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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15일 수요일

진실은 덮고 갈등은 부추기는 언론, 거부합니다


이글은 프레시안ㅁ 2013-05-13일자 기사 '진실은 덮고 갈등은 부추기는 언론, 거부합니다'를 퍼왔습니다.
[협동조합 프레시안] 전환 선언 1주일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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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을 선언한 지 1주일이 지났습니다. 2000명 가까운 분들이 조합원으로 가입해 주셨고, 응원과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한국일보)의 이희정 선임기자는 칼럼을 통해 '협동조합 전환 결의문'에 나타난 우리 언론의 남루한 현실에 공감을 표하면서 "누구도 가지 않은 길로 어렵게 첫 발을 뗀 프레시안의 용기를 지지하고 응원한다"고 밝히셨습니다. (☞관련 기사 :프레시안의 새 실험)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은 (경향신문) 칼럼에서 협동조합 실험이 "단순히 돈을 더 내줄 후원 회원을 찾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프레시안의 변신이 의미를 가지려면 "자신이 알고 싶은 정보와 자신이 깨우치고 싶은 지식의 방향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능동적인 독자, 편집진과 기자들의 역량과 양심에 신뢰를 가지고 그들의 성과를 냉철히 평가하면서 또 어려움을 함께 짊어질 책임 있는 공동체 성원을 찾아 일으켜 세우는 과정이 돼야 한다"고 충고해 주셨습니다. (☞관련 기사 : 언론 매체의 협동조합 실험)

조합원으로 가입한 한 독자께서는 협동조합 전환이 전례가 없다는 점에서 "쉽지 않은 결정이고 또한 불확실한 결정"이라면서도 "의미 있는 시도"이고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시도"라고 평가해 주셨습니다. 특히 이 독자께서 지적한 우리 사회의 언론 현실은 당초 (프레시안)이 출범할 때와 문제의식과 너무나도 똑같아 그저 놀라울 뿐이었습니다. (☞바로 보기 : 협동조합 프레시안을 바라보며)

이 독자께서는 "무엇보다 '기사'를 읽어도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을 때가 태반"이라면서 "보수냐 진보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사실을 말하고 누가 거짓말을 말하느냐는 것이다. 누구의 이야기가 더 들을 만하고 더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느냐는 것이다. 좋은 언론이란 사람들이 이러한 판단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기사를 쓰는 언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프레시안)을 시작했을 때의 문제의식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진보/보수의 편 가름보다 깊이 있는 보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을 보다 깊이 있게, 보다 넓은 맥락에서 독자들에게 제대로 보여주는 것, 이것이 언론 본연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판단은 독자들의 몫입니다. 저희가 전문가들의 역할을 강조했던 이유는 '공공의 가치에 충성하는 전문가'들이야말로 바로 이러한 임무에 적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2년이 지난 지금, 이러한 문제의식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되돌아봅니다. 분명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원인은 복합적입니다. 생존에 급급해야 하는 우리 언론 현실의 구조적 문제점 외에도 내부 구성원의 변화, 개인적 나태함 등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도처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대결 상황에서 일단 약자를 대변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이 사회적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방해한 측면도 있을 것이고, 역량 자체의 부족도 있을 것입니다.

출범 초기에 비해 읽을 만한 기사가 적어졌다거나 뻔한 주장들이 많아졌다는 지적, 겸허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사회적 진실을 전하겠다는 구성원들의 충정만큼은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프레시안(손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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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가을부터 고민했습니다.

시작은 경영난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먹고사는 문제가 우선이더군요. 그러다가 한 기업과의 합작이 유력하게 논의됐습니다. 편집권이 보장되는 가운데 안정적인 경영 환경에서 일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편집권 독립만 100퍼센트 보장된다면 특별히 문제 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프레시안) 기자들과 필자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독립성과 정체성에 중대한 훼손이 올 것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3개월여 동안 오랜 논의와 진통이 있었습니다. 예상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기업과의 합작을 포기하고 독자 생존 방안을 선택하게 된 데는 지난해 말 발효된 협동조합기본법이 한몫을 했습니다. 협동조합이라는 새로운 틀을 통해 언론의 '품위 있는 생존'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프레시안)이 출범할 때에도 주식회사보다는 비영리 시민 단체 형태로, 광고보다는 콘텐츠 유료화에 의한 운영을 원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우리 언론 생태계에서 '뉴스 콘텐츠는 공짜'가 상식이었기 때문입니다. 뉴스 콘텐츠의 생산에 돈을 대는 것은 주로 대기업과 정부 등 사회적 강자들입니다. 독자 등 수용자들의 경제적 기여는 극히 미미합니다. 결국 우리 언론 생태계에서 일반 서민 대중을 위한 언론은 생존하기가 극히 힘든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레시안)도 이런 언론 생태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기사의 클릭 수를 늘리고자 제목 장사를 해야 했고, 그 결과 일정 부분 초심을 잃은 것도 사실입니다.

협동조합이라면, (프레시안)의 뜻과 지향에 동의하는 시민들이 조합원으로 참여해 도와주신다면 안정적 경영과 가치 있는 콘텐츠 생산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독자 조합원과 기자 조합원이 힘을 합쳐 강자의 이익에 봉사하는 뉴스가 아닌, 공동체의 앞날을 위한 뉴스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지난 12년간 (프레시안)이 해온 일에 부족함은 있을지라도,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하신다면 도와주실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한 달쯤 전, 유기 농업으로 유명한 홍성군 홍동면에 다녀왔습니다.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세상이 물신주의로 미쳐 돌아가는 와중에도 이 마을은 생명을 존중하며 높은 문화적 수준의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농촌이 인구가 감소하는 것과는 달리, 이 마을의 인간다운 삶에 이끌린 타지 사람들이 몰려와 매년 40퍼센트씩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양극화와 탐욕이 판치는 세상 속에서 '품위 있는 삶'을 지키는 소중한 근거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이런 근거지가 쉽사리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찬갑, 주옥로 선생님 같은 선각자들이 풀무학교를 세운 게 1958년이라고 하니 50년 이상의 노력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협동조합을 통한 '프레시안 뉴스 공동체'라는 실험은 이제 시작입니다. 준비도 많이 부족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례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목표는 분명합니다.

권력과 금력에 휘둘리지 않는 소신 있는 언론을 만들고자 합니다. '더 들을 만하고 더 생각해볼 가치가 있는' 뉴스를 만들려 합니다. 공동체를 위한 '좋은 언론'의 근거지가 되려 합니다. 나아가 구성원들끼리 '지속 가능한 좋은 삶'을 위한 지혜를 모으는 자리가 되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이 힘을 모아주신다면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 

2013년 5월 8일 수요일

"협동조합 프레시안의 조합원이 되세요"


이글은 미디어스 2013-05-08일자 기사 '"협동조합 프레시안의 조합원이 되세요"'를 퍼왔습니다.
[인터뷰]협동조합 전환 선언한 프레시안 박인규 대표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다시 태어난다. 프레시안이 선택한 협동조합은 '기존 주주 모델, 무료 신문 모델' 구조에서 악화될 수밖에 없는 경영과 그로 인해 흔들리는 독립 언론의 기치 사이에서 장고 끝에 얻은 결론이었다. 지난해 12월부터 시행된 협동조합기본법은 이들의 '결단'에 윤활유 같은 역할을 했다.
결단의 중심에는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가 있다. 박 대표는 2001년 창간 이래로 12년 동안 묵묵히 프레시안을 이끌어 온 인물이다. 그가 외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협동조합 기반의 매체로 프레시안을 전환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미디어스)는 6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프레시안 사무실에서 박인규 대표와 1시간가량 인터뷰를 진행했다.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박 대표는 한국 언론에서 프레시안이 가지는 의미, 광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인터넷 매체의 현실, (오마이뉴스)와의 비교, 프레시앙에 대한 고마움, 협동조합으로서의 가능성과 전략 등을 세세하게 설명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협동조합 전환과 관련해 (미디어스)기자들의 생각을 물었다. 그가 던진 질문은 고민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이었다. 프레시안의 선택은 훗날 한국 언론사에서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아래는 박인규 대표 인터뷰 전문.

▲ 주식회사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됨을 알리는 프레시안의 공고문. 프레시안 화면 캡쳐



미디어스(이하 '미'):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의 전환을 꾀한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깜짝 놀랐다. 경영의 한계와 새로운 도전이라는 양면적인 추측이 가능한 상황이다. 협동조합으로 전환하게 된 핵심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박인규(이하 '박'): 경영문제가 주요한 문제였던 것은 맞다. 주식회사로 잘 나갔는데 협동조합으로 전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2001년도에 처음 프레시안을 창간할 때에도 주식회사가 아닌 다른 형태, 이를테면 NGO 같은 모델 등을 고민했었다. 제대로 된 언론이라면 수익성보다는 사회적 역할과 기여가 중요한 것이니까. 협동조합 얘기도 그때 나왔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협동조합하기엔 여건이 어려웠다. 사실 프레시안은 2007년에도 경영난이 있었다. 당시 한 케이블 업체와 인수·합작 이야기가 있었다. 그게 성사 단계까지 갔다가 무산됐었다. 그때 대신해서 출범한 것이 유료회원제인 '프레시앙'이다. 프레시앙으로 실제로 꽤 효과를 보았지만 그것만으로 운영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후로는 3-4년간 네이버 뉴스캐스트의 덕을 봤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론의 입장에서는 '독이 묻은 과일'이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혐오광고'나 '낚시기사'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프레시안에 실리는 광고는 우리가 직접 수주하는 것이 아니다. 광고 대행사가 프레시안의 광고 지면을 사서 다른 곳에 분양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혐오 광고랄까, 불편한 광고랄까, 성형외과나 치과 광고 등이 늘어났다. 그런 광고들이 더 광고효과가 높다고 하더라. 그러다보니 여성단체에서 반여성적이라는 비판도 많이 받았다. 이런 고민들도 협동조합 탄생에 큰 기여를 했다. 
 
미: 프레시안은 프레시앙 이외에도 프레시안 북스를 시작하는 등 콘텐츠를 다변화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나?
 
박: 물론 그렇다. 프레시안 북스는 콘텐츠의 다양화 측면에서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프레시안 북스는 사실 '세련되게 돈을 버는 콘텐츠를 만들어보자'는 취지가 있었다. 기존에는 문화방면이 매우 취약했다. 문화기사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시도해보면 클릭수가 나오질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대안은 책이었다. 책이라는 것은 종교, 학술, 예술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것이기에 책을 중심으로, 서평을 중심으로 깊이 있는 콘텐츠를 만들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우리가 강점을 가질 수 있는 책 리뷰를 통해 활로를 뚫어보자는 시도였다. 그러나 콘텐츠 유료화 측면에서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 대기업 중심의 광고 시장에서 진보언론이 독자적인 수익 구조를 만들어 내는 일이 너무 어렵다. 결국 작년 하반기부터 경영난을 겪고 독자성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면서 협동조합의 추진이 가능해졌다. 
 
미: 처음부터 협동조합으로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닐 것 같다. 다른 자구책은 없었나. 
 
박: 그 전에는 합작이랄지, 매각이랄지, 그런 논의들이 있었다. 실제로 모 대기업에 대한 합작 내지 매각이 주주들 사이에서는 합의가 되는 상황이 있었다. 기업에서는 그들에게 경영권을 주면 프레시안에 편집권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 건과 관련해서 내부 기자들의 반발이 있었다. 또한 프레시안은 외부 필자들이 상당한 역할을 하는 매체라는 점에서도 필자들의 의견도 중요한데, 그 분들 역시 편집권의 훼손과 침해를 우려했다. 상당한 진통이 있었다. 그러다가 12월에 협동조합기본법이 통과되면서 협동조합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다. 3월에 기자들과 함께 심도깊은 논의를 하면서 협동조합으로 전환하자는 결심을 하게 됐다.


▲ 프레시안 박인규 대표 ⓒ미디어스


미: 프레시앙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지 여쭤봐도 될까. 
 
박: 3000명 정도 된다. 처음 띄울 때 2천명 정도가 들어왔고, 후에 3천원으로도 회원이 가능하도록 기준을 낮추면서 1천명 정도가 더 들어왔다. 처음에 기획할 때는 '인건비 정도만 프레시앙으로 감당할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심정이었는데 현실은 인건비의 십분지 일 정도를 감당하고 있다. 
 
미: 협동조합으로 전환되면 조합원을 모집하는 것이 중요할 텐데, 프레시앙 회원과는 다른 어떤 권리가 있다고 강조해야 할 법도 하다. 협동조합 조합원은 어떤 차별적인 권리를 가지게 될까?
 
박: 과거 프레시앙에 대해서도 '제3의 주인'이란 표현을 썼지만 후원해주는 것에 대해 일정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이상의 권리를 보장하기는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조합원의 차이라면 당연한 것이지만 의결권을 가진다는 것이다. 비록 1/N의 의결권이라 하더라도 의미는 크다. 소비자 조합원과 생산자 조합원, 그러니까 독자 조합원과 기자 조합원을 나누어 운영하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이사회를 구성하면 기자들이 절반, 독자들이 절반 참여하는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 물론 독자 조합원이 늘면 대의원이 필요할 테지만. 이들이 보도 방향이나 경영 방향에 대해서 직접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부분이 가장 큰 차이점이 될 것이다. 
 
미: 역으로 협동조합원의 정치적 성향이랄까, 이런 것들이 편중되는 경우 조합원들에 의해 프레시안의 고유 편집권이 침해받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가능할 것 같다.  
 
박: 협동조합 전환하면서 기존 주주들이 걱정했던 부분도 이 지점이었다. 외국에서도 협동조합을 기반으로 한 언론이 없는 것 역시 그러한 이유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물론 편집권 독립은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그러나 조합원들이 자신들의 어젠다를 가지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는 일이다. 맹목적으로 프레시안 보도 방향에 방해가 된다고 치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참신한 아이디어에 프레시안이 충분히 도움을 받고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오히려 참여하는 조합원을 어떻게 늘려야 할지가 더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미: 대표님의 이력을 보자면 경향신문에서는 사원 주주회사로의 전환을 경험했고 프레시안에서는 주식회사 체제를 겪었으며 지금은 협동조합을 모색하고 있다. 언론사의 소유구를 다양하게 경험했던 셈인데, 각각의 차이는 무어라고 보시는지.
 
박: 경향신문은 원체 역사의 부침이 많은 신문이다. 카톨릭 신문으로 시작했다가 MBC와 함께 정부의 권리를 받게 되었다. 나는 1987년 이후 경향신문 홀로서기 운동을 했었던 사람이다. 경향신문은 그 당시 사단법인으로 꾸려졌다. 당시 내부에서 사단법인은 좋으나 공익성을 담보할 수 있는 사람, 가령 김수환 추기경 같은 분들을 포함해서 이사진을 구성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제작 거부를 하는 등 나름의 투쟁을 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한화그룹이 경향신문을 인수하는 와중에 나는 해고가 됐다. 사실 경향신문이 사원주주신문이 된 것은 재벌기업이 신문을 포기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지 내부 투쟁의 결과물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런 역사가 축적되어 지금은 나름대로 경향신문의 체제가 괜찮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프레시안은 경향신문에 비할 정도로 규모가 크지 않고 구독료가 없는 콘텐츠를 발행하는 입장이다. 신문산업이 나름대로 만들어온 문법과 많이 다르다. 기존 종이매체는 엄연히 구독료가 존재하고 관행적으로 높은 광고단가가 있기 때문에 자생이 가능한 측면이 있다.
 
미: 조합원이 만 명이 될 경우 광고를 모두 제거하겠다는 약속을 내걸었다. 조합비가 최소 월 1만원으로 명시되어 있으니 조합원이 만 명이면 일억 이상이다. 프레시안을 정상화하는데 필요한 금액이 이 정도인 것인가. 
 
박: 협동조합 하시는 분들 이야기가 협동조합이 자족적인 구조가 되려면 적어도 3만명 정도의 조합원이 필요하다고 하더라. 그러나, 다른 걸 떠나서 인건비 정도만이라도 조합원들이 채워주면 좋을 것 같다. 그러한 판단에서 기준이 만 명이다. 앞서 말했듯 프레시앙 역시 처음에는 그것을 목표로 뒀다. 하지만 현재는 프레시앙 독자들이 후원하는 수준은 전체 인건비의 1/10 정도다. 분명 그들의 도움이 유익했으나, 이제는 확장성을 고민해야 한다. 프레시안이 12년을 버티면서 우리사회에서 언론으로서 역할을 하고 기여를 한 측면도 있다고 자평한다. 협동조합법이 통과된 만큼 더 많은 연대와 참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이 확산되는데 언론기관으로서 역할을 한다면 상호 윈-윈하지 않을까 싶다. 협동조합에 대해서도 단순히 일회성 기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환경, 인권, 진보 등 숱한 담론들을 논의할 공간이 마련된다는 점을 부각하는 일이 필요하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협동경제에 관한 논의가 심화되고 있는 만큼, 프레시안이 이러한 지점에서 협동조합을 널리 알린다면 의미가 있을 것이다. 
 
미: 프레시안의 기여와 역할 얘기를 하셨으니 협동조합을 넘어 프레시안에 대한 평가 얘기로 넘어가도 될 것 같다. 프레시안은 애초 기자 출신들이 많이 모인 언론이었고 인터넷 언론 중에서 가장 저널리즘에 충실한 언론이라는 평을 들은 반면, 반대급부로 초기에는 ‘프린트해서 읽는 중년 독자’들이 주로 많다는 얘기도 있었다. 이런 양면성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을까? 내부에서는 어떻게 평가하시나?  
 
박: 프레시안 초창기에는 이념적 성향보다는 깊이를 강조했다. 깊이 있는 분석과 논평을 했다. 그러나 2007년을 기점으로 내 또래 언론인들이 다 떠나게 됐고, 그 후엔 신입기자들이 많이 들어왔다. 특히 2008년 촛불시위를 거치면서 이념적 지향이 강해진 측면이 있다. 현재는 이런 부분을 외부 필자의 기고로 상쇄하는 상황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깊이 있는 분석이나 성찰보다 구호나 주장이 다소 앞섰던 적도 있다고 평가한다. 앞으로도 그 부분은 숙제로 남을 것 같다. 주장과 구호에 문제가 있다기보다 언론 본연의 역할인 현실 사회를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 한다는 당위에는 걸맞지 않았다는 뜻이다. 
 
가령 노동문제에 있어서도 정리해고 철폐라는 구호만으로 사태를 재단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한다. 정리해고를 어떤 상황에서 용인하고 어떤 정리해고를 줄일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런 지점으로 독자들을 설득하려는 고민을 해야 한다. 이런 문제의식들도 살려나가기 위해 노력하겠다.
▲ 프레시안 박인규 대표 ⓒ미디어스


미: 비슷한 시기에 출발했던 오마이뉴스와 비교를 할 수도 있을텐데.
 
박: 프레시안은 초창기에 언론노조, 기자협회 등 언론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주축을 이뤘다. 새로운 걸 시도한다고 노력했지만 결국 언론판에서의 관행을 지우지 못한 측면이 많다. 프레시안의 한계라고 평할 수 있을 터인데, 오마이뉴스는 그 와중에 새로운 시도를 기획하고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느낀 문제점은 오마이뉴스가 표방하는 '시민기자'라는 것이 기존 언론인에 대한 불만을 토대로 생긴 거라, 언론인이 사실상 아무것도 아니며 그저 매체파워에 기대 기득권세력에 영합하는 이들일 뿐이라는 인식을 깔고 있었던 거다. 그에 반하면 우리는 저널리스트의 전문성이란 것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믿는 이들이었다. 지금도 그 신념은 변함이 없지만 그러다 보니 프레시안이 오마이뉴스보다 대중들과 교감하는 측면에서 부족했던 점은 있는 것 같다. 그러한 부분은 겸허하게 인정한다.
 
미: 프레시안은 방대한 외부 필진을 보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비결이 있다면.
 
박: 별다를 게 있겠나. 개인적인 네트워크와 매체의 노력의 결합이다. 그런데 담론시장 상황이 녹록하지 않다. 4-5년 전부터 인터넷 신문들이 만들어 온 유형의 담론공간에 기존 매체인 한겨레나 경향신문이 뛰어들었고 흡수해나갔다. 
 
미: 한겨레 hook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인가. 
 
박: 바로 그렇다. 그래서 우리 매체에 있다가 한겨레나 경향신문 필진으로 갔던 분들도 있었고, 프레시안이 이제는 등용문 역할을 한다. (웃음) 매번 새로워져야 한다는 강박은 여전하다.
 
미: 어째서 한국 사회의 인터넷 언론은 독자적인 수익 구조를 창출하는데 실패하고 말았을까. 
 
박: 남 탓하면 안 되는데(웃음). 내 생각에 한국 사회에서 언론시장 만큼은 분명 시장실패가 있다고 본다. 좋은 콘텐츠를 생산하는 매체가 시장에서 잘 되는 구조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매체의 생존력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아직까지도 한국사회에서 압도적으로 보수 세력이 강하다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악조건들도 결국에는 돌파해야 하는데, 경영진이 무능해서 그렇다고 답해야 하지 않을까?(웃음) 저변 확대 측면에서는 실패를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 기성언론이라 볼 수 있는, 종이신문이나 방송과 비교했을 때 인터넷 언론만의 고유한 가치가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박: 아무래도 자유로운 담론 형성을 주도할 수 있다는 게 특징이 아닐까 싶다. 프레시안은 기사가 길다는 악명을 갖고 있었지만 그 긴 글을 통해 우리사회의 문제를 나름 심도있게 짚었다고 생각한다. 또, 일반 대중에게는 덜 알려졌을 지라도 업계의 기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초기에는 대중도 대중이지만 기자들을 자극하자는 포부가 있었다. 독창성도 있었고, 진지한 고민도 많이 했다. 그러나 대중과의 스킨십 등에서는 프레시안이 많이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대중지향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앞으로는 이 지점을 정제하고 제대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 번 스타일이 굳어지니까 쉽게 고쳐지지 않더라(웃음).
 
미: 민주정부 십 년 동안, 특히 참여정부에서 국가기관이나 공기업의 광고를 군소언론에게 배분해주는 정책을 통해 진보언론들이 상대적으로 수혜를 노렸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이후 그 광고가 끊기면서 새로운 수익모델을 찾아내는데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다. 프레시안은 상대적으로 덜했다 보지만 그러다보니 진보언론이 대선 과정에서 정권교체에 목메는 근시안적인 보도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 새로운 수익모델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러한 현실은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까? 
 
박: 무엇보다도 언론의 독립성과 역량을 함께 강화하는 것이 우선적 과제다. 언제까지나 주류 담론에 대한 항의와 반대로만 진보파의 정치 담론을 형성할 수는 없다. 프레시안도 사회적 약자가 심각하게 억눌릴 수밖에 없는 한국 사회의 구조에서 그들에게 맹목적으로 힘을 실어준 측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조건 반사적인 반대를 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미: 그런 지점에서 볼 때도 프레시안이 좋은 역할을 했다. 정치에 대한 학술담론과 대중 사이에서 매개의 역할을 한다는 느낌도 받았는데, 앞으로도 그런 기조를 끌고 갈 것인지.
 
박: 학술담론이라기 보다는... 원래 지향했던 것은 전문가들과 일반 독자들 사이에서 통역을 맡고 싶었다. 가교 역할 말이다. 지식인들은 깊은 지식이 있으나 전달력 측면에서는 기자들에 비해 부족하다. 그래서 전문성을 가진 기자들이 필요한 것이고. 그러나 반복적으로 말을 하는 것이지만 대중과의 소통에 있어서는 프레시안이 일정 부분 실책한 측면도 있다. 전문가를 중점적으로 대변하고 대중을 대변하지 못했달까. 사안을 조금 단순화하고 핵심적인 과제를 독자들에게 선도적으로 제시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그 관성을 깨기란 쉽지 않았다. 언론계 외부에서 나름의 개혁을 주창했으나 우리 역시 언론판에 들어와 있었고 그 내부논리를 쉽게 해체하기 어려웠다. 기자 개개인이 확고한 언론관과 가치를 가지고 노력해야 할 문제라고 본다. 
 
미: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박: 프레시안 입장에서 현 국면에서 중요한 것은 협동조합 실험에 있어 '얼마나 많은 조합원들이 참여하는가'다. 가능성을 보고 있지만 결국엔 우리의 역량으로 나아가야 할 일이다. 협동조합 조합법이 시행되었기에 이런 실험이 가능했지만 제도가 그 자체로 성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 스스로 반성과 성찰을 통해 독자들에게 그리고 조합원들에게 진정성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미: 좋은 말씀에 감사드린다. 프레시안이 미디어스를 포함한 다른 언론들에게 하나의 모델이 되어주었으면 한다.
▲ 프레시안 화면 캡쳐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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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윤형, 김도연 기자  |  webmaster@mediaus.co.kr

2013년 4월 18일 목요일

1년 남은 박원순, '원순표 대못'을 박아라!


이글은 프레시안 2013-04-17일자 기사 '1년 남은 박원순, '원순표 대못'을 박아라!'를 퍼왔습니다.

[초록發光] 마을, 에너지, 협동조합


마을과 에너지가 만나다?

근래 전화를 받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지인들 뿐 아니라 안면 일식도 없는 누군가로부터 "동네에서 에너지 협동조합을 만들고 싶다, 햇빛 발전을 시도하고 싶다. 에너지 효율화 집수리 조합을 만들면 어떻겠냐?" 등 마을 안에서 에너지와 관련한 다양한 고민들을 쏟아내는 전화에 정신이 없다. 이렇게 빠르게 마을 단위로 에너지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것에 고무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서두르다 너무 많은 교육비만을 치르고 실패로 끝나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든다.

마을이 에너지 문제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던 데에는 서울시의 마을 공동체 활성화 정책과 핵발전소 1기 줄이기 정책이 맞물려 효과를 내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막상 이 두 정책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여 제대로 마을 단위의 에너지 전환을 이끌어낼 것인지는 의문이 든다.

무엇보다 걱정인 것은 여전히 박원순 시장이 강조해온 마을 공동체 활성화 사업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원순 시장은 후보 시절부터 마을 공동체의 회복에 대해 강조해 왔고, 이에 대한 시민 사회의 반응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민·관 모두 준비되지 않은 채 맞이한 마을 공동체 활성화 사업은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부터 2011년 10월 보궐 선거를 통해 당선된 박 시장은 인수위원회 없이 시정을 바로 이어가야 했고, 그의 정책 기조를 충분히 담아낼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2012년의 마을 공동체를 위한 예산은 없었고, 관은 관대로 민은 민대로 새로운 시장이 강조한 '마을'에 대해 서로 다른 상을 그렸고, 이 과정에서 관은 민을 무시했고, 민도 관을 신뢰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서울시 마을 공동체 종합지원센터'라는 중간 조직이 만들어졌지만 짧은 시간 민과 관을 아우르겠다는 미션은 너무 버거워 보였다. 마을 만들기라는 단어에 익숙하지 않은 관은 마을 만들기의 모델로 소개된 마포 성미산 마을, 은평두꺼비하우징, 동작 성대골 마을을 표본 삼아 지역 조사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베끼기 시작했다. 심지어 서울시는 마을 공동체 사업을 잘 진행한 자치구를 선정해 1억 원 인센티브를 주겠다고 했다가 민간 영역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마을 공동체 사업이 2013년을 맞이했다. 2012년과 달라진 점은 예산이 편성되었다는 것이다. 2012년 행정비를 제외하고, 0원이나 다름없던 예산이 2013년에는 54억8000만 원가량 늘었다. 대단한 발전이다. 그렇지만 앞서 언급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한 채 단순히 2012년 대비 2013년의 예산이 책정 되었다고 마을 공동체가 활성화 될지는 의문이다.

마을에서 '관이 돈을 풀면 마을 사업은 망한다'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마을에서 뭔가 잘할만하면, 갑자기 관이 지원을 하겠다고 나서고, 마을 사업이 관의 지원에 집착하게 되고, 외부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면서 잘되던 마을이 망하는 마을이 된다는 것이다. 마을 사업은 본래 지역 주민의 자발성과 자립을 기틀로 자리 잡아야 지속가능한데 관의 지원이 이런 기틀을 흔든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보면 충분한 기초 조사와 명확한 목적, 방향을 모으지 못한 채 예산만 책정하는 것은 마을에 독이 될 수도 있다.

에너지 자립 마을 성공할까?
ⓒ프레시안(최형락)


물론 마을 공동체 사업이 모두 표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서울시의 에너지 정책인 '핵발전소 1기 줄이기'에 발 맞춰 에너지 분야를 적극적으로 마을로 끌어 들여 새로운 에너지 자립 모델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서울시 입장에서는 마을 공동체와 에너지 문제를 한 번에 풀어낼 수 있는 모델을 찾은 것이고 마을 입장에서는 새로운 마을 공동체 활성화 영역을 발굴한 셈이다.

사실 '핵발전소 1기 줄이기' 사업은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지만 에너지 자립도는 극히 낮은(2008년 기준 2.45퍼센트) 서울이 어떻게 안정적으로 에너지를 공급받을 것인가 하는 공급 위주의 정책에서 어떻게 에너지를 줄일 것인가 하는 수요 관리 정책으로 급선회한 참신한 정책이긴 하지만 사실 그 안의 내용은 에너지 줄이기 이상의 참신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에너지 자립 마을을 만들면서 새로운 구상이 가능해진 것이다.

예를 들어 지난해 마을 7개, 그리고 올해 4개 마을을 추가하여 선정한 에너지 자립 마을이 대표적일 것이다. 에너지 자립 마을은 에너지 자립도를 2014년까지 50퍼센트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특히 도심형 에너지 자립 마을 만들기 사업 중 성대골 마을과 십자성 마을의 경우 마을의 에너지 자립 활동을 관광 코스와 연계하는 방안이 나와 흥미롭다.

단순히 마을 주민들을 중심으로 에너지 절약하는 것을 넘어 에너지를 생산하고 여기에 체험과 교육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접목시키고 있다. 그리고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여 일자리까지 창출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내공이 쌓인 탄탄한 마을 공동체가 에너지를 만나 시너지를 내고 있다.

마을 공동체+협동조합+핵발전소 1기 줄이기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더 중요한 주체로 협동조합이 부상하고 있다. 처음 서울시민 햇빛 발전 협동조합이 만들어진 이후 노원구, 성북구와 같이 구 단위의 햇빛 발전 협동조합이 만들어지고 있고, 한살림과 같은 생활협동조합도 한살림 햇빛발전조합을 만들어 물류 센터에 태양광을 설치하고 있다. 지금껏 오롯이 에너지를 쓰기만 했던 서울 시민들이 스스로의 힘을 모아 태양광을 설치하고 발전소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서울시의 마을 공동체 사업 그리고 협동조합, 거기에 핵발전소 1기 줄이기 정책까지, 이 세 조합은 아주 시기적절하고 궁합도 잘 맞아 보인다. 마을 단위로 사람이 모이고, 그들이 에너지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시는 이러한 시민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결과적으로 서울시 전체의 에너지는 줄이고 재생가능에너지는 늘릴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공동체와 협동조합을 통해 교육과 확산이 이뤄지고, 녹색일자리도 창출될 것이다. 이것이 마을, 협동조합, 핵발전소 1기 줄이기가 만들어내는 최상의 시나리오일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이것이 지속 가능할 것이냐가 더 중요한 문제이다.

에너지 자립 마을이 많아지고 에너지 협동조합이 늘어난다고 해서 그것을 성공으로 자찬할 수는 없다. 서울시의 지원에 힘입어 시작하고 있는 햇빛 발전 조합이나 에너지 자립 마을이 지속 가능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의 협동조합과 마을 공동체 사업을 보면 한때 유행처럼 확산됐던 사회적 기업이 떠오른다.

정부의 사회적 기업 활성화 정책은 사회적 기업들이 자립 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경제 영역의 생태계 조성 없이 오롯이 일자리 창출을 목적으로 도입 되었다. 그러다보니 사회적 기업 지원은 인건비를 지원하는 사업으로 전락했고 결국 지원을 받은 기업들은 정부의 보조 없이는 1년을 버티지 못하는 유약한 구조를 가지게 되었고 사회적 기업 육성 정책의 총체적 실패라는 신랄한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이미 에너지 협동조합과 에너지 자립 마을도 사회적 기업과 마찬가지로 정부의 지원 없이는 지속가능하기 어렵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이제 박원순 시장의 임기는 1년 남짓 남아 있다. 마을, 협동조합 그리고 에너지를 묶어 내어 최상의 효과를 기대하고자 한다면 각각의 정책 지원과 예산 확대 보다는 이들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생태계 조성이 우선되어야 한다.

많은 전문가는 서울형 발전 차액 지원 제도(FIT)의 도입과 확대를 제안하고 있다. 마을과 협동조합에서 재생 가능 에너지를 통해 에너지를 생산하고 이것을 되 팔수 있도록 정책을 설계해야 이를 통해 지속 가능한 경제가 만들어지고 다른 영역으로의 확대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제 서울시는 이러한 의견을 받아 에너지 자립 마을과 에너지 협동조합이 자립할 수 있는 생태계 조성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초록發光'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으로 기획한 연재입니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는 이 연재를 통해서 한국 사회의 현재를 '초록의시선'으로 읽으려 합니다. 이런 시도는 이명박 정부의 '녹색 성장'이 아닌 '초록대안'을 찾으려는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활동의 일부분입니다.

(☞바로 가기 :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2013년 4월 1일 월요일

이이제이 “역사전쟁 시작, 뉴라이트와 맞붙겠다”


이글은 GO발뉴스 2013-04-01일자 기사 '이이제이 “역사전쟁 시작, 뉴라이트와 맞붙겠다”'를 퍼왔습니다.
공개방송…“협동조합으로 양질의 현대사 컨텐츠 선보일 것”

600여명의 애청자가 모인 가운데 열린 팟캐스트 ‘이이제이’ 첫 공개방송에서, 제작진은 “협동조합을 통해 양질의 컨텐츠를 선보일 예정”이라면서 “향후 보혁 간 역사전쟁에서 뉴라이트와 지속적으로 싸워 나갈 것”이라며 향후 진로를 공개했다.
이이제이 진행자 ‘세작’ 윤종훈씨는 지난달 31일, 서울시 논현동 ‘플래툰 쿤스트할레’에서 열린 공개방송 직후 ‘go고발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협동조합을 구성해 영상자료를 포함한 양질의 현대사 컨텐츠를 선보일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지금까지의 뜬금없는 구독연합이 아니라, 소비자들이 주주가 돼 조합을 만들게 되면, 방송환경도 안정적이고 부수적인 수입도 조합원에게 돌릴 수 있을 것”이라며 구성 취지를 설명했다.

▲ 팟캐스트 ‘이이제이’가 지난달 31일 오후 4시 서울 논현동 ‘플래툰 쿤스트할레’에서 첫 공개방송을 열었다. ⓒ ‘go발뉴스’

공동 진행자 이동형 작가는 영상화 작업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의 ‘백년전쟁’에 대해 박근혜 대표에게 건의가 올라가는 등, 앞으로 보이지 않는 역사전쟁이 진행될 거라고 본다”면서 “역사 팟캐스트 1위 방송이, 그 싸움에서 뉴라이트와 한 번 맞서 봐야하지 않겠나. 영상과 음성은 느낌이 확실히 다르다”고 덧붙였다.
패널이 협동조합 구성을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선 이후 영상화 작업을 시작한 이이제이 진행자들은 이이제이 번외 편에서 “팀이 15명씩 움직이니까, 편당 제작비가 2000만원 정도 들어간다. 지금은 (제작진이) 재능 기부하는 형식으로 이뤄지고 있는데, 답보상태다”라고 밝힌 바 있다.
‘나는 꼼수다’, ‘리셋 KBS’ 제작자이자 본 방송의 영상제작을 담당한 김성수씨는 “나꼼수로 인해 ‘팟캐스트의 무료화’가 고착화됐는데, 그래야만 하는 하등의 이유가 없다”면서 “소비자가 혜택을 가지는 대신에 컨텐츠에 대한 정당한 비용을 지불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고 말했다.
그는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가는, 협동조합을 오랫동안 생각했었다. 조합을 만들어서 수익을 내고, 그걸로 계속 방송을 제작하자는 것”이라면서 “인프라 구축, 인력 수급을 위한 자본 확충 문제 등 어려움이 많지만, 차분하게 풀어갈 수 있다. 아이디어를 냈으니, 오늘 난상토론을 벌여볼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남진-나훈아’ 특집으로 꾸며진 이날 공개방송에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 정치개입의혹을 제기한 진선미 민주통합당 의원이 깜짝 출연해 관심을 모았다. 원 전 국정원장의 근황을 묻는 질문에 대해 “집에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국정조사로 넘어가면 시간이 지체될 우려가 있다. 그보다는 조속한 사법 집행을 위해 압박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혀 큰 호응을 얻었다.

배동일 기자  |  forever2886@hanmail.net

2012년 9월 3일 월요일

박정희식 경제성장이 최고?... 퀘벡은 달랐다


이글은 오마이뉴스 2012-09-02일자 기사 '박정희식 경제성장이 최고?... 퀘벡은 달랐다'를 퍼왔습니다.
[퀘벡의 실험-4] 캐나다 사회경제모델 연구자 김창진 성공회대 교수 인터뷰

올 대선의 핵심 이슈는 복지와 경제민주화다. 특히 유럽발 재정위기에 따른 경기 침체도 현실화되고 있다. 경제 민주화뿐만 아니라, 위기 극복을 위한 대안은 없을까. 협동조합이 새로운 대안 경제모델로 떠오르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2010년 협동조합 모델의 상징인 이탈리아 애밀리아로마냐의 볼로냐에 이어, 캐나다 퀘벡의 모습을 짚어본다. 퀘벡 모델은 1960년대 이후 협동조합과 사회적기업, 시민사회가 함께 참여하는 사회적 경제를 이끌어 오고 있다. 경제는 견고한 성장과 함께 일자리도 늘면서, 위기를 헤쳐나가고 있다. 학계에선 이를 '조용한 혁명'이라 부른다. 글로벌 경제위기도 비껴간 이들의 혁명을 찬찬히 따라가본다. [편집자말]

▲ 캐나다에서 가장 넓은 퀘벡주. 790만명에 달하는 인구 가운데 프랑스계 사람들이 80%에 달한다. 공식 언어는 불어다. 이들은 스스로 퀘벡인이라 불리길 원한다. 그만큼 민족적 자존심도 강하다. 사진은 퀘벡시티 사이를 흐르는 세인트로렌스 강변 전경. ⓒ 김종철

"1960-70년대 한국과 캐나다의 퀘벡은 어찌보면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것이죠. 박정희시대가 개인과 이기주의 중심의 제도와 문화를 고착화시켰다면, 퀘벡은 조직의 신뢰와 합의의 문화를 만들었던 거죠."

김창진 성공회대 교수(사회과학부)의 말이다. 그와의 대화가 1시간을 넘어섰다. 지난 9일 캐나다 퀘벡주의 몬트리올 한 호텔 로비. 그는 일 주일여 동안 퀘벡 모델의 현장을 취재진과 함께했다. 그동안 서로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을 풀어놓고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캐나다 사회(적) 경제 연구자다. (참고로, 김 교수는 '사회적'이라는 표현보다 '사회경제'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고 했다. 우리가 '시장적 경제'라고 하지 않고 '시장경제'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는 캐나다의 사회 경제를 '실험'이라고 했다. 이어 그 '실험'은 우리 사회에 중대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 김 교수의 생각이다. 그리곤 퀘벡이 왜 사회경제의 실험장이 됐는지를 우리에게 설명해 나갔다.

"1867년 4개의 주(州) 연합으로 출발해 1905년에 캐나다 연방이 만들어졌죠. 이후 캐나다에선 영국계와 프랑스계 이민자들 사이의 오랜 긴장과 갈등의 시간이 흘렀어요. 물론 퀘벡 사람들은 퀘벡인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왔죠. 나중에 영국계(나중에는 미국계) 자본에 의해 지배를 받으면서도, 퀘벡인들은 오히려 분리독립하려고 주민투표까지 불사했어요."

"서울은 오로지 산업화와 이기주의 문화에 정착"

▲ 김창진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캐나다 사회경제 모델을 연구하는 국내 몇 안되는 학자다. ⓒ 김현대
- 분리독립을 위한 주민투표를 2번이나 했다고 하던데."1980년하고 1995년이에요. 과반수 찬성만 하면 독립하는 거였는데, 1995년엔 거의 아슬아슬한 표 차이로 부결이 됐죠. 아무래도 경제적인 부분에 대한 불안감이 있지 않았나 싶어요. 요즘에는 분리독립 의사 자체는 많이 줄어든 것 같아요."

- 퀘벡주의 경우 캐나다에서 가장 큰 주이면서 언어는 불어를 고집한다."민족적 정체성이 아주 강합니다. 1960년이후 20년 동안 퀘벡에선 큰 변화가 진행됐죠. 이른바 '조용한 혁명'이라고... 영국계 사람들에 의해 사회, 경제가 좌지우지 되는 것에 반발해서 프랑스계 진보적 인사들이 주 정부에 참여하기 시작했죠. 각종 사회민주주의 정책들이 나왔어요."

당시 좌파 성향의 정치세력인 퀘벡당이 들어서면서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에 대한 지원이 크게 늘었다. 수천여 개에 달하는 각종 협동조합들이 조직됐고 사회 분위기 역시 합의의 문화가 정착됐다. 김 교수는 "당시 한국은 박정희 집권기로 산업화에 드라이브를 걸면서 오로지 성장과 조직 이기주의가 최대의 가치였던 시대였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서울과 퀘벡은 전혀 다른 길로 가고 있었던 셈"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퀘벡의 '조용한 혁명'은 주 정부와 협동조합, 시민사회의 긴밀한 협력도 이끌어냈다. 정부는 협동조합을 전담하는 부서를 만들고 제도도 정비해 나갔다. 사회, 교육 등 복지체제도 갖춰 나갔다. 시민사회와 협동조합 등도 자발적인 협력체제를 만들었다. 90년대 들어서 경제 위기가 닥치자, 사회경제단체 연석회의인 '샹티에' 조직이 만들어진 것도 이때였다.  다시 김 교수의 말이다.

"캐나다가 미국의 아류? 미국보다 훨씬 우월한 사회경제체제"

▲ 캐나다 퀘벡주에 있는 소비자협동조합매장. 국내 대형마트의 체인브랜드를 이용하면서도, 운영은 협동조합이 맡아 하고 있다. 마을 주민 상당수가 조합원으로 가입해 물건을 구입한다. 또 퀘벡지역에서 직접 만드는 농산물이나 소비재도 판매한다. ⓒ 김종철

"아직도 사람들은 캐나다라는 나라를 잘 모르죠. 여전히 미국의 아류 국가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으니까.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요. 예를 들어 원주민 대책만 보면 알 수 있어요. 미국은 원주민보호구역이라고 해놓았지만 사실상 격리 구역이나 다름없어요. 이들에게 허용한 것은 카지노와 수공업뿐이죠. 카지노가 돈이 되니까 이마저 백인들이 장악해버렸고. 미국쪽 원주민들은 기념품 정도 팔거나 대부분 알코올 중독자로 힘들게 살죠."

- 캐나다의 원주민 대책이라면."원주민의 자활을 돕는 프로그램을 통해 정책적으로 지원해요. 그리고 협동조합을 만듭니다. 원주민 스스로 말이죠. 원주민 협동조합을 통해 사회로부터 격리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찾아가죠. 물론 정부는 이들 협동조합을 지원하기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를 갖고 있고. 이런 부분을 보면 (캐나다가) 미국보다 훨씬 우월한 체제를 가진 나라라는 생각이 들죠."

김 교수는 "1960년 이래 퀘벡에선 50년 넘게 사회경제가 성장, 발전해 왔다"면서 "그동안 사회경제 주체들도 재정 기반을 갖춰왔는데 그 바탕에는 데자르댕과 같은 협동조합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 퀘벡주는 다양한 형태의 협동조합기업이 존재한다. 사진은 퀘벡주 몽마니 지역에 위치한 건축자재와 공구만을 파는 소비자협동조합이다. 이곳은 '올해의 협동조합'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 김종철

- 퀘벡을 중심으로 정말 다양한 협동조합이 큰 역할을 하는 것 같은데."퀘벡주 인구가 770만 정도인데, 협동조합 조합원 수는 880만이에요. 전체 인구 수를 넘어서는 것인데, 데자르댕(북미 최대의 금융협동조합기업)의 기여가 크죠. 이곳 조합원만 580만 명이에요. 데자르댕뿐 아니라 보험협동조합 등도 많아요. 협동조합이 금융부문을 버티고 있으면서, 지역사회뿐 아니라 일반 사기업까지 지원해주고 있죠."

그는 "비금융 부문에서도 농업과 임가공업 등에서 협동조합이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면서 "주유소뿐 아니라 등산장비 등 각종 소비부문 협동조합 기업들도 캐나다 전체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또 "최근에는 응급구조활동에 나서는 노동자협동조합을 비롯해 보육, 장례, 문화예술 등의 분야로까지 협동조합이 확산하는 추세"라며 "조합원뿐 아니라 조직 자체도 좀더 개방적인 모습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박원순의 서울 실험과 퀘벡의 사회경제 시스템, 접목될 수 있을까

▲ 캐나다 몬트리올의 라발지역에 위치한 지역개발협동조합네트워크(CDR). 86년에 만들어진 이곳은 협동조합 모델을 지역사회에 알리고, 각종 교육과 법률자문 등을 수행한다.주 정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기도 한다. ⓒ 김종철

김 교수와 나눈 대화는 계속됐다. 1시간 정도 예상했던 시간이 훌쩍 넘었다. 이야기를 진행할수록 그의 말소리는 더욱 또렷했다. 밴쿠버의 연구소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왔다. 대화는 자연스레 우리가 어떻게 접목할수 있을까였다. 아직 우리에게 적용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역시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퀘벡의 사회경제 바탕에는 풍부한 사회연대기금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마디로 튼튼한 재정 안전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퀘벡에는 자산규모만 220조 원에 달하는 데자르댕이라는 금융협동조합기업이 있다. 데자르댕은 매년 각종 기금에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김 교수는 "퀘벡 주 정부와 협동조합연합회, 중앙 노동단체 등이 사회연대기금 조성에 적극 나서고 있다"면서 "이를 통해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의 설립, 고용유지 등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최근 서울을 협동조합의 도시로 만들겠다고 했다. 김 교수는 "매우 의미있는 진전"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박 시장이 추진중인 '마을 공동체' 등 협동조합정책에 참조할 만한 퀘벡의 사례를 소개했다. 지역개발협동조합네트워크(CDR)다. 이곳은 취재진도 지난 9일 방문했던 곳이다. 지역사회 개발을 자치단체나 정부가 아니라 협동조합이 맡아 하는 것이다. 지역주민이 조합원으로 참여해 지역개발을 추진하는 방식이다.

김 교수는 "시디알은 퀘벡의 독특한 모델"이라며 "지역주민이 조합원으로 직접 사업에 참여하면 자치단체로선 예산집행 과정에서의 낭비도 줄일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과거 지역개발은 정부가 이끌면 주민이 따라오는 방식"이라며 "이제는 주민이 이끌고, 정부는 재정 지원과 정책 조율을 통해 민관이 서로 자연스럽게 결합하는 방식이 더 효율적"이라고 강조했다. 다시 김 교수의 말을 옮겨본다.

"박원순의 서울 실험이 어떻게 될지 아직 예단하기엔 이르지요.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 등 사회 경제 육성에 서울시가 적극 나선다고, 당장 어떤 의미있는 성과가 나오긴 쉽지 않지요. 어느 정도 성과를 보기 위해선 시간의 시험대를 견뎌야 합니다. 그건 우리 사회의 몫이기도 하지요."

▲ 퀘벡주의 옛 시가지. 퀘벡을 상징하는 깃발이 도시 곳곳에 걸려있다. 퀘벡인들은 1960년대 이후 영미계 중심의 사회 문화에 반대해 '조용한 혁명'을 해오고 있다. ⓒ 김종철

덧붙이는 글 | 취재지원: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

김종철(jcstar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