 보통사람들의 역사"(5쪽)로 파악하겠다는 입장이다. 이처럼 민족보다 개인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서술이 "기존의 역사 서술에 비해 꽤 큰 변혁"(5쪽)이기는 하나, 이러한 관점이 식민지지배라는 특수한 역사적 경험을 한 우리 역사에도 적합한지는 의문이다.


잘 알다시피 일본 제국주의 지배는 근대 사회의 핵심 가치인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부정하였으며, 조선인의 정체성,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조선인은 일제 파시즘의 폭력정치에 의해 일체의 권리가 무시되었고 복종과 굴욕의 노예적 상태를 강요당했다.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이에 따른 민족적 차별과 억압, 배제가 구조적으로 확대・재생산되고 있는 식민지시대에서 민족문제야말로 조선사회를 이해하는 데 가장 본질적인 개념이 아닐 수 없다. 진정한 의미의 근대 시민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율성은 독립 이후 일제의 식민잔재를 극복하는 민주화투쟁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획득되었다. 개인의 자유와 인권의 신장은 민족의 독립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둘째, 민족독립운동이 연합국의 반파쇼연합전선의 하위개념이다. 우리 민족의 독립은 독립운동세력이 전취(戰取)한 것이 아니라 연합국이 '선물'로 준 것이라는 입장이다. 이처럼 외인론(外因論)을 취할 경우, 민족독립이 미소 강대국의 승리에 힘입어서 주어진 것이기에, 독립 이후의 상황이 미소 연합국의 힘덕에 국제적으로 제약, 규정, 좌우되는 것 또한 당연하다는 타율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민족해방이 전적으로 연합국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는 '타율적 해방론'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힘에 의한 독립운동은 절대로 불가능하였다는 입장에 따를 경우, 자주적인 힘으로 민족독립을 추구한 독립전쟁은 역량을 헤아리지 않은 무모한 투쟁이 된다. 교과서는 이러한 시각에 따라, 무장투쟁론을 배격하고 외교지상주의에 근거하여 활동을 벌인 이승만에 대해서는, "그는 유럽 신문들에 일본의 만주침략을 고발하는 글을 기고함으로써 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한 각국 외교관과 언론인들 간에 반(反)일본 여론을 환기하고 한국의 독립에 대한 우호적 관심을 조성하였다"(127쪽)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반면, 김구에 대해서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항일 테러 활동을 시작하였다"(129쪽)라 하여, 역사학계에서 의열투쟁이라 부르고 있는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테러리스트의 테러활동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경교장 연못가를 산책 중인 김구 선생 ⓒ뉴시스

또한 교과서는 일제말기에 "해외 독립운동이 여러 분파로 나뉘어 서로 갈등하였다"(131쪽)고 하여, 독립운동세력의 연대와 통합의 움직임보다는 분파와 갈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중일전쟁 발발 후의 중국 관내 민족해방운동전선은 좌익적 세력의 통일전선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과 우익통일전선인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의 두 갈래로 일단 통일되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본제국주의의 패망이 가까워짐에 따라 민족해방운동전선의 정치력과 군사력을 통일시켜야 할 필요성이 더욱 높아져, 중국 관내 지역 민족해방운동전선의 통일전선운동이 계속되었다. 그 결과 임시정부를 통일전선정부로 확대 강화시킬 수 있었으며(1944년 4월), 통일전선정부로 발족한 임시정부는 전체 민족해방운동세력의 통일전선에 의한 무장투쟁의 강화를 강조하였다(1944년 8월 9일)

한편 국내에서도 중일전쟁 이후부터 일제 패망까지 수많은 항일비밀결사가 조직되었고 태업과 징용, 징병 거부와 입산 활동, 유언비어의 유포 등 다양한 저항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럼에도 교과서는 "국내에서 총독부의 폭압적인 전시동원정책에 대해 한국인이 정면으로 대항하기는 어려웠다.(……)과거 민족주의 활동으로 이름 높던 많은 지도적 인사가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협력자가 되었다.(……)보통의 한국인들도 강제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 전시체제에 참여하였다.(……) 일제의 광기 어린 전시체제에 저항하기는 어려웠다."(132쪽)라 하여, 황국신민화와 전시동원정책은 조선인이 거역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이었다는 숙명적 패배론에 따라 독립운동사를 서술하였다.

대한민국의 독립은 우리 민족이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전개한 독립운동과 미국, 소련 등 연합군의 일본에 대한 군사적 승리의 결과였다(복합적 외인론). 설사 독립의 주인(主因)이 연합국의 승리라 할지라도, 독립에 기여한 조선민족의 자주적 힘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조선민족이 항일독립운동을 지속해서 전개하지 않았다면 연합국이 독립을 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항일 민족독립운동의 역사적 경험이 해방 후 자주적 독립국 건설운동으로 분출된 건국준비위원회와 같은 활동도 없었을 것이다.

셋째, 민족독립운동이 경제발전의 하위개념이다. 뉴라이트는 식민지시기가 "억압과 투쟁의 역사만은 아니었"으며 "근대 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함으로써 근대국민국가를 세울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두텁게 축적되는 시기"(78쪽)이기도 하였다고 본다. 조선의 '독립'보다 '문명화'가 일제시기를 파악하는 중심 개념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문명화란 자본주의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독립운동은 조선의 문명화를 방해하는 '악성종양'에 불과하다. 뉴라이트는 조선후기에서 식민지사회로의 이행은 근대 자본주의사회로의 이행기였으며, 식민지기에 축적된 근대화 역량이 대한민국 발전의 역사적 기초였다고 본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구축된 인적·물적 인프라가 해방 이후 특히 박정희 시기 고도성장의 역사적 바탕이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일제하 조선경제와 해방 후의 한국경제는 연속적인 측면보다 단절적인 측면이 더 강하다. 식민지기가 종료된 이후에는 해방과 분단 및 한국전쟁으로 기존의 제 제도가 근본적으로 흔들릴 만큼 큰 외부적 충격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부충격을 무시하고 한국 근대의 역사 전체를 연속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시기별 특징이나 본질을 파악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허수열, 2011, 33쪽).

또한 제국주의 침략을 경험한 나라가 독립을 되찾은 이후 자본주의적 발전을 지향한다는 것도 자기모순이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최고 발전단계로서 경제적 본질은 독점자본주의이다. 제국주의란 자본주의가 발달한 국가들이 원료를 약탈하고 상품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약한 나라를 무력으로 침략해 식민지로 삼는 것을 일컫는다. 제국주의의 세계지배가 진전되면서 식민지에서는 노동자, 농민을 주축으로 한 민중세력이 제국주의의 지배에 반대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대부분은 제국주의 지배에서 벗어나 민족자주정부를 세웠다. 노동자 농민이 중심이 되어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세력이 독립국가 건설 방략으로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는 길을 제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실례로 1942년 12월 26일 약헌개정위원회(約憲改定委員會) 제5차 회의에서는 좌파정당의 대표였던 민족혁명당의 신영삼(申榮三)이 "토지국유 강령은 전 민족 동원에 방해가 된다"고 문제를 제기했을 때, 정부 측의 조소앙은 "자본주의 사회를 건설한다면 따라올 사람이 하나도 없다"(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 문서, 325쪽)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족독립운동의 맥락에 비추어 볼 때,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에 기초를 두고 출범하였다는 뉴라이트 교과서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2. 서술 내용

뉴라이트 교과서는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하는 목적이 "오늘날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어디서 왔는가?", "오늘날 한국의 자유시장경제는 어떻게 성립하였나?"라는 질문에 올바른 답을 찾기 위해서라고 하였다(12쪽). 이에 대한 해답으로 뉴라이트는 "개화기와 식민지시기에 걸쳐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근대 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해온 민족적 근대화세력"(134쪽)에 의해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에서 근대사를 서술하면서, 동학농민항쟁과 의병운동 등 아래로부터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지극히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반면, 개화파를 중심으로 한 위로부터의 움직임은 지나치게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

1) 근대변혁운동

(1) 아래로부터의 움직임

19세기 후반 식민지 쟁탈을 벌이던 제국주의 열강의 손길이 마침내 조선에도 미쳐 민족 위기의식을 더해갔다. 조선은 봉건사회체제의 모순을 타파하고 자주적인 근대화를 추진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안게 되었다. 나라 안팎의 위기에 대응하는 움직임은 아래로부터의 변혁운동과 위로부터의 개혁운동의 두 갈래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하여 교과서는 "민족주의 역사학은 개항 이후 한국 근현대사의 주류를 동학농민봉기, 식민지시기의 항일무장투쟁, 4·19민주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흐름으로 이해하고 그러한 역사관을 역사교과서를 통해 보급하였다."(271쪽)며, "이러한 시각의 역사교육은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근대화를 추진해온 개화파 이래의 근대화 세력을 반민족으로 매도하는 경우가 많았다."(271쪽)고 비판하였다.

아래로부터의 흐름은 농민적 토지소유를 바탕으로 지주제를 해체하고 자본주의 사회를 이루려는 움직임으로, 평안도농민전쟁→1862년 농민항쟁→1894년 농민전쟁→대한제국기 농민운동→의병전쟁→3.1운동→항일무장투쟁과 노동자‧농민운동→사회주의 운동으로 이어진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개항 이전의 농민항쟁에서 1894년 농민전쟁으로 이어지는 아래로부터 변혁운동에 대해 지극히 부정적이다. 민중이 주도한 근대적 변혁운동인 1894년 농민전쟁에 대해, 교과서는 "동학농민봉기는 기존 체제를 부정한 급진적인 혁명이었다기보다 유교적인 근왕주의(勤王主義)에 입각하여 서민의 경제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했던 복고적인 개혁의 성격이 강하였다."(45쪽)라고 하여, 혁명적인 성격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1894년 농민전쟁은 조선 후기 농민항쟁을 통해 성장한 농민대중이 동학의 조직을 이용하여 봉건사회를 변혁하고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을 물리치려 한 대규모의 반봉건·반침략투쟁이었다. 농민전쟁에 참여한 농민군은 경제적으로 농민층에 대한 봉건적 수탈을 제거하여 농민경제를 자립·안정시키고 봉건지배세력 및 외국자본주의세력의 침탈로부터 소상인과 다수 빈농층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또 사회적으로는 봉건적 신분질서를 해체하고 근대적 평등사화를 실현하고자 하였다."(한국역사연구회 『한국역사』 255쪽)라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입장이다. 갑오농민전쟁은 반외세 전쟁인 동시에 반봉건 농민전쟁이었으며, 지주적 토지소유제에 반대하고 농민적 토지소유를 달성하려는 전쟁이었다고 역사학계는 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무력으로 국권을 되찾으려 한 의병운동에 대해서도, 교과서는 "초기의 의병은 무기나 기율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전투보다는 상소나 시위를 위한 집단에 가까웠다."(68쪽)라고 평가절하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당시 계몽단체들이 "실력이 없다. 때가 아니다"라며 준비론 또한 실력양성론에 기초하여 의병투쟁을 비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에 반해 공립협회는 의병전쟁을 독립전쟁으로 파악하고, "혹자는 (의병에게) 폭도의 악명을 더하(나)… 대의로 생명을 버리는 자 어찌 도적이며…"라고 하여 부정적 인식을 반박하였다. 아울러 "세상만사가 시세와 완급이 있나니 교육이니 양병이니 사업이니 정치니 종교니 하는 것은 태평시대에도 예비할 바이거니와 시기가 급박한 경우를 당하면 한갓 무예적 행동밖에는 방책이 없다"며 의병이 수행하는 독립전쟁을 높이 평가하였다. 실제로 의병은 1907년부터 1914년까지 무기를 들고 직접 일본군 등과 싸우며 저항하여, 10만 명 가까이 전사했다. 결국 일제는 의병의 격렬한 저항으로 때문에 조선병합을 늦출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의병투쟁은 1920년대 만주 독립군과 1930년대 만주 항일유격대 그리고 1940년대 광복군 등으로 발전해갔다.

(2) 위로부터의 움직임

개화파를 중심으로 한 위로부터의 개혁운동은 개항을 불가피한 시대적 조류로 인식하여 봉건체제를 개혁하려고 한 개화운동이다. 이들은 지주적 토지소유를 바탕으로 지주의 부르주아로의 전환을 꾀하는 반봉건 개혁운동을 벌였다. 그 구체적인 흐름은 갑신정변(1884)→갑오개혁(1894)→독립협회(1896)→광무개혁(1897~1906)→애국계몽운동→실력양성운동과 민족주의운동(1920년대)으로 이어진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개항 이후 한국 근현대사는 한국의 우수한 전통 문명과 외래 근대 문명이 융합하면서 한국 나름의 형태로 정착하는 과정이었다. 대한민국은 이 같은 한국사의 기본 흐름에 부응하여 근대 문명을 도입하고 이식함에 있는 힘을 다하였던 개항기의 개화파에서 출발하는 독립운동세력과 근대화세력이 세운 국가였다."(276쪽)라고 하여, 대한민국은 위로부터 개혁운동을 추진한 세력에 의해 세워졌다고 주장하였다. 교과서가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까닭은 "크게 보면 1876년 개항 이후 서유럽에서 발생한 근대 문명이 일본을 거쳐 한국에 유입되었다. 그에 따라 개별 인간이 근대적 사권의 주체로 성립하고, 사유재산권이 확립되고, 자유시장경제가 발전하고, 자유민주주의가 도입되었다."(276쪽)라고 보기 때문이다. 뉴라이트는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에 기초하여 출범하였다는 사실을 전제로 그 연원을 추적한 결과 개화파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독립협회로 이어지는 개화파의 운동의 사상적 기반은 사회진화론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성립과정에서 형성된 사회진화론은 기본적으로 사회 강자(=부르주아)의 지배와 나아가 세계 강자(=제국주의국가)의 침략 지배를 현실적으로 인정하는 논리였다. "각 민족이 경쟁하는 세계를 당하여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멸망함을 탓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진보하는데 내가 진보하지 못한 것, 다른 사람은 강한데 내가 강하지 못한 것을 오히려 탓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처럼 강대국 문명국의 발전이 약소국 미개국의 침략 위에서 가능하였던 당시 현실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였기에, 제국주의 침략을 받게 된 원인을 내부의 미개함으로 돌리는 패배주의적인 인식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개화파는 제국주의 침략이 '문명시혜'라는 주장을 하였다. 독립협회는 제국주의 이권침탈을 자원개발=문명화로 인식하였고, "하늘이 준 것을 능력이 없어서 쓰지 못하고 남에게 빼앗기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심지어 "조선이 몇 해를 청국의 속국으로 있다가 하느님의 덕분으로 독립"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청나라와의 조약에서 우리나라의 대청 종속을 폐기하고 자주독립국임을 명시한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청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우리나라를 보호국화하기 위한 조치를 오히려 독립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개화파는 일본의 지배를 문명화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기에 통감정치의 이른바 보호정치가 식민지 통치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내정개혁에 대한 기대로 보호국도 감수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타나고 있었다.

개화파들은 민중은 늘 깨우쳐야 하는 계몽대상이라고 볼 뿐 변혁주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개화파들은 철저한 우민관과 민중불신관에 의거하여 무력항쟁을 반대하고 실력양성론을 주장하였다. 의병이 무력을 사용하는 데 대해, '비 문명화된 폭력적인 방법으로 문명인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며, 의병을 '무뢰배, 비도(匪徒), 불한당, 화적'이라고 비난하였다. 또한 의병운동은 "자국의 지위나 경우를 알지 못하고 상대 나라의 지위와 실력을 헤아리지 못한 망동이다"며 의병에게 무력항쟁을 포기하도록 종용하고 실력양성을 주장하였다. 모든 사회운동이나 활동은 철저하게 국가의 실정법 범위 안에서 전개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나온 발상이었다.

▲사형 집행에도 의연했던 의병들. 26일 순천대학교 홍영기 교수 등 사학과 교수들에 따르면 일제는 1909년 9월1일부터 같은 해 10월30일까지 전라도와 그 외곽지대에서 항일의병 초토화 작전을 진행했ek. ⓒ뉴시스

개화파의 운동은 이후, 자강운동론→실력양성론과 구사상ㆍ구관습개혁론→문화운동론→자치운동론으로 발전하는데 자강운동, 문화운동, 자치운동의 밑바닥에 깔린 논리는 준비론, 실력양성운동론이었다. 1920년대에 들어 실력양성론자들은 독립운동의 유보와 실력양성을 위한 문화운동의 우선을 내세우면서 '선 실력 후 독립'을 주장하였다.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과 투쟁의 논리가 아니라 일제가 허용한 범위 내에서 합법적으로 실력양성운동을 하자는 논리인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기성운동 등 문화운동의 좌절을 겪으면서, '한국의 독립 대신 우선 자치권을 얻어 독립을 위한 실력을 먼저 양성하자'는 타협적인 자치운동론으로 발전한다. 자치론자들은 총독부가 자치제 실시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1925년경 말부터 '조선 현하의 상태에서 독립운동은 절대 불가능하니 차라리 자치운동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들은 ⓵현재로서는 독립이 불가능하므로 독립의 기회에 대비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준비론과 ⓶독립에 도달하는 한 단계로서 자치권을 획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단계적운동론을 논리적 근거로 내세웠다. 타협적인 자치운동론은 앞서의 경제적・문화적 실력양성론과 비교할 때 그 타협성이 훨씬 강화된 것이며, 민족운동의 목표를 독립이 아닌 '자치'로 하향 조정한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반 자치론자들은 ⓵자치운동은 대중의 돌진적 또는 좌경적 기세를 누그러뜨리고자 하는 '관제적 타협운동'이며 ⓶총독부의 자치제실시설은 민족운동의 보조를 교란하는 데 근본적인 목적이 있다며, 기회주의와 우경적 타협운동에 반대하는 민족좌익전선 결성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그 결과 비타협적 민족주의에 동조하는 민족주의 좌파와 계급해방을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자들 간의 협동전선론이 대두되어 1929년에 이르러 신간회가 결성된다. 반면 민족주의 우파인 자치론자들은 1930년대 들어 친일적 성향을 노골화하면서 일제의 추종세력으로 변질되어 간다. 이러한 역사 흐름에 비추어 볼 때, 개화파에서 출발하는 독립운동세력이 대한민국을 세웠다는 뉴라이트의 역사관은 독립운동 전선에서 탈락한 민족주의 우파 중심의 역사 인식인 것이다.

2) 독립국가 건설방략

뉴라이트 교과서는 "우리는 이 책에서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태어나는 역사적 과정에 특별한 애정을 쏟았다. 그것은 이 국가가 인간의 삶을 자유롭게 풍요롭게 만들기에 적합한, 지금까지 알려진 한 가장 적합한,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에 그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6쪽)고 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기본이념으로 삼아 출범하였다는 교과서의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대한민국이 제헌헌법을 통해 표방한 민주주의는 단순한 미국식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가 아니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보다 훨씬 더 한국적 현실을 반영한 역사성 있는 민주주의인 것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일제하의 민족운동이나 해방 이후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꾸준히 발전되고 숙성되어온 역사적 실체로서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민주주의 전통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민주공화국 수립을 향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이해해야 한다.

한국 독립운동의 특성은, 국내는 물론 국외 각지 한민족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나 독립운동의 무대가 되는 광범성(廣範性), 무장투쟁인 의병전쟁으로 시작하여 1920년대에 만주·노령의 독립군 항쟁으로 발전하고 이어 1930, 40년대에 항일빨치산투쟁이나 조선의용대(군), 한국광복군으로 계승되는 강력한 투쟁성(鬪爭性), 그리고 대한제국시대의 전제군주국으로 국권을 회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 국민국가 즉 민주공화국으로 새롭게 독립하려는 근대성(近代性)을 지녔다는 점이다. 한국의 독립 운동가들이 높은 사상성을 갖고 독립투쟁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독창적인 새로운 사상을 창조해가면서 수준 높은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 독립국가 건설 방략이다.

대한민국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던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일찍이 독립운동세력이 끈질기게 추구해 왔던 공화주의와 민주주의 이념이었다. 민족독립운동은 비록 우리의 힘으로 나라를 되찾는 데는 실패하였지만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데 공화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중요한 이념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제헌헌법에 반영되어 나타났다.

▲ 백범 김구 선생의 사저이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 마지막 청사인 경교장이 광복절인 지난 8월 15일 오후 시민들에게 복원현장이 공개되고 있다. ⓒ뉴시스

(1) 공화주의 이념의 대두

우리의 민족독립운동은 대외적으로는 외세 특히 일본의 침략 앞에서 주권을 지키거나 잃었던 주권을 회복하는데 목적을 두었지만, 대내적으로는 군주주권의 전제주의를 청산하고 공화주의정부를 수립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오랜 역사 동안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정치적 담론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이념은 공화주의와 균등 즉 평등주의였다.

국민주권의 공화제를 수용하여 국민국가를 수립하려고 했던 최초의 독립운동 단체는 미주에서 결성된 공립협회(共立協會:1905~1909)였다. 공립협회의 기관지 의 영문 제호는 "For the Koreans by the Koreans" 였는데, 이는 공립신보가 한국인의 국권회복사상과 민주국가(주권재민)을 지향하고 있음을 뜻한다. 국권회복 방략으로 독립전쟁론, 국력배양론을 함께 주장하였던 공립협회는 1907년부터 국민국가수립을 위한 국가체제의 변혁을 구상하고 있었다. 국가체제의 변혁을 구상하게 되는 근본 원인은 망국 사태가 전제정치로 인한 폐습의 결과라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공립협회는 사회계급을 타파하고 자유평등주의로 국민을 깨우친 연후 공화제에 입각한 국민주권을 실시할 때만이 국권회복과 국력배양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공립협회는 국내 계몽주의자들이 주장한 입헌군주제가 아닌 공화정을 지향하였다. 그리하여 "전제시대에는 제왕과 귀족이 평민에 대하야 의무는 조금도 없고 권리만 탐절하야 평민을 학대하니 이는 국가의 주권이 아니오 민적(民賊)이라 칭할 것이오, 평민은 제왕과 귀족에 대하여 권리는 조금도 없고 의무만 다하야 제왕과 귀족을 복종하니 이는 나라의 백성이 아니오 노예라 칭할지니"(1908년 12월 9일 논설 '국민론')라 하여, 전제정치를 통렬히 비판하면서 군주를 통치자로서 부정하고 있다. 즉 국가의 구성요소를 국민, 영토, 주권의 3요소로 인식하면서 주권은 군주 또는 정부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있음을 천명하였다. 국민은 나라의 주인이라는 국민주권사상은 국내 계몽단체들이 주권을 통치권으로 이해한 것에 비하면 상당히 진보적인 인식을 수용하고 있었다(김도훈, 1989).

내에서도 을사보호조약 이후 황제권을 부인한 공화제론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주권이 황제에게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황제를 협박하는 것만으로도 국민의 반대와는 관계없이 조약이 체결될 수 있음을 보게 됨으로써 주권재민의 절실함을 이해하게 되었고, 또 조약의 체결은 황실이 스스로 안전을 위하여 국민을 배반한 결과가 되었으므로 국민 일반의 황실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 간 것이다. 황실과 국가를 구분하여 인식하는 데서 출발해 점차 군주권을 타도하려는 방향으로 나갔다. 독립협회운동 때까지도 군주와 국가를 선명히 구분하지 못하고 군주의 지위를 높이거나 그 권력을 확고히 하는 것이 국가의 국제적 위치를 높이는 일이요 국권을 확고히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을사보호조약 이후에는 국가와 군주를 동일시하는 것이 전제주의적 생각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군주전제체제를 타도하는 것이 국가를 위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나타나게 되었다. 애국계몽운동단체 가운데 유일한 비밀단체이며 또 정치운동과 무장저항운동을 함께 추진하였던 신민회가 공화정체의 수립을 목적으로 한 것은 대한제국 말기의 민족주의가 공화주의를 지향함으로써 그 옳은 방향을 잡아가고 있던 구체적인 증거가 되는 것이다(강만길, 1992).

1912년에 일어난 아시아 최초의 공화혁명인 중국의 신해혁명은 공화국 건설을 통한 민주주의 실현이라는 목표를 제시하는 동시에 민족 간 평등과 호혜의 새로운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수립이라는 목표를 제기했다. 신해혁명과 이후 중국에서의 민주주의의 진전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917년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신규식(申圭植)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 ·조소앙(趙素昻) 등 14명이 발기하여 작성한 '대동단결의 선언'은 국민주권의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융희황제(순종: 필자)가 삼보(三寶: 토지, 인민, 정치)를 포기한 8월 29일은 즉 우리 동지가 삼보를 계승한 8월 29일이니, 그 간에 한순간도 숨을 멈춘 적이 없음이라. 우리 동지는 완전한 상속자니 저 황제권 소멸의 때가 곧 민권 발생의 때요, 구한국 최후의 날은 곧 신한국 최초의 날이니 무슨 까닭이오. 우리 한국은 무시(無始) 이래로 한국인의 한(韓)이오, 비한국인의 한이 아니라. 한국인 간의 주권수수는 역사상 불문법의 국헌(國憲)이오, 비한국인에게 주권을 양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효요, 한국의 국민성이 절대 불허하는 바이라. 고로 경술년 융희황제의 주권 포기는 즉 우리 국민 동지에 대한 묵시적 선위(禪位)니 우리 동지는 당연히 삼보를 계승하여 통치할 특권이 있고, 또 대통을 상속할 의무가 있도다. 고로 이천만의 생령과 삼천리의 옛 강역과 사천 년의 주권은 우리 동지가 상속하였고 상속하는 중이오 상속할 터이니, 우리 동지는 이에 대하여 불가분 무한 책임이 중대하도다."

'대동단결의 선언'의 내용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최고 권력인 국민주권은 양도되지 않으며 양도될 수도 없다. 주권은 양도될 수 없는 국민의 최종적 권력이다. 최고의사결정권한인 주권은 국민이 직접 보유하고, 불가분이며, 양도할 수 없다.

둘째, 국민은 군주와의 복종계약을 통해 자신의 최고 권력인 주권을 양도한 것이 아니며 단순한 신탁위임에 불과하다.

셋째, 군주가 자신에게 주어진 최고 권력인 통치권을 일제에게 양도함으로써 군주주권은 상실되었으므로, 이제 최고 권력은 국민주권이다. 따라서 이제는 정체(政體)가 절대군주가 지배하는 군주독재가 아니라 국민의 일반의사에 따른 통치인 공화주의가 되어야 한다.

대동단결선언은 이어 융희황제가 포기한 삼보(三寶)를 상속하기 위한 완전한 통일조직의 필요성, 즉 '유일무이의 최고기관'인 정부를 조직하자는 주장을 하였는데, 그것은 3.1운동의 결과 임시정부의 수립을 통하여 실현되었다.

이듬해인 1918년 11월에는 만주 길림에서 국외 망명 독립운동가 39인의 이름으로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외교론을 배격하고 독립전쟁을 통한 독립운동노선을 천명하였다. 대한독립선언서는 "무력겸병을 근절하여 평등한 천하의 공도를 진행하는 것"을 복국(復國)의 사명으로 하였으며, "권리와 부를 모든 동포에게 베풀며 남녀 빈부를 고르게 조화하며, 등현등수(等賢等壽)를 지우노유(智愚老幼)에게 균등하게 하여 사해 인류를 건"지는 것을 건국의 기치로 삼았다. 대한독립선언서는 독립군의 육탄혈전으로 나라를 되찾은 다음, 남녀 빈부가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이루겠다는 독립국가 건설 방략을 밝힌 것이다.

이후 민족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정치적 담론으로 자리 잡는 이념은 '대동단결의 선언'에서 밝힌 공화주의와 '대한독립선언서'에서 밝힌 균등 즉 평등주의가 된다.

1919년 3.1운동 직후 출범한 상해 임시정부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국무원 선거를 한데 이어 전문 10조의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심의·통과시켰다. 임시헌장은 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 하여, 왕정복고를 거부하고 인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임시헌장 1조에서 제기된 민주공화제는 당시 일본만이 아니라 신해혁명 이후 중국에서 나온 수많은 헌법안 가운데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형식과 내용을 담고 있다. 주창자인 조소앙에 따르면 민주공화제는 인민의 이익을 기초로 하여 정치적 권리를 균등화하고 국민을 균등하게 정치에 참여시키는 가장 좋은 제도였다(김정인, 2012).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은 이후 여러 차례(1925, 1927, 1940, 1943, 1944) 개정되었지만, 민주공화국을 지향하는 원칙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이러한 전통은 1948년 제헌헌법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1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2조)라 하여, 민주공화국 및 인민주권을 선포하는 데로 이어졌다. 이처럼 식민통치기에 인민주권과 민주공화국에 대한 합의, 즉 군주주권과 왕정복고에로의 반동적인 흐름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세계사적으로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3ㆍ1운동을 분수령으로 인류가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가 가시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3ㆍ1운동 이후로 정의, 인도, 자유, 평등 등이 시대이념으로 등장하였다. 한용운이 조선독립의 이유로 "자유는 만유(萬有)의 생명"이라고 천명했던 것도 이런 시대정신의 표현이었다. 다른 하나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모든 사회세력들이 자신을 자각하고 자아실현이라는 공동 이상을 표출하였기 때문이다. 민중은 민족적 해방을 요구하는 이상, 노동자는 계급적 해방을 요구하는 이상, 여성은 성적 해방을 요구하는 이상을 분출하였다. 그리고 스스로의 투쟁을 통해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였다. 노동자는 계급적 자각을 통해 노동권 생존권 확보를, 민중은 민족적 자각을 통해 국권회복을, 여성은 성적 자각을 통해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을 시작하였다. 3ㆍ1운동을 직접 체험하였던 청년 김산은 "그 사람들은 자유를 구걸하지 않았다. 그들은 치열한 투쟁이라는 권리를 행사하여 자유를 쟁취하였다"라고 시대분위기를 전하였다. 이처럼 개인이 자신의 인격을 자각하고 자유와 평등이 시대정신이 된 사회분위기 하에서 왕정복고사상은 발붙이기 힘들었다.

▲독립기념관의 독립선언도. 독립기념관에 전시된 민족대표 독립선언도. 민족대표들은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갖고 세계 만방에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였다.ⓒ연합뉴스

대한민국임시헌장은 민주공화국을 선포한데 이어, 3조에서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임"이라 하여, 새로 건국할 민족국가의 기본 방향이 평등사회 건설에 있음을 선언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공화주의의 전통을 이어 균등, 평등, 재산의 공공성을 강조하였으며, 인민의 기본권을 자유보다는 '균등의 원칙'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임시정부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통해 균등한 사회를 달성하고자 하였다.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란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등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보존되어야 할 최소한의 존엄성과 관련된 사회경제적 권리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민주주의이다. 임시정부의 정강과 헌법의 이념을 제공한 조소앙(1887~1958)에 따르면 우리는 고래로 이러한 이념과 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새로운 국가 건설에서 사회민주주의적 이념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정신적 전통은 유학과 실학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민족해방운동의 전통이 이러한 생각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강자를 존중하고 약자 보호를 거부하는 제국주의 원리는 분명 자본주의와 통하는 것이었다. 이에 맞서는 독립운동의 정신은 일본인의 침탈에서 조선인을 해방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강자의 침해로부터 약자를 보호하는 방향을 중시하고 있었다.

(2) 건국강령의 건국이념

1941년 11월 28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민족국가 건설이념을 담은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공포하였다. 건국강령은 대일 선전포고를 앞둔 시점에서 모든 독립운동세력이 합의한 미래사회의 준칙이었다. 내용은 한국독립당의 기본이념이기도 한 삼균주의(三均主義)에 기초하여 전 국민적 데모크라시 국가인 신민주국 건설론에 입각해 있었다. 일제가 패망하고 우리가 해방되면 대한민국의 헌법과 통치는 대한민국 건국강령에 따라 삼균주의 원칙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건국강령은 인간의 기본권인 자유와 평등을 기본원리로 하여 작성되었으며, 정치적 평등(均權), 경제적 평등(均富)과 함께 교육의 균등(均智을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한 3대 기본 권리로 간주하였다. 정치적 평등이 다수의 의사에 의한 국민의 자치 즉 국민주권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유에 가까운 개념인 반면, 경제적 평등과 교육의 균등은 평등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건국강령의 경제적 평등이념은 제 6항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건국강령은 "건국시기의 헌법상 경제체계는 국민 각개(各個)의 균등생활을 확보함과 민족 전체의 발전과 국가를 건립, 보위함에 연환(連環)관계를 가지게"하되, 경제정책의 기본원칙을 다음과 같이 정한다고 하였다.

(가)대 생산기관의 공구와 수단을 국유로 하고, 토지와 어업, 광산, 농업, 임업, 수리, 소택(沼澤)과 육상・수상・공중 운수사업과 은행·전신·교통 등과 대규모의 농·공·상·기업은 국유로 하고, 소규모 혹 중등기업은 사영으로 함.(나)적의 일체 사유자본과 부적자(附敵者)의 일체 소유자본 및 부동산을 몰수하여 국유로 함.(다)몰수한 재산은 일체 무산자의 이익을 위하여 제공함.(라)토지의 상속, 매매, 양도, 저당, 상속, 조차(租借)와 고리대금업과 고용농업을 금지함.(마)국제무역과 전기, 상수도와 대규모의 인쇄, 출판, 영화, 극장 등을 국유 국영으로 함.(바)노공(老工)·유공(幼工)·여공(女工)의 야간노동과 연령·지대(地帶)·시간의 불합리한 노동을 금지함.(사)노동자, 농민의 면비의료(免費醫療)를 보급 실시하여 질병소멸 및 건강보장에 힘씀.(아)토지는 자력자경(自力自耕)을 원칙으로 하되, 고용농, 소작농, 자작농, 소지주, 중지주순으로 우선 분급함.

건국강령은 중소기업만 사영으로 하고, 토지혁명을 통해 문란한 사유제도를 국유제도로 환원하고, 대 생산기관‧대기업을 국유화 하며, 광산‧어업‧농림 등 자원성기업과 운수산업‧은행‧전신‧교통 등 국가기간 시설을 국유화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건국강령은 수정자본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 사상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수정자본주의 노선을 건국강령은 "우리나라의 건국정신은 삼균제도에 역사적 근거를 두었"다고 하여, 전통이념에 근거하여 이끌어내고 있다(조동걸, 1995).

건국강령의 토지의 국유와 대기업의 국유화 방침이 가능했던 것은 좌우파의 구별 없이 독립운동의 공통이념으로 정착하였기 때문이다. 1930~40년대 해외에서의 민족독립운동의 발전은 독립국가 건설론을 하나로 모으는 계기가 되었다. 독립국가 건설 방안은 전 국민의 보통선거에 기초한 민주공화국의 수립과 친일파·민족반역자의 처단, 대 생산기관의 국유화와 토지문제 해결, 8시간 노동제실시, 남녀평등과 의무교육제 실시 등으로 집약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우파인 임시정부의 이념과 노선도 1930년대를 거치면서 점차 변화하여 사회민주주의 이념과 무장독립노선을 지향하게 되었다. 건국강령을 통해 드러난 임시정부의 독립국가의 체제 및 정책방향의 주된 내용은 보통선거제와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수립, 토지와 대 생산기관의 국유화, 지방자치제의 실시, 국비교육, 사회보장제도의 실시 등이었다. 이와 같이 임시정부가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표방했던 점은 식민지시기 우익 민족주의의의 질적 변화를 보여주었다는 측면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특히 주목할 점은 1948년에 제정된 제헌헌법의 기초위원이던 유진오 박사가 헌법을 기초할 때 참고한 10가지 문서 가운데 임시정부의 건국강령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제헌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박사는 대한민국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함께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를 입국의 기본으로 채택하였다"고 하였다. 자유방임주의를 배격하고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를 대한민국의 근본이념으로 채택했다는 것이다. 민족독립운동의 전통이 제헌헌법에 직접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3. 맺음말

뉴라이트는 교과서는 대한민국의 국제(國制)가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 경제적으로 자유시장 체제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개화기와 식민지시기에 걸쳐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근대 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해온 민족적 근대화세력 즉 개화파에 의해 수립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개념으로 개항 이후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민주주의 운동의 역사를 파악할 경우, 우리나라 근·현대 민주주의운동의 풍부하고 다채로운 역사를 제대로 포괄할 수 없다.

대한민국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던 것은 개화파의 흐름과는 다른 독립운동세력이 끈질기게 추구해 왔던 공화주의와 평등주의 이념이었다.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워 새로이 독립국가로 탄생한 대한민국은 미국식 형식적·정치적 민주주의와는 다른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추구하였다. 대한민국의 정체(政體)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였으며, 경제 이념은 자유시장경제가 아니라 사회적 시장경제였다. 그리고 이런 헌정체제와 경제 질서를 수립케 한 것은 결코 일제 식민지 지배의 유산이 아니었다. 그와는 정반대로 일제에 항거한 민족해방운동 세력이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민주독립 국가를 재건"(제헌헌법 전문)한 결과였다.

참고한 글:

김도훈, 「공립협회(1905~1909)의 민족운동 연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4, 지식산업사, 1989.
강만길, 「독립운동 과정의 민족국가 건설론」 한국민족주의론 Ⅰ, 창작과비평사, 1992.
조동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건국강령」 『한국의 독립운동과 광복 50주년』 광복회, 1995.김정인, 「근대 한국 민주주의 문화의 전통 수립과 특질」 『역사 속의 민주주의』 제 55회 전국역사학대회 발표문, 2012.


 /한상권 덕성여대 사학과 교수 친일·독재미화와 교과서개악을 저지하는 역사정의실천연대 상임대표

2012년 11월 21일 수요일

일제가 조선에 철도를 놓은 이유는?


이글은 프레시안 2012-11-20일자 기사 '일제가 조선에 철도를 놓은 이유는?'를 퍼왔습니다.
[뉴라이트는 어떻게 역사를 왜곡했나]일제강점기 조선경제 발전론, 터무니없는 소리!

일제 강점기(1): 경제적 변화 등에 관한 서술

1. 기본 입장

뉴라이트는 일제강점기를 항일독립운동이나 민중운동 중심으로 볼 것이 아니라, 조선이 식민지 통치를 경험하면서 자본주의적인 발전을 이루었다는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에 입각하여 자본주의 발달이라는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일제의 한국 지배가 "한국인의 정치적 권리를 부정한 폭력적 억압체제"(78쪽)에 입각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리고 "국내외의 한국인의 불굴의 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하였다"(78쪽)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뉴라이트 교과서는 식민 통치 시기가 '억압과 투쟁의 역사'만은 아니었으며, 일제 식민통치의 '의도하지 않은 효과'와 한국인 자신들의 노력에 의해 "근대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함으로써 근대국민국가를 세울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두텁게 축적되는 시기"(78쪽)였다고 새롭게 규정한다. 식민지 시기가 "오늘날 한국 현대문명의 제도적 기초가 그 과정에서 닦인"(96쪽) 근대문명에 관한 학습기 즉 근대문명의 제도적 확립기라는 주장으로, 식민지근대화론의 입장인 것이다. 그 결과 반민족 행위자인 친일파는 일제의 식민 통치와 식민지 근대화 과정에 잘 적응해 근대적 능력을 배양하고 대한민국 발전의 초석을 놓은 '근대화의 선구자'로 둔갑되었다.

근대화, 자본주의화, 경제성장, 문명화 등으로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미화하는 뉴라이트의 '식민지근대화론'은 국민정서는 물론이고 학계의 연구동향과도 한참 거리가 있는 이론으로, 다음 문제점이 있다.

▲ 지난 2008년 자유교육연합과 뉴라이트학부모연합 등 보수성향의 5개 교육·사회단체 회원들이 7일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반대한민국 교과서 추방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첫째, 일제의 지배제도나 정책이 가진 수탈성이나 억압성이 거세될 수밖에 없다. 식민지근대화론이 식민지지배미화론이라고 비판하면, 뉴라이트는 마지못해 '이식근대의 수탈성과 폭력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억지 주장을 하지만, 논의의 초점은 근대적 제도의 이식이나 보편 문명의 수용이지, 결코 이런 제도의 식민지성 혹은 억압과 수탈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둘째, 근대 사회를 이식한 주체가 일본 제국주의이므로, 우리 역사 발전의 주체는 일제가 될 수밖에 없다. 일체의 권리를 박탈당한 식민지시기에 우리 민족의 주체적 근대수용이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일제시기 식민지 근대화의 주체(혹은 역사발전의 주체)는 일제(총독부와 일본인 자본)와 이에 기생한 이른바 민족자본가(기업가나 테크노크라트)라고 서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의 사회적 성공을 가져다준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협력적이었던 친일파들이 한국의 근대화를 주도한 계층이었다는 것이다.

셋째, '항일운동은 독립 쟁취, 친일활동은 건국역량준비'라는 기괴한 도식이 성립하게 된다. 서로 적대개념인 항일과 친일이 둘 다 국가건설을 위한 애국 활동이 되는 것이다. 사실 뉴라이트는 근본적으로 '근대화‧경제성장=문명화'라는 시각에서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기 때문에, 항일보다는 친일에 보다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뉴라이트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일제의 지배가 억압적이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기존의 교과서와 비교할 때, 식민지 지배정책의 억압성과 독립운동에 대한 서술은 줄이고, 그보다는 일제강점기가 자본주의 정착기였다는 점에 역점을 두어 서술하고 있다.

2. 서술 내용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서술할 때 가장 중요한 전제는 한국이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은 식민지 상태에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식민지시대의 역사서술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는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그에 대한 한국인들의 대응은 어떠했는가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반면 뉴라이트 교과서는 수탈과 억압을 강조하는 이른바 '수탈론'은 민족적 편견에 입각하여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한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며, 일제강점기를 다음과 같이 새롭게 규정하고 있다.

첫째, 일제 식민통치 당국은 조선인을 경제적으로 수탈한 바가 없으며 자본주의 관계에 의해 정상적으로 통치했다. 폭력적 수탈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순수하게 자본주의적 경제교환관계에 입각한 재화의 이동이 있었을 뿐이므로 제국주의의 수탈과 억압은 과장되었거나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둘째, 식민통치의 '의도하지 않은 효과'와 한국인 자신들의 노력에 의해 "근대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함으로써 근대국민국가를 세울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두텁게 축적되는 시기"(78쪽)였다. 식민지지배는 한국인에게 근대문명을 가르쳐 주었으며, 해방 이후 근대국민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능력은 근대문명을 학습한 세력 즉 친일파한테 있다.

셋째, 일제강점이 조선의 근대화를 촉진시켰고, 이 시기에 구축된 인적·물적 인프라가 해방 이후 대한민국 고도경제성장의 역사적 동력이 되었다. 일제 침략 하에서도 조선인이 능동적으로 경제생활을 영위하여 자기 성장을 이룩하였으며, 1930~1945년간에 조선에서 이루어진 맨파워(man power)의 성장이 1960~1970년 경제발전의 역사적 기원이다.

이상 뉴라이트는 일제강점기를 '자본주의의 정착과 근대 문명의 축적기'인 동시에 '한국자본주의 고도성장의 역사적 기원'으로 간주하고 있다. 일제의 민족적 차별과 폭력적 억압의 실상 대신 일제 식민통치의 근대적 효과와 그 성과에 주목함으로써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제국주의 시혜론'에 입각해 식민지시기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뉴라이트교과서 '식민지 시기의 경제적 변화'(94~101쪽) 서술에 집중적으로 드러나 있다.

1) 시장경제 기반의 형성

(1)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뉴라이트 교과서는 "총독부는 인력과 물자의 이동을 활성화하고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교통 통신망을 대거 확충했다"(94쪽)며, 철도, 도로, 항만 등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실태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였다. 그리고 "이 같은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은 식민지 한국에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활성화하였다"(94쪽)고 서술하여, 마치 일제가 조선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위해 사회기반시설을 확충한 것인 양 오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교과서의 서술은 일본이 조선에 철도, 항만과 같은 사회기반시설을 확충하여 조선을 근대화시켰다는 일본 극우파들의 '식민통치 시혜론'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이다. 이를 근거로, 1953년 한일회담 수석대표였던 구보다 강이찌로(久保田貫一郞)의 "36년간의 일본의 조선 통치는 한국인에게 유익했다"는 망언 이후로 "나는 일본의 조선 식민통치가 한국 국민에게 불행이었다는 생각을 가져본 일이 없다"(1958년, 기시 노브스케(片信介) 총리대신), "일본은 조선을 위해서 좋은 일을 많이 한다. 한 20년쯤 더 통치했으면 좋았을 것이다"(1964년, 다까스기 상이찌(高衫晉一) 한일회담 수석대표)는 망언이 이어졌으며, 오늘날 역사교과서 왜곡 사태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조선인의 희생에 따른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은 조선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먼저 철도건설은 일본이 이권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철도는 일본에 각종 특혜를 주었다. 일본은 조선인의 희생에 힘입어 부설된 철도를 독점 운영하면서 높은 수익을 독차지하였다. 게다가 철도가 건설됨으로써 군 병력의 이동, 식량의 일본 수출, 공업 지대에서의 원료와 생산물의 수송 등을 차질 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일본은 철도 건설과 독점을 통해 조선에 대한 군사 및 정치적 지배기반을 굳히는 한편 경제약탈을 효과적으로 하였다. 해운 또한 일본자본에 의해 독점되었다. 해운업의 독점과 확장은 자연히 항만시설의 확장을 가져왔으며, 확장된 항만은 확대된 철도망과 연결됨으로써 식민지적 경제침탈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전신 전화 등 통신망의 확장 역시 식민지 지배망의 확립을 위한 것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항일의병전쟁을 탄압하고 식민지 지배기구를 확립하기 위해서도 도로망의 정비・확대 또한 시급했다. 도로 건설 역시 식민지 지배망의 일환으로서 적극 추진되었는데, 도로 용지로는 농토가 무상 몰수되었으며 사용된 노동력은 대부분 농민의 부역동원이나 강제노동으로 충당되었다. 결국 식민지시기에 철도, 항만, 전신, 전화,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이 확충되었으나, 이들을 일본이 독점함으로써 일본 자본주의 발전을 뒷받침하는 자원이 되었으며, 식민지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는 시설로 활용되었다.

▲ 독립기념관의 독립선언도. 독립기념관에 전시된 민족대표 독립선언도. 민족대표들은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갖고 세계 만방에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였다.ⓒ연합뉴스 (목천=연합뉴스) 독립기념관에 전시된 민족대표 독립선언도. 민족대표들은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갖고 세계 만방에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거족적인 3.1운동이 점화되었다. (끝) YNA

(2) 도시화의 진전

뉴라이트 교과서는 인구 증가를 말하면서, "도시의 발전도 있었다. 도시인구, 즉 부(府) 인구는 1920년 전체 인구의 3.4%에서 1930년 5.6%, 1940년에 11.6%로 증가하였다"(95쪽)고 하여, 도시의 발전을 강조하였다.

식민지시기 도시의 발전을 얘기하려면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것이 일본인 인구의 증가다. 일제 말기에 약 75만 명의 일본인이 조선에 들어와 살고 있었고 그 가운데 대부분이 도시에 집중되어 있었으므로 도시의 발전은 일본인들의 조선 이민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또한 이 시기 도시의 발전을 언급할 때, 주요 도시들이 일본인들에 의해 주도되는 식민도시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서울이나 개항장에서 발전한 도시들은 구조적으로 일본인 거주지인 남촌과 조선인 거주지인 북촌으로 분리되어 있고, 도시 시설 면에서도 양자 사이에 커다란 격차가 있는 이중도시(dual city)의 모습을 띠었다. 즉 일본인 거주지역에 대한 우선 개발과 특혜가 주어졌고,전기나 상수도 그리고 도로의 보급도 일본인 거주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도시의상권과 문화시설의 소유권자는 일본인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대도시들은 '식민 도시'의 전형적인 모습을 띠고 있었다. 이와 같은 실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는 가운데 '도시의 발전이 있었다'고 쓰는 것은 조선의 식민지성을 은폐하고 근대성만을 부각하는 것이다. 게다가 교과서는 토막민과 같은 도시빈민 문제는 생략하고 있으며, 도시 건설의 미명하에 성읍 등 한국 도시의 정체성을 파괴하고 기형적인 도시 발전을 이룬 폐단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다.

2) 식민지의 경제개발

(1) 경제성장률

뉴라이트 교과서는 "전체적으로 식민지 한국의 연평균 총생산은 인구 증가율 1.3%를 능가하는 3.6%의 성장을 보였다"(99쪽)고 하여, 식민지시기에 조선이 상당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서술이 지닌 가장 큰 문제점은 한반도에 존재하는 지배자이며 착취자인 일본인과 피지배자이며 피착취자인 조선인을 구분하지 않고 이들 모두를 한반도인으로, 사실상 조선 민족으로 동일시한다는 데 있다. 민족문제야말로 식민지 조선경제를 이해하는 데 가장 본질적인 것이다. 일제강점기는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 지배가 핵심이고 따라서 그러한 사회에 대한 분석에서는 민족문제를 핵심적 요소로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제시대의 개발은 식민지체제하에서 이루어진 개발이었고, 조선경제가 사실상 일본인들에 장악되었던 상황에서 경제성장률을 말하는 것은 식민지 조선의 역사상을 왜곡할 가능성이 높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 투자된 자본은 대부분 일본 자본이었으며 조선에서의 경제 성장에 따른 수익은 대부분 일본 자본과 재조선 일본인의 몫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1930년대 이후 조선에 들어선 공장들은 일본 본토의 대규모 자본투자에 의한 것이었고, 전시 중 연간 총생산액은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수많은 자원 약탈이 포함된 것이다. 일본의 대자본은 만주까지 넓어진 시장을 위해 만주와 한반도를 포괄하는 '대일본 자본주의 경제권'을 설정하고, 만주와 한반도의 시장을 목표로 조선에 공장을 짓기 시작하였다. 특히 북한 지역에 많은 공장을 지었다. 따라서 이 시기 조선 경제는 '일본 자본주의권' 안에서만 의미가 있었다. 당시 한반도 경제라는 것은 독자적인 경제권이 아니었다. 조선인의 자본 비중은 10% 정도밖에 안 되었다. 식민지 조선에서의 경제 성장 수익은 대부분 일본 자본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으므로, 경제 성장률을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조선의 경제가 고도성장하고 있던 바로 그때, 조선 농민들의 생활은 점점 더 곤궁해져 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체 조선인 호수에서, 생활이 궁박한 상태에 있지만 반드시 타인의 구호를 받을 정도에는 이르지 않고 간신히 생계를 세울 수 있는 세민(細民)과 생활이 궁박하여 긴급히 누군가의 구제를 필요로 하는 상태에 있는 궁민(窮民)의 호수가 차지하는 비중은 1926년의 13.8%에서 1934년 35.5%로 늘어났다. 같은 기간 동안 전체 조선인 중에서 이들 세궁민(細窮民)이 차지하는 비중은 11.6%에서 28.2%로 급증했다. 전체 조선인의 3분의 1 가량이 세궁민인 것이다.

결국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동안 조선은 급속한 개발을 경험했으나 그 개발의 이득은 조선인들에게 거의 귀속되지 않았고, 조선인들의 경제적 처지도 거의 개선되지 않았고 또 개선될 전망도 없었으며,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그것에 의한 민족차별이 구조적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해방과 더불어 이 개발의 유산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바로 그 의미에서 일제시대의 개발은 조선인에게 있어 '개발 없는 개발'이었다. 조선에서 일어난 놀라운 경제성장에도 그것이 조선인들의 생활수준을 개선시킬 전망이 없고 오히려 불평등과 차별만을 확대재생산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허수열, 28쪽)

(2) 한국인 상공업자의 성장

뉴라이트 교과서는 "식민지 경제발전은 일본인과 일본자본이 주도하였지만 한국인과 한국인 자본이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한국인 상인과 기업가 중에는 경제 환경의 변화에 잘 대응한 자도 많았다.(……) 불리한 여건에도 한국인 상공업자들은 공장을 건설하고 시장을 개척하는 수완을 발휘하였다"며, 그 대표적인 사례로 경성방직과 화신을 들었다. 그리고 이들이 "면방직업과 백화점 부분에서 일본인 기업과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99-100쪽)고 하였다.

그러나 "법인으로 등록된 회사 자본 가운데 한국인 자본 비중은 10% 정도에 불과"(100쪽)한 식민지 현실에서, 전체 자본 규모의 10분의 1에 불과한 한국인 상공업자의 성장에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경성방직이나 화신과 같은 기업이 친일의 대가로 특권을 부여받아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마치 일본인 기업과의 순수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것인 양 왜곡하였다.

사실 일제치하에서 조선인이 일본인과 경쟁해 자본가로 성장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제시대의 조선인 대지주 가운데 자본가로 살아남은 사람은 절반도 안 된다는 연구결과는 조선인의 기업 경영이 쉽지 않았음을 잘 보여 준다. 이처럼 열악한 여건에서 경성방직이 지주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던 까닭은 총독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9년 10월에 창립된 경성방직은 출발하자마자 좌초의 위기를 맞았다. 경성방직은 1926년경부터 완전 조업에 들어감으로써 기사회생할 수 있었는데, 총독부가 1924년부터 매년 자금을 제공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거족적인 저항운동인 3.1운동에 직면하여, 조선의 귀족, 양반, 부호, 실업가, 교육가, 종교가 등에게 얼마간의 편의와 원조를 주어 친일단체를 만들려는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이후 경성방직은 일제의 만주 진출에 발맞추어 1938년 만주 봉천에 지점을 설치하였다. 이즈음 경성방직 사주 김성수는 중일전쟁의 의미를 확산시키고 일반 민중들의 시국인식을 철저히 하기 위해 시국강연을 하고 다녔다. 또한 일제가 각종 관변기구와 민간단체를 총망라하여 조선인을 통제할 목적으로 조직한 전시통제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와 같은 김성수의 주도적이며 적극적인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해, 최근 서울행정법원은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당하여 국가와 민족의 자주권이 박탈되고 한민족의 뿌리와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절박한 식민지배 하에서 당시의 유력한 기업인이자 교육자가 자신의 기업 및 학교 경영활동 유지를 위하여 일제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도움이 되는 행위에 가담하거나 이를 용인하였다는 것은 그 내심의 의사나 동기가 어떠하였는지에 불구하고 친일반민족행위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경성방직처럼 일제에 협력한 자본가들은 성장을 거듭한 반면 백산상회와 같은 항일기업은 몰락했다. 백산상회의 몰락과 사주인 안희제의 옥사는 국민국가를 갖지 못한 민족자본의 비극적인 운명을 여실히 보여준다.

▲ 일제강점기 수탈의 흔적이 남아 있는 항구도시, 군산. 일제는 조선의 쌀과 자원을 수탈해가는 창구로 전북 군산을 선택하고 철도와 항만 등을 조성했다. ⓒ연합뉴스

3) 농촌 경제의 동향

(1) 쌀의 수탈과 지주제

뉴라이트 교과서는 "쌀은 일본에 수탈된 것이 아니라 경제 논리에 따라 일본으로 수출되었으며 그에 따라 일본인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의 소득은 증가하였다"(98쪽)고 하여, 이른바 '식민지수탈론'을 비판하였다. 일제 식민 통치당국의 공권력에 기초한 폭력적 수탈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순수하게 자본주의 경제 교환관계 즉 시장논리에 입각하여 자율적·자발적 교환을 통한 부의 축적이 있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수탈론에서 말하는 쌀의 수탈이란 유통 과정에서의 수탈보다는 생산과정에서의 수탈에 더 중점을 두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지주제와 고율 소작료 관행은 총독부권력에 의해 강력히 뒷받침되고 있었다. 일본인 지주와 조선인 지주가 총독부 당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소작인들로부터 고율의 소작료를 거두어들이는 것 자체가 사실상 수탈에 해당한다. 일제 통치자들은 쌀 생산을 늘리고 지세 수취를 원활히 하기 위해 소농민과 소작인을 외면하면서 지주를 보호하고 육성하는 정책을 광범위하게 시행했다. 그 결과 조선의 소작인 경작 비율은 조선 시대에 상상도 하지 못한 수준으로 뛰어올랐으며, 소작제는 일제시대에 이르러 가장 악랄한 형태가 되었다. 지주한테 소작농이 얽매인 정도가 더 심해졌으며 수탈성도 한층 강화되었다. 1920년대 중반 암태도소작쟁의를 기점으로 조선의 소작농민들은 소작료를 4할로 낮추는 운동을 전개했으나 총독부 경찰 당국은 이를 극력저지하고 탄압하였다. 소작료는 5할 혹은 그 이상이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한편 일제는 1918년 '쌀 소동'으로 식량공급문제가 사회문제가 될 정도로 악화하자, 한반도를 식량 공급지로 삼기 위해 식민지 지주제를 정착시키는데, 이 역시 쌀이 시장의 논리에 의해 생산‧수출된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식민 통치의 혜택을 가장 크게 받은 집단은 지주층이었다. 지주층이 전통 사회에서 허용되지 않던 가혹한 조건으로 소작인을 착취할 수 있게 된 것은 일제 식민 통치 덕분이었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일본에 쌀을 보내 식민지의 임무를 수행하고 지세를 납부함으로써 식민 통치의 비용을조달했다. 조선 후기에 정부는 지방 지주 세력의 통제가 약해져 소작료가 수확량의 절반을 넘게 된 현실을 개탄하곤 했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에는 조선을 일본 제국의 쌀 생산 기지로 이용하는 정책에 의해, 농지 소유의 집중이 심화하고 소작료가 살인적 수준까지 올라갔다. 소작인의 최저 생계비가 보장되지 않는 이런 사태는 정상적 국가 경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로 식민지 경영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식민지 조선의 재부는 일본인 회사와 일본인 지주층, 그리고 일부 조선 지주층에게 집중되었다.

게다가 일제는 조선을 미곡생산지대로 규정하여 일본으로 저가의 쌀을 수출해서 일본 경제의 임금부담을 줄일 수 있도록 하였다. 식민지정책에 따라 조선의 농업이 쌀 단작으로 바뀐 것이다. 1920년 이후 산미증식계획이 시행된 결과 일본에 대한 쌀 수출량은 증가하지만, 조선인 자작농들은 지주들에게 땅을 헐값에 빼앗겨 소작인이 되거나 먹고 살길을 찾아서 만주, 연해주 등으로 이주해야 하였다. 산미증식계획 실시 과정에서 수리 조합비를 내지 못한 농민들의 토지를 지주들이 헐값에 사들임으로써 우리나라 농민들을 더욱 궁핍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이 계속되는 동안 농경지는 점점 극소수의 일본인, 한국인 지주들이 독점하게 되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전체농가의 3~4%밖에 안 되는 소작농과 자소작농이 지주들의 땅을 경작하면서 전체 생산량의 반 이상을 현물로 소작료를 내게 되었다. 일제는 1930년경에는 조선에서 생산된 쌀의 40% 이상을 헐값으로 가져갔다.

소수의 일본인이 조선의 부의 많은 부분을 장악하게 되면서 민족별 경제적 격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졌고, 시간이 경과하면서 그 격차는 더욱 확대되어갔다. 민족별 경제적 격차의 확대는 민족차별을 더욱 조장함으로써 차별은 일상화되었다. 많은 조선인이 경제적 궁박을 견디다 못해, 농촌을 떠나 도시빈민으로 흘러들어 가거나 혹은 만주나 시베리아로 유민화되어 떠나갔다. 한 사람의 일본인이 이민으로 들어올 때마다 다섯 사람꼴로 조선인이 유민화되어 조선을 떠나간 것도 바로 이러한 경제적 궁박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조선인 유민과 일본인 이민, 이것이 다름 아닌 식민화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2) 조선인의 생활수준

일제시대에 조선인들의 생활 수준이 저하되었음을 증명하는 지표로 흔히 1인당 미곡 소비량의 감소가 거론된다. 이에 대해 뉴라이트 교과서는 "쌀을 대신해서 만주에서 조와 콩이 대용식품으로 수입되었다. 쌀의 1인당 소비가 감소한 것은 사실이지만 잡곡 등 대용식품과 기타 가공식품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1인당 열량섭취가 줄었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98쪽)고 하였다.

그러나 이 분야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에 따르면, 일제시대에 조선의 1인당 미곡소비량은 현저히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조선총독부의 인구자료와 생산량 자료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 1911~1934년간의 1인당 미곡소비량의 감소는 확실하게 나타난다. 1911년 0.786석에서 1934년 0.379석으로 52%나 감소하게 되는 것이다. 쌀을 제외한 다른 곡물의 1인당 소비 역시 1918~40년간 감소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쌀, 보리 및 대두의 소비에서 얻어지는 조선의 1인당 칼로리 섭취량은 1918년이 정점이고 그 뒤로 계속 감소하여 1936년에 최저점에 도달한다. 1인당 칼로리 소비량을 통한 곡물소비량의 종합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제시대에 1인당 곡물소비량은 결코 증가했다고 할 수는 없다. 일제시대는 아직 엥겔계수가 매우 높은 시기였기 때문에, 이러한 1인당 곡물소비량의 동향은 조선인들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다거나 혹은 1인당 소득이 증가했다는 주장을 하기 어려움을 짐작하게 해준다.(허수열, 271~277쪽)

▲ 일제의 전쟁물자 수탈. 일제가 공출제도라는 명목으로 수탈한 각종 물자 ⓒ연합뉴스

4) 식민지 지배 정책

(1)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

뉴라이트 교과서는 식민지 시기 가장 큰 성과로서 근대적인 사유재산제도의 성립을 들고 있으며, 이를 자유민주주의의 초석이 놓인 것으로 확대하여 해석하였다. 뉴라이트가 일제강점기 자본주의에 입각한 경제활동이 조선인에게도 전면적으로 보장되었다는 증거로 든 것이 1912년에 공포된 조선민사령이다.

"민사령을 통해 식민지 한국에서 근대적인 사유재산제도가 성립하였다. 민사령은 일본인이 한국에서 토지와 자원의 재산권을 확보하고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하도록 보호하였다. 민사령은 일제가 한국을 지배할 목적으로 공포하였지만, 한국인의 사유재산권과 경제활동의 자유 역시 보장하였다. 이처럼 민사령을 통해 한국인도 근대적 사권(私權)의 주체가 되었다"(84쪽)

뉴라이트의 이론가인 이영훈 교수는 민법을 주목하고, 해방 후 대한민국이 일제의 민법체계를 그대로 온존시킨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일제를 통해 이 땅에 들어온 시장경제체제를 복구하고 발전시켜 오늘날과 같은 번영하는 시장경제를 성취하게 된 것이지요"(이영훈, 『대한민국이야기』, 기파랑, 2007, 173쪽)라 하여, 식민지 지배 유산으로서 민법이 있음으로써 대한민국이 '번영하는 시장경제'를 성취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역사적 사실과 매우 동떨어진 것이다. 일제가 한국에서 자유로운 경제활동은 보호했다고 하나, 그것은 전면적이었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다. 엄혹한 식민통치하에서 식민지정책에 소극적이거나 독립운동에 찬동하는 기업가의 활동까지 보장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제헌헌법의 재산권 조항이 식민지 지배유산, 특히 일제 민법의 연속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제헌헌법 기초위원이었던 유진오 박사의 답변을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말씀드릴 것은 이 재산권에 관한 생각이 가령 그 전 일본 민법에 있던 돈 재산권에 관한 생각과는 대단히 다르다는 점을 한마디 말씀드려 두겠습니다. 그전에는 재산권은 절대적으로 해 가지고 그랬지마는, 지금은 공공필요에 의해서 불가불 이것을 수용해야 하는 경우에는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해서 상당한 보상을 지불함으로써 행한다... 그래서 재산권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보지 않고 법률로써 재산권의 내용을 정하고 법률로써 그 한계를 정해 가지고 그 법률이 허용하는 한계 내에서 재산권은 용인된다는 그 규정입니다"(헌법제정회의록, 147쪽)

제헌헌법 제10장 부칙 100조는 "현행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 효력을 가진다"고 하였다. 이는 다시 말해, 식민지 지배 유산으로서 민법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사회적 시장경제와 사회국가이념에 기반을 둔 제헌헌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효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2) 근대적 규율의 강요와 수용

뉴라이트의 규율 예시는 제국주의의 폭력적 획일주의와 훈육의 실상보다는 근대의 긍정적 양상을 예로 들고 있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근대규율에 의한 시간 사용의 합리화와 생활습관의 개선, 양력제, 염색옷, 제복착용 등 새로운 근대 생활상을 제시하고, "이처럼 한국인에게 가해진 새로운 규율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위한 것들이지만, 근대사회의 규율로서 한국인의 일상생활과 정신문화에 점차 내면화되어 갔다"(104쪽)고 함으로써, 식민시기 규율의 '문명화·근대화' 양상을 부각했다. 무단통치기 교사도 제복을 입고 칼을 차고 다니던 살벌한 상황이나 민족차별에 대한 서술보다는 조선총독부가 근대적 법치에 입각한 통치를 했다는 점을 은연중 강조함으로써 식민통치의 폭력성은 사라지고 근대적 체제로의 정비만 부각된 것이다. 그 결과 조선총독부는 식민통치기구가 아니라 효율적인 국가기구로 인식된다.

그러나 일제가 엄격한 일과시간, 체계적인 금지나 의무의 조항 등의 근대규율을 통해서 조선 사람들을 재구성하려고 애쓴 것은 사회계약의 기본적 이해관계 속에 걸려 있는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복종하는 주체, 습관이나 규칙, 명령에 복종을 강요당하는 개인을 만들어내기 위함이다. 가정, 학교, 공장 등을 군대나 감옥과 다름없는 감시 통제기구로 만듦으로써 하나의 거대한 감금사회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식민지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운동을 미리 방지하는 효과도 있지만 노동력의 효율적인 동원과 착취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결국 일제가 만들어낸 근대성에는 근대 시민사회의 정신적 기초인 개인의 자율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의 근대 시민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율성은 해방 이후 일제의 식민잔재를 극복하는 민주화 투쟁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획득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는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권한을 위임받은 권력체가 아니다. 조선총독부는 국가(공적 주체)가 아닌 것이다. 일제는 근대 사회의 핵심 가치인 자유 평등을 부정하였으며, 조선인의 정체성,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전시총동원체제 시기에는 일방적인 복종과 규율과 통제 그리고 돌격전을 요구했고, 이 과정에서 인명 희생과 국가테러리즘에 의한 인간 파멸이 있었다.

해방 이후 잇따라 발생하는 국가테러리즘의 근원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에서 비롯한다. 조선인은 자신의 정부를 갖지 못한 채 일제의 파시즘의 폭력정치에 의해 일체의 권리가 무시되고 복종과 굴욕의 노예적 상태를 강요당했다. 일제는 항일운동세력에 대한 탄압뿐만 아니라 조선 민중 전체에 대한 노예교육과 강압적 정치, 그리고 조선의 인적 물적 자원을 총동원하기 위한 수립한 국가총동원체제를 통해 조선 민중 전체에 대해 무차별한 탄압과 인권유린을 자행했다. 그 결과 일체의 민주주의적 정치훈련을 받을 기회를 박탈당한 채 식민지 노예의 길을 강요당했는데, 이는 인권문제 등 인간의 기본 권리에 대한 의식을 키우는 데 결정적인 장애로 작용하였다.

(3) 교육 정책

뉴라이트 교과서의 식민지 시기의 교육과 관련한 서술 역시 문제가 심각하다. 어떠한 교육이며 누구를 위한 교육인가에 대한 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먼저 취학률에 대한 기술을 보자.

"총독부는 보통학교의 보급에 주력하여 1918년 3개 면마다 보통학교 1개를 둔다는 3면1교제를 계획하여 1922년까지 완료하였다. 1928년에는 보통학교의 1면1교제 정책을 추진하여 1936년에 완료하였다. …한국인의 지속적인 학교 설립 및 확충 요구에 직면한 총독부는 1936년부터 1946년까지 취학률 60%를 목표로 하는 제2차 확충계획을 세웠다. 그 결과 식민지 말기의 취학률은 40%를 넘었다"(89쪽)

1920년대 30년대 학생 맹휴사건의 가장 많은 요구가 민족차별 철폐였음에도 교과서는 식민지 교육과 조선인 학생의 갈등 구조보다는 조선인의 교육열 증대에 초점을 맞춰 일제가 이를 수용하였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왜 1936년부터 총독부가 취학률을 높이려 했는지도 설명하지 않고 있다. 전환의 배경은 (준)전시체제에 따르는 황국신민의 육성이라는 일제의 교육방침의 변경 때문이었다. 동양의 히틀러라고 불리는 미나미 지로 총독이 1936년 부임하여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를 강조하면서 황국신민화를 목표로 하는 보통교육이 확장되었다. 이듬해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보통교육의 확장이 더욱 요구되었다. 그것은 징병제를 시행하여 조선의 청년들을 전장에 동원하기 위해서는 일본어를 가르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초등교육은 사실상 어린 조선인 학생들을 조기에 황국신민으로 만들어 전쟁의 총알받이로 끌고 가기 위한 조선인 징병제 계획과 맞물려 운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쓰지 않은 채 취학률이 40%를 넘었다는 점만 쓰게 되면 총독부가 조선인 교육을 위해 크게 노력하였다는 식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다음은 중학교 진학의 문제에 대한 서술이다."1930년대에는 공업화가 이루어지자 학교 졸업자에 대한 수요가 커지는 가운데 중등학교 입학난이 심화되었다. 이에 총독부에 중등학교 설립을 청원하거나 사립중등학교를 설립하는 운동이 활발히 펼쳐졌다"(105쪽)

교과서는 중등학교 설립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고 쓰고 있으나, 대부분의 중등학교 설립 운동이 총독부에 의해 좌절되었고 총독부 또한 중등학교를 거의 설립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쓰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총독부의 교육정책이 우민화 교육정책 즉 보통교육 위주였기 때문이었다는 언급도 없다. 총독부는 조선인을 위한 인문계 중등교육은 최대한 억제하고 실업계 중등교육만 다소 숨통을 틔워놓았다. 1938년부터 중등학교가 늘어났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에야 중등학교 학생 수가 늘어난 것은 일본인들이 다수 전쟁에 동원되면서 그들의 자리를 충원할 인적자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일제는 정작 근대화 필요한 기술 인력을 양성하는 고등교육기관은 거의 확대하지 않았다.

(4) 강제동원

일제 식민지배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 노동력의 강제동원이다. 일제는 침략전쟁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인적·물적 자원의 통제 운용을 규정한 '국가총동원법'(1938년 5월)과 이에 근거하여 인적동원을 위한 통제법령인 '국민징용령'(1939년 7월 15일)을 반포하였다. 이에 따른 노동력 강제동원에 대해, 뉴라이트 교과서는 "일본의 민간기업은 총독부로부터 지역과 인원을 할당받아 노무자를 확보했는데(……)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집과 알선에 응한 사람도 많았으며"라고 하여, 강제동원을 국가권력에 의한 인력동원의 강제성보다는 경제적 교환관계에 의한 노동력의 취업 문제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반인도적인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으로 보고 있는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도 충돌하는 것이다.

▲ 강제징용자의 애환. 일본 북해도 탄광으로 끌려간 조선인 노무자의 애타는 심정을 담은 낙서 ⓒ연합뉴스

특히 정신대 명목으로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간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군이 강제동원을 주도했다고 서술하였다(92~93쪽). 그리고는 심문을 맡았던 미국군이 남긴 기록을 인용하여 "1942년 5월 상순 일본인 대리업자가 '위안봉사'를 시킬 한국인 여성을 모집할 목적으로 한국에 도착했다. 이 대리업자가 여인들에게 제시한 것은 큰 돈벌이, 가족의 빚 갚기, 쉬운 일, 신천지 싱가포르에서의 새로운 삶 등이었다. 이러한 꾐에 빠져 많은 여성이 해외 취업에 지원하고, 몇백 엔의 선대금을 받았다. 이들은 대부분 무지했고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이었다"(93쪽)고 하여, 실제로는 업자들이 여성들에게 큰 돈벌이가 있다고 하자 무지한 여성들이 그 꾐에 빠져 따라갔다는 '취업사기'식으로 서술하였다. 그리고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피해자들이 증언하고 있는 강제연행, 인신매매, 유괴 등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정신대로 끌려간 즉 강제동원 된 조선인 여성의 숫자와 정작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일본군위안부의 동원 규모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교과서는 "일본군은 노예제를 금한 국제협약을 위반한 범죄를 저질렀다"(93쪽)고 하면서도, 정작 일본군이 저지른 범죄행위의 구체적 실상을 서술하는 데는 인색하다.

맺음말

이상 뉴라이트 교과서의 일제 강점기 경제적 변화 등에 관한 서술 내용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식민지에 대한 효율적이고 조직적인 수탈을 위한 인프라 구축과 개발을 자본주의 시장경제 구축으로 미화하였다.

둘째,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일제의 식민통치와 식민지 근대화 과정에 잘 적응해 근대적 능력을 배양하고 대한민국 발전에 초석을 놓은 '근대화 선구자'로 둔갑시켰다.

셋째, 식민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를 사회를 효율적으로 운영되는 합리적인 근대국가기구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입장을 수용할 경우, 대한민국은 헌법에서 말하는 것처럼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일제식민통치의 근대화(문명화)성과를 계승‧발전시켜 성립한 것이 된다. 그리고 친일반민족행위는 건국역량을 준비하기 위한 애국 활동으로 미화되며, 그 완결판은 근대문명을 학습한 세력이 중심이 되어 세운 1948년 정부수립이다. 뉴라이트가 1945년 해방보다 1948년 건국에 더 의미를 부여하고 건국절을 기념일로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대한민국은 항일독립운동의 산물이 아니라 조선총독부의 법통을 승계한 국가가 되는 셈이 된다.

참고한 글:박찬승, 「식민지 근대화론에 매몰된 식민지 시기 서술」 『뉴라이트 위험한 교과서, 바로 읽기』 , 서해문집, 2009.박한용, 「뉴라이트 교과서의 친일문제 인식과 문제점」 『뉴라이트 위험한 교과서, 바로 읽기』 , 서해문집, 2009.허수열, 『개발 없는 개발』 은행나무, 2011


 /한상권 덕성여대 사학과 교수 친일·독재미화와 교과서개악을 저지하는 역사정의실천연대 상임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