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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11일 목요일

“남북 모두 밉다, 자식 군대 보낸 심정 아는가”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3-04-10일자 기사 '“남북 모두 밉다, 자식 군대 보낸 심정 아는가”'를 퍼왔습니다.

북한이 핵실험에 대한 유엔의 대북제재 움직임 등에 반발해 정전협정을 백지화하겠다고 공언한 6일, 임진각 부근 민통선 철조망에 리본으로 한반도를 형상화한 설치미술 작품 주변으로 국군 순찰병이 지나가고 있다. AP 뉴시스


전쟁이 게임도 아닌데…남북 ‘긴장 고조’ 애타는 부모들
“요즘 뉴스 보기 겁난다” “제발 대화로 풀어라”


어머니는 아들의 군복 옷깃을 계속 매만졌다. 전역을 한달 앞둔 ‘말년 병장’의 가벼워야 할 휴가 복귀 발걸음을 어머니는 놓아줄 수 없었다. ‘북한이 곧 미사일을 쏠 것’이라는 아침뉴스에, 부부는 혼자 가겠다는 아들을 쫓아 터미널까지 나섰다. 아버지는 아들을 꼭 끌어안고 나서야 버스에 태웠다. 2년 전 훈련소 입소 때처럼.

자식을 군대에 보낸 부모들이 평화를 바라는 마음은 절실하다. 10일 서울 구의동 동서울터미널에서 만난 김아무개(51)씨 부부도 그랬다. 제대 전 마지막 휴가를 마치고 강원도 속초의 부대로 복귀하는 아들을 배웅하러 가게를 닫고 나왔다고 했다.

“하필 제대를 한달 앞두고 남북관계가 악화돼 걱정입니다. 몸 건강히 돌아만 온다면 바랄 게 없겠는데….” 김씨는 “전쟁이 무슨 게임도 아니고, 양쪽 정치 지도자들이 긴장만 고조시키는 게 마치 1950년대로 돌아간 것 같다”고 말했다. 김씨 부부는 아들이 좋아하는 햄버거를 사먹였다. 오늘따라 배웅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아들을 갓 군대에 보낸 부모들은 평화를 바라는 마음이 더 간절했다. 경상북도에 사는 최아무개(54)씨의 아들은 지난 1월 경기도 의정부 306보충대에 입소했다. “스물입곱 늦은 나이에 군대에 간”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는 애가 끓었다. “남북관계가 좀 안정이 됐으면 좋겠어요. 박근혜 대통령은 예전에 김정일도 만나고 했잖아요. 대화로 이런 관계를 풀어나가야죠.” 최씨는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집 아들들처럼 20대 초반에 보낼 걸 그랬다”고 말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아들은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린다고 했다. “엄마 걱정할까봐 자주 전화가 와요. ‘평소와 다르지 않다’고 절 안심시키죠. 그동안 일하느라 피곤해서 못 나갔던 새벽기도를 내일부터 다시 나가볼까 해요.”

남자친구를 군대에 보낸 여성들도 잔뜩 긴장하고 있다. 군대 간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여성들의 인터넷 모임인 ‘고무신카페’(cafe.naver.com/komusincafe)에는 걱정어린 글들이 줄줄이 올라있다. “곰신(고무신)들은 진돗개 뜰 때마다 가슴을 졸여요. 진짜 전쟁 나는 건 아니겠죠.” “요즘 들어 우리나라가 종전국이 아님을 새삼 느낍니다. 남자친구 격려해주느라 정작 우리 불안한 마음 내비치기도 힘들고 그러신가요?” 이들이 서로 위로하는 마음은 더욱 애절하다. “우리까지 흔들리면 홀로 떨어져 있는 남자친구들은 더 힘들 거예요.”

근심이 분노로 커지는 이들도 많다. 아들이 군 복무 중인 정아무개(52)씨 같은 경우다. “늘 통일이니 민족이니 말하는 북한 정권이 왜 항상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남한 정부도 마찬가지에요. 부부싸움을 해도 한 쪽이 져주면 쉽게 해결되는데, 강경 일변도인 북한과 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으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또다른 주부 정아무개(56)씨는 “북한에도 우리 정부에도 화가 난다”고 했다. “높으신 분들이야 본인이나 자식들 군대 안 보낸 사람들이 많으니 상관없을지 몰라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 군대 보낸 나같은 사람의 두려움은 설명할 수가 없어요. 대화로 해결해야만 해요.”


박현철 허재현 이유진 기자 
fkcool@hani.co.kr

2012년 12월 16일 일요일

청년실업이 낳은 RPG 캐릭터


이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12-11일자 제51호 기사 '청년실업이 낳은 RPG 캐릭터'를 퍼왔습니다.
잉여가 본 잉여

 
<3083 26="26" p="p" v="v"> 2003-올리비에 코르페

언젠가부터 많은 청년들이 스스로를 '잉여'라 부르고 자신들의 일상을 '잉여짓'과 '잉여력'으로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잉여란 단어를 종종 듣기는 했는데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아직 목격하지 못한 사람은 잉여들의 놀이터 중 하나인 트위터에서 '잉여'로 검색하면 잉여들의 끊임없는 잉여짓을 목격할 수 있다. 처음 잉여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을 때 이미 잉여에 대한 많은 글들이 있을 텐데 어쩌다 별것 없는 잉여인 나에게 이런 요청이 들어왔는지 의아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잉여의 시선으로 보는 잉여를 말하기엔 잉여인 내가 꽤 적합한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간단하게 본인을 소개하자면 나이 서른의 잉여다. 잉여력을 분출했던 대표적인 일은 잉여의 목소리를 담은 팟캐스트를 만든 것이다. 어느 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으니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이어서 수많은 청춘-멘토 기획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 있었다. 청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기에 무슨 내용이 있나 슬쩍 들어봤더니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를 조롱해보고자 다른 잉여들과 합심해 (잉여니까 청춘이다)라는 딱히 듣는 사람이 없는 방송을 만들었다. 이 잉여짓을 통해 수많은 유형의 잉여를 만나며 (잉여라고 스스로를 규정했던 나조차도) 애매했던 잉여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이제 이 글을 통해 잉여가 바라본 잉여는 어떤 존재인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머지 인간과 떨거지 인간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를 보면 주인공 현수(권상우 분)의 아버지(천호진 분)가 현수에게 "너 대학 못 가면 뭔 줄 알아? 잉여인간이야, 잉여인간! 잉여인간 알아? 인간 떨거지 되는 거야, 이 새끼야!"라고 호통을 친다. 대학을 나와야 사회에서 인정받는 '산업역군'으로 자리잡을 수 있던 시기에 대학 진학은 '사람 인정'의 중요한 기준이었다. 이처럼 잉여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 대열에서 낙오 내지 탈락한 '나머지'들을 지칭하는 데 쓰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빗대자면 요즘의 잉여는 취업을 못 한 '인간 떨거지'라고 할 수 있다.
주체로서 잉여가 성립되고, 다양한 형태의 잉여가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공유되면, 거기에서 표출되는 잉여력과 잉여짓이 잉여 일반의 정체성에 추가된다. 흔히 볼 수 있는 잉여의 문법 중 하나는 "나는 잉여니까 오늘도 ( )한 잉여짓을 한다"인데, 잉여짓은 일상적 여가를 포함해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행동을 거의 모두 포함한다. 남는 시간(잉여력)을 소득 창출 행위 및 기타 행위(잉여짓)에 쓰는 이들이 잉여다. 따라서 오늘날의 잉여는 "자본가와 안정된 임금노동자를 제외한 나머지로서 잉여짓을 일삼는 자"로 규정할 수 있겠다. 여기에다 "어차피 안 될 거야"라는 자조와 체념을 내면화한다.
잉여는 다시 매우 투박한 분류이지만 세분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 경제적 안정도, 둘째 주체적인 선택 여부에 따라 잉여의 양상이 달라질 것이다. 부모의 후원을 받아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면 잉여로운 시간을 잉여롭게 보낼 수 있다. 바로 잉여로울 수 있는 잉여다. 딱히 경제활동을 병행하지 않아도 될 만큼 여유로운 시간을 갖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어느 정도 현실에서 충당할 수 있는 경우다. 반면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잉여는 잉여임에도 잉여롭지 못하다. 생존을 위해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해야 하는 처지이기에 존재로서는 잉여지만 일상은 전혀 잉여롭지 못하다. 치솟을 대로 치솟은 등록금, 높은 물가가 감당이 안 되는 생활비 등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이들에게 잉여로울 수 있는 자유는 매우 제한된다. (비록 나의 경험 속에서 접한 적은 표본이지만) 이들의 경우 스스로를 잉여로 규정하는 비율은 그리 많지 않다.
자발성에 따라 구분을 해보면 잉여짓을 계속하고 싶은 잉여와 '탈잉여'를 꿈꾸는 잉여로 나뉜다. 전자의 경우는 자본주의적 경제활동에서 벗어난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자주 나타나며 이른바 '문화판'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들의 경우 경제적 불안정을 각오하고 '평범한 삶'을 누리지 않더라도 스스로 선택해서 잉여가 됐다. 사실 이런 유형은 이미 과거부터 존재했으며 엄밀하게 말하면 새로이 등장한 잉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단지 잉여가 일종의 문화현상의 성격으로 나타나면서 자신을 잉여라고 부른다고 볼 수 있다. 후자는 고용 불안정의 시대에 취업을 못 하면서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잉여가 된 이들이다. 이들은 언제나 탈잉여를 꿈꾼다. 스스로 잉여라고 자조하면서도 언제든 잉여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여기서 나는 잉여의 개념을 좁게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말하고 싶다. 잉여의 개념이 너무 확장되어서 여기저기에서 잉여를 갖다 쓰고 있지만 잉여로 불리거나 혹은 자처하는 이들을 실제 구성하는 다수는 비교적 경제적 안정을 누리는 비자발적인 잉여에 가깝다. 잉여를 사회현상으로 주목한 이들 가운데 잉여는 스스로를 잉여라 지칭한다는 점을 강조한 경우가 많았다. 사실 외부에서 잉여라 지칭하는 계층은 이미 어떤 이름으로든 존재했고 정작 잉여라고 스스로를 인정하는 층은 협소하다고 본다. 앞선 구분에 따라 내가 보는 잉여는 잉여로운 시간을 비교적 큰 부담 없이 소비할 수 있는 중간계급의 자녀들이다. 그래서 잉여는 중간계급을 둘러싼 사회적 변화의 산물인 셈이다. 과거의 중간계급 자녀들과 다른 점은 전자는 미래가 어느 정도 보장되었고(비교적 일자리가 많았고 그들의 부모 스스로 노후를 어느 정도 준비할 수 있는) 후자는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안온한 삶을 지속할 수 없다는 두려움을 가진다는 것이다. 어쩌면 오늘날의 잉여는 한국 사회에서 중간계급의 몰락(하우스푸어와 같은 현상이 심화되고 있듯)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사례가 아닌가 생각한다. 중간계급의 자녀들이 최소한 자신이 누렸던 물질적 풍요를 이어가고자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된 것이 아닐까?

게임 속의 세상, 게임 속의 잉여

이 깨달음을 통해 잉여가 되는 과정 속에서 양산된 잉여들은 게임 속 캐릭터와 무척 닮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들의 삶은 RPG(롤플레잉게임)의 진행과 비슷하다. 게임 속에서 막과 장 사이에 던져진 퀘스트를 클리어하면서 한 단계씩 전진하는 방식이 그들의 삶과 크게 차이 나 보이진 않는다. 정형화된 게임 규칙 안에서 조금은 다른 방식의 공략이 있을 수도 있지만 하나의 목적을 향한 최선의 방식은 존재한다. 게임에 빗대어 잉여의 인생 주기를 살펴보면 부모라는 '추종자'의 엄호 아래 비교적 쉬운 1막 '유년기'를 클리어하고 나면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된다. 그나마 1막은 다른 스테이지와 비교해 분홍빛이 감도는 편이다. 물론 분홍빛이 지속되는 기간이 짧아지고 있는 것 같지만(더욱더 과열되는 조기교육) 아직은 희망 속에서 '꿈'이란 걸 꿀 수 있으니까. 2막 '대입 돌파'는 학벌이 공고한 한국 사회에서 향후 인생의 방향을 상당 부분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막이다. 2막에서 높은 업적을 달성하고 클리어한 경우 3막 '취업 전쟁'의 진행이 한결 수월해진다. 단적으로 기업 인사 담당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채용 시 가장 많이 보는 비공개 커트라인으로 나이에 이어 학벌이 꼽힐 정도기 때문이다. 획일화된 진행 방식에 대해 각계각층에서 비난의 목소리는 높지만 크게 봤을 때 변한 것은 없고, 결국 더 좋은 업적을 위한 유저와 그 서포터를 위해 기형적인 형태로 '대입판'이 변질되어온 실정이다.
현재 많은 잉여들이 3막 '취업 전쟁' 속 던전을 헤매고 있다. 엄청난 양의 잉여가 본격적으로 양산되는 지점이다. 2막과 달리 3막은 짙은 안개가 드리워져서 맵을 정확히 볼 수 없고 불확실한 정보만이 나돌고 있다. 예를 들면 기업 측의 정보에 따르면 "스펙보다 스토리"가 중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3막 유경험자들은 "스펙은 기본, 스토리는 필수"라고 말한다. 이런 불일치로 인한 혼란과 더불어 경기 침체라는 눈보라가 쏟아지는 상황은 유저들의 괴로움을 끌어내고 있다. 그래서 많은 유저들이 게임에서나 현실에서나 다음 막으로 가기 위한 충분한 스펙을 쌓기 위해 '앵벌이'에 나선다.
어쩌면 게임이 인생보다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게임은 난이도 선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개 초·중·고급 정도로 나뉘는 게임의 레벨은 유저가 선택할 수 있는 반면, 인생의 난이도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캐릭터 생성과 동시에 고정되곤 한다(예를 들면 부모의 재력과 같은 가정환경). 또한 게임은 이른바 '로드 신공'을 통해 세이브-로드를 무한 반복하며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지만, 인생에서 한번의 실패는 돌이킬 수 없다. 특히 한국 사회에는 실패에 대한 완충작용 역할을 해줄 장치가 부족하기 때문에 실패하면 끝인, 그야말로 '하드코어 모드'다. 그렇기에 잉여짓으로 자신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거나 자조와 체념을 받아들이지만 나머지의 도전은 불필요한 것이나 사치로 생각한다.
그렇다고 잉여들이 게임 캐릭터처럼 단순하게 살아가는 것만은 아니다. 신해철의 노랫말을 보자. "이제 나의 친구들은 더 이상 우리가 사랑했던 동화 속의 주인공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고흐의 불꽃 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 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엔 더 이상 도움 될 것이 없다 말한다/ 전망 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 구좌의 잔고 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 나만 혼자 뒤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는 걸까/ 가끔씩은 불안한 맘도 없진 않지만 걱정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친구여 우린 결국 같은 곳으로 가고 있는데."(신해철, [나에게 쓰는 편지]) 1990년대 X세대가 했던 고민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잉여들도 '자의건 타의건 간에 '왜'라는 물음이 거세된 채 맹목적으로 클리어만을 바라보고 사는 것은 아닐까?', '그 끝에서 볼 엔딩은 어떤 것일까?', '과연 행복은 무엇일까?' 머리가 복잡해지는 고민들을 스스로 던져본다. 하지만 이런 물음도 이젠 조금은 지겨운 클리셰가 되어버렸다. 책에는 나오지만 시험에는 나오지 않는 문제라서 딱히 공부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여기에 이른바 '꼰대'라 불리는 기성세대 중 일부는 조금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허망한 예상 답안을 던져주곤 한다. '게임'을 벗어나라는 주문이다. 시각을 조금만 바꿔도 세상은 크게 달라 보인다는 둥, 착실한 '게임 공략법'과 다르게 자신이 진정 원하는 적성을 찾고 그것에 대한 열망을 불태우며 살아야 한다는 둥. 하지만 탈출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도 아니고 탈출한다고 해서 새로운 세상이 바로 열리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게임의 규칙이 변하길 기대하거나 자신만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가족의 지원 혹은 개인의 특별한 능력과 운에 기댈 수밖에 없다. 결국 많은 잉여들에게 잉여롭지 않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정규직으로의 취업밖에 없다.

"잉여의 탈출구는 결국 취업뿐?"

이제 대다수 잉여들의 선택은 '탈잉여'로 귀결된다. 어쩌면 가장 안전한 선택이다. 이 과정에서 잉여는 체제 순응적인 존재로 조각된다. 체제 순응적인 신입사원상일 때 탈잉여할 가능성이 가장 높아지기 때문이다. 자기소개서와 이력서가 요구하는 인재가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스펙을 쌓고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 일을 찾아가고 있다. 과거 세대들이 요즘 잉여들을 질타할 때 '낭만을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잉여들에게 낭만을 즐기는 것조차 탈잉여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잠깐 게임을 일탈하더라도 금세 게임 속으로 복귀한다. 여기에서 잉여라는 계층의 한계가 드러난다. 혹자는 잉여를 어떤 정치적 변혁의 가능성을 담지하는 계층으로 상정하기도 하는데 이는 판타지에 가깝다. 잉여들은 금방이라도 '짱돌을 들고 거리로 나설' 것처럼 '88만원 세대'를 조망했던 이들의 바람에 부응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꿈을 펼치지 못하고 세태에 순응한 패배감 위에 잉여로서의 삶 속에서 얻은 무력감이 중첩되어 불만조차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한 번 실패하면 저만치 뒤로 처지게 되는 사회구조 속에서 그 두려움을 극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잉여들의 집합소인 취업 커뮤니티에 가보면 그들의 불안함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불투명한 채용 속에서 서로가 가진 경험의 조각을 이리저리 끼워 맞추며 탈잉여를 향한 전략을 세우다가 탈잉여를 한 이들을 보며 부러움과 패배감을 느낀다. 그러고는 익명 게시판에서 온갖 불만과 하소연을 쏟아내고 잉여짓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안정된 삶을 이어가려는 비자발적 잉여들은 이렇게 불확실함 속에서 오늘을 난다. 잉여들의 현실을 잘 대변해주는 가사로 마무리하겠다. "나는 오늘 가만 누워 TV를 보다가/ 이 세상에 대해 깊이 고민을 해봤지/ 나와 함께 얘기를 해볼래?/ 진지하게 얘기를 해볼래?/ 이 세상은 지옥 지옥이다. 아!/ 이 세상은 지옥 지옥이다. 아!"(청년실업, [이 세상은 지옥이다])

 / 강동기 마포FM에서 청춘프로그램 (잉여니까 청춘이다) 팟캐스트를 제작했다.

2012년 2월 3일 금요일

게임이 마약이면 조선일보는 뭐지?


이글은 미디어스 2012-02-02일자 기사 '게임이 마약이면 조선일보는 뭐지?'를 퍼왔습니다.
불법게임 다운받아 기사 쓰는 조선일보의 ‘불법성’


▲ 조선일보 31일자 1면
언론계에게 ‘편파 왜곡 보도’를 지칭할 때, 흔히 하는 말로 ‘조선일보식 기사’라는 표현이 있다. 종종, 결론을 향해 내달리기에 바빠 근거와 사실이 부실한 기사에 대해 “이런 조선일보 식 기사 같으니”라고 품평하곤 한다. 2일자 조선일보가 오랜 만에 ‘조선일보식 기사’의 한 전형을 보여줘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지난날 31일부터 조선일보는 ‘게임, 또 다른 마약’이란 제목의 기획을 진행 중이다. 기획 첫 회는 1면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말보다 게임 먼저 배우는 젖먹이들’이란 제목에 하의를 입지 않은 채 스마트폰을 열중하고 있는 아이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아이들의 게임 중독을 걱정하는 이 기획은 그러나 ‘제목의 작명, 기사의 내용, 사진의 활용’에 이르기까지 걱정의 진심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선정성으로 도배돼 있다. 31일자 4면과 5면으로 이어진 기획은 “유아에 게임기 주는 건, 음식쓰레기 주는 셈”, “게임중독 뇌, 마약중독처럼 변해”, “아이 뇌가 망가진다, 폭력성 띠고 ADHD 위험” 등 게임에 대한 맹목적 적대심을 노골화하며 공포를 주입하기 위해 최상급 표현을 남발했다.

▲ 조선일보 1일자
이어진 1일 기사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게임 좀비’...괴물처럼 변해가는 아이들”, “게임중독 뇌...관제탑이 테러범에 접수된 격” 등 살벌한 표현이 난무했다. 게임의 폭력성을 우려하는 기사의 폭력성이 오히려 더 우려스러울 정도였다. 또한 ‘칼싸움 게임에 중독된 명문대 중퇴생이 갑자기 거리로 뛰쳐나와 행인을 살해했다’는 결코 일반화 될 수 없고, 또 인과관계 역시 불분명한 사례를 곁들였다. 기사의 의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면 상황 짜깁기를 서슴지 않는 모습도 보였다. 게임에 대한 편파적 시각을 바탕으로, 상황을 침소봉대하거나 왜곡하는 전형적 방식이었다.
“IT가 일상을 파고든 이후 매체의 주요한 베스트셀러 아이템 가운데 하나가 아이티 주의보입니다. 내용은 유사 마약이고요, 담론은 공포이지요. 공포를 파는 건 유사 이래 가장 확실한 세일즈입니다. 특히 조선일보가 이 방면에 아주 뛰어납니다. 공포를 팝니다, 공포를 팔아요! 그럼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공포를 산답니다. 인터넷이 아이들을 망친다! 어쩐지 아이들이 내 마음대로 안 되더니 아이고 네 네”
네이트에서 ‘뉴스&톡’이라는 제목으로 뉴스 코멘트를 진행하는 허지웅 영화평론가는 조선일보의 공포 마케팅을 비판한 내용이다.

출발부터 심상치 않았던 조선일보의 기획은 급기야 2일, 3회차에 이르러 드디어 ‘사고’를 쳤다. 조선일보 기자는 게임의 폭력성을 직접 체험했다며 파일공유사이트에서 ‘맨헌터2’ 게임을 300원 주고 내려 받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직접 체험한 까닭인지 묘사의 생생함이 앞선 기사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몇몇 대목을 옮겨보면 “느닷없이 볼펜을 들어 목 오른쪽을 힘껏 찔렀다.”, “사내는 피 묻은 볼펜을 움켜쥐고 태연한 표정으로 왼쪽 눈, 오른쪽 눈을 차례로 공격했다.”,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바닥엔 피가 흥건하다” 등 기사라기보다는 잔혹한 판타지 소설의 수사 같을 정도였다. 기자는 체험을 마친 소감을 밝히며 “식은땀에 젖고, 호흡도 가빴다”고 적었다.

▲ 조선일보 2일자에 장성진 기자가 쓴 '맨헌트2' 체험기사. 그런데 이 게임은 국내 출시가 불허된 것이다. 네티즌들은 장 기자가 불법적인 방식으로 게임을 다운받아 불법적으로 게임을 했다고 조롱하고 있다.

기자의 체험대로 ‘맨헌트’는 “사람을 얼마나 잔인하게 살해 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진 게임으로 각종 도구를 이용해 적을 잔인하게 살해할수록 높은 점수를 얻게 되는 방식이다. 하지만 그래서 이 게임은 게임물등급위원회에 의해 ‘등급 거부’ 판정을 받아 국내 정식 출시가 이뤄지지 않았고,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도 이미 판매가 금지된 게임이다. 한 트위터리안은 조선일보의 기사에 대해 “이걸 갖고 게임 비판하는 건 마치 ‘소돔의 120일’만 갖고 문학은 유해하다고 하는 꼴”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국내에 출시되지도 않은 게임을 파일공유 사이트에서 내려 받아 작성된 조선일보의 기사는 그 자체로 ‘저작권법’을 어겼다는 혐의도 있다. 조선일보의 기사는 국내에서 유통되는 것 자체가 불법인 게임을 불법적으로 다운 받아 체험하곤, 합법적으로 서비스되는 게임들을 규제하자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조선일보식 기사에 대한 네티즌들의 반응은 차갑다. 취재를 하기에 앞서 조선일보부터 ‘준법정신’을 가지라는 비난과 조롱이 봇물이다. 포털 사이트마다 해당 기사에는 수백 개의 댓글이 달려있고, 트위터 등 SNS에서 조선일보의 기사를 링크하며 한 마디씩 보태고 있다.  조선일보의 기획 의도가 바로 이런 ‘노이즈 마케팅’에 있던 것이었다면, 대성공을 거두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왜 조선일보는 느닷없이 게임을 때리고 나선 것일까? 게임의 폭력성과 중독성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언론이 이에 대한 공포를 기사화하는 것 역시 조선일보뿐만 아니라 무수하게 많은 언론이 하는 걱정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일보의 기획은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이 거센 상황에서 ‘청소년들의 폭력성’을 양껏 부각시키는데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볼만하다. 게임에 빠져 ‘괴물’ ‘좀비’가 된 청소년들은 ‘폭력성을 주체할 수 없으니 통제가 필요하다‘는 메시지가 3번의 기획 시리즈에서 일관되게 전해지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